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12.10.15 파란 하늘을 닮은 몽골의 전통신앙 라마불교와 샤머니즘 18
  2. 2012.09.21 새마을 한류바람이 부는 몽골 탄광촌 울란바타르 날라이흐 16
  3. 2012.08.27 헉! 소리 나는 몽골 전통 양고기 요리 허르헉((Horhog) 26
  4. 2012.08.17 몽골 초원에서 만난 귀여운 망아지와 신비한 종마 32
  5. 2012.08.13 몽골 초원의 천막집 게르(Ger)가 궁금하다. 27
  6. 2011.10.28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몽골 테를지(Terelji) 국립공원 21
  7. 2011.10.26 거북바위가 인상적인 몽골 테를지(Terelji)국립공원 14
  8. 2011.09.19 몽골 마지막 황제의 보물창고 복드칸 겨울궁전 박물관(The Bogd Khaan Palace Museum) 23
  9. 2011.09.16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복드칸의 겨울궁전(The Bogd Khaan Palace Museum) 25
  10. 2011.08.15 초원의 나라 몽골의 심장, 울란바타르 간단사원 22
  11. 2010.11.17 몽골에는 초등학교가 없다? 32
  12. 2010.11.15 몽골 최고의 이름, 칭기즈칸 33
  13. 2010.09.17 행운을 전해주는 몽골 독수리 31
  14. 2010.07.16 몽골 음주문화, 한국보다 더 화끈하네.. 39
  15. 2010.06.14 충격적인 성묘사의 몽골 세밀화 33
  16. 2010.04.13 몽골 칭기즈칸 말박물관, 세계 최대 규모에 놀라다 29
  17. 2010.02.21 게르 갤러리에서 본 멋진 몽골 풍속화 12
  18. 2010.02.05 몽골 전통 음악 흐미와 마두금 모린호르 45
  19. 2010.02.01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유산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70
  20. 2010.01.25 몽골에서 만난 반가운 한류 열풍 62
  21. 2010.01.12 몽골 전통 의상 패션쇼에서 본 미녀 모델 74
  22. 2009.12.19 특이한 모양이 눈길끄는 몽골 전봇대 40
  23. 2009.12.17 일본의 쓰라린 추억 간직한 대마도 코모다하마 신사 43
  24. 2009.12.10 한국 아이와 너무 닮은 몽골 아이들 55
  25. 2009.11.30 칭기즈칸 신화 몽골군, 돈 내면 입영 면제? 69
  26. 2009.10.21 초원의 나라 몽골의 아름다운 자작나무숲 22
  27. 2009.10.20 할머니도 하이힐도 즐거운 줄넘기 34
  28. 2009.10.14 몽골 게르에 가면 볼 수 있는 이것은? 39
  29. 2009.10.05 몽골 주름잡는 한국산 중고차 55
  30. 2009.09.17 몽골 울란바타르 최고의 데이트 코스 자이승 승전탑 42


 

 

가도가도 끝없는 초원이 펼쳐지는 몽골 초원.

푸른 초원과 함께 몽골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파란 하늘이다.

'뭉크 탱그린'이라 부르는 파란 하늘은 몽골인들에게는 단순한 창공의 의미가 아니라

하늘 그 자체가 초월적인 힘, 즉 신성을 가지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또 몽골인들은 나무, , 바위 등 모든 사물에 정령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정령의 심기를 거스르면 큰 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열악한 자연 환경과 함께 갈등이 심했던 종족 역사 속에서 살아 남았던

몽골인들이 영원히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신(神) 뿐이었으므로

전통이 말살되었던 사회주의 시기에도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굳건히 지켜왔다.

 

 

 

 

 

16C에 라마불교가 전파된 이후 정령을 섬기던 많은 몽골 사람들은 불교를 믿게 되었는데  

일반 불교와 마찬가지로 환생과 고통으로부터 각 개인을 구원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라마불교(티벳불교)오늘날 몽골 국민의 90% 이상이 믿고 있는 종교이다.

 

 

 

 

20C 초 몽골에는 수백개에 이르는 불교 사원이 있고 남자의 30%가 수도승일만큼 번성했다는데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공산주의가 반 종교 캠페인을 벌인 이후

사원의 연계적인 체계가 무너지고 많은 수도원들이 문을 닫게 되어 

1990년까지 오직 간단사원(Gandan in Ulaanbaatar)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0년에 이르러 민주주의가 다시 재건되기 시작하자 종교의 자유도 허락되어 

100개 이상의 수도원이 다시 문을 열었으며 기독교, 이슬람교도 종교 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의 90%가 라마불교를 믿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몽골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종교는

수천년 동안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종교였던 샤머니즘이다.

 칭기즈칸도 무당에게 전쟁에 대한 자문을 구할 정도로 샤머니즘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오늘날에도 몽골 북쪽 지역에서는 샤머니즘이 불교와 혼합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무당들이 신을 몸안으로 불러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몽골 무당은 자신의 영혼을 몸밖으로 내어보낸다.

몽골 무당은 혼수 상태와 비슷한 탈자아 상태에서 무당의 영혼이 몸으로부터 빠져 나와

하늘과 땅 속, 물 속을 자유자재로 다니며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초원을 다니다보면 돌이나 흙무덤 위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고 푸른 천을 둘러놓은 것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한국의 성황당과 비슷한 '어버(어워, Ovoo)'이다.

 

 

 

 

 

어버는 마을의 수호신이요, 초원의 이정표이자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는데

몽골인들은 학식,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어버 앞에서 재난 방지와 가축의 번성을 위해 기도한다 

과거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말머리를 베어 성황당에 바치고 승전을 기원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몽골에서는 먼길을 떠나기 전 성황당을 들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성황당의 유래 중 가장 그럴싸한 것은 들판의 이정표 대신 생기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보이는 초원에서 방향을 잃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러다가 어버를 만나면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반가움에 환호를 지르게 된다.

지금도 구역의 경계에는 어버가 서 있어서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말이나 차에서 내려

어버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세바퀴 돌고 흩어진 돌이 있으면 모아서 다시 쌓아 올리며 소중히 다룬다.

 

 

 

 

나담축제 때는 성황당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비는 '어버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정월대보름에 지내던 동제와도 비슷한 의식이라고 한다.

 

 

 

 

최근 몽골 정부는 문화재 보호정책을 펴면서 어버를 복원하기도 하면서 관광용 어버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몽골의 사원이나 마을 어귀에는 우리나라 선돌과 흡사한 모미가 서 있는 것도 눈에 뜨인다.

 

 

 

 

모미는 말뚝 모양의 바위에다 얼굴 형태를 그려놓은 것이나 사람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모미를 만나는 사람들은 둘러친 파란 천에다 몽골의 화폐인 투그릭을 꽂으며 가족의 평안을 빈다.  

현재 몽골의 국교는 라마불교(티벳불교)지만 헌법상 종교 및 신앙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다.

몽골인의 90%가 라마불교를 신봉하며, 나머지 5%는 이슬람교도가 차지한다.

그리고 1990년 이후 개신교 및 가톨릭 등이 전파되어

기독교 신자가 약 2%(4만 명 추산)이고, 나머지 3%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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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향한다.

수도 울란바타르의 동쪽 끝에 위치한 날라이흐 지구로 가기 위함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을 한시간 이상 달려가니 저 멀리 넓게 펼쳐진 마을이 눈 앞에 나타난다. 날라이흐 지구다.

 

 

 

 

울란바타르의 한 구(區)에 속하는 날라이흐는 인구 3만명 정도로 주로 도시 빈민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들어가기도 전에 인부들이 앞길을 막는다. 진입로를 막고 도로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보수 공사가 거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라 도로를 운행하던 모든 차량은 임시도로로 우회해야 했다.

제대로 닦여지지 않은 임시도로로 인해 차량들이 지날 때 마다 모래 먼지가 뽀얗게 사방으로 날린다.

차창을 닫아도 스며드는 미세한 먼지로 인해 목안이 간질간질해진 승객들은 얕은 기침 소리를 내뱉기도 한다.

 

 

 

 

마을 어귀 주유소까지 이르니 맞은 편에 엄청나게 큰 광고판이 세워져 있다.

몽골어인지라 무슨 내용인지 몰랐는데 알고보니 날라이흐가 '새마을운동 시범마을'이라는 표식이란다.

 

 

 

 

날라이흐의 풍경은 초원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많이 삭막하게 보인다.

예전에는 탄광마을이었던 이곳은 몽골에서 석탄 산업이 제일 먼저 이루어진 곳인데

지금은 우리나라처럼 석탄 산업이 사양화되어 탄광은 거의 버려진 상태이라고......

 

 

 

 

이 마을은 이제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아 새마을운동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중인데

날라이흐는 한국 새마을 운동 단체에서 지원을 받는 '새마을 운동 시범 마을'이라고 한다.

 

 

.

 

몽골에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건 지난 2004년.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받아들여 경제 성장을 준비하는 몽골은 지역 사회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데
지방 정부들은 한국과 새마을운동 협약을 맺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경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농촌이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길이 넓어지고 구불구불하던 논길이 반듯하게 바뀐 것처럼

새마을 운동을 받아들인 날라이흐 지구도 우물이 없던 마을 입구에 우물이 생기고

콘크리트 벽돌 공장이 세워져서 천막집 게르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현대식 주택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날라이흐 여러 마을에는 회의를 위한 새마을회관도 지어지고 어린이를 위한 독서실도 마련될 뿐만 아니라

 외곽에도 가로등이 설치되어 지역내 야간 교통사고와 범죄도 크게 줄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많이 바뀐 것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수 있다'는 주민들의 의식인데

추운 겨울을 무사히 잘 넘기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새마을운동의 확산으로 인해 '잘 살아 보자'는 의식이 몸에 배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교회나 학교 등지에서 친선 봉사 활동을 오기도 하는 날라이흐는 

대전광역시 서구와도 자매 결연을 맺는 등 한국과는 여러 방면으로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관공서와 은행, 상점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날라이흐의 메인 스트리트는 울란바타르 못지 않은 분위기이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빠르고 무엇보다 활기가 넘쳐 보인다.

 

 

 

 

공산주의 시절 소련의 영향을 받아 키릴문자(Cyllilic Alphabet)을 쓰는 몽골이라

간판만 보면 러시아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은 착각도 불러 일으킨다.

 

 

 

 

거리에는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한데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메인스트리트 한가운데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주택 앞이든 가게 앞이든 풀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소들이 점령하고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심지어 구청사나 구민회관 같이 보이는 크고 번듯한 건물 앞 잔디에도

털석 주저 앉아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소들에게 점령을 당했다. 역시 이곳은 몽골임이 분명하다. 

 

날라이흐 시내를 한바퀴 돌아 본 후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잠시 멈춘 버스를 향해 V자를 그려주는 사람들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답다.

나아진 생활로 인해 옷차림도 깨끗한 이곳 주민들.

순박한 그들의 얼굴에도 남다른 여유가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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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몽골의 투브 초원에서 양잡는 현장을 깜짝 공개해드린 바 있는데

오늘은 양 한마리로 몽골 전통 요리 '허르헉((Horhog)'을 만드는 과정을 공개하고자 한다.

허르헉을 만들기 위해서는 초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놀던 양 한마리를 골라내야 한다.

초원에서 의지할 식량이라고는 가축 뿐인 유목민들에게 양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대상인데

귀한 손님이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손님을 대접하는 경우에만 잡을 수 있다.


관련 포스트 : 초원의 법칙 - 몽골 유목민의 양 잡기 현장 습격 리얼 리포트 

 


 

 

양을 잡을 때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칼로 양의 앞가슴을 5cm정도 찢은 후

찢은 틈새로 손을 넣어 심장 동맥을 갑자기 움켜쥐어 바로 숨통을 끊어버린다.

이것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동물에 대한 미덕인데

피 한 방울 땅바닥에 흘리지 않고 양를 잡고 가죽을 벗기는 과정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양을 잡고 가죽을 벗겨낸 게르의 바깥 주인은

바닥에 양가죽을 넓게 펴 놓고 먹기에 알맞은 크기로 고기를 하나 하나 잘라낸다.

이때 뼈는 절대로 자르지 않으며 관절을 꺾어서 고기를 해체한다고 한다.

 

 

 

 

남자들이 양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을만한 크기로 자르는 동안 여자들은

손가락 사이에 창자를 끼고 훑어나가며 양의 창자 속에 들어있는 배설물을 하나 하나 뻬내는데

내장 속에 들어 있던 덜 삭은 풀에서부터 똥까지 빠져나와서 주변에는 시큼한 냄새가 진동한다. 

 

 

 

 

모든 과정에서 물은 전혀 쓰이지 않는데 몽골사람들은 고기를 물로 씻으면 본래의 맛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을 잡을 때는 땅 바닥에 한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잡는 것이 기술인데

양의 뱃속에 고인 피는 그릇으로 떠내어 커다란 그릇에 옮겨 담는다.

피를 받은 안주인은 피 한사발을 땅바닥에 뿌리는데 이는 대지의 신에게 주는 고수레인 듯......

 

 

 

 

양 뱃속에서 나온 피는 밀가루와 소금을 넣고 골고루 주물러 섞는다.

 

 

 

 

손으로 주물러 잘 섞은 피를 양의 창자 속에 넣고 익히게 되면 바로 오리지널 피순대가 되는 것이다.

 

 

 

 

양고기를 자르고 피순대를 만들고 하는 동안 한쪽에서는 난로에 장작불을 피워 '초토'를 굽는다.

초토는 몽골 초원의 자갈로 탄소 함유량이 높아 허르헉의 맛을 좋게 하는 돌멩이이다.

 

 

 

 

이제 고기도 준비되고 순대도 만들어졌고 불도 준비되었으니 고기를 넣어 익힐 일만이 남았다.

 

 

 

 

고산지대인 몽골 초원은 기압이 낮아서 요리할 때 냄비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야 하는데

오늘 요리는 양 한마리를 다 넣고 익혀야 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압력솥이 준비되었다.

튼튼하기 이를데 없는 이 압력솥은 몽골의 군대에서 주로 사용되는 압력솥이라고 한다.

 

 

 

 

허르헉을 만드는 맨처음 과정은 큰 압력솥에다 물을 조금 붓는 것이다.

 

 

 

 

그리고는 압력솥 안에 기본 양념인 소금을 적당량 투입한다.


 

 

 

 

그 다음에는 난로의 뚜껑을 열고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초토를 꺼낸다.

 

 

 

 

불길 속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돌멩이 초토를 꺼내서 압력솥 안에 집어 넣는다.

 

 

 

 

달아오른 초토를 넣으면 압력솥 안의 물은 금방 피시시......하며 수증기가 피어오르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큼지막하게 자른 고기들을

초토와 함께 차곡차곡 압력솥 안으로 던져 넣고 정성스럽게 만든 피순대도 넣는다.

 

 

 

 

관광객들을 위해 만드는 허르헉은 감자, 당근, 양파는 물론 마늘까지 넣어 누린내를 없애도 먹기 좋게 한다는데

사실 몽골인들은 채소나 양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 와서 채소를 먹는 몽골인들도 늘어났지만 양파와 마늘 정도가 고작이라고 하는데

마늘도 구하기 힘든 초원의 오늘의 허르헉 양념은 '소금'과 조그마한 '양파 2개'가 고작이다.

 

 

 

 

물과 소금, 초토, 양고기와 피순대, 양파를 솥에 넣은 후에 난로에 다시 새 장작을 투입한다.

 

 

 

 

그리고는 뚜껑을 단단히 닫은 압력솥을 난로불 위에 얹어 놓는 것으로 준비 단계는 끝이 났다.

 

 

 

 

이렇게 해서 1시간 반 정도 푹 쪄야 한느데 양을 잡고, 고기를 자르고, 순대를 만들어 솥에 넣어 익히는데까지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리는 허르헉은 진정한 의미의 슬로 푸드가 분명하다

 

 

 

 

1시간 반 정도 지나 난로에서 압력솥을 내려도 뚜껑을 바로 열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뜸을 들인 후에 뚜껑을 열게 된다.

 

 

 

 

드디어 압력솥의 뚜껑이 열리고 커다란 솥 안에 들어 있는 허르헉의 실체가 드러났다.

사이사이에 까만 돌멩이 초토가 보이는데 솥 입구까지 고기와 순대가 놀랄만큼 가득히 들어있다.

 

 

 

 

양 한마리를 통째로 요리하면서도 왜 채소는 고작 양파 2개가 전부일까 생각했는데

사실 몽골의 전통적인 요리에서 채소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초원에서 고기보다 구하기 힘든 것이 채소이기도 하지만 

선입견을 가진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감자 등의 야채에서 땅 냄새가 난다면서 먹지 않는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에게 채소는 전통적으로 가축들이나 뜯어먹는 목초같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어도 많이 뜨끈뜨끈한 고기와 순대를 집게로 집어 커다란 쟁반에다 덜어낸다.

 

 

 

 

고기를 다 덜어낸 후 압력솥을 보니 압력솥 안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고

그 속에서 고기를 익힌 일등공신 초토가 헤엄치고 있다.

