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의 도시 전주는 볼거리도 많고 체험할거리도 많다.
조선을 건국한 전주 이씨가 본(本)으로 삼고 있는 도시 전주는 원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으나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풍남문 로터리를 돌아서 한옥마을의 중심도로인 태조로로 들어서면
고딕식으로 장엄하게 지어진 전동성당이 먼저 눈에 뜨이고 한옥마을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그 중심부엔 전주 한옥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이 자리잡고 있다.

한옥마을의 상징이자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어진은 일반 초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서 조종(祖宗)과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으므로 
따로 봉안하는 장소인 진전을 지어 귀하게 보전했는데 전주, 경주, 평양 등에 각각 어진을 봉안했다.
어진 봉안처는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다가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 진전이라고 불리웠다.
 세종24년(1442년)에 와서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는데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의 어진 봉안처는 경기전이라 칭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주출입문은 종묘나 왕궁처럼 삼문으로 되어 있어 위엄을 더해 주고 있는데
가운데 문은 조상신이 다니는 문이므로 사람은 가운데 문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정문 앞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의 상징인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그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경기전을 들어 갈 수는 없으리라....
 이 하마비는 조선 후기에 경기전을 보수할 때 세워진 것이다.


출입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오는데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을 말한다. 

9m의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가운데 태극 문양으로 장식했다.



경기전의 면적은 49,590㎡로써 어진을 모신 정전 외에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신 조경묘, 예종대왕 태실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史庫)가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정전(보물 제1578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경기전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조선 태조 어진(보물 제931호)'때문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가로 150㎝, 세로 218㎝인 태조 어진은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현재의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좌우의 회랑에는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등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데
좌측 회랑에는 영조, 철종, 순종의 영정이 우측 회랑에는 세종, 정조, 고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지갑만 열면 매일 보게 되는 너무나 친숙한 세종대왕의 영정.


영조대왕의 영정.


철종의 영정...모든 어진이 유리 액자 안에 들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정전의 우물 천정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으며


본전의 회랑에는 어진 외에 경기전 책임자가 쓰던 가마인 가교, 제사에 쓰이는 향로, 향합을 받쳐드는 가마인 향정,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쓰이는 가마인 신연 등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경기전 정전의 입구인 내삼문 동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전주사고(史庫) 실록각'이 나온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에 하나인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의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전주사고가 있던 자리에 1991년에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전주 사고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사고로써 건물은 당시에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실록부터는 편찬할 때마다 주자로 인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른 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타버리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는데
안의와 손홍록이 급히 전주로 달려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 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화를 면하고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들이 번갈아가며 실록을 지켜 내었다. 
실록은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 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고  전주사고의 실록 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로부터 조선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여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귀중한 역사기록유산이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사스런 땅(慶基)에 지어진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존되어 
조선 왕실의 영원과 안녕을 바라는 점에서
전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
전주사고에서 실록이 보존됨으로 조선의 역사가 지켜진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장소이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뒤로 하고서도 경기전의 푸르름과 편안함은 전주 시민의 최고의 휴식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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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위치한 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萬和亭)을 찾아가는 길......
경주에서 출발하여 미스 네비가 인도하는대로 건천을 넘어 운문댐을 돌아 한참을 가니
 동창천을 옆에 낀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는 운치있는 정자가 보인다.



급히 차를 돌려 정자 앞 빈터에 세우고 담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만화정의 대문을 손으로 살짝 밀어보니 아뿔사....문이 잠겨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정자 담 옆에서 잡초를 제거하시던 분께 문의하니
마침 그분이 운강고택,섬암고택,만화정 등을 관리하고 계시는 분이셨다.


퇴직 교사이시면서 밀양박씨 후손으로 인근의 여러 고택들을 관리하고 계시는
박성규 선생의 뒤를 따라 만화정의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행랑채가 파란 철대문인 것에 마음이 걸렸다. 나무 대문으로 복원하면 좋을텐데...


볕 좋은 아침...행랑채와 곳간에 비치는 햇살이 눈이 부시게 따사롭다.


건물은 정자인 만화정과 함께 행랑채, 하당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류주택 답게 곳간의 모양새 하나하나에도 신경쓴 것이 눈에 뜨인다.


행랑채 섬돌 아래서 보니 정자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행랑채에서 정자쪽 문에 서니 안뜰과 함께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정자가 보였다.


정자 바로 옆쪽으로 물빛이 고운 동창천이 흐르고 있는데 
바로 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막지 않았을 때는 더욱 기막힌 경관이었을 듯...


대문 안쪽에 서서 우러러 보니 하늘을 이고 있는 만화정은 마치 입으로 불면 날아갈 둣 가벼워 보인다.


주변 산수의 아름다운 풍광과 잘 어울리게 섬세하게 설계된 이 만화정은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운강 고택(별도 포스팅 예정)의 부속건물인데
운강 박시묵 선생(1814~1875)선생이 조선 철종 7년(1856년)에 지은후 공부하면서 강론하던 집이다.


정자는 한칸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방 1간, 동쪽에 2간의 통방을 배치하고


막돌을 쌓은 기단 위에 장대석 테두리를 두른 2중 기단을 두었다.


처마는 길게 내밀고 네 모퉁이에는 활주를 세웠으며 누마루에는 삼면에 헌함을 돌려 바닥을 확장하였다.


마루는 한간이라 그다지 넓지 않고


부채처럼 넓게 조각한 판대공 아래


정자를 거쳐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굵은 나무)와 섬세하게 조각된 화반대공(대공:마룻대를 받는 짧은 기둥)이 눈길을 끌고


도리의 모서리에도 이렇게 꽃 문양을 새겨져 있으며


용두가 받쳐져 있기도 하는 등 섬세한 장식이 인상적이다.


정자를 돌아 후원으로 가 보니


안뜰보다 넓은 후원에는 운강 박시묵 선생의 비가 서 있었다.


푸르른 강물과 어우러진 주변의 경관은 너무나 아름다워 더운 날씨에 등에 고인 땀을 식히기엔 안성맞춤이다.


만화정은 특히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민을 격려하기 위해 종창천에 왔을 때
이곳 방에서 숙식하였던 곳이기도 해서 더욱 유명한 정자가 되었다.


운문 들판의 이름은 원래 만화평(萬花坪)이라고 하는데
만화평을 굽어 보는 위치에 있는 이 집을 만화정(萬和亭)으로 지은 것은 운강선생의 큰 뜻이 있지 않을까.

안민영(安玟英)의 주옹만영(周翁漫英) 한 구절처럼 
모든 일이 화평하라는 뜻이리라....

이 하나의 마음이 화하면 기운도 화한 법 (這箇心和氣亦和)

나의 마음과 기운을 화하게 하여야 중화를 이루리라 (和吾心氣致中和)
냇물이 사해로 귀의함이 모두 살아 있는 것 같고 (川歸四海渾如活)
온 산에 꽃 핌은 모두 함께 화의 기운 얻음이라 (花發千山共得和)
풍채와 운치는 다 같이 삼대(夏殷周)의 순후한 학풍으로 돌아가리 (風韻同歸三代學)
공부는 요컨대 한 덩이 화에 있음이로다 (工夫要在一團和)
세간 만사 화가 귀한 것이니 (世間萬事和爲貴)

일마다 오직 화하면 모든 만사가 다 화하리라 (事事惟和卽萬和)


만사가 어수선한 이때에 만화정(萬和亭)에 올라 온갖 시름을 잊고 화평함을 누려보심이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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