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고 있는 몽골 음식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징기스칸(칭기즈칸) 요리?"라고 대답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몽골 음식으로 알고 있는 '징기스칸 요리'는 사실 몽골 요리가 아니다 

몽골에는 양고기를 삶아서는 먹어도 끓이거나 구워먹지는 않기 때문이다.

 

  징기스칸 요릿집에서는 몽골인들이 초원에서 먹었던 방식이라며  

부족한 비타민을 섭취하기 위해 고기와 야채를 함께 끓여 먹었다 하고  

징기스칸이 전쟁 중 철모에 양고기를 구워 맛있게 먹은 데서 유래했다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몽골 사람들은 자신들이 야채를 먹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몽골 전통요리처럼 소개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 징기스칸요리는 일본 홋카이도 지방에서 유래한 양고기 요리로  

몽골이나 역사적 인물 징기스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퓨전 일본 요리이다. 

징기스칸 요리의 기원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구 일본군의 군복을 만들기 위해  

홋카이도에 양목장을 설치하면서 양털 자급을 했던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본래 육식하는 습관이 없었던 일본은 육식을 해야 유럽인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메이지 유신이후로 일본화한 육식 요리를 속속 개발하고 있었는데  

양털로 군복을 만들고 남는 대량의 양고기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었다 

양털로 군복을 만들고 남은 양고기는 일본전통요리인 나베와 결합하여 요나베가 되었는데  

이 요나베((羊鍋))가 징기스칸 요리(일본어: ジンギスカン)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것은  

기마민족인 몽골의 식량인 양과 유럽까지 진격해 들어간 정복군주 징기스칸의 이미지가 맞아떨어져  

당시 일본의 만주 침략등 대륙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몽골을 여행하는 동안 여러가지 형태의 몽골 음식을 대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전통적인 형태로 나오는 몽골 음식도 맛보긴 했지만  

도시에서는 전통 음식이 현대식으로 변모된 음식을 많이 대할 수 있었다 

여행 중 몽골에서 맛본 음식 몇가지를 사진과 함께 소개해 드리자면...... 

 

 

 

 

 

  몽골에서 자주 먹은 음식은 '코릴타슐'인데 이것은 국물 있는 양고기 칼국수이다 

양고기와 국수를 넣고 끓이는 코릴테슬은 우리네 칼국수 미는 방법과 비슷하다 

밀가루 반죽을 둥글고 얇게 밀어낸 다음 반죽을 난로에 살짝 구운 후 칼로 썰어 면발을 만드는데  

물을 끓으면 양고기를 넣고 다 익을 때쯤 국수를 넣어 끓이는 간단한 요리이다. 

 

 

 

 

  

'초이방'은 넓적하게 썰어낸 손칼국수와 고기, 야채를 함께 볶아 양념을 쳐서 먹는 볶음국수이다. 

코릴타슐보다 다소 느끼하고 국물이 없어서 먹기에 상당히 뻑뻑하지만  

고기 삶은 국인 하르슐과 같이 먹으면 제법 먹을 만 하다.

  

 

 

 

 

  하르슐(Har shul)은 양고기만 넣고 끓인 국이다. 

야채는 양파 몇 조각 들어갔을 뿐인데 약간 느끼하지만 후춧가루를 뿌려 먹으면 제법 먹을 만 하다. 

 

 

 

   

몽골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음식은 '호쇼르''보츠'이다. 

'호쇼르'는 한국의 튀김만두와 비슷한 형태로 속은 주로 양고기가 들어가는데  

요즘은 만두호쇼르, 김치호쇼르 등 다양한 종류의 호쇼르가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몽골인들이 점심에 차와 함께 먹는 종요한 음식인 호쇼르는 한국인들의 입에도 제법 잘 맞다. 

 

우리나라 고기만두와 비슷한 '보츠'도 속에 주로 양고기가 들어가는데  

기름기가 굉장히 많아 한번 베어물면 기름이 주르르 떨어질 정도이다. 

보츠는 몽골에서 귀한 손님이 오거나 명절이 되면 만들어 먹는 음식인데  

몽골의 설날인 차강사르에는 보츠를 1,500~3,000개 정도 빚기도 한다고....... 

 

 

 

 

   

언뜻 보면 피자 조각같이 생긴 이것은 '감비르'라고 하는데 한국식 호떡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속에는 기름, 설탕, 소금을 넣거나 아니면 따로 양념해서 밀가루를 치대어 양념을 한다 

패스츄리처럼 따로 따로 떨어지는 것이 특징인데 고소하고 제법 맛나다.

 

 

 

 

 

울란바타르 시내에 위치한 유명 음식점 '알타이'에서는 '몽골리안 바베큐'를 맛 볼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고기와 야채를 접시에 담아가면 둥글고 넓적한 철판 위에서 순식간에 볶아서 내어주는데 

볶는 동안 뒤집개를 위로 던지거나 빙글 돌면서 볶는 등 여러가지 묘기를 부리기도 한다.

 

 

 

 

이름은 몽골리안 바베큐이지만 몽골 전통 요리라기 보다는 퓨전에 가까운 요리인데  

울란바타르 현지에서 아주 인기있는 음식이다.

 

 

 

 

 

몽골 요리 중에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바로 '허르헉'이다. 

허르헉은 양 한마리를 통째로 잡아 내장은 순대로 만들고 고기는 잘라  

뜨겁게 달구어진 돌과 함께 압력솥 안에 넣고 끓이는 몽골의 대표적인 요리. 

야채를 거의 넣지 않고 만들어낸 허르헉은 상당히 느끼하고 고기도 질기지만 

몽골의 전통 음식을 체험하기에는 허르헉 만큼 좋은 음식이 없을 것 같다.

 

  

 

 

  몽골의 휴양지에서는 아저씨들이 모여 염소를 잡아 요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염소의 털을 가스불로 그을린 다음에 고기를 하나 하나 분해하여 요리하는데 

불에 그을린 채로 누워 있는 염소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지던 현장이었다.

 

 

 

 

몽골인들의 주식은 고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들은 서구인처럼 고기를 많이 먹지 않는다. 

그대신 유제품을 많이 섭취하는데 몽골인은 가축의 젖으로 무수한 음식과 유제품을 만든다고 한다.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유제품은 우리들이 '마유주(馬乳酒)''라고 부르는 '아이락(Airag)'인데  

아이락은 말젖을 가죽 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저어 발효시킨 술이다. 

마유주라고 불리우기도 하지만 사실 알코올 성분은 약 6~7도 정도여서  

몽골인들은 아이락을 술의 개념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암말의 젖은 젖소의 우유보다 비타민C가 세배 이상 들어있어서  

식사 대용이나 최고의 영양식으로 사랑받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여름에는 한 사람당 매일 3~5리터 정도의 아이락을 마신다고 하는데 

아이락의 맛은 첫맛은 약간 비릿하고 시큼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하지만 

자꾸 마시면 고소함이 입에 배어 자꾸 찾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소나 양, 염소젖으로 만든 '타라크(Tarag)'는 요쿠르트와 같은 발효식품인데 

설탕이나 방향제, 과일 등의 첨가제를 사용하지 않아 천연 그대로의 발효맛 요쿠르트 같은 맛이 난다. 

'으름'은 서구식 버터인데 우유를 윗부분이 엉겨붙을 정도로 진하게 끓여  

윗부분만 떠내 응고시켜 덩어리에서 물기만 빼고 뭉친 것이다. 

으름은 가축이 오줌보나 가죽 주머니, 나무통 등에 넣어두고 겨우내내 먹는다고 한다. 

 

 

 

 

 

  우유나 양유를 윗부분이 엉겨붙을 정도로 진하게 끓여  

물기가 빠진 우유덩어리를 눌러서 잘라낸 우유과자를 '아롤'이라고 한다. 

