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8.06.22 서울 전시 / 이다(2da)의 여섯번째 개인전 '불완展"(Incomplete Exhibition)/ 합정역 갤러리 앤케비넷 26
  2. 2017.12.21 서울 북촌 여행 /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9
  3. 2017.12.19 서울 고궁 여행 / 창덕궁 뮤지엄숍에서 불꽃 쇼핑을...... 13
  4. 2017.12.18 서울 북촌 여행 /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 추억의 시간 여행지 '서울교육박물관' 12
  5. 2010.09.01 경주 남산 칠불암, 벽안의 여승이 그린 소박한 기와 그림 39
  6. 2010.05.31 유채꽃 박람회의 환상적인 루미나리에 56
  7. 2010.01.28 범띠해에 살펴보는 우리 삶 속의 호랑이 39
  8. 2010.01.28 경주 박물관에서 만난 아프리카 부처 2
  9. 2010.01.27 방학숙제로 금관만들기 도전하세요~ 50
  10. 2009.10.19 선덕여왕에서 본 신라의 장신구 패션 55
  11. 2009.09.23 정조의 대전을 장식했던 책거리 병풍 37
  12. 2009.09.08 애정 표현 리얼 묘사한 국보 195호 34
  13. 2009.07.20 광고회사를 통째로 옮겨 놓은 박물관 뮤지엄큐 48
  14. 2009.06.18 왕자의 토기로 한잔 하실래요? 36
  15. 2009.06.11 '선덕여왕'에서 본 14면 주사위 주령구 30
  16. 2009.06.02 새가 되고 싶은 나무 , 솟대 8
  17. 2009.05.24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영상박물관 뮤지엄큐 4
  18. 2009.05.18 그라피티, 낙서인가? 예술인가? 18
  19. 2009.05.17 보물 제 904호는 Made in Greece 12
  20. 2009.04.11 인천 자유공원의 신나는 화장실 13
  21. 2009.04.06 이국적인 호반 미술관 아트 선재 20
  22. 2009.04.01 박목월을 만나는 동리,목월 문학관 4
  23. 2009.04.01 김동리를 만나는 동리,목월 문학관
  24. 2009.03.29 선조 임금의 서예 '적선(積善)' 7



필자가 애정하는 이다(2da)작가의 여섯번째 개인전인 <불완展>이

2018년 6월 8일부터 25일까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삐딱'님의 갤러리인 '앤케비넷'이 전시 공간인데요.





갤러리 2층으로 올라가니 조그마한 의자가 제일 먼저 맞아 주었습니다.

어쩐지 여기 앉아서 <불완展> 인증샷을 찍어야만 할 것 같더군요.





지난 토요일 작가 도슨트(dosent) 시간에는 동시에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전시장에 몰려왔다는데

주말이 아닌 평일에 찾아간지라 한결 조용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어요.


 



왜 <불완展>인가? 하는데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 줄 글이 제일 앞에 걸려 있었는데요.


누구에게든 흠집은 있다. 깨어진 부분도 있다.

이다의 여섯번째 개인전 <불완展>은

내면 자아의 부서지고 깨어진 흔적,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이다.


인간은 어떤 사고(accident)로 깨진 접시가 된 것이 아니라

본래 그리 타고 난 존재라는걸 말하고 싶어 깨진 접시를 그리기 시작했나 봅니다.





이다(2da)작가의 지난 전시에는 도록이 없었는데 이번 전시에는 도록을 출판한 것이 눈에 뜨였어요.

도록을 사는 것은 작가의 전시 작품을 모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얼른 도록을 손에 집어 들었는데요.

불완전 연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도록 맨 처음 부분에 쓰여 있었어요.


'불완전함(incomplete)에 대한 생각은 오래 되었다.

10년 전, 목회자인 아버지는 설교 중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깨진 접시와 같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지만

깨진 곳으로 어떤 것이든 금방 새어나가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 순간 나는 종교적인 의미를 깨닫기에 앞서 '인간은 깨진 접시' 라는 말과

그것이 품고 있는 강렬한 이미지에 사로잡혔다. 불완전 연작의 시작이었다.

-'불완展' 도록에서-


도록을 잠시 살펴 본 후 작품 하나 하나를 상세히 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불완展의 모든 작품은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이번 전시의 메인 그림인 <불완전. 완전>인데요. 

구름에서 내린 비가 깨진 컵 위로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깨진 접시가 만든 산 사이로 강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불완전 강산>

불완전한 깨진 접시들이 만든 강산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

불완전한 것들이 모여 있는 그림인데 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것일까요?





메인 그림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그림이 <불완전 테이블>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연물로 둘러 싸인 가운데 깨진 접시에 누워 있는 이다(2da)가 충격적이었는데요.

그림 마다 등장하는 깨진 접시에 대한 의문은 작가의 그림 설명에서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림 속의 깨진 접시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상징한다.

접시와 함께 등장하는 자연물. 즉 새, 늑대, 해, 달, 별, 구름, 번개, 비, 돌, 물,나뭇잎, 산들은

영원한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은 깨진 접시이며 자연물은 온전한 접시이다.

반대로 자연물은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없고, 인간은 스스로 깨어져 있음을 늘 인지하고 완전함을 갈구하는 존재이다.

-'불완展' 도록에서-





제일 큰 사이즈의 그림인 <불완전 세계>입니다. 

러프한 느낌이 너무 맘에 들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늑대까지 그려져 있어 좋았어요.

노출 콘크리트의 카페 벽에 걸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림이었는데요.

거실에 걸어두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사고 싶은 그림 1호로 찜했습니다.





<INCOMPLETE - 염원>

벨벳 끈에 묶인 두 손은 한 사람의 손일 수도 있고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해와 달, 산이 있는 완전한 자연 속에 마주 잡은 두 손은 무엇을 염원하고 있을까요.

그림 속에 담긴 의미도 의미지만 너무나 예쁜 그림이라 집에 걸어놓고 싶은 그림 2호로 찜했습니다.





<INCOMPLETE 플라스틱 플라워>

이다(2da)의 <불완展> 작품에서 자연물은 모두 완전함(complete)을 상징하지만

이 꽃은 플라스틱 플라워를 그렸기 때문에 불완전함(Incomplete)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INCOMPLETE - 풀밭 위의 점심 식사>

특이하게도 사각 프레임이 아닌 타원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 몇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접시와 테이블의 선명한 보색이 아주 맘에 드는 작품이었어요.





<INCOMPLETE - 지하 바다>





<INCOMPLETE - 불완전 공유>





<IINCOMPLETE - 낙원>

선악과로 추정되는 나무를 바라 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INCOMPLETE - 비 맞는 산>

깨진 접시가 이룬 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너무 귀여웠어요.





<INCOMPLETE - RED, BLUE>





<INCOMPLETE - MINT, PINK>





<담을 수 없는 비>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지만 깨진 곳으로 어떤 것이든 금방 새어나가 버리는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in INCOMPLETE>





<불완전 우물>

작은 사이즈의 그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어요. 불완전한 인간의 현실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더군요.





왼쪽은 <불완전 우물>, 오른쪽은<두개의 마음>인데요.

오른쪽 <두 개의 마음>은 면에 자수로 직접 수놓은 것이었습니다.





 <INCOMPLETE - 완전.불완전>, <깨진 접시가 별을 먹다>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린 왼쪽 그림 <INCOMPLETE - 완전.불완전>이 특히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불완전방>

유일하게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고 디지털 프린트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한쪽에는 도록 끝부분에 실린 동화<불완전 세계> 원판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불완전 세계>를 먼저 읽어보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해요.





불완전(INCOMPLETE) 연작의 아이디어 스케치들도 전시되어 있어 어떻게 작품 구상이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빛이 잘 드는 창가에 마련된 <불완展샵> 또한 전시장에 오는 분들의 발길을 붙잡는 곳이었는데요.

주머니가 가벼워 작가의 원화를 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기분 좋은 코너였습니다.





진열된 엽서를 여러 개 사서 따로 따로 액자에 넣어 벽에 장식하면 아주 멋질 것 같았어요.





원화 이미지로 만든 핀도 너무나 귀여웠는데요. 필자는 10개나 사서 백이나 옷에 달았답니다. 포인트로 안성맞춤이었어요!





자석도 되고 병따개도 되는 일석이조 불완전 자석도 선물용으로 딱이었구요.





길드로잉할 때 메고 다닐 수 있는 길드로잉 가방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다(2da)작가가 손으로 직접 밀어서 만든 실크 스크린 에코백도 마음에 들었는데요. 

원화가 새겨진 에코백을 매니 뭔가 모르게 간지가 나는 것 같더군요.  작가가 직접 만든 것이라 더더욱.





원화 이미지로 만든 책갈피도 있었는데요. 안에 자석으로 되어 있어 책장에 붙이면 딱 하고 들어붙는 것이에요.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이라서 선물용으로 구입하기엔 아주 좋더라구요.





이다(2da)작가의 작품으로 만든 핸드폰 케이스도 대표적인 굿즈(goods)였어요.

필자는 제일 마지막 <불완전 강산>그림으로 된 핸드폰 케이스를 주문했는데요. 집으로 배송해 준다고 해요.





지난번 전시에 나왔던 늑대 그림 핸드폰 케이스도 너무 멋지죠.





커다란 창 앞 테이블에는 이다(2da)의 원본 노트와 함께 그동안 출간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편안하게 앉아서 작가의 원본 노트를 얼마든지 오래 감상해도 되었어요. 작가의 원본 노트를 직접 만져 보는 감격스러움!

















아리랑 TV 다큐멘터리 '길, Drawing Tour with 2da'에서 그렸던 작업 노트 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작게 걷기, 끄적끄적 길드로잉, 리얼토킹, 내 손으로 발리, 내 손으로 교토, 내 손으로 치앙마이......등 

이다(2da)의 저서와 작업 도서 십여 권도 전시되어 있었어요. 심지어 2003년 출간되어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이다의 허접질, 무삭제판 이다플레이도 이곳에서 직접 살펴 볼 수 있어 좋았어요.





다른 전시와는 달리 '불완展"전시를 관람하러 오시는 분들은 전시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아주 길었는데요.

한 시간 이상 머무르며 작가의 세계에 빠져 드는 분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작가의 불완전한 세계와 자신의 불완전한 세계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던 <불완展>이었습니다.



완전한 해와 달, 별과 산과 구름, 그들을 바라보는 불완전한 너와 나.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불완전한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불완展 도록에서-



Copyright 2da.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작가의 허가를 받은 후 작품을 촬영하고 게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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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동 숙소에서 재동초등학교, 정독도서관을 지나 경복궁 옆길까지  북촌로5길을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아트선재센터가 있는 곳에서부터 소격동이네요.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이어지더군요.





