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여행을 오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돌아보는 불국사.

사계절 언제나 아름다운 곳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단연 가을일 것이다.

가을철에 불국사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사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단풍에 감탄하는데

돌어보면 경내는 물론 담장 주변과 토함산 등산로의 단풍도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다.

불국사는 필자의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라 가끔 주변 산책로를 거닐곤 하는데

그때마다 집 주변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에 새삼 자랑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11월 하고도 늦은 중순에 다시 토함산 불국사를 찾아 보았다.

중부 지방의 단풍은 이미 따 떨어져 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지만

따스한 남쪽나라 경주 불국사의 단풍은 아직도  가지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마지막까지 그 찬란한 자태를 붉게 불태우고 있는 중이다.

이제 곧 겨울이 오면 마른 이파리가 되어 다 떨어져 버릴 단풍들.

가는 가을이 못내 아쉬워 몇장의 사진으로 마지막 남은 단풍을 소개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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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오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들리게 되는 불국사.
불국사 여행의 기점인 불국사 기차역 앞에 '갈비국수'를 파는 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국사역 앞으로 찾아가보았다.



1936년에 지어져 75년이 되는 역사를 지닌 불국사역 광장에 이르니 '절구통'이라는 친근한 이름의 상호가 여행자를 반긴다.
간판 아래 내걸린 현수막에는 갈비국수 5,000원, 갈비정식 7,000원, 양념돼지갈비 15,000원, 잔치국수 2,500원이라고 친절히 가격까지 제시되어 있다. 잔치국수가 2,500원이라니? 이건 거의 시장좌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벼운 가격이 아닌가! 





하지만 오늘은 이집의 특미인 '갈비국수'를 먹으러 온 것인 만큼 다른 메뉴는 돌아볼 겨를이 없다.
갈비국수 2인분을 시키니 금새 김치, 풋고추, 젓갈 무침, 미역줄기 무침 등 기본 반찬들이 상 위에 베풀어진다.





기본 반찬이 나오더니 주인 아저씨가 탁자 위에 하트 모양의 유리 워머를 갖다 놓는다. 국수를 시켰는데 워머라니! 
카페에서 허브차를 주문하면 찻주전자와 함께 나오는 워머가 국수 메뉴에서 나오다니 뭔가 재미있다는 느낌이 든다.




주인아저씨가 워머 안에 놓여진 초에 불을 붙여주고 가니 불빛과 함께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갈비국수를 어떻게 주는 것이기에 워머에 불까지 붙이는걸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주방에서 잘 구워 사기그릇에 담겨나온 돼지갈비가 데워진 워머 위에 올려졌다.
국수를 먹는 동안 갈비가 식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데워진 워머와 함께 따스하게 전해진다.

 

 


연이어 노란 양푼이에 담긴 잔치국수가 나왔다.
탱글탱글하게 잘 삶겨진 국수 위에 부추, 계란 지단, 단무지채, 김.....등의 고명이 올려졌다. 






워머 위에 놓인 갈비를 한점 집어서 보니 구워진 상태는 무척 적당하다.
잘 익은 돼지갈비를 보니 국수에 얹어 먹기도 전에 입 안에 침이 스르르 고인다.






주인아저씨께서 오시더니 친절하게 먹는 방법을 일러주신다.
국수 따로 갈비 따로 먹지 말고 국수 위에 돼지갈비를 올린 후 국수와 함께 싸서 먹으면 더 맛이 있다는 말씀이다.



주인 아저씨께서 일러주신대로 국수 위에 갈비를 올린 다음 젓가락으로 함꼐 잘 싸서 입 안으로 가져가보았다.
음......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맛인데?
탱글탱글 잘 삶겨진 국수 면발과 함께 돼지갈비를 함께 얹어서 먹으니 잔치국수만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입 안이 행복하다.
워머에 올려진 갈비가 마지막 국수를 입에 넣을 때까지 따스하게 보온이 잘 되어 있어 더욱 좋다.




앗.....너무 열심히 먹었나보다. 국물까지 후루룩 다 들이마셔버리니 금새 양푼이 바닥이 드러났다.
깔끔한 잔치국수 위에 따스한 갈비를 함께 얹어먹는 '절구통' 식당의 '갈비국수'
가격도 비교적 가벼워서 점심으로 먹기에는 너무 서운하지도 않고 너무 과하지도 않는 적당한 음식이니
불국사역을 통해서 기차 여행을 하시는 분들께 한번은 들려서 맛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은 착한 메뉴이다.