 

 

 

 

초토는 고기가 다 꺼내고 난 후에도 손에 한참 동안 쥐고 있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초토를 손에 쥐고 이리 저리 굴리면 원적외선이 나와 혈압과 심장 등에 좋다고 하길래

 초토 하나를 얻어 손에 살며시 쥐어 보았다. 따스함이 온 몸에 퍼진다.

아....기분이 좋아진다. 몸도 절로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이제 허르헉을 양손으로 들고 뜯어먹는 일만 남았다.

침을 굴꺽 삼킨 후 쟁반에 담긴 허르헉 한조각을 집어 입안에 넣고 살며시 뜯어먹어 본다.

그런데 헉.....! 엄청 질기고 또 느끼......하다.

그렇게 오래 익혔는데도 뼈에 붙은 살코기가 좀체로 뜯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누가 보든말든 양손으로 뼈다귀를 붙잡고 마구마구 뜯어먹어야 했다.

 살점을 힘껏 물어 뜯어 입안에 넣고 질근질근 씹어 보니

헉.....! 양고기 특유의 누린내와 느끼함이 온 몸을 파고든다.

 

몽골로 오기 전 습득한 정보에는 허르헉은 감자, 당근, 양파, 마늘 등 야채가 많이 들어가 느끼하지 않고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다더니 그 요리는 한국 관광객을 위해 특화된 퓨전 허르헉이었던가 보다.

양 한마리에 달랑 양파 2개만 넣은 초원의 허르헉은 완전 느끼함 그 자체였다.

김치나 겉저리와 함께 먹는다면 느끼하지도 않고 환상적일텐데......

새삼 한국 음식의 귀중함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언제 또 몽골에 와서 유목민이 만든 오리지널 허르헉을 먹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의 시큼한 막걸리 맛과 비슷한 아이락(마유주)으로 살짝 입을 축인 후에

접시에 놓인 허르헉 고기를 집어 꼭꼭 씹으며 음미하다 보니 어느덧 허르헉의 구수한 맛이 입안에서 느껴진다.

 

 

 

 

기름기가 엄청 많은 허르헉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는 모습도 보았다.

여러 사람이 먹고 난 그릇을 거의 물 두 바가지로 다 씻어낸다.

주방 세제를 푼 바가지에서 문지른 그릇은 다른 바가지의 맹물로 한번 슥 행궈내면 끝이다.

한국에서라면 경악할 일이겠지만 물 없이 살림하는 것이 몸에 배인 몽골여인에게는 물 두 바가지도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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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올림픽 승마 종합 마술 부문에서 영국 여왕의 외손녀 필립스 공주가

은메달을 획득하여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필립스 공주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외동딸인 앤 공주의 딸인데

앤 공주도 1978년 몬트리얼 올림픽 종합 마술 부분에 출전한 승마 선수이다.

이렇듯 승마가 귀족의 스포츠로 인식되어 있는 유럽에서는  

올림픽 승마 부문에서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형편인데

세계에서 말을 제일 잘 타는 민족을 꼽으라면 '몽골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류 역사상 최초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떨쳤던 칭기즈칸의 위업은

신출귀몰하는 전략과 기병을 앞세운 전력 덕분이었다고 하는데

정복 전쟁시 몽골 병사들은 1인당 8~9마리의 말을 몰고 쉬지 않고 진격했다.

전속력으로 정복지를 향해 달리다가 타고 있는 말이 지치면

말 위에서 다른 말로 바꿔 타면서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고 한다.

 

적군과 접전할 때에도 적들은 몽골 병사들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는데

병사가 100여명이면 몰고 다니는 말 800~900마리가 병사들을 에워싸고 있어

적군들은 몽골 병사들에게 감히 접근할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또 적군들에게 포위가 되었을 때에는 고깃가루인 보르츠와 말젖으로 연명을 했으며

전투 식량이 떨어지면 늙은 말부터 잡아 먹으면 되었기 때문에

병참 문제가 해결되어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을 잘 타는 몽골 민족이 올림픽 승마 부문에서 메달 하나도 따지 못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몽골의 국민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올림픽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기술만 익힌다면

올림픽 승마 부문의 메달은 몽골에서 싹쓸이해가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몽골에서는 어딜 가든지 드넓은 초원에서 방목하고 있는 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말들은 긴줄을 매어 여러 마리를 굴비 엮듯 묶어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양쪽에 긴 기둥을 세우고 높이 줄을 매단 후 말고삐를 높이 매달기도 한다.

 

 

 

 

힘만 살짝 주면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이 매어둔 고삐.

말의 힘은 사람에게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센데 이렇게 묶여 가만히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또 많은 말들은 고삐도 묶어두지 않는데고 이리 저리 흩어지지 않고 무리를 지어 모여 있다.

초원에 불어오는 센 바람을 이기기 위한 지혜일까?

모두 머리를 한데 모으고 엉덩이를 밖으로 돌리고 떼를 지어 뭉쳐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말의 온순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얼마나 순수한 눈인지......

 

 

 

 

아름다운 동물이 많이 있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섹시한 동물은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초원 이곳 저곳에는 고삐도 없이 돌아다니며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초원의 천막과 게르를 배경으로 한데 모여 있는 말들과

 

 

 

 

사이좋게 데이트를 하며 풀을 뜯는 말들의 모습은 한폭의 평화로운 그림이다.

 

 

 

 

말무리 중에서는 이렇게 새로 태어난 망아지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망아지를 어미말의 눈에 띄는 곳으로 끌고 오면 어미는 새끼를 보고 젖이 더 많이 돌게 되는데

망아지가 젖을 조금 빨고나면 망아지를 살짝 옆으로 끌어낸 뒤 주인은 어미말의 젖을 손으로 짜낸다고 한다.

 

 

 

 

어미의 젖을 맘껏 빨지 못한 망아지는 다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잇몸을 드러내며 한껏 반항을 해 본다.

 

 

 

 

이윽고 진정이 된 망아지. 다시 줄에 매여 앉아 온순한 자태를 보여준다.

망아지 이마의 하얀 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War Horse'에 나온 말과 너무 많이 닮았다.

이쁜 망아지야! 얼른 얼른 자라서 초원을 거침없이 달리는 멋진 말로 자라주렴!

 

 

 

 

가축의 젖 짜는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아이들과 아빠는 말을 타고 초원을 무한질주한다.

 

 

 

 

우리나라 제주마의 원조가 되는 몽골마.  아라비아 말에 비해서는 체구가 비교적 왜소하다.

하지만 기골이 장대한 성인을 등에 태우고도 거침없이 질주하는 모습을 보니 작은 체구에서도 무한한 힘이 숫는가 보다.

 

 

 

 

몽골에서는 걷는 것보다 말 타는 것을 먼저 배운다는 말이 있다.

3살도 안된 이 여자아이는 고삐도 잡지 않고 편안하게 말을 타는 법을 이미 터득하였다.

이렇게 말 위에서 자란 아이를 몇년 후에 나담축제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몽골 최고의 축제인 나담 축제 마지막 날에는 어김없이 말달리기 시합이 거행되는데

대부분의 기수는 4~7세의 몸이 가벼운 어린 기수들이라고 한다.

 

 

 

초원의 하루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저멀리 초원의 민둥산에도 어둠이 어둑어둑 밀려오는 시간.

어디선가 갑자기 털이 아주 길고 다른 말과는 생김새가 전혀 다른 말이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눈 앞으로 다가온다.

갑자기 나타난 말을 보고 놀라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금세 바람같이 휙 눈 앞을 지나가 버린다.

필자가 "어! 어!"하고 있으니 옆에 있던 울란바타르대학 남학생이 얼른 필자의 카메라를 뺏어

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한참 후에 사진을 찍어가지고 돌아왔다.

 

 

 

 

윤기 흐르는 흑갈색의 털과 길고 검은 갈기를 가진 이 말은 종마라고 한다.

무리와 어울리지 않고 고고하게 혼자 초원을 질주하는 모습은 정말 신비롭기까지 하다.

비록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제대로 살펴 보지 못 했지만

몽골 초원에서 만난 이 신비한 종마의 모습은 아직도 필자의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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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 올려드린 포스트에서는 몽골의 투브 초원에서

1시간 만에 게르(Ger) 한채를 후딱 짓는 과정을 소개해 드렸다.

그러면 몽골 초원의 천막집 게르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몽골 울란바타르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투브(Tov)아이막의 초원에서

양과 말을 방목하고 있는 한 가정의 게르 내부를 살짝 들여다 보았다.

 

 

 

 

초원에서 살던 몽골인들은 기후 여건에 따라 자주 이사해야 하므로

이동이 간편하고 보온이 잘 되는 게르를 전통적인 주거수단으로 삼아 왔는데

영구성이나 외적  보호기능보다는 일시적인 추위와 햇빛, 그리고 비바람을 차단하는 차양이 주목적이다.

 

비교적 간단하고 어설퍼 보이는 이 게르도 의외로 가격이 만만치 않다고하는데

몽골에서 제대로 된 게르 하나를 세우러면 우리 돈으로 150~200만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서 게르 하나를 새로 만들려면 온 가족이 몇년전부터 틈틈이 재료를 다듬고 모아서 준비한다고.......

 

 

 

 

몽골의 게르에 들어가려면 문을 두드리거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고 하면 안 된다.

가능하면 게르에서 멀리 떨어져서 주인을 불러야 하는데 무작정 집 가까이 다가가면 오해받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약탈이나 습격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르에 개를 카우지 않더라도고 손님은 멀리서 "개를 불러들이시오." 또는 "날씨가 참 좋군요."등

아무말이나 혼자 크게 지껄이면 주인이 게르 안에서 옷을 차려입고 나와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손님이 게르에 들어가게 되면 주인은 여름에는 아이락을, 그외의 계절에는 수테차를 권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받쳐들어 손님에게 권한다.

차와 동시에 작은 병에 담긴 코담배(센떼노)를 권하며 다시 한번 악수를 청하는데 

"건강하세요~(에롤 벵흐 바이가라)", "여행이 편했느냐?"라고 물으며 말문을 터나간다.

하지만 절대로 손님이 어디서 왔으면 어디로 가는지는 캐묻지 않는다고 한다.

 

코담배는 담뱃잎이 아닌 향료와 약초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대부분 옥으로 만든 향수병에 들어있다.

모양과 크기는 매니큐어통 정도인데 귀이개 모양의 도구로 가루를 꺼내 엄지 손톱에 바른 후

조심스럽게 흡입하면서 냄새를 향유하는데 강한 향료와 매콤한 냄새가 나서 매우 자극적이므로

갑자기 들이마시면 재채기와 콧물이 나와서 당황하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한바퀴 씩 돌려가며 코담배 냄새를 맡으면 인사가 끝나고 병은 주인에게 돌려주면 된다.

 

 

 

 

게르는 난로를 중심으로 남성구역, 여성구역, 그리고 신성구역......이렇게  세구역으로 나뉜다.

좁은 공간에서 웬 남녀칠세부동석이냐고 의아해하시겠지만

몽골 사람들은 게르 안으로 들어가면 자기가 어느 곳에 앉아야 하는지를 정확히 안다고 한다.

남성은 게르에 들어가면 왼쪽으로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는 남성구역은 하늘이 보호하고 여성 구역은 태양이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남쪽으로 난 게르 문의 반대쪽인 북쪽은 신성한 구역인데 

가문의 최고 연장자가 사용하는 무기와 모린호르(마두금), 말재갈 등을 놓아두는 곳이다.

옷이나 중요한 물건을 넣어두는 옷장인 밝은 오렌지색의 아브다르도 이곳에 자리잡는데

가족사진이나 정부로 받은 훈장, 불상, 라디오 등이 그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몽골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칭기즈칸의 초상도 신성구역에 걸려 있는데

칭기즈칸의 초상은 어느 집 어느 게르를 가더라도 빠짐없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르의 서쪽인 왼쪽은 남성구역으로 이곳에는 말안장과 고삐, 아이락 주머니 등

남자주인의 소지품들이 걸리게 되고 손님용 침대나 카페트도 이곳에 놓이게 된다.

 

 

 

 

주인 내외의 침대는 오른쪽인 여성구역의 벽에 붙어 있는데 아이들이 많으면

침대가 거의 돌아가지 않으므로 부모의 발치 바닥에 양탄자나 양가죽을 깔고 잠을 잔다고 한다.

사진에서 게르의 천막 아랫부분이 살짝 들어올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바깥의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상당히 시원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르의 동쪽인 오른쪽에는 안주인의 주방용구와 생활도구들이 비치되어 있는데

이집의 안주인의 세심함이 드러나는 자수 장식품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주방용구가 비치되어 있는 게르의 오른쪽 문 입구에는 이렇게 고기를 줄에 널어 말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뜨였는데

 이렇게 실내에서 고기를 말리는 이유는 밖에 두면 야생짐승들이 언제 물어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말린 고기는 갈거나 절구에 빻아 가루로 만드는데 우리나라 미숫가루같은 이 고깃가루를 '보르츠'라고 한다.

 휴대가 간편하고 영양도 만점인 비상식량 보르츠는 뜨거운 물에 서너 숟가락 퍼 넣고

 2~3분 기다리면 금방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영양식이 된다고.....

 

 

 

 

원형의 게르의 제일 가운데에는 이렇게 난로가 놓여 있는데 취사는 물론 게르의 난방을 책임지고 있다.

나무가 자라는 지역에서는 난로에 나무를 때지만 그 외의 지방에서는 가축의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게르의 난로에 불을 지피면 게르 내부는 금방 더워지고 그 열기는 비교적 오랫동안 간직된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난로를 신성시여기는데 난로에 물을 붓거나 쓰레기를 넣는 것, 불을 쑤시는 것과

난로를 타 넘는 것은 물론 난로에 발을 쪼이는 것도 금기시된다.

난로를 모독하는 모든 행동은 최악이며 주인을 모독하는 것으므로 조심해야 할 일......

 

 

 

 

멀리 한국에서 몽골의 초원까지 온 이방인을 위해 안주인이 몽골 전통 의상 델을 입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어 우리나라의 두루마기와 모양새가 비슷한 델은 남녀 구분이 없는데

단추의 숫자가 많고 화려하면 여성용, 모양이 단순하면 남성용이라고 한다.

남성용 델은 장식보다 실용성에 중점을 두었는데

일하거나 말을 탈 때에는 몸을 보호하고 밤에는 담요대용으로 보온에 한몫을 했다.

변화의 물결이 빌어닥친 요즈음 델은 오리털 파커로 바뀌었고

긴 소매의 델로 감추었던 손에는 두툼한 스키 장갑이 끼워지게 되었다.

 

 

 

 

게르를 방문한 기념으로 투브 초원의 이 가족들에게 가족사진을 한장 찍어주기로 했다.

게르의 문 앞에 서서 두 아이를 안고 선 부부의 얼굴에는 순박하고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포토 프린터를 가지고 갔더라면 즉석에서 사진을 출력해줄 수 있었을텐데 그점 아쉬운 점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사진을 출력해서 게르 주인의 이름을 적은 메모와 함께 투브 아이막으로 부쳐 주었다.

가축들이 먹을 풀이 다 없어지면 게르를 분해하여 또 다른 초원으로 이동하는

초원의 유목민 가족에게 이 사진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부디 이 사진도 게르의 신성구역의 액자 안에 함께 걸리게 되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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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몽골.
가도가도 끝없는 지평선과 초원 뿐인 몽골은 신조차 버린듯이 척박한 땅이다.

그러나 몽골의 자연이 이렇듯 끝없는 초원만 계속되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몽골의 자연은 크게 5개 권역으로 나뉘어지는데 동부의 평원과 서부의 산맥, 북부의 숲과 호수,
남부의 사막, 그리고 울란바타르를 중심으로 한 톱 아이막(중앙 道)이 그것이다.



몽골의 수도인 울바타르 근처에는 놀랍게도 이렇게  큰강이 흐르고 있는데 강의 이름은 '톨'강이다.




수량도 풍성한 톨강 유역에는 몽골에서 보기 힘드는 싱그러운 숲들이 펼쳐져 지나치는 이들의 눈을 시원하게 한다. 




올란바타르에서 멀지 않는 곳에는 울창한 수목 사이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천국과 같은 곳이 있는데 
바로 울란바타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항헨티 산기슭에 있는 테를지
(Terelji) 국립공원이다.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푸른 초원, 울창한 전나무가 우거진 산과 그 뒤쪽으로 얼굴을 내민 바위산,
우거진 숲 사이로 흐르는 맑은 톨강,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하얀 게르가 어울려 한폭의 풍경화로 다가오는 테를지 국립공원. 

거북바위를 지나 테를지 국립공원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구름을 이고 있는 웅장한 산 아래로 울란바타르-2 호텔이 나타난다.
이 호텔에서 묵어보지는 못하고 점심식사만 했는데 경관이 정말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멋진 호텔이다.

