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기온이 32도를 웃도는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요즘.
후텁지근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다 보니 에어컨 아래에서 얼음 빙수로 땀을 식히는 일도 잦아졌다.
시원하다고 에어컨을 오래 쐬다 보니 머리도 지끈지끈하니....여름 감기에 걸리기 일쑤이고
가끔은 덥다고 배도 덮지 않고 자다가 배탈에 걸리는 일도 다반사이다.

이 더운 여름,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옛날에는 어떻게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을까...?
높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방금 길어온 우물물에 두 발을 담그고
넓직한 부채 하나로 설렁설렁 바람을 일으키며 여름을 여유롭게 보내었을 우리 선현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우리 선현들의 여름 필수품 부채는 본래 더위를 쫓는 데 쓰였으나 점차 의례용 또는 장식용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전통혼례 때 신랑, 신부의 얼굴 가림용으로 쓰는 것은 의례용이며
화가, 서예가, 문인 등이 부채에 그림이나 시 구절을 써 넣어 집안에 보관하는 것은 장식의 역할이라고 하겠다.

한국, 중국, 일본 동양 3국에서는 일찌기 부채가 일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접부채는 극동의 명품으로 일본에서는 7세기부터 사용하였고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접부채가 처음 만들어져 명나라 때 크게 유행했다.
이른바 당선()이라 부르는 부채는 부챗살로 대(竹) 이외에 백단, 흑단, 상아를 사용했고 금, 은을 장식한 부채까지 등장하였다.
15~16세기경부터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역의 물결을 타고 중국의 부채가 유럽에 알려졌는데 
서양 사람들은 동양에서 건너간 부채를 진주 , 비단 등과 함께 매우 귀중한 물건으로 여겼다.

그후 17세기에는 파리를 중심으로 부채가 만들어졌고
18세기 유럽에는 부채가 크게 유행하게 되어 유럽 여성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식품이 되었다.
상아, 진주조개, 비단, 양가죽 등을 사용한 부채에 여러 가지 풍속도를 그려넣은 것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브리제라고 하는 노송나무 모양의 부채를 좋아했다.
19세기 초에는 한때 접부채가 부활했으나 그 뒤 점차 쇠퇴하고, 인쇄한 부채가 등장하였다.

한국에서는 가는 대오리(가늘게 쪼갠 댓개비)로 살을 만들고 종이 또는 헝겊을 발라 부채를 만들었는데
가장 질이 좋은 부채는 전북 전주, 전남 남평, 담양, 나주 등지에서 나는 부채이다.
전통 부채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크게 깃털로 만든 우선(羽扇), 자루가 달린 둥근 부채인 단선(團扇, 방구 부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선(摺扇), 용도가 다른 별선(別扇)등 크게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리는 부채는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미선 공예'에 전시된 부채 작품들로
전시장 바로 앞에 펼쳐진 수백만원을 홋가하는 대형 부채에서부터 산수화, 각종 화조가 그려진
각종 멋드러진 부채들이 전시장을 가득히 채워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특히 아무 장식없는 하얀 부채에 먹물 한방울 떨어뜨린 후 

입으로 불어서 멋진 부채 그림을 탄생시키는 장인의 솜씨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 

요즘 같이 무더위가 계속 되는 날, 우리 선현들의 멋과 슬기가 담겨 있는 부채 하나 장만 하시어 
남은 여름을 여유롭게 지내보는건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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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의 도시 전주는 볼거리도 많고 체험할거리도 많다.
조선을 건국한 전주 이씨가 본(本)으로 삼고 있는 도시 전주는 원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으나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풍남문 로터리를 돌아서 한옥마을의 중심도로인 태조로로 들어서면
고딕식으로 장엄하게 지어진 전동성당이 먼저 눈에 뜨이고 한옥마을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그 중심부엔 전주 한옥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이 자리잡고 있다.

한옥마을의 상징이자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어진은 일반 초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서 조종(祖宗)과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으므로 
따로 봉안하는 장소인 진전을 지어 귀하게 보전했는데 전주, 경주, 평양 등에 각각 어진을 봉안했다.
어진 봉안처는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다가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 진전이라고 불리웠다.
 세종24년(1442년)에 와서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는데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의 어진 봉안처는 경기전이라 칭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주출입문은 종묘나 왕궁처럼 삼문으로 되어 있어 위엄을 더해 주고 있는데
가운데 문은 조상신이 다니는 문이므로 사람은 가운데 문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정문 앞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의 상징인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그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경기전을 들어 갈 수는 없으리라....
 이 하마비는 조선 후기에 경기전을 보수할 때 세워진 것이다.


