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들이 유화를 그리 듯 펼쳐지던 어느 여름날, 안동시 법흥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동댐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은 통일신라시대의 '신세동 7층전탑', 바로 앞에 위치한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그리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 '임청각'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안동에 도착하여 임청각길 어귀에 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이내 철길 가림막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철길 가림막 앞에 펼쳐지는 웅장한 고, 바로 '안동 임청각(臨淸閣)'이다.

 

 

 

 

그런데 배산임수라는 말도 있듯이 탁 트여야 할 고택 바로 앞에 철길이 자리잡고 있다니 

일제 강점기 시절에 만들어진 철길이 임청각 바로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답답함이 바로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철길을 따라 평행으로 선 담장 너머 긴 바깥 행랑채가 장관이다. 행랑채가 이렇게 크니 고택의 규모는 또 얼마나 클까 생각했는데   

행랑채 끝 부분에 가서 건물의 규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단칸 맞배지붕의 대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99칸이나 되었다는 고택의 대문치고는 너무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초라하다는 느낌마져 든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초라한 대문은 아니었다 

본래는 장엄한 중층 누각형 대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처럼 작은 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부설한 철길에 있다. 일본인들이 왜 안동 시골구석에 철길을 만들었을까 

광산이나 농수산물이 풍성하지도 않은 이곳에 굳이 철길을 가설한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겉으로는 주민들의 교통 편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안동을 관리하는 것이 일본의 목표였던 것이다. 

 

일제가 낙동강 변으로 철도를 부설하고 도로를 뚫으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곳이 바로 임청각이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이 태어난 이집의 맥을 끊기 위해 임청각 행랑채 일부와 문간채, 중층 문루를 헐어내고 철도와 도로를 가설했다. 

임청각은 본래 왕족이 아닌 평민이 지을 수 있는 집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아흔아홉칸(99)칸이었는데

집앞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 건설로 인해 많은 건물이 헐리게 되고 지금은 본채 56칸과 군자정 8칸 등 70여칸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애초의 임청각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 선생이 

이곳 지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터전을 잡음으로써 시작되었고

1519년에 이르러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라는 시구에서 ()’자와 ()’자를 인용한 것이다

 

임청각은 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지를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졌는데

크게 정침(살림채), 군자정, 사당 등 세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가옥의 평면도를 보면 일(), ()자 또는 그 합자 형태인 용()자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자는 하늘을 나타내는 의미로,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고.....

 

 

 

 

임청각에서도 가장 눈에 뜨이는 건물은 별당인 군자정이다. 

군자정은 자 모양의 건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정침 쪽으로 한 칸씩 온돌방을 더 내어 붙여 놓은 모습이다





정자형 별당답게 누마루 형식에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바닥에 내려서지 않고도 난간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관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다



 

 

군자정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돌로 만든 물확이 있는데 이 물확은 손을 씻는 곳이다

실내로 들기 전에 손을 닦으라는 의미로 청결을 위한 주인의 배려가 눈에 띄는 부분이다.





누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주변에 꾸며 놓은 화단과 방지(方池)가 보이고 방지 옆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도 보인다.

방지는 크지않고 아담한데 가운데 석가산 대신 조그만 맷돌 하나가 대신 올라앉은 모습이 재미있다.

전면 온돌방의 세살무늬 덧문을 열어젖히면 안동댐에서 흐르는 강물과 강 너머 시간의 흐름도 감상할 수 있어 좋다

 

 



군자정 대청에 높이 걸린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로 새겨진 현판이라고 하는데

현판 아래는 임청각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훈장 등이 여러개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임청각은 그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이며 임청각의 소유주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주 이상룡선생은 경제적 풍요와 함께 종손으로서의 권위와 안일을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또한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3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집이다.

이곳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가 아홉분이나 된다고 하니 임청각은 명실상부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지(方池)를 지나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으로 올라본다. 사당 앞에 심기워진 배롱나무가 너무 아름답다. 

이 사당에는 4대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었지만 한일합방이 되자 석주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장주하여 현재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고 한다.

 

 

 


사당 툇마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담너머 군자정과 방지는 물론 임청각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법흥교까지 훤히 보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명승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강이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이었다고 하는 임청각.

앞을 가로막은 철길만 아니었더라면 배산임수!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혔을텐데......

 

 

 

 

사당을 나와 군자정 앞을 거쳐 정침(살림채)으로 향해본다.  살림채인 정침은 안채중채사랑채행랑채로 나누어져 있는데 

복잡한 가옥 구조를 잘 연결시키는 다섯개의 마당(안마당사랑채마당행랑채마당대문진입마당 그리고 헛간마당 )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자리잡고 있어 효용성과 세련미를 더해준다.


 



사랑채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엄텅나게 깊은 이 우물은 아직도 말항상 맑은 물이 그득하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이 가옥의 혈이 있는 장소로 훌륭한 인재 셋이 나온다는 전설이 깃든 특별한 우물일 뿐 아니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출생하신 우물 앞 방은 독립운동가의 정기를 받은 아이를 갖고 싶은 부부들의 숙박 요청이 쇄도한다고 한다. 


 

 

 

편의성과 세련미를 함께 갖춘 독특한 구조라는 안채.

안채를 보아야 고택의 진수를 보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문이 굳게 닫겨 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중채를 돌아 행랑채 문으로 들어서 본다. 행랑채는 문을 중심으로 안행랑채바깥행랑채로 나뉘는데 무려 13칸이나 되는 규모이다.

문 안에 있는 안행랑은 마님을 보필하는 하인들의 생활 공간이고  바깥 행랑채는 남자 하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라고......





안행랑채 끝에는 뒤뜰로 나가는 문을 만들어 하인들이나 안주인이 뒤뜰로 나가 화초나 채소를 가꾸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시 기존 토지의 경사를 잘 이용하여 오밀조밀 계단을 만들어 둔 것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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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행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문. 문은 안채에서 열고 닫을 수 있게 했다. 

이는 안채에 기거하는 여인들의 사생활을 보호 차원인 듯......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 가장 규모가 큰 임청각은 1519년에 지어졌으니 거의 500년이 되는 귀한 문화재이다.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은 안동시의 지원을 받아 고택을 수리한 후 민박을 받는 등 고가옥 전통체험장으로 가옥을 개방했는데.

방 3개와 대청 마루가 있는 군자정 한채를 빌려 하룻밤 숙박하는데 15만원 정도의 저렴한 체험비를 받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니보물로 지정된 귀한 고택에서 민박을 한다고? 500년이나 된 고택이 훼손이라도 되면 어쩔려고!'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아무리 잘 지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고 빈 집으로 두면 결국은 서까래가 썩고 구들장이 무너지고 마는 법.

사람이 살며 사용해야 집이 더 오래 가고 고택체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더 갖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주인들의 나라 사랑과 헌신이 더 감동적인 충절의 고택 안동 임청각에서 1박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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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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