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많던 여중생 시절, 단짝 친구와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그 앞을 지나다니던 대구 계산동 성당.

호기심에 성당 문을 살며시 밀고 안을 훔쳐 보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던 성당의 높은 첨탑, 하얀 미사포를 곱게 쓰고 미사를 드리던 여자들,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기도하던 긴 머리 아가씨의 모습도 바로 엊그제 일인양 생각나는데....






대구 나들이길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계산성당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았다.





담장허물기 운동으로 사라진 담장 둘레에 새롭게 만든 화단엔

금강소나무, 배롱나무, 화살나무, 철쭉 등이 심겨져
예전보다 더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데




건물은 108년이나 된 역사가 무색하리만큼 깨끗하여 돌아보는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다. 
 
 
 

 

성당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기념 성수대가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내부 장식은 간결하고 깔끔하며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느낌이 앞선다.
 

 
양쪽 벽에 늘어선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주는데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스테인드글라스 중에는 한복 차림의 성인도 눈에 많이 뜨인다.




갓을 쓰거나 사모관대를 한 이들 성인들은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초기 대구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이다. 

 계산 성당의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신나무골, 세방골에서 에배를 드리다가

1886년에는 대어벌(현 인교동)에 있던 정규옥 승지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정규옥 승지의 집은 관청이 아닌 건물로는 대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899년, 한국식 십자형 목조 성당으로 지어진 본당의 축성식은 성탄절에 거행되었는데

사방에서 축성식을 구경하기 위해 신자와 비신자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력한 지진이 대구 지역을 휩쓸었던 1901년 2월 4일,

제대 위에 올려둔 촛대가 진동으로 쓰러져 제대보와 양탄자에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일어나 이 아름다운 목조 성당은 전소되는 참변을 맞게 된다.


한국형 성당을 화재로 잃게 되자 그 위치에 현재의 벽돌로 된 서양식 성당을 세우게 되는데


설계는 프랑스 선교사가, 건축은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벽돌을 굽는 기술이 우리나라엔 없었던지라 중국인들이 벽돌 공장을 새로 새워 건축을 했으며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건축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서 조달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는 열차로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서 대구로 우송되기까지 했다.


1902년 12월 3일 첫미사를 드린 후 1903년 11월 1일 열린 성당  축성식에는 영호남지역 선교사들이 대부분 참석하였고,
 
사방 2백리 안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축성식에 참여하려고 대구로 모여 들었다.

이 축성식에는 인근 주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고,

대구 감사와 지역 유지들도 초대에 응해서 대구 전체의 축제날과 같았다고 한다.




대구에선 전래가 없었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보면 너무나 잘 튼튼하게 서 있어서 성당 건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기와집과 초가집 밖에 없던 시절에 이렇듯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니.....정말 놀랍기만 하다.


이 성당 건물은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건축된 서양식 건물이고 서울,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이다.

경상도 지역을 통틀어 가장 오래 된 이 성당은 현재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당에서 시인 이상화가 영감을 얻어 그의 시 '나의 침실로'를 지었으며

1950년 12월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이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경북지사가 주례사를 했는데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했다는 일화는

대구사람이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계산 성당 주변 일대에는 우리나라 근대 문화 유적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옆 뽕나무 골목 안에는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구의 중심이었던 종로, 약전골목, 진골목들을 돌아볼 수 있다.



 

또 계산성당과 마주 보는 언덕은 바로 가곡 '사우(思友)'의 배경이 된 '청라언덕'인데

이곳에는 102년 역사의 대구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초창기 의료 선교를 담당했던 선교사 주택이 박물관으로 남아 있어서

대구의 근대 문화 거리를 돌아보는 골목 투어의 기점이 된다.


108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제 자리에 서 있는 계산성당.


오늘도 여전히 대구의 근대 역사를 알려주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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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으로 알려져 있는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 위에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기독교 순교자 묘지가 자리잡고 있으니 

바로 '은혜 정원(Garden of Mercy)'이다.

 

 

의료 박물관이 된 선교사 챔니스 주택 아래편에 위치한 은혜의 정원에는 10개의 묘석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데

대구,경북 지방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다가 순교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가 묻혀 있다.