탈지분유보다 기름기가 많아 더 끈적하고 찰진 아롤은  

식량이 부족한 겨울을 위한 장기 비축 식량으로 훌륭한 역할을 하며 

몽골인의 보양식으로도 한몫을 톡톡히 하는 영양 간식이다. 

  

 

 

   

'수테차(Suteychai)'는 발효차를 끓여서 우유와 소금을 넣은 것으로 설탕 대신 소금을 넣은 밀크티라고 할 수 있다. 

수테차는 물 5~6리터에 마른 찻잎 한 국자 정도를 넣어 차를 끓이는데 찻잎을 건져내는 시기는  

마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다르고 떫은 맛을 좋아하는 집안에서는 찻잎을 건져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 후 마유나 우유를 국자에 담아 눈 높이까지 들어올린 뒤 끓고 있는 찻물에 서서히 쏟아 붓는데 

한꺼번에 부으면 찻물이 갑자기 차가와져 맛이 변하기 때문이고 또 우유가 엉겨 멍울이 생기기 때문이다. 

제일 마지막에는 소금을 넣는데 몽골 초원에서는 염분 보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수테차는 짭쪼롬하고 비릿한 맛이 나긴 하지만 입안의 누린내와 뱃속의 기름기를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 

 

 

 

 

   

슬퍼도 술, 기뻐도 술인 몽골인들은 국민 1인당 연간 26리터 이상의 보드카를 마신다고 한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만취하는 것이 예의이므로 꼭지가 돌도록 마시는 것이 몽골의 음주 풍습이고 

알코올 농도 39도 이상의 보드카를 마셔대다 보니 늘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거리에는 만취해서 비틀거리거나 주사를 부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양고기만 먹을 것 같은 몽골에도 인스턴트 음식이 엄연히 존재한다 

미스터 치킨을 테이크 아웃하면 이렇게 몽골판 맥심같은 남성전문잡지도 끼워서주는 것이 재미있다. 

맛은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편인데 몽골에서 닭고기 값은 쇠고기의 무려 5배나 된다고 한다. 

몽골에서 가장 비싼 고기는 닭고기이고 그 다음으로 돼지고기, 쇠고기, 양고기, 염소고기, 낙타고기 순이다.

생닭 한마리에 한국돈으로 무려 18,500원 정도 한다고 하니  

몽골에서 치킨은 한번 먹으려면 엄청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고급 음식이다.

 

 

 

 

 

   몽골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곡식이 들어간 음식을 장만해준다. 

농산물 생산이 거의 없어 유목 생활을 햐야만 했던 몽골에서는 곡물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은 야채도 거의 먹지 않았는데 야채는 가축들이 먹는 초원의 풀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울란바타르의 호텔이나 고급 식당에서는 각가지 채소가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걸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야채는 중국에서 수입해오기 때문에 상당히 비싼 음식이다. 

비싸고 귀한 야채를 흔쾌히 대접해주었던 몽골의 친구들에게 감사드리며

간략하게나마 몽골 음식 소개를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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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가도 끝없는 초원이 펼쳐지는 몽골 초원.

푸른 초원과 함께 몽골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파란 하늘이다.

'뭉크 탱그린'이라 부르는 파란 하늘은 몽골인들에게는 단순한 창공의 의미가 아니라

하늘 그 자체가 초월적인 힘, 즉 신성을 가지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또 몽골인들은 나무, , 바위 등 모든 사물에 정령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정령의 심기를 거스르면 큰 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

 

열악한 자연 환경과 함께 갈등이 심했던 종족 역사 속에서 살아 남았던

몽골인들이 영원히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신(神) 뿐이었으므로

전통이 말살되었던 사회주의 시기에도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굳건히 지켜왔다.

 

 

 

 

 

16C에 라마불교가 전파된 이후 정령을 섬기던 많은 몽골 사람들은 불교를 믿게 되었는데  

일반 불교와 마찬가지로 환생과 고통으로부터 각 개인을 구원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라마불교(티벳불교)오늘날 몽골 국민의 90% 이상이 믿고 있는 종교이다.

 

 

 

 

20C 초 몽골에는 수백개에 이르는 불교 사원이 있고 남자의 30%가 수도승일만큼 번성했다는데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공산주의가 반 종교 캠페인을 벌인 이후

사원의 연계적인 체계가 무너지고 많은 수도원들이 문을 닫게 되어 

1990년까지 오직 간단사원(Gandan in Ulaanbaatar)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0년에 이르러 민주주의가 다시 재건되기 시작하자 종교의 자유도 허락되어 

100개 이상의 수도원이 다시 문을 열었으며 기독교, 이슬람교도 종교 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의 90%가 라마불교를 믿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몽골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종교는

수천년 동안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종교였던 샤머니즘이다.

 칭기즈칸도 무당에게 전쟁에 대한 자문을 구할 정도로 샤머니즘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오늘날에도 몽골 북쪽 지역에서는 샤머니즘이 불교와 혼합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무당들이 신을 몸안으로 불러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몽골 무당은 자신의 영혼을 몸밖으로 내어보낸다.

몽골 무당은 혼수 상태와 비슷한 탈자아 상태에서 무당의 영혼이 몸으로부터 빠져 나와

하늘과 땅 속, 물 속을 자유자재로 다니며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초원을 다니다보면 돌이나 흙무덤 위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고 푸른 천을 둘러놓은 것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한국의 성황당과 비슷한 '어버(어워, Ovoo)'이다.

 

 

 

 

 

어버는 마을의 수호신이요, 초원의 이정표이자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는데

몽골인들은 학식, 지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어버 앞에서 재난 방지와 가축의 번성을 위해 기도한다 

과거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말머리를 베어 성황당에 바치고 승전을 기원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몽골에서는 먼길을 떠나기 전 성황당을 들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성황당의 유래 중 가장 그럴싸한 것은 들판의 이정표 대신 생기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보이는 초원에서 방향을 잃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러다가 어버를 만나면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반가움에 환호를 지르게 된다.

지금도 구역의 경계에는 어버가 서 있어서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말이나 차에서 내려

어버 주위를 시계 방향으로 세바퀴 돌고 흩어진 돌이 있으면 모아서 다시 쌓아 올리며 소중히 다룬다.

 

 

 

 

나담축제 때는 성황당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비는 '어버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정월대보름에 지내던 동제와도 비슷한 의식이라고 한다.

 

 

 

 

최근 몽골 정부는 문화재 보호정책을 펴면서 어버를 복원하기도 하면서 관광용 어버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몽골의 사원이나 마을 어귀에는 우리나라 선돌과 흡사한 모미가 서 있는 것도 눈에 뜨인다.

 

 

 

 

모미는 말뚝 모양의 바위에다 얼굴 형태를 그려놓은 것이나 사람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모미를 만나는 사람들은 둘러친 파란 천에다 몽골의 화폐인 투그릭을 꽂으며 가족의 평안을 빈다.  

현재 몽골의 국교는 라마불교(티벳불교)지만 헌법상 종교 및 신앙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다.

몽골인의 90%가 라마불교를 신봉하며, 나머지 5%는 이슬람교도가 차지한다.

그리고 1990년 이후 개신교 및 가톨릭 등이 전파되어

기독교 신자가 약 2%(4만 명 추산)이고, 나머지 3%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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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그의 본명은 테무친이다.
칭기즈칸의 어머니 후엘룬 우진은 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타르가 약탈해 온 여자였다.
후엘룬은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이수게이의 형제들에게 발각되어 적장인 이수게이의 부인이 된다.