올려드린 맛집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모든 리뷰는 전혀 댓가를 받지 않고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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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한귀퉁이 경주에 둥지를 틀어 몇년째 살고 있는 필자.
그동안 경주의 숨겨진 맛집에 대해서 몇번 포스팅을 한적이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는 요즈음
지방 소재 맛집 소개를 해봐야 누가 관심을 기울여줄까...하는 생각으로
맛집 포스팅할 때 마다 다소 힘이 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맛집들에 대한 포스팅 이후
소개했던 맛집에 대한 관심이 의외로 높아질 뿐 아니라 
소개해드렸던 맛집을 찾으시는 분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그만 둬버릴까 생각했던 경주 맛집 포스팅을 다시 계속해 볼까 한다.

(일부 유명 맛집 블로거들께서 식당과 손을 잡고 홍보성 포스팅을 올린다는 글을 대한 적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에는 여행 중이나 모임에서 방문했던 맛집 중 개인적으로 추천할만한 곳을 <완전 자발적으로>소개하는 것이라
식당 측에서 어떤 형태의 향응도 받지 않았음은 물론 식당 방문시에 자신을 블로거라고 밝히지도 않았음을 알려드리며......) 





오늘 소개하는 음식점은 경주 - 울산간 7번 국도변에 위치한 낙지요리 전문점 '석거돈'이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불국사역 지나고 괘릉 가기 바로 직전에 위치한 석거돈은
꽤 넓은 주차장을 보유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차를 주차하고 식사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식당 내부는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구역과 이렇게 방바닥에 앉을 수 있는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다른 곳과 구분되는 석거돈의 특징 중 하나는 식당 내부에서는 절대 금연이라는 것과 물수건을 공급하지 않는 것이다.
물수건 대신 식당 출입구에 깨끗한 세면대와 강력한 핸드드라이어가 구비되어 있어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갈때마다 손님으로 넘쳐나는 곳이지만 좌석의 회전율은 의외로 무척 빨라서
앉으면 바로 주문을 받고 주문을 받자마자 순식간에 음식을 내어온다.

메뉴는 석거돈 7,000원, 낙지볶음 7,000원, 단 두가지 뿐인데 우리 일행은 이집의 상호와 같은 석거돈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자마자 금방 음식이 베풀어지고 가스 버너 위에는 넓직한 프라이팬이 올려진다.
잘 닦여져 반들반들한 양은 프라이팬 뚜껑은 얼마나 오랫동안 쓴 것일까?
긁히고 우그러진 양은 뚜껑에서 이집의 연륜이 느껴진다.  





음식의 빠른 회전과 종업원들의 편의를 위하여 모든 반찬은 이렇게 쟁반에 올려진 채로 탁자 위에 놓여진다.




밑반찬들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다. 나온 반찬을 살펴보면 마늘쫑 무침, 부추 김치......




어묵 볶음..




간이 잘 맞는 고추 무침.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고 폭 쩌낸 달걀찜과 콩나물 무침, 김치, 물김치 등 소박하고 친근한 반찬들이 대부분이다.




푸릇푸릇한 배추물김치를 한 숟가락 떠서 맛보니 시원하다못해 청량감까지 느껴진다.




이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엄청 큰 밥그릇이다.
밥공기라고 하기엔 너무 큰 이런 밥그릇은 요즘 어디 가도 보기 힘든 큰 사이즈의 아빠 밥그릇이다.




커다란 밥뚜껑을 열어보니....헉.! 윤기나는 쌀밥이 그릇에 가득 들었다.
조그마한 밥공기에 2/3 정도만 채워지는 다른 식당의 공깃밥에 비하면 거의 두배가 되는 양이다.




프라이팬에서 김이 솔솔 오르기에 양은 뚜껑을 살포시 열어본다.
위에 얹혀진 큼지막한 대파들 아래 돼지고기와 낙지가 함께 들어있는 것이 보인다.





석거돈이 뭔가 궁금했는데 한자어로 낙지를 뜻하는 말이 '석거(石距)'라고 한다.
그러니까 '석거돈'이란 낙지와 돼지고기 볶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석거돈 요리를 할 차례이다.
프라이팬이 열로 달구어지면 숟가락으로 이러저리 뒤적여가며 재료와 양념이 잘 섞이게 볶아야 한다.





