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어느 집을 가나 한결같이 그 집의 중심이 되는 벽에 걸려 있는 한 사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의 사진인데 터키인들은 그를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관공서와 학교에는 물론 식당이나 동네의 조그만 구멍 가게에도 그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화폐 개혁 전의 터키 리라와 화폐 개혁 이후의 예니 터키 리라,두 화폐의 가치는 같다.)   

모든 터키 지폐의 앞면에는 그의 초상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대도시의 큰 거리는 어김없이 아타튀르크 거리이다.
                                             

아타튀르크가 사망한지 70년이 되었지만 아타튀르크에 대한 터키 국민의 신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그가 사망한 11월 10일에는 온 국민이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터키 국민들이 아타튀르크에 대해 이런 절대적인 신망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첫째,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오스만 제국에서 터키 공화국을 세운 국부(國父)였기 때문이다.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은 20세기 초반에 와서는 서구 강대국의 침략 위협을 받게 된다.
거기다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다가 패전하게 되니 패전국에 대한 연합국의 영토 분할 점령으로 인해
자칫하면 현 앙카라 고원 지대의 영토만 남을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무스타파 케말이 등장하여 열강에 의한 영토 점령에 반대하고 민족적 저항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데 
1921년 아나톨리아로 공격해 온 그리스 군대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대패시키니 다른 나라 군대 또한 스스로 철수하게 된다.
이후 1923년 로잔평화조약에 따라 공식 국가 승인을 받아 1923년 정식으로  터키 공화국이 선포된다.

무스타파 케말은 직업 군인이었으나 노련한 정치가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비젼과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터키 독립 전쟁을 지휘하였고 1923년 앙카라에 새로이 의회를 조직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둘째, 초대 대통령으로써의 무스타파 케말은 재임 기간동안 종래의 '이슬람 전통'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한 서구식 근대화 작업을 하여 러시아와의 전쟁, 발칸 전쟁, 1차 세계 대전 등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터키인들의 긍지와 사기를 올려서 단합시키는 구심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일차적으로 행정 체계와 사법 체계, 교욱 제도가 바꾸었으며 헌법이 개정되었다. 
터키는 '정교 분리'의 세속 국가가 되었고 대대로 내려오던 '칼리프 제도'는 폐지되었다. 
메카의 정복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이어 받았던 칼리프 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로써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결단인가...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구분한다는 것은 이슬람 사회에서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슬람 범정, 이슬람 공직 제도, 이슬람 학교, 이슬람 종교 제단이 다 폐지되어서
오늘날 터키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자유의 나라>가 되었다. 


 


대대로 내려 오던 이슬람력 대신 국제 표준시와 국제 표준 달력이 채택되었으며

기존의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주간 공휴일이 변경되었고 성(姓) 사용법을 통과시켰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되었고 여성에게도 투표권과 참정권이 주어졌으며 공공 기관이나 학교에서 여성들이 히잡을 쓰는 것을 폐지하였다.



그 중 최고의 개혁은 문자 개혁이다.

말은 있되 글이 없어 아라비아 글자를 사용하던 터키 사람들에게 1928년 무스타파 케말은 라틴 문자를 기초로 하여
터키어 발음에 맞는 문자를 만들어 공포하였으니 터키인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의 문자를 갖게 되었다.
우리 세종대왕처럼 새로운 글자를 창조해 낸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가 국민을 위해서 자기나라에 맞는 문자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선 
세종대왕의 업적에 버금가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이 없이 지내던 터키인들에게 성(姓) 사용법이 의회를 통과하자
터키 국민들은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는 새로운 성을 선사하였다. 
이 사실이 보여주듯 그에 대한 터키인들의 사랑과 존경은 신에 버금 갈 정도이다.


혁명보다도 더 단호한 개혁 정치를 단행한 아타튀르크.....
오랜 세월동안 이슬람에 젖어있던 국민들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국민들은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심으로 잘 참고 견디며 따라주었고
그의 사후
오늘날까지 터키 국민들은 그에게 변함없는 존경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터키를 구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친 지도자.
'터키의 아버지(아타튀르크)'라는 그 이름과 같이 온 국민이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고 본받는 지도자.
우리에겐 이런 훌륭한 지도자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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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사람이 동시에 사랑한 땅', 터키 이스탄불 거리는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과거와 현대가 뒤섞인 구시가지의 뒷골목에는 이 거리에선 말이 끄는 수레와 최신형 벤츠가 뒤섞여 다니며 
차들은 세울 곳만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주차를 하고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집들과 모스크의 첨탑보다 더 높이 솟은 호화 현대 아파트들이 뒤섞여서 조화를 이룬다.

