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대마의 이즈하라에 도착하여 시작된 대마도 여행은 상대마의 히타카츠에서 마무리된다. 

 미우다 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히타카츠는 그야말로 조그마한 항구이다.  

 
차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국제 여객 터미널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우리나라 시골 읍내 버스 터미널을 연상케 하는데 이름은 국제 페리 터미널이다. 


 터미널 맞은 편에 '환영'이란 글이 3개 국어로 쓰여 있는데
일본어와 한글이 병기되어 있는 표지판은 대마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출항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터미널 근처를 배회하며 동네 구경을 해본다. 
 


터미널 바로 맞은 편에 띄엄 띄엄 상가들이 보인다.

중심 상가라고 해봐야 이렇게 한산하기 그지 없고 도로에 운행하는 차들도 간혹 눈에 뜨일 따름이다.
 

 

 
히타카츠 항구 건너편으로 어촌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지난 밤 산책 했던 건너편 마을은 마을 전체를 다 돌아보아도 사람의 기척은 커녕
희미한 전등 하나 정도만 켜져 있는 주택들 사이로 온 마을이 불빛도 비치지 않는 암흑 천지어서
걸어가는 발소리와 기침 소리조차도 온 골목에 울려 퍼지는 통에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이 있다. 

 
여객 터미널 바로 옆엔 국제 여객 페리 출입국 사무소가 보인다. 
 

 
바로 앞엔 해상 보안청의 경비정이 서 있고... 


주유 트럭이 와서 경비정에다 기름을 공급하고 있는데 
 


담소를 나누면서 한가하게 근무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도 규모가 큰 배는 거의 없다.
 

 

 
작은 항구인지라 컨테이너도 큰건 별로 없고 옆에는 코딱지만한 지게차 한대가 잠시 쉬고 있다.
 


이윽고 지게차 기사가 나타나서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다른 아저씨가 나타나서 담배 한대를 권한다.

이야기는 길어질 대로 길어져서 작업은 언제 시작하려는지....

 


몇 대 없는 차 중에 택배차와 소형 트레일러가 나란히 기다리고 있는데
대마도는 차량 대수가 그다지 많지 않은지라 78-83, 50-19 란 번호판이 이색적이다.

 
택배사의 로고는 대마도의 상징 동물인 '산고양이'인 듯..
 

 


파란 컨테이너 옆에 빨간 컨테이너가 눈에 띈다.
 

 
터미널 옆 전화 부스에는 색깔이 서로 다른 전화기 두대가 나란히 있다.
 

 
기능이 서로 다른 것인지...색깔만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대합실은 정말 조그마했는데 구멍가게 같은 매점이 하나 있고 바로 옆에 아이스크림 자판기가 있다.
사람 몇 안 사는 조그만 시골 동네에도 자판기가 설치된 일본은 그야말로 자판기의 천국! 
 

 대합실 벽에 붙은 포스터. 일본 사람들도 짝퉁을 사긴 하나 보다. 
 

 
밀항,밀어,밀수 신고는 110번이란다...ㅋㅋ
 

 
사람이 사는 곳에 범죄는 따라 가는 법.
이곳에도 어김없이 지명 수배 포스터가 붙었다. 신고는 역시 110번~
 

 
작은 대합실을 배회하며 포스터 등을 읽어 보고 있는데 출항 시각이 되었다.
코딱지만한 국제 여객 페리 출입국 사무소를 거쳐 쾌속선을 타면 1시간 40분만에 부산항에 도착하게 된다. 
  

 여행 중에 돌아본 대마도는 일본 땅이면서도 한국에 점령 당한 듯 해 보였다.
대마도 관광객의 90%가 한국인이라 대마도에서 활기차게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일 뿐 아니라
대마도 재정에서 한국 관광객의 의존도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영토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며 부산 행 카페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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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대마도) 가장 북쪽의 마을 카미쓰시마 쵸 와니우라 뒷산에 위치한 한국 전망대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1997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는 서울 파고다 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다고 하는데

한국 정자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곳은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의 거리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제도와 부산시의 윤곽을 육안으로 뚜렷이 볼 수 있어

그야말로 '국경의 섬' 임을 실감케 하며 밤이면 부산 광안대교의 불꽃이 환하게 비친다고 한다.

 

 
부산의 모습이 보이나 하여 눈을 크게 뜨고 바라 보았지만 이 날 따라 마침
흐린 날씨로 인해 부산 앞 바다의 모습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한국 휴대폰이 터지는 장소라 잘 도착 했다는 안부 전화를 걸 수 있는 장소라고 하여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안테나는 뜨긴 하지만 통화는 연결되자 금방 끊어져 버렸다.

예전에는 대마도 전역이 통화 가능권이었으나 2004년 우리 나라 '스펀지'에 소개될 당시

"한국 휴대폰이 터지는 지역은 한국땅입니다"라는 멘트가 문제가 되어

일본에서 방해 전파를 발생시켜 지금은 한국 전망대 외의 지역에선 통화가 수월치는 않다.
 

  
포구 앞쪽에 동서로 길쭉하게 보이는 섬은 '우니지마'로 우리 말로 해율도(海栗島)이다.

 

 
이곳에는 현재 일본 해상 자위대의 레이더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섬이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하며 '와니우라'를 보호하고 있다.

 

 
대마도에는 우니시마의 일본 항공자위대 레이더 기지와 오오우라(大浦)에 해상자위대가 있으며
이즈하라(嚴源)에는 육상자위대가 있어 군사적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국경의 섬이다. 

