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노신공원(루쉰꽁위엔,魯迅公園).  


 



고교 시절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阿Q正傳을 쓴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의 묘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공원이다. 

 

 

 

노신을 기념하는 공원에 한국인들이 뭐하러 가냐고 반문하실 것인데....
지금은 이름이 노신공원이지만 옛 이름이 홍구 공원(훙커우 공원,虹口公園) 이란걸 알면 다들 "아항~" 하실 것이다. 

 

 한국인에게 홍구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윤봉길의 아호인 매헌(梅軒)을 본따 의사의 기념관인 매정(메이팅,梅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1994년에 세워졌고 

 

 1998년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매원 입구에 세워졌다. 

 

 

1929년 어느 날, 서당 뒷산을 산책하던 19세의 윤봉길은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개의 묘표(墓表)를 뽑아서 메고 오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건너편 산에서 내려오던 청년은 윤봉길을 만나자 마자 그를 붙들고 간청하게 되는데
부모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공동 묘지에 갔으나 일자무식인지라 묘표에 쓰인 글을 읽을 수가 없으니
어느 묘가 부모의 묘인지 알수가 없어
할 수 없어 근처의 여러개의 묘표를 다 뽑아서 들고 글을 아는 분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윤봉길은 부모의 함자를 물어본 후 여러개의 뽑힌 묘포 중에
그 청년의 부모의 묘표를 쉽게 찾아내어 주니 청년은 너무나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묘표를 뽑고 그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까?" 라는 윤봉길의 질문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청년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그제서야 깨닫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아이고~~이를 어쩌나~~우리 부모님의 묘를 이젠 영영 잃어버렸네~~!" 하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윤봉길은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 퇴치와 민족 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농민 독본 저술,월진회 조직등을 통하여 단순한 계몽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정신의 부흥을 목적하였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은 기반이 닦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농촌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이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나서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을 철저히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백범과 마지막 조반을 든 후 

차고 있던 새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담담한 심정으로 자리를 나서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일본인 장군들과 주중공사, 주중총영사, 일본거류민단장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열이 끝나고 식전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열혈 청년 윤봉길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제 폭탄을 몰래 숨겨 가지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울분과 애국심을 물통모양의 그릇의 폭탄에 담아

일본인 장군들과 거류민 단장 그리고 일본 공사를 향해 정확하게 던졌고
그 폭탄이 폭발하면서 여럿이 부상 당하고 목숨을 잃은 자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 기사가 그 때의 사건 정황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고 

 

해외 언론들은 다투어 당시 정황을 타전했는데 당시 상하이 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면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중국 1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하고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 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인들은 그를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여 총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애국지사 윤봉길의 유해를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하기도 했다.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서한의 한 구절에서 그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거사 당시 그의 나이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 어린 아이들과 아내,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와 겨레를 향한 그의 뜨거운 애국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Copyright 2010.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사실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직접 보기전까지는 에펠탑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흥미도 없었다.

 

사진이나 TV에서 많은 사진으로 접해본 구조물이지만 그다지 아름답다고 생각지도 않았고

 

오히려 파리의 경관을 해치는 건물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파리에 도착하여 이동하는 동안 차 안에서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처음 본 순간.....



나의 지금까지의 생각은 선입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파리의 어느 곳에서 보든지 에펠탑이 눈에 잘 뜨였는데 



생각보다 아름다웠고 안정감이 있었으며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건축물이었다.

 



에펠탑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이 300 미터의 철탑이다.

 

교량 건축학자 에펠의 설계로 세워졌는데 건설 당시에는 많은 사람의 반대에 부딛혀야 했다.



당시에는 이런 건물의 예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이 탑은



성베드로 성당의 돔이나 기자의 대피라미드보다 2배나 높은 높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 엄청나게 큰 철탑이 파리의 경관을 헤친다는 많은 사람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탑은
그 당시의 싼 노동력으로  몇 달 만에 세워지게 되는데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자리를 지켰다.  



반대 가운데 건립되었던 에펠탑은 마침내 그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파리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 되었다.



에펠탑 바로 아래에 가서 서보니..... 그 위용은 입이 쩌억 벌어질 정도였다.



얼마나 크고 높은지.....새삼 그 크기와 높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펠탑 엘리베이터 입구에 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구불구불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리를 입은 인도 여인네들......히잡을 두른 이슬람 여인네.....동양인....유럽인......



이곳은 세계 각국의 인종 전시장이었다.

 

구불구불한 줄을 따라 기다리기 한시간 이상.....

 



마침내 바로 아래 입구에 도착.....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거기도 사람이 인산 인해이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올라가고 내려오는데 탑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사선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는 탑의 1/3 쯤 와서 또 직선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그곳에서도 기다리는 줄이 탑 내부를 빙빙 돌아가며 줄지어 있다. 

 



미국의 오티스 엘리베이터회사에서 설계한 유리 엘리베이터는 이 건축물의 주요특색인데

 

에펠 탑을 세계 최고의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로 부각시키는데 일조를 했다고 한다. 

 

여러 대의 엘리베이터가 한꺼번에 운행하는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몰리니 질서란건 하나도 없었고

 

완전 무질서의 현장 그 자체였다.



서로 먼저 타려고 밀고 당기고......우리나라 사람만 질서 없는건 아닌가 보다.

 

내 차례 쯤이 되었을 땐 엘리베이터를 걸어서 들어간게 아닌라 밀려서 겨우 끼어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백팩을 문에 세게 부딪히며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나와서 보니 로마에서 샀던 선물용 시계의 케이스가 무참히도 부서져 있었다....ㅠㅠ

 

유리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에펠탑의 골조및 엘리베이터를 끌어올리는 도르레도 훤하게 다 보였는데

 

움직이지 못할 만큼 끼어서 올라가는데도 마침 가장자리에 있었으므로 사진 한장 건질 수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원래 에디슨의 발명품인데 탑 꼭대기 방에는 에디슨과 그의 딸의
 밀랍인형도 전시되어 있다.

 

 

에펠탑 맨 위 꼭대기에 올라가니 아쉽게도 철망이 쳐져있었다.

 

발밑은 아찔하게 느껴지는 낭떠러지......

 

자살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이렇게 철망을 쳐 놓았다고 하는데 약간은 아쉬움이 남았다.

 

 

에펠탑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주변은 녹지가 조성이 잘 되어 있었다.

 

탑 아래 잘 꾸며진 녹지대에서는 각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잔디에 누워서 하늘과 함께 에펠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여유로와 보였다.

 



탑의 바로 아래에 세느강이 보이는데 강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다리와

 

세느강 유람선 바토무슈가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세느강에는 작은 섬들이 여럿 있는데 사진의 보이는 작은 섬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섬이다.

 

유람선은 이 섬을 돌아서 다시 원위치로 가게 된다. 

 

 

황혼 무렵의 에펠탑의 모습은 더 아름답다.

 

하늘에는 아직 푸른 빛이 남아있는데 에펠탑에는 약한 조명이 들어오고 있는 상태라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밤에는 에펠탑의 조명은 더욱 환상적으로 변하고 

 

의 맨위에는 레이저 불빛이 어두운 파리의 밤하늘을 이리 저리 비춘다.



파리 어느 곳에서든 이 멋진 에펠탑의 야경을 볼 수 있는데



이 사진은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지나가다가 찍은 것이라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멋진 야경 사진을 원하시는 진사들이 이곳에 오신다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을 것 같다.

 

삼각대를 버텨 놓고 이 멋진 에펠탑의 야경을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날이 다시 온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