시내 한가운데를 둘러싸고 있는 1,500년이 넘은 비잔틴 시대 성벽 유적 옆을 수많은 차들이 뒤엉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메트로, 트램, 버스, 돌무쉬, 택시.....등 다양한 교통 수단이 한데 뒤섞여 지나간다.

미니버스인 돌무쉬는 일반 버스보다 편리하고 싸서 서민들이 자주 이용한다.

'가득하다'는 뜻의 돌무쉬는 말 뜻 대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은데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승객을 태운다.

돌무쉬 운전자들은 동시에 여섯 가지 일을 해낸다고 하는데 승객들과 잡담을 하며 차창을 닦고,

맞은 편에 오는 돌무쉬 운전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요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며,

길가에 돌무쉬를 타려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 그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을 한다고....

고속 도로가 잘 발달된 터키는 도시의 오토가르(Otogar,장거리 버스 터미널)마다

 

'오토뷔스(Otobus,버스)'가 잘 구비되어 먼 거리를 냉방 장치가 잘 된 안락한 좌석에 앉아 갈 수 있다.

오토뷔스는 남자 차장으로부터 간식과 차까지 대접받을 수 있으며 화장실은 물론 뷔페까지 설치된 2층 버스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오토 버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벤츠 버스가 즐비하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갖가지 살림 살이를 싣고 이사가는 트럭을 만났다. 세간 살이도 몇 안 되는 걸로 보아 자취하는 청년 둘이 이사를 가는 것일까?
 

우리네 이사 풍습처럼 거울을 제일 마지막에 실었는데 주인들도 짐칸에 실려서 이사를 간다.
 


터키의 고속 열차는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오가는 '푸른 기차'뿐이다.

그러나 터키에서 기차는 아주 안전한 교통 수단이며 기차의 등급은 없으나

식당차에는 제복을 입은 웨이터들이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다양한 메뉴를 날라다 준다고 한다.
 

 
터키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당이 있어서 누구나 자신의 기호와 주머니 사정에 알맞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

특히 이스탄불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굉장히 많은데 터키 요리는 세계 3대 요리에 속할 만큼 훌륭한 요리이다.

이 집은 되네르 케밥이 무지 맛있었던 식당으로 기억된다.

터키 사람들은 쪼끄마한 식당에 가도 식탁보를 정성스럽게 깔아놓는걸 잊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식탁 매트를 깔거나 유리를 깔지 않고 수가 놓이거나 레이스가 달린 하얀 식탁보를 정성껏 깔아 놓는다.

바자르에 가면 여러가지 종류의 레이스로 된 식탁보나 뜨게로 된 식탁보가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식탁보를 까는 것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이다.

 
식당 건물에 붙어 있던 전통 화덕인듯....요즘은 쓰지 않는지 주변이 깨끗하다.

 
 식당에서 남자들끼리만 식사를 할 때에는 초대한 사람이 계산을 하지만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할 때에는 남자가 반드시 음식값을 부담한다.이곳은 남성다움이 중요한 사회이기 때문...

 이 인형은 메뉴판을 펴놓고 바구니에 앉아 있는데 구두 사이즈가 맞지 않는지 신발을 반만 신은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터키의 식당 입구에는 가격표가 비치되어 있지 않다.입구가 지나치게 호화로운 곳은 대체로 음식값이 비싸지만 그것이 맛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식당 안은 좁아서 대부분 바깥에다 식탁을 베풀어 놓고 손님을 받는다.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식당 바깥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다. 

간판도 제대로 붙지 않은 구멍가게에도 과일은 항상 풍성하다. 구멍가게 풍경은 우리네 옛날 가게 풍경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블루 모스크 축대 바로 맞은 편에 있던 한국 음식점이 있는데 음식은 그다지 맛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음식점 바로 옆에는 안내판도 없는 오래 된 유적이 있는데 이스탄불에는 이렇듯 가는 곳마다 길거리에 유적이 널려 있다. 

쟁반에다 무엇인지 먹을 것을 받쳐들고 가는 이스탄불 소년..음식 배달을 가는 것으로 보인다. 

쇼핑의 천국 터키는 가는 곳마다 활력이 넘친다. 유럽에서는 저녁 시간만 되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도시가 온통 적막에 쌓여 있는 경우가 많지만 터키는 도시 중심의 큰 상점과 백화점을 제외한 주택가의 모든 상점은 10시 이후까지 영업을 하며 관광객이 많이 찾는 해안가나 관광지의 상점들은 우리나라 처럼 새벽까지도 물건을 판다.

