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의 북쪽 해안도시 네압볼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 즈음..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니 호텔 밖 풍경이 더할 나위없이 좋다.

호텔은 바다로 툭 튀어나온 자그마한 곶 위에 자리잡아 객실 어디서든 삼면으로 바다가 보이는 환상적인 장소에 있었다.

 

정말 천혜의 장소에 자리잡은 멋진 호텔..

호텔은 부페 음식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수영장 시설도 멋지다. 하지만 바로 옆에 바다를 두고 수영장 물에 몸을 담글 수는 없는 일......

삼면으로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 앉아 그리스의 풍부한 해산물로 배를 불린 후 수영복으로 갈아 입은 후 치마만 살짝 걸치고 바닷가로 나가 보았다.

 

호텔은 에게해의 톡 튀어나온 곶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호텔과 건너편 곶 사이로 쏘옥 들어간 조용한 만이 그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인지.....
거기다 저녁 무렵 이 멋진 
해변에서 수영하고 노는 사람은 필자와 S양, K양 세 사람 뿐이어서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너무나 즐거운 마음에 해변에서 장난치고 소리지르며 놀다보니.......호텔 발코니에 나와서 우리를 지켜보던 외국 남자가 우리를 부르며 손을 흔든다.
아이...쪽 팔려라...ㅋㅋ

해변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군데 군데 자리잡고 있어서 작은 수조같은 공간이 여기저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수조에 누워 있으면 파도도 치지 않아 바닷물에 둥둥 떠서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낭만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바닷물에 누워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동쪽 하늘에서 보름달(!)이 떠오르고 이내 달빛이 고고히 비쳐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인다.  에게해에 떠오르는 보름달이라니....! 하늘에도 달이요...바다에도 달이 흩어져 있으니 에게해의 달밤은 그야말로 환상의 달밤이다.

이 날 필자의 눈 속에 들어와 박힌 하늘과 바다의 달빛은 아직도 바로 어제 일인양 기억에 생생한데......
물에서 노느라 사진은 전혀 남기지 못했으므로 월출의 인증샷은 아쉽게도 통과~!

 

아침 일찍 일어나 베란다쪽을 보니 동쪽 바다로 여명의 기운이 불그레하다.
사진에서 바로 앞 쪽의 쏘옥 들어간 바다가 바로 엊저녁에 밤드리 노닐었던 바다이고 저 멀리 건물이 많이 보이는 곳은 네압볼리 다운타운이다.

 

 

앗....해가 떠오른다.  에게해의 떠오르는 태양이다!
구름이 끼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구름 사이로 해가 동그렇게 떠오른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에게해의 월출과 일출을 한자리에서 보다니....정말 기억에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

 

 

망원 렌즈가 아닌 콤팩트 디카로 찍은 사진이라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러면 어떠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에게해의 일출인 것을....
아직 어두운 바다 위로 비치는 햇살이 찬란하게 나의 마음 속에 들어와 박힌다.

 

 

아침을 먹고 네압볼리 다운타운으로 나가 보았다. 

 

 

지나가는 버스에 쓰인 그리스어(헬라어)가 눈에 뜨인다.
읽기도 힘든 그리스어의 조합들은 내게는 문자라기 보단 그냥 부호같이 보이기도 한데.....
차라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는 터키어가 훨씬 쉽게 느껴진다. 

 

 

항구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다 쓴 전화 카드가 나동그라져 있고 여기저기 낙서가 가득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다 똑 같은가 보다...

 

 

 

간판도 역시 뜻 모를 글자가 가득....그리스어를 전혀 모르는지라 읽기가 정말 난해하기만 하다. 

 

 

 

‘새로운 성읍’이란 뜻의 네압볼리(네아폴리스,Neapolis)는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세워진 도시인데 비잔틴 시대에는 크리스토우폴리스(Christoupolis)로 불리웠으며 터키 통치시대부터 카발라(Kavalla)로 바뀌어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오늘날 카발라는 인구 10만여명 정도의 활기찬 항구도시로 현재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데살로니키(성경의 데살로니가) 다음 가는 큰 도시인데 항구도시이자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중해의 담배 집산지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네압볼리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도착했던 곳으로 유럽 전도가 처음 시작된 항구이다.

바울은 이 항구를 통해 이곳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빌립보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사도행전 16:11∼12) ”  

 

 

 

바울 당시 이곳은 동서양의 뱃길을 잇는 교통 요지였고 육로 역시 로마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대로(Via Egnatia)가 이곳을 지난다.  

네압볼리에서 빌립보로 넘어가는 에그나티아 가도는 도로 건설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돌을 깔아 마차가 다닐 수 있게 한 포장도로인데 그 때문인지...시내 한 복판에도 돌을 깔아 포장한 도로가 많다. 

 

 

 

이곳에는 바울의 도착을 기리는 바울기념교회가 두 곳이나 세워져 있는데 한 곳은 항구 가까이에 있고 다른 곳은 항구의 언덕 위에 있어 항구 바로 가까이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를 찾아 보았다.

 

 

이 교회는 1928년에 사도 바울의 유럽 도착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교회 벽에는 바울이 배에서 항구에 내리는 모자이크화가 있어 이 곳이 바울이 유럽 전도에 첫 발을 디딘 역사적인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신축한 교회는 예전에 있던 교회 터 위에 세워져 있다.
'한번 세워진 교회는 절대 무너뜨리지 않는다.'란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앞에는 예전 교회의 기둥의 잔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세월이 스쳐 지나간 돌기둥에 기대어 잠시 상념에 빠지며
모자이크로 새겨진 사도 행전 16장 9~12절의 바울의 사역을 회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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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가장 먼저 도로를 닦았는데 도로 건설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이다. 
B.C. 146~120년 사이에 건설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터키까지 연결하는 길이 535마일의 도로였으니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860km에 달하는 엄청나게 긴 거리이다. 

 

에그나티아 가도가 지나가는 길에 에 위치한 빌립보(필리피, Philippi)는 기독교 선교를 받은 유럽의 첫 성으로 바울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립보의 옛 명칭은 크레니티(샘)였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마게도냐 왕 필리포스 2세(재위 BC 359∼336)가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바꾸었다. 

이 빌립보는 기원전 42년에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루터스가 참패한 후 자결한 곳이며 이 결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후에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게 된 배경이 된 역사적인 도시이다.

