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운(雲), 문 문(門)......
찬란한 가을빛이 스르르 사라져가고 있을 때 쯤 청도 운문사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돌담길을 지나니 '호거산운문사라'라는 현판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호랑이가 사는 산(虎居山)이라......!
운문사를 둘러싼 산들을 보면 정말로 호거산이라 불릴만큼 산세가 높고 험악하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다. 


 

여승들이 수도하는 절, 청도 운문사.
이곳 여기저기에서는 이렇게 일하고 있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커피 자판기 청소를 하고 있는 여승들도 볼 수 있어 약간의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


 

너무 늦게 간 것일까? 이미 오색찬란한 단풍은 다 떨어지고 겨울색이 완연하다.


 

경내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감나무 끝에 매달린 까치밥 몇개만이 앙상한 나무에 노란빛을 입혀준다.


 

아......이파리가 다떨어지고 남은 나무에 탐스러운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다!
탐스러운 모과 앞을 지날 때에는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며 한참이나 바라보게 된다.



 

비가 오락가락하다...... 구름이 짙게 드리우다...... 변덕스런 날씨가 계속되던 중에
잠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니 다소 을씨년스럽던 경내에도 따사로움이 감돈다.



 

비로전 뒤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비로전 뒷쪽 계곡 위에는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지만 자그마한 문과 함께 출입을 삼가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니 일행 중의 한명이 능청스럽게 손을 뻗어 문 안쪽 빗장을 열더니 다리 위로 올라선다.
"들어가면 안 되는 구역이라는데요?" 하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며 씨익 웃으며 앞길을 인도하길래 
자신도 모르게 살그머니 뒤를 따라 다리 위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다리 위에서 경내를 바라보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여러본 와 보았던 운문사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보니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다리를 건너니 경사진 길이 나타난다. 계단 대신에 놓여진 돌이 비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있다.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 뒤로 돌아보니 소나무 가지 아래로 펼쳐지는 다리와 계곡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일반인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금단의 구역으로 들어서니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운문사 경내와는 또 다른 고요함이 불시에 찾아온 침입자를 반긴다.


 

어.....! 여기는 작은 연못도 있고 그 옆에 팔각정도 자리잡고 있어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군데군데 놓여진 아기자기한 모양의 탁자와 의자들.
의자들은 놓여있지만 그 어디서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너무나 조용하다.



팔각정을 지나고 숲길을 지나 내리막길로 조금 걸어가니 작은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넓은 공간이 나타나도 고요만이 감돌 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군데군데 이렇게 귀여운 동물의 모양으로 키운 조경수들도 많은데 봐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드넓은 경내 군데 군데에는 정자나 암자가 세워져 있고 여러가지 돌 조각들이 놓여 있어 눈이 심심치 않다.
비가 많이 내리면 저 작은 다리 아래도 개울물이 졸졸 흐르겠지.


 

걸어가다 뒤돌아보니 뒤로 보이는 산에는 아직도 늦가을의 기운이 남아 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무들은 빛바랜 낙엽들도 다 떨구어 버리겠지.


 

금단의 구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여승들을 만나 눈총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한바퀴 다 돌아보고 나오는데도 다행히 한사람의 여승들도 만나지는 못했다. 


 

작은 문으로 나서니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다리가 눈 앞에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리라.

 

 

운문사 돌담길을 지나 사리암으로 가는 길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여승을 만났다.


 

한참을 걸어가더니 마주 오던 여승을 만나 한참이나 담소를 나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서서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는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허락없이 금단의 구역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 괜스레 미안하여 빠른 걸음으로 그들 곁을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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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타임머신 여행을 떠난 듯 6,70년대의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계동길.

차 두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은 계동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영진문고와 경기철물건재상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봉산 게스트하우스와 노란벽 작업실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북촌로6길.
얼마 걷지 않아 소나무 내음이 그대로 풍겨나는 듯 단아한 한옥집이 나타난다.

바로 서울 종로구 계동길 북촌마을의 또 다른 진주 '청원산방'이다.






나즈막한 담장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대문채에는 예스러운 글씨체의 '청원산방(淸圓山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담벼락에는 '성심예공원'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 창호 연구소'라는 팻말이 함께 걸려 있다.
이곳 청원산방은 전통창호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라고 하면 되겠다.