 터키의 가게 점원들은 친절하고 민첩하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물건을 구경하고 차나 한잔 마시라고 권한다. 이런 상황에 익숙치 못한 외국인들은 물건을 강매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지만 마음이 약해서 차마 거절치 못하고 가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멋진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손님들은 가게 점원들과 마치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한 것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 받게 된다. 물건을 사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이스탄불 시내를 오고 가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첨단 패션을 잘 소화시키는 젊은이들이다. 여자들은 히잡을 두르고 몸에 피트되는 청바지를 입고 명품 썬글라스와 핸드백을 멘 언발란스한 패션이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지.....

원래 터키의 아가씨들은 미모가 출중한데다 대부분 피부가 하얗고 스모키 화장을 진하게 하므로 눈이 크게 부각되어 이방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여 여행자들은 아가씨들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면 면 여자나 남자나 대부분 배가 나오고 살이 찌게 된다.  

사원 근처의 히잡 여인들도  다른 이슬람 나라와는 달리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법으로 관공서나 학교에서 히잡이 금지되었지만 이곳의 여인들은 종교적인 이유와 패션으로 히잡을 즐긴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무슬림 남자들은 여자를 무시하고 가정에 관심이 없을 것 같으나 수퍼에는 온 가족이 다 함께 쇼핑을 오며 관광도 꼭 같이 한다든지 실제로 우리나라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연세가 꽤 된 히잡 아주머니가 캠코더를 휘두르는 것이 너무 멋져 보여서 포즈를 부탁했더니만면에 웃음을 띄면서 아주 다정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아야 소피아 앞에서 너무나 멋진 구두닦이 할아버지를 보았는데 너무 열중하고 있어서 인사를 못 걸어보았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어찌 저리 깨끗한 옷차림일까...그 점이 궁금하다. 

터키 사람들은 특히 유머 감각이 넘친다. 길거리에서 우리나라 장기와 비슷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는 "원 달라~!"라고 말한다.진짜인줄 알고 멈칫 하니 이 남자들은 막 웃으면서 카메라를 위해 기꺼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하늘색 정복을 입은 교통 경찰이 손짓하여 버스를 세운다.'운전 기사가 신호 위반을 했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열린 문으로 경찰이 뭐라 뭐라고 하니 운전 기사가 생수를 두병 전해준다. 아항......교통 정리를 하던 경찰이 더위에 목이 마르니까 물 좀 달라고 차를 세운거로구나... 참 재미있기도 해서 얼른 셔터를 눌러 경찰을 찍었다.


 

근데 사진 찍힌 교통 경찰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핸드폰을 슥...꺼내는 것이 아닌가..?  핸드폰을 꺼낸 경관....버튼을 삑삑....누르더니 필자를 향해서 조준하고 찰칵...!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관광객을 보고 핸드폰 사진을 찍는 교통 경찰이라니......!

정말 이스탄불에서나 볼 수 있는 여유만만하고 재미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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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 제국의 수도, 유럽과 아시아의 가교...이 명칭이 모두 가능한 곳은 세계에서 단 하나.....바로 이스탄불이다.


이곳은 단순히 이스탄불로만 부르기에는 성이 안 찰 정도로 '감동이 밀려오는 도시'이다.
터키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이희철 박사에 따르면이스탄불은 "아! 이스탄불..." 이란 감탄사로 로 불러야 느낌이 차 오는 그런 도시라고 한다.  

 역사 시간에 우리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던 동로마 제국이 AD 330년부터 AD 145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아 번창했고그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도 AD 1453년 부터 AD192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니1600년간 세계를 주름잡은 대제국의 수도를 지낸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골든 혼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 이미지 출처: http://www.reisenett.no

            이스탄불 2,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단 몇 줄로 줄여서 설명해 보면.... 이스탄불의 가장 오래 된 이름은 '라고스'였다.현재의 사라이부르누에 세워진 라고스라는 도시는 BC 660년  '비잔티움'이 이 도시에 세워질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비잔티움이란 명칭은 그 지역에 새롭게 거주한 그리스인 메가라 족의 족장 '비자스'의 이름을 딴 것인데이 명칭은 로마 시대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까지 계속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헤레나 여제, 이미지 출처: http://upload.wikimedia.org

 AD 324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상업,교통,방어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비잔티움에 도시 재건을 시작하여6년 만인 AD 330년에 완공하고 이름을 '노바 로마'로 하였으니 바로 '새 로마'라는 뜻이다.그리하여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바뀌게 된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그린 그림, 이미지 출처 :http://www.constantinople.org.uk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제국 내부의 경제 파탄 및 부패로 인해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두 아들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정치,경제적으로 강해지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 비해상대적으로 약해져 있던 서로마는 AD 476년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되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리던 동로마 제국에 의해 이어져 나가게 된다.