 

 

한국전망대 바로 옆에는 조선역관사 순국비(朝鮮譯官使 殉國碑)가 서있다.
숙종 29년(1703년) 2월 5일(음력)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한천석 이하 108명의 조선역관 일행과
이들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측 역관 4명이 저녁 무렵 대마도의 와니우라 입항 직전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 비는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이다.

당시는 수장된 사람들의 명단을 알지 못했는데 대마도주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종가문집을 정리하던 중 사망자들의 명단이 발견되어 순국 400주년을 맞이하는 2003년 3월7일에 순국자들의 이름을 적어 추가로 건립했다. 
기단석은 112개의 돌로 쌓아 당시 희생된 112명을 추모하는 뜻이 담겨져 있으며 일본어와 한국어로  유래와  당시 사망한 112명 역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 최서북단에서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의 거리....
대마도에서 일본까지의 거리에 비해 대마도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반도 안 된다.
그렇게 가까운 섬이 우리 땅이 아니고 일본 땅이라니...
남 주기 아까운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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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부터이다.
그들은 외교적, 상업적 동기에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특히 대마도(쓰시마)사람들이 조선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구했다고 한다.
조선의 역관들은 다른 나라로 유학을 하지 못했지만 일본의 역관들은 초량 왜관에 와서 유학을 하며 조선어를 배웠다.
통계에 의하면 대마도의 남자의 반이 일생에 한번은 조선에 왔다고 하니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어에 능통했던 것 같다.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에서 보면 건너편 산 중턱에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광청사이다.
서산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청사는 길에서도 경사가 급한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광청사(光淸寺,고우세이지)는 1727년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설립한 3년제 조선어학교가 있던 건물이다.

이 조선어학교의 수업은 하루 4시간씩. 매월 27일은 시험을 쳤다.

교재는 1학년 <교린수지> 2학년<전일도인> 3학년<인어대방>이란 책이었는데 통역사 양성이 목적이었는데

교사는 인위문길(仁位 文吉)이라는 20세의 전문통역사였다.

 

 

길에서 광청사 입구까지는 약간의 비탈길을 올라가야 하므로 입구에 지팡이가 비치되어 있다.

지팡이에 붙어 있는 명찰에는 좌수용,우수용이라고 쓰여져 있다.

왼손잡이,오른손잡이를 구별하여 지팡이를 구비해 놓은 것도 일본인들의 세심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절 본당에서 1872년 10월 25일 '한어학소(韓語學所)'가 개소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통역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대마도에서 조선어는 매우 인기가 높아 입소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1873년 8월 2일까지 1년간 대마도 고위층 자제 34명을 입소시켰는데 그들 중 10명이 10월 16일 조선말을 더 잘 배우기 위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왔다. 초량 왜관 내에 '초량관 어학소'를 만들었으니 한어학소의 전진 배치였던 셈이다.

 

이들이 이후 경복궁을 드나들며 한일 합병의 통역관 겸 정보원 역할을 했으며 1895년 민비 시해사건 때 투입된 자객들 중에 낀 통역 2명이 이 어학소 출신 대마도인이었다. '초량관 어학소'는 1880년 동경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가 생기면서 자동 폐소되었다.

 

현재 대마도 소학교에서는 5,6 학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어과를 설치해 교육하고 있고 한국인 원어민교사가 있다고 한다. 대마도 고등학교에서는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사물놀이를 학습하고 있으며 곧 태권도도 가르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던 조선어학교...이제는 상생하는 이웃이 되기 위해 선하게 쓰여지기만 바랄 뿐이다. 

 

 

광청사를 나와 수선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선사(修善寺,슈센지)는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개인 사찰이라 최익현 순국비에 참배키 위한 한국 사람 외엔 거의 찾는 사람도 없는 절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인데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높이 9.5cm의 신라 동조여래현좌불상이 있으며 최익현선생의 순국비와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토츠안'의 묘가 있다.  신라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는 비각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어서 확인할 수도 없다.

 

 

수선사 내에 있는 '대한국인 최익현 순국지비'. 최익현은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은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수선사에 지장보살이 단체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지장 보살들이 여러 가지 무늬의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전번에 서산사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원래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의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부모들은 어린 영혼을 지워 버린 몹쓸 짓을 한 자기들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치장을 한다.

 

그리고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어린 영혼을 달랜다는 것이다. 

(이 코딱까리만한 지장보살은 서산사(세이잔지)정원에 있는 지장 보살이다.) 

 

가는 곳마다 턱받이로 장식한 지장 보살들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만제키바시(만관교) 다리 옆 숲에 있던 지장 보살들은 하나같이 파란 색깔의 턱받이로 치장하고 있었다.
 

 

뒤에 광배가 있는 수선사의 이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선 한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일본의 부처는 석가모니불조차도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화꽃 턱받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본인들의 불심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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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침략이나 점령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상 자부하는 일본에게는 사실은 쓰라린 추억이 있다.
1274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서 대마도와 이끼섬이 공격을 받아 초토화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의 현장 코모다하마 신사는 
카미카자 전망대에서 출발한 차는 섬을 가로 질러 반대편 해안의 포구 마을 코모다(小茂田)에 있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에서 해류를 따라 오면 저절로 도착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대륙에서 대마도로 배가 다니는 뱃길이 열렸던 곳이다.

