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으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긴 했다지만 
밀양은 그저 경상도 한 구석에 짱 박혀 있는 그런 조그만 소도시에 불과하다.
도시 자체가 그다지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시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나직한 돌담들이 우리를 반기는 곳.
'은밀한 햇살'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밀양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조차 온화하다.


밀양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영남루(嶺南樓)'이다.


추화산을 등지고 남천강(밀양강) 맑은 물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절벽 위에 좌우에 익루를 끼고 날아갈 듯 서있는 누각 영남루.
그 당당하고 날렵한 모습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부의 객사인 밀주관에 부속되었던 건물이다.
고려 공민왕(1365년)때 이전에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가 큰 누각으로 세워졌는데 임진왜란때는 밀양 객사와 함께 소실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년)에 중건된 것으로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물 중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16경중에 하나로 선정된 것을 미루어 볼 때 수려한 경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각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누의 양옆에는 각각 1채씩 부속 건물이 있는데
본루를 기점으로 좌측에는 침류당(枕流堂)을 우측에는 능파각(凌波閣)을 익루로 거느리는 특이한 형태이다.
특히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시킴으로
 당당하면서도 날렵한,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멋진 누각이다.


특히 기와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래 끝에 부착된 귀면와(鬼面瓦)인데 이것은 조선시대 귀면와 중 걸작품이다.


영남루 전면의 현판 글씨는 추사체의 대가 구한말 송파 하동주의 글이다.


마당 쪽에서 올라가는 계단 위에도 많은 현판들이 붙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인 중층 누각의 내부 모습은 시원하도록 넓다.
건물의 기둥이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누각의 내부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한 충량과 퇴량은 물론 대형 대들보가 모두 화려한 용신으로 조각되어 있는가 하면


봉황 등 화려한 꽃 무늬가 가득하여 특이한 내부 구조와 함께 하나하나 바라보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내부의 현판 중 유명한 것은 1843년부터 1844년까지 이 건물을 중수할 당시
이인재 부사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인 이증석, 이현석 형제가 쓴  현판인데 '영남제일루'는 이증석이 11세 때 쓴 글씨이다.


그리고 '영남루'는 이현석이 7세 때 쓴 글씨인데 각각 7세, 11세인 어린아이들이 이렇듯 힘차고 큰 글씨를 썼다니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다.
이 두 현판은 서예가들로부터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전해내려 온다고 한다.


그 외에도 누각 안에는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들의 시문 현판들이 즐비하다.




퇴계 이황이 영남루를 예찬하여 쓴 시도 눈에 뜨인다.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바라보니 눈 앞에 펼쳐지는 보는 남천강(밀양강)의 전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눈부시다.


강둑과 둔치의 체육 시설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여름철이면 마루바닥이 비좁을 정도로 누각을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영남루의 맞은 편에는 천진궁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역대 왕조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내부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비롯해서 부여, 고구려, 가야, 신라, 백제의 시조 위패와 고려 태조, 조선 태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대가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어버리고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천진궁은 건축적 가치에 앞서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감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영남루 마당을 자세히 보면 바닥에 돌들이 도드라지게 올라온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석화(石花)라고 한다.


연한 납석으로 이루어진 석화는 영남루 전체와 부근에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그 형태가 국화꽃 모양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비 온 후에는 그 자태가 선명하고 아름다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자연 유산이다.


영남루를 한바퀴 돌아보고 내려오니 누각 아래 목련이 아름답게 피어 여행자를 반긴다.
은밀한 햇살은 밀양에 먼저 도달하여 꽃샘 추위 속에서도 아름다운 봄을 재촉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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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함풍제의 후궁이었던 자희황태후이다.

그녀를 일컫는 이름 서태후는 정식 명칭이 아닌데

태후(太后)는 황제의 모친을 일컫는 말로 황제 모친의 정실은 동(東)으로 후실은 서(西)로 표현한데서 이른 말이다.
 


서태후는 한 가난한 한족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서 4세 때 양녀로 팔려갔다가 12세 때 다시 혜징의 시녀로 팔려갔다.

그후에 궁녀로 뽑혀갔는데 우연히 경극을 좋아하던 왕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맘에 들어해 그녀를 품었고 

아들 재순(동치제)을 출산하여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함풍제가 죽고 아들인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를 일소하고 동치제의 섭정이 되는데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 된 아들을 다시 광서제로 옹립하고 섭정이 되어 황실을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던 동태후와는 달리 국정의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쥐고 있었는데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강유위등과 함께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들을 부추켜 다시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만에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시키는 등 무술정변을 일으킨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이용하여 열강에 대한 선전 포고 이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서안으로 피신하였으나

북경 귀환 이후 정치는 대외적으로 굴욕적 외교로 돌아서게 되고 청왕조의 권위는 실추된다.