후엘룬은 잡혀와서 10 달 만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수게이는 고민 끝에 아이를 친자식으로 받아들이고 이름을 테무친이라 하였다.
자신이 타타르족의 테무친 우게의 목을 벤 날에 태어났으므로 적장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준 것이다.

뒤에 칸(Khan,왕이란 뜻)으로 추대된 그는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몽골족의 기상을 세계에 떨치고 1,227 년에 세상을 떠났다.





칭기즈칸.....몽골의 역사는 그 이름과 함께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몽골족 가운데는 몽골계 외에도 투르크나 탕구드계 등 여러 언어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3 세기 초, 테무친이 칭기즈칸에 추대되고 몽골 제국을 창건하면서 '칭기즈칸'과 '몽골'이 갖는 카리스마로 인해
다른 소수 부족의 언어와 의식은 모두 철저히 몽골에 동화되고 만다.
이로써 오늘날 몽골족 대부분이 칭기즈칸을 자신들의 시조로 생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비행기를 타고 몽골 울란바타르에 내리니 칭기즈칸 공항이라는 붉은 네온이 여행자를 맞아 준다.




공항에 한 벽면에는 어김없이 칭기즈칸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는 곳마다 관광 기념품점에는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상품들이 진열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칭기즈칸 열쇠 고리는 기본이고.....

화폐에도 색깔과 액면가만 다르지 칭기즈칸의 초상 일색이다.

(10,000 투그릭은 우리나라 화폐 가치로 10,000원 정도이다.

500 투그릭에도 칭기즈칸...1,000 투그릭....역시 칭기즈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상점이나 음식점의 가장 중심이 되는 벽면에도 이렇게 칭기즈칸의 초상이 붙어 있고





몽골 게르의 북쪽인 신성구역에는 어김없이 칭기즈칸의 초상화나 





칭기즈칸을 새긴 카페트가 떡하니 게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다.





울란바타르의 중심인 수흐바토르 광장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중심에도





칭기즈칸의 동상이 위엄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울란바타르 남쪽 산등성이에 새겨진 칭기즈칸의 대형 형상은 몽골 사람들의 자부심을 더욱 고취시켜주는데
이 형상은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한지 800년 되는 지난 2006년에 만들어졌다.




몽골 사람들은 최고라는 의미가 없는 곳에는 절대로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공항, 칭기즈칸 호텔, 칭기즈칸 보드카.....
각 분야에서 최고의 것이 아니면 절대로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사업을 번창시키기 위해서 칭기즈칸이란 명칭을 함부러 사용하는 사람은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테러 당할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칭기즈칸이 죽은지 780 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몽골에는 칭기즈칸이 살아 있음을 본다.
몽골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는 살아있는 칭기즈칸은 
각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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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마지막 왕 '벅드 칸 겨울 궁전 박물관'에는 몽골인들의 다양한 풍습을 그린 세밀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아이락 축제'라는 그림에서는 몽골인들의 음주 문화가 세밀한 필치로 잘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축이 공간 가득히 늘어나기를 기원하는 제전인 '아이락 축제'는 
그 해 처음으로 말 젖을 짠 날이나 그 말 젖을 발효시켜 아이락을 만든 날 거행하는 축제이다.
아이락 축제를 그린 세밀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숫대야보다 큰 술잔에 아이락을 채워서
마시다 토하고 또 마시거나 술 마시는 사람의 양 귀를 잡고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아이락 축제의 진기한 음주 풍습이 그림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세밀화에 나타난 것 처럼 술 마실 때 사용된 엄청나게 큰 술잔은 실제로 몽골인들이 술 마실 때 사용했던 잔으로
'벅드칸 겨울 궁전 박물관'에 전시된 아이락 술잔은 크기가 거의 세숫대야 만큼이나 크다.



몽골의 대표적인 술, '아이락'은 '마유주(馬乳酒)'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말젖을 가죽 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저어서 만드는 아이락은 발효되면 보글보글 소리가 나며 기포가 솟아오르며 술이 된다.



우리나라 막걸리 같이 약간 비릿하고 시금털털한 맛을 가진 아이락은 알코올 성분이 그다지 높지 않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마시는데
몽골 사람들은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아이락은 술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아이락은 식사 대용으로도 쓰이는 몽골 최고의 영양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에는 한사람이 매일 3~5 리터의 아이락을 마시기도 하고 허약한 아이나 중환자에게는 영양식처럼 아이락을 마시게 하기도 한다. 
몽골에서 아이락은 행복을 상징하며 흰색의 종교적 의미 때문에 축제나 기념일에는 꼭 사용되는 대표적인 전통술이다.



음주는 몽골의 국가적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 시대 이후부터 40년전까지는 음주가 엄격히 통제되었으나 
1959년 처음으로 보드카를 만드는 증류소가 세워졌고 '절제된 소비'를 권장하는 홍보운동이 시작되었다.
몽골의 젊은이들에게 음주의 이점(?)을 알리기 시작한 결과 술의 소비와 함께 국가 재원 또한 급증하였다.
몽골인은 술과 함께 산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통계에 따르면 몽골인은 남녀 구분없이 연간 26리터 이상의 보드카를 마신다고 한다.


 

알코올 농도 39도가 넘는 독주 보드카를 물 마시듯 마셔대는 몽골인은 늘 술에 취해 있기가 일쑤이다.
기뻐도 술, 슬퍼도 술, 기분 나빠도 술....집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직장 내에서도 술을 마신다.

몽골인들은 손님을 맞이할 때도 술로 맞이하기 때문에 공항에서부터 벌어진 술 파티가 끝이 날 줄 모르고
손님이 돌아 가거나 먼 길을 떠날 때에도 어김없이 술판을 벌여야 그 사람을 놓아보내준다.
떠나는 손님에게도 그의 안전을 빌기 위해 술 마시기 전에 동서남북을 향해 고수레를 한 후 술잔을 주고 받는데
여행에 앞서 마시는 세잔의 술은 행운과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에 반드시 의무적으로 세잔은 마셔야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몽골을 사업이나 방문 목적으로 들리는 사람들은 몽골인들의 매일 계속되는 술 대접으로 인해 취생몽사하다 돌아오기가 다반사이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만취하는 것이 예의인데 취하지 않으면 술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여 계속 술을 먹인다.
특히 남의 대접을 받았을 때에는 주인의 호의에 답하는 듯으로 만취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취해서 저지르게 되는 주사에 대해서도 아주 관대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급한 몽골인들은 술마시다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금방 주먹질과 욕설이 난무하며 치고 받고....난투극이 벌어지는데 술이 다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이 만취하는 풍습은 칭기즈칸 시대로 올라가는데 다른 종족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취한 척하고 있다가 주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의 집을 방문해서 술을 마실 때에는 손님이 주인을 해치지 않을테니 안심하라는 표시로 만취하는 습관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에서 '만취는 영원한 우정'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오른쪽 목을 튕기기도 하는데 이는 '완전 필름이 끊어지도록 마셨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어느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모자라 쉽게 술에 취하는 것으로 보고됐다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몽골인들은 음주에 의해 쉽게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몽골의 모든 범죄의 80%이 술에 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몽골의 매월 1일은 국가에서 정한 '금주일'이다.
이날은 몽골의 모든 술집은 영업을 하지 않고 다 문을 닫아야 한다.
국민들의 과다한 음주로 인해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니 한달 중에 하루 만이라도 술을 마시지 말자고 정해 놓은 날이란다.
금주일에 본 몽골 시내의 유명한 Pub Bar 의 풍경은 실외 의자까지 모두 홀 안에 쌓아두어 마치 폐업한 가게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나 술을 좋아하는 몽골인들이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딜 수가 있을까....
이와 같이 앞에서 단속반이 오는지 웨이터를 문 앞에 세워두고 몰래 몰래 지하에서 영업을 하는 술집도 있다는 사실....



