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쳤는데도 사방이 안개로 자욱하다.
친구와 남산을 올라보기로 약속했는데 가봐...? 말어...? 한참을 망설이다 길을 나선다.
경주에 산지는 한참 되었다지만 등산을 그다지 즐기지 않아던터러 지척에 있는 남산이 미답의 터이다.

 


오늘은 칠불암 쪽으로 남산을 올라보기로 한지라 산 아래에서부터 기분이 설레인다.
통일전과 서출지를 지나 한참 좁은 길로 차를 달려 소나무 숲 사이에 차를 세운다.





비 온 뒤 찾는 산이라 오르는 길목은 더욱 상쾌하고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버섯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온다.





등에 물기를 한껏 머금은 두꺼비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제 갈길을 가는 안개 낀 산 속.





아직 나무 사이의 거미줄도 제대로 걷히지 않은 싱그러운 숲길을 심호흡을 하며 한참을 올라
어둑어둑하게
대숲으로 뒤덮힌 가파른 계단을 헉헉 거리며 올라가니 그 위에 절 같지도 않은 조그만 암자 하나가 나타난다.





새로 지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두칸 짜리 암자에는 소나무 내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그만 암자가 있는 이곳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이곳에 국보 312호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있기때문....
통일신라시대 동해로 칩입하는 외적을 불력으로 막기위해
사찰을 짓고 돌에 부처를 새겼다는 칠불암은 오랜 세월 속에 절은 폐사되고 불상만 남아있었다.
이 불상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칡넝쿨과 대나무숲에 가려있던 것을
80여년전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할머니가 산나물을 캐던 도중 찾아내면서 세상밖으로 나오게 됐다.
이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칠불을 모셨는데 지금 새로 지어진 암자는 세 번째 축성된 것이다.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m 가량되는 돌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을 새겼으며 1.74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을 새겼다.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는 협시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은 왼쪽 어깨에만 살짝 옷을 치고 있으며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화려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크기가 같으며,  역시 온 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삼존불 모두 당당한 체구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다른 바위 4면에 새긴 사방불도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원래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이곳 주변에서 당시의 구조물을 짐작케 하는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보살상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것으로 보아
이 칠불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칠불암의 옛날 모습)





칠불암 마애 석불 위 곧바로 선 절벽에 있는 신선암을 가기 위해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칠불암까지 오르는 길이 다소 평탄했다면 신선암을 오르는 길은 약간의 난코스이다.





오르다 잠시 쉬며 뒤돌아보니 온통 안개에 휩싸여 산 아래는 보이지도 않는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 구름이 남산의 신비함을 한층 더해 주고





산 아래 통일전과 서출지가 자리잡은 남산동조차 자욱한 안개 구름으로 인해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힘든다.





가까스로 신선암에 올라 사람 하나 겨우 지나는 벼랑 끝 모퉁이를 돌아서면





거기에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한 마애 보살상이 나타난다.





높이 1.4m의 마애보살반가상은 머리에 삼면보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지그시 감은 두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구름 위의 세계에 있는 듯 하다.
오른손에는 꽃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옷은 아주 얇아 신체의 굴곡이 사실적으로 드러나 보이며 옷자락들은 대좌를 덮고 길게 늘어져 있다.





벼랑 끝에 서서 보니 바로 아래의 칠불암이 잡힐 듯 가까워 보이고 건너편 산도 발을 내디디면 단숨에 건너갈 듯 하다.
구름 속의 신선이라도 흉내내고 싶은 것일까?
갑자기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지면서 팔을 들면 날아갈 듯한 묘한 상상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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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산내면을 지나 구비구비 운문사로 향하는 산길은
'운치있다'는 표현이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아침나절 내린 비로 인해 멀리 보이는 산허리에는 안개 구름이 낮게 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아름드리 숲들은 싱그러운 얼굴로 여행자를 반긴다.





운문사 입구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하니 도시 생활에서 찌들었던 스트레스가 일순간에 씻겨지는 듯 하다.





일반적인 사찰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서 걸어서 올라가다보면 숨이 차고 땀이 나기 마련인데
운문사는 계곡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차량으로도 사찰 입구까지 바로 진입이 가능하다.





아름드리 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기분좋게 걷다보면
금방 사찰 입구에 다다라 요즘 같이 더운 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호거산 운문사...호랑이가 살았던 산이라고 해서 호거산이라고 하나보다.