 

 

 

빌립보의 대규모 유적지는 1914∼1937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행해졌는데 도시의 대광장은 에그나티아 도로 바로 옆에 있고 그 면적은 길이 91m, 폭이 46m가 넘는 장방형이다. 

 

 

 

북쪽 중앙에 연사들이 연단으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는 장방형의 주춧돌이 있고 대광장의 북동쪽과 모서리에는 2개의 대신전이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그리고 도서관 건물, 줄지어진 기둥들, 건물의 현관, 분수, 목욕탕 등이 발굴되었는데 아직도 광범위한 지역은 미발굴된 그대로 남아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 바로 옆에 에그나티아 가도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새로운 도로를 닦기 바로 직전까지 이 길은 주민들의 통행로로써 충분히 제 할 일을 다했다.

에그나티아 가도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 복음을 들고 유럽 선교를 위해 지나갔던 길이기도 한데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이며 최고의 복음 전도자인 그로 인해 유럽 선교의 장이 처음 열렸다.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은 지금은 아스팔트 길에 밀려난 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통해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당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약 9m 폭으로 상당히 넓은 규모의 도로이었는데 도로에는 중앙 분리대도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마차들은 상대방의 채찍질을 피하기 위해 다 좌측으로 통행을 하였다고 하니 오늘날의 영국권 나라의 차량 좌측 통행의 기원은 에그나티아 도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에그나티아 도로에 그려져 있던 도형이 눈에 뜨이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놀이 했던 흔적이라고 추측된다.

 

 

극장을 지나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조금 지나면 바실리카 A 라고 불리는 지역이 위치해 있다.   

 

 

바실리카는 회당식 교회를 말하는데 빌립보에는 바실리카가 두 곳이 있다.

 

 

바실리카 A는 거의 허물어지고 기둥 몇개와 벽만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기둥 몇 개만 보아도 전성기 때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대리석 기둥 위의 아칸사스 잎이 어제 새긴 듯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이런 기둥 양식을 코린트식이라고 한다. 

 

 

바실리카 A에서 바실리카 B로 가려면 중간에 현대에 건설한 아스팔트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길을 건너면 바로 바울이 투옥되었던 감옥이 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곳은 바울이 귀신이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써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힌 감옥이다. 

그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다(사도행전 16:16∼34). 이 일로 기독교 역사상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된다.  

 

 

가운데 나 있는 이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빌립보 유적지는 두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윗쪽 유적지 산허리에는 바실리카 B와 원형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바실리카 B의 웅장한 기초석을 보면 당시 교회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바닥에 나둥그러진 대리석 조각들에는 십가가 장식이 선명하다. 

 

 

현재는 기둥 몇 개만 서 있고 바닥에 흩어진 석재들이 이 곳이 바실리카 B의 자리임을 알려준다. 

 

 

여기저기 무너진 유적의 잔해가 널려 있는데 발굴과 복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의 유적지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곳은 바로 원형 극장인데 아직도 시민들의 공간으로써의 원형 극장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원형 극장 가운데에 심상치 않은 장식들이 있길래 알아보니 내일부터 이곳에서 연극제가 열린다고 무대 장식을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이천년이 넘은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무대라니...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배우들도 다 감격으로 가슴이 떨릴 것 같지 않은가....
시간이 있으면 내일까지 머무르며 이천년된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공연을 볼 수 있을텐데.....아쉬운 마음 간직하고 빌립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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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데살로니가란 지명을 들어본 적 있으신지....
어릴 적에 여름 성경 학교라도 조금 다녀 본 경험이 있는 분은
이내 "데살로니가 전후~♪ 디모데전~♬"하며 부르는 성경 목록가의 한 대목이 떠오를 것 같다. 

데살로니가(테살로니키,Thessaloniki)는 BC 315년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동생 카스텔이
알랙산더의 누이이기도 하고 자기 아내이기도 한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에는 바울과 관련되는 로마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사실 유적이라는 게 고대 도시가 국가 지진이나 전쟁이 나서 폐허가 되어버리거나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리는 일이 생기게 되면 무인지경이 된 채로 방치되었다가
마침내 후대에 발굴되어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건데
오늘날의 데살로니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발굴이 되었다고 해도 극히 일부분이고 고대 데살로니가는 아직도 땅 밑에 고이고이 잠들어 있다. 

 

 

 

데살로니가에서 찾아볼 만한 유적 중의 하나는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드미트리우스 교회이다.
성 드미트리우스는 4세기에 순교한 분인데 어쩌다 데살로니가의 수호 성인이 되었고 이 교회는 드미트리우스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5세기에 지은 이 교회는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1948년에 다시 재건되었다. 

 

 

 교회의 내부는 어두운데 규모는 상당히 크다. 

 

 

현 교회의 지하로 내려가니 아래에 오래된 옛날 교회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한 번 세워진 교회는 무너지거나 없애면 안 되는 동방 정교회의 원칙에 따라 원래 있던 교회 위에다 다시 새로운 교회를 지은 것이다.

  

 

드미트리우스 교회 맞은 편에 로마 성벽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을 뿐 도시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교회 앞 광장은 넓고 그늘은 너무나 시원하여 화단가에 앉아 잠시 쉬어가려고 하니 
이쁜 강아지를 데리고 놀러 나온 그리스 부자가 눈에 뜨인다.
키 크고 잘 생긴 아들과 키 작은 아버지가 부자 지간일지 당최 줄이 그어지진 않았지만
자기 아들 자랑을 무지 하는걸 들어보니 그 아들의 아버지임엔 분명하였고(^^)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은 동서양이 다를바 없는 것 같다. 

 

 

 주인을 따라나온 행복한 개는 연신 하품을 해대는데....원래부터 개를 데리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트려면 개 칭찬부터 하는 법.
개가 아주 귀엽다고 말을 붙이자 개의 주인인 훈남은 너무나 좋아하며 대화에 끼어든다. 

 

 

 

 

 

그리스 조각같이 잘 생긴 이 훈남, 만면에 웃음을 띄며 강아지를 안더니 사진 한장 찍어달라고 한다.
강아지 산책 시키러 나온 동네 총각조차 이런 훈남이라니....그리스 여자들은 축복받은 땅에 태어난 것에 틀림이 없다...^^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실망을 주었던 데살로니가. 조각 미남을 만난 것에 만족하고 빌립보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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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치한 '루디아 기념교회'는 바
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5월 20일을 루디아의 축일로 정했는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하였다.   