강남의 어느 바처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어느 Lounge Bar 안에는 금주일에도 몰래 한잔 하러 오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몽골의 젊은이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처음에는 맥주로 시작하지만.....
맥주로 인해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알코올 함유량이 39도나 되는 보드카병을 쉴 새 없이 비우고 폭탄주도 서스럼없이 들이킨다.



몽골 젊은이들이 최후에 마시는 술은 항상 칭기즈칸 보드카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의 술이지만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칸 보드카를 비워야 끝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오늘도 몽골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히며 크게 외친다.
"토토이(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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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서쪽에 위치한 바얀골 지역(Bayangol District) 적십자 지부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말박물관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차를 돌려 말 박물관으로 향한다.


차에서 내려 앞을 보니 엄청나게 큰 말동상이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건물 바로 아래 선 사람과 비교해보면 말 동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실 것이다.


어마어마한 말 동상이 방문자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이 말 박물관은 2009년 5월에 개관했는데
50명의 독일, 중국의 기술자들이 힘을 합친 이 공사에는 무려 250톤의 철이 소요되었다고...


세계 제일의 크기를 자랑하는 말 동상의 높이는 무려 40m 인데 말의 높이만 해도 30m에 달한다고 한다.


동상이 서 있는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아직 기반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주변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거대한 정문과 진입로도 아직 공사중이라 주변 경관은 다소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으리으리한 로비로 들어서니 엄청난 크기의 봉 위에 채찍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칭기즈칸이 15세 때에 황금 채찍을 찾은 장소에 칭기즈칸과 그의 말 동상을 세웠다고 하는데 봉 위에 놓인 채찍은 아마 재현품인 듯.....


말에 대한 다른 전시관이 있나 싶어 물어보니 어이없게도 1층에 있는 전시품은 이게 전부라고 한다.
말 박물관이라서 여러 종류의 말이나 말 관련 유적 및 전시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엄청난 크기의 말 동상이 전부라고 하니 약간은 실망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 말 박물관의 관람 포인트는 바로 '말 속으로 들어가 본다'는 것이다.
아랫층 로비에서  말 꼬리를 통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말의 뱃속으로 들어간 후 
말 뱃속에 있는 영상실에서 3분 정도의 말 박물관 건립 과정에 대한 영상물을 감상하고 다시 계단을 통해 
말머리로 올라가게 되면 말머리 끝 부분에 아주 협소하긴 하지만 전망대가 위치해 있어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사진에서 말 갈기 부분에 사람 세명이 서 있는 것을 점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말 동상과 그 크기가 비교된다.


말 뱃속에 있는 영상실은 한 십여평 규모로 47인치 정도의 TV가 낮은 위치에 앉아 있어서
의자에 앉으면 뒤의 사람은 화면이 보이지도 않는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스하고 바로 전망대로 올라간다.
 


영상실을 나와 계단을 통해 전망대로 올라가 뒤로 돌아보니 헉....위엄에 가득 찬 칭기즈칸의 얼굴이 노려보고 있다.


얼마나 크기가 큰지 아무리 뒤로 물러서도 카메라에 반도 채 잡히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크기의 동상을 바로 앞에서 찍는건 광각 렌즈로도 안 되고 어안 렌즈라야 제대로 될까....?


할수 없이 부분 부분 닥치는 대로 카메라에 남아 보았으니 보시는 분들이 머리 속에서 이미지를 조합하시기 부탁드린다.


칭기즈칸의 왼쪽 팔뚝 아래에 늘어선 게르들이 이채롭다.


앞으로 게르 200여채를 주위에 더 세워 이곳을 관광의 기지로 삼을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주변이 많이 어설픈지라 잘 정비된 관광지로 자리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 하다.


칭기즈칸 말 박물관.....전시품은 없고 겉모습만 웅장한 박물관이긴 하지만
세계 최고의 말 동상이 있는 박물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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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펼쳤다.

몽골인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칭기즈칸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기병을 앞세운 전격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시에 몽골 군대는 1인당 8~9 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는데 병사가 100 여명이면
말이 800~900 마리가 되므로 적들은 감히 몽골 병사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복지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데 한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리다 병사를 태운 말이 지치면
달리는 말을 세우지도 않고 말 위에서 다른 말로 올라타며 진격했으므로 군대의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해결 문제인데 몽골인은 원거리까지 별도의 식량 조달이 필요없는 유목민이었으므로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도 양고기 가루를 미숫가루처럼 말린 보르츠나 말젖으로 연명할수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늙은 말 부터 차례로 잡아 먹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저 싸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칭기즈칸 군대는 요즘의 인터넷 프로토콜 방식과도 같은 국제적인 통신망을 구축하여
근거리는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하고 장거리는 송골매를 이용하여 연락을 했다.
전령은 극소수의 부족 언어를 사용하는 군사를 보내어 도중에 체포 되더라도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 군에서 사용하는 통신 보안 방법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 정보망을 통하여 정복지 현지의 상인들을 보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몽골군은 무섭다'라는 소문을 적진에 퍼뜨리고 밤에만 활동하는 '검은 기마병'을 보내는 등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작전을 폈다.
또 몽골 군대의 지휘관들은 칭기즈칸부터 말단 병사까지 동일한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같은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노략질을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전리품이 생기더라도 아랫사람을 먼저 챙겼기 때문에 몽골군의 사기는 충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은 이국적인 문화를 잘 못 받아들여 나라는 쇠퇴일로를 겪게 된다.
칭기즈칸 시대에는 한집에서 병사 한명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으므로 100 만 정도의 인구에 병사가 10 만이나 되었는데 
라마 불교의 도입으로 인해 몽골의 군사력은 점점 쇠퇴하게 된다.
원나라 전성기의 몽골은 한집에서 한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집에서 한명 이상을 라마승으로 출가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병사 또한 점점 줄어들게 되니
몽골의 군대 제도는 와해되어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기게 되기까지 이른다.
이때문에 대제국 몽골은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게 되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로 유라시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몽골군의 현재의 모습은 어떨까.....?
울란바타르 손기노 카이르칸 지역에 위치한 군부대를 찾아가 보았다.



몽골의 정식 군대인 몽골 국군은 사회주의 정권 붕괴 후 몽골 인민군에서 계승된 군대이다.

몽골의 총병력은 9100명, 예비병력은 14만명인데 (2003년 통계) 병력은 사회주의시대보다 만명 정도 줄어들었고
몽골 군대의 장비는 주로 인민군 시대 소련으로부터 얻은 무기가 대부분인데  
전투기나 공격용 헬리콥터 등은 모두 퇴역해서 전력은 매우 약하다고 한다.




손기노 카이르칸에 위치한 군부대는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었지만 부대는 비교적 한산해 보였고



군인들의 복장과 복무 모습은 우리나라 군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의 입장에서 군부대의 겉모습만 보고 받은 인상을 피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겠지만
몽골 군부대에서 받은 인상은 '너무나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방문자를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군인 아저씨의 시선도 따스하기만 하다.



부대 강당에서 공식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초소 옆에서 트럼펫을 연습하는 군악대원들을 발견했다.



트럼펫 부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계속 연주해 달라고 했더니 카메라를 너무 인식해서인지 경직된 모습으로 악기를 연주했다.

그런데 이 군인은 나이가 상당히 되어 보인다. 도대체 연세가 몇이신지.....