광서제가 죽고 마지막 황제 '푸이'를 왕위에 세운 후 그날 죽게 되는 서태후(1835~1908).

서태후의 초상을 보면 한눈에도 엄하고 강한 인상으로 중국을 쥐고 흔들만한 기상이 풍겨나오는데.....





북경 시민의 아름다운 휴식처 '이화원'은 바로 서태후의 여름 별장이다.

중국의 최대의 정원이며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황족 정원인 이화원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데

그 면적은 자금성의 4배, 천안문의 6배의 넓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피서와 요양을 위해 이화원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는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하여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 역시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처럼 수많은 관광객들로 문전 성시를 이룬다.

중국은 어딜 가든지 내국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는데
가는 곳 마다 중국의 인구 13억이 실감이 된다.





이화원을 둘러보기 위해서 인수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전각들 중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 눈에 뜨였다.

우리나라도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용은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용이 자는 곳에는 용마루를 둘 수 없다는 등 여러가지 의견도 있으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진바 없다고...






서태후가 정무를 보았던 인수전 전각 앞에는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주작 등 여러가지 동물의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고



 

정원에도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러가지 석물들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이화원의 3/4를 차지하는 곤명호(昆明湖)는 원래 평지인 곳을 파내어 만든 호수인데

인공 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주위가 8km인 곤명호를 일주하는 멋진 모양의 유람선을 타고 곤명호를 한 바퀴 돌면

이화원을 구경하느라 힘들어 배인 땀방울이
시원한 호수 바람에 금방 말라 버리며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 날아가 버린다.
 


 

호수 가장자리엔 군데 군데 조그마한 섬이 있고 그 섬을 아름다운 다리로 연결시켜 놓았다.

서태후는 밤이 되면 호수 안 작은 섬에 숨겨 놓았던 미남자들을 하나씩 자신의 궁궐로 불려들였다고 하는데

서태후와의 하룻밤을 보낸 미남자들은 소문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부하들에 의하여

그 다음날 아침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되었다고 한다.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萬壽山)은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만수산 앞의 산비탈길에 세워진 불향각은 높이 21미터의 거석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남쪽으로는 곤명호를 향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지혜해불전을 기대고 있어서 
이화원의 상징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수산 아래 위치한 장랑(长)은
전체길이 728미터에 총 273칸의 회랑으로

이어진 복도 건축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길며 유명한 회랑이다.

장랑에는 중국 각지의 화가의 그림 14,000 점이 장랑에 걸려있는데

중국 목조 건축물에 꾸며진 장식 예술인 이런 그림을 '소식채화'라고 한다.
 

그림의 주제는 자연과 동물, 인물 전기 등  중국 고전 문학의 내용에 등장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고 한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 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등 사치의 극을 달렸다.

또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제의 아버지는 광서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도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애기 엄마 두명은 목욕을 한 후

젖만 내놓고 몸을 붉은 천으로 감싼 후 다 감싸고 침대에 누운 서태후에게 무릎을 꿇고 젖을 먹였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중국어로 '쎈양'이라고 하는데

얼마전 인터넷에서 중국의 중학교 남학생 수십명이 미혼모 여학생을 협박하여

미혼모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면 모유를 달라고 협박하여 친구들이 공부하는 교실 안에서

여학생의 무릎에 누워 한가롭게 젖을 빠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일이 있다.

처음 여학생을 협박한 남학생은 다른 동료 남학생에게 젖을 빨게 해 주는 댓가로 돈까지 받아 챙겼다고.....ㅠㅠ
 
이런 인면수심의 흉악한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에게서 전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란의 청조 말기, 어떤 이에게는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던 반면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매몰찬 이름이었던 서태후.

무소불위의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서태후가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밟고 서서 만든 아름다운 정원 '이화원'은

지금은 수많은 평범한 북경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북경을 찾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리는 명소가 되어

중국의 관광 수익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으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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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이 끝난 월화 드라마 시장을 허리케인같이 강타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

남성들만이 전유하던 왕의 자리를 공주의 신분으로 도전하여 성공한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일대기를 화려한 색채감과 풍성한 에피소드 등으로 펼쳐갈 예정인데....


이제 겨우 초반일 뿐인데도 선덕여왕 시청에 대한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선덕여왕의 최대 정적으로 종횡무진 맹활약을 하는 미실 고현정의 화려한 등장으로 초반 세몰이를 하더니
아역 배우 남지현 및 외국인 단역 배우의 출연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3,4회에서도
시청률 20%를 가뿐히 제끼는 고공 행진을 하고 있다.