  성 소피아 성당(하기야 소피아)              

               로마 제국의 상속자이자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은 황제의 강력한 지배와 군사적 통치권을 강화하게 되는데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AD)때에는 국력을 확장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는등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스탄불 시내를 둘러싼 비잔틴 시대 성벽 

       이로써 비잔티움 천도 AD 330년부터 AD1453년 수도 함락까지  1123년간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격, 이미지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에 제동을 건 것은 11세기말 튀르크계인 셀주크 제국이었으니셀주크의 침공과  십자군 원정에 의해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비잔틴 제국은 점점 약소국으로 전락하다셀주크 투르크족이 건설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매드 2세의 침공으로 인해 AD 1453년 비잔틴 제국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 당하게 된다. 

  전성기 오스만 터키의 영토, 이미지 출처 :http://www.bahaullah.org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칭하는데 이후 16세기 쉴레이만 1세 황제 때에 동서 정벌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르는 최대의 영토를 가지게 된다.또한 메카의 정복과 함께 마호메트의 자손들에게 내려오던 '칼리프'라는 칭호를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이어받게 되니 오스만 제국은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1912년의 이스탄불,   이미지 출처 :http://www.dimitris.gr

  건국 초부터 쉴레이만 황제 때까지 오로지 영토 확장에만 주력해 왔던 오스만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하여 최대 전성기와 함께 점점 쇠퇴가 오기 시작하는데17세기 후반 빈공격 당시 곤경에 봉착한 것을 계기로 수 차례에 걸친 패전을 겪은 뒤 인해 제도를 서구화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한다.

 이스탄불 전경, 이미지 출처 : http://www.firstworldwar.com

20세기 초 열강들의 영토 점령으로 인해 패색이 짙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독일이 패전하자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될 형편에 놓이게 되고400년 이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온 그리스조차 아나톨리아(터키 중부의 땅)의 일부를 요구하고 나선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이미지 출처 :http://lh4.ggpht.com

 이 때 터키 공화국의 국부(터키어로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이 등장하여 열강에 의한 영토 점령에 반대하고 민족적 저항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데 1921년 아나톨리아로 공격해온 그리스 군대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대패시키니 다른 나라 군대 또한 스스로 철수하게 된다.1923년 로잔평화조약에 따라 공식 국가 승인을 받아 1923년 정식으로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니이스탄불은 제국의 수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륙에 있는 앙카라로 넘기게 된다.  

   이스탄불의 위스크다라 지역 (가이드북 스캔 이미지)


그러나 아직도 터키의 경제, 문화, 관광의 중심지는 이스탄불이라고 할 수 있으니 
터키 여행에서 이스탄불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앙꼬없는 진빵'이 되고 마는 격이다.

 동서양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  이미지 출처 :  http://www.information-turkey.net


딱딱한 역사를 읽어 내려가는데는 언제나 지루함이 따른다.
하지만 2,700년 내려온 이스탄불의 역사를 위와 같이 단 몇 줄로 간단히 기술하여 보았으니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인 이스탄불을 이해하는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자~그럼.....무한감동이 밀려오는 도시 이스탄불로 떠나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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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면 터키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코니아(콘야,Konya)'라고 대답한다.
수도 앙카라에서 250 k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인구 80만이나 되는 대도시가 왜 제일 보수적인 도시일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코니아에 내려보았더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경에서 '이고니온'이라고 불리웠던 코니아는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로마,헬라 제국 시대에는 브르기아 지방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 시대에는 수리아와 에베소를 연결하는 유명한 상업 도시였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이 곳을 방문하여(사도행전 13:51)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 신자를 얻게 된 기록도 있으며(사도행전 14:1~7)

1071년부터 1308년까지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수도이었기도 한  유명한 도시이다.


그런데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코니아가 알려진 이유 중의 하나는
이 곳이 '메블레비'로 불리우는 터키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 종단의 발상지라는 사실 때문이다.
메블레비 교단의 창시자인 '메블라나 젤라렛딘 루미'는 글을 모르는 일반 대중도
쉽게 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마'라는 수행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세마'는 흰 옷을 입은 수행자들이 음악에 맞춰 끝도 없이 뱅글뱅글 돌며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방법이다.

