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르는 곳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1970년대에서 시간이 일시 정지하기라도 한걸까? 
면소재지 토담 골목길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길지 않은 골목 끝자락에 이르니 트인 마당이 나타나고
늠름한 모습의 나무 종탑과 함께 기와를 올린 소박한 한옥 건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1903년에 건립되었으니 무려 10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간소한 한옥은
바로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452호로 지정된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로 한국 교회 건축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 공간을 갖추고 있는 개신교 문화재이다.
독특한 건물의 원형이 잘 보존된 자천교회는 영남 지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교회는 1903년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건립된 이 지역 신앙의 요람이다.





자천교회의 역사는 미국인 선교사와 서당 훈장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영남지역 선교 책임을 맡아 대구에 들어온 안의와(아담스, J.E.Adams) 목사는 경북 동부와 동북 지역 선교여행에 나섰는데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인 노귀재에서 고향인 경주를 떠나 대구로 가던 서당 훈장 권헌중을 만나게 된다.

깨어있던 선비 권현중은 안의와 목사에게 감화를 받아 대구로 이주하려던 이삿짐을 내려놓고 
자천리에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사랑방을 예배당겸 서당으로 삼아 낮에는 한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성경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교인이 서당 문동들과 노비와 머슴이 전부였는데
권헌중은 앞장서 상투를 자르고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불태워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깨어 있는 권헌중에게 감화된 신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고
1903년에 기와 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으니 바로 오늘날에 만날 수 있는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 예배당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는 가마니 공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 쓰이는 등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천지역은 한국전쟁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라 당시 모든 집들이 포화를 맞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교인들이 평평한 교회 지붕에 올라 흰 횟가루로 십자가를 그리고 'CHURCH(교회)'라 표시해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당시 영천 화북면 지역에선 이 자천교회와 교회 바로 옆 한옥만 폭격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배당 건물의 외관을 살펴보면 지붕을 넓고 평평한 우진각 지붕으로 얹은 것이 눈에 뜨이는데
우진각 지붕이란  건물 네면에 지붕면을 만들어 귀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도록 한 형태를 이름이다.
이는 전통 한옥의 대문에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독립 건물에 쓰여진 것은 흔치 않은 형태로
일(一)자형 예배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이 되었던 것 같다.





자천교회 예배당의 가장 큰 특징은 남녀 교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내부에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점이다.






25평 정도가 되는 작은 예배당의 정면에는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강대상을 두었는데
신자석에는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다.




                                                                                                       예배당 구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시는 자천교회 손산문 목사님

구한말, 유교사회였던 우리나라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사고는
초기 우리 교회들의 건축물들이 ‘一자형’과 ‘ㄱ자’형으로 지어서 남녀가 구분지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했는데
ㄱ자로 지어진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의 경우 한쪽 날개는 여자석이고 다른 한쪽 날개는 남자석으로 되어
설교자가 서는 강대상은 그 모서리에 위치함으로 남녀석을 번갈아쳐다보며 설교하게 되어 있다.
반면 ‘一자형’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실내 중앙에 기둥이 네개 버티고 있는데 
기둥을 이용하여 중간에 칸막이를 함으로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가 내외하여 서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남녀 신자석을 갈랐던 초기 교회들이 대부분 휘장으로 공간을 구분한 것과는 달리
자천교회 예배당에서는 아예 나무 칸막이를 만들어 공간을 양분한 것이 주목할만한 점이다.
 





설교를 듣는 남녀 신자들은 서로를 볼 수 없지만 설교자는 물론 남녀 신자를 모두 보며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자가 앞에 있는 칸막이로 인해 답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강단 앞에 서보니 예상 외로 설교자의 시야도 별로 가려지지 않고 답답한 느낌도 거의 들지 않는다.





현재의 사고로 보면 참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물의 배치이지만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교 국가에 웬 기독교 교회인가?' 라는 동네 주민들의 반대로 교회 건립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자명한데
오늘날처럼 남녀가 함께 섞여서 예배를 드렸다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겠는가?
이처럼 유교 문화를 지혜롭게 수용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지역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신자석 뒤쪽에 두 개의 방을 낸 것도 이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데 
남녀 신자들이 따로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도록 방을 낸 것이다.