이 교회의 돔에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형상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 마당 아래에는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세례터가 있다. 

그 전날 상류에 내린 비로 인해 흙탕물이 콸콸 흘러 가고 있었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세례터를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루디아가 세례받았다는 터에 선 것만 해도 기념할 만한 일이다. 




세례터라 알려지는 장소 옆에 아주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이렇게 작은 교회를 그리스에선 '에클레시아'라 부른다.



 

바울이 유럽에서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결신자,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자주장사 루디아라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두아디라(Thyatira,터키어로 Akhisar)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는데

그 당시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었다.

그리고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 후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 지방 염색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하던 여인이 자주장사 루디아였던 것이다.  


 

바울 일행은 지각티스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하였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사도행전16:15)"

그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하여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여러 번 도왔고

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위문품을 보냈다.

이에 바울은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의 '빌립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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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수호신인 여신 아테나의 이름에서 유래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Athens).
260만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아테네는 아티카주의 주도이자 그리스의 수도이다.

2500년전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로써 번영을 누린 도시 아테네. 
메인 스트리트인 파네피스티미우 거리에는 근대적인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데
한편에는 고대 유적들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시내 곳곳에는 중세의 비잔틴 건물도 남아 있어
고대와 중세,현대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곳이다.  

아테네를 방문하는 사람, 아니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리는 곳,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크로폴리스 입장 티켓을 손에 쥐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신들의 도시 아크로폴리스에 발을 딛게 되는 것이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제일 먼저 지정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있는 언덕.
이 언덕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올림푸스 신에게 제사 지내던 영역으로
파르테논 신전, 에렉티온 신전, 니케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2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서있는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외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파괴, 학자들의 절도 행위, 방문객들의 낙서, 지진 등으로 건물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특히 1687년 베네치아와 터키로부터의 공격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그리스 독립 후 복원 작업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려면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이온(음악당) 옆을 거쳐가게 되는데
오데이온은 정치가이며 부호인 아티쿠스가 사랑하는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AD 161 년에 건축한 음악당인데
넓이 240m, 높이 28m의 직사각형 구조이고 
원래는 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무대 전면은 화려하게 장식된 3층 구조였으나 지금은 2층만 남아있고
육천명을 수용하는 규모인 32열의 계단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파괴된 것을 1950년에 보수 하였다.
 

 

아직도 여름이면 이천년이나 된 이 오데이온에서는 아테네 축제가 열리며 많은 예술가들의 공연이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공연을 해야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오데이온 계단의 경사는 심히 가파르고 높아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아찔하기까지 했는데
이천년 넘은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문을 닫아 놓고 출입금지시킨 유적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동이 전해져 왔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서 내려다 본 아테네 시내의 전경에서 바로 아래는 아레오바고 언덕이며 오른 쪽에 보이는 신전은 복원된 헤파이토스 신전인데 신전 앞에 옛 아고라터가 펼쳐져 있다.
이 아고라는 아테네인들의 심장 역할을 했던 곳으로 단순한 상업적인 중심지만 아니라 모든 공공 건물이 운집해 있던 곳인데
267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아고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파르테논 신전의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 양식의 작은 신전은 에렉티온 신전이다.
처녀 여신 아테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아테나 여신은 이곳 시민들에게 풍부한 올리브를 포세이돈은 풍부한 물을 제공해 줄 것을 약속하며 둘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삼지창으로 아크로폴리스를 치고 샘에서 소금물이 솟도록 했으나 아테네가 올리브를 싹트게 하자 신들이 아테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그 장소가 이 곳이다. 결국 시민들은 아테나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화가 난 포세이돈은 물을 마르게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리스는 물이 무척 귀하다.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앙 숭배를 위해 지어진 이 신전은 6 명의 소녀상이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처녀단이 특히 유명하다.
이 것을 카리아테이드(caryatid)방식이라고 하는데 이렇듯 기둥이 아닌 처녀상들이 받치고 있는 기법은 이 신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각상들은 보면 왼 쪽 세 개는 왼 쪽 무릎을 오른 쪽 세 개는 오른 쪽 무릎을 살짝 내밀고 있어 튜닉을 입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는데 에렉티온 신전 앞에 선 여자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한 발을 살짝 앞으로 내어밀고 신전의 소녀상과 같은 포즈로 기념 사진을 찍어 본다. 


아테네의 여름은 심하게 덥고 아크로폴리스 바닥의 화강암에 반사 된 햇빛은 사람을 쉬 지치게 한다.
해발 고도 156m의 높은 언덕(?)을 헥헥 거리며 올라온데다 강렬한 햇빛에 지쳐서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르테논의 자료 사진을 미쳐 남기지 못하고 남은 사진은 필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들어간 사진 한장 뿐이었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의 이미지는 웹에서 살짝 빌려온 이미지로 대체하기로 하고.....

파르테논 신전은 약 2400 년 전에 도리아식 기둥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처음에는 아테나 여신을 섬기던 신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성 소피아 교회로,
오스만 터키의 지배 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베네치아와 대치 중에는 폭약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전 안에 있던 많은 조각 작품들은 폭약고로 사용할 때의 폭발 사고로 인하여 에서 떨어져 나와 신전 바닥에 방치되던 중
엘긴이라는 사람이 파르테논 박공부에 붙어 있던 조각품 및 많은 조각품을 떼어서
영국으로 가져 갔는데 엘긴이 가져간 조각품을 '엘긴 마블'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양을 가져가
지금은 대부분의 조각 작품이 대영 박물관 파르테논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러니....
조상이 물려 준 유적들을 지키지 못한 비애는 다만 우리 나라뿐만 아닌가 보다. 