한참 볶다보니 금새 양념이 어우러지고 재료에서 물이 나오면서 먹음직스럽게 보골보골 끓어 어우러진다.




빨갛게 볶아진 석거돈을 보니 침이 절로 나온다.
낙지는 오래 볶으면 질겨지니 이제 머뭇거리지말고 신속하게 먹는 일만 남았다.




곁들여 나온 빈그릇에다 밥을 조금 놓고 석거돈을 두어 숟가락 더서 넣고는 마구 마구 비벼본다.
지저분하게 비벼져서 보기에는 별로지만 맛은 아주 그만이다.



 

그냥 반찬으로 먹던지.....비벼서 먹던지.....상추쌈으로 싸서 먹던지......개인의 취향대로 즐기면 될 일이다.




밥그릇이 크니 비벼먹고 쌈을 싸서 먹어도 밥이 많이 남아 필자와 일행은 남은 밥을 프라이팬에다 넣고 볶아먹기로 한다.




남은 양념에다 밥을 투하하고는 콩나물이며 남은 반찬을 다 붓고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마구 마구 비벼본다.




한참 지나니 비빔밥이 먹음직스럽게 잘 비벼지고 프라이팬 바닥에는 자작자작 밥이 눋는 소리가 난다.
이미 배가 어느 정도 찬 상태였지만 잘 비벼진 석거돈 비빔밥을 보니 다시 식욕이 솟아오른다.
심기일전 달려들어 그릇 바닥이 보일 때까지 박박 긁어 먹어 먹고나니 배가 남산만해지고 움직이기조차 힘이 든다.


1인분 7,000원의 저렴한 가격에 낙지 돼지고기 볶음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석거돈.
불국사, 괘릉, 영지 쪽 여행길이나 울산 가시는 길이라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서민의 대표 맛집이다.



올려드린 맛집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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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과 이견대(利見臺)주변에는 동해 바다의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맛집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곳은 필자의 단골 횟집인 일출 회식당이다.

횟집의 방 안에서 문무대왕릉을 환하게 조망할 수 있는 것이 이 식당의 큰 장점.
이곳에서 회를 주문해 놓고 조금 기다리면 육질이 쫀쫀한 자연산 회를 즐길 수 있다.





회를 주문하고 나오는 동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나온 작은 고구마는 맛이 너무나 달다.






너무나 달콤 새콤해서 여러 사람의 젓가락이 난무하는 비빔국수.





경주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볶은 콩가루 얹은 샐러드.





너무나 싱싱한 멍게와 해삼이 곁들어지는 건 물론이다.





겨울에 가면 곁들인 반찬으로 이렇게 과메기를 맛볼 수도 있다.





스테미너와 피부에 최고인 경북 동해안의 별미 과메기를 안 먹어 보신 분은 없으시겠지요?


관련 포스트 : 포항 구룡포 명물 과메기




에피타이저로 나온 반찬을 다 비울 즈음이면 이렇게 푸짐한 자연산회가 들어온다.
대도시나 여느 다른 지방에서는 회의 양을 푸짐하게 보이기 위해 무채로 된 깔개(방석?)위에 회를 올리는 것이 보통인데
동해안 횟집에서는 대부분 아무런 깔개나 장식 없이 대접시나 보통 접시에 오로지 회만 올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갈개 위에 올라앉는 회에 비해 당연히 양도 많은게 특징일 뿐더러
근해에서 직접 잡은 자연산 회는 쫄깃하고 탱탱하여 입안으로 전해지는 신선한 바다의 내음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회와 함께 곁들여지는 조개탕을 한숟갈 떠먹으니 모두 다
"으~~ 시원~~하다~!!"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회를 다 먹었으면 매운탕을 빠뜨리고 갈 수 없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운 맛이 느껴지는 빠알간 매운탕의 국물은 정말 대박이다.
누구나 한 숟갈 떠먹으면 "커~~!!"소리가 절로 나오니 이 집에서 회가 하이라이트라면 매운탕은 가히 클라이막스가 아닐까.....?





회를 뜨고 남은 생선뼈와 머리로 끓이는 매운탕이라지만 의외로 살점도 두둑하니 들어있어 기분이 좋다.

매운탕을 떠먹다 보면 매운탕 안에는 수제비도 많이 들어있어 건져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매운탕에 들어 있는 수제비의 원료인 밀가루는 생선의 비린내를 제거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비린내 하나 없이 얼큰하고 담백한 매운탕을 끝까지 즐길 수 있어 좋다.





