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진 곳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은 통일 후에도 불안정한 국가를 걱정하여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다고 했는데
문무대왕의 사후 유해를 낭산에서 화장한 후 양북리 앞 바다 큰 바위에 장례를 치렀고 사람들은 이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1박2일에서 문무대왕릉이라 잘못 표기한 대왕암 공원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 위치한 약 93만㎡에 이르는 넓은 공원이다.
이 지역은 옛 선비들이 해금강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목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대왕암, 용굴, 탕건암 등의 기암 괴석과 함께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 15,000그루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바로 앞에는 1906년에 설치된 울기등대가 있어서 한동안 울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2004년에 이르러 대왕암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특히 용추암, 또는 댕바위라고도 불리는 대왕암은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부창부수라고.....문무대왕이 죽어 수중릉에 장사되니 그의 왕비도 이곳 울산의 대왕암에 묻혀 함께 용이 되기를 원했을까......?
이왕이면 문무대왕의 유골이 뿌려진 경주 봉길리 대왕암에 함께 묻히지 왜 경주에서 이렇게 먼 곳에 묻혔을까.....하는 의구심도 가져본다.




문무대왕비릉으로 전하는 대왕암은 육지에 있는 바위와 철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철교를 지나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 대왕암 정상에 오르면 의외로 정상의 공간이 협소함에 놀라게 된다.
십여명이 서면 금방 자리가 부족해지는 이곳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거의 날아갈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정상에서 눈을 들어 앞을 보면 탁 트인 바다가 펼쳐져 가슴이 다 시원해지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주변 바다의 물빛은 너무나 푸르고 주변에 둘러싼 기암괴석들은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대왕암 주변에는 남근바위, 탕건바위, 자살바위, 처녀봉, 용굴 등으로 이름지어진 기암괴석이 있어 가히 해금강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험천만한 벼랑 끝에 서서 낚시를 하는 모습들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장관인데 주변에는 간이 횟집들도 성업 중이다.




정상의 울타리에는 많은 사랑의 자물쇠들이 채워져 있는데 소금기가 많은 바닷바람으로 인해 거의 녹슬어 있는 모습을 본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와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연인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녹슨 자물쇠들이 미관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바다에 던져진 열쇠들은 바다를 오염시키게 되니 부디 삼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런 낙서들도 군데 군데 쓰여있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이곳 대왕암은 일출 명소로도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출이 빠른 곳이 대왕암이냐 간절곶이냐를 두고 3년간 분석한 결과
총 조사시간 108일 가운데 대왕암에서 해가 먼저 뜬 날이 94일(87%)이었으며 간절곶은 7일(6.5%)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월초와 12월말에는 간절곶이 1초 정도 해가 더 빨리 떠오른다고 해서
대왕암은 간절곶에게 새해 일출 명소의 영예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왕암 일출이 간절곶 일출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은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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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경주 수학여행 특집이 6일 저녁 3회로써 막을 내렸다.
3회 방영분은 대부분 경주 수학여행 특집을 마지막으로 하차하게 되는 김C에게 많은 촛점이 맞추어졌고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는 김C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례적으로 3회에 걸쳐 방영되었던 경주 수학여행 특집은 경주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는 특히 기억에 남는 방송이었다.
경주 시내 전역에 걸쳐 7명의 출연자들이 스탬프 투어 레이스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장면들 마다
"어.....저기는 안압지 뒷편 유채밭이야.....음......김종민이 지금 선덕여고 앞을 거쳐서 분황사로 향하고 있네....
강호동이 어두운 길바닥에 앉아 짖는 개를 나무라는 저 장면은 사마소 앞길 하수구 위에 앉아서 찍었군......" 했는데
이렇게 출연자들이 숨을 헐떡이며 달리는 장면에서 순식간에 스쳐가는 장면 하나하나 너무나 눈에 익은 곳인지라
경주 수학여행 특집 내내 타지역 분들은 맛보지 못할 특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1박 2일 경주수학여행 특집이 방영되고 난 지난 휴일날 첨성대 앞으로 가보았는데
벚꽃도 지고, 유채꽃도 다 져버리고 아직 연꽃은 피지도 않은데다 수학여행 성수기도 이미 지난지라
약간은 비수기라고도 할 수 있는 시기인데도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차를 주차할 곳이 잘 없도록 주변이 붐비고 있었고
특히 스탬프 투어나 자전거 투어를 하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것으로 보아
1박2일의 가공할만한 파급 효과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유적지 지도를 보면 짐작을 하시겠지만 첨성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사적지구에는 많은 유적이 옹기종기 몰려 있다.
첨성대를 중심으로 하여 바로 앞에 반월성, 계림, 경주 향교, 교촌마을이 있고 맞은편에는 대릉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반월성이 끝나는 지점에는 안압지, 경주국립박물관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이 위치하고 있어
불국사, 석굴암을 제외한 많은 유적지가 도보 이동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이번 1박2일 스탬프투어 레이스도 첨성대에서 출발하여 도보로 유적지에 가서 스탬프를 찍고는 다시 첨성대로 돌아오는 미션이었는데
모든 이동 수단, 심지어는 자전거 이용조차도 금지했기 때문에 살며시 자전거를 타고 분황사 스탬프를 찍은 이수근은 자동 탈락되기도 했다.