나이 많은 군인들 뿐인가....하고생각했는데 형님들 앞으로 나이가 많이 어려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이 군인은 카메라 앞에 세웠더니 출입문 앞에 붙어서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너무나 어려 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군인 아저씨'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완전 중학생 같아 보이는 이 군인, 수줍은 듯 머금은 미소가 참 훈훈하다.
몽골의 군대 역시 우리와 같은 징병제로서 남자는 18세부터 1년간 병역의 의무를 진다는데
이 군인은 채 열여덟도 안 되어 보이는 듯..... 너무나 애띤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몽골에서는 일정한 돈을 내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병역대체금이라고 불리는 납부금을 납부하거나, 해외에 유학하는 등 26세까지 해외에서 지내면 병역의무는 소멸된다고 하고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면제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보다는 징병제도가 상당히 유연하다.

실제로 안내와 통역을 위해 같이 따라다녔던 몽골 항공 직원 '바야라'도
200만 투그릭(몽골 화폐 1투그릭은 우리 화폐 단위와 비슷) 정도의 병역대체금을 내고 군대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돈을 내고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군대를 가겠냐고 반문했더니 몽골 청년 바야라는
"솔직히 말해서 몽골 군대는 공부를 많이 배우지 못했거나
수백만 투그릭이 넘는 병역대체금을 낼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이 간답니다."

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돈으로 이백만원 정도 되는 병역대체금은 저소득층에게는 너무나 큰 돈이므로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군대를 면제받지 못하고 입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의 월급이 사회에서 받는 월급의 평균 수준은 되기 때문에 불만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데
어쨌든 이런 제도가 다른 문제가 없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돈을 내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라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돈 내면 군대 면제'되는 제도가 시행되었더라면 온 나라가 완전 난리가 났을터인데......



군부대를 떠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자꾸만 어린 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병역대체금 기백만원을 내지 못해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병역 의무를 잘 마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고
자신의 나라 몽골을 위한 애국심만은 어느 나라의 군인들보다 더 불타오르기를 마음 속으로 기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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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인 초가집이나 기와집을 볼 수 있는 곳은...?

정답은 '민속촌'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 가옥인 초가집이나 기와집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보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옥은 이제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라고 말하는게 더 합당할 듯 하다.

그럼 몽골을 대표하는 전통 가옥, 유목민의 이동식 천막집은 뭐라고 하는지 아시는 분.....?
학교다닐 때 사회책에선 '파오'라고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이것은 중국어 'bao(包)'에서 기인된 말이고
영어로는 유르트(Yurt), 몽골어로는 게르(Ger)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도시에 초가집이 없는거나 마찬가지로
아무리 몽골이라도 도시에는 현대식 건물이 있고 멀리 떨어진 초원에 가면 게르를 볼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갔었는데 나의 예상은 완전 어긋나버렸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시내 한복판에 게르가 즐비하다.

울란바타르를 둘러선 나즈막한 야산에 온통 게르 천지다.
현대적인 아파트 앞에도 게르, 차들이 분주하게 다니는 길가에도 게르, 심지어는 빌딩의 옥상에도 게르가 올라 앉아 있다.
수도 울란바타르 주민의 반이 게르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몽골은 온통 게르천지여서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오늘은 울란바타르 인근에서 돌아다니며 찍은 <게르 풍경>을 소개해 드린다.
게르 짓는 과정과 게르의 내부 구조....등 게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 기회에 다시 자세히 설명드리기로 하고...



울란바타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이승 전망대에 올라서 시내를 본 풍경이다.
저 멀리 울란바타르를 둘러싼 산중턱까지 집들이 들어찬 모습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집들의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카메라의 렌즈를 줌으로 당겨 자세히 보니 헉...울란바타르 산중턱에 있는 건물의 반이 게르다.



판자로 울타리를 친 구역 안에 게르가 한두채 씩 자리잡고 있다.



자이승 전망대의 남쪽에는 이렇게 게르 집단촌이 보인다. 게스트 하우스나 캠프촌이 아닐까...추측을 해 본다.



손기노-카이르칸 지역의 주택들. 2층 양옥과 게르가 한 동네에 섞여 있다.



게르는 초원에 가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건 완전 오산. 아파트 앞에 게르가 있다.



이렇게 관공서 앞 마당에도 버젓히 게르가 있고



공터만 있으면 어디든지 게르가 빠지지 않는다.



달동네의 앞의 게르...



가게 앞에도 게르가 버티고 있는데 게르 앞에 간판이 있는 걸로 보아 상점의 용도로 쓰이는 듯 하다.



때로는 옥상 위에 이렇게 버젓이 올라앉아 게스트 하우스로 쓰이기도 한다.



다운 타운의 고급 아파트 앞에도 게르가 버티고 있는데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이런 게르는 대부분 영업용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는 게르 갤러리도 있는데 엄청나게 규모가 큰 게르 갤러리의 안에는 수준 높은 미술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게르의 모양과 게르를 둘러싼 울타리는 어느 지역을 가도 비슷한 모습이다.



시골 동네에 자리잡은 게르나...



민가가 별로 없는 길가에 자리잡은 게르나 다 판자로 담을 둘렀다.



담장은 판자로 , 대문은 함석으로 된 곳이 많이 보인다.



때로는 이렇게 컬러풀하게 담을 장식한 집도 보인다.



물론 초원 한가운데서 사는 유목민들에게야 구역을 정하는 담이야 필요조차 필요가 없겠지만
도시 변두리에 사는 주민들의 게르 주변은 담을 판자로 둘러친 모습들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울란바타르의 휴양지구인 나이람달로 가는 길목에도 별장들과 게르가 섞여 있다.
몽골 사람들은 조금만 살만 하면 누구나 별장을 가지고 있는데 부자들은 여름 별장, 겨울 별장도 따로 있다고 한다.



테를지 국립 공원에서 본 풍경. 웅장한 산 아래 게르가 멋진 조화를 이룬다.



나이람달 캠프장의 게르. 몽골에도 이렇게 멋진 숲이 있고 이런 곳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흘러가는 개울도 있다.



이런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별도.... 달도....은하수도 고스란히 게르 위로 쏟아진다.



몽골에는  울란바타르와 테를지 단 2곳에 골프장이 있다는데.......골프장의 게스트 하우스도 게르다.



부족의 깃발이 나부끼는 이렇게 멋진 게르 안에서는 당장이라도 칭기즈칸이 칼을 차고 나올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게르라면 역시 이렇게 초원의 하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어야 제격이다.
파아란 하늘과 눈부신 초원의 푸르름 속에 있는 게르의 하얀 색은 초원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



게르 앞에 이렇게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은 몽골의 초원  어디를 가든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우는 초원의 게르 주변 풍경들은 몽골을 떠나온 여행자의 마음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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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곳 바로 '수흐바토르 광장'이다.




울란바타르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가장 번화한 거리 피스 애비뉴(평화의 거리)를 건너면 눈 앞에 엄청나게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수흐바토르 광장은 울란바타르의 어느 지역이든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인데
광장을 중심으로 국회 의사당, 역사 박물관, 중앙 우체국, 외무부 청사, 국립 오페라 하우스, 자연사 박물관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각국의 대사관, 사원, 대학 등의 교육 기관 또한 이 광장과 가까운 곳에 밀집해 있다.



이 광장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광장 중앙에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 있기 때문이다.



수흐바토르가 1921년 7월 11일 혁명을 선포하고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1925년부터 이곳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흐바토르(Damdinï Suhbator )는 가난한 유목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역전 마차의 마부가 되었고
1911년 몽골 독립 후 건군된 자치 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하여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918년에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은 수흐바토르는 1920년 6월 초이발산 등과 몽골인민당을 결성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 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건설을 위한 전술 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우르가(현재 울란바타르)에 인민 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 있는 장소는 1921년 몽골군이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개선 환영식이 열렸던 장소이며
7월 11일, 수흐바토르 장군이 혁명을 선포할 때 말을 타고 서 있었던 곳이다.
당시 그가 탄 말이 오줌을 쌌는데 모여있던 사람들은 이를 길조라고 생각하여 그곳에 말뚝을 박아놓았고
나중에 동상을 세울 때에 그 말뚝을 찾아내 그곳에 세웠다고 한다.
동상 밑에는 1,865kg의 금과 수흐바토르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에서 입었던 옷 한벌, 그리고 장군 부인이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넣어 두었다.