경주에 여행 오시는 많은 분들은 보통 시내 안압지,대릉원, 첨성대, 반월성,불국사만 돌아보고 서둘러 가시곤 하는데
필자는 보문호,덕동댐을 넘어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 푸르른 감포로 넘어오시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다.
가슴이 탁 트이는 푸르른 동해 바다와 함께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을 지척에서 보신 후에 
이렇게 싱싱한 자연산회도 즐기고 가신다면 그제야 경주에 다녀왔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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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에서 울산쪽으로 7번 국도를 달려 불국사역을 지나 

토비스 콘도 쪽으로 접어들어 1km 쯤 가면 나타나는 자그마한 못, 영지.
그리 특별하지도 경관이 빼어나지도 않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못과 다를 바 없는 못 영지.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 영지(影池)는 슬픈 전설이 깃들여 있는 역사가 오래 된 못이다.
이 평범한 못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석가탑 건립과 비롯하여 기록된 아사달과 아사녀에 관한 전설을
작가 현진건이 재구성하여 소설화한 역사 장편 소설 '무영탑'에 나오는 바로 그 못이기 때문이다.





무영탑(無影塔)이란 말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 옆에 서 있는 석가탑을 이르는 말이다.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의 지휘 아래 신라는 불국사 대공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공사에는 많은 백제 출신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되고
대웅전 앞에 세울 석탑을 창건하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 출신 석공 아사달이 불려오게 된다.
신라의 부름을 받은 아사달은 아내 아사달을 두고 서라벌로 향하게 되는데......

진정한 석공은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탑을 세우는데 전념해야 하는 법이라 아사달은 아사녀에 대한 그리움도 떨쳐버리고
오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성하는데만 일념을 다한다.
다보탑을 2년 만에 완성하고 이제 석가탑을 세우고 있는 초파일 밤, 불국사에 왕이 행차를 하였다.
일행은 다보탑을 보고 감탄하였는데 특히 일행에 끼어 온 이손의 딸 구슬아기는 극도의 감격을 느꼈고 왕 앞에 나온 석공 아사달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은 서라벌을 넘어 부여까지 퍼지게 되고 손꼽아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혼자 서라벌로 향한다.
천신만고 끝에 불국사에 도착하였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경내로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아사녀는 입구에서 제재를 받게 되는데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고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곧 결혼한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으니 아사녀의 가슴은 무너지고
상심한 그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탑을 뒤늦게 완성한 아사달은 부여로 향하려고 서둘러 불국사 문을 나서다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못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아사녀가 벗어놓은 짚신 한켤레만 아사달을 맞아주고 있었다.

아사달은 자신의 못난 처지를 가슴 아파 하며 울부짖으며 못 주변을 방황하며 아내를 그리워했는데
아사녀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을 보고 망치와 정으로 아사녀를 새긴 후 아사녀가 뛰어든 영지에 자신도 몸을 던지고 말았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 하였다.






아사달이 아사녀를 생각하며 조각하였다는 돌부처는 현재도 남아 영지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영지 석불 좌상이'라는 팻말을 따라 길에서 몇 걸음 걸어가니 곧 이어 나타나는 석불좌상.
불상은 몸체와 대좌,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고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옷을 걸치고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로 앉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여 무릎 위에 내렸다.
석불이 앉은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를 다른 돌로 조각하였는데
상대에는 연꽃을, 중대에는 안상을 조각하였고 하대에도 연꽃 24송이를 조각하였다.






석불좌상 앞에서 가까이 서서 석불의 얼굴을 올려 보는 순간 '헉...'하는 낮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이 기괴한 얼굴의 석불은 도대체 뭐지.....
석불은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했는데 보는 이를 놀라게 한 것은 다름아니라 얼굴 부분이었다.






석불의 얼굴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다.
가슴은 살짝 볼록하고 허리는 잘록하여 여성스러움을 잘 드러낸 몸체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얼굴 부분과 머리 부분은 눈, 코, 입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통일신라 초기의 석불이라 오래 되어 이렇듯 심하게 마모된 것인가 했더니
지역민들의 얘기로는 6.25 당시에 이 불상을 표적으로 삼아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 부분에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구멍도 발견되는걸 보면 표적으로 썼다는 증언들이 사실인 듯 하다.