 

이 곳은 또한 고려말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 점령을 위해 처음 상륙한 장소이기도 한데 거기에 코모다하마(小茂田濱) 신사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일본의 신사는 도리이(鳥居)에서 시작되는데 바로 신사
앞에 '天'이라는 글자 모양으로 서 있는 문을 말한다.
신의 사신이라 믿는 새가 쉬어가도록 한다고 해서 도리이(鳥居,도리이는 '새'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장대 또는 솟대로 표현되는데 솟대 위에 새 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우리의 전통 신앙과도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도리이는 흔히 붉은색으로 칠을 하여 신사의 신성한 공간과 평범한 공간의 경계를 나타낸다. 또 산이나 바위 같은 곳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모양에는 수많은 변형이 있지만, 2개의 원통형 수직기둥 위에 직사각형의 들보가 가로로 2개 얹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첫번째 가로대는 기둥의 양쪽 끝을 지나 바깥까지 뻗어 있고 두번째 가로대는 그보다 약간 아래쪽에 걸쳐져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불교와 함께 일본에 전래된 인도의 아치형 관문인 '도라나'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어떤 학자들은 만주나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 대문과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코모다하마 신사의 도리이는 흰색에 붉은 글씨가 쓰여져 있었으며 우리들이 흔히 '귀신 안테나'라고 부르는 신을 부르는 대나무가 양 쪽에 세워져 있고 도리이 아래의 굵은 동아줄에는 하얀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금줄과 같은 용도로 쓰여 그 곳이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는 듯 하다.

 

 


이곳은 일본이 외세에게 처음으로 점령을 당한 곳이다.
합포(마산)를 출발한 고려와 몽골의 연합 일본 정벌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 5일 오후 4시경 하대마도의 사스우라에 상륙했는데 바로 오늘날의 코모다(小茂田)이다. 팔번우동기(八幡愚童記)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 바다를 뒤덮은 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무사였다.

 

 

전투는 10월 6일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대마도의 일만 병사들은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전원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시 도주 소오 스케쿠니는 전쟁 후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그 싸움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한다.
 
  


려몽연합군은 대마도와 이끼섬을 단숨에 초토화시킨 후
곧장 큐슈의 후쿠오카 상륙을 개시하기 위해 후쿠오카 앞 바다에 진을 쳤다. 그런데 태풍이 올 계절이 아닌데도 큰 태풍이 쯔시마해협을 덮쳐 려몽 연합군은 싸워보지도 못한 체 태풍에 큰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이에 이 태풍을 신이 준 바람(神風)이라고 여기고 행운을 주는 좋은 길상의 의미로 새기고 있다.

신풍(神風).....가미카제... 돌아올 수 없는 연료만 채운 일인승 경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연합군의 함선으로 돌진하여 자폭하던 특공대 가미카제. 바로 이 려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에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실은 이곳은 한국과는 또 다른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1419년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상륙하여 점령하고 약 2주간 머문 곳인데도 어디에도 이에 관한 흔적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에 관한 흔적을 없앤 것은 아닐까...생각이 들었다.

 

 

신사의 들어가는 입구에는 같은 도리이가 또 서 있었고 가운데에도 역시 코모다하마 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신사 앞의 석등은 지붕이 투구처럼 볼록하고 끝 귀가 말려올라간 일본 석등의 전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의 신사 건물의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의 8작 지붕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어 있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즉 가로는 짧고 세로는 긴 직사각형 형태의 배례전이 신을 모신 본전과 연결된 형태의 모습이다. 신사 건물에서는 항상 앞쪽이 배례전인데 대개 앞 뒤로 길기 때문에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배례전 안쪽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별개의 건물인 본전이 있는데 대체로 본전은 배례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하고 있다. 본전에는 그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이 모셔져 있는데 이 신물은 신의 현신(現身)으로 생각되어 누구도 볼 수 없는 신사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의 지붕 장식도 역시 도리이의 형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신사 문 앞마다 우리나라의 금줄처럼 굵게 꼰 새끼줄과 하얀 종이가 함께 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사에 들르는 일본인은 신사 앞에서 반드시 손과 입을 씻은 다음 배례전 안의 복전함에다 돈을 넣고 배례전 앞에 늘어진 천을 흔들어 목탁모양의 방울(나무나 청동으로  따위로 만듬)을 친다. 방울을 치는 것은 내 정성을 바치니 봐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죄와 부정을 씻어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두번 합장 배례하고 두번 박수를 친다.

그리고 신사를 들어갈 때는 가운데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며 나올 때는 오른 쪽으로 나오는데 이 풍속은 우리나라에서 사찰의 대웅전에 들어갈 때의 방식과 비슷하다.

 

 

신사의 내부는 경배를 올리기 위한 배례전과 신을 모신 본전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본전으로 가는 통로가 보인다.

 

 

코모다마하 신사 내부에는 몽골군과의 전투도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는데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를 받들고 있으며 매년 11월에 위령제를 지낸다. 코모다마하 신사는 동경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신사 앞에 놓여 있는 포탄에는 명치 30년(1897년)의 전리품이라고 쓰여져 있다. 

 

 

신사 배례전 바로 옆에는 원구 칠백년 평화지비(元寇七百年平和之碑)가 서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듯 비의 맨 위에는 비둘기가 새겨져 있었는데
우리가 왜구(倭寇)라고 하듯이 그들도 원구(元寇)라고 부르는 걸 보니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이 때 寇라는 한자는 '도둑'이라는 뜻...

 

 

신사 마당 옆에는 복전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길쭉한 나무판에 빼곡이 적혀 있었다. 일만엔, 오천엔,삼천엔,이천엔......거기다 방어 한 마리,과자, 청주 두병.... 이런 품목도 눈에 뜨이는데 복전의 액수가 많을수록 이름이 상단에 붙어져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2003년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30% 가운데 51%가 신도, 그리고 48%가 불교, 그리고 1%도 안되는 나머지가 기독교등으로 되어 있다.
 