미리 전화를 걸어보지 않고 방문한지라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두들겨 보았더니
안에서 기척이 나더니 겨자색 셔츠를 입은 남자분이 나오신다.
바로 무형문화재 소목장이신 심용식 선생님이시다.
멀리 경주에서 청원산방의 소식을 듣고 집의 내부를 구경하러 왔는데
집안을 돌아보아도 실례가 되지 않겠냐고 물으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직접 집안을 안내해 주신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맞은 편을 바라보니 마주 보이는 안채에도 멋진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이름은 
‘계수헌(桂樹軒)’.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처럼 아름답다는 뜻인데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현판이라고 한다.
대문에 걸려 있는 '청원산방(淸圓山房)'이라는 현판과 함께 우리나라 서단의 거목인 초정 권창윤 선생께서
청원산방이 전통문화와 전통창호의 앞날을 은은한 달빛처럼 비춰 주길 바라는 기대와 소망을 담아 쓴 것이다.




일반적인 한옥의 창호는 한가지로 통일되어 있는데 반해 청원산방의 창호는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주 보이는 창호에 정자매화꽃살문과 솟을빗꽃살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대부분 두겹으로 된 청원산방의 문은 안쪽 문이 간결하면 바깥문은 화려하게, 바깥문이 장식적이면 안쪽문은 담담하게 만들어달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ㄷ자 모양으로 조붓하게 들어앉은 방들에는 귀갑살문, 완자팔각문, 정자살문, 꽃완자문......등 각기 다른 종류의 문과 창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통 창호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인 이집의 
문과 창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 방문객들에게 보여진다고 한다.

 




마당 한구석에는 꽃담이 잘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꽃담 아래에 나무로 꾸며진 수도도 있어 운치를 더해주기도 한다.




마당에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운 모래 위에 구들장돌로 된 댓돌이 깔려 있어서
마치 강물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댓돌을 밟고 집안으로 들어가 본다.





장지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방안으로 들어서니 8폭 매화 병풍이 다소곳하게 둘러쳐 있고 그 앞에 나무로 된 침상이 자리잡고 있다.





바깥에서 보는 창호 역시 아름답지만 이렇게 안에서 비쳐보이는 소박한 창호는 화려한 창호보다 더욱 아름답다.
이런 창호는 완자창의 기본인 사분합완자미서기문이라고 하는데 보통 화려한 꽃살문의 내부문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역시 안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완자교살문. 우리 조상들의 디자인 감각은 정말 너무나 현대적인 것 같다.






사분합아자미서기문의 제일 안쪽에는 채광과 외부 조망을 위해 유리를 끼웠다.
이맇게 다소곳하고 정갈한 창호로부터 화려하고 특색있는 창호까지 청원산방에는 모든 창호가 다 모였다.

서재 및 응접실의 용도로 보이는 방에는 책과 찻잔, 기념패등이 서가에 빼곡이 꽂혀 있었는데 서가 또한 방의 구조에 맞춰 직접 짜맞춘 것이다.





서재의 꽃완자문의 유리 너머로 보이는 안 마당과 꽃담이 너무나 아름답다.





바깥문은 소박한 세살문이고 안쪽에는 이렇게 화려한 꽃완자문을 두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서재의 남쪽 부분의 창호는 동산 위에 달이 든 것같은 모양의 달아자살문으로 되어 있다.
마치 만월이 방 안에 둥그렇게 뜬 것 같은 창호를 보니 어쩐지 안쪽으로 발을 디뎌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을 양쪽으로 살짝 밀고 들어서니 거기는 심용식 선생의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다. 이렇게 멋진 컴퓨터방이라니....
더구나 채광을 위해서 이곳의 창호는 한지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에 비치는 무심한 대나무가 마치 한폭의 그림같다.




컴퓨터방에서 왼쪽으로 꺾어 살펴보니 세상에......! 여기는 너무나 모던한 주방이다.
블랙과 화이트로 세련되게 매치를 이룬 주방 가구들을 보니 이런 집에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의 오른쪽에 난 빗살불발기문을 밀고 들어서니 이곳 또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이 펼쳐진다.




유리로 칸막이가 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은 놀랍게도 욕실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다.
욕실에 습기가 많은데 나무가 썩지 않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럴 염려가 없다고 한다.




