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누구에게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단 하나, 바로 '아야 소피아 (터키어,Ayasofya)',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Αγία Σοφία)'라고 불리우는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아야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 중 최대의 걸작으로 AD537년에 완공되었다.
교회가 건축된 이후로 제국의 멸망까지 새로운 많은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야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축물도 건축되지 못했으므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오르기도 했다.

  

 

이 건물은 537년에 건설되어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 동안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대규모의 복구 사업을 거친 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던 시절에 회칠하여 사라졌던 비잔틴 모자이크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1935년에 교회도,이슬람 사원도 아닌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써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아야 소피아를 방문하기 위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라고 쓰인 입구로 들어선다.

3개의 돔이 예배당인 아야 소피아는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첫번째 건축물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섯개의 돔 건축중의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의 구조를 보면 중앙 돔 정점까지의 높이는 56.6m 이니 무려 1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다. 

건물의 전체 길이는 100m이고 내부 공간의 크기는 75m X 70m로 내부 넓이는 7,570 평방미터(2,300평)에 이른다. 

 

 

 외랑 벽에는 아야 소피아의 역사를 알려주는 설명 판넬이 여러개 붙어 있다.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사실 이 자리에 세워진 세번째 건물인데 AD 360년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이
메갈로 에클레시아(거대한 교회)라는 목조 건물을 세웠지만 404년에 발생한 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416년에 다시 지어진 교회는 532년에 니카 혁명 기간 동안 반란군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두번째 교회의 토대와 계단,부서진 박공 부분은 현 '아야 소피아'입구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외랑의 한 부분에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작품들과 걸개,소형 액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외랑을 거쳐 내랑으로 들어서면 길이가 60m, 넓이가 11m인 내랑의 천정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여 있고 
벽들은 모두 대리석과 아름다운 돌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9개가 있는데 9개의 문 중 맨 끝의 3개씩 6개의 문은 일반인이 드나드는 문이다.
 한가운데의 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고 황제의 문 보다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관직자,사제,대신들이 사용하였다.
황제의 문에 붙어 있던 금판과 대신의 문에 붙어 있던 은판은 라틴군에 의해 도난당했다.  


 

 황제의 문 위 박공 머리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있는데
가운데 보좌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비잔틴 황제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고
양 원 안에는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엄청나게 거대한 돔이다.
동서로 31m, 남북으로 33m인 중앙 돔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는데 이 창으로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 준다.
당시에는 유리가 없었으므로 대리석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하여 창을 만들었단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4개의 창은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10세기경에 보수할 때 파손되어 채광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대리석 판을 얇게 잘랐으면 돌판을 통하여 빛이 비칠까...

 돔의 한가운데는 원래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 이 그림은 코란의 문구로 덮이게 되었다. 

 

 

본당의 후진의 반원 돔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다.
이층의 왼쪽 끝에 가면 더 잘 보이는 이 금빛 찬란한 모자이크는 그림 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고
 옆에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도 있다.

 

 

 돔 옆 네 코너에는 3개의 날개가 달린 체루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천사의 얼굴은 각각 사자,황소,독수리 ,그리고 천사의 모습이었으나
역시 오스만 제국 이후 다각형의 별 모양으로 덮여 버렸다.

 

 
중앙 안 쪽 부분에는 금색으로 장식된 '미흐랍(Mihrab)'이 있다.
미흐랍이란 '이슬람 중심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곳'을 말한다.
이슬람 교도들이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할 때 엎드리는 방향을 표시하는 것인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에 이곳에 미흐랍이 설치되었다.

 

 

미흐랍의 오른편에는 이슬람 예배의 설교단이 있는데 이슬람의 설교자인'이맘'이 금요일에 설교했던 곳이며
미흐랍의 왼쪽에는 1849년에 만든 오스만 술탄의 화려한 옥좌가 있다.

 

 

벽과 코너에는 8개의 거대한 원판이 걸려 있는데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있다.
 

 

 미흐랍의 오른쪽의 판은 알라, 왼쪽에는 무하메드,
그리고 나머지 판들에는 이슬람 초기 칼리프(종교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직경 7.5m의 이 둥근 판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훌륭한 달필이라고 하는데
아라비아 문자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는 글씨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아야 소피아를 짓기 위해 5년간 100명의 기술자와 10,000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에 있는 국가와 소아시아의 대리석 석광에서 가져 왔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와 수학자가 함께 설계해서 세운 이 건물은 가장 자리로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본당에는 40개,위층 갤러리에는 67개가 있고  돔 형식으로 된 이 건물의 한 가운데에는 전혀 기둥이 없다.

 

 

이 기둥들은 에페스의 항구 체육관,레바논의 아폴로 신전 등에서 가져 온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해서 로도스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이 운반되었다.
기둥과 벽의 대리석의 문양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도 자연스럽다.

 

 
하트 모양이 너무나 귀여운 기둥 앞에서 아야 소피아 경비원의 모습을 사진에 같이 담아 보았다.
눈웃음치기를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이지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엔 좀 근엄한 자세를 보인다.
그래야 더 공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그렇지만 이 직원의 굳게 다문 입에도 미소가 서려 있는걸 볼 수 있다.