수피즘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도 누구나 한 번 정도는
팔을 하늘로 치켜 들고 뱅글뱅글 도는 세마 명상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세마 명상춤은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의 정교 분리 정책에 의해서 일시 금지되었으나
지금은 완화 정책으로 인해서 다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메블레비에서 세마를 추는 사람을 '세마젠'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의상이 흰색인 것은 수의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춤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이 걸치는 검은 색 망또는 무덤을 뜻하고 머리에 쓰는 긴 모자는 묘비를 의미한다고.....
인간이 가장 겸손해지고 솔직해지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신과의 합일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란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나. 

이 곳 코니아의 메블라나 박물관에는 수피파의 시조 메블라나의 묘가 있으며
터키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온 몸을 검은 차도르로 휘감은 여성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도시이다.

신비주의 이슬람의 도시 코니아는 셀주크 터키 술탄의 궁정이나 알라딘 자미(사원)등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도시이기도 하지만
현재는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어서 도시의 풍경은 황량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신개발 지역이 더 많이 눈에 뜨이는데
이런 주택 지구는 밋밋하게 지어진 아파트, 나무 하나 없는 주차장 때문에 너무나 삭막한 느낌이 든다.

신주택지구에는 주상 복합 스타일의 아파트가 많은데 우리처럼 베란다가 새시 유리로 되어있는 경우는 많이 없고
대개의 경우 베란다에 커튼처럼 커다란 흰 천을 쳐놓았다가 한낮에 태양이 내리쪼일 때 가려서 열기를 막아준다. 

코니아 변두리는 훨씬 더 터키 색이 강하다.
삼륜 오토바이 뒤로 파랑과 초록문의 색감이 참 고운데 터키 사람들은 건물 색을 다양하게 쓰는 것이 특징이다.

 

터키의 어느 마을을 가도 그렇듯이 펩시의 간판이 자리잡고 있고
코딱지만한 잡화점에는 잡다한 생활 용품등이 길가에까지 전시되어있다.

가게 앞에 있는 엄청나게 큰 용량의 세탁 세제들이 시선을 끄는데 이것은 터키의 가정들이 예민할 정도로 청결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터키 주부들은 일상 중 많은 시간을 마룻바닥을 솔로 문질러 닦거나 속옷을 세탁하고 삶는 일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TV 광고의 많은 부분이 청소용품 광고로 채워져 있을 정도라고 한다.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관광지도 아닌 보수 이슬람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다 혹시 잡혀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들고 약간은 무섭기도 했지만......
호텔을 나서니 길에는 어디에서인지 뿌연 연기가 나와서 거리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울리며 온 도시를 내리덮고 있어
가슴을 찍어 누르는 듯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이 온 몸을 감쌌다 

그런데 아잔 소리가 나면 다 길가다 엎드려 메카 쪽을 향하여 기도할 줄 알았더니
아잔 소리가 나든 말든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제 갈길을 가고 있다.

길에는 여자나 남자나  혼자서 다니는 사람들은 잘 없었고 가족 단위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히잡을 두르거나 검은 차도르를 발끝까지 덮어 쓴 여자 옆에는
자유로운 복장을 한 남편이 아이를 안거나 손을 잡고 따라 다니고 있어서

이슬람 가족들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매우 가정적인 분위기란 걸 한 눈에도 느낄 수 있었다. 

 

재래 시장은 우리나라 90년대 같은 분위기였는데  가게 마다 마네킨에다 옷을 입혀 세워둔 것이 특징이었고
특히 가운데 마네킨은 어디가 부러졌는지 노끈으로 목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 벽 사이의 철근에다 고정시켜 놓았다.  

 

가방, 신발, 속옷 등을 함께 파는 가게 앞의 남자 마네킨은 맨 머리에다 넥타이를 두르고 있다.
우리 나라의 노래방 패션이 터키로 옮아간건가...? 

 

터키의 극보수도시 코니아 재래 시장에도 어김없이 짝퉁은 넘쳐나고 있다.
마네킨들의 수염은 매직펜으로 직접 그려 놓는 센스....^^

시장에서 나와 다운타운을 걸어가니 조그만 애들이 떼를 지어 따라왔다.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는 도시인지라 자기들과 다르게 생긴 동아시아 사람이 무척 신기한가 보다.
아이들은 큰 눈을 반짝이며 신기한 표정으로 졸쫄 따라다녔는데 그 중에 용기가 있는 애들은 "Hello~~"하며 인사도 건넨다.
손을 흔들며 웃어주면 부끄러움을 타며 도망가기도 하고 어떤 애는 같이 손을 흔들며 까르르 웃기도 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길을 걸어오다가 마주치면 깜짝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외지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코니아에 동아시아 사람이 나타나니 그들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자기네들끼리 힐끗거리며 쳐다보며 수근수근한다. 
"와...저 사람 봐라. 어디서 온 사람이야..? 중국 사람? 일본 사람? 아냐...한국 사람일거야....근데 여기에 웬 일로 왔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코니아 거리 구경을 하러 갔다가 도리어 그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 구경을 시켜준 형편이 되었다. 