호거산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둘러싸인 산세는 예사롭지 않고 높은 산허리에 안개가 걸리니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범종루를 거쳐 들어선 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먼저 모으는 것은 바로 입구에 자리잡은 엄청나게 커다란 소나무이다.
마치 커다란 표고버섯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거의 땅을 뒤덮으며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처진소나무라 불리운다.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 정도의 이 아름다운 소나무는 천년 기념물 180호로 지정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처진 소나무 관련 상세 포스트 : 막걸리 먹고 자라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





운문사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운문사를 돌아보다 보면 한 사찰에 대웅보전이 두군데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운문사의 가장 중심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신 대웅보전인데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이 대웅보전은 1994년에 건립되었다.





운문사 신 대웅보전의 너무나 아름다운 꽃살문은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님의 작품이다.




















다른 하나의 대웅보전은 신 대웅보전의 앞쪽에 약간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라 시대에 건립한 운문사는 4번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 대웅보전은 조선 숙종 44년(1718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의 간격을 넓게 잡아 칸수에 비해서 건물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1994년에 새롭게 대웅전을 지은 후에  비로자나불을 봉안했으므로 비로전으로 불리우다가
문화재청에서 보물 835호로 지정한 이후에 원래의 이름인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다시 찾게 되었다.





2007년에 해체 보수하였으므로 단청이나 꽃살문이 너무 산뜻하여 세월의 흔적이  도리어 느껴지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 678호)은 높이 5.4m의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층 기단에는 앉아 있는 8부중상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만세루는 학승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으로써 주요 행사 때만 사용하는 곳이다.





운문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사찰에
전국 5대 비구니강원 중에 학풍이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운문승가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경내가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지만
승가대학은 학승들의 수행을 위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 내부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승가대학 건물 바로 옆의 공양간의 문이 열려 있기에 살짝 들여다 보니
비구니스님들이 공양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반들반들 윤이 난 엄청나게 큰 무쇠솥이 눈에 확 들어왔다.

240명의 학승들은 공부와 노동을 병행하고 있어 운문사 경내에서는 이처럼 청소를 하거나 농사일을 하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찰 경내는 드넓고 쾌적하며 대웅보전 뒤에는 야생화 단지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나 데이트하는 커플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더구나 사찰의 바로 옆 계곡에서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마져 불어오니 
요즘 같이 후텁지근한 날,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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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처음 그곳을 들렸던 기억은 거의 10 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행중 여러곳의 사찰을 방문하곤 하지만 부석사 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빛 바랜 앨범 속 사진 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아스라이 남아 있던 부석사..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추위가 가셔지지 않은 어느 조용한 날에 다시 찾아본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서 부석사로 들어가는 길이 시작된다. 
 

 
 사과밭과 인삼밭 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숫길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나목이 늘어서 있는데도 이렇듯 아름다운데 가을에 단풍이 물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회가 된다면 가을에 다시 찾아와 사진으로 꼭 담아보고 싶다.

 
 천왕문 들어가기 전 왼쪽 편에 당당하게 서 있는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가 눈에 뜨인다.
행사가 있을때 사찰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필자의 앞을 가방을 멘 여학생이 담담하게 스쳐 지나간다.
갸날프게 생긴 여학생이 홀로 사찰을 찾다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천왕문을 향해 걸어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어쩐지 고독하게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아...산자락 아래 단아하게 펼쳐진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 서서 보니 수려한 산자락 아래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이 차례로 펼쳐져 있다. 


경내에서 제일 먼저 방문자를 맞아주는 건물은 범종루인데 이 건물의 전면은 동쪽을 향해 있고 측면이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는데 범종루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름은 범종루이지만 범종은 바로 옆에 있는 신범종각에 걸려 있고 범종각에는 큰 법고와 목어만이 걸려 있다. 