길 옆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안내판이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정문도 담장도 없는 곳이었어요.

골목길을 걷다가 내키면 미술관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있고 

미술관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골목으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오설록 티하우스 쪽에서 미술관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종친부, 교육동, 전시동을 가르키는 팻말이 있더군요. 먼저 종친부 쪽으로 가보았어요.





현대식 건물 사이에 전통 건축물이 서 있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 조화롭게 보였어요.

미술관 가장 안쪽에 어른처럼 서 있는 이 건물은 왕의 친척들이 일을 보던 종친부 건물이라고 합니다.





종친부를 나와 교육동 건물 사이로 내려갔습니다. 

프레임 사이로 경복궁의 담장이 보이더군요.

전 이런 프레임을 너무 좋아합니다^^.





프레임 속에서 뒤를 돌아 종친부 건물을 보았습니다. 

현대적인 프레임 속에 서 있는 종친부 기와의 곡선이 참 아름답네요. 





프레임 속의 프레임......하늘도 너무나 푸르른 날입니다.





삼청로에 서서 교육동을 보았습니다. 건물의 유리창에 비친 비슬나무의 그림자가 그림 액자같이 보이더군요.

이 비슬나무 세그루는 수령이 170살이 넘는 나무로 왕실 뜰에 심었던 나무라고 합니다.

설계를 맡은 민현준 건축가가 비슬나무 세그루를 베지않고 유리창에 비치게 설계했다고 하네요.





종친부 앞에도 너른 마당이 있는데 관리동과 전시동 사이에도 너른 마당이 펼쳐져 있더군요.





미술관의 건물들은 너른 마당을 중심으로 빙 둘러 서 있었습니다.

미술관의 주인공이 건물이 아니라 마당인 것처럼 너르고 편안한 공간이네요.

바로 앞 자작나무들 위로 우뚝 솟은 종친부 건물! 그뤠잇! 이네요.





마당을 가로질러 전시동으로 향해보았습니다. 건물이 상당히 오래 된 것처럼 보이더군요.

연혁을 살펴보니 1913년 수도육군병원으로 건립되어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을 거쳐

1971년에서 2008년까지 국군기무사령부로 쓰이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2013년에 이르러 새롭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네요.





붉은 벽돌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더군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게 놀라웠습니다.





미술관 로비에서 바깥 마당을 바라보는 것도 참 좋았습니다. 정말 여유가 느껴지는 공간이었어요.





미술관 내부는 입장권 구입없이 누구나 들러볼 수 있지만 전시 관람은 통합관람권(4,000원)을 구입해야 했습니다.

갔던 날 임흥순<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요나스 메카스: 찰나, 힐긋, 돌아보다 전시가 열리고 있었어요.





전시장에서 나와 아트숍으로 가보았습니다. 너무 기발한 기념품이 많더군요.







미술관 카페테리아가 참 좋더군요. 오후 햇살이 따스하게 비추어 너무나 따사롭게 보였습니다.





다리도 쉴겸 미술관 앞 마당과 하얀 자작나무가 보이는 의자에 앉아 진한 커피 한잔하고 가야겠네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예술이 일상으로 들어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라 좋았습니다.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가까이 있다면 매일 매일 오고 싶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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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이나 박물관에 갔을 때 마지막으로 꼭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뮤지엄숍이지요.

특히 서울의 고궁이나 박물관에는 수준 높은 기념품들이 있어 여행객들의 눈을 홀리곤 합니다.

너무 너무 이쁜 기념품들이 많은지라 저도 모르게 스르르 지갑을 열곤 했었어요..

커피 한잔과 함께 했던 창덕궁 뮤지엄숍의 이쁜 기념품 사진 몇 장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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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마을 어귀 정독 도서관 앞에 서울교육박물관이 있어 들러보았습니다. 





구 경기고등학교 건물인 정독도서관 건물 중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을 박물관으로 만들었고 하는데요.

건물 자체가 등록문화재 2호 대한민국 근대유산이라고 합니다.

입장료는 따로 없었구요. 무료 관람으로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니 로비에 오래 된 교과서들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수신서, 초등지리서, 한글소리본, 초등 공민, 가사, 노래책......교과서 제목들이 참 생소했습니다.

 




로비 한쪽에는 문구점 등 피규어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보는 이들을 추억의 시간 여행 속으로 떠나게 해 주었습니다.





만국기를 걸고 소리 높여 응원하던 운동회 장면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오더군요.


 



기마전, 장애물 달리기, 2인3각......누구나 운동회 때 다 해 보았던 종목들이네요.





다른 한쪽에는 추억의 달동네를 재현해 놓았습니다.





정독상회 앞에서 구슬치기하는 아이들, 가게 앞을 지키던 멍멍이, 넝마주이 아저씨......





국화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면서 침 흘리는 아이의 표정도 리얼했어요.





오른쪽 특별전시실에는 학교가 재현되어 있고 교복체험도 할 수가 있더군요.





그리고 특별전도 함께 열리고 있었어요.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김란사라는 분인데요.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미국유학생이며 여성 중 인문계 최초의 학위를 받으신 분이라고 하네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스스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으로 유학 후

여성 교육에 온 힘을 다하는 한편 고종의 밀사가 되어 한일 합방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지만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요.

여성 교육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여성 김란사 특별전은 12월 말까지 열린다고 합니다.





로비 왼쪽은 상설전시실인데요. 전통기, 개화기, 민족저항기, 해방과 6.25전란기, 교육과정기로 나누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소풍도시락과 찐 계란, 환타, 칠성 사이다......고증이 참 잘 되어 있더군요.





부족한 것이 없이 자라 부모님 세대를 전혀 모르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들려보면 참 좋을 공간이더군요.

북촌 여행길에 들려보았던 서울교육박물관을 잠시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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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경주 남산을 오르면 살아 있는 신라가 그대로 보인다.
혹자는 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데.....



통일전 방면에서 시작하는 등산 코스를 통해 칠불암을 오른다.




조그만 암자 하나 달랑 있는 이곳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이곳에 국보 312호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있기때문....
동남쪽으로 향한 큰 바위에 삼존불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바로 앞에 솟은 사면 바위에 여래상이 한구씩 새겨져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관련 상세 포스트 : 경주 남산 7대보물 칠불암 마애조상군과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초보 답사기





마애조상군을 자세히 돌아보고 한숨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면
좁은 절 마당 울타리에 그림이 그려진 기왓장이 여러장 결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들과 그림 옆에 쓰여진 영어.
절에 전시된 기왓장 그림에 영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데.......



칠불암 마당에 전시된 이 기왓장 그림들은 이 칠불암에서 몇년간 수행했던 헝가리 출신 외국인 효공 스님이 그린 것이다.

효공 스님은 한국 스님의 알선으로 불법에 귀의하였고 10년전 출가하여 한국에 온지는  8년 정도 되었는데

행자 생활을 거쳐 경기도 어느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칠불암으로 오게 된 것이다.

효공 스님은 한국말에 능통할 뿐 아니라 상냥하고 친절하여 칠불암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늘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고 암자에 올릴 기와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그녀......

호기심 많은 등산객들이 한국에서의 스님 생활에 후회는 없는지.....고향의 가족들이 그립지 않느냐....이것저것 물으면
부끄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기만 하더라는 효공 스님.
모처럼 찾은 칠불암 산행에서 효공 스님이 안 보이기에 물어보니 이제 그녀는 다른 곳으로 수행하러 떠났다고 한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효공스님은 칠불암을 떠나고 없지만 그녀가 그린 그림은 지금도 칠불암 마당에 남아 그녀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효공 스님이 남기고 떠난 기왓장 그림을 소개해 올리자면.....







































기왓장 그림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녀가 가깝게 느껴진다.
훗날 남산을 오르다 혹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건네보고 싶다.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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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을 노랗게.. 노랗게 물들여서 보는 이의 가슴을 언제나 설레이게 하는 유채꽃.

경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산에 유채꽃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는 뉴스는 한참 전부터 들려왔지만

경주에도 지천으로 피어나는 유채꽃을 굳이 경산까지 가서 봐야해? 하며 무관심 모드로 일관하던 중에

박람회장에 밀랍 인형 , 테디 베어 등 각종 전시와 함께 루미나리에가 볼만 하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몇 지인들과 함께 경산 박람회장으로 향한다.




'대구, 경북 유채꽃 박람회 with Luminarie'는 지역민방 TBC 창사 15주년 기념행사로 개최되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박람회장은 다소 한산하기까지 하다.




이마트 경산점 바로 옆 '펜타힐즈'라는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 오만평의 너른 부지가 유채꽃으로 가득 찼는데




경주 같이 잘 가꾸어진 유채밭이 아닌지라 약간은 황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유채꽃보다 루미나리에에 더 관심이 가서 위로 올려다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내릴 듯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다.




아쉽지만 흐린 하늘이라도 배경 삼아 아직 점등되지도 않은 루미나리에를 이리저리 찍어본다.




잿빛 구름을 머리에 인 '하얀 루미나리에'는 '밤의 루미나리에'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데




노란 유채꽃과  잿빛 구름 사이의 '하얀 루미나리에'는 마치 어린 공주의 티아라처럼 순결해 보인다.




7시가 넘으니 루미나리에도 점등되고 하늘도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8시가 되니  "3,2,1....!" 입장객들의 카운트 다운과 함께 메인 광장의 루미나리에도 드디어 빛을 발하고

16만개의 루미나리에와 조화를 이루는 일루미네이션의 푸른 빛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휘영청 높이 뜬 달도 질새라....있는 힘껏 그 빛을 대지에 비추고




공주의 하얀 티아라도 색색의 보석으로 치장하여 더욱 화사하게 빛난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하늘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니 루미나리에는 더욱 강렬한 빛을 발한다.




검은 하늘 아래 오색영롱한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루미나리에.

눈 속에, 마음 속에 고이 고이 담아두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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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해 온 친근한 동물이다.
선사시대부터 오랜 세월 동안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 함께 공존해 왔는데
단군신화 속의 사람이 되고 싶었던 호랑이부터
시베리아 등지에 살아남아 있는 백두산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들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과연이 아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호랑이를 그림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사실은 울산 언양의 절벽에 새겨진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당시의 사냥 모습과 200 여점에 달하는 육지와 바다 동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선사인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울산반구대 암각화 재현품(국립경주박물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그림은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림인데 여기에는 10 여 가지의 줄무늬 호랑이와 점박이 표범의 모습도 남아 있다.
호랑이들은 마치 사람처럼 앉아서 한가롭게 쉬거나 그물에 잡혀 발버둥 치기도 하고
표범과 무리를 지어 유유히 이동하는 등 다채로운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반구대 암각화는 한반도에 등장한 호랑이를 표현한 최초의 예술 작품인 셈이다.