 

 

이 사진은 대영박물관에서 찍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이다.
대영박물관에는 파르테논 특별실이 따로 있어서 파르테논 신전에서 때내어 온 대부분의 조각상과 부조들이
방 전체를 빙 둘러가며 원래 있던 곳과 같은 위치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라 모든 관광객들은 파르테논 앞에서 기념 사진만 찍고 다음 유적지로 서둘러 떠나곤 한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조그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언덕은 유명한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 언덕이다. 아레오바고는 그 언덕에서 소집되었던 아테네 공회의 명칭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재판관들은 재판을 진행하고 교사 후보자들을 심사하여 임명하였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동안 그 당시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에피쿠로스 및 스토아 학파의 추종자들에게 붙들려 끌려가게 되는데 이 때 바울은 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과 변론하였다. 그 상황을 기록한 사도 행전 17 :18~31의 내용이 아레오바고 언덕 오른 쪽 네모난 동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뒷편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다음으로 중요한 박물관이라고 하며 1865년에 완공되었으니 거의 150년이 다 된 박물관이다. 

 

 

특히 여신들의 조각상들은 섬세한 옷과 머리 장식이 눈에 띄는데... 

 

 

주름이 곱게 들어간 섬세한 옷감과 가늘게 땋은 머리가 그 당시 아테네의 최신 유행이었다고..... 

 

 

파르테논 신전 박공의 모형에는 포세이돈(삼지창을 들고 있다)과 아테나가 대결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넘어진 거인과 싸우는 아테나의 모습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전시된 유물의 사진은 아무리 많이 찍어도 되나 유물을 배경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처음에는 약간 갸우뚱했지만 나중에 와서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유물을 배경으로 서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경우에는 관람하는 사람들의 동선에 상당히 방해가 되는데
사진을 찍느라 유물을 가리는 것을 방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일 듯....
그리고 유물 자체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유물을 단지 인물 사진의 뒷배경으로 삼는 것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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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오라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란 뜻의 메테오라(Meteora)는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들이 있는 곳. 그 희귀성과 신비함으로 인해 UNESCO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이 곳의 수도원들은 14세기에 처음 세워졌고  전성기인 16세기에는 총 24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속세와 차단하기 위해 바위산 위에 수도원을 지었는데 올라가는 길을 따로 만들지 않아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래를 이용하여 끌어올리는 방법 뿐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총 14개의 수도원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수도사가 거처하는 6군데의 수도원만 그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메테오라로 가는 길 오른 편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곳을 자세히 보니 그 앞에 판자촌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스 가옥같지 않은 다소 지저분한 집들이 늘어서 있기에 물어보니 집시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란다.
집시들은 유럽 어느 지역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거나 이렇듯 한적한 지역에 부락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여자들의 입는 치마 중 길고 폭이 넓거나 갈래갈래  폭이 갈라진 치마를 흔히 집시 치마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정한 거주 지역을 가지지 못한 집시의 여인들이 길을 가다가 생리 현상을 해결할 때에 아무 곳에나 치마를 펼쳐 들고 앉기만 하면 남들의 눈치를 받지 않고 볼 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치마들을 입었는데 요즘은 멋진 집에 멋진 화장실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옷을 입는다고 집시들이 흉을 본다고 한다. 

 

 

 집시 마을을 지나 한참 가면 저멀리 예사롭지 않은 기암 괴석들이 보이는데 마치 사람이 누워서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 

 

 

멀리서보아도 그 위용이 예사롭지 않고 바위 아래에 빨간 지붕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기묘한 모습의 바위들이 여기저기에 불쑥 솟아오른 듯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은
산정에 물고기 및 바다 생물들의 뼈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옛날에 갇혀진 내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수도원 보수 작업 당시 발견된 건축적 증거와 벽화가 이 곳이 조성된 시기가 13세기초임을 확인해 준다.
기암 괴석 군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이 일품이며 현재 6개의 수도원이 남아 있는데  
왼 쪽부터 루사노,니콜라우스(아주 작게 희미하게 보이는..),대메테오라(큰 산 위에 희미한..), 발람 수도원이다. 

 

 

메테오라의 수도원 건물 중 가장 도달하기가 어려운 건물은 트리니티 수도원이다.
이 곳에 가기 위해선 계곡을 지나 좁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한다.
1981년 007 시리즈 ' For Your Eyes Only'의 클라이막스 추격 장면에서 이 수도원이 등장하여 더욱 유명세를 탔다.

 

 

루사노 수도원은 메테오라의 수도원 중 자연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왼 쪽 바위 위에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오래 된 대 메테오른 수도원이 있는데  
너무 높아서 사진 상으로는 잘 나타나 보이지 않고 오른 쪽  수도원은 두 번째로 큰 발람 수도원이다. 

 

 

발람 수도원은 은돈한 수도자 발람에 의해 1542년에 세워졌는데
주황빛의 지붕으로 유명한 이 건축물은 수도원 건물 중 주변 풍경과 가장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발람 수도원을 돌아보기 위해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는데는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야 한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는데에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로는 입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바지를 입은 관광객들은 사진과 같이 수도원 입구에서 빌려 주는 고무줄 치마를 걸치고 들어가야만 한다.

절벽 사이를 이은 다리를 지나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올라가서 내려다 보면 아래가 까마득하다. 

 

 

 역시 골짜기 아랫 부분들을 보면 수도원들이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옛날에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원으로 통하는 계단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원 위에서 도르래를 이용하여 사람들이나 물자를 끌어 올리곤 했다. 

 

 

이 수도원에는 세 명의 주교를 기리는 돔으로 된 십자형 교회가 있으며
벽면에는 1548년 프랑스 성화가 카텔라노스가 그린 성화가 장식되어 있다.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은 깔람바까 마을 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깔람바까의 전망대로 불리운다.
14세기에 수도원이 형성되었고 많은 수도사들이 있었으나 쇠퇴하면서
1961년도에는 수녀원으로 바뀌어 비잔틴 성화,성가 등을 제작 판매하고 있다.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에 있던 특이한 모양의 종은 쇠막대로 치면 청아한 소리가 난다.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신비한 메테오라.....고요한 깔람바까 마을....
시간이 허락한다면 오래 머무르며 정지된 중세의 시간을 느껴보고 싶은 공중 수도원 메테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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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유명한 말씀으로 인해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고린도(코린트,Corinth).

구 고린도의 광대한 유적지를 돌아보다 보면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박물관이 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개인박물관같이 규모가 작고 아담한 박물관이다.
고린도 유직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세워진 이 박물관의 입장료는 6유로이다.

 

 

 '고대 고린도 고고학 유적 및 박물관'이라는 안내판을 따라서 박물관을 한바퀴 둘러본다. 

