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랜드 마크, 비엔나의 살아 있는 역사,
비엔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심장으로 비유되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





12세기 중반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340년에 완성된 비엔나의 자랑 슈테판 성당의 외관과 상세한 내부 모습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포스트에서 상세하게 소개해 드렸으니  확인해 보시길 바라며.....





오늘은 슈테판 성당의 상징과도 같은 남쪽 첨탑에 헉헉거리며 올라가서 본 비엔나 전경을 소개해 드릴까 한다.





슈테판 성당의 남탑은 137m의 높이로 비엔나 어디서나 볼수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이다.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남탑은 비엔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등대와 같아서 
시내에서 방향을 잃으면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보고 길을 찾아오면 될 정도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멀리 나갔다가 다시 비엔나로 돌아올 때에 
슈테판성당의 남탑이 보이면 비로소 집에 돌아온듯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고 하면서 

남탑에 '슈테플(Steffl: Old Steve)'이라는 애칭을 붙여 부르며 사랑하고 있다.

비엔나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하는슈테플인지라 간혹 이 첨탑을 기어 올라가서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브리엘 자츠버거라는 청년은 1658년 황제의 비엔나 개선입성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남탑 꼭대기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며 황제를 환영코자 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황제의 입성 행렬은 지체가 되었고 날은 어두워 저녁이 되어버려
그 청년은 남탑 꼭대기에서 기다리다가 내려오기도 전에 어둠을 맞게 되었다.
청년은 두려움으로 밤새 남탑에 매달려 지내야 했는데 날이 샌 후에야 사람들이 사다리를 놓고 청년을 구출하러 올라갔다.
놀랍게도 겁에 질려 밤을 지샌 청년의 머리칼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부터 무모하게 남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사람은 머리칼이 하얗게 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슈테판성당의 남탑에 직접 올라보기 위해 성당 뒷편에 위치한 조그마한 문으로 들어선다.
슈테판 성당을 관람하는데는 입장료가 없지만 남탑에 올라가려면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도 3.50유로나......





북탑은 남탑보다 훨씬 낮은 60m의 높이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
137m나 되는 남탑은 순전히 계단을 통해서만 위로 올라갈 수 있다.





발 하나 겨우 올릴 수 있을 정도의 좁고 어두운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본다. 하나.....둘....셋....... 





백 쉰 하나, 백 쉰 둘, 백 쉰 셋.......헥헥.......땀이 비오듯 오르기 시작한다.






군데 군데 낙서들과 조그마한 창틀들이 있으면 멈추어서 사진도 찍어보고......




 
이백 스물 일곱, 이백 스물 여덟......@.@ 아이고 다리야......계속 뱅글뱅글 올라가니 머리까지 아파 온다.





으음....이런 곳까지 와서 낙서를 휘갈기는 사람들이 있구나.





여기도 낙서....저기도 낙서.....성한 벽이 안 보일 정도로 낙서 일색이다. 그래도 한글 이름이 없어서 다행이다.





삼백 열 하나......삼백 열 둘.....
어.....! 정신이 혼미해서 계단 수를 얼마까지 세었는지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에라......! 계단 수 세는건 포기해 버리고 계속 올라간다......
헥헥헥헥헥헥.....땀 삐질 삐질 삐질 삐질.......흐른 땀이 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빙글빙글 계단을 돌다보면 나타나는 문양들이 너무나 아름답다. 어둠을 뚫고 비추는 햇살도 너무나 반갑고......





한참이나 오르니 이렇게 햇살이 환하게 비친다. 다 왔나 보다...하고 좋아했더니 아직도 더 올라가야 한다.





이제 다 와 가는건가? 평소에 운동 좀 해둘껄......어두운 계단을 하염없이 뱅글뱅글 오르자니 정말 정신이 혼미하다.





지상에서 72m 지점에 이르면 이렇게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한때 화재 감시를 위한 소방대가 주둔했었다고 한다.  물론 이곳에 근무하던 소방대원들도 모두 걸어서 올라갔다고.......





지금은 소방대원은 없고 텅빈 공간에 조각상들만 비치되어 있다.





히잡 쓴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길래 황망하게 한 컷......





드디어 전망대의 문이 보인다. 만세~~~!!!!


탑 위 전망대의 공간은 비교적 좁은 공간이다.  올라가면 사방이 확 트여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아서 약간은 실망이다.
첨탑 위인지라 조그마한 기념품 샵과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하나가 전부인 좁은 공간이다.