 

신도(神道)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 전쟁 영웅은 물론 각종 귀신이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 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 것으로 여겨지면 신사를 세워 모신다. 일본 전국에 신사가 10만 여개가 넘으니 거의 동네마다 신사가 있어 마을 곳곳에 빨간 도리이가 세워져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신도(神道)는 교리는 없고 다만 신사에서의 의식을 중시한다. 그러나 신사의 예배는 개인적이지 교회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의식은 없고 개인적으로 엄숙한 자세로 신사에 들어가서 비치된 헌금함에 돈을 넣은 후 두 번 합장을 하고 절을 한 다음에 박수를 두 번 친다.  

 

 

신사에는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첨단 산업으로 앞서가는 선진국 일본에 경전도 없고 사제도 없는 신도가 사람들의 기복과 관련하여 일본 제일의 종교로서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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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의 매력은 아름다운 삼림과 구비구비 이어지는 해안을 맘껏 가슴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인데 그 중에서도 하대마의 카미자까 전망대와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는 발 아래에 펼쳐지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의 절경과 아울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이다.

  

 

 

이즈하라 시가의 북방 약 4Km, 사스(佐須)방면으로 빠지는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높은 평지가 펼쳐진다.

바로 주변 경치가 빼어나 명승지로 알려진 카미자까 공원(上見坂園地)인데 이 곳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서 일본의 대표적 익곡(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전경과 영산으로써 신비하게 둘러서 있는 백악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이즈하라 마찌와 미츠시마 마찌와의 경계에 있는 카미자까공원은 그 비경으로 인해 

사계절을 불문하고 하이킹, 드라이브 등 가족 동반의 행락지가 되고 있다.  

 

 

이곳 역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장소인데

기존의 대마도를 지배하던 아비루씨와 외지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소우씨가
1245년 이곳 카미자까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인 후
소우씨가 승리하여
그 후 명치유신(1868년)까지 대마도주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신라계 부족과 백제계 부족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으나 어느 쪽이 신라계이며 백제계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곳의 공원 안쪽에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포대 진지 터와 내무반과 참호, 포대 등의 터가 있는데
지금은 무성한 덩굴로 뒤덮인 채 남아있다.  

 

 

공원 가운데에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있는데 마지막 대마도주  宗武志가 1964년에 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모양(魚型)을 깎으면서 가만히 바다 조류를 본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웃겠지만        

깊은 밤 세계지도를 펴고        

컴퍼스를 잡아       

섬(대마도)을 축으로 크게 돌린다."

 

아마도 대마도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듯 하다. 

      

 

대마도가 일본국에 편입된 이후 행정편제가 바뀌어 소다케유키(宗武志)는 도주(島主)의 자리를 잃고

대신 백작의 작위를 부여 받아 섬에서 떠나 도꾜로 거주지를 옮겼고

덕혜옹주와는 이혼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하여 오래 살다 죽었다고 한다.   

 

 

 전망대에 올라서 보니 아소만의 모습이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옅은 아침 안개 속에 가려져 저 멀리의 풍경들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크고 작은 섬들이 군데 군데 늘어선 아소만의 아기자기한 정경은 처음 방문한 이방인에게도 다정하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다시 차를 타고 구비 구비 산길을 돌아 와타즈미신사에서 가까운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는 차에서 내려 60m 정도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되는데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달리하여 대개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온다.

 

 

에보시타케(烏帽子岳)의 '에보시(烏帽子)'는 '까마귀 모자'란 뜻으로 사방이 다 보인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아소만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해발 176m의 전망대에 서니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누워있고 그 사이로 그림같은 바다가 절묘하게 펼쳐져 있었다. 

 

 

겹겹이 겹쳐진 산들과 바다에 떠 있는 107개의 크고 작은 섬,고요하고 평온한 바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서 생성된 리아스식 해안은 아소만을 대마도 최고의 비경으로 만들었다.

이 곳을 흔히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들 부르기도 한다는데

조각배를 빌려 타고 저 섬들의 사이 사이를 누벼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전망대의 위치를 표시한 안내판에는 부산과 일본의 한 중간에 있는 대마도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한 눈으로 보아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근접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쾌청한 날에는 거제도도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아래로 보이는 아소만 일대 연안은 한국인들이 즐겨찾는 낚시터가 몰려 있다.

연중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받는 아소만은 수온이 적절하여 각종 어류가 풍부한데

특히 대형 감성돔과 참돔이 많이 올라오며 물이 아주 맑아 인근에는 진주 양식장도 있다고 한다.  

 

삼림 자원과 해양 자원이 풍부한 아름다운 땅 대마도.. 
오랫동안 우리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곳이었는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대마도는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우리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쫒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신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에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과 만호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박위장군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에 이뤄졌는데
1429년에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7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는데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으니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무역을 허락하고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고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의 영토로 대마도가 편입되면서
일본은 대마도를 통치하게 되고 우리는 영원히 대마도땅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조선 후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서 대마도를 굳게 지키기만 했어도
오늘날과 같이 대마도를 일본에게 주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주기 아까운 땅......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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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이웃인 우리나라와 일본의 사찰은 의외로 다른 점이 아주 많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원은 단청으로 단장되어 그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일본의 사찰은 단청 기술을 전수받지 못해 단청이 아예 없고 탑도 없다.
우리나라 사찰에 들어서면 의례히 나는 독경소리도 들을 수 없고
오가는 스님들의 모습도 볼 수 없는 곳이 일본의 사찰이다.
대부분의 일본 사찰은 위패의 보관, 관리 수익으로 운영되며 월급제의 승려가 많으며
대처승이므로 당연히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고 사찰로 출퇴근을 한다.
옛날 일본의 사찰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는데
조선의 영향으로 요즘은 불상을 안치하고 운판도 거는 곳이 많다.  