스탬프 투어의 시작과 끝은 첨성대에서 장식되었다.
경주 여행을 와서 첨성대를 돌아보고 가지 않는 사람은 한명도 없으리라....
요즈음은 담장을 거의 없애 버린지라  밖에서만 보고 '에게게....이게 첨성대야?' 하고 돌아서며 관람료 500원을 아끼려는 사람들도 많은데
경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첨성대를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다는 것은 500원이 아니라 5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특히 밤에 조명을 받은 첨성대는 그 자태가 이루말할 수 없이 섹시하니 반드시 밤에 다시 한번 들려서 첨성대를 보고 가셔야 한다.



첨성대 바로 길 건너편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고분 여러 기가 보존되어 있는 이곳은 마치 공원과 같이 경관이 아름다워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대릉원의 꽃은 역시 천마총인데 1973년 발굴 시에 하늘을 나르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다고 해서 천마총이라고 불리운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발굴한 후 고분의 반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반은 공간을 비워 출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아 눈길을 끄는 고분이다.

대릉원에서는 MC몽이 먼저 스탬프를 찍어 아쉬워하는데
나중에 이승기 역시 대릉원에서 스탬프를 찍은 사실이 밝혀져 함께 자폭하게 된다는 반전이 재미있다.
 첨성대에서 도보로 이동하기엔 약간은 먼 분황사에서는 의외로 은지원, 이수근, 김종민이 다 스탬프를 찍어서 모두 자폭하게 되는데



선덕여왕 재위때에 세워진 분황사는 분황사 모전석탑을 장식하는 인왕상이 특히 인상적이다.
모전석탑이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은 석탑을 말하는데 원래 7~9층으로 추정되는 이석탑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강호동이 스탬프를 찍으러 찾아 갔던 곳은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마을이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알려진 최부자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지기로 지내면서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아라'등 자손들에게 가훈을 남겨 
진정한 부자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함으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는 집안이다.



교촌마을 일대는 대부분 최부자와 그 자손들의 집인데 현재 경주시에서는 낡은 집들을 헐고 신축하는 등 한옥마을을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특히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마을은 바로 앞에는 남천이 흐르고 월정교, 반월성, 계림, 경주향교 등이 지척에 이어져 있어 경주 최고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 향교는 외부 관광객들은 그 위치도 잘 모르고 잘 찾지도 않는 곳이지만 강호동은 스탬프를 찍으러 향교까지 오게 되는데
스탬프를 찍어주어야 할 문화해설사가 이미 퇴근해버려 난감해진 강호동.
 교촌마을을 대표 유명인사 윤덕환 어르신의 도장을 대신 받아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1박2일 최고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강호동 낙오>.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김종민은 가위 바위 보의 전설, 불패의 신화 강호동을 단 한 차례의 주먹을 냄으로 일시에 침몰시켜 버리는데.....

단 한번도 낙오된 적이 없었던 1박2일의 최대 강자 강호동은 일시에 낙오자가 되어
어딘지도 모를 베이스캠프를 물어물어 찾아가야할 지경에 이르게 되니 시청자들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통쾌함이 물밀듯 밀려옴을 느끼게 된다.



강호동이 한탄을 하며 베이스캠프를 추정하는 전화를 하던 곳은 바로 교촌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사마소.
사마소란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조직하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협의기구로
이 건물은 교촌마을 바로 앞을 흐르는 남천을 가로지르는 월정교 북쪽 교각 위에 서 있던 건물을 1984년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무너져 기반만 남아 있던 월정교는 지금 한창 복원 중인데 월정교가 다 세워지면 다리 위에 사마소와 꼭 같은 건물이 양쪽에 세워질 것이다.
사마소 바로 앞에는 김유신의 생가터에 남아 있는 우물인 제매정이 있다.

택시 기사와 작가, 이수근, 사마소 주민의 힌트를 종합하여 베이스캠프가 불국사 유스 호스텔이라는 것을 유추해낸 강호동은
어두워진 길을 걸어 불국사로 향하는데 가다가 이쁜 카페도 기웃거려 본다.