범종각을 지나면 다시 높은 계단 위로 안양루가 그 수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무량수전 앞마당 긑에 놓인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이 건물은 앞과 뒤에 걸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 편액에는 안양루라고 되어 있으니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문을 통하여 위로 바라보니 시선에서 약간 어긋나게 국보 제 17호인 아름다운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연화대 위 8각 화사석 사이로 난 창을 통해서 무량수전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곳인데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려서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하였으며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한 건물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팔작지붕의 시초인 무량수전은 주심포 기둥이 절묘한 배흘림 기둥인 것으로 유명하다.
배흘림기둥이란 기둥 중간 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기둥인데
중간을 볼록하게 함으로 기둥 머리 부분이 넓어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주고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 부분에 집중된다는 건축 구조 역학을 고려한 것이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왼쪽 뒷편에는 부석사 이름의 유래가 된 부석(浮石)이 있다.
부석은 우리 말로 '뜬 돌'인데 돌이 실제로 떠 있을 수는 없으니 아래 돌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이 부석에는 선묘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중국 여인인 선묘는 의상대사가 중국에 있을 때 그를 몹시 사모했다.
그러다 의상대사가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게 되자 선묘는 그만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 뒤 의상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을 때 이 자리를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죽은 선묘의 영이 돌을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도망가게 되어 그 자리에 부석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으로 올라 아래를 보니 안양루, 범종루를 비롯한 사찰 내의 건물들이 아담하게 들어앉은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도 보물 제249호로 지정된 단아한 석탑이 있는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1960년 석탑을 해체, 수리했을 때 3층 옥신에 있는 사리구멍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수습되었다.

 
3층 석탑을 지나 산기슭을 조금 올라가면 조사당이라는 고려시대의 목조건물이 있다.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은 1377년(우왕 3)에 창건되었고 1490년(성종 21)에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세부 표현이 간결한 모습이다.


정면 가운데에는 살문을, 그 좌우 옆칸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았는데  파스텔톤의 색감이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다. 

 
조사당 전면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선비화(골담초)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란 전설이 있는데
심하게 촘촘한 창살 속에서 자라고 있어 그 모습을 확인하고 사진에 담기는 조금 난감한 일이다.
조사당은 부석사 제2의 목조 건물로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산에서 내려오며 안양루 아래 펼쳐진 경치를 내려다 보니 맞은편 산과 마을에 저녁 안개가 은은하게 펼쳐져 있다.
안양루에 걸린 김삿갓의 시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를 떠올리며
쉴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손을 잠시 멈추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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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해 온 친근한 동물이다.
선사시대부터 오랜 세월 동안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 함께 공존해 왔는데
단군신화 속의 사람이 되고 싶었던 호랑이부터
시베리아 등지에 살아남아 있는 백두산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들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호랑이를 그림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사실은 울산 언양의 절벽에 새겨진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당시의 사냥 모습과 200 여점에 달하는 육지와 바다 동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선사인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울산반구대 암각화 재현품(국립경주박물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그림은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림인데 여기에는 10 여 가지의 줄무늬 호랑이와 점박이 표범의 모습도 남아 있다.
호랑이들은 마치 사람처럼 앉아서 한가롭게 쉬거나 그물에 잡혀 발버둥 치기도 하고
표범과 무리를 지어 유유히 이동하는 등 다채로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한반도에 등장한 호랑이를 표현한 최초의 예술 작품인 셈이다.



약 2천년전 사람들은 호랑이를 소재로 디자인한 청동제 허리띠 고리(일종의 버클)를 만들어 허리에 찼다.
경북 영천 어은동에서 출토된 가로 20.5㎝ 정도의 이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는 말 모양의 허리띠 고리와 함께 발굴되었다.
마치 스핑크스를 연상시키는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의 이 호랑이 모양 청동기는 북방계 청동유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토기 뚜껑에도 호랑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호랑이가 고개를 쳐들고 표효하는 모습이 소박하지만 예리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어 무척 현대적인 감각을 준다.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인 호형 토기도 눈길을 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표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두려워 접근하기 힘든 맹수의 모습이 아니라 어쩐지 친근감이 들어 가까이 하고 싶은 애완 동물과도 같이 보인다.



고구려 무덤 속에는 흰 호랑이 백호가 서쪽을 지키는 사신(四神)의 하나로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시대에도 능묘와 불탑 둘레에 호랑이를 포함한 십이지상(十二支像)이 배치되어 각 시간과 방향에서 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기쁨을 뜻하는 까치와 호랑이를 익살스럽게 그린 ‘까치호랑이그림’을 정월 초하룻날 대문에 붙였다.
그것은 정월이 인월(寅月), 즉 호랑이 달이기 때문으로, 새해를 맞는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까치호랑이 그림은 도자기나 민화 등에 잘 남아 있기도 하다.