아...그리고 일본의 신사문은 항상 열려있지만 절문은 항상 닫혀있다.

학술적인 목적이나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사찰 내부를 방문하려면 사전에 사찰측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 본토는 사찰보다 신사가 많으나 대마도는 의외로 29개소의 신사에 비해 사찰이 39개소로 더 많다. 

이즈하라에서 우리나라와 관련있는 사찰 서너 군데를 돌아보았는데 먼저 서산사(西山寺,세이잔지)를 소개해 드리자면

서산사는 대마 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다.

 

 

 

이 곳은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떼이안(以酊庵)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테이안은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 숙소로 제공되고 또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일종의 관저였는데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이후 이떼이안이 서산사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도 사찰에서 운영하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다.  

 

 

서산사 절문 바로 앞에는 아주 아주 조그만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이런 소규모의 일본식 정원을 가레산스이(枯山水)양식의 정원이라고 한다.

흰 모래와 돌로 산수를 표현하는데 모래는 물이요, 바위는 산이다.

일본식정원은 물이 있는 곳에 조성했으나 이 양식 이후로 물없이 모래선을 물결로 표현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선종 사찰에서 시작되어 후대에 발전했는데 지금은 독립된 정원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절문을 들어서면 하얀 돌이 깔린 아주 좁은 정원이 있고 가운데 통로에 일렬로 늘어선 박석이 갈 길을 인도한다.

마주 보이는 문은 유스 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몇 발자국 가서 돌아서서 절문을 보고 찍은 사진을 보면 경내가 얼마나 좁은지 알수가 있는데
문 양쪽으로도 숙소로 쓰이는 방들이 보인다.

 

 

 

 

정원 오른쪽에 아주 쬐끄만 지장보살이 빨간 프릴 달린 턱받이를 하고 머리에는 핑크빛 뜨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에서 본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어린 영혼을 지워버린 몹쓸 짓한 부모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달래는 것이다.

 

 

건물 처마에서 아래 마당까지 길게 쇠줄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정원의 흙을 패이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일본인들의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세심함에는 두 손 들고 항복...

 

 

 

시간이 허락하면 이 유스 호스텔에서 자는 체험을 해보면 좋을텐데.....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리를 보니 호기심이 막 발동하는걸 꾸욱 억누르고 돌아섰다.

 

이떼이안(以酊庵)으로 쓰였던 건물 정면의 지붕 끝의 산 모양으로 생긴 구조물은 당파풍(唐破風)으로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 건축 양식에서는 박공이라 하는 것으로 에도(江后)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전해져서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김성일 선생의 시비가 수선사 경내에 서 있는데 이 시비는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것이다. 

 

 

좁디 좁은 사찰 경내에 힘겹게 서 있는 종루는 종치는 막대조차 밖으로 삐져 나와 있는데 묘지는 사찰 경내보다 훨씬 넓다.
일본 사찰은 묘지의 관리로 사찰 운영을 하기 때문에 신도 관리나 불사 보다는 묘지 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묘지에는 일본인 가족들의 납골묘가 가문별로 설비되어 있고
사찰 승려의 주 업무는 이 납골묘를 관리하고 관리비를 유족들에게 받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죽어서도 가족과 옆에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어서
마을 주택가 인근에 납골묘를 만들어 안치한다고 한다.  

 



심지어 집 안이나 방 안에 납골당을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무리 부모의 유골이라지만 무섭지도 않는가 보다. 

 

정실(正室)이라고 쓰여진 비석을 보니 일본에도 축첩이 성행했었나 보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태어나면 신사로 가서 그 조상신에게 참배로써 인사하고 자라면 결혼은 교회에서 서구식으로 치르고
죽으면 그 장례 절차나 매장 형식은 불교식을 따르고 사찰 묘지에 묻힌다. 
알다가도 이해하기 힘든 일본 사람들의 사고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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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유명 사찰 만송원(반쇼인,萬松院)을 찾아가는 길.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잡은 만송원은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의 산기슭 입구에 있다.

 

 

 

 

낙엽수림이 뒤덮힌 일대를 포함한 만송원은「쓰시마 번주 소가묘소」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곳이다.

 

 

 

 

 

이 사찰은 초대 번주 요시토시의 보리사로써

제2대 번주 요시나리가 아버지를 기리며 1615년에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한 곳으로 이 곳에 역대 쓰시마 번주와 그 일족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불사공구(佛事供具)인 삼구족(三具足 : 향로, 촛대, 고배)과 고려불(관세음보살반가사유상),

고려판경문 등이 있으며 조선에서 가져간 국보급 불상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사찰은 우리 나라나 중국의 사찰과는 외관이나 성질이 매우 다르다.

일본의 사찰은 외관상 신사와 매우 흡사하지만 신사는 반드시 도리이(鳥居)가 있는데 비해 사찰에는 그것이 없고

신사 주위에는 묘지가 없는데 일본의 사찰 주변에는 거의 대부분 묘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정문 오른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인왕상이 팔을 들고 서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어 '아'상이라고 하는데 범어에서 시작을 의미한다. 

