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부터이다.
그들은 외교적, 상업적 동기에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특히 대마도(쓰시마)사람들이 조선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구했다고 한다.
조선의 역관들은 다른 나라로 유학을 하지 못했지만 일본의 역관들은 초량 왜관에 와서 유학을 하며 조선어를 배웠다.
통계에 의하면 대마도의 남자의 반이 일생에 한번은 조선에 왔다고 하니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어에 능통했던 것 같다.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에서 보면 건너편 산 중턱에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광청사이다.
서산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청사는 길에서도 경사가 급한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광청사(光淸寺,고우세이지)는 1727년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설립한 3년제 조선어학교가 있던 건물이다.

이 조선어학교의 수업은 하루 4시간씩. 매월 27일은 시험을 쳤다.

교재는 1학년 <교린수지> 2학년<전일도인> 3학년<인어대방>이란 책이었는데 통역사 양성이 목적이었는데

교사는 인위문길(仁位 文吉)이라는 20세의 전문통역사였다.

 

 

길에서 광청사 입구까지는 약간의 비탈길을 올라가야 하므로 입구에 지팡이가 비치되어 있다.

지팡이에 붙어 있는 명찰에는 좌수용,우수용이라고 쓰여져 있다.

왼손잡이,오른손잡이를 구별하여 지팡이를 구비해 놓은 것도 일본인들의 세심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절 본당에서 1872년 10월 25일 '한어학소(韓語學所)'가 개소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통역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대마도에서 조선어는 매우 인기가 높아 입소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1873년 8월 2일까지 1년간 대마도 고위층 자제 34명을 입소시켰는데 그들 중 10명이 10월 16일 조선말을 더 잘 배우기 위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왔다. 초량 왜관 내에 '초량관 어학소'를 만들었으니 한어학소의 전진 배치였던 셈이다.

 

이들이 이후 경복궁을 드나들며 한일 합병의 통역관 겸 정보원 역할을 했으며 1895년 민비 시해사건 때 투입된 자객들 중에 낀 통역 2명이 이 어학소 출신 대마도인이었다. '초량관 어학소'는 1880년 동경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가 생기면서 자동 폐소되었다.

 

현재 대마도 소학교에서는 5,6 학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어과를 설치해 교육하고 있고 한국인 원어민교사가 있다고 한다. 대마도 고등학교에서는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사물놀이를 학습하고 있으며 곧 태권도도 가르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던 조선어학교...이제는 상생하는 이웃이 되기 위해 선하게 쓰여지기만 바랄 뿐이다. 

 

 

광청사를 나와 수선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선사(修善寺,슈센지)는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개인 사찰이라 최익현 순국비에 참배키 위한 한국 사람 외엔 거의 찾는 사람도 없는 절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인데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높이 9.5cm의 신라 동조여래현좌불상이 있으며 최익현선생의 순국비와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토츠안'의 묘가 있다.  신라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는 비각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어서 확인할 수도 없다.

 

 

수선사 내에 있는 '대한국인 최익현 순국지비'. 최익현은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은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수선사에 지장보살이 단체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지장 보살들이 여러 가지 무늬의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전번에 서산사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원래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의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부모들은 어린 영혼을 지워 버린 몹쓸 짓을 한 자기들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치장을 한다.

 

그리고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어린 영혼을 달랜다는 것이다. 

(이 코딱까리만한 지장보살은 서산사(세이잔지)정원에 있는 지장 보살이다.) 

 

가는 곳마다 턱받이로 장식한 지장 보살들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만제키바시(만관교) 다리 옆 숲에 있던 지장 보살들은 하나같이 파란 색깔의 턱받이로 치장하고 있었다.
 

 

뒤에 광배가 있는 수선사의 이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선 한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일본의 부처는 석가모니불조차도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화꽃 턱받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본인들의 불심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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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이웃인 우리나라와 일본의 사찰은 의외로 다른 점이 아주 많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원은 단청으로 단장되어 그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일본의 사찰은 단청 기술을 전수받지 못해 단청이 아예 없고 탑도 없다.
우리나라 사찰에 들어서면 의례히 나는 독경소리도 들을 수 없고
오가는 스님들의 모습도 볼 수 없는 곳이 일본의 사찰이다.
대부분의 일본 사찰은 위패의 보관, 관리 수익으로 운영되며 월급제의 승려가 많으며
대처승이므로 당연히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고 사찰로 출퇴근을 한다.
옛날 일본의 사찰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는데
조선의 영향으로 요즘은 불상을 안치하고 운판도 거는 곳이 많다.  