집안을 하나 하나 설명하면서 설명해주신 후 심용식 소목장께서는
거북이 모양으로 된 대문 빗장까지도 닫았다 열었다 하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창호를 한곳에서 다 만날 수 있는 청원산방을 지으신 심용식 소목장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 되던 1969년부터 10여 년 동안
조찬형 선생에게서 전통창호 제작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톱밥가루와 6년을
함께한 끝에 수덕사에 첫 작품을 걸었다고 한다.





이후 심용식 소목장은 이광규, 최영한, 신영훈 선생을 만나 목재 고르는 법, 연장 다루는 법 등
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과 실습뿐 아니라
장인의 자세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안목을 배우며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국내외 중요 건축물의 창호 제작에 참여하여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1981년 성심예공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전통창호 제작활동을 했다.






그는 문 하나를 만드는 데 집 크기, 바람세, 빛의 양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까지 고려해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는데.......





좋은 나무를 찾느라 발걸음 내딛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오랜 세월 나무를 만지면서 축적한 감각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계보다는 수작업으로 모든 창호를 제작한다고 한다.

이러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철학을 집대성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6년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창호제작)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에는 ‘서울전통예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백 가지 전통창호의 명맥을 잇는 것은 물론, 전통 창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창작하기도 하는데......
 





그가 작업한 전통 창호 작업들을 보면 낙산사 원통보전, 동학사, 백담사 대웅전, 불국사 선원, 불영사, 석남사, 송광사, 
수국사, 수덕사, 운문사. 운주사,해인사 비로전 ......등 사찰의 꽃살문들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춘전, 양화당, 문정전, 창덕궁 인정전 등 궁궐의 꽃살문,




과천 제비울미술관, 교보문고 대문,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직동 운경재단, 양평 돌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사랑방, 프랑스 고암서방....등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전통 창호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공간인데도 옛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청원산방. 

아무리 훌륭한 전통문화라도 현대에서 고유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인정받아 재해석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서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하고 고민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개발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심용식 소목장.

창호 연구와 제작은 물론 자신의 예술 세계를 물려 줄 수 있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창호가 박물관에만 전시되어 있는 죽은 전통이 아니고 현대인과 함께 숨쉬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열정을 아끼지 않는 심용식 소목장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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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어떤 분들은 중국 청도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경남인가...? 하며 갸우뚱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는 고장이 청도이다.
그러다가 청도소싸움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하면
아하...그곳...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경북에서도 한쪽 구석에 짱 박힌 조그마한 소읍 청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의외로 오래된 고택, 읍성, 서원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있어
가볼만한 곳을 찾아다니다보면 며칠에 걸려 돌아보기도 벅찬게 사실이다.

필자는 그동안 숨겨진 진주 같은 청도의 이모저모를 여러번 포스팅해 드렸는데
오늘은 청도의 가볼만한 곳의 대략적인 소개와 아울러
그동안 미쳐 소개해드리지 못한 곳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더 상세한 소개는 설명 아래 링크된 포스트를 누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운강고택 및 만화정 (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이 다시 중수한 대주택이다. 
이 주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자형으로 되어 쌍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 주택이다. 





만화정(萬和亭)
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운강 박시묵이 1856년경 건립한 정자로 수학을 강론하던 곳이며
동창천을 끼고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운치를 배려해 놓았다.
주변의 경관이 이름답고 건물 또한 견고하고 섬세하며
6.25때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섬암고택 (문화재자료 제268호)

운강 박시묵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 공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안채와 중문채, 사랑채, 헛간채, 도장채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대문채는1990년 도로확장공사 시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운강고택을 중심으로 한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중심 몫을 하고있다.