 

 

 

 

정문 왼쪽에 있는 인왕상은 입을 다물고 있어서 '훔'상이라고 하고 이는 끝을 의미한다.

 

 

 

 

 

절의 정문은 닫겨 있어 옆으로 통해 돌아가니 다 사그러져 가는 매표소가 있었다.

입장료는 300엔....무지 비싸다.

일행이 열명이라고 하니 깎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반값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절 옆 문 바로 옆 담벼락에 돌로 만든 북이 서 있었다.

북에는 삼태극이 선명하고 또아리를 튼 용이 기둥을 휘감고 있는 이 북의 이름은 칸코(諫鼓,간고)이다.

 

 

 

 

 

우리나라의 신문고와 같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울리라는 것인데

영주가 선정을 베풀어서 인민들이 북을 칠 일이 없으므로 새들만 놀고 갔다고 하여

당시의 평화로움을 말해주고 있는데 실제적인 필요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세워둔 것 같다. 

 

 

 

 

산문(절문)을 안에서 본 모습인데 일본 사찰의 정문은 항상 닫겨 있어서 측문을 통해 들어온다.

현존하는 이 절문은 쓰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桃山:1568∼1600)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다.

 

 

 

 

만송원의 본당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몇 번의 화재로 인해 남아있는 것은 산문과 그 양 옆에 시립해 서 있는 인왕의 목상, 그리고 뒷산의 묘소 뿐이다.

절의 일주문을 지나 한참 가면 사천왕상이 나오고 대웅전,약사전,명부전,산신전....등등

여러 불각이 산재해 있는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달리 법당 하나 달랑 있는게 일본 사찰의 특징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쪽 끝에 삼구족이 전시되어 있었다 .

삼구족(三具足) 이란 동으로 만든 향로, 화병, 촉대(초를 꼽는 대) 세트를 말하는데

화병은 뚜껑에 사자가 앞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양이 특이하며

촉대는 새가 거북의 등위에 올라앉아 부리로 촉대를 물고 있는 진기한 모습이다 

 

 

 

 

이 삼구족은 조선통신사 기간 중 우리 왕실에서  대마도 번주에게 하사한 것이다.

 

 

 

 

 

신 벗고 들어간 법당은 다다미가 깔려 있고 우리 나라의 대웅전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굵은 대나무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

 

 

 

 

 

본당의 본존불은 십일면관음불(十一面觀音佛)으로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고려시대 불상이라고 하는데

내부가 매우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 나라의 법당만 보다가 만송원의 법당을 보니 여기저기 불구들이 널려 있는 모습들에서 매우 산만한 느낌을 받았다.

 

 

 

 

본당의 왼쪽에 까만 흑돌의 지장보상이 빨간 턱받이를 하고 있다.

일본 전국의 마을이나 절, 계곡 어귀에 있는 부조나 석상은 어김없이 지장보살인데

일본에서 본 지장 보살은 이렇게 한결같이 앞치마 같기도 하고 턱받이 같기도 한 옷을 입혀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곳의 지장 보살은 조선의 임금이 그동안 선린 외교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주는 등 국교를 다시 맺는데  많은 공헌을 한

대마도주 '소우요시토시'의 죽음을 애도하여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세 틀이 있었는데 대동아전쟁때 두 틀이 공출을 당해 무기로 사라지고 지금은 한 틀만 남게 되었다 한다.  

 

 

 

 

 

법당 오른쪽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 문장인 등나무 그림이 새겨져 있는 단아한 등이 걸려 있었고

그 옆의 유리창문으로 되어 있는 곳에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역대 장군들의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유리 사이로 보니 어두운 방 안에서 위패나 촉대등을 구별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인 등나무 문장이 벽지로 도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묘지는 햐쿠칸키(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마련되어 있다.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宗가 제10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묘지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번주와 그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이 하단에는 일족 및 소가(宗家)에서 출가한 사람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중에서도 대조선무역이 활발하였던 시기의 번주 요시나리(義成)와 요시마사의 묘는

다른 묘에 비해 훨씬 커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였던가를 짐작케한다.

 

 

 

 

이 곳은 일본 3대 묘지(万松院 / 石川縣 金澤의 前田家 / 山口縣 萩市의 毛利家)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사적이다  

 

 

 

 

묘지 쪽에는 둘레가 무려 6~7m나 되고 높이가 35~40m나 되는 삼나무(大杉)가 세 그루 있다.  

 

 

 

수령이 1600년이라고 하며 대마도에서는 최고령으로 나가사키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마도는 큐슈와 우리나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서인지 소나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잡목을 비롯한 삼나무와 노송나무를 쉽게 접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스기'라고 하는 삼나무는 수분을 흡수하지 않고 
물 속에서 쉽게 부패하지 않아
일본에서는 선박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한다.

사찰보다, 잘 보존된 묘지보다 더 부러운 것은 이렇게 오래 된 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마도를 돌아 다니는 동안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섬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삼림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미인의 다리같은 삼나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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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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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현의 쓰시마시. 대마도의 정식 명칭이다.
인구는 약 38000명인데 그것도 해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대마도.
면적은 약 708 제곱킬로미터이니 제주도의 약 40%의 넓이이다.
그렇게 면적이 좁은데다 삼림지대가 섬 전체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마도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농사 지을 땅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

그래서 그런지 시내를 제외한 대마도의 외곽지 도로는 거의 다 차선도 없는 좁은 일차선 도로인데
가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만나면 두 차 다 서서 간신히 비켜 나간다.
그 차들조차 거의 다 경자동차인데도 불구하고..... 