호텔 앞에도 말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는데 드넓게 펼쳐진 테를지 국립공원 안의 초원은 골프장으로 이어진다. 




말과 너무나 친숙한 몽골인지라 가는 곳 마다 이렇게 말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울란바타르-2 호텔 바로 옆에 더 멋들어진 건물이 있기에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북한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란다.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북한 호텔이라고 하니 뭔가 두려운 느낌이 들어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울란바타르-2 호텔 뒷편으로 돌아가서 보니 호텔 담 너머로 북한 호텔이 지척이다.
건물은 지은지가 얼마 되지 않는지 상당히 산뜻해 보이고 고급스러워보인다.




호텔 뒷편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숲이 있다고 하기에 산책길에 나섰다.
호텔 뒷편길로 들어서보니 발 앞에 바로 맑은 강물이 펼쳐진다. 바로 '멀리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의 '톨'강이다.




산책길에 나서니 주춤하던 비가 또 약하게 내리며 강물 위로 점점이 뿌려진다.




햇살로 눈부시는 톨강을 볼 수는 없지만 대신 비를 머금어 너무나 싱그러운 수풀이 눈 앞으로 펼쳐지니 도리어 이색적이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튼튼해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걸어서 건너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맑은 강물에는 주변의 커다란 나무들과 멀리 산의 모습까지 거울처럼 비쳐진다.



다리 위에서 강물을 보니 완벽하게 아름다운 반영이 펼져진다. 흐르는 강물인데 어찌 이리도 고요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파아란 하늘이 담긴 반영은 아니지만 그나름대로 분위기 있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다리 위에 서 있는데 바로 앞 강물 위를 늑대같이 생긴 시커먼 개가 혼자 강물을 건너간다.

아니 늑대같이 생긴 개가 아니라 거의 늑대다. 인적도 없는 강물을 건너가는 넌 대체 누구니.....?




다리를 건너 숲속으로 들어서니 숲이 깊어갈수록 경치는 점입가경이다.




수령이 수백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들이 숲 전체에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어제 오늘 갑자기 내린 많은 비 때문인지 떠내려온 가지들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고......




자잘한 나뭇가지들은 강물에 밀려올라와 아름드리 나무 아래 그 몸을 맡기었다.

 



강물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 큰 홍수에 뽑혀 넘어졌는지도 모를 커다란 나무들이 여기저기 강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뿌리채 뽑힌 거목들은 한두 그루가 아니다. 갑자기 내린 큰 비가 이곳 톨강을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숲 속 여기저기를 얕게 흐르던 강물은 어느새 합쳐져서 큰 강을 이루어 흘러간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몽골에 와서 나무들이 뿌리채 뽑힐 만큼 큰 홍수가 지나간 흔적을 보게 되다니!

예상치 않게 비가 와서 파란 하늘 아래 톨강이 흐르는 테를지를 볼 수 없다고 불평하던 일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태초의 신비로운 숲을 연상시키는 테를지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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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가도 끝없는 초원과 황무지만 계속될 것 같은 몽골. 이런 몽골에도 기암괴석이 펼쳐지고 울창한 수목 사이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천국과 같은 곳이 있다. 바로 울란바타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항헨티 산기슭에 있는 테를지(Terelji) 국립공원. 1993년, 몽골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테를지는 세계자연유산으로도 등록되어 있는 몽골의 자랑거리이다. 일전에 몽골에 다녀온 분들이 찍은 사진이나 여행 가이드북에서 테를지를 처음 보았을 때 몽골스럽지 않은 의외의 풍경에  "와....몽골에도 이런 곳이 있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눈이 부시도록 파아란 하늘 아래 우거진 침엽수림과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은 유럽의 어느 나라인 것 처럼 착각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테를지로 향하는 날은 날씨 운이 없었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몽골이지만 테를지로 향하는 날은 아침부터 궂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이 귀한 몽골 사람에게야 반갑기 그지없는 비이지만 어렵게 찾아간 여행자에게 비는 여행을 힘들게 하는 자연현상이므로 시작부터 힘이 빠지게 하고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테를지를 찍어봐야지.....하는 욕심은 살포시 접어두어야 했다.



누가 이곳을 몽골이라 했던가..... 끝없이 펼쳐지는 전나무 숲을 한참이나 달리던 버스가 숲길에서 느닷없이 멈춘다.
저쪽을 보라는 기사의 손짓을 따라서 올려다보니 저 멀리 산 정상의 바위 모습이 합장하는 스님의 모습이다.
차안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내려 바위를 향하여 절을 하고 사진찍기를 마치니 버스는 다시 빗 속을 덜컹덜컹 달리기 시작한다.


테를지를 향해 한참을 가다보니 길 가에 차량들이 여기저기 정차해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한쪽에는 소방차도 보인다. 
어...무슨 일이지? 교통사고가 난건가?


알고보니 울란바타르 방송(UBS)에서 드라마를 찍으러 온 것이라고 한다. 오....이곳까지 와서 드라마 찍는 현장을 만나다니....

로 지나가면서 언뜻 보니 여배우가 아주 예쁘다. 좀 더 자세히 보게 고개 좀 들어보세요.....


한참을 달려 테를지 국립공원 매표소 앞에 이르니 앞에 이르니 잠시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찌뿌드드......시야는 뿌옇고 어둡기만 하다.
매표소 좌우에는 캠프촌들이 자리잡고 있고 마주 보이는 산세는 국립공원답게 웅장하게 보인다.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이렇게 말을 대여해주고 있다.
말을 타고 테를지를 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아무도 없다.
몽골의 말들은 아라비아말들에 비해서 체구가 그리 크지 않다. 우리나라 조랑말보다 약간 더 큰 정도.....


테를지의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비를 머금은 흙들은 붉은 황토빛을 머금고 있는데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거친 길을 한참이나 달려온 버스. 드디어 고장이 나 버렸다. 버스 안으로 들어가 고장난 차를 수리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테를지 국립공원의 중심이 되는 곳에 이르니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가 눈 앞에 펼쳐진다.


몽골 관련 책자나 가이드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거대한 바위, 바로 '거북바위'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쳐들고 있는 머리, 등을 덮은 등딱지, 엎드린 형상이 영락없는 거북의 형상이다.


거북바위만 멋진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산세도 빼어나기 이를데 없다. 사진의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하얀 건물이 하나 보이는 데 이곳은 이 주변에 위치한 유일한 화장실이다. 이 화장실은 문이 전혀 없으므로 볼일을 보면서 주변의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세계최고 경관(?)의 화장실이다.


웅장한 기암괴석과 쭉쭉 뻗은 침엽수림을 보면 마치 알프스 중턱의 어느 마을같다. 하얀 게르만 없다면......


주차장(?)에 가까운 곳에도 올망졸망하고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자리잡고 있어 심심치 않다.


맑은 날씨였다면 파아란 하늘 아래 이런 멋진 풍경들을 담을 수 있었을텐데......정말 아쉽다.
 


그래도 간만에 내린 비로 인해 주변 산의 나무들이 푸르름으로 가득해서 너무나 보기가 좋다.


중생대 화강암지대에 융기된 암산이 오랜 세월 바람과 비에 침식되어 형성된 높은 암벽과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 나지막한 계곡과 푸른 초원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는 테를지의 지명은 이곳에 많이 자라고 있는 식물이름 '테를지'(우리말로 '각시 석남')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웅장한 기암괴석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테를지는 몽골인들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몽골 최고의 휴양지이다.
거북바위를 지나 테를지국립공원 안으로 쑥 들아가서 만난 아름다운 톨강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울창한 삼림은 다음편에서 보여드리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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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초원을 호령하던 몽골 왕의 일상은 어떠 했을까?
몽골의 마지막 복드 칸 '자브춘 담바 후탁트 8세'가  거처하던 복드 칸 궁전에서 그 해답을 찾아본다.

마지막 복드 칸이 몽골사회주의 이전까지 왕비와 함께 20년간 머물렀던 복드 칸 궁전은
7채의 라마 사원과 왕의 거처인 겨울궁전으로 구성되었는데
복드 칸과 왕비의 의복이나 침대 같은 화려한 수공예품이나
8대 복드 칸의 즉위를 축하하여 이웃나라 왕들이 선물한 희귀한 동물의 박제 등
진귀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왕궁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겨울궁전은 궁전 안 7채의 라마 사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하얀 서양식 건물로 되어 있다.
이 겨울궁전은 1905년에 러시아 3대 왕 니콜라이가 지어준 것으로 
왕과 왕비의 유품과 8대 복드 칸의 즉위를 축하하여 이웃나라 왕들이 선물한 희귀한 동물의 박제 등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몽골에서는 라마 사원을 중심으로 주변에 화려한 게르를 세워서 그 곳을 왕실로 사용했고
추운 겨울에만 서양식으로 지어진 겨울궁전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곳 역시 입장료의 4배나 되는 10,000투그릭을 지불해야 실내의 전시품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조명이 어두운데다 대부분의 전시품들이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되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지기가 힘든 곳이었다.


 



 게르에서 생활하던 벅드 칸이지만 그의 유품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복드 칸과 왕비 뿐 아니라 대비의 휴식용 침대도 흑단과 비단으로 장식한 화려한 침대이다.




복드 칸의 황금색 델(Deel, 몽골 전통 의상을 델이라고 한다)에는 황룡이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고




복드 칸 의복의 바깥 부분에는 양단에 용을 산호와 진주로 정교하게 상감해 넣었다.




왕비의 델과 모자도 정말 아름답다. 전체가 너무나 정교한 수로 뒤덮여있다. 하나를 수놓는데도 몇년이 걸리지 않을까?





은과 진주로 장식한  대비의 델(Deel)과 신발(고탈,Gutul).
몽골의 전통 신발인 고탈은 좌우가 구별되지 않는게 특징이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신발의 좌우를 찾는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나?

 



왕비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머리 장식.
몽골에서 패션의 완성은 모자인데 몽골사람들의 머리에 쓴 모자나 장식으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복드 칸이 종교 의식 때 입던 의복과 의식에 쓰이는 도구들.
몽골의 왕인 복드 칸은 달라이라마처럼 환생을 하는 자나바자르이기 때문에 신분 자체가 라마승이었다.




복드 칸과 왕비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옥좌. 가운데 태극 문양은 몽골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




복드 칸의 보좌 앞에 불전함이 있고 그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지폐가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왕이자 라마교의 우두머리이기도 한 복드 칸을 생불(살아있는 부처)로 생각하는 라마 불교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실에서 쓰이던 삼발이 화덕인데 독립 국가 몽골의 중심으로 존재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한 방에는 이렇게 화려한 복드 칸의 침대가 놓여 있는데 정교하기 이를데 없는 공예품이다.




바로 옆에 놓여진 왕비의 침대 역시 흑단으로 정교하게 아로새겼다.




그 외에 이렇게 중국 풍의 자기들도 눈에 뜨인다.




연회에 쓰이던 대형 접시. 복드 칸의 상징인 용이 그려져 있는 접시이다.




오른쪽은 화병, 왼쪽은 아이락(aikag, (馬乳酒))을 마실 때 쓰는 사발이다.
말젖을 가죽 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저어서 만드는 아이락은 발효되면 보글보글 소리가 나며
기포가 솟아오르며 술이 되는데 맛은 우리나라 막걸리 같이 약간 비릿하고 시금털털한 맛이다.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아이락을 몽골 사람들은 술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여서
이렇게 세숫대야만한 잔에 담아 두 손으로 들고 마신다.





복드 칸의 소장품 중에슨 이렇게 뮤직 박스도 있다. 뮤직 박스 안에는 유럽 클래식 음악 8~10곡이 내장되어 있다고.......




복드 칸이 선물받은 코끼리.




코끼리의 의상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의식 때 쓰이던 코끼리 의복도 궁전의 장인들이 한땀 한땀 떠서 만들었단다.





복드 칸이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 안장과 게르 모형.
게르 모형이 얼마나 귀여운지.....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팔면 잘 팔릴 것 같다.





벅드 칸이 5세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배라고 한다. 장난감치고는 너무나 정교하고 화려하다.





전시품 중에는 이렇게 진귀한 동물의 박제가 많다. 모두가 복드 칸의 즉위식 때 이웃나라에서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




복드 칸의 상징인 용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양산과 전용 마차도 한쪽에 다소곳이 전시되어 있다. 




방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화려한 게르가 눈에 뜨인다. 게르 앞에 진열된 복드 칸의 양산은 전부 공작 깃털로 만들어졌다고.....




김수미가 보았으면 하악대며 좋아했을 듯한 너무 멋진 표범 무늬 게르.
가까이 가서 설명을 읽어보니 게르를 덮은 가죽은 진짜 눈표범(Leopard) 150 마리의 가죽으로 이루어졌단다!
갑자기 게르의 덮개로 일생을 마친 눈표범들이 불쌍하게 느껴졌지만 자연 보호 관념이 없던 옛날의 일이니 용서해야겠다.

복드 칸이 야외로 나갈 때 쓰는 이 게르는 그가 25번째 생일에 선물받은 게르라고 한다. 
 




박물관의 많은 소장품 가운데 필자의 시선을 가장 끈 것은 정교하기 이를데 없는 몽골 세밀화이다.

이슬람 세밀화에 많은 영향을 준 몽골 세밀화는 그 표현법과 정교하기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마치 '윌리를 찾아라'를 보고 있는 듯한 몽골 세밀화를 하나하나 들여다 보고 있노라며 언제 시간이 갔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위의 그림은 '아이락 축제'를 그린 것으로 B. Sharav(1869~1939)의 작품인데

아이락 축제가 벌어지는 주변의 모습을 너무나 상세하게 묘사해서 눈길을 끈다.
그림을 보다 보면 상대적으로 매우 자유분방한 몽골의 성 풍속도도 짐작할 수 있는데
충격적이라고 표현할만한 몽골의 성풍속도에 대해서는
이전에 상세한 세밀화 그림과 함께 소개해 두었으니 아래 링크를 눌러보시기 바라며......

관련 포스트 : 충격적인 성묘사의 몽골 세밀화





B. Sharav가 그린 '겨울궁전' 세밀화를 보면 과거 복드 칸 궁전에는 현재보다 더 많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른쪽 맨 앞의 푸른 지붕과 하얀 벽의 건물이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궁전 앞에는 엄청나게 큰 무쇠솥도 전시되어 있어 당시 궁전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수를 짐작할 수 있다.
사회주의로 인한 왕가의 몰락으로 이제 왕과 왕비가 궁전을 거니는 모습은 비록 볼 수 없고 
몽골의 마지막 왕 복드 칸이 거닐던 정원에는 마른 풀만 무성히 자라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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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를 믿는 몽골에는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처럼 환생을 하는 자나바자르가 있다.
몽골의 복드 칸이기도 했던 자나바자르는 
세속의 삶은 물론 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관장했는데

몽골에는 자나바자르부터 마지막 8대까지 8명의 자나바자르가 있었다.

마지막 자나바자르이자 8대 복드 칸인 '자브춘 담바 후탁트 8세'가 
몽골 사회주의 직전까지 20년간 왕비와 함께 거주했던 곳이 바로 복드 칸 궁전이다.
정교합일을 추구하는 몽골 복드 칸들은 신분 자체가 라마승이었기 때문에
복드칸 궁전은 7채의 라마 사원과 1채의 왕의 거처로 이루어져 있다.





복드 칸 궁전 앞에 이르러 보니 궁전의 정문은 웅장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세개의 열린 문 뒤로 화려한 모습의 문은 평화의 문이라고 하는데
이 문들은 8대 복드 칸의 대관식을 기념하여 1912~ 1919년 사이에 지어진 문으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지어졌다.

단청도 산뜻하고 진한 색감으로 채색되어 있는데 내부의 소박하고 퇴락한 궁전 건물과 비교하면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다.
아마도 근래에 와서 단청을 새롭게 입힌 것 같이 보인다.





평화의 문이라 불리우는 세개의 문에 그려진 그림은 복드 칸 시절 몽골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제일 가운데 문은 왕과 왕비가 출입하던 문이지만 지금은 세 문 다 사용하지 않아 출입할 수 없다.





안쪽에서 자세히 살펴보아도 궁전의 문은 정말 화려하고 단청도 정교하기 그지없다.






관광객을 비롯해서 모든 방문객은 옆에 위치한 쪽문을 이용해 출입해야 한다.
복드 칸 궁전의 입장료는 2,500 투그릭(한화 2,500원 정도)인데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내부 촬영은 물론 외부 촬영을 하는데도 반드시 사진 촬영료를 내어야 하는데
카메라 한대 당 사진 촬영료는 10,000투그릭, 비디오 촬영은 15,000투그릭을 지불해야 한다.
궁전 입장료의 4배에 달하는 사진 촬영료를 내어야 하니 배 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넓은 곳을 관람하며 몰래 카메라를 찍을 수도 없는 일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10,000투그릭을 지불해야 했다.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료 뿐 아니라 궁전 안내 브로슈어조차도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필자는 몽골어와 영어로 된 보잘 것 없는 브로슈어를 5달러나 주고 구입해야했다.