약 2천년전 사람들은 호랑이를 소재로 디자인한 청동제 허리띠 고리(일종의 버클)를 만들어 허리에 찼다.
경북 영천 어은동에서 출토된 가로 20.5㎝ 정도의 이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는 말 모양의 허리띠 고리와 함께 발굴되었다.
마치 스핑크스를 연상시키는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의 이 호랑이 모양 청동기는 북방계 청동유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토기 뚜껑에도 호랑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호랑이가 고개를 쳐들고 표효하는 모습이 소박하지만 예리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어 무척 현대적인 감각을 준다.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인 호형 토기도 눈길을 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표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두려워 접근하기 힘든 맹수의 모습이 아니라 어쩐지 친근감이 들어 가까이 하고 싶은 애완 동물과도 같이 보인다.



고구려 무덤 속에는 흰 호랑이 백호가 서쪽을 지키는 사신(四神)의 하나로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시대에도 능묘와 불탑 둘레에 호랑이를 포함한 십이지상(十二支像)이 배치되어 각 시간과 방향에서 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기쁨을 뜻하는 까치와 호랑이를 익살스럽게 그린 ‘까치호랑이그림’을 정월 초하룻날 대문에 붙였다.
그것은 정월이 인월(寅月), 즉 호랑이 달이기 때문으로, 새해를 맞는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까치호랑이 그림은 도자기나 민화 등에 잘 남아 있기도 하다.



18세기 조선시대 작품인 이 까치 호랑이 무늬 백자 항아리는 직선의 구연부에서 원을 그리듯 내려오다가 구연부와 같은 크기로 좁아지는 형태이다.
표면에는 까치는 호랑이를 내려다보고, 호랑이는 까치를 마주쳐다보는 '까치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호랑이의 우스꽝스러운 눈짓에 잔득 움츠린 까치의 모습이 재미있다. 
 


19세기 조선시대 작품인 백자 호랑이 무늬 왕사발에서 호랑이는 더욱 대담하게 표현되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곧추선 털.....그리고 구름 사이를 노니는 호랑이의 날렵한 몸매는 민간 신앙의 대상인 호랑이의 위엄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호랑이는 수렵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상징물로 표현이 되었다.
선사시대부터 아주 오랜 세월을 한반도의 인류와 함께 공존해온 우리 민족의 상징 동물 호랑이.
지금은 우리 땅에서 그 자취가 사라지고 동물원에서나 그 용맹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어서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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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창한 휴일날...경주 국립 박물관을 들려본다. 

 고고관, 안압지관...등 유물 전시관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니 참 날씨도 좋다. 

 하늘도 푸르고 날씨는 청명해서 박물관으로 온 관광객이 참으로 많다. 

 박물관 마당에는 이렇게 목이 없는 부처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8~10세기 경에 만들어진 석조 여래 좌상들이다. 

 왜 이렇게 목이 없는 부처가 많을까...

'전혀 다른 향가와 만엽가'를 저술하신 '정광선인글돋선생'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첫째,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불사 파괴와 야외 석조물 파괴 등(불두 파괴는 정체성을 파괴 시키는 행위이므로)

       궁궐에서도 이단을 몰아내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중종때 조광조의 소격서의 혁파이다. 소격전(도교 및 민간신앙)이 폐지된다.

 

둘째, 몽고 병의 신라 침입으로 황룡사 목탑이 불타고 곳곳에 절이 파괴된다. 

고려인들이 몽고을 몰아내기 위해 부처님이 불력을 이용하기 위해

       고려 속장경,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몽고병은 불상 파괴가 극에 달한다. 

 

셋째, 임진왜란 때 승병이 도처에 일어난다.

승병의 중심에 黨聚(당취,싸움하는 승려)가 있다.

서산대사를 비롯한 사명대사 ,영규스님 등이 당취이다.  

승병의 거처가 사찰이다.

왜병들이 사찰을 불지르고 파괴한 원인이 바로 당취와 싸움이었다.

        

넷째, 일제시대 메이지 유신이후 일왕을 신으로 추앙하는 시대가 온다.

일본에서도 神社 외 절의 석등 및 부처 파괴가 일어난다.

        일제 강점기에 전국 곳곳에 신사를 짓고 강제참배를 강요한다.

       남산은 특히 불교의 요람이다.

곳곳에 산재한 부처들을 철처히 파괴하는 행위가 이뤄졌을 것 같다.

(참조:http://blog.daum.net/kmb2274/17035203)

 

 하긴 고대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그리스,터키에도 가면 이렇게 목이 없는 석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는데
목이라는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가늘고 취약한 부분이라 더 쉽게 훼손이 되지 않았나....생각도 해 본다. 

  이렇게 목이 없는 부처가 외국 관광객들에겐 매우 신기한가 보다.
목 없는 부처를 발견한 한 무리의 외국 관광객...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 하더니 모두다 부처 뒤에 가서 머리를 얹고 기념 사진을 찍는다.
머리를 정교하게 땋아내린 이 여자분은 가나에서 온 관광객이다.
머리가 아주 이쁘다고 했더니 아주 좋아하며 만면에 웃음을 띄었다.  

 이 친구는 특히 더 시끄럽다.
나도 앞에 서서 이 재미있는 친구를 향해 사진을 찍으니
"Hey~~ I'm African Buddha~~!!"
라고 떠들어대면서 웃고 장난치며 너무나 즐거워 한다. 



 

 이 아프리카 부처 역시 가나에서 왔는데 이름은 'Samuel'이란 친구다.
사진을 부쳐 달라고 내게 자기 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가나에서 온 '짝퉁 부처'인 사무엘이
한국에서 여행하는 동안 즐거운 추억을 많이 가지게 되었으면 하고
경주에서의 좋은 추억도 오래 간직했으면 한다.
자기 얼굴이 한국 인터넷에 뜬걸 알면 더 기분 좋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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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신라의 금관.

그 화려함으로 인해 눈을 떼지 못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곤 하는데
우리 옛장인들의 솜씨를 볼 때마다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하곤 한다.

 박물관에서 금관을 처음 본 아이는 
"와...이거 정말 금이에요?"  "이거 대체 어떻게 만들어요..?" 라는 질문을 하곤 했는데
아이들의 호기심도 충족시킬 겸 얼마 남지 않은 방학 숙제로 금관 만들기에 도전해 본다. 

 신라 금관을 만들기 위해선 몇 가지 재료가 필요하다.
우선 금관을 본뜰 수 있는 얇고 넓은 금판이 필요하고 달개와 곱은옥, 금실과 금못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금관을 만들려면 수천만원의 비용이 들것이므로...^^
간단하게 마분지 몇 장과 금색 색종이로 금관 만들기가 가능하다. 

 고학년의 어린이가 가정에 있는 집에서 좀 더 퀄리티가 높은 금관을 만들고 싶으면
신라 금관 만들기 세트를 이용해서 좀더 정교한 금관을 만들 수 있다.
금관 만들기 세트는 국립 중앙 박물관 문화 상품 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며....

금관 만들기 세트를 바닥에 펼쳐놓고 금관의 명칭을 확인해 본다. 

 금관의 펼친 모양과 각 부분의 명칭은 위와 같다. 

 부품을 금색 마분지에서 떼어내기만 하면 되므로 가위로 오릴 필요도 없이 되어 매우 편리하다.   

 장식을 떼어내고 남은 마분지에는 금관 장식 부분의 모양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달개 하나 하나는 정성스럽게 떼어내어서 분실되지 않도록 종이컵에 잘 보관해야 한다. 

 금관의 장식 중의 으뜸은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 장식인데 그것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천연의 나무'를 상징한다. 

 달개(영락) 장식을 달기 위해 이미 뚫려 있는 구멍을 송곳으로 찔러 구멍을 좀 더 넓게 만들면 쉽게 달개를 달 수 있다. 

 달개(영락)과 곱은옥(곡옥) 장식을 달면 조그마한 흔들림에도 세움 장식이 파르르 떨려서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구리 철사를 달개에 꿰어 나뭇가지 모양 세움 장식에다 정성스럽게 매단다. 

 구리 철사를 달개에 꿰어 단 후 곱은옥도 예쁘게 오려서 구리 철사에 매단다.
이 때 달개가 쉽게 흔들릴 수 있도록 약간 헐겁게 철사를 매는 것이 포인트. 

 아이들에게 금관의 모양과 꼭 같이 만들게 하는 것도 좋지만 예쁜 모양으로 관테에 구멍을 뚫어도 좋고
남은 마분지를 이용하여 달개를 더 많이 만들어 붙이는 등 자기만의 창의적인 모양으로 만들게 하면 더욱 좋을 듯... 

  나뭇가지 모양 세움 장식 하나를 완성한 모습이다. 영 엉성하긴 하지만 기분이 좋다. 

  나머지 세움 장식도 꼭 같은 방법으로 달개와 곱은옥을 정성스럽게 장식한다. 

  달개와 곱은옥을 다 붙이면 세움장식을 스테이플러로 관테와 조립한다. 

 자기 머리 사이즈에 맞게 관테를 조립한 후 안에 세트에 들어 있는 자주색 테이프를 관테 내부에 붙이면 완성이다. 

 금관 완성이다. 금관에서 발하는 빛이 너무 강렬하다 보니
조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도무지 색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고 도리어 검게 나온게 흠이다.  

 남은 방학 중에 아이들과 가족들이 힘을 함해 신라 금관 만들기 체험을 한다면 역사 공부도 되고 가족간의 사랑도 더욱 넘쳐날 듯.....
 완성된 금관을 모두 머리에 써보면서 왕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본다면....
" 그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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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지세를 찾아나선 비담,
염종의 근거지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삼한지세를 찢어 
공을 접고 노는 춘추를 발견한다.
어이 상실한 비담, 피묻은 칼을 춘추의 목에 겨누자
망나니 공자는 "이거 니꺼야?" 되물으며 겁에 질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선덕여왕' 38회에서 소개되었던 이 장면은 선덕여왕 애청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시리라.
멋적은 듯한 웃음마져 너무나 샤방했던 춘추, 그의 귀에 떡하니 걸려 있는 커다란 귀걸이가 눈에 확 들어 오는데....