재래 시장을 지나 중심가를 한참 가니 상당히 큰 Multi-Flex 가 나타난다.
할인점, 영화관,레스토랑이 모두 모여있는 복합 건물이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니 'Afra'라는 엄청 큰 할인점이 있다.



할인점  'Afra' 입구에 있는 간판 중 indirim 은 discount라는 의미인 듯....아마 그 날의 특별 할인 품목을 광고하는 것 같다.

할인점 안은 우린 나라의 매장과 거의 비슷하고 없는게 없는데 매장 안이 갖가지 물건으로 넘쳐나고 있다.
남편,아내,아이들.....온 식구들이 같이 쇼핑을 나오는데 애들의 수는 둘이나 셋,경우에는 네 명 씩도 데리고 나온다.
카트에다 애들을 태우는 건 우리 나라와 모습이 꼭 같다.
하얀 치마,검은 상의를 입고 검정과 흰색의 스트라이프가 있는 히잡을 두른 뛰어난 패션 센스의 아줌마가 눈에 뜨인다.
히잡(스카프)은 여자들의 패션 품목으로 대부분 수십개씩 가지고 있어 옷에 따라 바꾸어 매고 다닌다고 한다. 

 

트렌치코트와 히잡, 숄더백의 색감을 잘 맞추어 입은 아줌마들이 여기도 눈에 뜨인다.
아내들의 장보기에는 남편들도 꼭 따라 와서 같이 물건을 고르는게 아주 보기가 좋아보인다.
뒤에는 경품으로 차 한 대를 준다는 광고가 걸려있는데 우리 나라 마티즈와 모양이 같다. 마티즈인가.....?



역시 할인점에선 세일하는 옷을 사야 본전을 뽑는 법......
사진 찍는 이방인 여자가 신기해 보이는지 건너 편에서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신기해 하고 있다. 

 

갖가지 모양의 수제 소시지가 먹음직스러운 가공 식품 코너.
우리 나라 소시지는 거의 돼지고기로 만들지만 이곳엔 돼지고기 소시지는 없다.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할인점의 식육 코너에는 양고기가 대부분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아저씨인데도 몹시 수줍어한다.

 

촌두부같기도 하고 빨래 비누같기도 한 이것은 오리지날 핸드메이드 치즈.
수작업으로 만든 치즈라고 하니....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긴다.

 

땅이 기름지고 비옥한 터키는 과일과 채소의 천국이다.
모두 다 박스 채 과일을 사는데 우리 나라같이 과일 몇 개 사는 건 터키에서는 없다. 
그만큼 과일이나 채소등 농산물은 엄청나게 싸다.
터키가 국민 소득이 높지 않은데도 국민의 생활 수준이 그리 낮지 않은 것은
농산물이 아주 싸서 모든 식량이 자급자족되기 때문이라고..... 

과일 박스 뒤편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도르로 둘러싼 여자 발견.....
이스탄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차도르 입은 여인이 콘야에는 여기저기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 터키 사람들은 사진찍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아주 시골 사람이나 골수 이슬람 신도들은 사진 찍는 것을 안 좋아하기 때문에 정면에서 찍을 수가 없어서 뒤에서 몰래 찍었다.

 

히잡이나 차도르로 둘러싸고 있지만 그녀들의 속옷은 우리네보다 더 화려하다.
소박하고 점잖은 여인들의 옷 속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심히 야한 속옷들을 입고 있다고 한다.
검은 차도르로 온 몸을 감싸고 눈만 내놓은 여자들까지도.....

향수 매장에서는 매장 전체에서 유일하게 여자 점원이 향수를 팔고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엄청난 미인이다. 
터키의 젊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초절정미인인데 그들의 신비로운 화장이 한 몫을 더 한다.
원래도 흰 피부에다 파운데이션을 하얗게 바르고 눈에는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는지라 크고 검은 눈이 더 신비롭게 보인다.
그리고 머리에는 히잡을 두르는데 옷은 자유롭게 입고 심지어 최신식 청바지도 잘 소화시킨다.
히잡에 청바지라.....무지 언밸런스한 것 같은데도 그녀들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에는 청바지에 선글라스, 명품 백을 들고 히잡을 쓴 멋진 여인이 즐비하다.



터키 사람들은 여자나 남자나 미혼일 때는 환상적으로 몸매가 이쁘지만 결혼하면 다 엄청나게 살이 찐다는게 슬픈 일이다.