교촌마을에서 대릉원 가는 삼거리에 위치한 이 코딱지만한 카페는 주변의 풍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가 3,000원으로 비교적 차 가격이 저렴하고 아늑하여 알만한 사람들은 자주 찾는 곳이다.

카페를 지나가다가 들어간 코딱지만한 슈퍼(??)는 첨성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알토란같은 위치의 구멍가게.
강호동이 엄청 먼 길을 온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첨성대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돈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첨성대 앞을 지나가다 보면 낮이고 밤이고 찾는 이가 거의 없어보이는 관광 슈퍼.
이제 강호동이 들어와서 과자도 사고. 계란 넣은 컵라면도 먹고 갔으니 관광객들이 많이 들려 주인 아저씨의 얼굴이 미소가 더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는 반월성 앞 유채밭을 지나가는데 유채꽃의 상태로 보아 이미 절정을 지난 시기인 듯 하다.



지금은 이미 유채꽃이 다 져버려 다 갈아엎고  늦여름을 환하게 장식할 황화 코스코스 씨앗을 뿌려 놓았지만
4월의 반월성 유채밭은 밤낮으로  유채가 환하게 꽃 피어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꽃밭 속으로 유혹하곤 한다.
반월성 유채밭이 끝나는 지점에는 경주 제일의 야경 명소 안압지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왕궁의 동궁으로 문무왕 14년인 674년에 완성된 이 연못의 원래의 이름은 월지(月池)로써 
조선시대에는 거의 페허가 되어 기러기와 오리만이 날아들었기에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리웠다.



어느 곳에서도 연못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게 조성된 안압지는 낮에도 좋지만 야경이 특히 화려하여
밤에 안압지를 찾는 이들은 가슴이 설레일 만큼 아름다운 반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1박2일 경주 수학여행편의 대미는 불국사에서 마무리가 된다.  너무나 유명한 불국사이므로 부연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고.....

경주를 자세히 알리기 위한 수학여행 특집은 김C의 하차로 인해 눈물로 마무리가 되었다.
예능감은 다소 부족했지만 항상 진지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하던 김C.
그 또한 그의 마지막 수학여행지 경주를 언제까지나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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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처음 그곳을 들렸던 기억은 거의 10 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행중 여러곳의 사찰을 방문하곤 하지만 부석사 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빛 바랜 앨범 속 사진 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아스라이 남아 있던 부석사..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추위가 가셔지지 않은 어느 조용한 날에 다시 찾아본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서 부석사로 들어가는 길이 시작된다. 
 

 
 사과밭과 인삼밭 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숫길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나목이 늘어서 있는데도 이렇듯 아름다운데 가을에 단풍이 물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회가 된다면 가을에 다시 찾아와 사진으로 꼭 담아보고 싶다.

 
 천왕문 들어가기 전 왼쪽 편에 당당하게 서 있는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가 눈에 뜨인다.
행사가 있을때 사찰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필자의 앞을 가방을 멘 여학생이 담담하게 스쳐 지나간다.
갸날프게 생긴 여학생이 홀로 사찰을 찾다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천왕문을 향해 걸어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어쩐지 고독하게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아...산자락 아래 단아하게 펼쳐진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 서서 보니 수려한 산자락 아래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이 차례로 펼쳐져 있다. 


경내에서 제일 먼저 방문자를 맞아주는 건물은 범종루인데 이 건물의 전면은 동쪽을 향해 있고 측면이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는데 범종루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름은 범종루이지만 범종은 바로 옆에 있는 신범종각에 걸려 있고 범종각에는 큰 법고와 목어만이 걸려 있다. 


범종각을 지나면 다시 높은 계단 위로 안양루가 그 수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무량수전 앞마당 긑에 놓인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이 건물은 앞과 뒤에 걸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 편액에는 안양루라고 되어 있으니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문을 통하여 위로 바라보니 시선에서 약간 어긋나게 국보 제 17호인 아름다운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연화대 위 8각 화사석 사이로 난 창을 통해서 무량수전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곳인데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려서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하였으며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한 건물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팔작지붕의 시초인 무량수전은 주심포 기둥이 절묘한 배흘림 기둥인 것으로 유명하다.
배흘림기둥이란 기둥 중간 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기둥인데
중간을 볼록하게 함으로 기둥 머리 부분이 넓어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주고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 부분에 집중된다는 건축 구조 역학을 고려한 것이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왼쪽 뒷편에는 부석사 이름의 유래가 된 부석(浮石)이 있다.
부석은 우리 말로 '뜬 돌'인데 돌이 실제로 떠 있을 수는 없으니 아래 돌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이 부석에는 선묘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중국 여인인 선묘는 의상대사가 중국에 있을 때 그를 몹시 사모했다.
그러다 의상대사가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게 되자 선묘는 그만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 뒤 의상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을 때 이 자리를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죽은 선묘의 영이 돌을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도망가게 되어 그 자리에 부석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으로 올라 아래를 보니 안양루, 범종루를 비롯한 사찰 내의 건물들이 아담하게 들어앉은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도 보물 제249호로 지정된 단아한 석탑이 있는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1960년 석탑을 해체, 수리했을 때 3층 옥신에 있는 사리구멍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수습되었다.