 

 

박물관 마당에는 시대별로 그리스 건축의 각각의 기둥 양식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비교해 두었다.
제일 왼쪽은 도리아식의 기둥으로 기둥 위 장식이 대체로 단순한 사각형의 형태이고
중간의 것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도리아식보다는 장식이 가미되어 있으며
기둥 위 부분 양쪽에 둥근 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의 것은 고린도식 기둥으로 넝쿨 무늬로 섬세히 장식한 가장 화려한 형태의 기둥 장식이다.
 

 

 

고린도의 건축물은 기둥 장식 하나도 그냥 그대로 두는 법이 없이 화려한 장식이 기본이다. 

 

 

전시품에는 대리석 석상이 유달리 많은데 이 석상들은 인간의 몸을 본뜬 것이 대부분이다.
환락의 도시 고린도답게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높았던 것일까....?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Six Pack 열풍은 그 기원이 그리스 시대 이전까지 올라가는 듯....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서 옷은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인지 옷은 어깨와 팔에 슬쩍 걸치기만 했다.
 

 

 코린트식의 기둥 장식 속의 이 아름다운 남자는 머리는 구불구불 아름답게 파마를 하고 주름이 많이 잡힌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석상의 옷 주름이 너무나 세밀하고 아름답다. 귀족들은 섬세하게 치장을 한 옷을 입고 멋을 부렸다고 하며 시종들까지 아름답게 장식한 옷을 입혔다고 한다. 

 

 

금방 다린 듯한 섬세한 주름의 옷을 입고 치장을 한 고린도 사람들이 떠오른다.
대리석을 가지고 이렇게 옷 주름까지 미세하게 표현한 조각 기법이 놀랍기만 하다.  

 

 

 아우구스투스 상인 듯 하다. 

 

 

 이 모자이크는 제우스신의 아들이고 술의 신인 디오니수스(바커스)를 위한 것인데  원래는 바닥에 깔린 모자이크이다. 

 

 

 극도로 세밀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그 당시 고린도의 풍요함을 말해 주고 있다.  

 

 

 코린토 박물관에 소장된 이 도자기들은 BC 3000년 부터 900년 사이의 물건들이다. 

 

 

니케(Nike,전쟁이나 경기의 승리의 여신) 상이다. 스핑크스의 영향을 받은 듯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시절 고린도의 승리를 위하여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게 날개를 잘라 놓은 것을 후세에 다시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병이 치유가 되면 그 신체의 부분을 조품으로 만들어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쳤다고 한다.
귓병이 나으면 귀를 만들어 바치고 발이 나으면 발을 만들고
성병도 치유가 되면 성기의 조각을 만들어서 바쳤다고 하여
고린도 박물관에는 유난히도 성기의 조각이 많았다.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이다 보니 성병이 많았던 듯....  

 

 

발굴 당시에 나온 인골과 부장품들.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 

 

 

고린도 박물관에는 유달리 목만 남은 석상들이 많은데 이렇게 석상의 코가 훼손된 모습도 많이 보인다.
그리스에서도 석상의 코를 깎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퍼졌나....? 

 

 

박물관 뒤뜰에는 묘비명과 함께 머리 없이 몸만 있는 석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문 앞에 문패 대신 자기의 전신상을 세웠다는데 전쟁도 많았고 이동도 많았던터라
전신상이 완성되기 전에
당사자가 죽거나 이사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얼굴이 없는 전신상은 기본 사양이고 얼굴은 옵션....
새 집을 사도 얼굴만 주문하고 이사할 땐 얼굴만 들고 다니게 된 것이다.

 

 

착탈식 석상이라....그런 석상을 개발한 사람이 요즘 있었더라면
나라 생각은 안 하고 자기 무리의 영달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 한 두 개 쯤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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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고대 및 현대 도시 고린도(코린트,Corinth). 
이 도시는 구 고린도와 신 고린도로 나뉘는데 고대 도시 유적은 구 고린도에 있다.
 
 

고린도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세계 3대 운하 중의 하나인 고린도 운하.
이 운하는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에 있는 운하인데 서쪽 바다인 이오이나해와 동쪽 바다인 에게해를 연결한다.
길이 6.3km, 폭 25m(바닥의 폭은 21m) 의 규모인데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약 80m인지라
다리 위에서 보면 아래가 까마득하게 보일만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운하 양 쪽 바다 풍광도 아주 아름답다.

AD 67년, 로마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노예를 데리고 자기 스스로 첫 삽질을 하여 운하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네로 황제가 죽자 이어 즉위한 가르바 황제가 경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중지한 이후
1881년 다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하였으니 운하를 만드는데 거의 180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운하 안에 갑문이 없는 수평식 운하이며 양쪽 만의 간만 시간차 때문에 강한 조류가 일어나기도 한다는데
실제로 다리 위에선 몸을 가누기도 힘들만큼 심한 바람이 불어 운하 구경하는데도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곳이다.

운하를 가로질러 놓인 도로 표지판에 쓰인 낙서가 눈에 뜨인다. 어디든 낙서하고 싶은 심리는 만국 공통인 듯....

운하를 지나면 나타나는 구 고린도에는 고대 도시 유적지가 있다.
이 고대 도시는 지브롤터처럼 돌출한 아크로코린토스 언덕(해발 575m)의 성채 아래에서 성장했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는 고대 도시의 위로 가파르게 솟아 있고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는 육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옛날 고린도는 전략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중요성을 지닌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BC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BC 8세기초에 고린도 도시국가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고린도의 정치적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증대되었다.
그 당시 고린도의 인구가 자유인이 25만, 노예가 40만이었다고 하니 인구 3만 정도인 오늘날의 고린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고린도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신전 중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매음 행위를 자행했고
한 때는 1000명의 선발된 창녀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봉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린도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인과 같이 행한다'는 말은 '성적 부도덕을 행한다'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고린도의 폐허의 아폴로 신전은 BC 6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38개의 기둥이 있었는데 반복되는 지진으로 인해 지금은 7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신전은 주전 6세기경에 세워진 그리스의 신전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으로
전통적인 도리아식(Doric style)기둥이며 기둥이 하나로 된 통기둥인데 현재는 7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 신전의 남아 있는 고린도식 열주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고대 고린도시의 유적은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의 정북쪽에 있으며 그 도시와 언덕은 둘레 약 10㎞의 원형 성벽으로 결합되어 있다.
중요 유적은 대부분 로마 시대의 것들이지만 아고라가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BC 4세기의 일이라고...