기념품들은 비엔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것들. 가격은 비싼 편이다.





전망대의 벽에도 이곳을 왔다 간 세계 각국 사람들의 낙서가 잔뜩......손이 닿을 수 있는데까지 열심히 써놓았다.





훤하게 트여 있으면 좋으련만 안전을 위해서 창을 작게 내었나보다.
조그마한 창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려면 앞 사람이 물러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창을 통해 밖으로 내다보니 와아.....!
비엔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저 아래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마치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25만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성당 지붕의 모자이크 타일도 손에 잡힐 듯 하다.
저멀리 왼쪽에 교회처럼 뽀족한 첨탑을 갖춘 건물은 비엔나 시청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얀 쌍둥이 첨탑은 보티프 교회(Votivkirche), 
가운데 초록색 돔을 갖춘 건물은 성 베드로 교회(Peterskirche)이다.





정문 양쪽에 서 있는 이교도의 탑을 줌인해서 보니 장식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정교하다.
성당 바로 아래에서 올려볼 때에는 그 모습을 잘 파악할 수 없었는데......






멀리 보이는 보티프 교회(Votivkirche, 봉헌교회)를 향해 줌을 당겨보았다.

마치 하얀 레이스를 늘어뜨린 것처럼 가늘고 아름다운 쌍둥이 첨탑이 너무나 아름답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암살 미수 사건을 감사하여 그 동생 멕시코 황제 페르디난도 막시밀리안이 세운 교회인데
1879년에 봉헌된 이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네오-고딕 건축물 중의 하나로 꼽힌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비엔나에는 가끔 직사각형으로 된 건조한 빌딩들도 군데 군데 보이지만 대부분은 5층 이하의 건물들이 많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좁고 어두운 계단을 뱅글뱅글 돌아올라올 때는 "왜 사서 이런 고생을 하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발 아래 펼쳐지는 비엔나의 기품있는 건물들을 보니 왜 슈테판 성당이 비엔나의 랜드마크로 불리우며
비엔나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지가 실감이 되었다.

오를 때는 정말 '개고생'이지만 꼭대기에 오르면 성취감과 아울러 비엔나를 발 아래 두는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비엔나 슈테판 성당 남탑 전망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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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브룬 궁전과 함께 비엔나의 랜드마크라 불리우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을 찾아 보았다.

비엔나 구시가지 중심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슈테판 성당 앞에 이르니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 아래 성당의 위용이 정말 대단하다.




전체적으로 성당이 침침해 보인다. 야간 조명이 약해서 그런가? 
자세히 살펴보니 성당 전면과 남탑 일부가 공사중이라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아름다운 슈테판 성당의 완벽한 모습을 대할 수 없어 약간은 아쉬웠지만
유럽의 많은 유명 성당들이 대부분은 언제나 보수공사 중인걸 많이 보았던지라 여기서도 그런가 보다....할 수 밖에 없었다.





12세기 중반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340년에 완성된 슈테판 성당은 초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나,
1359년에 고딕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실내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비엔나 사람들은 이르기를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이 비엔나의 영혼이라면
슈테판성당(Stephansdom)은 비엔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심장이라고 말한다.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전쟁의 포화도 견디어낸 슈테판 성당은 그야말로 비엔나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밤늦은 시간 도착하여 외부만 둘러보고 간지라 다음날 낮시간에 다시 성당으로 가보았다.
입을 다물지 못 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와 함께 밤시간에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지붕의 사라센 문양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남탑으로 올라가는 출입구 앞에 선 남녀가 너무나 왜소하게 느껴질 만큼 성당의 규모가 크다.
멀리서 찍지 않으면 제대로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 없는지라 성당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보이는데로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본다.

















성당 외부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성당 정문으로 들어가 본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 정문은 '
거인의 문'(리젠토르: Riesentor)이라고 부른다.
문의 이름은 '거인의 문'이지만 문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문으로 들어가니 성당 입구 벽의 문양이 참 특이하다.
돌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마치 노끈을 정교하게 엮어서 세워둔 것 같이 보인다.





슈테판성당은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 미사를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시절 성가대원으로 활약한 곳이기도 한 곳 답게 엄청나게 큰 파이트 오르간도 눈에 뜨인다.