 
3층 석탑을 지나 산기슭을 조금 올라가면 조사당이라는 고려시대의 목조건물이 있다.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은 1377년(우왕 3)에 창건되었고 1490년(성종 21)에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세부 표현이 간결한 모습이다.


정면 가운데에는 살문을, 그 좌우 옆칸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았는데  파스텔톤의 색감이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다. 

 
조사당 전면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선비화(골담초)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란 전설이 있는데
심하게 촘촘한 창살 속에서 자라고 있어 그 모습을 확인하고 사진에 담기는 조금 난감한 일이다.
조사당은 부석사 제2의 목조 건물로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산에서 내려오며 안양루 아래 펼쳐진 경치를 내려다 보니 맞은편 산과 마을에 저녁 안개가 은은하게 펼쳐져 있다.
안양루에 걸린 김삿갓의 시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를 떠올리며
쉴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손을 잠시 멈추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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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덮인 화진포가 나를 부른다.
처음 화진포에 갔던 몇 년 전 겨울.....
어디가 호수이고 어디가 들판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새하얀 눈밭으로 뒤덮여 눈 앞에 펼쳐지던 추억 속의 화진포.

동해안 최북단의 화진포는 둘레가 약 16㎞나 되는 아름다운 드넓은 석호이다.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해당화가 붉게 피어
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이곳은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데
바로 옆의 화진포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얕아
명사십리에도 비견되기도 하는 바다이다.



화진포는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또한 유명한데 

호수와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의 환상적인 경치를 접해보면 

대한 민국 초기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이 왜 이곳을 여름 휴양지로 삼았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최근에 와서 화진포는 '가을 동화'촬영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근 속초의 청초호 부근 아바이 마을이 가을 동화의 주촬영지였는데
화진포는 어린 시절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해변에서 모래 그림을 그리면서 추억을 쌓던 장면과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 - 준서가 은서를 등에 업고 해변을 거닐다 은서가 숨을 거두는
라스트씬을 촬영한 곳이어서 연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가 되었다.  



화진포 바다에서 보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눈에 뜨이는데 바로 '화진포의 성'이라 불리우는 김일성 별장이다.
"김일성 별장이 왜 남한에 있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에게 사족을 붙인다면
한국 전쟁 이전엔 이곳이 38선 이북, 즉 북한 땅이었다는 것을 기억시켜 드리고
지금도 이곳은 군사 통제 지역인지라 이 지역의 상황은 지도에서 스카이뷰로 확인할 수 없다.  
 


이 건물이 처음부터 김일성 별장이었던 것은 아닌데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비행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강제 철거키로 결정하고
원산 해변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는 히틀러를 피해 망명해 왔던 독일 건축가 베버(H.Weber)에게
예배당으로 사용할 조그마한 별장 하나를 바다에 면한 암벽 위에 짓게 하였다.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베버는 1938년 회색돌로 원통형 2층 건물을 현 위치에 지었는데
화진포 해안 절벽 위의 송림 속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하얀  외관으로 인해 '화진포의 성(城)'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이곳을 점령한 북한은 화진포의 성을 귀빈 휴양소로 운영하였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8년부터 김일성의 가족들은 경관이 매우 뛰어난 화진포의 성을 여름 휴양지로 이용하였고
실제로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김정일 형제가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화진포의 성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계단에 그 당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확힌하게 된다.



계단 중간 쯤에 어린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이 집 앞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표시되어 있고
 


계단 바로 옆 축대에 그 당시 사진의 사본이 걸려져 있어 '화진포의 성'의 원래 모습과
김정일의 어린 시절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누군지 손톱으로 긁적거려 김정일의 얼굴을 훼손시켜 놓았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 화진포의 성 마당에 이르니 수심이 깊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벽 위에 위치한 집이라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다. 