찾아주는 사람 별로 없이 대구 경북 지역 기독교 선교의 발자취를 찾아온 소수의 사람들만이 다녀가는 외로운 묘지.

하나님의 나라와 꺼져가는 조선 땅을 위해 낯선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 활동을 비문과 참고 글에서 찾아 소개해 본다.

 

 

처녀 순교자였던 마르타 스윗츠(Martha Switzer)선교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써

본국에서 보장된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몸 바친다는 각오로 해외선교를 자원하여

1911년 대구땅을 밟은 뒤 월급도 받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사유 재산까지 다 바쳐 가며 사역하였다.

그녀는 대구명도학원에 2천원의 거금(당시 쌀 한가마 10)을 내고

연합회가 제일동포를 위해 전도사(강성숙)를 파송하자 남은 유산 550원마저 기부하였다.

바로 그녀가 남긴 유산으로 일본 나고야와 만주 한인촌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명예나 보수를 바라지 않은 진정한 사역자였으며

교회를 찾은 조선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헌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대구땅에서 18년간 봉사하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였다.

 

 

넬리 딕(Nellie Dick Adams,탁넬니)은 대구 최초의 장로교선교사인 아담스(Adams,안의와,安義窩) 선교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1897111일에 3개월 된 장남 에드워드(안두화 : 계명기독대 창설)를 안고 태평양을 건너와

대구 지역에 발걸음을 디딘 첫번째 여자 선교사였다.

날마다 대구 땅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 넬리 딕은

남문안 예배당(대구 제일교회)의 유년 주일 학교를 창립했고

제일교회 부인 주일학교 교장, 전도부인 담당, 부인 사경회 인도와 순회 전도, 신명학교 출강,

정규 전도 부인 강습회 출강 등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다양한 선교활동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다 19091031일 넷째 아이의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로 숨져

고국을 떠나 대구 은혜정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넬리 딕의 쌍둥이 자매 진(Jean)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넬리 딕 선교사의 묘에는 "She is not dead but sleepeth(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니)"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죽은 것이 아니고 아직도 이 땅과 이 땅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영혼은 살아서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쏘텔(Chase Cranford Sawtell,사우대)188119일에 출생하여 ,

19071016일 신혼의 나이에 이름도 잘 몰랐던 한국땅, 그리고 대구라는 곳에 왔다.

그에겐 한 가지 꿈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구 선교를 넘어 더 내륙지역이고 당시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경북 북부 지역 안동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는 안동땅을 향해 기도하며 대구에서 그 곳으로 가기위해 준비하던 도중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죽게 되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I am going to love them." 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자신은 죽지만 여전히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죽음에 가슴 아파한 동료 선교사들은 쏘텔의 소망을 간직하고 자신들이 안동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렇듯 쏘텔은 안동땅에 복음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고 오히려 한알의 밀알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안동땅에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타 스콧 브루언(Martha Scott Bruen,부마태)선교사는

남편인 브루언(Bruen,부해리) 선교사를 따라 1902510일 대구 땅에 왔다.

남문안 예배당 구내 초가에는 존슨의 부인 에디스 파커가 소녀들을 위한 바느질 반(sewing class)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르타 스콧 브루언은 그 소녀들을 대상으로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동산 위에 있던 부인용 사랑채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화이트하벤에서 1875년 출생한 그녀는

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사와 농촌교회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부인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1930102055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르타 스캇 브루언 선교사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원래 조선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브루언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브루언을 도와 자신이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올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사랑과 내조가 있었기에 브루언 선교사의 사역과 대구땅에 여성학교 교육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딸들도 은혜 정원에 함께 나란히 묻혔다.

 

 

은혜정원에는 대구땅과 조선을 위한 선교의 삶을 사시다 묻히신 분들 외에도 곳곳에서 작은 묘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인데 버디 핸더슨(Buddy Henderson)은 계성학교의 교장 핸더슨(Henderson, 현거선)의 아들로

192065일에 출생해 1921917일로 단명했다.

 

 

루스 번스턴(Ruth Bernsten)은 구세군 대구지방관 번스턴(Brigador Arnold Bernsten)의 딸로 스웨덴 사람이다.