원래의 동상은 1931년에 만들어졌는데 1946년에 혁명 25주년을 기념하면서 새 동상으로 다시 만들어 세우고 이전 동상은 현재 몽골 대학교에 있다.
영웅은 단명이라던가....그는 30세 때 결핵으로 짧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수흐바토르 장군상 뒤에 장엄하게 서 있는 건물은 몽골 국회의사당이다.



국회 의사당 정면에는 몽골을 상징하는 세명의 동상이 서 있는데 가운데는 칭기즈 칸, 왼쪽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두번째 칸인 오고타이 칸,
오른쪽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에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이다.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몽골족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칭기즈 칸은 몽골을 상징하는 이름이며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건물 중앙에는 수흐바토르 장군묘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2005년에 몽골 국립 묘지로 이전했으며
국회 의사당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하여 완전한 새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몽골의 영웅들이 있는 계단으로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올라가서 자세히 살펴보거나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국회의사당과 수흐바토르 동상 사이에는 이곳이 울란바타르의 중심이며 기점이라는 표식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8방위가 표시되어 있다.



수흐바토르 동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광장에는 울란바타르의 중요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국회의사당 바로 서쪽 건물은 몽골 역사 박물관이며 그 뒤편에는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몽골의 대부분의 궁전이나 사원,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고
5,000~ 10,000(우리와 돈 가치가 비슷하다) 투그룩 정도의 사진 촬영비를 내면 촬영이 가능하다.
몰래 사진 찍다가 들키면 몽골 관리인이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당장 돈을 내라고 요구한다.



광장 입구 서쪽에 있는 건물은 중앙우체국인데 건물 벽에 코카 콜라 광고판이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이 우체국이라는데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광장의 동쪽엔 민주당 당사, 몽골 중앙 문화원,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자라잡고 있다.
 


뒤의 건물이 몽골 중앙 문화원이다.



몽골 국립 오페라 하우스는 아주 밝은 핑크색으로 칠해진 것이 이색적으로 보이며 바로 뒤의 건물은 샹그리라 호텔이다.



수흐바토르 광장의 남쪽 피스 에비뉴 건너편에는 반달 모양의 특이한 고층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울란바타르 시내 어디를 가더라도 보이는 유명한 건물이다.
우리나라 기업에서 건축한 건물이라는데 울란바타르 친구의 말로는 부실 공사라고 한다. 
외국에 짓는 건룸이라도 좀 더 견고하고 내실있게 지어서 국가 위상을 실추시키기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몽골의 중요한 혁명 기념일이나 국경일에 수흐바토르 광장에서는 국가 차원의 행사가 자주 열리는데 
그 때는 광장 가운데 있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에 꽃을 바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며
결혼식을 끝낸 신랑 신부들이 웨딩 사진을 찍으면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장소로도 자주 이용된다.



가히 울란바타르의 정치, 경제, 문화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수흐바토르 광장은
몽골인들에게는 울란바타르의 상징이며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몽골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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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맑게 개인 날,
버스에 올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Ulannbataar)의 남쪽 외곽지역으로 향한다.




울란바타르에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몽골 적십자사 칸-울 지부(Khan -Uul District Red Cross Branch)'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칸-울 지역은 14개 구역에 약 9만명의 인구가 밀집해 사는 지역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달동네와 같은 지역이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지만 저소득층이나 소외 계층이 주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고
가옥 또한 몽골 전통 가옥인 게르(Ger)나 대충 지어진 판잣집이 많고 도시 기반 시설이 부족하여 매우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지난 7월 14일 나담 축제 기간에는 화재가 일어나서 게르 14채가 불타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며
7월 21일 , 울란바타르를 강타한 집중 호우로 인해 게르 1,000여채가 떠내려 가고 사상자도 났으며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 당시 칸-울 지구에 물이 차 올라 사람들이 걷거나 차가 운행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길 곳곳에는 물이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어서 길에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칸-울지구의 건강과 구호 활동을 위해 봉사하는 '몽골 적십자사 칸-울지부'를 찾아가는데 거리에 고인 흙탕물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걸어 가야 했다.



조그만 판자문을 통해 들어간 좁은 공간에는 벽돌집 한동과 몽골식 전통 가옥인 게르(Ger) 두채가 있었다.



몽골 적십자사 칸-울지부는 2001년도에 적십자사에서 건립했는데 우리를 맞아준 게르는 EU에서 지어준 것이다.



동네 주민들과 자원봉사자 몇 분이 먼저 오셔서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한국 RCY 일행들은 준비해 간 우정의 선물 일부를 칸-울 지역에 전달했는데 우정의 선물은 생활 필수품과 학용품들이다.



우리가 준비해 간 작은 선물이 이분들에게 귀하게 쓰여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어 복지 센터로 쓰이는 게르 안으로 인도되어 들어갔는데



밝은 외부에서 게르의 실내로 처음 들어가면 갑자기 너무 어두컴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게르의 둥근 천정(터너)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살로 인해 곧 눈이 밝아지고 모든게 익숙해진다.



게르의 북쪽인 신성구역에는 칭기즈 칸의 초상화가 붙어 있고



역대 칸-울지구 적십자 책임자인 듯한(?) 사진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게르의 중앙에는 귀한 생수와 사탕이 전통식 탁자 위에 베풀어져 있었고



 몽골 전통 우유과자인 '아롤(aaruul)' 도 '무지개의 나라 솔롱고스(solongos,몽골에서 한국을 이르는 말)'에서 온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칸-울지구 적십자 지부장과  자원봉사자 대표의 인사가 있은 후 한국측 대표의 인사와
가지고 간 우정의 선물 및 대한 적십자사 총재의 선물 전달식이 이어졌다.




환영해 주신 분들 중에서 녹색 '델(Deel,몽골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 입으신 이 할머니는 1955년부터 지금까지 54년간 자원봉사를 하셨다는데
가슴에는 여러개의 기념 뱃지와 훈장이 빛나고 있어 할머니의 활동 경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내어주는 자원 봉사를 하셨기 때문일까?
올해 86세라고 하시는데 그 태도는 배우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자주색 델을 곱게 차려 입으신 이 할머니는 70년 동안 적십자 자원 봉사를 하셨다고 하는데



몽골 적십자가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한 것을 생각하면 이 할머니는 거의 몽골 적십자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란 델을 입으신 라마승은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전통 예절을 교욱하는 일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이 지역 노인들이 나와서 멀리서 온 방문자들을 환영하는 '장기 자랑 공연'이 이어졌다.



봉사 활동을 하러 갔는데 노인들에게 도리어 '위문 공연'을 받은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서 처음에는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치는 이 노인들에게는
멀리서 온 방문자들에게 자기들의 숨어 있던 실력을 보여준다는게 또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생각하며 기분좋게 들으면서 박수도 신나게 칠 수 있었다.



노래의 반주로 아코디언과 기타를 연주하던 할아버지는 이어서 기타 독주, 하모니카 독주까지 한다.
한곡이 끝나는가 하면 또 다른 곡이 이어지고......^^
젊었을 때에 한가락 날리고도 남았을 이 할아버지의 끼는 이날 완전 날개를 달았다.



칸-울지부 적십자사 복지센터에서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복지 증진을 위한 일과 식사 등을 제공하는 등의 봉사를 하고 있는데



이날 한국에서 방문한 일행은 노인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전달하는 외에 몽골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마사지 봉사를 했다.