출입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오는데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을 말한다. 

9m의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가운데 태극 문양으로 장식했다.



경기전의 면적은 49,590㎡로써 어진을 모신 정전 외에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신 조경묘, 예종대왕 태실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史庫)가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정전(보물 제1578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경기전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조선 태조 어진(보물 제931호)'때문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가로 150㎝, 세로 218㎝인 태조 어진은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현재의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좌우의 회랑에는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등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데
좌측 회랑에는 영조, 철종, 순종의 영정이 우측 회랑에는 세종, 정조, 고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지갑만 열면 매일 보게 되는 너무나 친숙한 세종대왕의 영정.


영조대왕의 영정.


철종의 영정...모든 어진이 유리 액자 안에 들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정전의 우물 천정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으며


본전의 회랑에는 어진 외에 경기전 책임자가 쓰던 가마인 가교, 제사에 쓰이는 향로, 향합을 받쳐드는 가마인 향정,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쓰이는 가마인 신연 등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경기전 정전의 입구인 내삼문 동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전주사고(史庫) 실록각'이 나온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에 하나인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의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전주사고가 있던 자리에 1991년에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전주 사고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사고로써 건물은 당시에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실록부터는 편찬할 때마다 주자로 인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른 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타버리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는데
안의와 손홍록이 급히 전주로 달려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 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화를 면하고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들이 번갈아가며 실록을 지켜 내었다. 
실록은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 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고  전주사고의 실록 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로부터 조선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여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귀중한 역사기록유산이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사스런 땅(慶基)에 지어진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존되어 
조선 왕실의 영원과 안녕을 바라는 점에서
전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
전주사고에서 실록이 보존됨으로 조선의 역사가 지켜진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장소이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뒤로 하고서도 경기전의 푸르름과 편안함은 전주 시민의 최고의 휴식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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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 마을에서 오목대, 경기전, 전동 성당을 둘러보고 길을 건너면
네거리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큰 문루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번 화재로 불타버린 숭례문과 거의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 문루는
전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풍남문(豊南門)이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의례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은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도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풍남문은 전주 4대문 가운데 남쪽 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1388년)에 전라 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거의 이백여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남문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 파괴되었는데
이후 영조 10년인 1734년에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명견루라 불렀다.


영조 43년인 1767년에는 전주성내를 모조리 휩쓰는 화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정해년 대화(丁亥年 大火)로 인해 명견루도 다시 불타 버리는 불운을 겪게 된다.
화재가 휩쓴 그 이듬해 전라관찰사 홍락인은 불타버린 명견루를 다시 중건했는데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재와 같은 2층루로 수축했고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던 1905년, 조선통감부는 폐성령을 내리게 되는데 
전주부성 4대문 중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는 와중에도 풍남문은 철거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풍남문은 조선 후기의 문루(門樓) 형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누대는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이며 높이는 17.2m에 이른다.

문루는 2층의 팔작(八作)지붕인데 하층은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상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면에 무지개 끝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하였다.
1980년에는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기도 한데
옛 문루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인 전주 풍남문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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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여채의 한옥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곳, 전주 한옥마을.

뻬곡이 늘어선 한옥에서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옛 선비와 아낙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한옥마을에는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정작 뒷골목으로 들어가보는 이는 잘 없다.
경기전이며 오목대, 향교, 전동 성당...그리고 수많은 전통 공예품 상점들이 서 있는 주도로에서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오래전 걸어다녔던 처마 낮은 골목길들이 나온다.

아이들의 뛰어다니던 소리, 두부 장수의 종소리로 아침을 깨우던 골목길,
어깨를 부딛치며 걸어갈만큼 비좁은 골목길은 대도시에선 이미 그 형태가 사라져가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은행나무길, 토담길....같이 정감있는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우리에게 선보인다.

하늘을 품고 땅을 안은 골목길의 낮은 담장들은 우리 한옥의 멋과 숨결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같은 형태가 거의 없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골목길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다.
언제 걸어도 정겨운 한옥마을 골목길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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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공부보다 운동을 더 좋아하는 선비 호창은 

어느날 우연히 YMCA 회관에서 야구를 하는 신여성 정림과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호창의 아버지는 호창에게 서당을 물려받길 권유하지만 

호창은 정림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며, 야구라는 신문물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에 조선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이 결성되고 황성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YMCA야구단의 연습장이 일본군의 주둔지로 바뀌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결성된 야구단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송강호(호창) 김혜수(정림)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긴 여운을 남겨주었던 영화 'YMCA 야구단'.

