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덮인 화진포가 나를 부른다.
처음 화진포에 갔던 몇 년 전 겨울.....
어디가 호수이고 어디가 들판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새하얀 눈밭으로 뒤덮여 눈 앞에 펼쳐지던 추억 속의 화진포.

동해안 최북단의 화진포는 둘레가 약 16㎞나 되는 아름다운 드넓은 석호이다.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해당화가 붉게 피어
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이곳은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데
바로 옆의 화진포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얕아
명사십리에도 비견되기도 하는 바다이다.



화진포는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또한 유명한데 

호수와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의 환상적인 경치를 접해보면 

대한 민국 초기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이 왜 이곳을 여름 휴양지로 삼았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최근에 와서 화진포는 '가을 동화'촬영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근 속초의 청초호 부근 아바이 마을이 가을 동화의 주촬영지였는데
화진포는 어린 시절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해변에서 모래 그림을 그리면서 추억을 쌓던 장면과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 - 준서가 은서를 등에 업고 해변을 거닐다 은서가 숨을 거두는
라스트씬을 촬영한 곳이어서 연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가 되었다.  



화진포 바다에서 보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눈에 뜨이는데 바로 '화진포의 성'이라 불리우는 김일성 별장이다.
"김일성 별장이 왜 남한에 있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에게 사족을 붙인다면
한국 전쟁 이전엔 이곳이 38선 이북, 즉 북한 땅이었다는 것을 기억시켜 드리고
지금도 이곳은 군사 통제 지역인지라 이 지역의 상황은 지도에서 스카이뷰로 확인할 수 없다.  
 


이 건물이 처음부터 김일성 별장이었던 것은 아닌데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비행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강제 철거키로 결정하고
원산 해변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는 히틀러를 피해 망명해 왔던 독일 건축가 베버(H.Weber)에게
예배당으로 사용할 조그마한 별장 하나를 바다에 면한 암벽 위에 짓게 하였다.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베버는 1938년 회색돌로 원통형 2층 건물을 현 위치에 지었는데
화진포 해안 절벽 위의 송림 속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하얀  외관으로 인해 '화진포의 성(城)'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이곳을 점령한 북한은 화진포의 성을 귀빈 휴양소로 운영하였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8년부터 김일성의 가족들은 경관이 매우 뛰어난 화진포의 성을 여름 휴양지로 이용하였고
실제로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김정일 형제가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화진포의 성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계단에 그 당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확힌하게 된다.



계단 중간 쯤에 어린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이 집 앞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표시되어 있고
 


계단 바로 옆 축대에 그 당시 사진의 사본이 걸려져 있어 '화진포의 성'의 원래 모습과
김정일의 어린 시절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누군지 손톱으로 긁적거려 김정일의 얼굴을 훼손시켜 놓았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 화진포의 성 마당에 이르니 수심이 깊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벽 위에 위치한 집이라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다. 



이 건물은 전쟁 중 훼손되어 1964년 재건축하였는데 외관은 처음과 변함이 없으나
실내는 현재 안보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게 매우 유감이다.
  전시관 벽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가 있었는데 대부분 건성건성 다 지나치고
건축물의 유래...김일성 정권의 수립 과정...등이 있으나 자세히 읽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당시 방의 모습을 재현한 소품들만이 눈에 띌 뿐인데... 



그 당시 의복과 제니스 라디오에 눈길이 가고.....
 


천정에 달려 있던 램프도 방문객의 시선을 잡는다. 



2층 전시실의 원형 방에 이르면 모두 다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창문을 통해 바다 풍경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절경'이라는건 바로 이런 경치를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
창문을 열고 바다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다.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옥상으로 연결이 된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화진포 호수와 화진포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오고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다.



건물의 벽 사이로 내다 보고 싶은데 두께가 있어서 쉽지가 않아 벤치 위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화진포성 위에서 내려다 보니 왼쪽의 호수와 오른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호수의 하늘빛 고요함과 대비되는 황홀한 에메랄드빛 바다색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이 해변의 모래는 조개 껍질과 바위가 오랫 동안 부서져 만들어진
모나즈 성분으로 되어 있어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고 개미가 살지 못 하는 모래라고 한다. 



앞에는 화진포 바다.....뒤에는 석호인 화진포 호수.....그 가운데 화진포 콘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콘도는 군인 시설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않고 슈팅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아저씨 발견.
아마 바다 한 가운데 섬 '금구도'를 찍는 듯 한데....
박격포 만한 엄청난 망원 렌즈와 무지 비싼 삼각대에 기가 죽은 필자는 몇 장 찍고 얼른 내려 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앞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섬 금구도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 온다.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는 광개토대왕릉이라고 한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 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3년(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이곳에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다고 하며
문자명왕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거북섬 성은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으며
산정 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섬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석축 보호벽과 방파성이 약 60m, 높이 170~230m,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앞으로 고성군에서는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원형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안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고 했던 문무왕처럼
광개토대왕도 자신의 숙원이던 남하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에다 자신의 무덤을 쓰게 한 것일까...?
눈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섬 금구도가 광개토왕릉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섬을 바라보니
감포 앞 바다에 서서 문무대왕 수중릉을 바라 볼 때와 같은 격한 감격이 가슴 속에서부터 물밀 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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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꼬옥 들리는 관광 명소가 있으니
그것은 울란바타르 남쪽 벅드산 정상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자이승 전승 기념탑이다.