42회 방영분에서 덕만공주를 만나 화해하는 장면에서는 귀걸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데.....춘추가 달고 있는 저 귀걸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4세기 금귀걸이 (경주 월성로 가-13호 고분)

경주국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전시되어 있는 월성로 고분 출토 금귀걸이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매회 '선덕여왕'을 볼 때마다 덕만이나 미실, 미생, 춘추, 보량...등의 옷차림이나 장신구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데
그것은 필자가 장신구 등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인물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들이
실제로 국립경주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시품이기 때문에 더욱 친근감이 간다.

'선덕여왕'에서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는 단연 미실.

드라마에서 매회 마다 그녀가 선보여주는 의상과 화려한 장신구를 보는 재미 또한 쏠솔하다.

또 신라 최고의 플레이보이 미생의 한쪽 귀에 걸린 커다란 귀걸이도 우리의 눈을 끌기에 충분하고

춘추가 보량에게 귀걸이를 골라주는 이런 장면에서도 신라 귀족들의 복식에서 장신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미생, 춘추, 진평왕, 알천....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지배층은 남녀 모두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귀걸이를 착용했다고 한다.
비슷한 도안의 귀걸이를 착용함으로써 그들끼리는 자신들이 신라를 이끄는 지배층이라는 우월의식을 느끼려고 한 것이다.


신라의 귀걸이에는 신라인의 미적 감각과 최고조에 이른 금공예 기술이 녹아 있는데
전 세계를 통틀어 경주만큼 금귀걸이가 많이 나오는 곳도 없다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귀걸이 중에 유난히 고리가 굵은 귀걸이(태환이식,太環耳飾)들을 보면 
저렇게 굵은 고리를 어떻게 귀에다 걸까..? 무겁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을 누구나 하게 되는데
실제로 굵은 고리의 속은 텅 비어 있어서 보기보다는 무게가 가벼우며 가는 고리는 직접 귀에다 걸기도 했지만 
굵은 고리는 긴 금실을 꿰거나 가죽끈을 꿰어 귓바퀴에다 걸거나 관테나 모자에 장식했다.


또 드라마에서 미실이 자주 걸고 나오는 아름다운 귀걸이를 보면

금드리개 (경주 교동)

경주 교동에서 출토된 이 금드리개를 토대로 귀걸이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금드리개 (황남대총)

드리개(垂飾)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하로 길쭉한 나선 모양의 장식이 일반적인 형태로써 귀걸이와 유사한데
 금관이나 금동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관테의 둘레에 장식한 것이다.

금드리개 (경주 황오동)

금드리개 (경주 월성로)

황오동이나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런 금제 드리개는 요즘에도 응용될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분위기이다.

5∼6세기 금드리개  보물 633호 (황남대총)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15.5㎝의 이 금제 드리개는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드리개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작품이기도 하다.

반지는 남녀 모두 애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양손 모두에 끼었는데

 천마총 발굴 당시 널 안에 누운 부장자는 열손가락에 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들었는데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금령총의 반지는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 유리옥을 넣어 만들었다.
신라의 금반지는 오늘날에도 못 따라갈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팔찌도 역시 금, 은, 동, 옥으로 만들었는데 역시 남녀 공용으로 보통 양팔에 착용하였고 

한번에 여러 개를 차기도 하였다니 신라의 귀족들은 그 당시의 패션 리더였음이 분명하다.

3세기 유리와 비취 목걸이 (경주 황성동)

목걸이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류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장신구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목걸이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뼈나 뿔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후 구멍을 뚫어 가죽 등에 매달아 목에 착용하거나
돌이나 흙, 조가비, 고동 또는 동물의 이빨에 구멍을 뚫어 엮어서 착용하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는 천하석으로 만든 대롱옥과 곱은옥
,
둥근 옥 및 작은 구슬 등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5,6세기 목걸이, 황남대총 출토품

원삼국 시대의 무덤과 집터에서는 벽옥, 수정, 활석, 유리, 마노 등의 구슬을 이용한 목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그 중 남색 유리구슬 목걸이는 신라 고분 출토품의 주종을 이루는데
유리구슬을 몇 줄에 꿰어 중간에 금제의 장식금구로 연결하고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어뜨리는 형식이다.

4~5세기 금목걸이 (경주 월성로)

또한 왕족이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에는 금목걸이가 출토되기도 하는데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 목걸이는 금실을 고리로 만들어 사슬처럼 연결한 것으로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세련된 형태이어서 현대에 착용한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다.

금목걸이 길이 33.2cm (황남대총 남분) 국보 194호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는 금실로 엮어서 만든 금줄에 금제의 곡옥을 매달아 늘어뜨리는 양식인데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사슬 4줄과 속이 빈 금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곱은옥을 달았다.
경주 지역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곱은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곱은옥 등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걸작이다.
 


 3세기 크리스탈 목걸이. (경주 황성동)
 

금이 흔했던 신라에서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유리이다.
로만 그라스라고 불리우는 유리그릇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에서 생산되어 동쪽으로 확산된 실크로드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황남대총 출토 봉수형 유리병에 보면 파손된 유리병의 손잡이 부분을 금실로 감아 둔 것으로 보아 유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가 있고
중국의 옛 기록에도 '삼한인(三韓人)은 금, 은, 비단보다 구슬을 재보로 여겨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고 늘어뜨려 장식한다'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의 각별한 유리 구슬 애호 풍습을 전해 준다.
삼국 시대에 이르러 한반도에서도 유리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이때 가장 많이 제작된 것은 남색 혹은 감색의 유리 구슬이다.
때로는 유리 구슬을 금이나 금동 제품과 함께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구슬처럼 남색 구슬 표면에 작은 노란색 구슬을 박아 넣어 미적 효과를 더하기도 했다.
또한 유리 곡옥을 만들어 갖가지 펜던트에 활용하는 등 목걸이용 유리 구슬의 많은 양이 고분에 부장되었기 때문에
유리 목걸이가 삼국 시대를 대표할 만한 고분 출토품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5~6세기 상감유리구슬 목걸이 ,보물 634호 (미추왕릉 c지구 4호 고분)

윗 사진의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길이 41.6cm의 이 아름다운 색감의 목걸이는 
청색환옥과 마노환옥, 청색관옥, 수정, 홍색마노곡옥 등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옥구슬이 눈길을 끈다.


특히 하단부에 달린 지금 1.8cm의 유리 옥에는
녹색 물풀이 떠 있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16마리의 오리, 구름, 두사람의 인물이 상감되어 있는데
인물상은 얼굴 바탕이 백색이며 세부는 청색선으로 처리하고 입술은 빨간 칠을 하는 등 
신라인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 또는 지중해 부근에서 수입된 목걸이로 추정된다. 

6세기 금목걸이 보물 456호 (경주 노서동)

나뭇잎모양 날개가 달린 금구슬 70여개와 녹색 옥구슬이 조화로운 이 금목걸이(금제경식)는
신라 목걸이의 화려함을 대변해 주는 걸작인데
선덕여왕이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는 이 목걸이를 재현한 것이다.

6세기 가슴걸이 보물 619호 ( 천마총 )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실에는 이렇게 고분 출토 현장을 그대로 떠옮겨서 전시해 놓은 귀한 보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가슴걸이(경식)는 천마총 안의 널(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서 있던 것으로 보아 목걸이로 쓰였던 장신구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의 재료를 사용했는데 원래의 줄 외에 가슴 부근에서 좌우로 늘어지는 짧은 가닥이 달려있고
청색 유리옥과 금·은 제품이 여섯줄로 이어져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큰 곡옥이 매달려 있다.
이 가슴걸이는 목에 걸었을 때 전체가 V자형이 되는데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목걸이에 비해 매우 화려한 작품이다.

금제 허리띠(과대), 띠드리개(요패) 국보 190호 (천마총)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제 과대와 요패.  과대란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 길이 125㎝, 띠드리개(요패)의 길이는 73.5㎝이다.
과대는 뚫은 장식이 있는 44개의 판을 연결하였고, 주변에 9개의 구멍이 있어 가죽에 고정시키게 되어있으며 양끝에 허리띠 고리를 달았다.
과대에서 늘어뜨린 장식은 13줄로 타원형 금판과 사각형 금판으로 연결하였는데 과대와 요패는 널 안에서 허리에 착용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상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본 신라인의 장신구에 대해 소개해 보았는데
신라 장신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은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지라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기로 하고.....

박물관 전시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인들의 장신구는 현대의 장신구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더러
현대의 패션 리더들이 바로 착용하고 나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세련되고 정교한 디자인이 많다.
이 장신구를 현대의 장인이 그대로 복제하려고 해도 흉내내기 힘들만큼 신라인의 세공술은 뛰어났는데
이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게 되어 장신구가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유교 사상을 중요시 여기다 보니 상고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 은의 사용을 막았던 조선의 정책은 찬란했던 금, 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켜 신라의 장신구 세공술은 고분 속에서 잠자게 되니
이렇게 멋진 신라인의 장신구는 오늘날 박물관이나 드라마의 재현품에서 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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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그린 사극 드라마를 보면 일반 사대부의 집 사랑방 뒤편에는
어김없이 일필휘지로 써놓은 서예병풍이나 수병풍을 둘러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궁궐의 대전에는 어좌의 뒤에 해와 달, 그리고 다섯개의 산봉우리,
소나무 등이 그려진 '일월오봉병'이 둘러쳐져 있는게 보통인데
특이하게도 정조 치세의 드라마에서는 다른 왕들의 대전 풍경과는 사뭇 다르게

양쪽에 서가가 늘어서 있고 거기에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을 준 아니라

책거리(책가도,冊架圖) 병풍이 떠억 버티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책거리(책가도,冊架圖)란 여러 칸으로 나누어진 서가에 고동기(古銅器),도자기,꽃병과

서책,붓,벼루,연적 등 각종 문방구류를 진열한 모습을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책거리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된 시기는 18세기 후반 정조 때이다.


정조가 특별히 책거리에 대하여 애정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정조의 학문 진흥 정책과 연관이 깊다.

정조는 책거리에 대하여 직접 거론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또한 자비대령화원들의 시험 문제로 책거리를 그리게 하는 등 책거리와 관련하여

늘 책 속에서 살면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임금이 책거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자 고관대작들도 그 뜻에 부응해서 
당시 귀한 분들은 앞을 다투어 집안의 벽을 책거리 병풍으로 치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도 책거리의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임금으로부터 시작된 책거리의 관심은 당시 새로운 유행을 이끌었으나

아쉽게도 김홍도의 책거리는 고사하고 정조 당시의 책거리는 한 점도 알려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하는 책거리는 화원 이형록과 장한종이 책거리로 이름을 떨친 19세기의 작품들이다. 