이 건물은 전쟁 중 훼손되어 1964년 재건축하였는데 외관은 처음과 변함이 없으나
실내는 현재 안보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게 매우 유감이다.
  전시관 벽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가 있었는데 대부분 건성건성 다 지나치고
건축물의 유래...김일성 정권의 수립 과정...등이 있으나 자세히 읽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당시 방의 모습을 재현한 소품들만이 눈에 띌 뿐인데... 



그 당시 의복과 제니스 라디오에 눈길이 가고.....
 


천정에 달려 있던 램프도 방문객의 시선을 잡는다. 



2층 전시실의 원형 방에 이르면 모두 다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창문을 통해 바다 풍경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절경'이라는건 바로 이런 경치를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
창문을 열고 바다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다.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옥상으로 연결이 된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화진포 호수와 화진포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오고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다.



건물의 벽 사이로 내다 보고 싶은데 두께가 있어서 쉽지가 않아 벤치 위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화진포성 위에서 내려다 보니 왼쪽의 호수와 오른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호수의 하늘빛 고요함과 대비되는 황홀한 에메랄드빛 바다색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이 해변의 모래는 조개 껍질과 바위가 오랫 동안 부서져 만들어진
모나즈 성분으로 되어 있어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고 개미가 살지 못 하는 모래라고 한다. 



앞에는 화진포 바다.....뒤에는 석호인 화진포 호수.....그 가운데 화진포 콘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콘도는 군인 시설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않고 슈팅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아저씨 발견.
아마 바다 한 가운데 섬 '금구도'를 찍는 듯 한데....
박격포 만한 엄청난 망원 렌즈와 무지 비싼 삼각대에 기가 죽은 필자는 몇 장 찍고 얼른 내려 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앞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섬 금구도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 온다.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는 광개토대왕릉이라고 한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 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3년(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이곳에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다고 하며
문자명왕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거북섬 성은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으며
산정 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섬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석축 보호벽과 방파성이 약 60m, 높이 170~230m,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앞으로 고성군에서는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원형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안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고 했던 문무왕처럼
광개토대왕도 자신의 숙원이던 남하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에다 자신의 무덤을 쓰게 한 것일까...?
눈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섬 금구도가 광개토왕릉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섬을 바라보니
감포 앞 바다에 서서 문무대왕 수중릉을 바라 볼 때와 같은 격한 감격이 가슴 속에서부터 물밀 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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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은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허리는 잘룩하며 높이는 108 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이 산에서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으니
나라에서는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에는 나무도 베지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달인이자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 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의 독서당도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와 오늘 소개하려는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자리잡고 있다.  
 

 경주 박물관을 지나 배반동 사거리에서 울산 쪽으로 100 미터 정도 지나 왼편 길로 접어들면
바로 능지탑과 선덕 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차 두대가 교행 할 수도 없는 좁은 산길을 
십여미터 정도 걸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탑이 바로 지척에 나타난다. 

실성왕 12년에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오르고 향기가 피어 올랐다더니만
능지탑을 처음 만난 이날에도 낭산의 바로 위에는 신비로운 구름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 m이다.   

 여느 탑의 형태와는 달리 특이하게 생긴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능지탑 혹은 연화탑으로 알려져왔는데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79 년에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정확한 원형을 알 수 없어 기단부 2 단만 토석 혼합으로 쌓았고    

 2층을 쌓고 남은 나머지 돌들은 옆과 뒷부분에 모아 두었다. 

 기단에는  12 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12 지상 중 3 개는 분실되었지만, 남아있는 9 지상은 비교적 정교하고 뚜렷하다. 

 동쪽은 호랑이,토끼,용(寅,卯,辰)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토끼의 상만이 남아 있다. 

 남쪽은 뱀, 말, 양(巳, 午, 未)의 지신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위는 말의 지상이다. 

 얇은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양의 지신상이다.  

 그리고 서쪽은 원숭이, 닭, 개(申, 酉, 戌)의 형상이 다 남아 있는데  

 얼굴 표정과 갑옷의 표현이 정교하여 마치 손오공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원숭이의 지상과 

 금방이라도 꼬끼오~하고 울 것 같은 닭. 

 서라벌의 멋쟁이 같아보이는 개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쪽은 돼지, 쥐, 소(亥, 子, 丑)의 지상이 다 남아 있는데  

 꿀꿀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돼지의 지상은 주둥이 쪽에서 보면 더욱 리얼하고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는 소의 지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이 날도 햇빛님이 해박하신 문화재 지식으로 능지탑의 이모저모를 잘 해설해 주셨는데
아름다운 손에 시선이 집중되어서일까? 쥐의 지상은 그 형상이 그다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12 지상은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에도 새겨져 있다. 
관련 포스트 : 비오면 비석 이름 바뀌는 신기한 김유신묘

 복원시에 미쳐 다 쌓지 못하고 주변에 쌓아둔 기단석을을 자세히 보면 앞에는 연화문을 잘 다듬었지만  

 뒤편은 자연석 모양을 그대로 두어 탑을 쌓았을 때 무너지거나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탑에서는 발굴 당시 큼직한 소조 불상 파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 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돌의 색깔이다. 