승전탑 아래 주차장에 내려서 고개를 들어보면
몽골 국기에 새겨져 있던 전통 문양 모양의 조형물 뒤로 엄청나게 큰 승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 들어서 보면.....승전탑이 위치한 언덕의 높이가 장난이 아닌지라 보기만 해도 전의가 상실될 지경이다.



언덕 입구 광장에는 이렇게 기념 부조가 있고 거기에 쓰인 글은
"소련사의 기억은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하고 대지를 태우는 불처럼 신성하다."라는 뜻이라고.....
(문자만 보고 몽골이 러시아어를 쓴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몽골은 엄연히 몽골만의 언어가 있고
문자는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글자를 쓰다가 공산화 이후 키릴문자(Cyrillic)을 차용하여 쓰고 있다.)



광장 앞에는 또 이렇게 전차 한대가 덩그러니 올라가 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몽골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소련에게 기증한 전차로써 실제로 베를린 진군에도 참여했던 전차라고 한다.

혹자는 2차 대전 당시 몽골의 국가 재정상 전차를 소련에게 기증할리가 없다고도 하는데
이전에 중국 및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도움을 많이 받은 몽골로서는 
전차 대금의 전체가 아니었더라도 상징적인 자금이나마 소련을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270개가 넘는 계단을 순전히 도보로만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한 사람들은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게 된다.



점점 가까워지는 승전탑을 올려다보면 엄청난 규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아래 선 사람들과 비교하면 승전탑의 높이가 짐작이 되실 듯 하다.



자이승 전승 기념탑(Zaisan tolgoi)은 1938년과 1945년 두차례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와 연합하여 막아냄으로써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과 전사자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탑은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맞는 1971년에 소련의 기증으로 세워졌는데 



높이 솟은 기념탑의 전면에는 한손에는 총을 들고 한손에는 깃발을 높이 세워들고 있는 장병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바다와 같이 짙푸른 몽골의 하늘 아래 깃발을 들고 당당하게 행진하는 장병의 모습에서
유라시아 제국을 평정했던 몽골인의 굳건한 기상이 느껴진다. 



깃발을 든 장병의 조형물 아래 반지처럼 둥근 구조물 또한 인상적인데



환형 구조물의 외부에는 몽골 혁명 영웅들의 얼굴이 부조로 새개져 있는데 몽골 공산 혁명의 영웅 '수흐바토르'도 그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련 포스트 : 몽골 여행의 시작은 수흐바토르 광장에서 )



환형 구조물의 중앙에는 봉화단 같이 생긴 향로가 있고



안쪽 벽면은 러시아와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 침공을 위해 중일 전쟁 승리 후 곧바로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되는데



그때 마주친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연합한 몽골군에게 패하게 됨으로 대륙 침공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몽골은 이 당시 러시아와의 연합을 통하여 2차 대전 참전국이 되고 



몽골 공산화는 더욱 가속화되니 몽골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사회주의국가가 된 나라이다.



특히 소련 군사와 몽골 군사의 앞에 나치의 깃발이 땅에 내팽겨져지는 장면과



일본 제국의 깃발을 땅에 내동댕이쳐서 짓밟고 서있는 모자이크화가 가장 인상적이고 속 시원한 부분이다.



조형물 전체의 그림은 소련과 힘을 합쳐 몽골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과감한 모자이크화로 표현하였는데



그들의 얼굴엔 당시 중국도 물리치지 못한 일본을 물리치고 몽골 사회주의 정부를 이룩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몽골의 상징 자이승 승전탑은 또한 몽골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원하게 탁 트여 울란바타르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울란바타르 최고의 데이트 명소이기 때문이다.



승전탑 앞에 서면 울란바타르 중심 구역은 물론 울란바타르 전체가 한장의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지는데



멀리 울란바타르를 둘러싼 야산에 빽빽이 들어선 집들을 자세히 보면 판잣집과 게르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섞여져 있어서
울란바타르 270만 시민의 반이 게르에 살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몽골의 강남이라 불리는 자이승 지구에는 이렇게 고급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백평이 넘는 아파트도 즐비한 자이승지구는 싱그러운 숲 사이로  푸른 톨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치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몽골의 아파트들은 한국의 아파트보다 더 화려한 색깔로 칠하는 것이 보통이라 도시의 풍경은 파란 하늘과 더불어 눈부신 조화를 이룬다.



승전탑 계단 아래 보이는 이 건물들은 북한 소유의 건물이라고 하는데 한참을 보고 있어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승전탑 동편 가파른 민둥산 능선에 무언가 하얗고 까만 점들이 움직이기에 자세히 보니



많은 양과 염소 떼들이 몰려서 내려오는게 보인다.
도시 안에서도 많은 수의 가축들이 방목되고 있는 곳...이곳이 몽골이라는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나는 부분이다.



몽골 최고의 데이트 장소답게 승전탑을 오르내리는 계단 옆 바위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낙서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쓰여져 있는데



그중에서는 한글 낙서도 심심찮게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보이는대로 카메라에 담았지만
찍어온 한글 낙서 사진을 글에 삽입해? 말어? 를 한참이나 고심한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어린 여행자들이 멀리 몽골까지 와서 소속과 이름까지 밝히며 써놓은 낙서를 인터넷에 공개해서
새로운 마녀 사냥꺼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떠나는 우리 자녀들이 외국의 유적지에다 한글 낙서를 남기고 오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도록 
교육을 잘 시켜 출국시켜 달라고 부모님이나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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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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