천정을 올려다 보니 대들보와 기둥들이 그대로 다 드러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자재로 쓰인 나무들은 거의 다듬지 않은 목재들로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동네 목수들이 천장이며 들보, 기둥들을 모두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넉넉지 않은 교회 사정에서 목수들이 토속적이고 소박한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 교회를 건축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배당은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게 아주 튼튼한 구조로 지어졌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붕과 벽, 기둥 등이 많이 손상되고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등 훼손 정도가 심각하였다.
이에 2005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하여 안의와 선교사가 생활하던 방을 복원하고
일제시대 때 유리문으로 바뀌었던 창문들도 본래의 창호지문으로 복원하는 등
창문틀의 크기와 위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가의 조언을 거쳐 복원,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물 뿐만 아니라 마당 한켠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 종탑도 방문하는 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집집다다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교회 종소리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기능 외에 신자가 아닌 동네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리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말기, 일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모든 놋 제품을 강제로 징발하였는데
이때 자천교회의 종도 강제로 철거되어 나무 종탑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어두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해방이 되고 1948년에 이으러서야 새로운 종탑을 교회 마당에 다시 세우게 되고 종탑은 다시 구원의 목소리를 되찾게 된다.

집집마다 시계가 있어 대부분의 교회 종탑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
아직도 자천교회 나무 종탑은 은은한 소리를 내며 생명의 목소리를 주변에 널리 퍼뜨리고 있다.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하나님 주신 동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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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함풍제의 후궁이었던 자희황태후이다.

그녀를 일컫는 이름 서태후는 정식 명칭이 아닌데

태후(太后)는 황제의 모친을 일컫는 말로 황제 모친의 정실은 동(東)으로 후실은 서(西)로 표현한데서 이른 말이다.
 


서태후는 한 가난한 한족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서 4세 때 양녀로 팔려갔다가 12세 때 다시 혜징의 시녀로 팔려갔다.

그후에 궁녀로 뽑혀갔는데 우연히 경극을 좋아하던 왕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맘에 들어해 그녀를 품었고 

아들 재순(동치제)을 출산하여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함풍제가 죽고 아들인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를 일소하고 동치제의 섭정이 되는데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 된 아들을 다시 광서제로 옹립하고 섭정이 되어 황실을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던 동태후와는 달리 국정의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쥐고 있었는데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강유위등과 함께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들을 부추켜 다시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만에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시키는 등 무술정변을 일으킨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이용하여 열강에 대한 선전 포고 이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서안으로 피신하였으나

북경 귀환 이후 정치는 대외적으로 굴욕적 외교로 돌아서게 되고 청왕조의 권위는 실추된다.




광서제가 죽고 마지막 황제 '푸이'를 왕위에 세운 후 그날 죽게 되는 서태후(1835~1908).

서태후의 초상을 보면 한눈에도 엄하고 강한 인상으로 중국을 쥐고 흔들만한 기상이 풍겨나오는데.....





북경 시민의 아름다운 휴식처 '이화원'은 바로 서태후의 여름 별장이다.

중국의 최대의 정원이며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황족 정원인 이화원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데

그 면적은 자금성의 4배, 천안문의 6배의 넓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피서와 요양을 위해 이화원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는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하여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 역시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처럼 수많은 관광객들로 문전 성시를 이룬다.

중국은 어딜 가든지 내국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는데
가는 곳 마다 중국의 인구 13억이 실감이 된다.





이화원을 둘러보기 위해서 인수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전각들 중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 눈에 뜨였다.

우리나라도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용은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용이 자는 곳에는 용마루를 둘 수 없다는 등 여러가지 의견도 있으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진바 없다고...






서태후가 정무를 보았던 인수전 전각 앞에는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주작 등 여러가지 동물의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고



 

정원에도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러가지 석물들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이화원의 3/4를 차지하는 곤명호(昆明湖)는 원래 평지인 곳을 파내어 만든 호수인데

인공 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주위가 8km인 곤명호를 일주하는 멋진 모양의 유람선을 타고 곤명호를 한 바퀴 돌면

이화원을 구경하느라 힘들어 배인 땀방울이
시원한 호수 바람에 금방 말라 버리며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 날아가 버린다.
 


 

호수 가장자리엔 군데 군데 조그마한 섬이 있고 그 섬을 아름다운 다리로 연결시켜 놓았다.