평소에 사극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는 아니었으나 선덕여왕은 방영 이전부터 특별한 관심을 갖고 기다렸는데 
이는 국내 드라마 중 처음으로 신라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주 무대는  바로 계림(경주).
드라마의 많은 부분이 촬영되는 미실궁과 화랑 산채, 화랑 연무장 등의 오픈세트가
신라 밀레니엄 파크 내에 개장되어 경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드라마에서 타이톨 롤인 선덕여왕 못지 않게 강력한 캐릭터는 바로 고현정이 열연하는 미실.
왕족과 화랑들을 비롯한 서라벌의 뭇 남성들을 손아귀에 넣고도 모자라 황후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신라 시대 최고의 팜므 파탈 미실의 존재는 주인공인 선덕여왕 못지 않는 캐릭터이다.
드라마의 제목으로 선덕여왕보다 미실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는 네티즌들의 많은 의견이 있었던 것처럼
미실은 이 드라마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드라마 중 많은 씬의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미실궁'이 궁금해졌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미실궁'....
'천년 고도'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미실궁 세트장은 지난 5월 14일에 오픈했다.



대나무 숲 저편으로 미실궁의 솟을 대문이 보인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위엄있게 서있는 홍살문 아래로 이어진 무지개 다리가 미실의 궁으로 인도한다.


무지개 다리 앞에 서서 궁을 바라보니 금방이라도 서슬이 시퍼런 미실이 걸어나올 것 같다.



잠시 정면에서 비껴 측면에서 연못과 무지개 다리를 살펴 본다.
아직 개장한지 얼마 안 되어 수련이 조금 엉성하게 자라있는 것이 맘에 걸리는데
드라마의 전개와 함께 이 연못의 수련도 점점 자라 무성해지겠지.


뒤로 좀 더 물러나 무지개 다리와 미실궁을 함께 잡아 보니 훨씬 더 안정감 있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무지개 다리를 지나면 높은 기단 위에 미실 본궁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계단을 올라 본궁 바로 앞에 서니 기둥과 인방의 화려한 장식이 눈에 확 들어온다.


서까래와 인방, 설주마다 화려하고 세밀한 문양을 그려놓았고


건물의 색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써서 위엄을 더해 주었다.
 


본궁에 이어진 건물은 제 1별궁인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주로 별궁에서 이루어진다.


본궁의 가운데 문을 밀고 들어서니 실내는 아무런 장식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문화유산 해설사이신 홍연무 선생께서 특별히 별궁 내부까지 안내해 주셔서 자세히 돌아볼 수 있었다.


별궁 내부도 천정과 설주, 인방에는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었으나 그외에 별다른 장식은 없었고 약간 썰렁하기까지 하다.드라마 촬영을 할 때마다 컨테이너 트럭에 커튼,카페트 등 소품과 기자재들을 잔뜩 싣고 와서 설치하는데

촬영이 끝나면 다시 모두 수거해서 차에 싣고 가버린다고 한다.


다른 드라마에 활용도 해야 하고 다음 촬영까지 그냥 두면 유실 우려도 있기 때문에 다 가져가는 것이리라..



실내에서 나와 본궁 기단 위에 미실궁 대문쪽으로 한바퀴 휘....둘러 본다.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제2 별궁이다.


 바로 반대편 제3 별궁에서 잡으면 아주 그림이 좋다.



제2 별궁은 방이 없이 회랑과 누각으로만 이루어진 건물이다.


제2 별궁의 누각 위에 서서 아래 연못이나 본궁, 맞은 편 제3 별궁을 바라 보는 정경이 평화롭다.


제2 별궁의 누각 바로 맞은 편 무지개다리 너머로는 제3 별궁이 자리잡고 있다.


제 3별궁 또한 ㄷ자 모양의 회랑과 누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연못을 양쪽에 두고 긴 회랑이 ㄷ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넓고 큰 회랑은 시원하기도 해서 앞으로 연회나 결혼식 장소로 대여하지 않느냐는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미실궁 세트장은 그다지 넓지 않으나 드라마에서의 좋은 그림을 위한 공간들이 구석 구석 숨어 있다.


산으로 난 협문에서는 배역들이 드나들거나 문 뒤에 서서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들을 찍는다.



병사 대신 문화해설사님을 세우고 한컷 찍어 보았다.


협문이나 정문이나 모두 붉은색으로 통일미를 주고 문양도 통일미를 주었다.


실내와 실외에 놓인 이색적인 모양의 등대도 눈에 뜨이고.....


기단석에서 솟아 나와 구불구불 흐르는 물길도 이색적이다.

미실궁에 대한 자상한 안내와 해설을 해주신 문화유산 해설사 홍연무 선생님께서 감사를 드리며
선덕여왕의 또 다른 세트장인 '김유신 화랑 산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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