붕대를 친친 감고 무덤에서 바로 일어난 미이라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
거기다 가늘게 내리던 비로 인해 빗방울이 석불 위로 흘러내리니 마치 피가 흐르는 듯한 형상이라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다.

머리와 가슴에 피를 철철 흘리는 얼굴없는 석불.....
마치 아사달을 기다리다 지쳐 결국은 영지에 뛰어든 아사녀의 슬픈 사랑과
아사녀를 잃은 것을 탄식하다 아사녀의 모습을 조각하고는 아내와 함께 세상을 버린 아사달의 고뇌처럼
오늘도 영지 입구에 말없이 서서 슬픈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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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를 벗어나 울산쪽으로 7번 국도를 달려 불국사역을 지나면 오른쪽 철로와 같이 달리게 되는데
괘릉 가기전 토비스 콘도 쪽으로 핸들을 꺾어 1km 쯤 가면 고즈녁한 못이 하나 나타난다.
못의 이름은 '영지(影池)',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란 뜻이다.





못은 그다지 크지도 않고 경관 또한 크게 아름다울 것도 없어서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근래에 와서 정자를 하나 짓고 주변에 산책로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찾는 이 별로 없이 시람들의 관심에서 멀기만 한 그런 곳이다.





비 오는 날 찾은 영지는 더욱 더 심심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낚시하는 분 몇 사람이 찾아와서 텐트를 쳐놓고 심심한 듯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뿐.....
잠시 차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한바퀴 둘러보는데 못 가의 흙으로 인해 신발만 엉망이 되어 얼마 못 걷고 다시 차로 돌아와야 했다.





심심하고 평범한 영지는 차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내려서 돌아 보지도 않는 못이지만

알고 보면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영탑 전설'이 전해져오는 제법 유명한 못이다.





현진건이 쓴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했더라도

고교시절 국어시간을 통해서 '무영탑에 얽힌 전설'은 어렴풋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무영탑'은 1938. 7. 20∼1939. 2. 7 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현진건의 장편 역사 소설인데
신라 시대 불국사 무영탑의 건립을 중심으로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 비극적 사랑의 전설을 현대 소설로 살려내었다.




무영탑(無影塔)이란 말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 다보탑 옆에 서 있는 석가탑을 이르는 말이다.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의 지휘 아래 신라는 불국사 대공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공사에는 많은 백제 출신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하게 되고

대웅전 앞에 세울 석탑을 창건하기 위해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 출신 석공 아사달이 불려오게 된다.
신라의 부름을 받은 아사달은 아내 아사달을 두고 서라벌로 향하게 되는데......

진정한 석공은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탑을 세우는데 전념해야 하는 법이라 아사달은 아사녀에 대한 그리움도 떨쳐버리고
오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성하는데만 일념을 다한다.
다보탑을 2년 만에 완성하고 이제 석가탑을 세우고 있는 초파일 밤, 불국사에 왕이 행차를 하였다.
일행은 다보탑을 보고 감탄하였는데 특히 일행에 끼어 온 이손의 딸 구슬아기는 극도의 감격을 느꼈다.
왕 앞에 나온 석공 아사달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버렸다.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서로 사랑한다는 소문은 서라벌을 넘어 부여까지 퍼지게 되고
손꼽아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나기 위해 혼자 서라벌로 향한다.

천신만고 끝에 불국사에 도착하였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경내로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아사녀는 입구에서 제재를 받게 되는데

천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을 만나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날마다 불국사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떠오를 줄 몰랐고 아사달과 구슬아기가 곧 결혼한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비취지 않으니 아사녀의 가슴은 무너지고
상심한 그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탑을 뒤늦게 완성한 아사달은 부여로 향하려고 서둘러 불국사 문을 나서다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못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아사녀가 벗어놓은 짚신 한켤레만 아사달을 맞아주고 있었다.

아사달은 자신의 못난 처지를 가슴 아파 하며 울부짖으며 못 주변을 방황하며 아내를 그리워했는데
아사녀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을 보고 
망치와 정으로 아사녀를 새긴 후 아사녀가 뛰어든 영지에 자신도 몸을 던지고 말았다.

지금도 그 당시 조각하였다는 아사녀의 모습을 지닌 돌부처가 영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 하였다.





토함산 기슭에 있는 동리 목월 기념관에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사달 추모탑이 있다.