복드 칸 궁전은 궁전이라 하기는 규모가 다소 작아 보인다.
몽골에서는 라마 사원을 중심으로 주변에 화려한 게르를 세워서 그 곳을 왕실로 사용했고
추운 겨울에만 서양식으로 지어진 겨울궁전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궁전은 왕의 거처와 7채의 라마 사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복드 칸의 유품이나 진귀한 수공예품, 각종 왕실 용품을 볼 수 있도록 왕궁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7채의 사원 건물 중 남북으로 자리잡은 사원 건물은 2층, 혹은 3층으로 되어 있고

동서로 자리잡은 부속 건물들은 1층으로 되어 있는게 특징인데 안에는 건물 안에는 불상과 탱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라마 사원 오른쪽에 위치한 하얀 서양식 건물은 복드 칸이 왕비와 함께 살던 겨울궁전이다.
1905년에 러시아 3대 왕 니콜라이가 지어준 이 서양식 목조 건물에는 복드 칸과 왕비의 유품을 비롯하여 
8대 복드 칸의 즉위를 축하하여 이웃나라 왕들이 선물한 희귀한 동물의 박제 등 진귀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겨울궁전 박물관의 소장품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 상세히 소개해드릴까 한다.





제일 안쪽의 3층 건물은 사원의 주가 되는 곳이라(메인 템플) 지붕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궁전 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은 Maharaja(위대한 왕) 사원이다.  





사원은 1893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퇴락한 단청으로 인하여 연륜이 더 오래 된 건물같이 보인다.





첫번째 건물 문을 통과해서 나가니 자그마한 마당과 함께 Naidan 사원이 나타난다.





이 건물은 아랫층 기와 지붕에는 전혀 채색을이 되어 있지 않고 2층 누각 지붕에만 진한 초록색으로 채색이 되어 있다.
무슨 뜻이 있어서 누각 지붕에만 채색을 한건지 아니면 현재 복원하는 과정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서로 배치된 부속 건물 역시 지붕은 전혀 채색이 되어 있지 않고 단청도 빛 바래인 채 그대로인데





어떤 부속 건물은 촌스러울 만큼 진한 색으로 단청이 되어 있어서 건물들 간에 통일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아마도 단계적으로 복원을 하고 있는 상태가 아닐까......생각해 보지만 신빙성은 없다.




동서로 배치된 부속 사원은 각가 탱화의 사원, 아플리케 사원, 장서의 사원, 만신전 등인데
건물의 내부는 의외로 많이 화려하고 탱화와 불상을 비롯하여 티베트 불교의 상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원과 사원 사이의 안 마당에는 여기저기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어 마치 관리를 안 하고 버려진 폐허같은 느낌도 든다.
왜 잔디를 깎지 않지? 이런 생각이 들겠지만 사실 몽골에 있는 동안 잔디를 깎아둔 건물은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몽골에서 목초는 짐승의 귀한 먹이이니 잔디를 깎는다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제일 안쪽 건물은 궁전 내부에서 가장 화려하다. 
주 사원인지라 건물은 3층으로 지어 위압감을 더 해주고 건물 지붕도 황금색으로 단청이 되어 있다.





지붕만 황금색으로 채색되었나 했더니 가까이 가서 보니 세밀하게 조각한 문양 마다 황금이 입혀져 있다.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느껴지는 단청과 퇴락한 황금빛은 서로 어우러져 묘하고도 신비한 느낌마져 가져다 준다.
"왕이 거처했다는 사원이라더니.....뭐 이리 초라하나......단청도 색이 다 바래고 관리를 전혀 안 하고 있구만.....쯧쯔쯔......."
하면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보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산뜻하게 채색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전 정문 보다는 
퇴락하고 희미해진 단청이 더욱 기품있고 아름다워 보인다.






내부 역시 외부와 마찬가지로 붉은색과 황금색이 조화를 잘 이루고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하다.





방과 방을 구별하는 문도 화려하기 그지없고 천정도 화려한 무늬로 꾸며져 있다.





한쪽에 놓여진 화려한 흑단의 가구에는 몽골 사람들이 생각하는 극락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궁전이라지만 라마 사원을 중심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내부의 전시품들은 라마 불교의 특징들이 잘 나타나있다.  


 



궁전을 다 돌아보고 시간이 허락하면 출입문 옆 조그만 기념품 가게에 들려봐도 되겠지만
특별한 기념품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몽골의 마지막 복드 칸의 고색창연한 라마 사원의 아름다움을 손에서 놓치 못하고 한참을 방황하다
왕과 왕비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 겨울궁전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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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나라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흔히 '라마교'라고 부르는 티벳 불교이다.
인구의 90%가 불교 신자이거나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가 몽골이다.

몽골인들이 의식적으로 불교를 믿게 된 것은 13세기 부터인데
16세기에 이르러 티베트 불교는 몽골 땅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21년에 몽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자
각가지 방법으로 종교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는데

1937~1939년 사이에는 거의 모든 불교 사원이 폐쇄되거나 박물관으로 바뀌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에 20,300명에 이르던 몽골의 승려들은 모두 구금, 또는 처형되었고
20세기 초 750개에 이르던 불교 사원은 대부분 다 철폐되어야 했다.

1989년 이후 찾아온 민주화로 인해 몽돌에는 전통 문화 복원 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고
사회주의 시절에 탄압 받았던 전통 종교와 신앙도 제 자리를 찾게 되는데
티베트 불교는 몽골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몽골 사람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으며 그 위상을 굳히게 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망가졌던 사원은 다시 복원이 되고 환속했던 승려들은 사원으로 돌아왔으며
종교 박해 속에 신앙을 버렸던 신자들은 다시 사원을 찾아 마니차를 돌리고 오체투지를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몽골 불교의 구심적 역할을 하는 '간단사(Gandan)'는 '몽골의 심장'이라고 불리우는 사원이다.





입구에는 이렇게 대형 마니차가 있어 불교 신자들은 사원에 들어가기 전에 마니차를 한번씩 돌리고 경내로 들어간다.



몽골, 만주, 티베트 건축 양식이 다 혼합된 간단사원 대법당은 의외로 소박하고 아담하다.
지붕의 색깔이 황금색인 것도 상당히 눈에 뜨이는데 지붕 위에도 대형 마니차가 코너 마다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대법당 안으로 들어가서 예불을 하는 순례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대법당과 부속건물을 한바퀴 돌면서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리 진열장 속에 들어 있는 불상 앞에도 오체투지를 위한 판이 여러개 마련되어 있었지만
날이 더워서 그런지 사원 구경을 다하고 돌아나올 때까지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이쁜 델을 잘 차려입고 마니차를 돌리는 할머니를 따라 대법당 순례길(코라, Kora)을 뒤따라가 보았다.





대법당을 빙 둘러가며 마니차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순례자들은 모두가 마니차를 한번씩 돌리며 지나간다. 뱅글뱅글.......





마니차 돌리기는 오체투지와 함께 티베트인의 대표적인 수행 중의 하나이다.



불교경전을 넣어 돌릴 수 있게 만든 통인 마니차는 한번 돌릴 때 마다 안에 들어 있는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경전을 읽는 대신에 그저 슥~ 한번 돌리기만 하면 읽은걸로 쳐 준다니......
공부하는 아이들도 책 안에 있는 내용을 외우는 대신에 한번 돌리기만 하면
머리 속에 다 들어오거나 읽은걸로 쳐준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대법당의 중앙 부분에 이르니 이렇게 자그마한 표식이 있고 사람의 손이 닿는 곳은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하다.
짐작컨대 아마도 이 부분이 불상이 있는 곳인 것 같다.




 마니차 골목의 꺾어지는 부분에 오색 타르쵸를 두른 신성한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기둥에 머리를 대고 잠시 뭐라고 기도하더니




기둥에다 몽골의 지폐인 투그릭을 꽂아 놓는다. 꽂힌 돈을 슬그머니 빼가는 사람은 없을테지?




'위대하고 성스러운'이란 뜻을 지닌 간단(Gandan)사원의 의 유래는 울란바타르와 그 역사를 같이 하고 있다.
원래 울란바타르의 이름은 ‘이흐 후레’라고 했는데 이것은 '큰 울타리'라는 뜻으로
간단사의 담장을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살기 시작하자 명명된 이름이다.




간단사는 17세기 제1대 복드 칸 잔바자르(G. Zanbazar)에 의하여 건립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시기는 분명치 않다. 
이후 100여 년에 걸쳐 간단사는 아홉 개의 사원과 도서관 그리고 5,000 승려의 숙소를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는데 .
1937~1939
년에 사회주의자들이 몽골 종교계를 억압하게 되자 대부분의 사원은 철폐되고 승려들은 투옥되거나 속화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 간단사는 종교 활동을 허가 받은 최고령 150명의 승려들로 사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는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몽골도 독립하게 되자 사원들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고 
간단사도 불교부흥을 위래 노력한 결과 예전의 위상을 다시 찾게 되었다.

오늘날 승려들의 삼분의 일은 사회주의 전 세대이며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25세 이하의 젊은 승려들이라고 한다.
현재 울란바타르에 있는 라마승의 총인원이 400명 정도라고 하는데 간단사원에만 300명 정도의 승려가 있다고 하니
간단사원은 울란바타르 신앙의 구심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법당을 한 바퀴 돈 사람들은 간단사원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관음대불전으로 향한다.





1996년에 복원되었다는 관음대불전은 티베트 사원보다는 훨씬 소박하고 간결해 보인다.
간단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관음대불전을 찾는 이유는 법당 안에 엄청나게 큰 불상인 개안관음상이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도 역시 대형 마니차를 돌리고 들어가는데
법당 내부도 중앙에 개안관음상이 있고 불상 주위를 마니차를 돌리며 한바퀴 도는 구조로 되어 있다.





관음대불전 안에 들어가니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내부 촬영을 하려면 5,000투그릭 정도의 돈을 지불해야 한단다.
우리 돈 5,000원 정도의 사진 촬영비가 약간 아깝게 느껴져서 불상 뒤편으로 돌아가 관리인 모르게 살짝 살짝 몇 컷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전광석화처럼 나타난 관리인 아저씨.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진을 찍으려면 당장 돈을 내란다.
하는 수 없이 돈을 지불하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져서 마음 먹고 사진을 찍어보기로 했다.

몽골에서는 박물관이든, 사원이든 내부 촬영을 하려면 반드시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이 특징인데
심지어 복드 칸 궁전 같은 곳에서는 실외 사진을 찍는데도 돈을 지불해야 했었다.





돈을 지불했으니 플래쉬를 터뜨려 찍든 몇장을 찍든 아무 상관이 없단다.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26m짜리 개안관음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면서 마음껏 셔터를 눌러보았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는 이 금불 입상은 불상에 입혀진 금의 무게만도 150kg에 이른다니 놀랄 일이다.



 









개안관음상 주변을 둘러가며 천정까지 질서있게 들어찬 진열장 안에는
이같이 손바닥 만한 불상이 빼곡이 들어차 있어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관음대불전을 찾은 순례자들은 불상을 한바퀴 돌며 마니차를 돌린 후 개안관음상 앞에서 예불을 한다.

우리나라 사찰과는 달리 몽골의 불전함은 투명창으로 되어 있어 쌓인 불전이 한눈에 다 보이는게 특징이다.



 

몽골 신앙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울란바타르 사람들의 생활의 구심점이 되는 장소,
몽골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관광 명소, 울란바타르의 간단대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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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인근 '투브 아이막'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투브 적십자 여성 지도자와 자원 봉사자들은 
한국에서 찾아간 봉사대원들을 형제와 같이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투브  아이막의 주민 현황과 적십자사 활동 현황에 대한 브리핑이 있은 후에는
중학생 두명이 마두금이라고 알려져 있는 모린호르를 아주 멋진 솜씨로 연주해 주었고
배, 가슴, 머리까지 사용하여 발성하는 몽골 특유의 노래 '흐미'도 들려 주었다.
이 학생들은 우리나라 SBS 프로그램 스타킹에도 출연한 몽골 전통음악의 유망주들이라고 하는데
학생들의 모린호르 연주 동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확인하시기 바라며....

한국에서 가져온 우정의 선물 상자를 전달과 양국 대원들과의 친교 시간 후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니
투브 적십자 지도자의 절친인 인근 중학교 학교장이 한국 봉사대원들을 초청했다고 하며 방문하기를 강권한다.
학교 방문으로 인해 울란바타르로 돌아가는 일정이 다소 늦추어질 우려는 있었지만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인근의 중학교로 향했다.




중학교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니 주변 초원의 낮은 구릉에는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학교 옆에도 벽돌로 지어진 연립 주택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학교의 사정도 일반 주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담장도 없이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다.




ㅁ자로 지어진 학교는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부분도 있지만 쌓은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엉성한 모습이었는데
몽골 사람들은 외부 치장하는 부분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며 
보온과 단열을 위해 벽의 두께는 거의 1m 정도로 만들어 겨울 추위에 대비한다고 한다.




세월이 흔적이 느껴지는 학교 현관 앞에 서니 교패와 학교의 현판이 멀리서 찾아온 여행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곧이어 적십자 지도자의 친구인 학교장이 나와서 일행을 반겨주었는데 역시 4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몽골에서는 각 기관에서 여성 우두머리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몽골 또한 부모들의 교육열이 대단히 높은 편인데
울란바타르에선 물론이고 유목민들 조차도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대학에 보내려고 애쓴다.
만약 아이들이 많아 모두 대학 교육을 시킬 형편이 못 되면 맏딸만 대학에 보낸다고 하는데
이는 딸만이라도 힘든 유목민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방학 중인지라 학교는 직원들만 근무하고 학생들은 하나도 없이 너무나 조용하기만 했다.





학교 복도는 어떤 부분은 돌이나 시멘트로, 어떤 부분은 나무로 되어 있는데




학교의 오랜 연륜을 말하는 듯 나무 복도도 많이 낡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학교장의 설명을 들으니 몽골에는 초등학교가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없고 초등학교 과정이 포함된 중학교부터 학교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다.
초등 과정 6년과 중등 과정 2년이 함께 들어있는 몽골의 중학교 과정은 8년이 되는데 
7세 때 중학교에 입학해서 중학교 8년, 고등학교 3년 , 대학교 4년의 과정을 거치게 되니 
대학 졸업 때까지의 기간은 우리나라보다 단축되는 셈이다.

공산주의 체제의 영향을 받은 몽골에서는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요원한 고등학교 의무교육이 몽골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사설 유치원도 있지만 유치원도 나라에서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수업료는 전혀 받지 않는다.
몽골 유치원 관련 포스트 : 너무나 귀여운 몽골 유치원 아이들





복도의 벽에는 우리나라처럼 학생들의 작품이나 학생들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간행물들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었고....




시원하고 활달한 필치로 쓰인 음표와 글씨들도 한눈에 확 들어왔다.




환경 게시물에는 아이들이 삐뚤빼뚤 써놓은 낙서가 여기저기 눈에 뜨였는데




손이 근질근질한 아이는 어느 나라에나 있기 마련인가 보다.




복도 한쪽 벽에는 이렇게 벽화가 그려져 있기도 했는데
초원에 뛰어노는 대형 말 그림을 보니  보니 "역시 몽골!"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교실로 들어가 보았더니 세상에! 교실이 온통 파란색 일색이다.
벽도 파랑, 천정도 파랑, 책상과 걸상도 온통 파랑.....역시 파란 하늘의 나라 몽골이다.




교실 넓이는 우리나라 교실 반 정도였는데 아이들의 책걸상 또한 너무나 작고 낮았다.
그 또한 얼마나 많은 세월이 이 책걸상을 거쳐 갔는지 낡아빠질대로 낡은 모습이었다.




컴퓨터, TV, 사물함....등 우리나라엔 보편적인 교실 집기들은 전혀 없고 달랑 칠판 하나 뿐인데
칠판에 쓰인 글씨를 자세히 보니 <금강 칠판> !
한국 자동차, 한국 물건이 몽골 전체를 평정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학교 교실에서 한국 물건을 만나니 그 또한 반가운 일이었다.




교실 뒤 환경판에는 알쏭달쏭한 몽골 고유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몽골 고유 문자의 가장 큰 특징은 세로쓰기이다.




오늘날 몽골에서는 몽골 전통 문자와 키릴 문자(Cyrillic alphabet)를 병행해서 쓰는데




소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몽골인지라 일상 생활 전반에서는 전통 문자 보다는 키릴 문자가 널리 쓰이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보니 칸마다 문이 없었고 작은 변기와 보통 변기가 바로 옆에 함께 있는 것이 눈에 뜨였는데
이는 초등에서 중등 과정이 한 학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인 듯....

학교장의 인도를 받아 도서실도 둘러보았는데 방학 중인데도 사서 교사가 나와 있었다.





열람실 없이 교실 반칸 정도인 도서실에는 책장 몇개 정도의 장서가 전부였고




도서실 가운데 책상 위에는 학생들의 교과서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설명을 들어본 즉, 아이들은 방학이 되면 학교에 책을 맡겨 두고 가는데 이 책은 다음 후배들에게 물려주게 된다고 한다.