임당리 김씨 고택 (내시고택, 대한민국중요민속자료 제245호)

이 고택은  조선시대 궁중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선암서원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1506~1543)선생 두분을 향사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고종15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




청도읍성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

이 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石築城)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규모는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읍성철거정책으로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와서 읍성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청도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읍성 외곽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비석이 서 있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가 2008년 청도 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 모두 30기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 제323호)
이 석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청도 동헌 (문화재 자료 제 403호)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인 청도 동헌은 관찰사, 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졌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들어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 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
옛 관아 건물은 용도가 폐기되고 동헌 건물은 학교 교실로 활용되면서 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도주관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위패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양쪽에 동 . 서헌의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청도 척화비 (문화재자료 제109호)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강한 경고문구가 적혀 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운문호
청도군 운문면 밀양강 지류를 막은 인공 호수 운문호는 댐 길이 407m, 높이 55m, 유역 면적 301.3㎢, 저수 용량은 1억3500만톤으로 
1일 37만톤의 용수를 대구, 경산, 영천, 청도군에 공급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댐이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가며 펼쳐지는 댐 지류의 고즈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운문호 주변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청도 운문사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년기념물 180호) 
운문사 앞 뜰에 자라는 처진 소나무의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해마다 승려들이 이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막걸리를 부어주는 정성을 다하고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매전면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295호)
소나무의 품종으로는 금강송과 처진소나무, 산송, 황금나무, 다행송이 있는데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형을 가진 것으로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이곳 매전면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m로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같이 처진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청도 와인 터널

청도에서 여행객들에게 특별히 각광받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청도 와인 터널이다.
경북 청도군 남성현 송금리에서 문을 연 와인 터널은 부부, 연인, 가족, 친지의 즐거운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터널은 실제로 열차가 다니던 터널을 개조해서 와인 저장고 및 카페로 문을 연 것이다.
바깥 온도가 영하에 달하더라도 터널 내부는 연중 14~16도의 온도와 60 ~ 70% 의 습도를 유지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고
110년의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와인 숙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내 최대의 와인 터널이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연인들끼리 들린다면 감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




화양 큰줄다리기

일부 복원된 청도 읍성 안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격년으로 열리는 도주문화제에서 쓰이는 줄이다.
화양 큰줄
다리기가 영남의 줄다리기라 할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 행사규모의 크기가 엄청나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고장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음력 정월대보름을 중심으로 한 부락 또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또는 남.북으로 편을 갈라 남녀 노소의 마을사람들이 줄을 당기어 승패를 다투고 그해의 흉풍과복을 점치기도 한 민속놀이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주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점세적 년중행사로 삼한 이래 벼농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양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고대사회로부터 행해진 민속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문장상으로는 18세기에는 도주줄, 19세기에는 영남줄, 20세기 초반에는 읍내줄, 1983년부터는 화양줄이라 부르고 있다.


청도 소싸움 축제 


자연과 하나 되는 문화 관광의 메카인 청도에는 이렇듯 도주 문화제, 정월대보름축제, 청도 반시 축제...등 각종 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그중에도 제일의은 역시 소싸움축제가 아닐까?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싸움은 이제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로, 한국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협동 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부활되고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 축제....청도에 들리는 분들이 빠뜨리지 않아야 할 최대의 볼거리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청도소싸움.kr/)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해드린 청도의 문화재, 민속놀이는 그저 일부분일 따름이다.
언급한 곳 외에도 가볼만한 곳이 산재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소개해 드리지 못하고 일부분만 소개해 드렸다.
남겨진 청도의 진주는 다음 기회에 더 소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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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산내면을 지나 구비구비 운문사로 향하는 산길은
'운치있다'는 표현이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아침나절 내린 비로 인해 멀리 보이는 산허리에는 안개 구름이 낮게 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아름드리 숲들은 싱그러운 얼굴로 여행자를 반긴다.





운문사 입구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하니 도시 생활에서 찌들었던 스트레스가 일순간에 씻겨지는 듯 하다.





일반적인 사찰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서 걸어서 올라가다보면 숨이 차고 땀이 나기 마련인데
운문사는 계곡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차량으로도 사찰 입구까지 바로 진입이 가능하다.





아름드리 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기분좋게 걷다보면
금방 사찰 입구에 다다라 요즘 같이 더운 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호거산 운문사...호랑이가 살았던 산이라고 해서 호거산이라고 하나보다.





호거산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둘러싸인 산세는 예사롭지 않고 높은 산허리에 안개가 걸리니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범종루를 거쳐 들어선 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먼저 모으는 것은 바로 입구에 자리잡은 엄청나게 커다란 소나무이다.
마치 커다란 표고버섯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거의 땅을 뒤덮으며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처진소나무라 불리운다.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 정도의 이 아름다운 소나무는 천년 기념물 180호로 지정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처진 소나무 관련 상세 포스트 : 막걸리 먹고 자라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





운문사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운문사를 돌아보다 보면 한 사찰에 대웅보전이 두군데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운문사의 가장 중심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신 대웅보전인데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이 대웅보전은 1994년에 건립되었다.