아...그리고 일본의 신사문은 항상 열려있지만 절문은 항상 닫혀있다.

학술적인 목적이나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사찰 내부를 방문하려면 사전에 사찰측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 본토는 사찰보다 신사가 많으나 대마도는 의외로 29개소의 신사에 비해 사찰이 39개소로 더 많다. 

이즈하라에서 우리나라와 관련있는 사찰 서너 군데를 돌아보았는데 먼저 서산사(西山寺,세이잔지)를 소개해 드리자면

서산사는 대마 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다.

 

 

 

이 곳은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떼이안(以酊庵)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테이안은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 숙소로 제공되고 또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일종의 관저였는데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이후 이떼이안이 서산사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도 사찰에서 운영하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다.  

 

 

서산사 절문 바로 앞에는 아주 아주 조그만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이런 소규모의 일본식 정원을 가레산스이(枯山水)양식의 정원이라고 한다.

흰 모래와 돌로 산수를 표현하는데 모래는 물이요, 바위는 산이다.

일본식정원은 물이 있는 곳에 조성했으나 이 양식 이후로 물없이 모래선을 물결로 표현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선종 사찰에서 시작되어 후대에 발전했는데 지금은 독립된 정원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절문을 들어서면 하얀 돌이 깔린 아주 좁은 정원이 있고 가운데 통로에 일렬로 늘어선 박석이 갈 길을 인도한다.

마주 보이는 문은 유스 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몇 발자국 가서 돌아서서 절문을 보고 찍은 사진을 보면 경내가 얼마나 좁은지 알수가 있는데
문 양쪽으로도 숙소로 쓰이는 방들이 보인다.

 

 

 

 

정원 오른쪽에 아주 쬐끄만 지장보살이 빨간 프릴 달린 턱받이를 하고 머리에는 핑크빛 뜨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에서 본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어린 영혼을 지워버린 몹쓸 짓한 부모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달래는 것이다.

 

 

건물 처마에서 아래 마당까지 길게 쇠줄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정원의 흙을 패이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일본인들의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세심함에는 두 손 들고 항복...

 

 

 

시간이 허락하면 이 유스 호스텔에서 자는 체험을 해보면 좋을텐데.....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리를 보니 호기심이 막 발동하는걸 꾸욱 억누르고 돌아섰다.

 

이떼이안(以酊庵)으로 쓰였던 건물 정면의 지붕 끝의 산 모양으로 생긴 구조물은 당파풍(唐破風)으로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 건축 양식에서는 박공이라 하는 것으로 에도(江后)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전해져서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김성일 선생의 시비가 수선사 경내에 서 있는데 이 시비는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것이다. 

 

 

좁디 좁은 사찰 경내에 힘겹게 서 있는 종루는 종치는 막대조차 밖으로 삐져 나와 있는데 묘지는 사찰 경내보다 훨씬 넓다.
일본 사찰은 묘지의 관리로 사찰 운영을 하기 때문에 신도 관리나 불사 보다는 묘지 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묘지에는 일본인 가족들의 납골묘가 가문별로 설비되어 있고
사찰 승려의 주 업무는 이 납골묘를 관리하고 관리비를 유족들에게 받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죽어서도 가족과 옆에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어서
마을 주택가 인근에 납골묘를 만들어 안치한다고 한다.  

 



심지어 집 안이나 방 안에 납골당을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무리 부모의 유골이라지만 무섭지도 않는가 보다. 

 

정실(正室)이라고 쓰여진 비석을 보니 일본에도 축첩이 성행했었나 보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태어나면 신사로 가서 그 조상신에게 참배로써 인사하고 자라면 결혼은 교회에서 서구식으로 치르고
죽으면 그 장례 절차나 매장 형식은 불교식을 따르고 사찰 묘지에 묻힌다. 
알다가도 이해하기 힘든 일본 사람들의 사고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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