 


 사진의 책거리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된 책거리(책가도,冊架圖)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기물들은 당시 문인들이

고동기 등 진귀한 문물들을 수집하며 보고 즐겼던 취미를 보여주는데

이 책거리 그림은 화면을 가득 채운 책가에 책과 기물들을 배치하고

다섯번째 폭 상단에는 인장을 그려 작자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 책거리는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책거리 그림 화가인 이형록(1808~ ? )의 화풍과 유사하나

인장의 글씨가 불명확하여 작자를 확인할 수는 없다.



조선 후기부터 그려졌던 우리나라의 책거리 그림은

중국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다보각경(多寶閣景)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림은 진귀한 골동품과 문방구류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투시도법과 명암법을 사용하여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조선 후기의 학문 숭상 사상을 대변해주는 책거리....

항상 책을 곁에 두고 읽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들을 기억하며

책거리 속에 그려진 다양한 수집품을 하나 하나 구경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일 듯 하다. 


올린 사진은 국립 중앙 박물관 유리 안에 있는 병풍을 찍은 것이라

사진의 상태가 고르지 못한 것을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라오며....  
  

 

책거리(冊架圖)

작자 미상

19세기 조선,비단에 채색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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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국립 박물관 신라실에는 목 부분에 토우가 장식된 특이한 모양의 항아리가 있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되어
국보 195호로 지정된
이 항아리의 정식 명칭은 '토우장식장경호'이다.




높이 약 34cm의 5~6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토우 장식 항아리는 신라실 전시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고고히 자리잡고 있어서
전시관을 둘러 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모은다.



토우란 '흙으로 만든 인형'을 말하는데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으로
장난감이나 애완용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오늘날 출토되는 것은 대부분
주술적 의미나 무덤의 부장품인데  이 항아리처럼 토기의 표면에 장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항아리는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의 계림로 16지구 30호분에서 파손된 채로 출토된 것을 수리하였으며 결손된 부분도 있다.




토우의 장식을 자세히 살펴 보면...
신라금을 연주하는 여인의 모습이 앞 부분에 보이는데 여인의 배가 부른 것으로 보아 아이를 임신한 모습이다.
이것은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금을 연주하는 여인 바로 앞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 거북이가 있는데
현재보다 짧은 생을 살아야했던 고대인들에게 장수는 당연한 욕망이었으리라...




그리고 옆으로 보면 뱀이 개구리의 다리를 물고 있는데 개구리는 수많은 알로 번식을 하는 동물인 만큼
구리처럼 다산하기를 원하는 고대 신라인의 의식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뱀은 고대 신라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뱀이 성장하면서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인간도 죽음의 옷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싶은 염원이 잘 나타나있다.
그리고 목과 몸체에는 세로로 다섯줄의 무늬를 연속해서 넣고 사이에는 동심원을 연속해서 넣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이 적당히 비추어서 농사가 잘 되라는 풍요를 상징한 것이다.




그런데 거북이,신라금 연주하는 여인,개구리,뱀 옆으로 다소 민망한 모습의 토우가 보인다.
엎드린 자세의 사람 형상이 보이는데 이건 또 무엇인지....




허걱.....!  이.....것......은......
민망스럽게도 한 여인이  엉덩이를 내밀고 엎드려 있고 뒤에 남자의 형상이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여인은 다리를 벌리고 엎드려 이른바 후배위 자세를 취한 채로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으며
그 뒤로 머리와 오른 팔이 부서진 남정네가 팔뚝만큼 굵게 과장된 성기를 내밀며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는 평균 수명이 짧았던 고대인으로는 종족을 보존하는 일이 가장 신성한 일이었던 만큼
임신한 몸으로 신라금을 연주하는 여인의 토우와 같이 다산을 기원하고자 하는 소망에서 표현한 것이리라.
성의 결합은 새 생명의 탄생이며 이는 곧 죽은 이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런데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 여인의 얼굴 표정을 보면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라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성행위 장면을 리얼하게 표현했는데도 전혀 외설스럽지 않도 해학이 저절로 묻어나오는 모습이기에....

이와 같이 토우는 무덤의 부장품으로써 고대인의 소망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영생과 부활,자손의 번창,풍요라는 절절한 기원을 담아 의식을 치르듯 토우를 빚었던 것이니
고대인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소망이나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별로 없는 듯 하다.

토우는 능청스러운 듯 하지만 밝고 상쾌하다.
단순하지만 세련되고 기교적인 듯 무심하다.
작은 흙덩이에 꿈틀거리는 생명을 부여한 신라인의 손재주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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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뮤지엄 큐>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경주에 자리잡은 <뮤지엄 큐>는 우리나라 유일의 광고영상박물관.

3천여점의 기자재, 700 여점의 광고작품 외에도 만 여점 이상의 귀중한 자료를 수집보관하고 있는
이 박물관이 서울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벌써 수백만 관람객을 돌파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경주에서도 울산으로 가는 길 한적한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경주 사람들도 "뮤지엄 큐...? 그런 박물관도 다 있는교..."하는 형편.


개관 초기 부터 뮤지엄 큐에 몇번이나 다녀온 필자.
여러번에 걸쳐 관람하고 촬영한 사진을 2회에 나누어 포스팅한 바 있다.


이 뮤지엄 큐의 1층 이벤트 홀에는 화장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아모레 퍼시픽관과
초창기의 진기한 영사기, 오디오, 라디오, TV, 핸드폰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디어관.
초창기의 광고에서 현재의 광고까지 전시해 둔 광고 역사관, 공익 광고 전시관,해외 우수 광고 전시관 등이 있다.

그리고 2층에는 광고 회사 회의실을 그대로 재현해 둔 광고 회사관.
우리나라 광고 회사의 역사와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 광고 제작 과정등이 소개되어 있고
한켠에는 코닥 시사실, 오디오 비쥬얼룸 등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공간은 '광고 제작 스태프 디오라마 전시관'
복잡한 광고 제작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다.


실제 광고 관련 인물 50인을 모델로 제작하여 한눈에 보기만 해도 쉽게 알수 있는 인물도 있는데
광고 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디오라마로 자세히 살펴 보면......


스토리 보드 작화 / Artist
영상 광고의 아이디어를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작화하는 전문가
이호범 / 프리랜서


작곡가 / Composer
영상 광고에 맞는 음악이나 광고 노래를 작곡하여 만들어내는 전문가
김도향 / 작곡가 겸 가수


코디네이터 / Coordinator
전 세계를 무대로 촬영지 선정 및 섭외, 스태프와 특수 작업 전문가들을 연결해 주는 국제 전문가
이현재 / 마린 프로덕션 호주


캐스팅 / Casting
여러 계층의 출연자들을 성별, 연령, 직군 별로 분류하는 책임자
심명희 팀원 / 캐스팅 나우


캐스팅 매니저 / Casting Manager
영상 광고에 작합한 출연자를 섭외 또는 선정하여 제작팀에 추천하는 섭외 전문가
심명희 / 캐스팅 나우


왼쪽: 광고 모델 / Model
광고의 출연을 전문으로 하는 모델
서정민 / 모델 겸 TV 탤런트

오른쪽 : 의상 전문가 / Styiist
출연자의 의상과 각종 액세서리를 활용, 작품 패션에 맞게 전체적인 코디를 책임지는 전문가
김영덕 / 프리랜서


메이크업 / Make-up
출연자의 얼굴과 피부를 영상 효과에 맞게 분장과 관리를 해주는 분장 전문가
김미애(왼쪽) , 김명숙 (오른쪽) / 프리랜서


광고 모델 / Model
광고의 출연을 전문으로 하는 모델
김혜자 / 모델 겸 TV 탤런트


강아지
'고향의 맛 다시다'광고에서는 개,닭,소 등 가축이 출연하여
농촌 분위기 조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


헤어 전문가 / Hair Make-up
출연자들의 헤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헤어전문가
조용환 / 니킨 토쿄


미술 감독 / Art Directer
세트의 기획, 제작, 배열 그리고 전문적인 코디네이션을 책임지는 전문가
오세충 / 스튜디오 큐빅


조리사 / Cooking Artist
각종 식자재를 활용하여 촬영에 적합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조리 전문가
박흠자(왼쪽) / 프리랜서


소품 담당 / Props
촬영에 필요한 여러가지 소품, 모형, 작동구들을 준비 관리하는 책임자
김한수 팀원 / 붐 프로덕션


프로듀서 / Producer
제작 기획으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감독과 함께 전과정을 책임지는 전문가
김한수 / 붐 프로덕션 감독


감독 / Director
작품의 전체적인 연출을 책임지는 전문가
윤석태 / 전 세종문화 감독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네요..^^)


조명 기사 / Artist Lighting
조명 기자재와 각종 효과용 기구의 설치 및 교정, 조명 기구의 이동 및 배선을 책임지는 전문가
이한규 팀원 / 라이팅 뉴스


촬영 감독 / Director of Photo
영상 광고의 분위기, 움직임, 톤 등 촬영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책임지는 촬영 책임 전문가
강창배 / 강스크루

35mm표준 카메라
렌즈 및 필터를 교환하여 다양한 영상을 촬영하는 표준형 기본 카메라
1초에 기본 24프레임에서 4배속까지 촬영 가능함


정사진 / Still Camera
영상을 제외한 여러 광고 사진을 만들기 위해 촬영하는 정사진 전문가
장영준 / 세영 스튜디오


녹음 감독/ Sound Director
촬영 현장의 출연자 대사나 현장 효과음을 촬영과 동시에 녹음하는 동시 녹음 책임 전문가
정해욱 / 베스트 사운드


영상 에디터 / Video Editer
각종 영상 소재들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 길이와 순서를 정하여
아이디어와 주제가 잘 살아나도록 하는 편집 전문가
윤명섭 / 서울 비젼스


기술 감독 / Technical Director
선택된 영상 소재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기술적인 문제를 도와주는 편집 기술 전문가
장선일 / 서울 비젼스


성우 / Radio Actor
녹음을 위해 분위기에 맞게 정해진 대본을 읽어가는 성우
 

 녹음 기사 / Engineer
여러 채널에 수록된 자료들을 복합하여 하나의 완성 작품을 만드는 녹음 믹싱 전문가
박수부 팀원 / CM 매니져


녹음 기사 / Mixing Engineer
영상 광고의 아이디어를 살려주는 각종 효과음의 믹싱 전문가
김벌래 팀원 / 38 오디오


효과 / Effector
영상 광고의 아이디어를 살려주는 각종 효과음의 제작 전문가
김벌래 / 38 오디오


이처럼 우리 곁을 알게 모르게 몇초간 스쳐지나가는 간단한 광고 하나에도
수십명의 사람들의 손길과 엄청난 노력이 깃들여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초간의 짧은 시간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광고의 세계.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광고 그 자체로도 눈이 즐거운 광고 영상이 너무나 많다.
즐겨보는 드라마를 기다리는데 광고가 너무 많이 나오면 사실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필요없는 광고가 너무 많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화를 내는 것 보다

그 광고 이면에 들어있을 여러 사람의 노고와 내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찾아 보면서
광고 자체를 한편의 멋진 영상 작품으로 보고 즐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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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아하고 정교한 토기를 본 적이 있으신지......