앞면에는 아사달의 예술혼을 석가탑 형태로 표현했으며 뒷면은 아사녀의 애절한 사랑을 부조로 나타내었는데 

오랜 세월 기다리다 만나지 못하고 생을 달리한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그리움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애틋한 남녀의 사랑을 표현한 소설 '무영탑'은
실제의 역사적 사실을 소설화한 것이 아니고 역사의 전설을 재구성하여 소설화 한 것이므로

혹자들은 이야기 소설이 정설인 것처럼 문화재 설명서에 실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론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소설에서는 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조건 등의 의미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작가 현진건은 신라 예술의 최고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석가탑을 건축하려는
한 석공의 예술혼과 남녀간의 사랑을 결합시켜 한편의 진지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픽션을 만들어낸 것이니
달리 말하면 작자는 그의 이념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사실이나 전설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향전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남원에 가면 실존 인물보다 더 유명한 춘향이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아사달과 아사녀는 사랑을 이루지 못 하고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았지만

오늘날 영지를 같이 거니는 연인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한다는 다소 현대적인 전설도 전해오니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이루길 원하는 연인들은 사랑의 성지와도 같은 영지를 돌아보고 가심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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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경주 수학여행 특집이 6일 저녁 3회로써 막을 내렸다.
3회 방영분은 대부분 경주 수학여행 특집을 마지막으로 하차하게 되는 김C에게 많은 촛점이 맞추어졌고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는 김C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례적으로 3회에 걸쳐 방영되었던 경주 수학여행 특집은 경주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는 특히 기억에 남는 방송이었다.
경주 시내 전역에 걸쳐 7명의 출연자들이 스탬프 투어 레이스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장면들 마다
"어.....저기는 안압지 뒷편 유채밭이야.....음......김종민이 지금 선덕여고 앞을 거쳐서 분황사로 향하고 있네....
강호동이 어두운 길바닥에 앉아 짖는 개를 나무라는 저 장면은 사마소 앞길 하수구 위에 앉아서 찍었군......" 했는데
이렇게 출연자들이 숨을 헐떡이며 달리는 장면에서 순식간에 스쳐가는 장면 하나하나 너무나 눈에 익은 곳인지라
경주 수학여행 특집 내내 타지역 분들은 맛보지 못할 특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1박 2일 경주수학여행 특집이 방영되고 난 지난 휴일날 첨성대 앞으로 가보았는데
벚꽃도 지고, 유채꽃도 다 져버리고 아직 연꽃은 피지도 않은데다 수학여행 성수기도 이미 지난지라
약간은 비수기라고도 할 수 있는 시기인데도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차를 주차할 곳이 잘 없도록 주변이 붐비고 있었고
특히 스탬프 투어나 자전거 투어를 하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것으로 보아
1박2일의 가공할만한 파급 효과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유적지 지도를 보면 짐작을 하시겠지만 첨성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사적지구에는 많은 유적이 옹기종기 몰려 있다.
첨성대를 중심으로 하여 바로 앞에 반월성, 계림, 경주 향교, 교촌마을이 있고 맞은편에는 대릉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반월성이 끝나는 지점에는 안압지, 경주국립박물관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이 위치하고 있어
불국사, 석굴암을 제외한 많은 유적지가 도보 이동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이번 1박2일 스탬프투어 레이스도 첨성대에서 출발하여 도보로 유적지에 가서 스탬프를 찍고는 다시 첨성대로 돌아오는 미션이었는데
모든 이동 수단, 심지어는 자전거 이용조차도 금지했기 때문에 살며시 자전거를 타고 분황사 스탬프를 찍은 이수근은 자동 탈락되기도 했다.



스탬프 투어의 시작과 끝은 첨성대에서 장식되었다.
경주 여행을 와서 첨성대를 돌아보고 가지 않는 사람은 한명도 없으리라....
요즈음은 담장을 거의 없애 버린지라  밖에서만 보고 '에게게....이게 첨성대야?' 하고 돌아서며 관람료 500원을 아끼려는 사람들도 많은데
경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첨성대를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다는 것은 500원이 아니라 5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특히 밤에 조명을 받은 첨성대는 그 자태가 이루말할 수 없이 섹시하니 반드시 밤에 다시 한번 들려서 첨성대를 보고 가셔야 한다.



첨성대 바로 길 건너편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고분 여러 기가 보존되어 있는 이곳은 마치 공원과 같이 경관이 아름다워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대릉원의 꽃은 역시 천마총인데 1973년 발굴 시에 하늘을 나르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다고 해서 천마총이라고 불리운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발굴한 후 고분의 반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반은 공간을 비워 출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아 눈길을 끄는 고분이다.