18세기 조선시대 작품인 이 까치 호랑이 무늬 백자 항아리는 직선의 구연부에서 원을 그리듯 내려오다가 구연부와 같은 크기로 좁아지는 형태이다.
표면에는 까치는 호랑이를 내려다보고, 호랑이는 까치를 마주쳐다보는 '까치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의 우스꽝스러운 눈짓에 잔득 움츠린 까치의 모습이 재미있다. 
 


19세기 조선시대 작품인 백자 호랑이 무늬 왕사발에서 호랑이는 더욱 대담하게 표현되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곧추선 털.....그리고 구름 사이를 노니는 호랑이의 날렵한 몸매는 민간 신앙의 대상인 호랑이의 위엄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호랑이는 수렵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상징물로 표현이 되었다.
선사시대부터 아주 오랜 세월을 한반도의 인류와 함께 공존해온 우리 민족의 상징 동물 호랑이.
지금은 우리 땅에서 그 자취가 사라지고 동물원에서나 그 용맹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어서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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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은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허리는 잘룩하며 높이는 108 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이 산에서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으니
나라에서는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에는 나무도 베지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달인이자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 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의 독서당도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와 오늘 소개하려는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자리잡고 있다.  
 

 경주 박물관을 지나 배반동 사거리에서 울산 쪽으로 100 미터 정도 지나 왼편 길로 접어들면
바로 능지탑과 선덕 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차 두대가 교행 할 수도 없는 좁은 산길을 
십여미터 정도 걸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탑이 바로 지척에 나타난다. 

실성왕 12년에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오르고 향기가 피어 올랐다더니만
능지탑을 처음 만난 이날에도 낭산의 바로 위에는 신비로운 구름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 m이다.   

 여느 탑의 형태와는 달리 특이하게 생긴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능지탑 혹은 연화탑으로 알려져왔는데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79 년에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정확한 원형을 알 수 없어 기단부 2 단만 토석 혼합으로 쌓았고    

 2층을 쌓고 남은 나머지 돌들은 옆과 뒷부분에 모아 두었다. 

 기단에는  12 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12 지상 중 3 개는 분실되었지만, 남아있는 9 지상은 비교적 정교하고 뚜렷하다. 

 동쪽은 호랑이,토끼,용(寅,卯,辰)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토끼의 상만이 남아 있다. 

 남쪽은 뱀, 말, 양(巳, 午, 未)의 지신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위는 말의 지상이다. 

 얇은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양의 지신상이다.  

 그리고 서쪽은 원숭이, 닭, 개(申, 酉, 戌)의 형상이 다 남아 있는데  

 얼굴 표정과 갑옷의 표현이 정교하여 마치 손오공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원숭이의 지상과 

 금방이라도 꼬끼오~하고 울 것 같은 닭. 

 서라벌의 멋쟁이 같아보이는 개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쪽은 돼지, 쥐, 소(亥, 子, 丑)의 지상이 다 남아 있는데  

 꿀꿀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돼지의 지상은 주둥이 쪽에서 보면 더욱 리얼하고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는 소의 지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이 날도 햇빛님이 해박하신 문화재 지식으로 능지탑의 이모저모를 잘 해설해 주셨는데
아름다운 손에 시선이 집중되어서일까? 쥐의 지상은 그 형상이 그다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12 지상은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에도 새겨져 있다. 
관련 포스트 : 비오면 비석 이름 바뀌는 신기한 김유신묘

 복원시에 미쳐 다 쌓지 못하고 주변에 쌓아둔 기단석을을 자세히 보면 앞에는 연화문을 잘 다듬었지만  

 뒤편은 자연석 모양을 그대로 두어 탑을 쌓았을 때 무너지거나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탑에서는 발굴 당시 큼직한 소조 불상 파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 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돌의 색깔이다. 

 쌓아진 기단석이나 쌓지 못하고 방치된 기단석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들이 모두 안쪽이 불에 그을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 탑지 안에서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나왔고 이렇게 불타 그을린 흔적이 나온데다 
 삼국사기의 기록까지 있어 이 곳이 문무왕의 화장지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장남이자  통일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일전을 벌여 제압한 후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군주이다.  

거듭된 통일 전쟁을 힘겹게 끝낸 문무왕은 생명의 줄을 놓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숨을 거두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  
그리고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고, 죽은 지 열흘 이내에 화장하라.”
하는 유언을 남겨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은 왕이었다.