중앙 제단 뒷편에 있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2차 대전의 포화 중에서도 손상을 입지 않고 온전히 보존이 되었다.





슈테판성당의 성직자들은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유리창을 떼어 지하 카타콤(지하묘지)에 숨겨 두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중세 건축의 당시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당 천정을 줄 지어 떠받치는 큰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뜨이는 기둥은 망토를 걸친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석상이다.
특이한 것은 성모의 망토 안에 여러 사람의 얼굴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모의 망토에 싸여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석상은 
'
보호의 망토를 입은 성모(Madonna with the Protective Cloak)'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조각품이다.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내장을 비롯해서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트(씨씨)의 내장 등 합스부르크 왕조 인물들의 내장들이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다시 성당 바깥으로 나와 이번에는 높이 솟아있는 탑들을 살펴본다.



늘 흐리고 잔뜩 찌푸린 비엔나의 겨울 오후에도 가끔 이렇게 파아란 하늘이 드러날 때가 있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이고 있는 지붕 장식은 하나하나가 다 정교한 예술 작품이다.








정문 양쪽에 서 있는 두개의 탑은 모양이 이교도 사원의 탑과 흡사하게 생겨서 '이교도의 탑'이라 불리운다.





슈테판 성당의 뒷편에 있는 탑은 각각 남탑과 북탑이다.
비엔나의 랜드마크인 남탑이 완성된 것은 1359년이었고
1450년, 프레데릭 3세 황제 때에 북탑의 건설이 착수되었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독수리탑이라고도 불리우는 북탑은
남탑의 장엄함에 비추어 규모면에 있어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남탑과 대칭하여 세우려 했던 북탑은 1511년에 꼭대기에 르네상스 스타일의 장식만 추가된채 공사가 중단되었다. 
137m인 남탑에 비해 북탑의 높이는 60m로 규모가 훨씬 작지만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남탑에 비해서 북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올라갈수 있다.
전망대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종인 품메린(Die Pummerin,큰 종)가 있는데 무게는 21톤이나 된다고......




슈테판 성당의 자랑은 뭐니뭐니 해도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137m 높이의 남탑이다.
비엔나의 사방 어디서나 볼수 있는 남탑은 마치 등대와 같아서 
시내에서 방향을 잃으면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보고 찾아오면 될 정도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슈테판성당을 보고 이제야 비로소 집에 돌아온듯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고 하며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슈테플(Steffl: Old Steve)'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하고 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비엔나의 랜드마크 슈테판 성당.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다는 137m 첨탑의 343개의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가서 찍은 사진은
다음 포스트에서 소개해드리길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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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인가......분당에 장애인종합복지관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일이 기억난다.

장애인종합복지관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이유인즉 장애인 집단 시설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고
무엇보다도 장애인들이 주변에 많으면 아이들에게 정서적,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장애인들이 아이들에게 정서적 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건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이렇듯 전혀 위험하지도 피해를 주지도 않는 장애인 복지시설 건립에도 주민들의 반대가 대단한데
만일 우리 지역 한복판에 화장장이나 공동묘지를 세운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결사항쟁하는 것도 모자라서
삭발을 하거나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열혈지사도 생길지도 모른다.
장례의 모습을 아이들이 보는 것이 정서상으로 좋지 않다는 주장을 하는 학부모들이 많겠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기 동네에 혐오시설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게 가장 큰 이유일 듯 싶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비엔나(빈, Wien)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 공동묘지가 들어서는 것을 환영한다.
우리와 장묘 문화가 확연히 틀리는 이곳의 시민들은 자기 집 뒷마당에 공둉묘지가 있는 것도 별로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23개구로 구성된 비엔나 시내에는 무려 46개소의 공동묘지가 있어
비엔나를 방문하는 관광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두군데 이상의 공동묘지를 찾아 돌아보고 간다고 한다.





46개소의 공동묘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뭐니뭐니 해도 1874년에 조성된 '비엔나 중앙묘지(Wiener Zentraltriedhof)'이다.
이곳은 빈 11구 짐머링에 위치한 시립묘지인데 시내 중심가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내외 거리이다.





묘지 입구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아름답게 줄지어선 가로수길 저 뒤로 묘지들이 펼쳐지고 제일 가운데 뤼거 교회(Lueger Kirche)가 보인다.