아버지 번스턴은 6.25 이후 중립국 감시위원단 스웨덴 대표로 내한한바 있다.

루스 번스턴은 1918107일 출생하여 1919128일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Our Darling Rut"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바바라 챔니스 (Babara F. Chamness)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925년에서 1941년까지 대구에서 근무한

챔니스(O.Vaughan Chamness, 차미수) 션교사의 딸이다

챔니스 선교사는 애락원에서 농사와 축산을 지도했으며 애락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조엘 로버트 핸더슨(Joel Robert Henderson)은 남침례교 선교사 Willie G. Henderson의 아들로

1964년 태어나서 몇 시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헬렌 맥기 윈(Helen McGee Winn)은 북장로교 윈(Rodger E. Winn,인노절) 선교사 부부의 갓난 딸이다.

윈은 안동에서 경안노회를 창설하고 안동성경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헬렌 맥기는 19131110일에 출생하여 열흘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당시 우리나라는 모든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었던지라

선교사의 자녀들은 태어나서 채 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한 가운데 죽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먼 이국 땅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자녀를 가슴에 묻어야 했던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슬픔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들, 딸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사랑했던 조선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분들의 마음에 있었기에.....

그들의 삶은 계속되고 이 땅에 선교의 꽃이 활짝 피게 된 것이다.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도 이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리라."

-- 은혜정원 표지판의 글에서--

 

참고 포스트 : 의료 선교 박물관(http://blog.naver.com/mslee1116)

메디 시티 - 건강(http://blog.naver.com/msl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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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 생각....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원제는 '사우(思友)'였지만 제목을 쉽게 풀어 써서 '동무 생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발표된 이곡은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애창곡이 되었다고 한다.

여고 시절,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이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며
(곡의 후렴 부분을 이중창으로 부르면 진짜 멋지다)
곡 중에 나오는 '청라 언덕'은 어디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교 후에 친구와 들리곤 했던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이 '청라 언덕'이란 사실을 얼마전에 알게 되었다.


이 곡의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한 후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 제일의 명문 여학교인 경북여고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곡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의 선교사 주택 세채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 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산동 언덕을 지칭한 말이다.
(동국대학교 이혁우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하였다.)


따스한 휴일 오후,추억의 '청라 언덕'을 찾아서 봄나들이를 했다.
'청라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동산 병원 뒷편, 신명 여고 옆길등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제일교회 옆 
긴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


오랜만에 올라보는 '청라 언덕'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선교사 주택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나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선교사들은 이제 없고
세 주택들은 선교 박물관,의료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는데
공휴일은 실내를 참관할 수 없어서 정원만 돌아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멧돌로 늘어놓은 십자가 형상이 특히 눈에 뜨였다.


대구 읍성 철거 (1907) 때에 나온 안산암으로 기초를 쌓고 붉은 벽돌로 벽을 만든 이 집은
아래는 서양식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로 이은 특이한 동서양 절충식 집이다.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옆에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대구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병원장 존슨 박사가 서양 사과나무 72그루를  처음 들여와서
한국 최초로 이곳에서 재배함으로써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금 있는 사과나무는 바로 그 나무의 자손목이다.


또 전국 담장 허물기사업의 하나로 유서 깊은 동산 의료원의 담장과 문을 헐었는데
담장의 일부와 초창기 교회의 종들을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두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이 되었는데


이 건물은 푸른 담쟁이 덩쿨로 뒤덮여 있어서 '청라 언덕'의 유래가 된 듯 하다.


 미 캘리포니아 남부 방갈로 형을 채택한 주택으로 1910년에 지어졌다.


이 주택 역시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다.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현재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었다.


현관 앞에 게양된 태극기에서 그당시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이 느껴졌다.


청라언덕을 다 둘러보아도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백합꽃은 찾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에 나오는 "백합 같은 내 동무야"는 단지 상징적인 표현인데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백합화는 찾을 수 없었지만 청라 언덕에는 등꽃과 라일락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벚꽃잎이 장독대며 돌절구에 살포시 떨어져서 청라 언덕의 운치를 한결 더하여주었다.


추억의 청라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나 또한  '동무 생각'을 나즈막히 불러 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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