대릉원에서는 MC몽이 먼저 스탬프를 찍어 아쉬워하는데
나중에 이승기 역시 대릉원에서 스탬프를 찍은 사실이 밝혀져 함께 자폭하게 된다는 반전이 재미있다.
 첨성대에서 도보로 이동하기엔 약간은 먼 분황사에서는 의외로 은지원, 이수근, 김종민이 다 스탬프를 찍어서 모두 자폭하게 되는데



선덕여왕 재위때에 세워진 분황사는 분황사 모전석탑을 장식하는 인왕상이 특히 인상적이다.
모전석탑이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은 석탑을 말하는데 원래 7~9층으로 추정되는 이석탑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강호동이 스탬프를 찍으러 찾아 갔던 곳은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마을이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알려진 최부자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지기로 지내면서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아라'등 자손들에게 가훈을 남겨 
진정한 부자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함으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는 집안이다.



교촌마을 일대는 대부분 최부자와 그 자손들의 집인데 현재 경주시에서는 낡은 집들을 헐고 신축하는 등 한옥마을을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특히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마을은 바로 앞에는 남천이 흐르고 월정교, 반월성, 계림, 경주향교 등이 지척에 이어져 있어 경주 최고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 향교는 외부 관광객들은 그 위치도 잘 모르고 잘 찾지도 않는 곳이지만 강호동은 스탬프를 찍으러 향교까지 오게 되는데
스탬프를 찍어주어야 할 문화해설사가 이미 퇴근해버려 난감해진 강호동.
 교촌마을을 대표 유명인사 윤덕환 어르신의 도장을 대신 받아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1박2일 최고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강호동 낙오>.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김종민은 가위 바위 보의 전설, 불패의 신화 강호동을 단 한 차례의 주먹을 냄으로 일시에 침몰시켜 버리는데.....

단 한번도 낙오된 적이 없었던 1박2일의 최대 강자 강호동은 일시에 낙오자가 되어
어딘지도 모를 베이스캠프를 물어물어 찾아가야할 지경에 이르게 되니 시청자들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통쾌함이 물밀듯 밀려옴을 느끼게 된다.



강호동이 한탄을 하며 베이스캠프를 추정하는 전화를 하던 곳은 바로 교촌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사마소.
사마소란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조직하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협의기구로
이 건물은 교촌마을 바로 앞을 흐르는 남천을 가로지르는 월정교 북쪽 교각 위에 서 있던 건물을 1984년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무너져 기반만 남아 있던 월정교는 지금 한창 복원 중인데 월정교가 다 세워지면 다리 위에 사마소와 꼭 같은 건물이 양쪽에 세워질 것이다.
사마소 바로 앞에는 김유신의 생가터에 남아 있는 우물인 제매정이 있다.

택시 기사와 작가, 이수근, 사마소 주민의 힌트를 종합하여 베이스캠프가 불국사 유스 호스텔이라는 것을 유추해낸 강호동은
어두워진 길을 걸어 불국사로 향하는데 가다가 이쁜 카페도 기웃거려 본다.



교촌마을에서 대릉원 가는 삼거리에 위치한 이 코딱지만한 카페는 주변의 풍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가 3,000원으로 비교적 차 가격이 저렴하고 아늑하여 알만한 사람들은 자주 찾는 곳이다.

카페를 지나가다가 들어간 코딱지만한 슈퍼(??)는 첨성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알토란같은 위치의 구멍가게.
강호동이 엄청 먼 길을 온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첨성대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돈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첨성대 앞을 지나가다 보면 낮이고 밤이고 찾는 이가 거의 없어보이는 관광 슈퍼.
이제 강호동이 들어와서 과자도 사고. 계란 넣은 컵라면도 먹고 갔으니 관광객들이 많이 들려 주인 아저씨의 얼굴이 미소가 더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는 반월성 앞 유채밭을 지나가는데 유채꽃의 상태로 보아 이미 절정을 지난 시기인 듯 하다.