 

키 19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꽃미남 청년이 할인점에서 치즈를 팔고 있다.
민간인이 이 정도 수준의 외모이면 연예인은 도대체 얼마나 잘 생겨야 한단 말인가.
치즈 파는 청년을 사진 찍으려고 주위에서 머뭇거리자 시선을 의식한 이 청년, 필자 쪽을 쳐다보고 눈을 찡긋하며 눈웃음을 친다.
여자랑 눈을 마주치면 어김없이 살인 미소와 눈웃음을 보내는게 터키 남자들의 특징.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이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나 좋아하며
치즈 포장하던 일도 잊어 버리고 한참 동안 포즈 취하기에 열중한다.

 

여자들이 서비스 산업에 진출하는 것을 꺼리는 터키에서는 계산대의 직원도 남자다.

 

이슬람의 나라답게 할인점의 서점에는  코란을 파는 코너가 있다.
코란의 가격은 24.212 YTL(신터키리라) 이니 우리 돈으론 약 2만원 쯤 되겠다.
15세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이 소년은 
사진 찍는것을 의식하고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빠알개지며 말까지 더듬는 것이 너무나 귀엽다.

사실 터키의 국교는 이슬람교가 아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는 이슬람의 오랜 인습이 터키 개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지 않고 정교 분리의 정책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 단체가 정당을 만들 수도 없고 일부다처제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관공서나 학교에서에서 히잡을 쓰거나 예배 행위를 하는 것은 금물이며
종교의 자유는 보장을 받아 모스크,기독 교회,유대인 회당이 공존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금요일 예배 시간에도 모스크 안에는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반면
모스크 밖에서는 그 시간에도 차 마시고 술 마시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밤 늦게까지 코니아의 다운 타운 구경을 하고 호텔로 가서 누우니 시장에서 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콘야는 골수 이슬람의 도시라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나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코니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미소가 넘쳤고 그들이 보는 시선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먼 터키의 한구석인 이곳 코니아 역시 '사람이 사는 도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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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아다나(Adana)는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르의 뒤를 이어  터키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

2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중공업과 면화,밀감 산업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당차고 세련된 현대 도시이다. 

하지만 도시의 중심지를 벗어나면 금방 우리나라 면소재지 같은 느낌의 동네가 나타난다.






아침 출근을 위해 부지런히 서두르고 있는 모습은 어디나 다 같다. 






청소차 인부의 모습도 정겹고.....



아무렇게나 난립한 건물과 두서없는 간판들은 우리나라 소도시와 비슷한 느낌을 주어 너무나 친근하다.




오랜만에 보는 손으로 쓴 광고판도 정겹다.





 

터키어로 호텔은 오텔(Otel)이라고 한다. 오텔... 어감이 참 재미있다.



 
 


코딱지 만한 가게도 이름은 마켓이다. 





 


데니즐리로 가는 버스인가....길에는 소형 버스도 눈에 많이 뜨인다.


 


아다나에서 안디옥으로 가는 국도의  주변에는 여기저기 새로운 아파트들이 많이 건축되고 있었다.

넓디 넓은 국토를 가진 터키도 아파트 건축 붐이 일고 있는 듯......그런데 아파트 색상은 아주 컬러풀하다. 



우리 나라의 아파트는 장방형으로 되어 옆으로 집들이 붙어있는 유형이 많은데  비해

터키의 아파트는 사방으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사방으로 집들이 붙어있다. 마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이렇게 베란다가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도 보인다.








마을을 지나면 가는 곳마다 평지와 야산에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다. 

터키특산 올리브유는 참 질이 좋고 올리브 제품도 매우 다양하다.



 


어수선한 듯 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아다나를 지나 안디옥으로 향한다. 

아다나(Adana)에서 안디옥(안티오크,Antakya)으로 가기 위해 아다나에서 차로 번잡한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다시 남쪽 해안 도로를 거쳐 이스켄데룸을 지나 하타이(Hatay)로 가는 여정이다. 


 


가다가 잠시 정차한 주유소 겸 휴게소에는 엔진 오일 등 자동차 용품을 팔고 있다.

만면에 웃음을 띈 경찰 두 명이 동네 아저씨와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경찰도 무지 한가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주유소에 딸린 식당에는 찾는 손님도 거의 없다.

터키에서는 화장실이 모두 유료인데 식당이나 주유소에 딸린 화장실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트럭을 대어놓고 잠시 쉬러오는 운전기사. 주유소에 들리는 차도 많이 없이 한산하기만 했다.