 쌓아진 기단석이나 쌓지 못하고 방치된 기단석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들이 모두 안쪽이 불에 그을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 탑지 안에서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나왔고 이렇게 불타 그을린 흔적이 나온데다 
 삼국사기의 기록까지 있어 이 곳이 문무왕의 화장지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장남이자  통일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일전을 벌여 제압한 후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군주이다.  

거듭된 통일 전쟁을 힘겹게 끝낸 문무왕은 생명의 줄을 놓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숨을 거두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  
그리고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고, 죽은 지 열흘 이내에 화장하라.”
하는 유언을 남겨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은 왕이었다.

   


  
 이렇게 화장된 문무왕의 유골은 감포 앞 바다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양지바른 무덤자리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조성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 
 

바닷가에서 보면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일 뿐 수중릉이 아니다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문무왕의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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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무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바다 속에는 수장된 왕의 무덤이 있는데
이 바다 속 무덤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수중릉이다.
대왕암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수중릉은
신라인들의 호국 정신과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인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죽으면서 자신의 유해를 화장을 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문무대왕릉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고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고....

무왕릉이 수중릉이냐.....유해를 뿌린 산골처냐.....하는 두 견해는 오래 전부터 팽팽히 맞서 왔다.
수중릉이라고 하는 견해는 한장의 거석이 암초에서 채취한 것이 아니라 인근 육지에서 운반되었다고 보며 
방향이 정확히 남북을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앙에 인공으로 동서로 긴 수로를 만들었다는 점을 들어 수중릉이라 주장하고 있다.

산골처라는 견해는 가운데 놓인 돌이 인공적인 석관 덮개가 아니라 자연석으로 보는 주장인데
문무왕 비문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 등이 '삼국사기'의 내용과 똑같이 적혀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논쟁의 진위 여부는 덮개석을 들어내고
그 밑에 사리장치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문무왕의 국가에 대한 혼과 의지가 깃들어 있는 신성한 자리를
과학적인 조사를 위하여 들어낸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유해를 바다에 장사지내어서까지 왜구에게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의 구국 충정은 그 정신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지
그 안에 유해함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견대(利見臺)는 문무대왕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는데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은 것이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이 왜구의 진압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하였으나  마무리 하지 못한 감은사를  치세 2년 만에 완공을 하는데...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고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利見臺)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견대에 올라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부왕의 충정에 효심으로 답한 신문왕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다.
 



경주에 오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은 경주 시내와 불국사 등을 돌아본 후
외곽지의 유적들은 잘 보지 않고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보문을 지나 추령 고개를 넘어 동해 바다 가는 길로 들어서서 감은사지와 이견대, 문무대왕릉을 돌아보고
감포에서 싱싱한 회 한 접시 드신 후 가신다면 최고의 추억을 담아가는 경주 여행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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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가는 가을날에 찬란한 가을빛을 

눈으로...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경주에서도 남산 최고 명당 자리에 위치한 통일전. 
그 이름에서 대충 짐작이야 하시겠지만 통일전이란 곳은 통일 신라 시대 유적도, 조선 시대 유적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삼국 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국민의 전당이다. 
 

통일전은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고 본받자는 뜻으로 건립된 만큼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교육원과 함께
초중등학생들의 이념 교육장 형태로 이용되어 왔으며 경주를 찾는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곳은 특히 바로 옆에 서출지가 있고 남산 답사를 위해서는 꼭 거쳐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잠시 들려 둘러보고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더우기 통일전으로 들어가는 2km의 진입로는 환상적인 은행나무길로 유명하고 


주차장에 들어서서도 방문객들의 탄성이 이어지는데 
주차장 주변이 온통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단풍으로 어우러져 가히 환상적인 경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곳의 느티나무는 단풍나무보다 더욱 빨갛게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내곤 하는데

 느티나무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할 정도로 고운 색을 자랑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수련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아직도 몇 송이 남아 있는 수련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 준다.

 이 연못 주위의 벤치는 남산 답사로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기에 안성맞춤이고 

 연못 건너편의 금강 소나무 숲 주변 산책로는 솔향기가 그득하다. 

 너른 경내에는 귀한 수목들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뽐내는데.... 

 목련잎도 노란 물이 이쁘게 들었고... 