라마승 또한 한국에서 온 사이비 마사지사(?)의 손길에 몸을 내맡기고 편안함을 즐겼다.
발에 신은 특이한 부츠는 '고탈(Gutul)'이라고 하는데 가죽으로 되었으며 우리나라 고무신처럼 앞코가 살짝 들리고 좌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마사지 후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이쁘게 문신 스티커를 붙여 드리니 너도 나도 와서 팔뚝을 내미셨다.



살며시 스티커를 떼어 문신이 나타나면 "오~~!" 하면서 너무 즐거워 하셨다.



화장을 곱게 하고 몽골 전통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주던 이분도 문신이 아주 맘에 드셨나 보다.



요술 풍선으로 만든 꽃 한 송이를 흔들며 웃으시기도 하고....



풍선 왕관에 팔뚝에는 문신을 하고 이쁜 손길로 주물러주는 마사지까지 받으니 만면에는 웃음이 피어난다.



별 것 아닌 봉사에도 너무나 좋아하고 기분 좋아 하시던 어르신들은 우리의 마사지 봉사를 다 받고 나시더니 
이번엔 수고한 한국 방문자들에게 마사지를 해주고 싶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놀라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손사레를 치고 여러번 거절한 후에야 간신히 그분들의 마사지 시도를 막을 수가 있었다. 




몽골 어르신들은 특히 사진 찍히기를 즐거워 하셨는데....



적십자 뱃지를 단 라마 승려는 최고의 모델이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아들에 뺨에 연신 뽀뽀하는 장면을 연출하시는 할머니는 오늘의 히로인이다.



필자는 우리를 환영해 주신 분들의 사진을 한분 한분 다 찍어 드렸는데



특히 이 멋쟁이 할머니는 사진 찍는걸 너무나 좋아해서 수십컷의 사진을 찍었다.



포라로이드 카메라가 있다면 즉석에서 사진을 현상해서 드렸으련만.....
미쳐 가져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분들의 사진을 인화지로 현상해서 몽골 적십자사로 우송해 주려고 한다.



선물 전달과 마사지 봉사를 마치고 나니 칸-울 지사에서는 방문한 일행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내놓는다.
아니...이런....
봉사받는 분들이 선물을 준비하다니....이런 경우도 있나....ㅠㅠ
우리는 극구 만류했지만 이분들은 자신들이 정성이라며 조그만 민속 악기 모형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나무로 만든 몽골을 대표하는 민속 악기의 이름은 '모린호르(morin khuur,馬頭琴)'인데



모린호르의 음색이나 연주하는 영상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고....



이제 떠나야 할 시간...



몇 시간 머무르지 않았지만 어르신들은 헤어짐을 너무나 서운해 하셨다.
초원의 거친 삶 속에서 한번 헤어지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었던 것처럼 솔롱고스의 방문객들도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으므로....



계속 손을 흔들며....



'바야르태(Баяртай, 안녕히 가세요)'! 를 말하면서도 손을 쉽게 놓지 못 했다.



짧은 만남이지만 헤어짐은 모두를 찡하게 했다.



할머니는 들어가시라는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을 어귀 도로까지 따라 나오며 손을 계속 흔드셨다.



어렵게 사는 몽골의 달동네에 가서 건네 주고 온 선물은 별 것 아닌 생활 필수품이었지만
그들에게서 받은 관심과 사랑은 전해 준 선물보다 더욱 크고 귀한 것이었다.
힘들게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밝은 표정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여준 그 어르신들을 보니
우리가 과연 그들을 도와주러 갔던건가.....생각되어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졌다.

몽골 가서 무엇을 하고 왔냐고 물으시는 분들에게 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주러 갔다가 더 많이 받고 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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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근래 몇개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 인천 공항 만큼 시설이 좋은 공항도 찾아보기 힘든다는 것이다.
너무 넓어서 출입국시에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만한 웰빙 공항이다.





출국시에 검색대를 통과하기 전에 시간이 좀 있으면 

공항 4층에 위치한 공항전망대(Airstar Terrace)에서 차를 마시거나 인터넷을 즐기곤 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편한 릴렉스 의자에 몸을 한번 맡겨보면 비행기 탑승을 미루고 

그곳에서 한숨 푸욱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기도 한다.





인천에서 몽골 울란바타르로 가는 항공편은 대한항공과 몽골 항공, 두편이 있는데
대한항공편은 몽골 항공보다 약 7만원 정도 비싼 항공 요금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대한항공편을 이용하고 있다.

인천 발 울란바타르 항공편은 운항은 매일 1회,
인천 발은 저녁 8시 10분이고 울란바타르 발은 무려 새벽 12시 20분에 출발한다.
몽골에 도착하면 이미 한밤중이 되거나 돌아올 때도 깊은 밤중에 출발해야 하는 다소 무리인 항공편이다.

밤중에 도착하고 한밤중에 출발하는 항공편이기는 하지만
몽골 여행에 최고의 적기는 바로 여름인지라 커다란 에어버스는 완전 만석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여행의 묘미 중에서 기내식을 먹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비즈니스 클래스를 한번도 이용해 보지 못한지라 내겐 이코노미 클래스의 기내식도 즐겁기만 하다.






팔도 못 제대로 못 펴는 좁은 공간에서 조그만 포크,나이프,스푼등을 사용해서 

코딱지만한 기내식을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건 어릴 떄 소꿉놀이하던 기억. 

그래서 기내식은 여행을 시작한다는 설레임과 함께 여행자를 한동안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도 한다.






인천에서 저녁 8시 10분에 출발한 항공기는 현지 시각 10시 40분(서울 11시 40분)에 도착하니 3시간 30분이 걸리고
울란바타르에서 새벽 12시 20분(서울 1시 20분)에 출발하면 인천공항에 4시 20분에 도착하게 되니
기내식 한번 먹고 양치질하고 책 몇 줄 읽지 않아서 금방 도착하게 된다.
정말 몽골 울란바타르는 서울에서 북경, 도쿄, 타이빼이 다음으로 가깝다는게 실감이 나는 부분이다.

울란바타르 시각 10시 40분,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구를 통해서 밖으로 나오니
헉.... 몇 걸음 안 걸으니 바로 입국 수속장이다.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여행의 피로가 엄습할 때 공항의 규모가 작다는건 때로는 아주 도움이 된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내려 오니 바로 컨베이어 벨트 위로 짐들이 빙빙 돌아간다.
이것도 공항에서 단 한군데 뿐이니 어디서 짐을 찾아야 하나....하고 헛갈리지 않으니 좋다.






수하물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니 헉.....! 이럴 수가...ㅠㅠ 울란바타르에 비가 온다.
보슬비도 아니고 "우르릉~~~ 꽝꽝~~!!" 천둥이 치면서 비가 주룩 주룩 내린다.

오기 전 인터넷 검색을 통한 사전 지식으로는 몽골에는 거의 비가 안 오니 우산은 필요없고
우산이 필요한 경우는 다만 초원에서 볼 일 볼 때 가리개 대용으로 필요하다던데.....
한국의 장마를 피해 몽골에 오면 눈부시게 파아란 하늘만 볼 걸 기대하고 왔는데 첫날부터 의외의 날씨가 우리를 반기더니
몽골에 체류하는 동안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비에 우박까지 다양한 날씨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틀을 제외하고는 거의 하늘이 꾸물럭하게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 계속되어서 나의 사랑스런 카메라를 울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파아란 하늘을 찍으러 몽골에 다시 가라는 계시..??)





골로 입국할 때는 비도 오고 해서 공항을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으므로  

몽골에서 출국시에 돌아본 울란바타르 공항을 살짝 소개해 드리자면.....

공항 앞에 내려서 맞은 편 주차장을 보니 소박하기 이를데 없다. 