몽골의 여름 방학은 6, 7, 8월 세달이나 되는데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기숙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도와 양을 치거나 말을 훈련시키거나 하며 자신들의 몫을 훌륭하게 해 낸다.
새학기는 서구와 마찬가지로 9월에 시작되며 9월 1일이면 모든 학교가 입학식을 거행한다고.....




교실과 도서실 등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건물 내에 위치한 체육관으로 향했다.
농구대, 탁구대, 평균대, 늑목 등 운동기구가 여기저기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체육관에서 내려다 보니 우리나라 운동장 정도의 너른 공간은 보이지 않았고 농구장 하나가 갖추어져 있을 뿐이었다.
학교만 나서면 다 초원이라 언제든지 달리고 뛸 수 있는 환경이라 운동장이 필요없었던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안내를 받아 둘러 본 학교의 교육 환경은 많이 열악해 보였고
컴퓨터는 물론 참고 도서도 너무 부족하여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부모는 어렵게 살아도 아이들만은 이런 환경을 벗어나 살기를 원하는 
몽골 가정의 높은 교육열로 보아 몽골의 앞날은 어둡지 않다는 것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비록 열악한 교육 환경 속에서 공부하고 있더라도 앞으로 몽골을 한걸음 앞으로 인도할 귀한 인재들이
이 학교에서도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해 보며 튜브 중학교의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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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그의 본명은 테무친이다.
칭기즈칸의 어머니 후엘룬 우진은 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타르가 약탈해 온 여자였다.
후엘룬은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이수게이의 형제들에게 발각되어 적장인 이수게이의 부인이 된다.

후엘룬은 잡혀와서 10 달 만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수게이는 고민 끝에 아이를 친자식으로 받아들이고 이름을 테무친이라 하였다.
자신이 타타르족의 테무친 우게의 목을 벤 날에 태어났으므로 적장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준 것이다.

뒤에 칸(Khan,왕이란 뜻)으로 추대된 그는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몽골족의 기상을 세계에 떨치고 1,227 년에 세상을 떠났다.





칭기즈칸.....몽골의 역사는 그 이름과 함께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몽골족 가운데는 몽골계 외에도 투르크나 탕구드계 등 여러 언어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3 세기 초, 테무친이 칭기즈칸에 추대되고 몽골 제국을 창건하면서 '칭기즈칸'과 '몽골'이 갖는 카리스마로 인해
다른 소수 부족의 언어와 의식은 모두 철저히 몽골에 동화되고 만다.
이로써 오늘날 몽골족 대부분이 칭기즈칸을 자신들의 시조로 생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비행기를 타고 몽골 울란바타르에 내리니 칭기즈칸 공항이라는 붉은 네온이 여행자를 맞아 준다.




공항에 한 벽면에는 어김없이 칭기즈칸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는 곳마다 관광 기념품점에는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상품들이 진열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칭기즈칸 열쇠 고리는 기본이고.....

화폐에도 색깔과 액면가만 다르지 칭기즈칸의 초상 일색이다.

(10,000 투그릭은 우리나라 화폐 가치로 10,000원 정도이다.

500 투그릭에도 칭기즈칸...1,000 투그릭....역시 칭기즈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상점이나 음식점의 가장 중심이 되는 벽면에도 이렇게 칭기즈칸의 초상이 붙어 있고





몽골 게르의 북쪽인 신성구역에는 어김없이 칭기즈칸의 초상화나 





칭기즈칸을 새긴 카페트가 떡하니 게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다.





울란바타르의 중심인 수흐바토르 광장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중심에도





칭기즈칸의 동상이 위엄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울란바타르 남쪽 산등성이에 새겨진 칭기즈칸의 대형 형상은 몽골 사람들의 자부심을 더욱 고취시켜주는데
이 형상은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한지 800년 되는 지난 2006년에 만들어졌다.




몽골 사람들은 최고라는 의미가 없는 곳에는 절대로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공항, 칭기즈칸 호텔, 칭기즈칸 보드카.....
각 분야에서 최고의 것이 아니면 절대로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사업을 번창시키기 위해서 칭기즈칸이란 명칭을 함부러 사용하는 사람은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테러 당할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칭기즈칸이 죽은지 780 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몽골에는 칭기즈칸이 살아 있음을 본다.
몽골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는 살아있는 칭기즈칸은 
각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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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매사냥법이 있었다고 하는데 몽골에는 독수리를 이용한 사냥법이 있다.
독수리는 사람보다 3배 이상의 시력을 가지고 있어서
수백미터 상공을 나르면서도 작은 목표물을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보다 몸집이 훨씬 큰 동물도 사냥할 수 있다고 한다.






몽골에서 말보다도 더 귀하게 여김받는 독수리는 4~5년 동안 훈련시킨 다음 사냥에 이용한다.

몽골인들은 이렇게 귀하게 훈련시킨 독수리를 3년 정도 사냥에 이용한 다음에는 살던 초원으로 날려 보넨다고 하는데
이는 자연에서 살던 독수리를 오랫동안 잡아 놓고 있으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몽골 사람들은 어깨에 독수리를 올려 놓으면 1년 내내 행운이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관광지에서는 관광객에게 돈을 받고 독수리를 관광객의 어깨에 올려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요금은 1달러나 1,000투그릭을 받는데 기분이 좋으면 1달러를 받고 여러 사람의 어깨에 올려주기도 한다.





관광객들은 이 아저씨가 낀 단단한 토시를 팔에 착용하고 독수리를 팔이나 어깨에 올려놓는 체험을 하게 된다.





독수리가 팔이나 어깨 위에서 발톱을 세우거나 날개를 벌리면 담이 센 남자들도 어깨를 움츠리고 겁에 질리곤 하는데

가끔 가다 독수리가 머리로 푸드덕거리며 기어 오르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모두가 도망가곤 한다.

독수리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푸드덕거릴 때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재미있는 모습들을 많이 담았지만
그 모습을 공개치 못하는게 정말 아쉽기만 하다.

독수리를 어깨에 올려서 행운이 찾아온다는건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여행지에서 이런 체험은 적은 돈 들여서 할 수 있는 즐거운 경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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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마지막 왕 '벅드 칸 겨울 궁전 박물관'에는 몽골인들의 다양한 풍습을 그린 세밀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아이락 축제'라는 그림에서는 몽골인들의 음주 문화가 세밀한 필치로 잘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축이 공간 가득히 늘어나기를 기원하는 제전인 '아이락 축제'는 
그 해 처음으로 말 젖을 짠 날이나 그 말 젖을 발효시켜 아이락을 만든 날 거행하는 축제이다.
아이락 축제를 그린 세밀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숫대야보다 큰 술잔에 아이락을 채워서
마시다 토하고 또 마시거나 술 마시는 사람의 양 귀를 잡고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아이락 축제의 진기한 음주 풍습이 그림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세밀화에 나타난 것 처럼 술 마실 때 사용된 엄청나게 큰 술잔은 실제로 몽골인들이 술 마실 때 사용했던 잔으로
'벅드칸 겨울 궁전 박물관'에 전시된 아이락 술잔은 크기가 거의 세숫대야 만큼이나 크다.



몽골의 대표적인 술, '아이락'은 '마유주(馬乳酒)'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말젖을 가죽 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저어서 만드는 아이락은 발효되면 보글보글 소리가 나며 기포가 솟아오르며 술이 된다.



우리나라 막걸리 같이 약간 비릿하고 시금털털한 맛을 가진 아이락은 알코올 성분이 그다지 높지 않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마시는데
몽골 사람들은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아이락은 술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아이락은 식사 대용으로도 쓰이는 몽골 최고의 영양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에는 한사람이 매일 3~5 리터의 아이락을 마시기도 하고 허약한 아이나 중환자에게는 영양식처럼 아이락을 마시게 하기도 한다. 
몽골에서 아이락은 행복을 상징하며 흰색의 종교적 의미 때문에 축제나 기념일에는 꼭 사용되는 대표적인 전통술이다.



음주는 몽골의 국가적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 시대 이후부터 40년전까지는 음주가 엄격히 통제되었으나 
1959년 처음으로 보드카를 만드는 증류소가 세워졌고 '절제된 소비'를 권장하는 홍보운동이 시작되었다.
몽골의 젊은이들에게 음주의 이점(?)을 알리기 시작한 결과 술의 소비와 함께 국가 재원 또한 급증하였다.
몽골인은 술과 함께 산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통계에 따르면 몽골인은 남녀 구분없이 연간 26리터 이상의 보드카를 마신다고 한다.


 

알코올 농도 39도가 넘는 독주 보드카를 물 마시듯 마셔대는 몽골인은 늘 술에 취해 있기가 일쑤이다.
기뻐도 술, 슬퍼도 술, 기분 나빠도 술....집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직장 내에서도 술을 마신다.

몽골인들은 손님을 맞이할 때도 술로 맞이하기 때문에 공항에서부터 벌어진 술 파티가 끝이 날 줄 모르고
손님이 돌아 가거나 먼 길을 떠날 때에도 어김없이 술판을 벌여야 그 사람을 놓아보내준다.
떠나는 손님에게도 그의 안전을 빌기 위해 술 마시기 전에 동서남북을 향해 고수레를 한 후 술잔을 주고 받는데
여행에 앞서 마시는 세잔의 술은 행운과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에 반드시 의무적으로 세잔은 마셔야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몽골을 사업이나 방문 목적으로 들리는 사람들은 몽골인들의 매일 계속되는 술 대접으로 인해 취생몽사하다 돌아오기가 다반사이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만취하는 것이 예의인데 취하지 않으면 술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여 계속 술을 먹인다.
특히 남의 대접을 받았을 때에는 주인의 호의에 답하는 듯으로 만취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취해서 저지르게 되는 주사에 대해서도 아주 관대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급한 몽골인들은 술마시다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금방 주먹질과 욕설이 난무하며 치고 받고....난투극이 벌어지는데 술이 다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이 만취하는 풍습은 칭기즈칸 시대로 올라가는데 다른 종족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취한 척하고 있다가 주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의 집을 방문해서 술을 마실 때에는 손님이 주인을 해치지 않을테니 안심하라는 표시로 만취하는 습관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에서 '만취는 영원한 우정'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오른쪽 목을 튕기기도 하는데 이는 '완전 필름이 끊어지도록 마셨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어느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모자라 쉽게 술에 취하는 것으로 보고됐다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몽골인들은 음주에 의해 쉽게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몽골의 모든 범죄의 80%이 술에 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몽골의 매월 1일은 국가에서 정한 '금주일'이다.
이날은 몽골의 모든 술집은 영업을 하지 않고 다 문을 닫아야 한다.
국민들의 과다한 음주로 인해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니 한달 중에 하루 만이라도 술을 마시지 말자고 정해 놓은 날이란다.
금주일에 본 몽골 시내의 유명한 Pub Bar 의 풍경은 실외 의자까지 모두 홀 안에 쌓아두어 마치 폐업한 가게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나 술을 좋아하는 몽골인들이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딜 수가 있을까....
이와 같이 앞에서 단속반이 오는지 웨이터를 문 앞에 세워두고 몰래 몰래 지하에서 영업을 하는 술집도 있다는 사실....



강남의 어느 바처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어느 Lounge Bar 안에는 금주일에도 몰래 한잔 하러 오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몽골의 젊은이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처음에는 맥주로 시작하지만.....
맥주로 인해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알코올 함유량이 39도나 되는 보드카병을 쉴 새 없이 비우고 폭탄주도 서스럼없이 들이킨다.



몽골 젊은이들이 최후에 마시는 술은 항상 칭기즈칸 보드카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의 술이지만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칸 보드카를 비워야 끝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오늘도 몽골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히며 크게 외친다.
"토토이(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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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마지막 칸인 벅드 칸의 겨울 궁전 박물관에는
벅드 칸 왕과 왕비가 실제로 사용했던 많은 유품들이 남아 있는데
각국 사신들로부터 선물받은 희귀 동물의 박제, 보석, 도자기 등의 진귀한 유물들이 많아서 볼거리를 준다.
그중에서도 전시실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세밀화는 많은 유물로 인해 스쳐지나가기 쉬운데
이 세밀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몽골인들의 주거 방법, 복식, 생활상들을 그대로 짐작할 수 있다.


몽골 세밀화는 이라크에서 발달한 모술파 세밀화의 영향을 받은 지극히 섬세한 필치가 인상적인데
이 박물관에는 B. Sharav (1869~1939 )라는 작가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아이락 축제', '여름 궁전', '겨울 궁전'같은 전시 작품의 깨알 같이 그려놓은 세밀화에는
궁전에서의 외국 사신 접견, 선물 행렬, 병사들의 체력 단련, 싸움에 출정하는 남자들을 배웅하는 여자들,
라마 사원에서의 예불, 라마승들의 토론,  게르 짓기, 말젖짜기, 낙타젖짜기, 소들의 싸움, 말똥으로 고기 굽기,
양털 고르기, 가축 잡기, 말똥 줍기, 아이락 축제의 산해진미,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
토할 때까지 술 마시기, 아동 음주, 술 마신 후의 폭력적인 행동, 여성들간의 머리채를 쥔 싸움.....등
당시 몽골인들의 생활 모습이 너무나 세밀하고도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충격적인 성 묘사가 그림 군데 군데에 숨겨져 있는데
간통녀로 짐작되는 여자를 재판하는 무당, 그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여자들, 
성행위중인 남녀를 죽이려고 다가가는 남자,  음주 후의 변태 행동, 성기 노출, 남녀간 성행위,
호모 섹스, 레즈비언, 성도착증을 비롯하여 눈을 의심케 하는 가학적인 성기 단련 장면까지.....
19금으로 분류할 수 밖에 없는 묘사가 군데 군데에 숨어 있어 보는 이들의 얼굴을 붉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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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과 미소가 저절로 나오는 몽골 세밀화의 해학의 세계로 여러분들을 살짝 초대하오니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라시길 바라며......^^

 

아이락(마유주) 축제 / B. Sharav ( 1869~1939 )





















여름 궁전 / B. Sharav ( 1869~1939 )




겨울 궁전 / B. Sharav (1869~1939 )












(벅드칸 궁전의 입장료는 2,500 투그릭인데 사진 촬영비는 입장료의 4 배가 되는 10,000 투그릭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엄청나게 비싼 사진 촬영비를 지불하고 찍은 사진들이지만
복원품인 '아이락 축제'그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 년 정도 된 그림이라 그림이 많이 탈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리 속에 든 그림을 흐린 조명하에서 찍었기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흔들린 것을 널리 이해 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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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서쪽에 위치한 바얀골 지역(Bayangol District) 적십자 지부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말박물관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차를 돌려 말 박물관으로 향한다.


차에서 내려 앞을 보니 엄청나게 큰 말동상이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건물 바로 아래 선 사람과 비교해보면 말 동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실 것이다.


어마어마한 말 동상이 방문자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이 말 박물관은 2009년 5월에 개관했는데
50명의 독일, 중국의 기술자들이 힘을 합친 이 공사에는 무려 250톤의 철이 소요되었다고...


세계 제일의 크기를 자랑하는 말 동상의 높이는 무려 40m 인데 말의 높이만 해도 30m에 달한다고 한다.


동상이 서 있는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아직 기반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주변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거대한 정문과 진입로도 아직 공사중이라 주변 경관은 다소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으리으리한 로비로 들어서니 엄청난 크기의 봉 위에 채찍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칭기즈칸이 15세 때에 황금 채찍을 찾은 장소에 칭기즈칸과 그의 말 동상을 세웠다고 하는데 봉 위에 놓인 채찍은 아마 재현품인 듯.....


말에 대한 다른 전시관이 있나 싶어 물어보니 어이없게도 1층에 있는 전시품은 이게 전부라고 한다.
말 박물관이라서 여러 종류의 말이나 말 관련 유적 및 전시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엄청난 크기의 말 동상이 전부라고 하니 약간은 실망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 말 박물관의 관람 포인트는 바로 '말 속으로 들어가 본다'는 것이다.
아랫층 로비에서  말 꼬리를 통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말의 뱃속으로 들어간 후 
말 뱃속에 있는 영상실에서 3분 정도의 말 박물관 건립 과정에 대한 영상물을 감상하고 다시 계단을 통해 
말머리로 올라가게 되면 말머리 끝 부분에 아주 협소하긴 하지만 전망대가 위치해 있어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사진에서 말 갈기 부분에 사람 세명이 서 있는 것을 점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말 동상과 그 크기가 비교된다.


말 뱃속에 있는 영상실은 한 십여평 규모로 47인치 정도의 TV가 낮은 위치에 앉아 있어서
의자에 앉으면 뒤의 사람은 화면이 보이지도 않는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스하고 바로 전망대로 올라간다.
 


영상실을 나와 계단을 통해 전망대로 올라가 뒤로 돌아보니 헉....위엄에 가득 찬 칭기즈칸의 얼굴이 노려보고 있다.