중앙묘지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이 교회는 중앙묘지 건립 추진 당시 시장이었던 칼 뤼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뤼거교회다.
이곳은 영화 '제3의 사나이'와 베토벤의 일생을 주제로 한 '불멸의 연인'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고......





매년 200만 명의 순례자들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중앙묘지가 오늘날처럼 유명하게 된 것은 순전히 비엔나 시의회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건립 초창기에 묘지가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하자 시장 칼 뤼거는
'유명인들의 젠트랄프리드호프 명예묘지 이장 추진법'을 통과시켜
각처에 흩어져 있는 예술인들의 묘지를 이장, 통합키로 하고
1881년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필두로 음악가, 학자, 정치인, 건축가 등과 역대 대통령들의 무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비엔나 시민들은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있는 중앙묘지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장례식에도 참가하는 등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유명 인사들이 속속 이 중앙묘지에 묻히게 되자
시민들은 그들 자신도 죽은 후에 좋아하던 예술인들과 함께 묻히고자 묘지 구입이 쇄도하였고

중앙묘지는 늘어나는 주문으로 몇 번에 걸쳐 묘역을 확장하고 또 확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현재는 비엔나 시민들의 무덤까지 통합 5개의 공동묘지까지 추가되어 묘소가 약 33만기에 달하는데 
대부분 가족 묘지이므로 한 묘소에 4기까지 합장할 수 있으니 무려 120만기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묘지이다.





안내도를 보면 중앙묘지의 규모가 짐작이 되는데 
제일 가운데 1번이 뤼거교회, 2번이 베토벤, 모짜르트, 슈베르트 등 음악가들의 묘역인 32A 구역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묘지란 그리 유쾌한 곳이 못 되는데 
대부분의
묘지들이 깊은 산속에 위치한데다 밤이 되면 볼록볼록한 봉분 속에서 원혼들이 일어나 
머리를 풀고 피를 흘리며 쫒아올 것 같은 으시시함으로 인해 누구나 가기를 기피하는 곳이 우리나라의 묘소이다.

하지만 봉분 없이 평토장을 한 비엔나의 묘소들에는 예술작품 같은 묘비 조각들이 놓여 있어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비 조각으로부터 현대미가 우러나는 추상 조각까지.....
단순한 묘비명에 그치지 않고 고인들의 과거와 그들의 재주를 상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를 묘비에 조각하여 고인을 그리며 회상하게 하며
묘비의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주위 경관으로 인해 묘지가 아
니고 마치 조각공원에 온 듯한 느낌마져 들게 한다.









 
많은 유명인사들의 묘소 가운데서도 제일 인기 있는 곳은 역시 32A구역에 위치한 음악가들의 묘소.
사진에서 가운데는 모차르트의 묘소, 왼쪽은 베토벤, 오른쪽은 슈베르트의 묘소이다.


 


사실 모차르트의 묘소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이 묘비는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가난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한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 사후 슈테판 대성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지만 돌보는 사람도 없던 묘지는 곧 잊혀지게 되었다.
후에 시 당국이 모차르트 무덤 자리를 조사했지만 확증을 잡지 못해 무덤이라 추정되는 자리에 1859년에 기념비를 세웠고
1891년에 이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기념비 위의 조각상은 그의 아내 콘스탄체의 모습이다.



악성(樂聖)이라 불리운 베토벤은 비엔나에 35년간 살았다.
말년에 귓병으로 거의 듣지 못하게 된 베토벤은 매우 신경질적이 되어 이웃과도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2만명이 넘는 비엔나 시민들이 몰려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생전에 베토벤을 몹시 존경하여 베토벤 사후 관을 운구하기도 했는데
베토벤 곁에 묻히길 원했던 그의 유언대로 그의 묘소는 지금도 베토벤의 바로 옆에 있다.




비엔나를 사랑하고 노래한 음악가들은 갔지만
그들의 묘소는 음악도들을 비롯한 많은 관광객들이 놓고간 꽃들과 양초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누가 묘지를 혐오 시설이라고 했던가......
문화 명소이자 비엔나의 또다른 관광 상품으로 떠오른 비엔나 중앙묘지는
자기의 삶을 성찰하고 남은 인생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사색의 장소가 아닐까.....