 

 

대마도 제일의 도시 이즈하라의 메인 스트리트는 가운데 하천이 흐르고 도로는 양 편에 갈라져 있는데
보도같이 생긴 이 길은 인도와 차도 겸용이라서 사람과 차가 구분없이 같이 다닌다. 

 

 

보행자,자전거,자동차가 같은 길로 다니고 있는데 일본의 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반대 방향으로 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를 타면 내릴 때 왼쪽으로 내려야 하는데 좌측 핸들의 차에 항상 길들여져 있던지라 
버스를 탔다가 내릴 때에는 오른쪽으로 내리려고 하다가 아차...! 하고 방향을 틀기가 일쑤였다. 

 

 

버스의 번호판은 녹색과 흰색이 있는데 녹색 번호판은 그린 버스라고 해서 합법적인 영업을 할 수 있는 버스이며
흰색 번호판은 시로 버스라고 하는데 불법 영업 버스라서 사고시에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

 

 

대마도 자동차의 번호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26-98, 25-46, 18-91, 79-78, 66-77,  5 29..... 
작은 섬이라 자동차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런가? 번호판의 숫자가 매우 단촐하다.    

 

 

위에 있는 長岐라는 표시는 대마도가 속해있는 현의 번호이다.



<長崎 (나가사키)227    •  • 41>이라고 쓰인 관광 버스의 번호판이 눈길을 끈다.
번호판이 0041도 아니고  •  • 41이라니....정말 대마도에서나 볼 수 있는 번화판이 아닐까...?(본토를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너무나 작은 섬 대마도에는 버스라 해 봐야 얼마 되지 않아서 천단위를 쓸 만큼의 수효가 없기 때문에 •  • 41로 표기해두었다.

 

마치 레고 장난감 같은 히타카츠 항구의 지게차의 번호   2  16 이다. 

 

 

일본 사람은 교통 질서를 무지 잘 지킨다는데 그래도 사고는 나는지 터널에서 나오다 사고를 낸 운전자를 조사하는 경찰 발견...!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 주차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차들에는 노란색 번호판들이 많이 보인다. 

 

 

노란색 번호판은 660 cc의 자동차로 케이지도오샤(경자동차)로 불리워진다. 

 

 

우리 나라 소형차보다(우리는 대부분 800cc) 더 규모가 작은데 
대마도 내의 대부분의 차들이 경자동차이라서 주차선 안에 차를 넣고도 넉넉하게 여유가 있다.  
그런데 위의 차들이나 아래 사진의 차들을 보면 하나같이 주차선의 중앙에 귀신같이 정확하게 주차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 사람들의 세심함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대마도주의 무덤 반쇼인으로 가는 길에도 차도가 일차선이라 길 가에 주차된 차들은 차도 옆에 엄청난 기술을 발휘하여 바싹 붙여 놓는다.
여기 저기 가는 곳마다 주차 질서 하나 만큼은 정말 칭찬할 만 한 일본 사람들이다.  

 

주택가에는 작은 택배차를 주차장 안 그물 속에 얌전히 앉혀 놓았다.
근처의 다른 집도 이렇게 그물을 쳐 둔 집이 많았는데 도대체 그물은 왜 쳐 놓았을까...? 자동차가 모기 물릴까봐....?
누구 아시는 분....!

 

 

이렇게 앙징맞고 이쁜 맞은 소형 트럭이라니....너무나 귀여운 차를 발견했다.

앞 모습은 더욱 귀여운데 칼로 중간을 뭉툭 잘라낸 듯 한 앙징맞은 이 차는 마치 프라 모델을 보는 것 같다.
꼬마 자동차 붕붕을 닮은 이 자동차는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이 살며시 느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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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해외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세상 구경을 좋아하는 필자.
가보고 싶은 나라가 오대양 육대주에 수없이 널리 펼쳐져 있지만
그 중에 왠지 썩 내키지 않은 나라도 있었으니 바로.....지척에 있는 나라 일본이다. 

일본과 우리 나라와의 해묵은 감정은 뒤로 하고서라도
왠지 우리 나라와 비슷한 풍습과 풍경일 것 같은 선입견 때문에 일
본까지 궂이 가야 하나.....하고 주저하고 있던 때에
대마도 역사 탐방 팀에 합류하게 되어 일본 본토는 아니지만 대마도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 

 

 

항공편을 이용하지 않고 선박편으로 남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처음.....
경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여 여객선 부두에서 간단한 출국 수속을 거치고 검색대를 지나치니
에게게.....면세점이란게 달랑 점포 세 개.....
실소를 머금으며 조금씩 돌아보고 있으니 이내 시간이 되어 씨플라워호에 몸을 실었다.

 

 

 씨플라워호에 앉아서 내다 본 부산항의 전경은 매우 정겹고.... 

 

 

밤새 바람이 불고 비가 심하게 내려 일본 초행길의 발목이 잡힐까 걱정한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 듯
아침 하늘은 심히 푸르고 맑아 기분좋은 여행길을 시작하게 해 주었다. 