얼마나 크기가 큰지 아무리 뒤로 물러서도 카메라에 반도 채 잡히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크기의 동상을 바로 앞에서 찍는건 광각 렌즈로도 안 되고 어안 렌즈라야 제대로 될까....?


할수 없이 부분 부분 닥치는 대로 카메라에 남아 보았으니 보시는 분들이 머리 속에서 이미지를 조합하시기 부탁드린다.


칭기즈칸의 왼쪽 팔뚝 아래에 늘어선 게르들이 이채롭다.


앞으로 게르 200여채를 주위에 더 세워 이곳을 관광의 기지로 삼을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주변이 많이 어설픈지라 잘 정비된 관광지로 자리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 하다.


칭기즈칸 말 박물관.....전시품은 없고 겉모습만 웅장한 박물관이긴 하지만
세계 최고의 말 동상이 있는 박물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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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타르에서 머무는 동안 밤의 몽골을 느껴보기 위해 여기저기 다녀보았는데
다운타운 한가운데 엄청나게 큰 게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몽골에서는 이와 같은 전통식 이동주택인 게르가 시내 한복판에도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울란바타르 시민의 거의 반 정도가 게르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전 포스트  아파트와 섞여 있는 몽골 천막집 게르 에서 자세히 말씀드린바 있다.



가까이 가보니 이 엄청난 규모의 게르는 다름아닌 갤러리였다.


'Welcome to our Gallery' 라고 쓰여진 게르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보았다.


아.....! 소박하기 그지없는 외관에 비해 내부는 엄청나게 넓었고 분위기 또한 아주 아늑했다.


넓기만 한게 아니라 유니(uni,나무기둥 윗부분)가 2중으로 되어 있고
보통은 2개 뿐인 게르의 중심 기둥 바가나(bagana)도 4개로써  
천정까지의 높이도 엄청 높은 거의 호화 주택 수준의 게르였다. 


지붕의 둥근 천정인 터너(toono)도 엄청나게 큰 사이즈인데 한쪽 부분은 열어두어서 컴컴한 밤 하늘이 그대로 드러났다.


벽에는 소품을 비롯해서 상당한 크기까지 많은 미술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몽골의 풍속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림 아래에 쓰여진 글자에 눈이 갔는데 이 글자는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몽골의 전통 문자로서 한자처럼 위에서 아래로 쓰는게 특징이다.
몽골은 이렇게 몽골 전통 글자를 쓰다가 공산화 이후 현재는 키릴문자(Cyrillic=러시아어 표기에 쓰임)을 차용하여 쓰고 있다.


그림 중에는 말을 형상화한 추상적인 그림으로부터  


사실적인 그림까지 말 그림이 많이 등장하는데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운다고 할만큼 몽골인들의 삶은 말과 깊이 관련되어 있고 없어서는 안될 최고의 교통 수단이다.


몽골의 파란 하늘 아래 낙타의 무리가 떼지어가는 아주 시원한 그림도 있는데 


아라비아 낙타가 혹이 하나인데 반해 고비사막의 낙타는 혹이 두개이라서 혹 속의 지방질로 열악한 환경을 잘 견딜 수 있다.


 '루브즈'라는 방한모를 쓴 남자가 연주하는 악기는 몽골의 대표적인 악기 '모린호르(morin khuur)로써
 악기의 머리에 말머리를 조각했을 뿐 아니라 말총을 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마두금(馬頭琴)이라고 부른다.
모습과 소리는 우리나라 해금과 흡사하여 애절한 느낌이 든다.


여인네들이 모여 앉아 양털을 두들겨 손질하고 있는데 양털은 옷은 물론이고 양탄자에서 게르를 덮는 직물까지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는 필수품이다.


독수리를 한팔에 앉히고 말을 달리는 그림에서는 유라시아를 평정한 몽골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몽골의 관광지에 가면 이렇게 독수리를 한팔에 앉히고 사진을 찍는 경험도 해볼 수가 있다.


아주 큰 사이즈로 그려진 몽골 씨름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온다.
체급 구분과 경기 시간 제한이 없는 몽골 씨름은 상대방의 무릎이나 팔꿈치등을 먼저 땅에 닿게 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데
최후의 승자는 나담 축제(7월 11~13일)기간 중 시합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몽골 대통령에게 푸짐한 선물을 받는다.

 선수들은 시합이 개시되기 전이나 승리하고 나서는 이와 같이 '잔진 말드가이'라는 모자를 쓰고
'가루다(전설 속의 동쪽 새)' 모형 주위를 돌며 날갯짓을 흉내낸다.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칭호는 매, 코끼리, 사자,거인인데 '거인'은 나담 축제 연승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호이다.


아이는 몽골인들에게 신앙과도 같은 존재이다.
태아숭배사상이라고 할 정도로 아이는 귀하게 대접받으며 임산부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용서받는다.
교육열도 엄청 높아서 교육을 국가 정책의 우선 과제로 생각하며 
몽골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몽골 민속의상은 지금도 남녀 구분이 없이 언제나 애용되는 옷이다.
 델(deel)이라고 부르는 이 옷은 위아래가 하나로 된 소매가 달린 헐렁한 가운인데
칼라가 있고 앞부분이 크게 겹쳐져 허리띠로 졸라매게 되어 있다.
몽골에 살고 있는 각 민족은 델의 재단, 색깔, 장식품으로 자기들의 민족을 구분한다.


모자는 남자 여자 모두 사용하며, 과거에는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기 위하여 모자를 썼다.
몽골인들은 모자를 아주 귀하게 여겨 모자는 반드시 허리띠 윗부분이나 선반 위에 놓아야 하는데
모자를 발로 밟으면 그것은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몽골에서 패션의 완성은 모자이다.
모자는 전통의 의미와 실용적인 목적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몽골사람들은 말드가이(모자)를 쓰지 않으면 복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몽골을 알리는 포스터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머리에 독수리 날개를 단 형상의 이 머리 모양은
몽골인의 난로를 지킨다는 독수리 설화처럼 난로를 지키는 여성의 임무를 표현한 것이라고....


소녀들은 꼭대기에 단추 모양의 보석 장식이 달린 '토르촉' 모자를 쓴다.
모자 꼭대기에서 길게 늘여뜨린 끈이 바람에 날리게 하는데
돈 많은 여자들은 여기다 진주를 매달기도 한다.


이런 모자를 보면 우리네 전통 모자인 '남바위'가 생각난다.
고려말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원나라의 풍습이 전해져 우리의 전통 복식에도 몽골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남바위나 족두리, 원삼을 비롯하여 연지 곤지, 은장도 등도 그 기원이 몽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몽골 사람들은 검소한 유목민의 평소 생활을 보상받기 위해 멋지게 입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난폭한 기후와 거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옷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중세의 여행객들은 몽골사람들이 모든 계절에 적합하고 실용성까지 갖춘 옷을 만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했다.
 


갤러리 안의 그림을 다 돌아본 후 몽골 전통 의상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몽골 소녀 앞에 서서 눈을 맞추어 보았다.
눈이 있는 부분을 과감하게 크롭한 구도로 인해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드러내 표현한 것보다 더 과감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소녀의 모습은 내 기억에 아주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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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사람들은 참 감성이 풍부하다.
그들은 사물을 보고 느낀 감정을 바로 시(詩)로 표현할 수 있는 놀라운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어른이나 아이나 남의 시를 낭송하기도 하지만 주로 자기가 지은 시를 낭송하는 경우가 많은데
운이 딱딱 들어맞는 멋진 시를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장기자랑을 하라고 하면
TV에 나오는 유명 가수의 최신곡을 몸을 흔들며 부르는데 반해
몽골 아이들에게 장기 자랑을 하라고 시키니 
다섯명 중에 네명이 시를 암송하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놀란 기억이 있다.



살고 있는 환경은 거칠고 척박하지만 너무나 부드러운 감성을 가진 몽골인들의 음악 또한 듣는이의 가슴을 파고 드는데
몽골을 대표하는 음악이라고 하면 먼저 '흐미'라는 뱃속 저 깊은 곳에서 나는 듯한 노래와 마두금이라고 하는 '모린호르'가 떠올려진다.



몽골을 방문했을 때에 운 좋게도 흐미와 모린호르 연주를 두번이나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한번은 토르고 패션쇼 오프닝 민속 공연에서 들은 음악이었고  또 한번은 울란바타르 인근 투브(Tov)지역을 방문했을 때였다.



투브에서 모린호르 연주를 준비한 아이들은 13세의 인근 지역 중학생이었는데
연전에 한국에 와서 SBS 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한 적이 있는 아이들이란다.



흐미( 후미,
회메이, Khoomei ) 는 배와 가슴, 목, 심지어는 머리까지 사용하여 발성하는 몽골인 특유의 전통 음악이다. 

동영상을 보면 확인하시겠지만 도대체 13살된 어린 소년의 목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믿겨지지가 않는다.

흐미 한곡을 부르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만큼 힘든다고 하는데
부르는 이의 혼신의 힘과 기가 다 표출되는 듯 콘트라베이스의 음색처럼 굵고 깊은 소리로 울리는 흐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수쳔년 동안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영혼이 깨어나 수천 마리 말과 함께 초원으로 한없이 달려나가는 듯한 착각마져 든다.


 몽골 칸-울지구에서 선물받은 모형 모린호르

흐미와 함께 연주되는 이 악기는 '모린호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말머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마두금(馬頭琴)이라고 불리우는 이 악기는
실제로 말총을 현으로 사용해서 만들었는데 활로 현을 문질러서 소리를 내고 두중의 강약을 서로 다르게 해서 연주하는 악기이다.
음색은 우리나라의 해금과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몽골인들은 애절한 모린호르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면 두고온 초원의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심지어는 말이 젖이 잘 나지 않을 때도 어미 말 옆에서 모린호르를 연주하기도 한다.
한시간 정도 모린호르를 연주하면 신기하게도 어미말에게서 젖이 돌아 새끼에게 젖을 먹일 수가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몽골 관광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편곡된 흐미도 등장했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몽돌에서도 전통적인 음악을 전수하려는 젊은이는 그다지 찾기 어렵다고 한다.
흐미를 전수 받으려는 젊은이가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흐미가 그 원형을 잃고 사라질까봐 걱정하고 있는데
이는 흐미가 너무 배우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전수받아 보아야 그 재능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든 형편이라
청년들은 모두가 보다 실질적인 직업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전통 음악을 전수받고 있는 이  두 아이들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지며
그들이 가진 재능을 더욱 잘 살려 몽골의 귀한 전통을 잘 이어나가는 재목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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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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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나 중국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한류 바람은 몽골도 예외가 아닌데
몽골에 부는 한류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드라마나 가수 등 연예 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0년 자유화 이후 시장 경제가 도입이 되면서부터 한국을 경제 모델로 삼은 몽골인지라
몽골 도처에서 한국과 관련된 상품 광고와 간판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수흐바타르 광장 바로 앞에서 본 대한항공의 광고에는 우리나라 여자 아이와 몽골 남자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길에서 만난 한국 타이어 광고는가 눈에 번쩍 뜨이고


기아 자동차의 광고도 반갑기 짝이 없다.


한국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몽골에 오는지 알게 해주는 한글 광고도 눈길을 끈다.
차가말굽버섯은 몽골의 2,000 이상 산악지역의 자작나무에서 자라는 자연산 버섯이라 우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버섯.


간단 사원 앞 동네의 서울 플라자는 백화점인 것 같고.....


서울 마트에는 몽골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산 식품과 공산품이 주를 이룬다.


길에서 만난 홍길동이란 한국 음식점 이름은 어떤 음식을 팔까...궁금하기도 하다.

 
몽골에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중고차가 다 있는데  어떤 버스는 서울의 노선과 번호판을 버젓이 붙이고 시내를 질주한다.

관련 포스트 : 몽골을 주름잡는 한국산 중고차


어떤 승합차는 아직도 한국에 있을 당시의 학원이거나 유치원 이름을 그대로 붙여놓고 있다.


이는 새로 도색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중고차일지언정 차가 한국산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버스 옆에 붙은 LG 마크와 수퍼 타이 광고도 반가움에 한번 더 쳐다보게 한다.


2080 치약 광고를 붙인 트럭이 휙 지나간다...어....여기는 몽골이었지...


아름다워지기 위한 소망은 몽골도 마찬가지...한국산 화장품은 최고의 인기 제품이다.


몽골에서 가장 화려한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는 대장금의 한상궁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우리나라 굴지의 화장품 브랜드의 설화* 화장품이 몽골에서는 월화수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아래에 쓰인 자음 유액...이런 문구는 한글이 그대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는 현대 엘리베이터이고...


수리 중인 에스컬레이터 입구 저지선 테이프에도 안전제일이라고 쓰여 있어 실소를 머금게 한다.


한국 기업의 몽골 진출은 다양하기 그지없는데 심지어 이렇게 의료 부분에 진출한 사례도 보이며


몽골의 울란바타르 대학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학으로 한국어를 제 2 외국어로 채택하는 등
한국에 가지 않고도 한국식 교육과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곳이라 몽골 대학생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학교이다.


여행 중 물과 간식을 사기 위해 들린 소규모 할인점의 진열대에는 태반이 한국 상품으로 가득 차 있는 놀라운 광경을 접할 수 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한국 상품 전문 매장이 아닌 몽골인 대상의 할인점인데도 비빔면, 김치면, 진라면, 육개장......등이 빼곡이 차 있고


한국어와 몽골어가 같이 쓰여진 마요네스.....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튀김을 맛보라는 튀김가루....


매운 김치 등.....한국 상품이 진열대의 반을 차지한다.


그런데 가격이 정말 만만치 않다.
 몽골의 화폐 단위는 투그리크(Tugruk)로써 US 1$ = 1170 tg 정도이니 거의 우리나라 돈과 가치가 비슷하다.
그런데 오예스 한통에 4,000 투그릭이고 후렌치 파이가 3520 투그릭이니 우리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비싼 정도...
대학 나온 일반 회사원의 한달 봉급이 30만원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싼 물가인 것이다.


몽골 사람들도 뻥튀기를 정말 좋아하나보다. 맥주나 몽골 위스키가 나오면 반드시 뻥튀기가 안주로 나오는 점도 우리와 비슷한 점이다.


호텔에서 TV를 트니 TV 홈쇼핑에는 한국 홈쇼핑을 몽골어로 녹화 더빙만 한채로 하루 종일 방영하고 있고
 사이사이에는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쉴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한국에서 종영되기가 무섭게 바로 몽골 TV에 그대로 방영되곤 한다.


노래방 뿐 아니라 식사만 취급하는 일반 레스토랑에도 노래방 기계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 많은데
비치되어 있는 책은 놀랍게도 한국 노래방에 비치된 책 그대로이다.

몽골의 대학생 적십자 단원들은 한국 최신 가요와 댄스를 그대로 다 외우고 있어 필자를 놀라게 했는데
한국에서 간 일행들이 도리어 노래를 몰라서 버벅거리면 도리어 가사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몽골의 젊은이들은 한국 문화와 한국 상품, 한국의 연예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을 방문하거나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을 꿈으로 가진 사람들이 많다.
가는 곳 마다 만나게 되는 이런 한류 열풍의 이면엔 사실 어두운 부분도 있긴 하지만
몽골을 뒤덮고 있는 자랑스런 한류의 물결이 초원의 불길처럼 크게 번져 나가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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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를 방문하시는 분들께 꼭 관람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공연이 있는데
바로 토르고(Torgo) 패션쇼이다.
몽골 전통 민속 음악과 민속 퍼포먼스와 함께 아름다운 몽골 전통 의상을 소개하는 이 패션쇼는
우리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몽골 전통 의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한지를 알게 해 준다.

매일 6시에 공연이 열리는 토르고의 일층에는 각가지 민속 의상과 민속 원단을 전시해 두었는데
토르고(Torgo)라는 몽골어가 '비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만큼
모든 옷이 실크 원단으로 되어 극도로 화려하다.



함께 공연되는 몽골 전통 음악과 공연은 다음에 다시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전통적인 몽골 의상과 더불어 현대에 맞게 디자인한 신개념 퓨전 의상까지...멋진 몽골의상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플래쉬가 없어서 ISO를 1600으로 올려서 찍다 보니 사진 상태가 좋지 않군요.....이해하시길 바라며....)

남녀가 입고나온 이런 몽골 전통 의상은 델(deel)이라고 한다.
부스라는 허리띠로 졸라매어 옷의 길이와 폭을 조절하는데 
여성의 경우에는 비단천에 화려하게 수놓은 허리띠를 매기도 한다.


몽골에 살고 있는 각 민족은 델의 재단, 색깔, 장식품으로 자기들의 민족을 구분한다.


남자 모델이 신은 고무신처럼 코가 살짝 들려진 신발은 고탈(Gutul)이라고 한다 .


이 커플은 마치 칸(Khan) 부부처럼 당당하고 화려한데 몽골에서 모든 패션의 완성은 모자이다.
모자는 남자 여자 모두 사용하며 과거에는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기 위하여 모자를 썼다.