 

 

 아야 소피아 안에는 이렇듯 고양이가 제 세상인양 돌아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슬람 국가는 거의 고양이 천국이랄 수 있는데 무슬림들의 고양이 사랑은 이슬람 예언자 무하메드가
자신의 옷자락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 옷자락을 잘랐다는 얘기에서 기인한다.
반면 개는 아주 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라서 그런 것일 듯....

 

 

 '눈물 기둥, 혹은 땀흘리는 기둥(Weeping Column)'라는 기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기둥의 물에 닿는 것만으로 병이 나으며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고대로 부터 내려오는 기둥인데
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기 때문에
현재는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판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한가운데 뚫린 구멍에 엄지를 넣고는 손을 떼지 않고 한 바퀴 돌릴 수 있으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
너도 나도 엄지를 넣고 돌려 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바퀴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입구의 오른 쪽과 왼쪽에 놓여 있는 1,250 리터의 거대한 대리석 항아리는 16세기에 페르가몬의 고대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거에는 문 밖에 놓여 있어서 이슬람 교도들이 물로 몸을 청결케 하는데 사용했다는데
발굴 당시 이 엄청나게 큰 항아리 안에 보물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2층 갤러리는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되던 곳이다.
갤러리란 건축물에서 벽을 따라 그 길이만큼 만든 좁은 발코니,또는 플랫폼을 말하는데
화랑(畵廊)을 뜻하는 '아트 갤러리'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갤러리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니고 비탈길인데 그 이유는 다른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에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갤러리의 한쪽 부분은 그야말로 '화랑'으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현대 타일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 갤러리에서 아래 층을 내려다 보니 사람이 자그마하게 보이는게 아찔하기 보이며 높이가 실감이 난다.

 

 

 갤러리 오른쪽의 입구에 있는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면 비잔틴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디시스(Deesis)'불리는 이 모자이크의 내용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인데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표정은 선명하고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다.

 모자이크를 보면 아랫부분이 회칠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자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3일간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이 허용되었지만
아야 소피아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메흐메드 2세는 이 건물을 파괴치 말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건물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교회는 이슬람 사원이 되었고 모자이크로 된 아름다운 기독교 성화들은 회칠로 뒤덮여졌다.
그리고 아야 소피아 건물 바깥에 네개의 미나레트(이슬람 첨탑)도 그 때 세워지게 된다.
1930년대 미국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성화 복원 작업으로 회칠로 뒤덮인 성화들은 이제 하나하나 옛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오른쪽 복도 안쪽 벽에 있는 모자이크는 요하네스 콤네소스 2세와 이레네 황후가
아들인 알렉시우스와 함께 (알렉시우스는 꺾어진 벽쪽에 있어서 사진에 담아지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께 헌금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왼쪽에 있는 모자이크는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여제(女帝) 조에와 그의 세번째 남편 콘스탄틴 모노마쿠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제 조에는 세번 결혼했는데 처음 이 모자이크에는 그의 첫남편인 로마노스 3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결혼할 때마다 모자이크에서 남편의 얼굴과 머리 위에 쓰인 문구를 바꾸었다.
72세로 죽은 조에의 얼굴만이 젊은 시절 얼굴 모습 그대로이다.

 

 

갤러리에서 내려와 출구인 남쪽 입구문으로 나가는 통로의 벽과 천정의 타일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아야 소피아의 내부를 다 관람한 후 나오는 마지막 남쪽 출구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예수께 왼쪽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 소피아를 손에 들고 예수께 봉헌하고 있어 시선을 끈다.

아야 소피아에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바라본 아야 소피아는 석양 무렵의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데
때마침 정원에 서 있던 검은 차도르의 두 여인과 함께 어울려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도대체 그 시대에 어쩌면 저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건축 기술로도 따라잡기 힘든 노하우가 자리잡고 있었을 듯 하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던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1500년 이상 한 자리에 서서 이스탄불의 흥망 성쇠를 바라본 건축물....
 아야 소피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역사의 흐름을 말없이 지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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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치한 '루디아 기념교회'는 바
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5월 20일을 루디아의 축일로 정했는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하였다.   



이 교회의 돔에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형상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 마당 아래에는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세례터가 있다. 

그 전날 상류에 내린 비로 인해 흙탕물이 콸콸 흘러 가고 있었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세례터를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루디아가 세례받았다는 터에 선 것만 해도 기념할 만한 일이다. 




세례터라 알려지는 장소 옆에 아주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이렇게 작은 교회를 그리스에선 '에클레시아'라 부른다.



 

바울이 유럽에서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결신자,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자주장사 루디아라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두아디라(Thyatira,터키어로 Akhisar)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는데

그 당시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었다.

그리고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 후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 지방 염색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하던 여인이 자주장사 루디아였던 것이다.  


 

바울 일행은 지각티스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하였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사도행전16:15)"

그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하여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여러 번 도왔고

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위문품을 보냈다.

이에 바울은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의 '빌립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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