전주 한옥 마을 한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전주 향교가 바로 이 영화의 촬영지이다.


한옥 마을에서도 사람이 잘 찾지 않고 조용하기만 한 곳. 전주 한옥 마을 속의 또 다른 세상, 전주 향교를 찾아가 본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으로 채색되는 전주 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온전히 보존된 향교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경기전 북편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건물은 조선 선조 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주 향교의 현존 건물의 배치 형태는 들어가는 누각인 만화루를 지나면 정면에 일월문이 있고 일월문을 지나면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 서무가 있자리잡고 있으며 대성전 담 뒤로는 명륜당이 있는데
 서쪽으로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와 사마재 그리고 주위에 고직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대지 3130평에 모두 19동, 100칸에 이르는 방대한 전향교는 사적 제 3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의 동무와 서무는 배향 공간이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편의 동재와 서재는 강학공간으로 이분되는데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려조 처음 지어진 건물은 경기전 옆에 세워졌는데 경기전이 지어진 뒤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의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 하여
      화산 기슭(중화산동)으로 이전되었다가 좌사우묘(左社右廟)에 어긋나고 전주성 밖이라 다니기에 불편해서 선조36년(160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향교에는 다섯 그루의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눈에 뜨이는데  향교 내 서문 앞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이나 된다.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은행나무가 벌레를 타지 않듯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대성전을 지나면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나온다.


 명륜당은 광무 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고쳐 지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은 대성전과는 달리 전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이 명륜당 앞에서 촬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역시 강학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대칭을 잘 이루고 들어서 있다.




동재의 마루에 앉아 명륜당 마당을 보니 탁 트인 정경이 시원하기 그지없고
특히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그늘을 넓게 드리워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한옥마을의 중심거리인 경기전 앞이나 전동 성당 앞이 인파로 북적이고 있을 때도
마을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향교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일기 화창하고 신록이 짙어지는 오월, 한옥마을 속 또 다른 세상, 전주 향교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은행잎 떨리는 소리, 작은 새소리와 함께 느림의 미학을 느끼는 시간을 가져봄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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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일원에서 열리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는 1997년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올해는 '전주 한지, 한바탕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5/1 ~5/5일까지 개최되었다.


독특한 멋과 아름다움을 지닌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하고 전주 한지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되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는
전국 한지 공예 대전을 비롯하여 한지 뜨기 체험, 탁본 체험, 소망등 달기, 한지 공예 장터, 한지패션쇼, 한지 그림그리기대회,
 가족 문바르기 대회, 한지 공예 교실, 한지와 전통 문화 체험.....등 다양한 체험 행사와 이벤트가 벌어지는 전주 특유의 축제이다.


그중에서도 한옥 마을에 위치한 천양제지는 방문하는 사람들이 직접 한지 제작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원래 한지 제작 과정은 닥나무 거두기 -> 찌기 -> 껍질 벗기기 -> 담그기 -> 삶기 -> 씻기와 햇빛 쐬기 ->티 고르기 -> 두드리기 ->
해리 -> 종이 뜨기(초지) -> 물 빼기 ->말리기 -> 다듬기 
등의 엄청나게 복잡하고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제작 과정을 모두 다 체험하기엔 무리지만 닥종이 죽통에서 한지 뜨는 과정 정도는 누구나 체험해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지를 뜰 때는 외발뜨기와 장판 뜨기를 사용했다고 하나 현재는 개량법인 쌍발뜨기를 하고 있다.
 이는 쌍발뜨기가 잡기 편리할 뿐만 아니라 여러장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뜨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발틀을 닥종이 죽이 가득한 지통에 담궜다가 들어올린다.


발틀에 담긴 닥종이 죽을 앞 뒤 양면으로 재빠르게 흔들어준 후 남는 원료는 다시 지통 속에 버린다.


발틀을 흔들어주면 물 때문에 탄성을 잃었던 종이 원료가 서로 얽히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물은 발을 통해 아래로 버려지고  섬유층만 남아 발틀 안에 뿌연 종이막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이 어느 정도 빠지면 발틀을 열고 발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그리고는 편평한 곳에 엎어 놓고 로울러로 눌러 밀어서 물기를 제거한다.


그리고는 발을 살짝 들어내면 하얀 한지가 완성....전문가가 아니라도 멋진 한지 한장을 완성할 수 있다.