 

 

오륙도를 바로 지척으로 지나며 푸른 바다를 항해하여 대마도의 이즈하라항으로 향했다.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하늘은 맑고 햇살은 쪼이나 풍랑이 제법 높아 배의 일렁거림도 심하였다. 
아침 10시 30분에 부산항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이즈하라까지는 3시간....
그것도 이즈하라가 대마도에서 가장 아랫편에 위치한 항구이기 때문에 3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상대마의 히타카츠항에서 부산까지는 1시간 50분밖에 안 걸리니 우리 나라와는 정말로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부산항 까지는 49.5km이요, 일본의 후쿠오카까지는 138km이니
옛부터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대마도는 일본보다는 한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우리 역사 탐방 팀은 우리 나라와 대마도 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역사적인 유적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대마도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대마도는 원래는 우리 땅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대마도는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쫒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과 만호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박위장군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에 이뤄졌는데
1429년에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7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무역을 허락하고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의 영토로 대마도가 편입되면서 일본이 대마도를 통치하게 되어
우리 나라는 대마도 땅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즈하라항 입국장은 그야말로 코딱까리(?)만 하다.
배에서 방금 내린 한국인들로 방 하나 만한 입국 심사장은 넘쳐 나고 계단과 아래 층까지 줄을 길게 늘어 섰다. 

 

 

입국 심사 시에 그 이름도 악명 높은 지문 날인을 하게 되는데
양쪽 검지 손가락을 인식 기계에 대고 지문을 찍은 후 이어 정면 얼굴 사진도 찍는다.
처음 발을 딛는 일본 땅에 대한 느낌은 이 지문 날인 때문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먼저 찾은 곳은 화장실.....우리 나라와는 조금씩 다른 배치.
듣기로는 우리가 화장실 문을 마주 보고 앉아 볼 일을 보는데 비해 일본인들은 벽을 마주 보고 앉아 볼 일을 본다는데 (맞나...?)
그 이유는 갑자기 문을 확 열었을 때 얼굴을 마주치는 난감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나....
그럼 엉덩이를 보이는 난감함은 어찌 하라구...? 이런 생각도 들었으나 직접 확인한 바는 없다.  

 

 

대마도의 모든 화장실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혼용된 안내판이 꼬옥 붙어져 있다.
대마도 관광객의 90%가 한국인이라니 그럴 수도.....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지 말고 변기 안에 버려달라는 안내문이 어디나 빠짐없이 붙어 있는 것이 특색.


출국장을 빠져나오니 대합실도 초만원.
우리 나라 읍내 버스 터미널 만한 대합실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곳 없어 서서 창 밖의 이즈하라항의 풍경을 찍어보았다.
건너편 산 위의 듬성 듬성하게 늘어선 집들의 풍광은 우리 나라의 작은 섬에 내린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항구 전체가 무지 무지 한가롭다. 입항한 배도 거의 없고.... 

 

 

2층인 입국 심사장에서 일층으로 내려 오니 매표소가 두 군데... 

 

 

벽에는 출입항 시각표가 붙어 있다.  맨 앞에 쓰여 있는 嚴原이 이즈하라이다. 

 

 

사진 가운데 뾰족한 지붕의 건물이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인데 정말 규모가 작은 것이 한 눈에 느껴진다.  

 

 

카페리 터미널에서 나와 먼저 만난 모습이다.
이즈하라 시내는 너무나 작아서 차를 이용하지 않고 모두 도보로 관광을 하게 된다.

조그마한 일본의 차처럼 조그마하게 축소해 놓은 듯한 도시 이즈하라....
짐을 잠시 맡겨두고 걸어서 이즈하라를 한 바퀴 둘러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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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어린이날은 1922년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5월 1일을 어린이를 위한 기념일로 정한 것에서 유래된다.
그 이후 1946년,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바꾸어 오늘까지 내려오는데 선물을 사 주고 맛있는 외식을 하는 것이 대세인 우리 나라의 어린이날과는 달리 일본의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의 무병 장수와 행복을 기원하는 전통 축제(마쯔리)의 하나인데 남자 어린이날과 여자 어린이날이 따로 있다는 점이 특히 다른 점이다.

여자 어린이날인 '히나 마쯔리(ひな祭り)'는 3월 3일이다.
'히나'는 전통 인형의 이름인데 에도 시대 일본에서 행해진 히나 인형(히나닌교,形) 놀이에서 유래되었다.
그 날에는 딸을 둔 가정에서 인형의 단을 만들어 놓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축제가 끝나면 단을 치워야 하는데
단을 치우지 않을 시에 딸의 결혼이 늦어진다는 속설이 있어 주의를 한다고 한다. 

남자 어린이날은 '단고노셋쿠 (端午の節句)'라 하여 우리와 같은 5월 5일이다.
남자 어린이의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는 날로 정하고 다양한 행사를 치루곤 한다.
특히 이 날은 남자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고이노보리(鯉幟 , のぼり)'를 세우고 무사 인형이나 갑옷,투구를 장식도 하여 나쁜 액을 물리치고 건강하게 자라길 기원하고 또한 대나무 잎이나 떡갈나무 잎에 싼 찹쌀떡을 먹는 풍습이 있다.

 '고이노보리(鯉幟 , のぼり)' 또한 에도 시대부터 유래된 전통 행사인데 '고이'는 잉어,'노보리'는 오른다는 말로 잉어가 오른다는 뜻이다.
남자 어린이의 출세와 건강을 기원하는 표시로 잉어 깃발을 집 앞에 장식하는데 잉어 깃발의 수는 보통 가족의 수에 맞게 단다고 한다.
이는 잉어가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된다는 중국 전설에서 유래하였는데 출세를 가르키는 말인 '등용문()'과도 관련있는 전설이다. 

고이노보리는 마을 단위로 수십개 혹은 수 백개씩 다는 마을도 있다고 하는데 마침 운 좋게도 어린이날 대마도에 발을 디디게 되어
마을마다 잉어 깃발이 푸른 하늘 아래에 흔들거리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대마도 여행 중 만난 고이노보리 장식을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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