'만화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30 이승만 대통령의 피난처, 청도 만화정 20
  2. 2009.05.26 담 너머로 훔쳐본 내시고택 33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위치한 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萬和亭)을 찾아가는 길......
경주에서 출발하여 미스 네비가 인도하는대로 건천을 넘어 운문댐을 돌아 한참을 가니
 동창천을 옆에 낀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는 운치있는 정자가 보인다.



급히 차를 돌려 정자 앞 빈터에 세우고 담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만화정의 대문을 손으로 살짝 밀어보니 아뿔사....문이 잠겨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정자 담 옆에서 잡초를 제거하시던 분께 문의하니
마침 그분이 운강고택,섬암고택,만화정 등을 관리하고 계시는 분이셨다.


퇴직 교사이시면서 밀양박씨 후손으로 인근의 여러 고택들을 관리하고 계시는
박성규 선생의 뒤를 따라 만화정의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행랑채가 파란 철대문인 것에 마음이 걸렸다. 나무 대문으로 복원하면 좋을텐데...


볕 좋은 아침...행랑채와 곳간에 비치는 햇살이 눈이 부시게 따사롭다.


건물은 정자인 만화정과 함께 행랑채, 하당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류주택 답게 곳간의 모양새 하나하나에도 신경쓴 것이 눈에 뜨인다.


행랑채 섬돌 아래서 보니 정자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행랑채에서 정자쪽 문에 서니 안뜰과 함께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정자가 보였다.


정자 바로 옆쪽으로 물빛이 고운 동창천이 흐르고 있는데 
바로 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막지 않았을 때는 더욱 기막힌 경관이었을 듯...


대문 안쪽에 서서 우러러 보니 하늘을 이고 있는 만화정은 마치 입으로 불면 날아갈 둣 가벼워 보인다.


주변 산수의 아름다운 풍광과 잘 어울리게 섬세하게 설계된 이 만화정은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운강 고택(별도 포스팅 예정)의 부속건물인데
운강 박시묵 선생(1814~1875)선생이 조선 철종 7년(1856년)에 지은후 공부하면서 강론하던 집이다.


정자는 한칸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방 1간, 동쪽에 2간의 통방을 배치하고


막돌을 쌓은 기단 위에 장대석 테두리를 두른 2중 기단을 두었다.


처마는 길게 내밀고 네 모퉁이에는 활주를 세웠으며 누마루에는 삼면에 헌함을 돌려 바닥을 확장하였다.


마루는 한간이라 그다지 넓지 않고


부채처럼 넓게 조각한 판대공 아래


정자를 거쳐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굵은 나무)와 섬세하게 조각된 화반대공(대공:마룻대를 받는 짧은 기둥)이 눈길을 끌고


도리의 모서리에도 이렇게 꽃 문양을 새겨져 있으며


용두가 받쳐져 있기도 하는 등 섬세한 장식이 인상적이다.


정자를 돌아 후원으로 가 보니


안뜰보다 넓은 후원에는 운강 박시묵 선생의 비가 서 있었다.


푸르른 강물과 어우러진 주변의 경관은 너무나 아름다워 더운 날씨에 등에 고인 땀을 식히기엔 안성맞춤이다.


만화정은 특히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민을 격려하기 위해 종창천에 왔을 때
이곳 방에서 숙식하였던 곳이기도 해서 더욱 유명한 정자가 되었다.


운문 들판의 이름은 원래 만화평(萬花坪)이라고 하는데
만화평을 굽어 보는 위치에 있는 이 집을 만화정(萬和亭)으로 지은 것은 운강선생의 큰 뜻이 있지 않을까.

안민영(安玟英)의 주옹만영(周翁漫英) 한 구절처럼 
모든 일이 화평하라는 뜻이리라....