국보 91호인 이 '기마 인물형 토기'는 1924년 경주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에서 발굴한 것이다. 

금령총은 6세기, 다시 말해서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쯤의 신라 무덤인데

지하에 목관과 곽을 만들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두껍게 덮은 무덤이다(적석 목곽분이라고 한다).






항공 사진으로 금령총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황남대총,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이 길너머로 보이고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이 노서리 고분군(서봉총이 있는 곳), 봉황대,금령총이 있는 곳이 노동리 고분군이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보물 제338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는데

금관테에 출자(出字) 모양 입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입식 2개를 세우고 곱은옥은 달지 않았다. 

아래로는 금방울,달개 등으로 꾸민 드리개가 달려 있어서 고분에 금령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금령총 내부에서 금관 외에도 금제 허리띠, 유리잔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여겨지는데 

특이한 점은 금령총의 금제 허리띠의 길이가 다른 것과 달리 무척 짧은 것으로 보아

어쩌면 무덤의 주인은 일찍 죽은 왕자였을지도 모른다고.....






1924년 금령총 발굴 당시의 생생한 사진에서 현장감이 느껴진다.




기마 인물형 토기는 말을 탄 사람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숨은 기능이 있다.

이 토기는 신라 왕실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데 쓰이던 주자(注子,주전자)인 것이다.

말 등의 깔때기로 액체를 넣고 말 가슴의 대롱으로 액체를 따르게 되어 있다.







당연히 말 내부는 비어 있어 물 240cc 정도를 담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위의 엑스레이 투시 사진에서 기마 인물형 토기의 속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은 이처럼 말을 이용한 독창적인 주자를 만들었는데 왜 말을 디자인에 응용했을까...

이는 말이 죽은 자를 하늘로 인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경주 덕천리 출토 기마 인물상을 비롯하여 






경주 미추왕릉 지구 출토 서수형 토기와 같이 옛무덤에서는 말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이 토기와 함께 하인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기마 인물형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손에 방울을 들고 있어서 앞장 서서 하늘로 주인을 안내하는 듯 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출토 당시의 사진 기록에서 실제로 발견 당시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여 있었던 걸 볼 수 있다. 








어려서 죽은 왕자가 말의 인도를 받아 하늘에 도달해서도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편안하게 시종의 호위를 받으면서 살 것을 기원하여 그런 부장품을 넣어 장사지냈으리라....



죽은 왕자의 내세를 위해 무덤에 함께 넣었던 기마인물형 토기.

왕자의 유체는 흙이 되어 흔적도 없어졌지만 기마인물형토기는 엊그제 만든 것처럼 그대로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 복제품이나마 들고 한 잔 술을 따라 마시면

"거 인생 참 무상하구나..."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올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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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드라마를 잘 안 보지 않던 필자, 
요즘 [닥.본.사]하고 있는 드라마는 바로 선덕여왕.

선덕여왕의 주 무대인 경주에 살고 있는 필자인지라 
드라마에 나오는 대부분의 내용은 모두 너무나 친근하기만 하다.

선덕여왕 6회에는 진평왕이 연회에서 여흥을 즐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진평왕이 "자~! 이제는 내 차례구나..주령구를 던져라!" 고 명하니 시녀는 희한한 모양새의 주사위를 왕 앞에서 굴린다.
시녀가 주사위를 굴리자 나온 글씨는 '음진대소 (飮盡大笑)'.


"음진대소라... 하하하....자, 모두 잔에 술을 따라라 !"
진평왕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다 마시곤 껄껄 소리내어 크게 웃자 좌중의 신하들도 따라서 크게 웃는다.


드라마에서 나온 희한한 모양새의 주사위는 바로 '주령구(酒令具)'이다.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시에 출토된 참나무 주령구에는 
14면 각각에 술 마실 때의 다양한 벌칙이 쓰여져 있어서 우리의 시선을 끈다.

주령구를 보는 박물관 관람객들은 특이한 모양새와 면마다 적힌 벌칙을 보고 신기해 하는데
왜 하필 주사위를 14면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기존 주사위가 6면 밖에 없으니 좀 더 많은 면이 나오도록 궁리하다
정육면체의 모서리 8개도 각각 면이 되게 깎아서 14개의 면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고
정육면체 주사위를 가지고 수많이 던져 놀다가 닳아버린 모서리들에 각각 면을 만들어 글자를 써넣다보니
6+8=14 이렇게 14면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한다고....





주령구의 각면에는 쓰인 다양한 벌칙들을 보면 그 당시 신라인들의 풍류적인 음주 문화를 엿볼 수 있는데 
4각형인 여섯면에 쓰인 벌칙을 보면.....

1.금성작무 (禁聲作舞) : 소리없이 춤추기
2.중인타비 (衆人打鼻) : 여러사람 코 두드리기
3.음진대소 (飮盡大笑) : 술 한잔 다 마시고 크게 웃기
4.삼잔일거 (三盞一去) : 한번에 술 석 잔 마시기
5.유범공과 (有犯空過) : 덤벼드는 사람이나 별난 짓으로 골려도 가만히 있기
6.자창자음 (自唱自飮) :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6각형인 여덟 면의 벌칙 또한 재미있기 그지 없다. 


7.곡비즉진 (曲臂則盡) : 팔뚝을 구부려 다 마시기
8.농면공과 (弄面孔過) : 얼굴 간질러도 꼼짝 않기
9.임의청가 (任意請歌) :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시키기 
10.월경일곡 (月鏡一曲) : 월경 한 곡조 부르기 (달이란 여자에 관한 내용일 듯..)
11.공영시과 (空詠詩過) : 시 한 수 읊기 
12.양잔즉방 (兩盞則放) : 술 두 잔이면 즉각 마시기
13.추물막방 (醜物莫放) :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14.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 스스로 괴래만(밤 늦게 곤드레 되어 들어오는 모양새)으로 부르기


이 주령구를 던지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신라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날에도 이런 14면체 주사위를 만들어 던지며 술자리를 한다면 얼마나 풍류가 깃든 모임이 될까...
14개의 벌칙을 오늘날에 맞게 현대적으로 살짝 바꿔서 친구들과 한잔 하실 때 써보시길 바란다.

[현대판 주령구 벌칙]
1.금성작무 (禁聲作舞) : 음악없이 춤추기
2.중인타비 (衆人打鼻) : 옆 사람한테 코맞기
3.음진대소 (飮盡大笑) : '원샷'하고 크게 웃기
4.삼잔일거 (三盞一去) : 석잔 '원샷'
5.유범공과 (有犯空過) : 통과
6.자창자음 (自唱自飮) : 노래 부르고 '원샷'
7.곡비즉진 (曲臂則盡) : 옆사람과 '러브샷'하기
8.농면공과 (弄面孔過) : 간지럼 참기
9.임의청가 (任意請歌) : 다른 사람 노래 시키기
10.월경일곡 (月鏡一曲) : 달 들어가는 노래 한곡 부르기
11.공영시과 (空詠詩過) : 시 한 수 읊기
12.양잔즉방 (兩盞則放) : 받은 술잔 남겨놓지 말고 빨리 돌리라.
13.추물막방 (醜物莫放) : 못난이 흉내내기
14.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 최신 유행가 부르기






신라인의 풍류와 놀이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귀한 유물 '주령구'
현재 경주 국립 박물관 안압지관에 전시되어 있는 주령구는 사실 '복제품'이다.
1975년 출토된 진품은 '안타깝게도' 유물 보존 처리도중 전기 과열로 일순간에 불타 버렸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출토된 적 없는 단 하나의 주령구.....
단 한순간의 실수로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유물을 잃어 버리다니....
천년 이상 안압지의 뻘 속에서 그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가 출토되자 마자 소실되어 버린 이일은
우리나라의 문화재 보존 수준을 다시 한번 짐작케 하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천만 다행으로 발굴 직후 남겨둔 전개도와 컴퓨터 단층 촬영,정밀 사진을 통해 재현을 해내어 다시 박물관에 전시하긴 했지만
숭례문의 예처럼 한번 소실되어 복원된 문화재는 더 이상 조상의 손때가 묻은 귀한 유물이 아니라는 점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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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목 이일주(始牧  李一柱)님의 솟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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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울산 가는 도로로 접어들어 통일전을 지나 왼쪽으로 보면
폐교가 된 내동 초등학교 부지에 새롭게 웅장한 건물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광고의 역사와 광고 제작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우리 나라 최초의 광고 영상 박물관이다.
이름하여 뮤지엄 Q.......
 


 
 2006년 4월 26일 개관하였으나 아직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실물 크기의 큰 코끼리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정원을 지나 

입장권을 사서 박물관의 문을 밀고 들어가 본다.
 


 뮤지엄 큐는 3천여점의 기자재 전시와 700여점의 광고작품 전시 외에도

1만 여점으로 추산되는 귀중한 자료를 수집 보관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광고영상박물관이다.
 

 
들어가서 오른쪽 이벤트홀에는 한국화장품 광고의 50년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AMORE PACIFIC관이 있다.
  

 
광고를 통해서 과거와 현대를 비교 짐작할 수가 있는데 포마드는 요즘의 헤어젤,

ABC 파라솔 크림은 썬크림, 백정제는 화이트 크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평양화학에서 ABC 화장품을 출시했던 듯...1959년도 광고이다.
 