 단풍의 고운 자태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매일 매일 낙엽을 쓸어야 하는 관리인 아저씨의 마음 속에도 고운 단풍의 빛깔이 남아 있겠지..?
 

정문을 지나 너른 정원을 지나면 흥국문(興國門)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흥국문을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옆으로 난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본다. 

 담장 옆에서 본 목련은 또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 오고...  

 담장 기와 위에 떨어져 소복이 쌓인 솔잎은 가을의 정취를 한결 더하여 준다. 

 흥국문(興國門)이라고 쓰여진 현판....나라를 일으키라는 뜻으로 이름한 문이겠지?  

 흥국문을 지나면 두번째 정원이 나오는데 저 멀리 계단 위에 또 문이 하나 보인다. 

 흥국문을 지나서 나오는 두번째 정원에는 사적비(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를 비롯하여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제일 왼쪽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사적비가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는 문무대왕의 사적비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사적비이다.

 두번째 정원에서 본전이 있는 마지막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서원문(誓願門)이다.
삼국 통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 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이리라.. 

 서원문을 들어서면 본전인 '통일전'이 그 위용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울긋불긋한 단청을 칠하지 않고
서까래는 연갈색으로, 기둥과 벽은 하얀색으로 칠하여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을 주는 전각이다. 

 통일전(統一殿)이란 현판 아래 전각의 문 또한 순수하게 하얀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본전 안에는 삼국총일의 대업을 달성한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제일 왼쪽에는 태종 무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무열왕의 얼굴은 비교적 자애롭게 그려져 있어서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선덕여왕에서 김춘추 역을 맡았던 유승호가 나이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혼자 상상해 본다.

 왼쪽에 모셔진 문무대왕의 눈꼬리는 올려져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무열왕과 문무대왕의 영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오른쪽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으로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또 본전을 돌아가며 사면에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전각의 옆과 뒷편 회랑을 따라 삼국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전시되고 있다.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된 17점의 기록화는 그림 보존을 위해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지라
반사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회랑의 구석에서 본전과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맛인데 특히 여기서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궁'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회랑의 양쪽 코너에는 누각이 두개 있는데 신 벗고 올라서 보니 통일전 경내와 저 아랫 마을까지 훤히 다 보인다. 

 왼쪽 누각에서도 아름다운 경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누각에서 바란 본 풍경은 느티나무,은행나무,반송,목련...각가지 나무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대궐이다.
 

서원문 앞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 아래 은행나무가 줄지어 사열하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전을 다 돌아본 후 은행나무길로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차창을 내리고 비행기 날개처럼 팔을 길게 옆으로 뻗어 보았다.
옆으로 스치며 지나가는 세찬 바람 소리...
이 가을.....이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날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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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되기 전까지 신라시대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화랑정신을 자라는 청소년에게 강력히 심어주고 싶었던 박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는지
국사책에서도 중점적으로 나오곤 했는데...

경주 지역에 와서도 지금껏 관심받지 못했던 선덕여왕의 자취보다는 김유신의 자취를 찾는 것이 더 쉽다.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경주 톨게이트에 세워진 동상은 물론 

경주 시민의 휴식처 황성공원 언덕에도 김유신 동상이 서 있어 밤에도 환하게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그가 죽은 뒤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조(租)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후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며 사람을 배정해 무덤을 수호하게 했으며



뒤에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여 무덤의 양식은 왕릉이나 다름이 없다.



원형분인 봉분의 둘레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호석,護石)을 돌리고 
12방위의 둘레돌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겨 위엄을 더했다.



경주의 다른 왕릉에도 지신상이 있지만 조각의 우수함이나 모습의 거대함은 이 무덤의 것이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지신상의 크기는 각각 세로 96㎝, 가로 61㎝정도인데 모두 문관복을 입고
발을 양옆으로 벌린 정면상이나 몸과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한 측면상이다.
얼굴은 방향에 따라 해당되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손에는 삼지창이나 검 또는 도끼 등의 무기를 들고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십이지신상의 모습을 하나 하나 살펴본다면.....
 

 
                                       쥐                                                                                소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또 봉분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김유신이 죽은 후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른 후 묘비를 세웠지만 
그 묘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조선
조선 숙종36년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뒷면에는 崇禎紀元周甲後庚寅(숭정기원주갑후경인)라고 적혀 있다.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서편 비석의 묘비와 동편 비석의 묘비를 비교해 보는데 동편 비석 아랫 부분 마지막 글자가 이상하게 보인다.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이란 비명의 제일 마지막 글자가 다른 글자와 겹쳐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가 오면 비석의 글자가 릉(陵)에서 묘(墓)로 바뀐다는 바로 그 비석이다.