아고라(시장)지역의 건물이 화려한 걸로 보아서 고린도 사람들의 생활은 대단히 화려하였다고 짐작되며 이곳은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한 도시였다고 전해 온다.

그밖의 신전, 별장, 극장, 상점, 공중목욕탕, 도기제조소, 단련장, 거대한 개선문,
기타 건물들의 유적이 점점이 들어서 있는 아고라 일대는 1896년부터 대대적으로 발굴되었다.

바울의 재판터(Bema)는 광장 중앙에 쌓여 있는 돌더미로 본래 아고라의 중앙에 자리자잡고 있었으며
가이오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인들의 고소로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았단 자리이다(사도행전 18:12~17).
5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인들이 이 곳을 교회로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사용된 우물 피레네 샘터는 정원과 6개의 물저장소가 서로 유통되도록 되어 있고 한 시간에 11000리터의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물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신화에 의하면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피레네)의 애절한 사랑이 오늘도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고 전한다.

그 당시 길가의 각 상점에서는 우물을 파서 포도주나 육류를 우물 속에 매달아서 냉장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팔았다.

대극장 유적은 에베소 유적지의 대극장에 비해서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다.

고대의 고린도 시가가 지진으로 무너진 후 1858년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신 고린도 시가 건설되었다.

한때 65만의 인구를 자랑했던 고린도의 현재 인구는 약 3만 정도이며 
신 고린도는 그리스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지만 여행자가 보기엔 한적한 소읍 같은 도시이다.

신 고린도 중앙에 위치한 '신 고린도 바울 교회'의 왼쪽에는 베드로 사도 오른쪽은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교회 입구 우측면에 위치한 대리석판에 흔히들 '사랑장(章)'이라고 부르는 고린도 전서 13장 1~8절의 말씀이 헬라어(그리스어)로기록되어 있다.

신고린도 교회 벽면에는 또한 역대 교역자의 명단이 벽에 적혀 있는데
1대 바울, 2대 아볼로, 3대 실라....이렇게 이어 내려와 현재는 88대 교역자가 시무하고 있다.

AD 50~52년에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본업인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 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강론하였다.
고대 고린도는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숭상하는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는데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음행을 꾸짖으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
고린도서를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어서 권유하였다.

이천년전 고린도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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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고 다섯 시간......
그리스의 영토인 에게해의 작은 섬 밧모(파트모스, Patmos)로 향한다.
남북 17km, 동서 9km 넓이의 바위와 화산암으로 뒤덮힌 조그마한 섬 밧모는 농사라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건조하고 불모지같은 땅인데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에게해를 헤치고 저멀리 밧모가 보이면 항구가 채 보이기도 전에
섬의 정상 부분에 성채와 같이 우뚝 서서
밧모에 오는 사람들을 환하게 반겨주는 건물이 있으니
바로 '성 요한 수도원'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 아름다운 수도원은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동로마 황제로부터 섬 전체를 성지로 하사받아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인데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높은 곳에 요새처럼 건축하였다. 

 

 

하얀 페인트로 칠한 그리스의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화산암으로 건축된 성 요한 수도원은 바다에서 바라보면 약간 검붉은 색으로 두드러져 보이며 마치 거대한 요새같이도 보인다. 

 

밧모섬의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성요한 수도원'을 가기 위해선 주차장에 내려서도 하얀 집들이 늘어선 호라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다 숨이 차서 멈추어 뒤로 돌아서 본 풍경은 깨끗한 하늘과 눈이 부시게 푸른 바다...거기에 장난감 같은  하얀 집들...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성 요한 수도원'의 철문이 순례자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이곳은 원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으로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성 요한 수도원을 세우면서부터 이 섬에 수도원과 교회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수도원 입구 문 위에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로 새겨져 있다.  

 

 

정문을 지나 다시 작은 문으로 들어서니 에는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의 사제가 서 있는데
민소매의 옷을 입은 필자를 보더니 어깨를 가리라고 태양의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검정색 숄을 한 장 주었다.
사진의 모델을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하고는 앉아서 멋진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검은 수도복과 검은 모자....그리고 길고 하얀 수염이 정말 멋진 사제. 카리스마도 완전 짱이다...!

정교회 사제의 프로필을 찍은 후에 욕심이 생긴 필자.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그것 또한 웃으며 허락한다.
필자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카메라를 앞에 선 사람에게 부탁하고 사제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더니
깜짝 놀란 이 사제..... 손사래를 거듭 치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덩달아 깜짝 놀란 필자.....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한 후 그냥 옆에 얌전하게 서서 포즈를 취하니
그 할아버지 사제 .....필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옆으로 고개 돌리고 외면한 채 사진 촬영에 임한다.
나이가 아주 많은데도 여자랑 신체 접촉을 하거나 쳐다 보면 안 된다는 계율을 지키던 할아버지 사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입구에서 수도원으로 가는 통로에도 있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는 예수님,왼쪽은 사도 요한,오른쪽은 수도원을 지어 헌납하는 크리스토둘로스이다. 

 

 

먼저 수도원의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예배당의 둥근 지붕의 붉은 돌이 눈에 들어온다.
화산암의 군데군데가 붉은색이라서 이 수도원이 먼데서 보면 붉은 성채처럼 보이나보다. 

 

 

수도원의 제일 큰 종루에는 종이 다섯개나 달려 있는데 쳐다보면 노틀담 사원의 에스메랄다가 떠오르는 건 웬일인지.....

 

                                                                                                                     

성 요한 수도원 도서관에는 장서 3,000 여권이 소장되어 있는데 장서 중에는 7~8 세기의 성경 희귀 사본들도 있다.
이 도서관은 아토스 수도원 도서관 다음으로 귀중한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라고 한다.  대리석에 쓰여진 요한계시록 사본도 이채롭다.  

이 건물 내에는 8개의 크고 작은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성요한 교회'는 제일 중심이 되는 예배당이다.
벽과 천정에는 오래 되어 칠들이 벗겨져 가는 성화들로 가득 차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인해 아랫 부분이 다 희미해져 없어져가는 성화들이 무척이나 신비한 느낌을 준다. 