모자는 전통의 의미와 실용적인 목적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몽골사람들은 모자(말드가이)를 쓰지 않으면 복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몽골인들은 모자를 아주 귀하게 여겨 모자는 반드시 허리띠 윗부분이나 선반 위에 놓아야 하는데
모자를 발로 밟으면 그것은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녀들은 꼭대기에 단추 모양의 보석 장식이 달린 토르촉 모자를 쓴다.


보통 모자 꼭대기에서 길게 늘여뜨린 끈이 바람에 날리게 하는데


돈 많은 여자들은 여기다 진주를 매달기도 한다.


이런 모자를 보면 우리네 전통 모자인 '남바위'가 생각난다.
고려말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원나라의 풍습이 전해져 우리의 전통 복식에도 몽골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남바위나 족두리, 원삼을 비롯하여 연지 곤지, 은장도 등도 그 기원이 몽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동물의 털로 만들어진 모자는 지금도 도시 사람에게 많은 인기가 있으며 


검은 담비로 만들어진 모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몽골을 알리는 포스터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머리에 독수리 날개를 단 형상의 이 머리 모양은
몽골인의 난로를 지킨다는 독수리 설화처럼 난로를 지키는 여성의 임무를 표현한 것이라고....


몽골 사람들은 검소한 유목민의 평소 생활을 보상받기 위해 멋지게 입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난폭한 기후와 거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옷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중세의 여행객들은 몽골사람들이 모든 계절에 적합하고 실용성까지 갖춘 옷을 만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했다.


전통 의상을 소개하는 패션쇼가 끝나면 전통을 현대에 맞게 재창조한 퓨전 의상들을 선보인다.


지극히 몽골스러우면서도 아주 화려하기 이를데 없고 감각적인 의상들을 해설없이 눈요기 하시길.....























패션쇼가 끝난 후에 잠시 모델들과 기념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다....하고 모델들의 포트레이트를 몇 장 찍었다.


모델들은 아주 친절하게 포즈를 취해 주었으므로 짧은 시간이나마 정신없이 몇장을 찍을 수 있었다.


아......그리고 미인 모델만 보아서 눈이 심드렁해진 여성 팬들을 위하여......


카리스마 돋보이는 남성 모델샷도 서비스로 함께 올려드린다.


패션쇼의 제일 마지막에 가면을 쓰고 나왔던 칸(khan).


가면을 벗으니.....185가 넘는 훤칠한 키에 잘 어울리는 멋진 훈남이다.


이 훈남이랑 기념 사진 한번 찍으려고 여성 관람객들이 줄을 섰다는 전설이.....^^;;


전통 의상 패션쇼 소개를 간략하게(?) 마치면서.....개인적으로 모델 중 베스트를 꼽아 보았는데
3위에는 정열적인 의상에 어울리게 환한 미소를 띄어주던 이 모델....


2위에는 특히 오묘한 눈빛으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끌던 모델.


하리수를 살포시 닮은 미녀 모델은 그 세련된 무대 매너가 가장 기억에 남아서 베스트 1위로 선정해 보았다.

여러분, 몽골 전통 의상과 몽골 모델들이 맘에 드셨나요?
사진으로나마 함께 패션쇼를 감상하신 여러분들의 눈도 필자와 마찬가지로 즐거우셨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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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인근 지역을 여행하며 이동하는 동안에는 차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과 간간히 나타나는 게르와 말, 양떼들은
여행자의 시선을 차창에 고정시키고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시내나 초원 가운데로 난 길을 갈 때나 필자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인적없는 길을 따라 끝없이 늘어서 있는 전봇대였다.





몽골에서 전봇대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광활한 초원에서 길을 찾지 못할 때 전봇대를 이정표로 해서 목적지를 찾아가곤 한다니 몽골 전봇대는 일석이조의 고마운 존재이다.





그런데 전봇대가 서 있는 모양은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몽골 전봇대 대부분은 그 모양이 A 자형인 것이 특징이다.





전봇개 바로 앞에 서서 찍어보았는데 이렇듯 절묘한 A자형 일수가...!





울란바타르 시내에는 더러 우리네 것과 같이 콘크리트 전봇대가 서 있는 곳이 많지만....





조금만 외곽지로 나가면 어김없이 나무 전봇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근데 자세히 보면 전봇대의 주지지대가 땅에 박힌 콘크리트 기둥에 단단히 묶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땅에 박혀있는 전봇대 나무가 썩어서 내려앉는걸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





그럼 모두 다 콘크리트로 전봇대를 하면 될텐데....
나무가 별로 없는 초원지대조차 이렇게 나무 전봇대를 박아놓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A자형 전봇대는 옆으로는 튼튼해 보이는데 그대신 앞으로는 넘어지지 않을까도 의문 가는 점 중에 하나였다.
변압기가 올려진 더블 A 자 모양의 이런 전봇대는 정말 튼튼해 보이는데.....

몽골의 특이한 모양의 전봇대는 호기심 어린 이방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모양의 전봇대가 있을까...? 아주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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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침략이나 점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상 자부하는 일본에게는 사실은 쓰라린 추억이 있다.
1274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서 대마도와 이끼섬이 공격을 받아 초토화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의 현장 코모다하마 신사는 
카미카자 전망대에서 출발한 차는 섬을 가로 질러 반대편 해안의 포구 마을 코모다(小茂田)에 있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에서 해류를 따라 오면 저절로 도착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대륙에서 대마도로 배가 다니는 뱃길이 열렸던 곳이다.

 

이 곳은 또한 고려말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 점령을 위해 처음 상륙한 장소이기도 한데 거기에 코모다하마(小茂田濱) 신사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일본의 신사는 도리이(鳥居)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신사
앞에 '天'이라는 글자 모양으로 서 있는 문을 말한다.
신의 사신이라 믿는 새가 쉬어가도록 한다고 해서 도리이(鳥居,도리이는 '새'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장대 또는 솟대로 표현되는데 솟대 위에 새 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우리의 전통 신앙과도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도리이는 흔히 붉은색으로 칠을 하여 신사의 신성한 공간과 평범한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또 산이나 바위 같은 곳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모양에는 수많은 변형이 있지만, 2개의 원통형 수직기둥 위에 직사각형의 들보가 가로로 2개 얹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첫번째 가로대는 기둥의 양쪽 끝을 지나 바깥까지 뻗어 있고 두번째 가로대는 그보다 약간 아래쪽에 걸쳐져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불교와 함께 일본에 전래된 인도의 아치형 관문인 '도라나'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학자들은 만주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 대문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코모다하마 신사의 도리이는 흰색에 붉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으며 우리들이 흔히 '귀신 안테나'라고 부르는 신을 부르는 대나무가 양 쪽에 세워져 있고 도리이 아래의 굵은 동아줄에는 하얀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금줄과 같은 용도로 쓰여 그 곳이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듯 하다.

 

 


이곳은 일본이 외세에게 처음으로 점령을 당한 곳이다.
합포(마산)를 출발한 고려와 몽골의 연합 일본 정벌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 5일 오후 4시경 하대마도의 사스우라에 상륙했는데 바로 오늘날의 코모다(小茂田)이다. 팔번우동기(八幡愚童記)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 바다를 뒤덮은 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무사였다.

 

 

전투는 10월 6일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대마도의 일만 병사들은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전원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시 도주 소오 스케쿠니는 전쟁 후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그 싸움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한다.
 
  


려몽연합군은 대마도와 이끼섬을 단숨에 초토화시킨 후
곧장 큐슈의 후쿠오카 상륙을 개시하기 위해 후쿠오카 앞 바다에 진을 쳤다. 그런데 태풍이 올 계절이 아닌데도 큰 태풍이 쯔시마해협을 덮쳐 려몽 연합군은 싸워보지도 못한 체 태풍에 큰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이에 이 태풍을 신이 준 바람(神風)이라고 여기고 행운을 주는 좋은 길상의 의미로 새기고 있다.

신풍(神風).....가미카제... 돌아올 수 없는 연료만 채운 일인승 경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연합군의 함선으로 돌진하여 자폭하던 특공대 가미카제. 바로 이 려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에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실은 이곳은 한국과는 또 다른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1419년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상륙하여 점령하고 약 2주간 머문 곳인데도 어디에도 이에 관한 흔적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에 관한 흔적을 없앤 것은 아닐까...생각이 들었다.

 

 

신사의 들어가는 입구에는 같은 도리이가 또 서 있었고 가운데에도 역시 코모다하마 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신사 앞의 석등은 지붕이 투구처럼 볼록하고 끝 귀가 말려올라간 일본 석등의 전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의 신사 건물의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의 8작 지붕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어 있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즉 가로는 짧고 세로는 긴 직사각형 형태의 배례전이 신을 모신 본전과 연결된 형태의 모습이다. 신사 건물에서는 항상 앞쪽이 배례전인데 대개 앞 뒤로 길기 때문에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배례전 안쪽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별개의 건물인 본전이 있는데 대체로 본전은 배례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하고 있다. 본전에는 그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이 모셔져 있는데 이 신물은 신의 현신(現身)으로 생각되어 누구도 볼 수 없는 신사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의 지붕 장식도 역시 도리이의 형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신사 문 앞마다 우리나라의 금줄처럼 굵게 꼰 새끼줄과 하얀 종이가 함께 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사에 들르는 일본인은 신사 앞에서 반드시 손과 입을 씻은 다음 배례전 안의 복전함에다 돈을 넣고 배례전 앞에 늘어진 천을 흔들어 목탁모양의 방울(나무나 청동으로  따위로 만듬)을 친다. 방울을 치는 것은 내 정성을 바치니 봐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죄와 부정을 씻어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두번 합장 배례하고 두번 박수를 친다.

그리고 신사를 들어갈 때는 가운데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며 나올 때는 오른 쪽으로 나오는데 이 풍속은 우리나라에서 사찰의 대웅전에 들어갈 때의 방식과 비슷하다.

 

 

신사의 내부는 경배를 올리기 위한 배례전과 신을 모신 본전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본전으로 가는 통로가 보인다.

 

 

코모다마하 신사 내부에는 몽골군과의 전투도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는데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를 받들고 있으며 매년 11월에 위령제를 지낸다. 코모다마하 신사는 동경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신사 앞에 놓여 있는 포탄에는 명치 30년(1897년)의 전리품이라고 쓰여져 있다. 

 

 

신사 배례전 바로 옆에는 원구 칠백년 평화지비(元寇七百年平和之碑)가 서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듯 비의 맨 위에는 비둘기가 새겨져 있었는데
우리가 왜구(倭寇)라고 하듯이 그들도 원구(元寇)라고 부르는 걸 보니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이 때 寇라는 한자는 '도둑'이라는 뜻...

 

 

신사 마당 옆에는 복전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길쭉한 나무판에 빼곡이 적혀 있었다. 일만엔, 오천엔,삼천엔,이천엔......거기다 방어 한 마리,과자, 청주 두병.... 이런 품목도 눈에 뜨이는데 복전의 액수가 많을수록 이름이 상단에 붙어져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2003년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30% 가운데 51%가 신도, 그리고 48%가 불교, 그리고 1%도 안되는 나머지가 기독교등으로 되어 있다.
 

 

신도(神道)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 전쟁 영웅은 물론 각종 귀신이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 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 것으로 여겨지면 신사를 세워 모신다. 일본 전국에 신사가 10만 여개가 넘으니 거의 동네마다 신사가 있어 마을 곳곳에 빨간 도리이가 세워져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신도(神道)는 교리는 없고 다만 신사에서의 의식을 중시한다. 그러나 신사의 예배는 개인적이지 교회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의식은 없고 개인적으로 엄숙한 자세로 신사에 들어가서 비치된 헌금함에 돈을 넣은 후 두 번 합장을 하고 절을 한 다음에 박수를 두 번 친다.  

 

 

신사에는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첨단 산업으로 앞서가는 선진국 일본에 경전도 없고 사제도 없는 신도가 사람들의 기복과 관련하여 일본 제일의 종교로서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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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몽골 봉사단원들이 울란바타르 인근 칸-울 지역 노인 복지 센터와 인근 지녁 아동들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에게 학용품 등 생활 필수품을 전달하고 함께 놀이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우너들은 칸-울 지역 아이들과 페이스 페인팅, 줄넘기, 공기놀이,
부메랑 던지기, 풍선놀이, 색칠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하며

봉사단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을 하나 하나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돌아와서 하나하나 사진을 펼쳐보니
몽골 아이들은 어찌 그리 우리 아이들과 닮아 있는지 신기한 정도였다.




동네 앞 공터에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넓은 몽골 땅이다보니 동네 앞 공터가 다 초원이다.


비록 작지만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선물 받은 학용품을 그 자리에서 꺼내 즐겁게 색칠 놀이도 해보는데


큰 아이는 색칠이 제법 능숙하고 색채감도 뛰어나다.


우리 동네 순이를 보는 것 같은 외모......너무나 친근감이 드는 아이들이다.


봉사 단원 중 화가가 한분 계셔서 아이들 얼굴에 일일이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셨다.


이쁜 얼굴에 그려진 꽃은 물론 아름답고...


개구장이의 볼에 그려진 꽃도 아이를 기분좋게 한다.


태극기를 그려주니 너무나 신기해하며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도 한다.


몽골 적십자 단원인 여대생도 예쁜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을 했다. 역시 적십자 사랑이다.


아이들 곁에서 같이 페이스 페인팅을 한 몽골 자원 봉사 여대생 삼인방, 미스 몽골 모드가 즐겁기만 하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풍선.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주니 너무 좋아하며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이렇게 이빨 빠진 모습의 아이들의 웃음은 더욱 귀엽다.


이 아이들은 80년대 우리 동네 코흘리개 개구장이들과 어찌 그리 모습이 닮아 있는지...


이 애기는 자기의 풍선이 언니의 풍선보다 이쁘지 않다고 불평이다. 다시 만들어서 쥐어 주어야 했다.
 


눈 색깔이 신비롭도록 아름다웠던 아이는 풍선 트로피를 받았다.


이 개구장이 아이는 싸구려 플라스틱 썬글라스가 너무 잘 어울린다.


몽골 사람은 시력이 너무나 좋은데 이 아이는 안경을 썼다. 도시 생활은 몽골 사람의 눈도 나쁘게 하나보다.


이쁜 얼굴 모습도 눈길을 끌었지만 돌아올 때까지 한번도 웃지 않아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던 여자 아이.


오래 함께 놀아주며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으로는 무리였나보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어울렸던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기억에 남을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바라며..... 칸-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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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펼쳤다.

몽골인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칭기즈칸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기병을 앞세운 전격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시에 몽골 군대는 1인당 8~9 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는데 병사가 100 여명이면
말이 800~900 마리가 되므로 적들은 감히 몽골 병사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복지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데 한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리다 병사를 태운 말이 지치면
달리는 말을 세우지도 않고 말 위에서 다른 말로 올라타며 진격했으므로 군대의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해결 문제인데 몽골인은 원거리까지 별도의 식량 조달이 필요없는 유목민이었으므로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도 양고기 가루를 미숫가루처럼 말린 보르츠나 말젖으로 연명할수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늙은 말 부터 차례로 잡아 먹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저 싸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칭기즈칸 군대는 요즘의 인터넷 프로토콜 방식과도 같은 국제적인 통신망을 구축하여
근거리는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하고 장거리는 송골매를 이용하여 연락을 했다.
전령은 극소수의 부족 언어를 사용하는 군사를 보내어 도중에 체포 되더라도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 군에서 사용하는 통신 보안 방법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 정보망을 통하여 정복지 현지의 상인들을 보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몽골군은 무섭다'라는 소문을 적진에 퍼뜨리고 밤에만 활동하는 '검은 기마병'을 보내는 등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작전을 폈다.
또 몽골 군대의 지휘관들은 칭기즈칸부터 말단 병사까지 동일한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같은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노략질을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전리품이 생기더라도 아랫사람을 먼저 챙겼기 때문에 몽골군의 사기는 충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은 이국적인 문화를 잘 못 받아들여 나라는 쇠퇴일로를 겪게 된다.
칭기즈칸 시대에는 한집에서 병사 한명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으므로 100 만 정도의 인구에 병사가 10 만이나 되었는데 
라마 불교의 도입으로 인해 몽골의 군사력은 점점 쇠퇴하게 된다.
원나라 전성기의 몽골은 한집에서 한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집에서 한명 이상을 라마승으로 출가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병사 또한 점점 줄어들게 되니
몽골의 군대 제도는 와해되어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기게 되기까지 이른다.
이때문에 대제국 몽골은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게 되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로 유라시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몽골군의 현재의 모습은 어떨까.....?
울란바타르 손기노 카이르칸 지역에 위치한 군부대를 찾아가 보았다.



몽골의 정식 군대인 몽골 국군은 사회주의 정권 붕괴 후 몽골 인민군에서 계승된 군대이다.