 본 전시관으로 처음으로 World of Communication Hall을 만나게 되고
  

 
인류의 의사 전달 방법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알수 있는 미디어 역사관에는

초창기의 진귀한 영사기,오디오,라디오, TV,핸드폰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어지는 한국 광고 역사관에는 신문, 잡지, TV, 라디오, 옥외광고 등 500여점의 광고 작품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는데
   


 1886년 한성주보에 실렸던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가 전시되어 있는데 문자로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후 급격히 발전한 광고는 만화 형식을 보이는데

1907년 '만세보'에 실린 염색약 광고에는
"이 물감은 빛도 곱고 드리기도 좋은 상등물감이니 사다 드려보시오
이 물감은 빨아도 빠지지도 않고 벗지도 아니하는 참 좋은 물감이요"라며
만화의 인물들이 염색약을 사다 써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1910년에 벌써 칼라 광고가 도입되었음을 볼 수 있고
 


 1914 년의 담배 광고에는 여인이 담배를 손에 들고 피우는 모습이 만화 형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1931년의 거북선표 고무신 광고에 보면

"가짜 거북선표가 많사오니 속지 마시고 거북선표를 사실 때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거북선 상표에 물결 바닥을 사십시오."라는 경고문을 써서
자사 제품의 우수성 홍보와 함께 그 당시에도 유사품이 많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자세히 뜯어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광복 이전의 광고들과
 

 


 6,70년대 광고에서는 우리나라 기업 제품 광고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박카스,금성 선풍기,사리돈,판피린,아로나민,비오비타,훼스탈,OB 맥주....
 

 

 
오리온,스타 치약....지금도 있는 제품과 없어진 제품.....등

우리나라 기업의 흥망 성쇠도 광고를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대가 흘러 현대의 우수한 광고 작품 바로 뒤에는 미래에 만들어질 광고가 차지할 부분을 비워두는 센스까지......
 


 한국 광고 역사관을 지나면 공익 광고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1980년부터 현재까지 대표적인 공익 광고 작품들을 전시해 두었다.
 


 또 해외 우수 광고 전시실엔  매년 세계 각국의 광고제 수상작들로 교체 전시가 되고 있고

모니터를 통해서 각국의 우수한 광고작을 동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6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TV-CF에 출현했던 모델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 모습이 지금과 많이 변해 구분하기 힘든 사람들도 많은데

누구의 얼굴이 보이시는지...?
 

 
2층 전시실은 더욱 흥미로운데
광고 회사 회의실을 그대로 재현해 둔 공간인 광고 회사관에는
우리나라 광고 회사의 역사와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 제작 과정 등이 소개되어 있고
우수 광고 작품을 소규모로 상영하는 KODAK 시사실,
단체관람객을 위한 우수광고 상영 공간인 250석의 오디오비쥬얼룸 등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은 광고 제작 스태프 디오라마 전시관.
 

 
50인의 실제 인물을 모델로 제작하여 
 

 
보는 재미와 배우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적혀 있는 모델의 이름을 보지 않더라도 이렇게 한눈에 척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 외 동아제약,태평양,CJ,KTF 의 광고를 찍는 촬영장의 축소 모형도가 2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로마에서의 라네즈 광고 촬영 현장 축소 모형. 


 
다시다를 찍은 광고 현장 축소모형.

상세하고 긴박감있는 촬영 현장의 묘사, 광고의 연출을 맡은 여러 스텝들의  표정,
친구의 무등을 타고 탈의실 내의 모습을 담너머 몰래 구경하는 청년들까지....
얼마나 정교하게 제작되었는지 하나하나 들여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류의 역사 속에 남겨진 과거는 흘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늘이 잉태되고 또 내일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모태가 되는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광고는 그 시대의 문화이며 그 시대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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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graffiti)는  벽이나 지하철 등에 낙서처럼 긁거나 휘갈겨 쓴 글씨 또는 그림을 이르는데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고
고대의 동굴 벽화, 이집트의 상형 문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그라피티는 1960년대 후반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뉴욕의 브롱크스를 중심으로 건물 벽이나 지하철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구호와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힙합(hip-hop) 문화와 결합하면서 확대, 발전되었다.
그라피티를 다른 말로 태깅(Tagging)이라고도 하는데,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작품을 완성한 뒤
자신들의 이름이나 별칭을 그려넣은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라피티는 초기에 인종주의· 고립· 환경오염· 정체성 상실 같은 사회 비판에 뿌리를 두었지만,
최근에는 신변 잡기적인 부분에까지 작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그라피티는 뒷골목 범죄자들의 낙서로 폄하되던 지위를 벗고
유럽과 미국 도시에서 친숙한 거리 미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전에 유럽 여행 중에도 고속도로나 도시 곳곳에 그라피티가 자리잡고 있는걸 수없이 많이 보았는데
이렇듯 그라피티가 예술로서 뿌리를 내린 데는 미국 태생의 세계적인 화가 장 바스키야의 공이 컸다.
(장 미셀 바스키야 관련 포스트 : 28세에 요절한 천재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야)

  그러나 아직도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을 롸이터(Writer,낙서쟁이)라고 부르는 등
크라임 형태로. 또는 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 취급받고 있으며
안티 그라피티(Anti-Graffiti)도 있을 정도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국에서도 역시 그라피티 문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피티는 소수 마니아에 의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은 한적한 시골 국도변 나들목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지방에서 보기 힘든 그라피티라...반가운 마음에 사진에 담아 보았다.
아직 미완성작인지 휘갈기다 치운 그림도 많았는데....
이 그림을 보시는 여러분에게도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라피티.....낙서인가? 예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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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보물 제 904호는 Made in Korea 가 아니다.

외국의 문화재가 국보나 보물이 되는 경우가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보물로 지정된 외국 문화재는 10 여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 고대 청동 투구는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경기대회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은 것인데....


바로 이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는 국내 최초로 마라톤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겨 버린 일제강점기인지라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는 태극기 대신 부끄러운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소식은

국민들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과 피 끓는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등극하였을 뿐 아니라 또 하나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 고대 청동 투구인 것이다. 
 

 



이 높이 21.5㎝의 청동 투구는 기원전 6 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에 의해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 발굴되었다.






형태를 보면 머리에 썼을 때 두 눈과 입이 나오고 콧등에서 코끝까지 가리도록 만들어졌으며 

머리 뒷부분은 목까지 완전히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눈과 입의 노출을 위해 도려낸 부분과 목과 접촉하는 부분에는 윤곽선을 따라 실을 꿸 수 있도록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투구 안쪽에 천을 대어 머리에 썼을 때 완충 효과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코린트식의 투구는 머리를 완전히 덮고 있기 때문에 명령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결정적인 결점을 지녔고

또한 무겁고 무더워서 여름철에 부적합한 약점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후의 그리스의 투구는 귀 부분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손기정 선수의 전리품이자 우리 국민의 희망이었던 그리스 고대 청동 투구는
주권을 잃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 탓에 오랜 기간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베를린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1986년, 그리스 부라딘 신문사의 주선으로
독일 정부는 청동 투구를 우리나라에 반납하게 되었으니 50여 년 만에 드디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강대국 박물관의 소장품 중 많은 유물은 식민지 시대에 부당한 방법으로 긁어 모은 것이 많으나

우리의 이 청동 투구는 자랑스런 전리품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보물 904호가 된 것이니

국립 박물관을 관람할 기회가 있으신 분들은 꼭 이 그리스 청동 투구를 마주 대하여 서서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손기정 선수의 위대한 투혼을 만나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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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화장실을 더러운 공간이라 말했던가....

젊은 미술학도들에겐 화장실도 창조의 공간이다.

이런 화장실에서 배출의 세계를 경험하면

휘파람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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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이란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 제목 만큼은 내게 참 낭만적으로 들렸던 기억이 있는데

여기에 지극히 낭만적인 미술관이 있다.

 

경주 보문 호반에 위치한 아트 선재 현대 미술관은

온 천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루는 환상적인 장소에 위치하고 

멋드러지게 지은 미술관 외관과 전시실이 수준급인 미술관인데

무엇보다도 더욱 추천할 점은 이 미술관이 흔하지 않은

'현대 미술 전문 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이란 점이다.

이 곳은 서울 삼청동의 아트 선재보다 훨씬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미술관 맞은 편 야외 조각 공원에  상설 전시된 조각품도 아주 볼만 하다.

 

 

 

1991년 개관 이후 지방 미술관으로는 보기 드물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전시되었는데

그 중 손꼽을 만한 전시로는

워홀과 바스키아의 세계, 신비의 나이브 미술전, 임멘도르프전, 칼더전, 보테로전,

장 피에르 레이노, 트레이시 모펫전, 야요이 쿠사마전,중국 현대 미술전......헥헥....^^

 

사진으로만 접해온 뜨고 있는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맘껏 감상할 수 있어서

지방에 사는 문화적 소외감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아트 선재의 소장 작품도 만만치 않은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들은

역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들이다.

 

 

유명한 현대 미술 작품을 줄줄이 전시하다가

대우 그룹의 부도로 인하여 자금줄이 막힌 아트 선재...

지금은 현저히 유명 작품 전시 유치가 줄었으나

그래도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봄 나들이에

이 멋진 미술관 관람은 꼬옥 하고 돌아가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실내의 전시 미술 작품은 촬영이 어려워 미술관 주변 조각 작품들을 소개한다.

 

  

남자와 여자 /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뚱뚱한 모나리자를 그려 유명한  콜롬비아의 화가이다.

바로 며칠 전까지 서울 오페라 갤러리에서 '페르난도 보테로와 앤디워홀전'이 열렸다.

 

 

보테로의 모든 그림과 조각은 마치 엉덩이에다 빨대를 꽂고

있는 힘껏 바람을 불어 넣어 빵빵해진 모습같이 보인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보테로의 작품과 미술 세계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에 자세히 소개해 드릴 예정이고..

 

 

한국 1(Korea 1 ,Vice Versa) 1991 /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berman)

 

 

 

 성 트로페즈(St. Tropez)  Steel Painted Brown / 안토니 카로(Anthony Caro)

 

 

  

해율 (Ocean's Rhythm -83.B) ,1983 Marble / 강태성

 

 

작품 0. 93-6-0 ,Bronze / 최만린 

 

 

스틸 워터 칼라 # 19 "중국의 달" (Steel Watercolor # 19 "China Moon") 1990 Steel /

플레쳐 벤튼(Fletcher Benton)

 

 

 

자화상 / 장 피에르 레이노 (Jean-Pierre Raynaud)

 

 

장 피에르 레이노는  자금성에, 일본에,프랑스 퐁피두 센터에...대형 화분을 설치하는 등

평범한 화분에 숨길을 불어 넣는 이색적인 작가인데

얼마 전에 하나 은행 광고에 실린 화분 그림으로도 유명한 작가이다.

 

  

퐁피두 센터의 조각은 이 작품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직육면체 위에 금빛 화분이 하나 덜렁 올려져 있던데....

오랫 동안 쳐다보아도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 설치 조각을 자화상이라고 했는지가 짐작이 가진 않았다.

 

 

태양의 춤 (Dance of the Sun),1991 알루미늄 / 존 헨리 (John R. Henry)

 

 

 

 

확산공간(Expanded Space) 1990 (Bronze) / 이종각

 

 

 

 

현대 미술 작품도 감상하고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도 즐기고.....

