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의 학자 고운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으로 전해지는 독서당을 찾아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에 가면 최치원선생이 글을 읽던 독서당이 있으니 꼭 가보라는 동료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항복사지에서 능지탑 아랫부분으로 훑어가며 한참을 걸어가다 찾지 못하고 돌아갔었고

두번째 발걸음에는 선덕여왕릉에서 시작하여 낭산 끝부분까지 갔다가 찾지못하고 돌아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어느날 배반동 사거리에서 보문쪽으로 향하는 7번국도를 가다가

문득 오른쪽으로 돌아보니 낭산 서북쪽 산중턱에 고택 하나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길에서 훤히 보이는데 찾지 못하고 두번이나 낭산을 이리저리 헤매었던 일이 허탈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배반동사거리에서 보문입구 사거리까지의 7번국도 4차선 도로는 커다란 화물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곳인데다

주변에는 차를 주차할 곳은 물론 갓길까지 없는 형편이라 차를 세워둘 곳이 애매하다.

배반 지하차도가 끝나는 곳에 한두대 정도 차를 세워둘 곳이 있기는 하나 역시 진입하기가 난감하다.


생각 끝에 2km 정도 떨어진 진평왕릉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산책 삼아 걸어서 독서당까지 가보기로 했다.

저 멀리 보이는 낭산까지 가는 길은 보문뜰의 문전옥답이 너르게 펼쳐져 있는 곳.

다른 곳은 가뭄으로 논물이 말라도 이곳의 논에는 물흐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니 정말 축북받은 곳이다.





논길을 벗어나  7번 국도에 접어들어 조금 걸어가니 독서당을 알리는 팻말이 보이고





이윽고 독서당으로 향하는 비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저멀리 나즈막한 낭산 중턱에 고택 하나가 보인다.





비포장도로 끝에 나타나는 계단. 이 계단을 오르면 독서당이다.





계단을 다 오르니 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잡은 독서당이 눈에 들어온다.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선생이 공부하던 곳이라 하지만

사적지로도 기념물로도 정해지지 않아 그냥 독서당이라는 안내판만 붙어 있는 곳이다.





최치원 선생은 6두품 출신으로 일찌기 당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으며 토황소격문을 써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헌강왕 11년에 귀국한 후 진성여왕 8년에 시무십여조를 건의하여 아찬이 되었는데 

자기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실망하여 은둔하고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독서당의 건물은 서향 정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한 형태이며 화려하지 않고 매우 소박해 보인다.

초석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후대까지 보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독서당의 마당 한쪽에 소박한 우물 하나가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우물은 최치원선생의 생전에도 있었던 우물일까? 

잘은 알수없지만 왠지 어린 최치원선생도 이물을 마시고 열심히 공부했으리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지금도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는 독서당의 우물. 

주변 주민들이 농업용수로 쓰는지 대문 옆엔 두레박이 다소곳이 걸려 있다.





독서당과 이웃하는 비각 안에는 조선 철종 1년(1850)에 건립한 유허비가 있어 유적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비석에는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문창후란 최치원선생의 시호를 이름이다.

(시호: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후에 왕으로부터 받는 칭호를 말한다)





독서당 앞뜰에 서면 너른 들이 발 아래 펼쳐지는데 앞에 보이는 도로는 7번 국도이고 멀리 보이는 건물은 경주국립박물관이다.

최치원선생이 학문을 닦은 곳으로 알려진 경주 독서당. 공부하는 아이들과 함께 와서 돌아본다면 더욱 의미가 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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