경주 문화재 지킴이인 솔뫼님을 만났을 때 비 오는 날 김유신장군묘의 비석을 한번 살펴보라고 하던 것이 생각나서
비가 오는 날 다시 김유신장군묘에 가보았는데 충분한 양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런지 글자가 다소 선명치 않다.
할 수 없이 땅바닥에 고인 물을 손으로 퍼서 글자를 적셔 보았더니 묘(墓)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가 무슨 이유로 비석의 묘비명을 바꾸어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 현상은 김유신묘를 찾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재미을 주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 경주에 와서 김유신장군묘를 찾는 분은 이 재미있는 비석의 글씨를 더 잘 관찰할 수 있겠지만
혹 맑은 날 방문했다 하더라도 문화 해설사 분들께서 비석에 물을 부어가며 재미있게 해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다가오는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선덕여왕과 관련된 경주 여행을 한번 계획해 보심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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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경주의 밤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매주마다 보문 야외 공연장과 안압지에서 상설 공연이 열려

시민과 관광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다.

 

보문 공연장에서는 매주 토,일  8시 30분부터 다양한 형태의 국악 공연이 열려서

특별히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되는데

안압지 공연은 그 규모가 훨씬 더 크다.

토요일이 되면 안압지 넓은 경내 전체에 특설 무대가 가설되고

특별 초대된 가수들의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박혁거세가 거서간으로 즉위하고 신라를 건국한 날이 기원전 57년 6월 8일이니 

2008년 6월 8일로 경주가 신라의 도읍지로 선포된지 2065년이 되고

안압지는 문무왕 14년인 674년에 완성되었으니 1334년 된 유적이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오래 된 유적지에서 상설공연이 열리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인데....

 

107번 째 공연인 6월 7일 저녁 8시 공연에서는  '김종서 밴드'의 콘서트가 펼쳐져

김종서의 팬들을 비롯한 경주시민,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안압지에서의 공연 모습들을 몇 장의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오프닝 무대를 장식한 '록시 밴드'.

 

 

신인인 듯 한데 아주 열심히 부른다. 

 

 

그룹 이름이 'No.1 Korean Band' 라는데 우리나라에 잘 없는 브라스 밴드이다.

 

 

떼거지로 나와서 신나게 공연을 하는 'No.1 Korean Band'.

 

 

늦게 갔더니 자리 없어서 서서 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찾아낸 명당 자리....^^

시야를 가리고 선 아줌마들의 머리 사이를 이리 저리 헤치며 사진 찍었다....ㅋㅋ

 

 

김종서 나왔다.

사람들의 환호가 장난이 아니다.

따라다니는 팬클럽 회원들이 목이 터져라고 연호한다.

 

 

텔레비젼 연예 프로그램에서 하도 많이 보아서 낯이 익다.

 

 

"안녕하세요..신인 탈랜트 김종서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요즘 어느 드라마에 출연하나보다.

 

 

노래 오랜만에 불러서 약간 소심해졌다고...

재치있는 말솜씨에 사람들이 다 웃는다.

 

 

그리고 김종서 다운 열창....

 

 

한 시간 동안 노래 불러서 무슨 노래 했는지 다 까먹었으나...

 

 

아름다운 구속....

 

 

플라스틱 신드롬...

 

 

대답없는 너...

 

 

그리고 제목을 잘 모르는 노래...들...

 

 

특히 앵콜 때에 Queen의 'Don't stop me now' 를 불렀다.

전주가 나오자 마자 Queen의 광팬인 나.....

 갑자기 광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 뛰었다.

 

 

무대 매너도 좋고 입담도 좋고 노래도 정말 잘 하는 김종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공연 후.....모든 축제는 불꽃 놀이와 함께 끝나면 금상첨화다..

  

 

이렇게 안압지 공연은 9시 반~10시 정도가 되면 모두 끝나게 되니

대구권에서 관광오시는 분들도 마치고 귀가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6월의 공연 계획은 

 

1주, 김종서 콘서트

2주, MBC 가요 베스트

(이 공연은 규모가 커서 실내체육관서 행사를 한다)

3주, 국악 종합 공연

4주, Folk 축제

.

.

 

그 주의 공연 스케쥴이 궁금하시면 경주 시청 홈페이지에서

누가 출연하는지 확인하시고 오면 된다..

 

아...그리고 보문 야외 공연장은 관람 무료이고

안압지 상설 공연은 안압지 입장료 1000원을 내어야 하지만

1000원이 아까와서 관람을 포기하시는 분은 없겠지?

(물론 경주 시민은 모든 유적지의 입장이 무료이다.←자랑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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