아......그리고 야외 조각 작품은 관람료도 없으니 일석 삼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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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 동리목월 문학관. 

 

  

석굴암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곳에

우리 문학의 거두인 김동리,박목월 두 작가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로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동리 문학관, 오른쪽엔 목월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지난 번 김동리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데 이어 이번에는 박목월에 대해 조명해 보기로 한다.  

 

 

1915년 1월 6일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에서 아버지 박준필과 어머니 박인재 사이의

2남 2녀 중 맏이로 출생한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泳鐘)이다.

 

 

아버지 박준필은 당시 경주군 수리조합(토지개량조합)의 이사였고

대구로 나가 중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유지였다.

어머니 박인재는 목월이 보통학교 4학년 되던 해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신앙은 이후 목월의 정서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목월의 할아버지인 박훈식은 개화의식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개화의식은 목월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그 때까지 집안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젊은 며느리가 성경책과 찬송가를 옆에 끼고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놀라운 것은 며느리의 교회 출입을 허락해준 시아버지 박훈식의 관대함이다.

그의 선각자적인 개화의식이 거기 뚜렷이 투영되어 있다.

어린 목월은 그러한 집안에서 법도 있는 사랑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난 것이다. 

 

  

목월은 1923년에 건천 보통학교를 , 1930년엔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고

계성학교 재학 중인 1933년 동요 '통딱딱 통짝짝'과 '제비맞이'가

각각 '어린이'지와 '신가정'지의 현상에 당선되어 동요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다.

 

1935년, 계성학교를 졸업한 목월은 경주군 동부 금융 조합에 취직하게 되는데

1940년에는 산그늘,가을 어스름,연륜 등의 글이 '문장'지에 추천됨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그 이후 1946년에는 '동시집' '초록별' '호랑나비''산새알 물새알'등의 창작 동시를

 

 

1948년에는 창작 동화집 '눈이 큰 아이'를 간행하는 등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한다.

 

 

그의 동시들은 유년지향의 시,생명 지향의 시,향수의 시,동시 언어의 확대가 특징이다.

 

 

목월 문학관의 전시관에는 그의 저서 및 유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목월이 편집일을 보았던 '여학생'지와

 

 

1951년의 동시집 수제본에서부터

 

 

초기의 시집 청록집(1946), 산도화(1955)...

 

 

후기의 시집들......

 

 

그의 창작욕을 짐작할 수 있는 수많은 육필 원고들도 전시되어 있다.

 

 

또 목월의 이력서와.....

 

 

중앙대학교와 한양대학교 재직 시절의 월급 봉투도 보이는데

그는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로 취임해 1976년 문리대학 학장을 지냈다.

 

 

뻬곡하게 쓰여진 그의 강의 노트에선 반듯한 성격이 미루어 짐작되고....

 

 

 생전의 모습이 담긴 앨범들..

 

 

문인들과의 조우..

 

 

여러분의 친필이 담긴 부채.

 

 

문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

 

 

그의 집필에 도움을 주었던 연필, 만년필,파일롯트 잉크..

 

 

그가 수집했던 우표책 등 여러가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목월 문학관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그의 서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데

 

 

원고가 이리저리 흩여져 있는 앉은뱅이 책상과 한쪽에 놓인 흔들의자는

선생이 방금 전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잠깐 자리를 비운 것만 같다.  

 

 

목월의 초기 시에 나타난 '향토적 정서'는

고향 경주의 문화재와 자연 환경을 통해 형상화된다.

 

 

"나는 늘 혼자였다. 사무가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거리랬자 5붐난 거닐면 거닐 곳이 없었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의 산천과 하늘 뿐이었다."

목월은 산문 '나와 청록집 시절'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목월의 글은 매우 서정적이고 자연지향적이다.

 

  

초기의 대표작인 '나그네', '윤사월','청노루','산도화'....

이런 작품들은 매우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노래하였는데

짙은 서정성과 함께 우리말의 리듬을 아름답게 살려내었다.

 

 

또한 목월이 노래하는 자연들은 이전의 우리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아름다움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가 노래하는 자연은 목월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자연이요, 아름다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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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토함산을 차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 아래로

 '동리,목월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는데.... 

 

 

석굴암을 찾는 관광객들이 대부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곳에

우리 문학의 거두인 김동리,박목월 두 작가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왜 동리,목월 문학관이 있나....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지만

동리,목월이 다 경주 출신이라는걸 알면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일 듯.... 

신라 문화 지킴이이신 햇빛님과 함께 '동리,목월 문학관'을 둘러 보았다.

 

 

김동리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벽에 붙어 있는 대형 사진이 정겹게 다가온다.

 

  

고독이 무서웠던 아이 동리(본명 시종(始鐘))는 어머니가 42세 때 얻은 막내였다.

먹을 젖이 부족했던 아이는 3세 때부터 아버지가 드시고 난 술찌꺼기를 먹고 늘 비틀대었고

6세 때에 '내가 달라면 주고 때리면 맞아주었던' 소꿉 친구이자 첫사랑으로 생각한 선이를 잃고

이어 사촌 남순누나의 죽음의 충격으로 평생 죽음이란 명제를 화두로 삼게 된다.

어머니를 닮아 키가 작았던 동리는 계절마다 이름모를 병으로 앓아눕기가 일쑤였고

혼자 산과 들을 배회했던 우울한 소년이었다.

20세 초반에는 잠시 출가의 꿈을 가졌으나 가부좌가 되지 않아

승려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시와 소설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1941년 화랑의 후예 당선 후 경주에서 소설가 이기현과 함께...

 

 

 동리는 야학을 통해 만났던 진주 사범 출신의 김월계와의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동리의 두번째 여인은 동화통신사 여기자였던 손소희.

그녀는 '혜성'이란 잡지와 다방 '마돈나'를 시작하며 김동리와 급격히 가까워졌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동리로서는

 손소희와의 사랑을 전혀 불륜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부인을 두고 손소희와 따로 살림을 차리게 된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손소희는 세번이나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는데

김동리는 김월계와의 이혼이 성립된 1966년경부터 또 다른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  

자신에게 순종하며 오직 자신만을 쳐다보는 소녀의 존재를 찾고 있었던 것.

 

그러던 중 24살의 작가 서영은을 만나 파문을 일으키는데 손소희는 그들의 사랑을 용서하고 덮어준다.

그래서  손소희는 남편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서영은에게 거처할 곳도 마련해 주고

 동리는 서영은을 일주일에 한 번씩 찾는 두집 살림을 다시 하게 된다.

서영은은 숨겨진 여인으로 25년을 지내다 손소희 사후에 세째부인의 칭호를 얻게 된다.

 

 

기념관에는 그의 손때 묻은 그의 유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창작의 도구가 된 만년필과 안경이며.....

 

 

즐겨 피우던 담배 파이프와 문인협회 주소록.

 

 

동리의 손목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시계들.

 

 

김동리의 부채작품.

 

 

동리의 문방구.

 

 

수많은 낙관들도 볼거리다.

 

  

 펼쳐진 동리의 사진첩에는 육영수 여사의 모습도 보인다.

 

 

 선생의 다이어리.

 

 

 김동리는 다이어리에 정초에 찾아오는 세배객들의 선물 목록을 잊지 않으려 기록해 두기도 했다.

 

 

방명록도..

 

 

겉장이 너덜너덜해진 서라벌 예술 대학 재직 당시 강의 노트.

당시 그가 가르치던 모든 제자가 등단하여 문인이 된 사례는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그의 육필 원고들.

 

 

퇴고의 흔적이 원고마다 나타나 있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을 잘라 스크랩해두기도 했다.

 

 

잡지에 게재되었던 그의 평론들.

 

 

 빛 바랜 도서 출판 계약서도 눈에 뜨인다.

 

 

동리의 대표작인 황토기,무녀도

 

 

 김동리 소설집 황토기.

 

 

을화는 영문판 뿐 아니라 독어 번역판도 발간되었다.

 

 

한쪽에는 둘째 부인 손소희의 썬글라스와 여권, 그리고 손소희의 출판 기념 방명록도 전시되어 있다. 

 

 

만화가 들이 그려준 동리의 캐리커쳐는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었고....

 

 

 노년의 김동리의 초상화에 쓰인

'山花水鳥皆知己" 란 글귀가 인상적으로 와 닿았다. 

자연의 모든 것이 다 동리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었으리라.

 

 

방으로 꾸며진 전시실에는 문갑이며 소장품, 모필들이 생전에 쓰시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선생이 쓰시던 책상 위에는 방금이라도 글을 쓰다가 일어나서 나간듯 원고지와 볼펜이 놓여져 있었는데

여기서 한국 문학사를 빛낸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동리 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 

.

.

글귀의 뜻은 무엇일까....

동리의 마음을 느껴 보며 한참이나 사색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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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선(積善)'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명문가에 거지나 나그네가 밥이나 잠자리를 얻으러 자주 왔는데

      주인 마님은 그들을 한 번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거지가 온 것을 보고 따로 상을 차려 밥을 먹였다.

      걸인의 밥상일망정 마님은 그릇조차 놋주발에다 밥을 담아 정성껏 대접하게 했건만,

      거지가 가고 난 상을 보니 놋주발이 없어졌다.

      거지가 훔쳐 가지고 도망간 것이다.

      마님이 하인한테 보고를 받고 보니,

      주발을 가져간 거지는 급히 도망을 치느라고

      뚜껑은 미처 챙기지 못해 빠뜨리고 간 것을 알았다.

      마님은 하인에게 말했다.

      "뚜껑이 없으면 그 주발을 어디 갔다 팔아 먹어도 제 값을 받지 못 할 것이니

      어서 이 뚜껑을 가지고 나가 그 사람을 찾아서 마저 가져 가라고 주어라."

      그 거지가 개과천선하여 새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바 없지만

      이 집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출세하여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아래 작품 '적선(積善)'은 국립 박물관에 소장된 선조 임금의  글씨다.

      굵고 강한 필획이 당당한 큰 글씨의 해서체인데

      이런 큰 글씨는 선조 임금의 딸 정명 공주의 글씨에도 또한 영향을 끼쳤다.

 

      예로부터 임금의 업적과 함께 임금의 글씨는 소중히 여겨졌는데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특히 선대왕의 위업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승한다는 자세로 역대 임금들의 글씨를 보존하였다.

      조선의 임금들은 모두 서예를 사랑했던 까닭에,

      글씨들은 모두 각각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인간 군왕의 면모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적선(積善)'

      선조 임금이 백성들에게 가장 실천하고 싶었던 덕목이었는지도..... 

           
                                           적선(積善)
                                        국립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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