한국의 대형 마트 주차장 정도의 크기보다 약간 적다고 생각하면 된다.






울란바타르 공항의 명칭은 '칭기즈 칸 국제 공항'인데 영어 표기 양 옆에 쓰인 글자는 '몽골 전통 문자'이다.






'칭기즈 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공항의 벽에는 칭기즈 칸과 티무르 칸등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고






공항의 벽면 장식에도 칭기즈 칸은 위엄있는 모습으로 여행자를 환영해 준다.






한밤중의 출국이라 이미 몽골 항공은 휑하니 빈 데스크만 공항을 지키고 있고






밤 늦은 시간이라서 공항은 조용하기만 하고 여기저기 앉아 있는 승객과 승무원은 다 한국 사람이다.






일행의 남자 팀원이 아내의 선물을 아직 못 샀는데 무엇을 사면 좋겠냐고 물어본다.
"여자들에겐 그저 파우더 컴팩트 같은 화장품이 최고죠~! 안에 들어가서 면세점에서 하나 사다드리면 좋아하실거에요...!"하고 말하니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수하물을 부치고 공항 검색을 통과해서 들어가니
헉....이게 웬 일..... 공항 안에 면세점이.....! 면세점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그마한 공항 라운지에는 커피숍 한군데와 조그만  관광 상품점 세군데가 전부일 뿐 눈 씻고 보아도 면세점이 없는 것이다.
샤넬, 구찌.....등의 명품 샵이 즐비한 인천 공항에는 견주지 못하더라도 조그만 복합 면세점이라도 있겠지 생각한게 오산이었다.
(2층에 가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보드카 및 캐시미어, 향수, 시계를 파는 면세점이 있다는 걸 이후에 알게 되었는데 몰라서 들리지 못한 것이다.)






관광 상품점 또한 한국인이 경영하는 샵인지 영어로 가격을 물으니 유창한 한국말로 대답한다...ㅎ






심심해서 관광 상품점을 여기 저기 둘러보니 진열된 상품은 퀄리티가 그다지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비싼 가격이다.
(몽골의 공산품 가격은 한국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이 매우 비싼 편이다.)






몽골의 전통 복장을 담은 사진 책자에 관심이 가서 물어보니 한화로 거의 7만원.....우리나라 책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다.






할 수 없어 주인 몰래 뒤적이며 구경하고 사진만 살짝 찍었다.






라운지의 벽에는 최근에 불어온 몽골의 한류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한국 병원의 대형 광고가 붙어 있고 






벽에 걸린 삼성 TV에서는 한국 위성 방송이 방송되고 있어서 몽골에 거세게 불어온 한류가 다시 한번 실감이 되었다.




울란바타르 공항.....
우리의 골리앗 같은 규모의 인천 공항에 비하면야 정말 소박하기 그지 없는 공항이다.
하지만 공항의 크기나 부대 시설로 어떤 나라의 공항이 좋다...나쁘다...라는 표현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데는 공항의 크기나 시설이란건 그다지 중요한건 아니니까.....
나를 '파아란 초원의 나라 몽골'로 인도해준 울란바타르 '칭기즈 칸' 공항.
나에게는 또 하나의 추억의 장소로 기억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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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푸른 초원의 나라, 몽골.
이번 몽골 방문은 개인 여행이 아니라 봉사와 국제 교류가 주목적이었고
활동 장소가 울란바타르 인근에 한정되어 있었던 관계로

사적인 취향대로 사진을 찍고 관심있는 부분들을 천천히 돌아보는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정신이 살아서 움직이는 몽골까지 가서 그냥 돌아올 수는 없는 일.
이동하는 도중이나 행사 도중에라도 눈에 보이는 것은 무차별적으로...필사적으로 다 셔터를 눌러 대었는데

이렇게 담은 사진들을 집에 돌아와서 열어 보니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다.

자, 이 산만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을 가지고 어떻게 포스팅을 하지..?
당최 계획이 떠오르지 않고 암담하기만 하다.
마치 만들 요리의 종류를 염두에 두지도 않고 
시장에서 보이는 식재료를 닥치는대로 담아 와서 냉장고에 한가득 넣어두고는

오늘 저녁 도대체 무슨 요리를 해야 하지...?
하는 고민을 끼니 때마다 하는 것에 비유하면 좀 이해가 되실지.....^^





몽골에 잠시 다녀온다고 친지들에게 말하니 국가 명칭부터 헛갈리고 생소해하는 분이 많았다.

몽고? 몽골? 어떤게 정확한 표현이지?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는 분명히 '몽고'라고 배웠는데 '몽골'은 또 무언지.....?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몽고와 몽골은 같은 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그 의미에 있어서는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이름은 '몽골(Mongol), 대외적인 공식 명칭은 '
몽골리아(the Republic of Mongolia)'이다.
몽골을 몽고로 부르는 것은 마치 '한국인'을 '조센진'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그것은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몽고(蒙古)'라는 한자어로 표기한데서 기원한다.

그 한자는 무지몽매할 '몽[蒙]'자에 오래된 것이라는 뜻의 옛 '고[古]'자를 쓰는데 
중국인은 주변 국가 중 유일하게 한번도 지배해 보지 못한 '강한' 몽골인을 '몽매하다'며 비꼬아 부른 이름이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항상 자신들만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국들은 오랑캐로 생각했기 때문에 
동서남북의 다른 민족들을 다 오랑캐의 뜻을 가진 한자인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으로 불렀다.
중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동이(東夷), 즉 동쪽 오랑캐인 것이고
투르크 족은 '돌궐'로, '훈'족은 '흉노'로 표현하였으니....대부분 부족의 이름에는 비하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몽골(Mongol)'의 원뜻은 '몽'이라는 부족이 '중심(골, ГОЛ)'이 되어서 세운 국가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좋은 뜻을 가진 이름'몽골'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바꾼 '몽고'라는 중국식 표현은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므로
몽골인들의 앞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는 서울에서 평양, 북경,도쿄, 타이빼이 다음으로 가깝다.
이렇게 가까운 나라 몽골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몽골이 그동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우리와의 단절은 더 심하였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변국들이 만들어낸 몽골 고립 정책에 동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에 이르러 공산당 일당 집권에 종식을 고하고 의회 제도를 받아들여 무혈 자유화를 이룬 이후
모래 폭풍보다 거센 개방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우리나라와 교류의 문도 트이기 시작했다. 


1990년 우리나라와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 울란바타르에는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몽골의 북한 대사관은 한떄 폐쇄되었다가 다시 문을 열기도 했다.
이후 몽골 대통령 2명이 한국을 방문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몽골을 답방하기도 하며 수교의 문은 점점 넓어져
현재 많은 몽골인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몽골에 체류하거나 방문하는 한국인의 수는 날로 증가하는 중이다.





요즈음 몽골의 젊은 대학생들 상당수는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으며 제2 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선호한다.

몽골의 텔레비젼에는 하루종일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는데 한국에서 종영이 되자마자 몽골에 바로 방영이 된다고 하고
홈쇼핑 채널에서는 한국의 홈쇼핑 방송이 더빙만 몽골어로 되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몽골 젊은이들은 한국 노래를 좋아하는데 한국의 최신곡들을 우리보다 더 정확한 가사로 외워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길에는 엑센트, 엘란트라, 마티즈, 그레이스....등 수많은 한국산 중고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있으며 
수퍼나 백화점에는 한국산 제품이 진열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몽골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놀라게 한다.

점점 가까워지는 나라, 마치 형제를 만난 듯 우리와 꼭 같이 생긴 사람들이 사는 나라 몽골.
지금부터 중구난방, 오리무중 몽골 여행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기대감일랑은 던져버리시고 부담없이....편안하게....루비의 뒤를 따라오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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