운문사 신 대웅보전의 너무나 아름다운 꽃살문은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님의 작품이다.




















다른 하나의 대웅보전은 신 대웅보전의 앞쪽에 약간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라 시대에 건립한 운문사는 4번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 대웅보전은 조선 숙종 44년(1718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의 간격을 넓게 잡아 칸수에 비해서 건물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1994년에 새롭게 대웅전을 지은 후에  비로자나불을 봉안했으므로 비로전으로 불리우다가
문화재청에서 보물 835호로 지정한 이후에 원래의 이름인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다시 찾게 되었다.





2007년에 해체 보수하였으므로 단청이나 꽃살문이 너무 산뜻하여 세월의 흔적이  도리어 느껴지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 678호)은 높이 5.4m의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층 기단에는 앉아 있는 8부중상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만세루는 학승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으로써 주요 행사 때만 사용하는 곳이다.





운문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사찰에
전국 5대 비구니강원 중에 학풍이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운문승가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경내가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지만
승가대학은 학승들의 수행을 위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 내부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승가대학 건물 바로 옆의 공양간의 문이 열려 있기에 살짝 들여다 보니
비구니스님들이 공양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반들반들 윤이 난 엄청나게 큰 무쇠솥이 눈에 확 들어왔다.

240명의 학승들은 공부와 노동을 병행하고 있어 운문사 경내에서는 이처럼 청소를 하거나 농사일을 하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찰 경내는 드넓고 쾌적하며 대웅보전 뒤에는 야생화 단지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나 데이트하는 커플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더구나 사찰의 바로 옆 계곡에서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마져 불어오니 
요즘 같이 후텁지근한 날,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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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높고 물 맑은 청도가 자랑하는 천년 고찰 운문사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엄청나게 커다란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의 크기도 거대하지만 그 단아한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방문객들은 너도나도 소나무를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마치 커다란 표고버섯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땅을 기어가듯 뒤덮으며 자라고 있는
이 거대한 소나무는 천년기념물 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이다.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 정도인 이 소나무는 
처음에는 낮게 옆으로 퍼지는 나무의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자라면서 아래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고 한다.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는 어느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운문사 대부분의 절집이 소실되는 가운데서도 화마에서 살아남아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고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운문사에 있는 비구니 승가대학에는 약 240명의 여승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데
이곳의 스님들은 이 처진소나무를 스승으로 섬긴다고 한다.
다른 나무들은 자랄수록 가지를 위로 펼치는데 이 노송은 자랄수록 가지를 아래로 낮추기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겸허한 자세를 본받자는 것이다.



이 처진 소나무가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이 소나무가 '막걸리를 먹고 자라는 소나무'라는 것이다.
강남 갔던 제비가 오는 삼월 삼짇날은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막걸리 공양을 받는 날인데
승가대학에서 교육을 마친 비구니 스님들이 막걸리 열두 말에 물 열두 말을 섞어 이 노송에 부어준다고 한다.


막걸리 공양은 30여 년 전, 쇠약해진 이 소나무를 살리고자 선대 스님들이 고안한 지혜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처진 소나무는 오랜 수령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 나무처럼 가지의 제일 말단까지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이는 막걸리가 나무에 좋은 비료의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인데

토양학자들 의 말로는 과학적으로 꼭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알코올농도가 5-6%에 불과한 막 걸리에 물을 타서 뿌리에 부어 준다면
알코올의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고 들어 있는 전분도 크게 비료역할 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막걸리의 성분이 물에 녹지 않은 토양속의 여러 비료성분을 녹여내어 나무에 이롭다는 주장도 한다.
다만 물탄 막걸리는 한참 가뭄이 심한 봄철에 나무에 물을 주는 효과와도 같아서
나무의 해갈에 도움이 되리라는 주장은 다소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임진왜란의 화마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운문사를 지키고 있는 처진 소나무....
운문사 천년 세월의 살아 있는 증인은 이 처진소나무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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