  

 


길에서 본 건물 중에는 아래는 입주가 완료되어 있고 위에는 미완성인 채로 건물이 구멍이 뚫려있는 건물이 제법 눈에 뜨인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건축주가 돈이 모이면 다시 위층을 신축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해도 준공 검사를 해주는지 궁금한 부분이었다.



짙푸른 터키의 하늘 아래 건물은 모두 지극히 컬러풀하다.

건물의 색깔로 쓰지 않는 색이 없을 만큼 주황색 집 옆에 노란색, 파란색...다양한 색상의 집이 많은데 심지어는 보라색 집도 있다.

베란다에서는 어딜 가나 양탄자를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널린 빨래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흰색의 속옷이 많다.

왼 쪽 아래의 하얀 문의 집은 인터넷 카페이다. 



동네 승강장에는 노닥거리는 동네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보이는데 터키 여자들의 90%는 미인이다.

가는 곳 마다 눈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의 미인이 널려있고 터키 남자들 또한 엄청 잘 생겼다.

하지만 3,40대가 되면 무조건 살이 찌고 배가 나온다는 슬픈 현실......ㅠㅠ

 
이탈리아 여자들 또한 20대일 땐 모두 모델 같이 쭉쭉 빵빵한데

40대가 되면 한결같이 엄청나게 살이 찌게 되고 특히 다리가 석회암 기둥같이 굵고 울퉁불퉁해진다.

그것은 이탈리아 지역의 물이 석회질이 많아서 그 물을 평생 먹게 되면 나이가 들어 저절로 다리가 울퉁불퉁하게 굵어진다는 얘기였다.

터키도 지형적인 영향으로 그렇게 살이 찌는지 아님 음식의 영향인지 알 수 없으나 나이 든 사람들은 대부분 살이 찌고 배가 나온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 도둑이 있는 법인지.....방범창이 설치된 집들이 보이고 빨래 건조대의 모습도 우리와는 다르다.

차도 많이 다니지 않는 2차선 도로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육교는 과연 얼마나 이용이 될까....? 



육교 아래에 있는 부식 가게에는 나무 상자에 채소들이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다.

토마토,가지,피망,양파,감자,오이,마늘,사과,수박,거기다 엄청나게 큰 고추까지.....

색깔이 다양하고 신선한 채소들은 우리네 부식가게의 채소보다 훨신 당도가 뛰어나고 싱싱한데다 값까지 싸다.

'신이 사랑한 나라 터키'에는 각종 곡식, 채소, 과일이 풍성한지라 국민의 일용할 식량은 풍성하고 삶은 늘 여유롭다. 



자주색 양파가 얼마나 큰지.....어른 주먹보다 훨씬 더 크다.

 


동네 수퍼의 간판은 어딜 가든지 펩시 아니면 코카콜라이다.

터키 어디를 가도 동네 수퍼 간판이 코카콜라나 펩시콜라로 되어 있는 걸 보면 이들의 가공할 만한 시장 잠식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담배,껌 여러가지 주전부리를 파는 동네 가게에는 보드카 광고와 아이스크림 광고가 같이 붙어있고

아이스크림 냉장고 안에는 바 형태의 한가지 아이스크림밖에 없었는데 아이스크림 가격은 우리 나라와 비슷하다. 



역시 동네 수퍼. 장사가 잘 안 되는지 주인 아저씨가 밖에 나와서 어슬렁대고 있다.



옷 가게 쇼윈도에는 살짝 촌스런 옷들이 진열되어 있고 많은 마네킨이 쇼윈도를 장식하는게 예전이 우리네 가게들을 보는 듯 하다.








어설픈 옷가게 앞에는 비싼 외제차가 떠억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벤츠나 BMW같은 고급차도 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정육점엔 양고기가 다리채로 주렁주렁 걸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집집마다 깡통이나 플라스틱 통에 화초를 심어 열심히 가꾸는데 터키 여자들은 집안과 밖을 늘 거울같이 청소하므로 거리는 어딜 가든 깨끗하다.





정육점 옆엔 인터넷 카페(PC방)가 자리잡고 있는데 쪼끄만 마을에 인터넷 카페가 3군데나 있다. 








계획없이 증축한 듯한 빨간 건물 아래에는 케밥 가게가 자리잡고 있는데 케밥 가게 앞에도 코카 콜라의 광고가 어김없이 붙어있다.

동네 아저씨들은 차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는데 옆 골목의 총각들은 주전자와 물통을 들고 어디에 갔다오는 것일까.....  






그늘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터키의 여유로운 풍경이다.

세련된 맛은 없어도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배어나오는 터키의 마을들은

지나는 여행자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용납해줄 것처럼 편안하게 감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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