8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이른바 '성상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서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보내던 세금 납부를 중지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오 3세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으로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분열된 원인이 되었던 성상 금지령으로 인해 이 후 비잔티움 내의 많은 성당의 이콘(icon,성화상)이 무너뜨려지고 지워졌는데 이 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라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해 이콘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1,2차 성상 금지령 이 후 성상 금지령은 점점 시들막해져서 동방 정교회에서 이콘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예배 형식은 계속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특징은 성상(聖像)은 거의 없으나 이콘(icon,聖畵)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랜 세월이 스쳐 간 흔적이 남아 있어 더 아름다운 성요한 수도원의 이콘들을 감상하시길......

 

 

모자이크로 된 이콘도 많은데 왼쪽은 사도 요한, 오른쪽은 수도원을 건립한 크리스토둘로스이다. 사도 요한의 이마를 보면 혹처럼 불룩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그 흔적은 사도 요한이 이마를 동굴 암벽에다 대고 하도 오랫동안 기도를 해서 생긴 굳은 살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였는지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 무릎 같았다고 전해진다. 

예배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입구까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성요한수도원 교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필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개신교인은 성상이나 성화에 대해서 그다지 탐탁치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서 그것이 비록 예수님의 그림이나 형상이라도 만들거나 그려서 형상을 보고 경배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같은 곳에서도 거기에 그려지거나 세워진 수많은 성경상의 형상들이 미적으로는 심히 아름다웠으나 신앙적으로 형상을 경배한다는 일은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되곤 했다. 

그러나 작은...너무도 작은...조그마한 방 두개 정도를 합친 듯한 성 요한 수도원의 아주 아주 작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에 필자는 감격에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방의 천정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소박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천정화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사면 벽에도 역시 성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성당이나 교회처럼 설교를 듣기 위해 성도들이 앉는 의자가 없었고
대신 성화가 그려진 벽 삼면에 앉는 부분이 없는 등이 높은 의자가 대여섯개 붙어 있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독특한 습관이 있어서 수도사들이 이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는 앉지 않고 서서 기도하며
서서 기도하던 중에 졸다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앉는 부분 대신 팔걸이만 있는 의자였다.

너무나 소박하고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예배당...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 붙어서 천정만 쳐다 보고 있는데
함께 천정 벽화를 보고 있던 S가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왜 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S,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을 잇는 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요...너무 아름다워요....
언제 다시 이 곳에 와 보겠어요.....너무 아름다워요....
이 모든 것을 내 눈 속에....마음 속에..... 담아갈 거에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 성화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작고 소박한 예배당..... 너무나 경건한 아름다움.....
필자 또한 벅차 오르는 감격에 가만히 서서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피부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 예배당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필설로나 사진으로써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고
지금 글을 쓰며 그 곳을 기억해 보아도 동일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성지 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밧모섬에 가서 성 요한 수도원의 예배당을 꼬옥 가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예배당 바닥에는 넓적한 나뭇잎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웬 나뭇잎일까...궁금하게 여기며 오른쪽 문으로 나가려던 중 아주 젊고 잘 생긴 수도사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필자가 이 나뭇잎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내일이 성모승천일인데 이 수도원을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경배의 뜻으로 나뭇잎(나뭇잎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적어둘걸...ㅠㅠ)을 제단 앞에 뿌려서 봉헌한 것이란다.
제물이 나뭇잎이라니...참으로 소박하기도 하다..
열심히 설명해 주던 수도사는 필자가 작별 인사를 하니 기념으로 나뭇잎을 주겠다며 필자의 손에 나뭇잎을 꼬옥 쥐어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예배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같은 화려한 성당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을 그 곳에서는 경험할 수가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자그마한 예배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청아한 노래 소리도 함께 들려 온다.

Nulla in mundo pax sincera
Sine felle; pura et vera
Dulcis Jesu est in te

Inter poenas et tormenta,
vivit anima contenta,
Casti amoris, sola spe

이 세상에 고통없는 참 평화는 없어라...
자비로운 예수여, 당신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평화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의 빛이 비칠 때
내 영혼은 비로소 위안을 얻게 된다네.

 

"Nulla in Mundo Pax Sincera (세상에 평화 없어라)..."
천국에 BGM이 흐른다면 아마 이 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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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인 밧모(파트모스,Patmos)섬은 남북 17 km,동서 9 km의 넓이의 이 섬은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인데 농사라 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별 것 아닌 건조하고 불모지 같은 땅이다.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으로 로마시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던 밧모섬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이곳에 18개월동안 억류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소로 가게 된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동안 '계시의 동굴'에서 지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그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계시의 동굴 출입구 옆 축대에는  '계시의 동굴(The Cave of the Apocalypse on the Patmos)'이란 글과 함께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I was on the island of Patmos)" 라는 요한계시록 1장 9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요한이 기거할 때에는 바위 동굴만 있었으나 17세기 경에 바위 위에 동굴 보호를 목적으로 성 안나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신학교 건물이 세워졌다. 

 

 

신학교 건물은 그리스 건축 양식에 따라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고

 

 

문 위에는 요한이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는 내용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 있던 바위 동굴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건물은 비스듬히 지어져 있는데
아무 시간에나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앞에서 기다린 후에 개장 시간에 맞춰 입장할 수 있다. 

 

 

동굴로 들어가려면 신학교 건물로 들어가서는 좁은 계단을 다섯번이나 꺾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도중 계단 옆으로 굳게 닫겨 있는 신학교의 붉은 문들은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한참 걸어내려가면 계시의 동굴의 입구로 들어서게 되는데 계시의 동굴을 둘러 싼 공간은 성 안나 교회라고 한다.


성스럽다 못해 신비한 느낌마져 드는 게시의 동굴은 한 20평 정도나 될만한 공간일까...
입구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난 바위 창문으로는 산 아래의 정경과 해안이 환히 드러나 보이고
맞은편에는 성안나교회의 벽화들이 천정과 오른 쪽에는 자연적인 동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동굴의 머리 위 바위가 크게 갈라진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요한이 계시를 받는 순간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이 나며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이라고 한다.