서태후는 밤이 되면 호수 안 작은 섬에 숨겨 놓았던 미남자들을 하나씩 자신의 궁궐로 불려들였다고 하는데

서태후와의 하룻밤을 보낸 미남자들은 소문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부하들에 의하여

그 다음날 아침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되었다고 한다.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萬壽山)은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만수산 앞의 산비탈길에 세워진 불향각은 높이 21미터의 거석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남쪽으로는 곤명호를 향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지혜해불전을 기대고 있어서 
이화원의 상징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수산 아래 위치한 장랑(长)은
전체길이 728미터에 총 273칸의 회랑으로

이어진 복도 건축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길며 유명한 회랑이다.

장랑에는 중국 각지의 화가의 그림 14,000 점이 장랑에 걸려있는데

중국 목조 건축물에 꾸며진 장식 예술인 이런 그림을 '소식채화'라고 한다.
 

그림의 주제는 자연과 동물, 인물 전기 등  중국 고전 문학의 내용에 등장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고 한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 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등 사치의 극을 달렸다.

또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제의 아버지는 광서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도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애기 엄마 두명은 목욕을 한 후

젖만 내놓고 몸을 붉은 천으로 감싼 후 다 감싸고 침대에 누운 서태후에게 무릎을 꿇고 젖을 먹였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중국어로 '쎈양'이라고 하는데

얼마전 인터넷에서 중국의 중학교 남학생 수십명이 미혼모 여학생을 협박하여

미혼모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면 모유를 달라고 협박하여 친구들이 공부하는 교실 안에서

여학생의 무릎에 누워 한가롭게 젖을 빠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일이 있다.

처음 여학생을 협박한 남학생은 다른 동료 남학생에게 젖을 빨게 해 주는 댓가로 돈까지 받아 챙겼다고.....ㅠㅠ
 
이런 인면수심의 흉악한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에게서 전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란의 청조 말기, 어떤 이에게는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던 반면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매몰찬 이름이었던 서태후.

무소불위의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서태후가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밟고 서서 만든 아름다운 정원 '이화원'은

지금은 수많은 평범한 북경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북경을 찾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리는 명소가 되어

중국의 관광 수익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으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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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길상면에 있는 온수리 성공회 교회는
고딕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일반적인 성당 건물과는 달리  

전통 한옥으로 지어져 찾는 이들에게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이 성공회 교회는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 가 1906년에 지은 건물이니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을 버티고 서 있음으로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교회 건축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귀한 사적이다.



건물은 시장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붕 위에 솟아 있는 십자가가 이 건물이 성당 건물임을 눈치채게 한다.


 

대문 또한 우리 나라 전통 대문 양식을 본따 솟을 삼문의 종루로 지었고 지금도 종을 칠 수 있도록 줄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은 벽체가 회벽으로 되어 있던 것을 들어내고 원래대로 창살로 고쳐 복원했다고 한다. 
 


종루에 다소곳이 달려 있는 종은 곧 청아한 소리가 들려올 듯 하고 


 
종루 처마의 날렵한 선은 하늘로 날아가듯 솟아 있다.

 


본당의 건물은 정면이 세칸이고 측면은 아홉칸인 동서 절충식 강당형 건물이다.


100년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건물이 깨끗한데 2004년 새 성당 축성 공사를 하면서 함께 복원 수리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서양식 성당 같지 않고 그저 수수한 우리 관아나 반가 가옥의 일부분 같아 친근감을 주는데 
정면 옆 출입문은 항상 열려 있어서 부담없이 그저 문을 드르륵 밀고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입구 문위에 '대한 성공회(온수리) 성안드레 성당'이란 현판이 다소곳이 걸려 있다.  
 


성당 내부는 간막이가 없이 통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두 줄로 네모난 기둥(고주)을 두어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전면은 집례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뒷면 亞자형 문 뒤는 집례 준비를 위한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듯... 


성당 내부 장식과 예배 집기 등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성당의 바로 옆에는 야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새로운 건물이 3층으로 지어져 있다.
원래의 건물에 비해서 경건함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선입견일까.....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이 땅에 묻혀 흙이 된 주교의 비석 앞에 서니
이 민족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그들의 믿음과 희생 정신에 다시 한번 웃깃을 여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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