   


  
 이렇게 화장된 문무왕의 유골은 감포 앞 바다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양지바른 무덤자리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조성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 
 

바닷가에서 보면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일 뿐 수중릉이 아니다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문무왕의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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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가는 가을날에 찬란한 가을빛을 

눈으로...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경주에서도 남산 최고 명당 자리에 위치한 통일전. 
그 이름에서 대충 짐작이야 하시겠지만 통일전이란 곳은 통일 신라 시대 유적도, 조선 시대 유적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삼국 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국민의 전당이다. 
 

통일전은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고 본받자는 뜻으로 건립된 만큼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교육원과 함께
초중등학생들의 이념 교육장 형태로 이용되어 왔으며 경주를 찾는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곳은 특히 바로 옆에 서출지가 있고 남산 답사를 위해서는 꼭 거쳐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잠시 들려 둘러보고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더우기 통일전으로 들어가는 2km의 진입로는 환상적인 은행나무길로 유명하고 


주차장에 들어서서도 방문객들의 탄성이 이어지는데 
주차장 주변이 온통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단풍으로 어우러져 가히 환상적인 경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곳의 느티나무는 단풍나무보다 더욱 빨갛게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내곤 하는데

 느티나무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할 정도로 고운 색을 자랑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수련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아직도 몇 송이 남아 있는 수련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 준다.

 이 연못 주위의 벤치는 남산 답사로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기에 안성맞춤이고 

 연못 건너편의 금강 소나무 숲 주변 산책로는 솔향기가 그득하다. 

 너른 경내에는 귀한 수목들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뽐내는데.... 

 목련잎도 노란 물이 이쁘게 들었고... 

 단풍의 고운 자태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매일 매일 낙엽을 쓸어야 하는 관리인 아저씨의 마음 속에도 고운 단풍의 빛깔이 남아 있겠지..?
 

정문을 지나 너른 정원을 지나면 흥국문(興國門)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흥국문을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옆으로 난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본다. 

 담장 옆에서 본 목련은 또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 오고...  

 담장 기와 위에 떨어져 소복이 쌓인 솔잎은 가을의 정취를 한결 더하여 준다. 

 흥국문(興國門)이라고 쓰여진 현판....나라를 일으키라는 뜻으로 이름한 문이겠지?  

 흥국문을 지나면 두번째 정원이 나오는데 저 멀리 계단 위에 또 문이 하나 보인다. 

 흥국문을 지나서 나오는 두번째 정원에는 사적비(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를 비롯하여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제일 왼쪽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사적비가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는 문무대왕의 사적비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사적비이다.

 두번째 정원에서 본전이 있는 마지막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서원문(誓願門)이다.
삼국 통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 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이리라.. 

 서원문을 들어서면 본전인 '통일전'이 그 위용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울긋불긋한 단청을 칠하지 않고
서까래는 연갈색으로, 기둥과 벽은 하얀색으로 칠하여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을 주는 전각이다. 

 통일전(統一殿)이란 현판 아래 전각의 문 또한 순수하게 하얀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본전 안에는 삼국총일의 대업을 달성한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제일 왼쪽에는 태종 무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무열왕의 얼굴은 비교적 자애롭게 그려져 있어서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선덕여왕에서 김춘추 역을 맡았던 유승호가 나이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혼자 상상해 본다.

 왼쪽에 모셔진 문무대왕의 눈꼬리는 올려져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무열왕과 문무대왕의 영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오른쪽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으로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또 본전을 돌아가며 사면에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전각의 옆과 뒷편 회랑을 따라 삼국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전시되고 있다.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된 17점의 기록화는 그림 보존을 위해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지라
반사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회랑의 구석에서 본전과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맛인데 특히 여기서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궁'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회랑의 양쪽 코너에는 누각이 두개 있는데 신 벗고 올라서 보니 통일전 경내와 저 아랫 마을까지 훤히 다 보인다. 

 왼쪽 누각에서도 아름다운 경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누각에서 바란 본 풍경은 느티나무,은행나무,반송,목련...각가지 나무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대궐이다.
 

서원문 앞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 아래 은행나무가 줄지어 사열하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전을 다 돌아본 후 은행나무길로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차창을 내리고 비행기 날개처럼 팔을 길게 옆으로 뻗어 보았다.
옆으로 스치며 지나가는 세찬 바람 소리...
이 가을.....이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날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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