한지라고 하면 문살을 바르던 하얀 문종이만 생각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즈음 전시장을 돌아보면 너무나 다양한 한지가 생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한지로 만든 한복까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색감이나 조직의 우수성이 기존 섬유에 못지 않다고 하니...
새삼 우리 한지의 우수성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 느껴졌는데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런 전통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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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문화의 보고 전주는 지금 도시 전체가  들뜬 분위기이다.
전주 영화의 거리에선 제 '11회 전주국제영화제(JIFF:4/29~5/7)'가
전주 한옥 마을을 비롯한 인근지역에서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5/1~5/5)'가 열려
전주를 겹치기 축제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한옥 마을을 중심으로 열리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는 독특한 멋과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하고 전주 한지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되는데
한지 공예 대전 및 한지 패션쇼, 여러가지 한지 관련 체험 행사가 다양하게 개최되고 있어
행사 기간 동안 한옥 마을을 방문하는 가족 단위 여행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한옥 마을의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 노점들.
마을 특성에 맞는 소품들이 다양하게 선을 보이고 있어 하나하나 돌아보며 눈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여심을 사로잡는 완소 소품은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데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완소 소품 몇 점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전 조각 보자기 하나 사서 창문을 장식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어느 소품이 가장 맘에 드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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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보스와 여의사의 만남.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은 위급한 상황에서의 첫만남 이후 안타깝고 위태로운 사랑을 한다.
조금씩 서로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가까워지는 두 사람 공상두(박신양)와 채희주(전도연).

1998년 상영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가슴 아픈 사연으로 많은 사람을 눈물짓게 한 영화 '약속'.
당시 전도연과 박신양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식을 올리는 배경지로 등장했던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름다운 외관과 고색창연한 분위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성당은 바로 전주 '전동 성당'.
영화 '약속'뿐 아니라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지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한옥마을과 풍남문 한 중간에 고풍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운 성당이다.


정조 15년(1791년)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_과 권상연(야고보), 그리고 순조 원년(1801년)에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되었다.


이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보두네(Baudounet,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립에 착수, 1914년에 완공했으니 100년의 역사를 지닌 건물이다.


성당은 화강석을 기단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고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주며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에 비잔틴풍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12개의 작은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기둥에 8개 창을 낸 양쪽 계단형 돔이 있는
로마네스크풍의 독특한 양식은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이다.



건물의 주춧돌은 풍남문 성벽돌을 일부 사용했으며 벽돌은 공사를 담당했던 중국인들이 직접 구워서 만들었다.


좁고 길쭉한 본당에는 마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앞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고 뒷편에서 '살짝' 한컷만 찍었는데...


성당 내부는 외부보다 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데 명동 성당처럼 공중 회랑을 만들고 자연 채광이 되도록 많은 창을 내었다.


바깥에서 보는 창을 보면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감을 짐작키 어려운데....


역시 스테인드 글라스는 안에서 보아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옆의 '사제관'은 본당을 세운 뒤 2대 주임 신부였던 라크루(瑟)신부가 1926년에 세운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사제관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살필 수 있어 본당과 함꼐 역사적 가치가 큰 근대 건축물이다.


2002년 전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돼 현재는 전주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잘 돌아보지 않는 본당 건물의 후면으로 가보면 이 건물의 고고한 아름다움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전면은 성당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다소 어수선한 느낌도 있으나 후면은 아주 조용해서 사색하기에도 좋다.
1988년에는  10월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일부 소실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으나 

1992년까지 4년여간에 걸쳐 보수되어 현재는 깨끗한 모습이다. 


이 성당은 호남 지방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한국 최초의 순교터라는 역사적 의미로 인해 
국가지정기념물 제288호로 지정되었고 인접한 풍남문, 경기전과 더불어 전통 문화와 서양문화 간의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외관과 주위 경관 덕분에 전국 사진동호인들이 가장 많이 명소 중 하나이며 
사랑의 서약을 올리고자 하는 커플들이 특히 많이 찾는 전주 전동 성당.
이곳에서 사랑을 <약속>하는 커플들에겐 부디 영화와 같은 <이별>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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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마을은 역시 간판도 달랐다.

처음 가 본 전주 한옥 마을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글로 된 깔끔한 간판들이었다.

더 크게, 더 자극적으로, 더 눈에 띄게....
거리의 간판들이 국적 불명의 상호로 온통 뒤범벅된 요즈음
한글로만 된 간판도 이렇게 눈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간판만 들여다 보고 걸어도 하루가 즐거운 전주 한옥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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