몽골의 총병력은 9100명, 예비병력은 14만명인데 (2003년 통계) 병력은 사회주의시대보다 만명 정도 줄어들었고
몽골 군대의 장비는 주로 인민군 시대 소련으로부터 얻은 무기가 대부분인데  
전투기나 공격용 헬리콥터 등은 모두 퇴역해서 전력은 매우 약하다고 한다.




손기노 카이르칸에 위치한 군부대는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었지만 부대는 비교적 한산해 보였고



군인들의 복장과 복무 모습은 우리나라 군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의 입장에서 군부대의 겉모습만 보고 받은 인상을 피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겠지만
몽골 군부대에서 받은 인상은 '너무나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방문자를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군인 아저씨의 시선도 따스하기만 하다.



부대 강당에서 공식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초소 옆에서 트럼펫을 연습하는 군악대원들을 발견했다.



트럼펫 부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계속 연주해 달라고 했더니 카메라를 너무 인식해서인지 경직된 모습으로 악기를 연주했다.

그런데 이 군인은 나이가 상당히 되어 보인다. 도대체 연세가 몇이신지.....



나이 많은 군인들 뿐인가....하고생각했는데 형님들 앞으로 나이가 많이 어려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이 군인은 카메라 앞에 세웠더니 출입문 앞에 붙어서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너무나 어려 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군인 아저씨'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완전 중학생 같아 보이는 이 군인, 수줍은 듯 머금은 미소가 참 훈훈하다.
몽골의 군대 역시 우리와 같은 징병제로서 남자는 18세부터 1년간 병역의 의무를 진다는데
이 군인은 채 열여덟도 안 되어 보이는 듯..... 너무나 애띤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몽골에서는 일정한 돈을 내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병역대체금이라고 불리는 납부금을 납부하거나, 해외에 유학하는 등 26세까지 해외에서 지내면 병역의무는 소멸된다고 하고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면제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보다는 징병제도가 상당히 유연하다.

실제로 안내와 통역을 위해 같이 따라다녔던 몽골 항공 직원 '바야라'도
200만 투그릭(몽골 화폐 1투그릭은 우리 화폐 단위와 비슷) 정도의 병역대체금을 내고 군대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돈을 내고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군대를 가겠냐고 반문했더니 몽골 청년 바야라는
"솔직히 말해서 몽골 군대는 공부를 많이 배우지 못했거나
수백만 투그릭이 넘는 병역대체금을 낼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이 간답니다."

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돈으로 이백만원 정도 되는 병역대체금은 저소득층에게는 너무나 큰 돈이므로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군대를 면제받지 못하고 입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의 월급이 사회에서 받는 월급의 평균 수준은 되기 때문에 불만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데
어쨌든 이런 제도가 다른 문제가 없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돈을 내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라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돈 내면 군대 면제'되는 제도가 시행되었더라면 온 나라가 완전 난리가 났을터인데......



군부대를 떠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자꾸만 어린 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병역대체금 기백만원을 내지 못해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병역 의무를 잘 마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고
자신의 나라 몽골을 위한 애국심만은 어느 나라의 군인들보다 더 불타오르기를 마음 속으로 기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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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라면 파아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리고 그 초원을 가로지르는 양떼와 말들이 먼저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몽골의 전부가 아니니.....
몽골에도 산이 있고 호수가 있고 침엽수 우거진 아름다운 숲도 있다.

지난 번 울란바타르 인근의 나이람달 캠프장 게르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캠프장을 둘러 싸고 있는 산 중턱에 하얀 자작나무 숲이 눈에 뜨였다.
소녀 시절 읽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로 인해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던 자작나무.
무언가에 모를 향수에 이끌려 일어나자 마자 아침 햇살 머금은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로버트 포로스트의 '자작나무'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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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칸-울 지역에서의 주민들과의 즐거운 시간.


멀리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보기 위해 동네 공터로 놀러나온 사람들의 표정이 순박해 보인다.


마을 앞 공터에서 어른,아이 어울려 신나게 긴 줄넘기를 한다.


친구와 함께 넘는 줄넘기는 마냥 신나기만 하고...


한국아이와 꼭 같이 생긴 이 개구장이는 너무나 신이 났다.


꼬마야 꼬마야...뒤를 돌아라...하는 노래를 불러주니 너무나 잘 넘는다.


줄을 넘는 가락이 한 두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치마가 발라당 뒤집어져도 신나게 줄을 넘는 여자 아이.


너도 나도 푸른 하늘 높이..푸른 하늘 높이...신나게 날아본다.


앗...언니가 걸리는 바람에 꼬마의 하늘을 나는 묘기는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아이들만 넘을쏘냐....나도 예전엔 한가락 했었지...신나게 뛰어드는 아저씨.


헉.....들어가자마자 걸려서 중도 포기...쪽팔림의 표정이 예술이다.


이어 하이힐을 신은 아줌마의 과감한 도전~!


보랏빛 치맛자락 팔락이며 잘도 넘는다.


하이힐 신고도 신나게 줄 넘는 아줌마는 진정한 줄넘기의 달인~!


하얗게 머리 센 할머니도 용기내어 도전해 본다.


앗! 이런~! 할머니의 비행도 두번째 도약에서 그만 끝을 맺었다.
몽골 푸른 하늘 아래 너도 나도 즐거운 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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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손님 대접은 아주 극진하다.
길 가다 늦어 아무 집에나 가서 잠자리를 청하면 재워주는 것은 당연하고
떠날 때는 음식까지 싸주며 친절하게 길 안내까지 해 준다.





전통적으로 게르에 들어가게 되면 게르의 상석에 앉은 사람이 아이락이나 수태차를 권하던지 
작은 병에 담긴 '코담배(센떼노)'를 방문객에게 건네는데
코담배를 건네면서 "건강하세요~!(에롤 멩흐 바이가라)"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한 후
"여행이 편했느냐'"라고 물으면서 말문을 터나간다.

하지만 절대로 손님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며,무슨 일로 길을 나서게 되었는지는 캐묻지 않는다고 한다.





코담배는 담뱃잎이 아닌 향료와 약초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대부분 옥으로 만든 향수병에 들어있다.
모양과 크기는 매니큐어통 정도인데 뚜껑에 달린 귀이개 모양의 도구로 가루를 꺼내어 엄지 손톰에 바른 후
조심스럽게 흡입하면서 냄새를 향유하는데 강한 향료와 매콤한 냄새가 나서 매우 자극적이므로
갑자기 들이마시면 재채기와 콧물,눈물이 나와서 당황하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코담배를 상대방에게 줄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며
조금 꺼내어  코담배를 받은 사람은 코담배를 코에 대어 냄새를 맡은 후 그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데

이것은 게르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축복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만약에 거부하면 그것은 무례한 일로써 주인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뜻이 된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바퀴 돌아가며 코담배 냄새를 맡으면 인사가 끝나게 되고 병은 주인에게 돌려준다.

코담배통은 몽골에서는 필수품으로 다양한 크기와 재질이 있는데
어떤 것은 금으로 장식한 것도 있어서 그 사람이 가진 코담배통으로 그 사람의 부와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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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중 그 나라 도로를 주행하는 한국차를 만나 반가웠던 경험이 있으신지?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한국차는 마치 한국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갑기 이를데 없는데...
몽골 여행을 다녀보면 여기가 한국인가...생각될 만큼 많은 한국 차가 운행되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몽골 전역에 다니는 차의 2/3가 한국에서 수입해간 차라고 해도 과연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버스는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들여온 것임은 물론이고 
새로 칠을 하거나 외관상의 변화를 주지 않고 한국에서의 모습 그대로 운행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게 해 준다.



현대의 로고가 선명한 청색 버스는 노선표지판 양쪽에 태극기와 몽골 국기가 함께 새겨져 있고


문에는 자동문, 매연저감장치 부착버스라는 표식이 그대로 붙어 있는게 보이는데
심지어는 번호판, 회사명, 버스 노선표까지 그대로 부착하고 운행하는 버스도 볼 수 있다.



버스 안에 붙어 있는 노약자 보호석이란 표식과 함께 붙어 있는 좌석 표지는 이 버스의 전적이 한국 직행버스였음을 말해주고


커튼을 비롯한 버스 안의 모든 부착물은 한국에서 쓰던 그대로이다.


짐을 잔뜩 싣고 가던 이스타나에는 전 주인의 핸드폰 번호가 선명하게 남아 있고


천주교 용대 공소(공소: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의 그레이스는
전방 장병들을 실어나르던 임무를 마치고 울란바타르의 식당 앞에 주차되어 있다.


긴급구호 앨뷸런스도 '환자 이송'이라는 표지가 아직 선명하다.


몽골에서는 엑셀과 엑센트 베르나 소나타가 주로 택시로 활용되는데


몽골에서는 자가용으로도 택시 영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다 승객을 차에 태우고 돈을 받을 수 있어서
살기 힘든 사람들은 온가족이 24시간 교대로 속칭 나라시 영업을 해서 돈을 번다.


그런 까닭에 그레이스 같은 낡은 승합차도 달동네의 택시로 요긴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마티즈 택시도 손님을 태우고 동네를 활보한다.


길에 다니는 차들을 살펴보면 엘란트라, 엑센트.....등이 많이 보이고


승합차도 그레이스, 스타렉스, 이스타나....등 한국산 중고차가 많이 보인다.


동네 앞을 신나게 달리는 소형 트럭도 현대 차이고....


곳곳에 현대 소형 트럭이 눈에 뜨인다.


이건 그 이름도 유명한 봉고 프런티어.


봉고 트럭은 가는 곳마다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눈에 띄는 차는 단연 베르나이다.


여기도 베르나..


저기도 베르나...


노란 베르나...


날개도 달고 바퀴도 제각각으로 튜닝(?)해서 한껏 멋을 낸 베르나..


소나타 옆에도 베르나...온 길가에 베르나가 휘젓고 다닌다.


몽골의 자동차 수입업자는 한국에 와서 제일 싼 차를 골라서 수입한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싼차를 구입하다보니 고장도 잦고 3가지 등급의 휘발유중에서 가장 싼 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 고장이 잘 난다.


그래서 고장이 나면 낮은 기술로 고치기 힘든 신차보다는 엑셀같은 기계식 자동차를 선호하기도 한다고.....


울란바타르 시내를 다니면 한국 중고차 뿐 아니라 이렇게 오른쪽 핸들을 사용하는 차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른쪽 핸들의 차는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한 차이다.


교통 체계나 도로 체계는 우리와 같은데 이렇게 좌측 통행차와 우측 통행차가 섞여서 다니는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죄측 통행 도로 체계에서 우측 핸들차를 모는 것이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No  Problem !" 이라며
안전하게 몰기만 하면 어느 쪽 핸들이냐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은 한국차가 싸서 좋기는 하지만 일본차나 독일차가 전반적으로 품질이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


먹고 살 만한 부유층들은 한국차를 타지 않고 일본차나 다른 수입차를 많이 탄다고 한다.


몽골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사업가분의 말씀에 따르면 현재 몽골에는 1억 3천만원이 넘는 차들도 주문하고 기다릴 정도로
고급차의 수요가 많아서
메르세데스 벤츠는 현지에 서비스 공장까지 신축하고 있고 
현대,기아차 전시장만 외곽에 있을 뿐
다른 일본과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거의 대부분 울란바타르 시내에 전시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한국산 차가 몽골 전역을 주름잡으며 달리고 있지만 최고급으로는 평가되지 못하고 
다만 서민들이 타는 중고차로만 인식된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도 좀 더 기술 개발을 하고 지속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해서
몽골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자동차 시장에 한국 차의 위상이 더욱 더 높아질 때가 한시바삐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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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드립니다..^^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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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꼬옥 들리는 관광 명소가 있으니
그것은 울란바타르 남쪽 벅드산 정상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자이승 전승 기념탑이다.



승전탑 아래 주차장에 내려서 고개를 들어보면
몽골 국기에 새겨져 있던 전통 문양 모양의 조형물 뒤로 엄청나게 큰 승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 들어서 보면.....승전탑이 위치한 언덕의 높이가 장난이 아닌지라 보기만 해도 전의가 상실될 지경이다.



언덕 입구 광장에는 이렇게 기념 부조가 있고 거기에 쓰인 글은
"소련사의 기억은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하고 대지를 태우는 불처럼 신성하다."라는 뜻이라고.....
(문자만 보고 몽골이 러시아어를 쓴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몽골은 엄연히 몽골만의 언어가 있고
문자는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글자를 쓰다가 공산화 이후 키릴문자(Cyrillic)을 차용하여 쓰고 있다.)



광장 앞에는 또 이렇게 전차 한대가 덩그러니 올라가 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몽골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소련에게 기증한 전차로써 실제로 베를린 진군에도 참여했던 전차라고 한다.

혹자는 2차 대전 당시 몽골의 국가 재정상 전차를 소련에게 기증할리가 없다고도 하는데
이전에 중국 및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도움을 많이 받은 몽골로서는 
전차 대금의 전체가 아니었더라도 상징적인 자금이나마 소련을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270개가 넘는 계단을 순전히 도보로만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한 사람들은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게 된다.



점점 가까워지는 승전탑을 올려다보면 엄청난 규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아래 선 사람들과 비교하면 승전탑의 높이가 짐작이 되실 듯 하다.



자이승 전승 기념탑(Zaisan tolgoi)은 1938년과 1945년 두차례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와 연합하여 막아냄으로써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과 전사자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탑은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맞는 1971년에 소련의 기증으로 세워졌는데 



높이 솟은 기념탑의 전면에는 한손에는 총을 들고 한손에는 깃발을 높이 세워들고 있는 장병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바다와 같이 짙푸른 몽골의 하늘 아래 깃발을 들고 당당하게 행진하는 장병의 모습에서
유라시아 제국을 평정했던 몽골인의 굳건한 기상이 느껴진다. 



깃발을 든 장병의 조형물 아래 반지처럼 둥근 구조물 또한 인상적인데



환형 구조물의 외부에는 몽골 혁명 영웅들의 얼굴이 부조로 새개져 있는데 몽골 공산 혁명의 영웅 '수흐바토르'도 그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련 포스트 : 몽골 여행의 시작은 수흐바토르 광장에서 )



환형 구조물의 중앙에는 봉화단 같이 생긴 향로가 있고



안쪽 벽면은 러시아와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 침공을 위해 중일 전쟁 승리 후 곧바로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되는데



그때 마주친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연합한 몽골군에게 패하게 됨으로 대륙 침공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몽골은 이 당시 러시아와의 연합을 통하여 2차 대전 참전국이 되고 



몽골 공산화는 더욱 가속화되니 몽골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사회주의국가가 된 나라이다.



특히 소련 군사와 몽골 군사의 앞에 나치의 깃발이 땅에 내팽겨져지는 장면과



일본 제국의 깃발을 땅에 내동댕이쳐서 짓밟고 서있는 모자이크화가 가장 인상적이고 속 시원한 부분이다.



조형물 전체의 그림은 소련과 힘을 합쳐 몽골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과감한 모자이크화로 표현하였는데



그들의 얼굴엔 당시 중국도 물리치지 못한 일본을 물리치고 몽골 사회주의 정부를 이룩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몽골의 상징 자이승 승전탑은 또한 몽골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원하게 탁 트여 울란바타르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울란바타르 최고의 데이트 명소이기 때문이다.



승전탑 앞에 서면 울란바타르 중심 구역은 물론 울란바타르 전체가 한장의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지는데



멀리 울란바타르를 둘러싼 야산에 빽빽이 들어선 집들을 자세히 보면 판잣집과 게르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섞여져 있어서
울란바타르 270만 시민의 반이 게르에 살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몽골의 강남이라 불리는 자이승 지구에는 이렇게 고급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백평이 넘는 아파트도 즐비한 자이승지구는 싱그러운 숲 사이로  푸른 톨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치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몽골의 아파트들은 한국의 아파트보다 더 화려한 색깔로 칠하는 것이 보통이라 도시의 풍경은 파란 하늘과 더불어 눈부신 조화를 이룬다.



승전탑 계단 아래 보이는 이 건물들은 북한 소유의 건물이라고 하는데 한참을 보고 있어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승전탑 동편 가파른 민둥산 능선에 무언가 하얗고 까만 점들이 움직이기에 자세히 보니



많은 양과 염소 떼들이 몰려서 내려오는게 보인다.
도시 안에서도 많은 수의 가축들이 방목되고 있는 곳...이곳이 몽골이라는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나는 부분이다.



몽골 최고의 데이트 장소답게 승전탑을 오르내리는 계단 옆 바위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낙서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쓰여져 있는데



그중에서는 한글 낙서도 심심찮게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보이는대로 카메라에 담았지만
찍어온 한글 낙서 사진을 글에 삽입해? 말어? 를 한참이나 고심한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어린 여행자들이 멀리 몽골까지 와서 소속과 이름까지 밝히며 써놓은 낙서를 인터넷에 공개해서
새로운 마녀 사냥꺼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떠나는 우리 자녀들이 외국의 유적지에다 한글 낙서를 남기고 오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도록 
교육을 잘 시켜 출국시켜 달라고 부모님이나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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