신비감 도는 동굴에서 나와 교회 건물 꼭대기 종루에 올라 푸른 밧모 바다를 내려다 보니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는 사도 요한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요한계시록 21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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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모(파트모스,Patmos)섬은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이다.
남북 17 km,동서 9 km의 넓이의 이 섬은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인데
농사라 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별 것 아닌 건조하고 불모지 같은 땅이다.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으로 이 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밧모에 18개월동안 억류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소로 가게 된다.
이 곳에 있는 동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밧모섬 여행자들 중에서 한국인을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에게해 한가운데 있는 밧모섬을 가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틀은 잡아야 하니
섬을 둘러보는 시간에 비해 오고 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이유로
인해 
밧모를 방문한다는 것은 상당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밧모섬으로 가는 길은 보통 두가지가 있는데 그리
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밧모까지는 약 10시간 정도 걸리고
터키의 쿠샤다시 항구에서 밧모로 가는 항해는 약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필자는 에베소를 둘러 본 후에 쿠샤다시에서 하룻밤 경유한 후 아침 일찍 소형 선박(거의 유람선?)을 타고 밧모로 가기로 했다.
밧모에서는 사도 요한의 유적지와 섬 전체를 돌아본 후 대형 크루즈선을 타고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리스 고린도의 피레우스항까지 가는 여정이다.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면 터키와 그리스 국경을 넘어가게 되므로 항구 내 출국장에서 여권 검사와 짐 검사를 마친 후 배에 올라야 하는데 터키는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나라여서 밧모로 가는 여행객은 거의 없으므로 소형 선박을 이용해야만 했다. 

 


쿠샤다시항을 출발하니 이내 비둘기섬이 나타난다.
쿠샤다시 여행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이 '비둘기섬'은 긴 방죽으로 본토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귀베르진 아다스'라고 불리우는 이 섬은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 섬을 둘러 싼 14,5세기의 성채가 복구되어서 지금은 터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나이트 크럽으로 변모되었다.
600년이 넘은 오래된 성채를 나이트 클럽으로 변모시키다니....! 
온 나라 안에 이천년 넘는 고대 유적이 차고 넘치는 터키에서는 600년 된 성채 정도는 그저 생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다행히도 날씨가 매우 맑고 파도가 거의 없어서 항해는 순조로왔고 젠틀하게 생긴 선장의 나이 지긋한 모습을 보니 더욱 더 안심이 되었다. 일기가 고르지 못하거나 파도가 높은 날에는 소형 선박은 아예 운행을 안한다고 하니 그리스 여행의 시작은 아주 운이 좋은 출발이다. 

 

 

배는 터키 국적인 유람선인지라 선박 후미에 터키 깃발이 붉게 휘날리고 있다.  

 


쿠샤다시를 떠난지 얼마 안 되어 큰 섬이 나타나길래 벌써 밧모섬? 했더니 사모스섬이다.
터키의 항구를 떠나면 얼마 되지 않아 계속 여기 저기 크고 작은 섬이 나타나는데 터키 바로 옆에 위치한 섬들은 놀랍게도 거의가 그리스의 영토이다.
제법 큰 섬인 사모스(Samos)섬, 또한 터키의 영토였으나 1912년 그리스에 합병된 상당히 큰 섬이다.
터키 사람들은 닭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코 앞의 섬들이 그리스의 영토라는데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

 

 

강렬한 태양빛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맑고도 푸른 에게해를 헤치고 5시간을 가니 드디어 저 멀리 목적지 밧모섬이 나타난다. 
오랜 시간 배에 있어 지루해하던 승객들은 모두 갑판에 나와서 멀리 보이는  밧모섬을 향하여 환호성을 지른다. 

 

 

나무도 거의 없이 바위와 화산석으로 뒤덮인 섬에 가까워지니 별것도 아닌 섬이네.....이런 생각이 일순간 들지만 
섬 주변을 유유자적하는 요트들에서 평화로운 느낌이 피부로 전해져 온다. 

 

 

푸른 나무로 뒤덮인 우리나라의 섬들과 달리 밧모섬은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섬이라 다소 낯설게 느껴지고
섬의 아랫부분에서부터 높지 않은 정상까지 여기저기 집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집들은 대부분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섬에 가까워질수록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솟아 있는 붉은 성 요한 수도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스칼라 항구가 가까워지고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집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방파제도 제대로 없는 그야말로 작은 항구로 배가 들어가는데....

 

 

이런 작은 항구에 대형 크루즈선도 들어온다니 믿겨지지가 않는 부분이다.

 

 

섬은 지극히 조그마한데 여름에는 유럽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이 곳에서 휴가를 보낸다. 

 

 

호화 요트에서 소형 요트까지 즐비한 이곳은 유럽 사람들의 꿈의 휴양지이다. 
주민이 2500명 밖에 안 되는 이 섬에 유람선과 요트는 물론이고 수만톤 급의 크루즈선도 정박하니 이 섬의 명성은 크기로 짐작할 일이 아닐 듯 하다. 

 

  

항구 옆 메인 스트리트에는 좁은 섬의 지형에 알맞게 오트바이가 많이 주차되어 있고 다운타운을 거니는 여자들의 자유분방한 차림과 핫한 몸매에서 섬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다운 타운 골목의 상가에는 아름다운 보석 및 악세사리 가게가 줄을 지어 있고 기념품 상가도 많이 들어서 눈요기거리를 준다. 

 

 

항구에서는 제일 먼저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의 세례터'를 찾아 보았다.

 

 

AD 96년 이 곳에 도착한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된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장소이다. 

 

 

바로 옆에는 아주 아주 조그만 기념 교회가 있다. 

 

 

사도 요한의 세례터 앞에서 보면 스칼라 항구의 전경이 그대로 보이고 성 요한 수도원도 멀리 다 보일 정도인데
밧모는 면적은 매우
좁지만 섬이나 해안선이 드나듦이 거의 80km나 될 정도로 구불구불한 섬이다.  



해변의 바닷물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해초도 거의 없어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이 곳은 태양 광선이 너무 강렬하여 플랑크톤이 잘 서식치 못하여 해변엔 고기도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하고
염도가 낮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도 몸이 전혀 끈끈하지 않고
몸을 말린 후 손으로 비비면 피부가 보송보송하니......정말 신비롭고 환상적인 바다이다. 

 

 

항구 바로 옆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바닷물의 오염이 적은데 이 섬의 구불구불한 어느 해안 한 구석에는 '누드 비치'도 있다고 하니  밧모에 가시는 분들은 그곳도 찾아본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휴가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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