이 하나의 마음이 화하면 기운도 화한 법 (這箇心和氣亦和)

나의 마음과 기운을 화하게 하여야 중화를 이루리라 (和吾心氣致中和)
냇물이 사해로 귀의함이 모두 살아 있는 것 같고 (川歸四海渾如活)
온 산에 꽃 핌은 모두 함께 화의 기운 얻음이라 (花發千山共得和)
풍채와 운치는 다 같이 삼대(夏殷周)의 순후한 학풍으로 돌아가리 (風韻同歸三代學)
공부는 요컨대 한 덩이 화에 있음이로다 (工夫要在一團和)
세간 만사 화가 귀한 것이니 (世間萬事和爲貴)

일마다 오직 화하면 모든 만사가 다 화하리라 (事事惟和卽萬和)


만사가 어수선한 이때에 만화정(萬和亭)에 올라 온갖 시름을 잊고 화평함을 누려보심이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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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유달리 고택과 누각이 많다. 
운강 고택,  만화정, 섬암고택 등의 오래 된  가옥들이 연이어 있어서 마치 한옥 마을에 온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가옥은 '내시 고택'이라고 불리는 '임당리 김씨 고택'이다.

이 고택은 궁중 내시로 정 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낙향하여 지은 집인데
이 가문은 임진왜란 전부터 16대 400여 년을 내시 가계로 이어져 온 가문이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이 고택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건물 구조도 일반 반가의 주택과는 다른 특성이 있어 내시 주택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고택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중앙에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눈에 잘 뜨일 듯 말 듯한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개천 위에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한참 걸어 들어가면 솟을 대문의 고택이 나타난다. 





솟을 대문 앞에 다다르니 헉......자물쇠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평소에도 문을 잠궈 놓는지 ......아니면 관리인이 어디 출타를 한건지 한참을 서성거려도 도무지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다.





키 높이 정도 되는 담장으로 인해 고택은 외부인들에게 그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자들이 쓰는 방법처럼 카메라를 한쪽 손에 들고 담장 안쪽을 향해 팔을 길게 뻗어 셔터를 마구 눌렀다.
카메라를 내려 모니터로 확인해 보니 담장 안의 풍경이 찍혔긴 한데 건물은 삐뚤빼뚤.... 수평도 맞지 않고 앵글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다.

수십번 실패를 거듭하니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기울어지지 않은 사진 몇 장을 건질 수가 있었고
사진으로나마 내시 고택의 내부를 일부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 가옥은 안채, 중 사랑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큰 사랑채, 사당, 대문채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구조로 보아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채란 집의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안채와 대면을 피하는게 상례라
대부분의 집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성
을 인정해 주는 구조인데 이 가옥의 경우는 예외이다. 
 

이 집은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 두 사랑채가 대문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위치해 있으며
작은 사랑채
중문을 통과 해야만 안채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다가 작은사랑채 판벽에는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관찰하기 위하여  ♡♡♡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랑채에 앉아 외간 남자의 출입이 있는지.....안주인이 어디를 가는지....하나 하나 감시할 수 있도록 된 구조이다.
성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바깥 주인으로서는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실제로 내시 가계 부인들은 토담으로 철저히 폐쇄된 안채에서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문 오른편에는 자그마한 연당이 있고 연당 남쪽에는 널찍한 빈터가 있는데 

사랑채 주위에도 빈 공간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집은 해방 후에도 지금 보다는 훨씬 집터가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동안 후손들이 땅을 많이 팔아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전답이 많아 천석꾼으로 불리었던 김일준은 인심도 후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환관(宦官)의 기원이 상고 시대 은나라 때까지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흥덕왕 때의 기록에서 이미 궁중에 환관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내시와 환
관의 개념을 같이 사용하지만 본래 내시와 환관의 개념은 달랐고 고려 때 까지만 해도 내시와 환관은 구분됐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나 주자학의 태두인 안향 등도 본래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내시로 일했다는데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을 독차지 하게
되면서 내시가 환관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환관의 형태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부모 혹은 친인척에 의해 거세를 당하거나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빈곤한 가정 경제를 면하고 환관이 되어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또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과 부역을 피하고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을 모셨던 16대 김일준이 왜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환관의 최고 벼슬은 종 2품인걸로 보아
김일준이 얻은 정 3품 통정대부 직첩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는 자리란걸 알 수 있다.

임당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서는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을 하지 않았고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내시 생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18대 이후
로는 혈통에 의한 가족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내시 고택.
고택 안에 살던 바깥 주인과 안주인이 인내해야 했던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니 고택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도 편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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