지금은 이미 유채꽃이 다 져버려 다 갈아엎고  늦여름을 환하게 장식할 황화 코스코스 씨앗을 뿌려 놓았지만
4월의 반월성 유채밭은 밤낮으로  유채가 환하게 꽃 피어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꽃밭 속으로 유혹하곤 한다.
반월성 유채밭이 끝나는 지점에는 경주 제일의 야경 명소 안압지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왕궁의 동궁으로 문무왕 14년인 674년에 완성된 이 연못의 원래의 이름은 월지(月池)로써 
조선시대에는 거의 페허가 되어 기러기와 오리만이 날아들었기에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리웠다.



어느 곳에서도 연못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게 조성된 안압지는 낮에도 좋지만 야경이 특히 화려하여
밤에 안압지를 찾는 이들은 가슴이 설레일 만큼 아름다운 반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1박2일 경주 수학여행편의 대미는 불국사에서 마무리가 된다.  너무나 유명한 불국사이므로 부연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고.....

경주를 자세히 알리기 위한 수학여행 특집은 김C의 하차로 인해 눈물로 마무리가 되었다.
예능감은 다소 부족했지만 항상 진지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하던 김C.
그 또한 그의 마지막 수학여행지 경주를 언제까지나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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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 들렸을 때의 일이다.

대웅전의 꽃살문과 자하문의 단청을 사진에 담은 후

자하문 옆 범영루의 법고를 찍으려 다가가다가  법고 바로 옆 마루에 신문지판이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골판지 같은 단단한 것을 넣고 밖은 신문지로 싼 것처럼 보이는 판 주위에는 여기저기 새똥이 흩어져 있었는데...

 

 

새똥의 흔적으로 보아 천정 어디엔가 새둥지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흔적은 없었고 다만 법고 위 천정 쪽으로 두개의 용머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일 뿐이었다.

 

 

그냥 돌아서서 가려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서 왼쪽의 용 머리 쪽을 자세히 보았더니

나뭇가지 같은 것이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용의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지은 것이다.

새는 나들이를 나갔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아직 마르지 않은 새똥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둥지 안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용의 머리를 깔고 앉아 지은 새둥지라....

여의주를 입에 물고 천하를 휘어 잡던 용도 그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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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사람들의 필수 수학 여행지 불국사는 언제 가도 경내에 사람들이 바글 바글하다. 

 

 특히 대웅전 앞 석등 앞에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인 관광객들로 추정되는 이 사람들은 한 사람이 석등 앞에 손을 합장하고 한참이나 석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절하고 나오면
그 다음 사람이 석등 앞에 합장하고 서서 또 한참 바라보다 절하고.....
모두가 이렇게 줄을 서서 석등을 살피는 것이었다. 

"참 일본 사람들이란....저런거 구경하는데도 줄을 서서 봐야 하나....질서 의식이 투철한건 좋지만 너무 심하군..."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좌우로 젓던 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는 시선이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다들 석등의 한 가운데 네모난 등집 창을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관광객들이 다 물러간 후에 나도 그들이 섰던 자리에 서서 등집의 네모난 창을 바라  보았다. 

네모난 창으로 보이는 것은...대웅전 안의 본존불의 얼굴이었다.
그랬다...!
석등을 대웅전 앞에 놓을 때에 석등을 통해서 부처의 얼굴이 보일 수 있도록 배치하여 놓은 것이었다.

 불국사에 들어서서 청운교,백운교를 계단으로 올라 자하문을 지나
봉로대(향로를 놓는 곳),연화문 석등,대웅전 현판, 대웅전 본존불......
이렇게 가람의 모든 배치가 일직선 상에 위치해 있는데
신라 장인들의 찬란한 솜씨와 더불어 계획적인 가람 배치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석등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하대와 중대에는 쌍잎의 연꽃문이 새겨져 있었고
사방으로 난 팔각형 등집의 네모난 창 주위에는 예전에 문을 달았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었다. 

 근데 하나의 궁금증을 풀고 나니 또 하나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팔각으로 된 등집과 팔각 지붕돌(옥개석)부분이 만나는 부분에서 이상한 둥근 물체가 여러개 보이는 것이다. 

 둥글고 검은 물체는 팔각 지붕돌을 빙 둘러가며 골고루 박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 보니 그건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왜 동전을 옥개석 아래에 끼워넣어두었을까...?
관광객들이 복을 빌기 위해서 끼워둔 동전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확실하진 않다.

 혹시 석등 아래에다 동전을 끼워놓은 이유가 정녕 복을 빌기 위함이라면
문화재를 훼손하면서까지 소유하고 싶은 그 행복은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자기의 마음 속에 있다고 살짝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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