역사를 주도한 명사들과 불멸의 음악가들의 흔적과 조우할 수 있는 곳,
죽음조차 아름다울 수 있는 그곳은 바로 비엔나 중앙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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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오스트리라 여행은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위주로 돌아보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여기저기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돌아온게 사실이다.
비엔나 시내 구경도 박물관이나 비엔나 음악회를 가는 도중에 조금 돌아보았고  
마지막 날에 시간을 내어 
슈테판 성당과 왕궁 등 시내 중심부 일부를 돌아본 것이 고작.....
하지만 머나먼 오스트리아까지 가서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다고 사진을 안 남길 수는 없는 일.
쫒기는 일정 속에서 길을 걸어가면서도 무분별하게 막샷을 날려 담아온 사진이 부지기수라....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편안하게 돌아보지는 못 했지만 
틈틈이 돌아본 비엔나 시내 풍경을 올려드리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엔나 3대 거리를 오늘 소개해 드린다면.....





비엔나 시내 여행의 시작은 비엔나의 상징 슈테판 성당에서 시작된다.
800년이나 된 이 성당은 지금도 여전히 수리중이라 앞면은 가리개로 가리워져 있다.
밤의 풍경이라 약간은 으시시하게도 보이는데 낮에 보면 정말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이다.
슈테판 성당의 내부와 137m나 되는 종탑을 땀을 팥죽같이 흘리며 올라간 얘기는 다음에 소개해 드리기로 하고......

 



비엔나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3대 거리는 A지점에서 슈테판 성당쪽으로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케른트너(Karntner) 거리,
슈테판 성당에서 동서로 가로지르는 그라벤(Graben)거리,
 그라벤 거리에서 ㄱ자로 꺾어져 왕궁까지 이르는 콜마르크트(Kohlmarkt)거리이다.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곳 없는 슈테판 성당 앞. 케른트너 거리와 그라벤 거리가 만나는 곳이다.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시내의 건물들은 보는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건물에 들어선 명품 샵들은 다른 곳에서보다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묻어나온다.





"완전 공짜!""스마트폰 제일 싼 집!"이런 문구 하나 걸려 있지 않는 모바일 샵. 건물마다 간판도 정말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케른트너 거리를 지나가다 본 모자 전문점. 모자가 모두 핑크색 일색인 것이 눈길을 끈다.





Hoher Markt 거리에 위치한 앙커(Ankeruhr)시계.
앙커 보험회사의 두 빌딩을 이어주는 10m 길이의 공중 회랑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긴 시계.
191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화가이자 조각가인 Franz von Matsch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시계는 역사적 인물을 묘사한 12조의 인형이 매시각마다 그 시대의 음악과 함께 나와서 시간을 알리는데
정오에는 12명이 역사적 인물이 다 나오기 때문에 이 시계 앞에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룬다고......
12인물에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하여 카를대제, 마리아 테레지아...등이 있고
맨 마지막에는 하이든이 나온다고 한다.





별빛처럼 아른거리던 스와롭스키 매장의 아름다운 장식.





매장 앞에 사람들이 서서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길래 필자도 가서 보니.....





환상적이고도 묘한 분위기의 쇼윈도 장식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왼쪽 마네킹의 바나나 모양의 스커트도 기발한 아이디어.






합스부르크 역대 왕가의 납골당이 있는 카푸치너 성당.
합스쿠르크 왕가의 영광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비운의 왕비 시시의 아들 루돌프를 비롯한
140명의 왕족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시내를 돌아보노라면 이렇게 쌍두마차들과 만나게 된다.
비엔나 거리를 누비는 쌍두마차 휘아커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트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관련 포스트 : 비엔나 명물 쌍두마차 휘아커




슈테판 성당 바로 앞에 있던 자라(ZARA) 숍.
우리나라 백화점의 자라는 중저가품 같은 인상을 주었는데 슈테판 성당 앞 엄청나게 고급스런 매장에 입점해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의 자라는 더 비싼 제품인가.....하는 생각마져 들게 한다.





명품 샵들이 즐비한 그라벤 거리. 추운 날씨에도 비엔나 시민들은 이렇게 실외에 나와서 커피를 마신다.





케른트너 거리나 콜마르크트 거리에 비해서 그라벤 거리는 거리의 폭이 넓해서 좋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있던터라 거리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식을 해두었다.





밤에 가보면 크리스마스 장식에 불이 들어왔겠지.....했으나 아직 시즌이 조금 남아서 점등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며칠만 더 있다 왔더라면 수많은 전구로 화려하게 불을 밝힌 거리를 보고 왔을텐데.... 그점 너무나 아쉽다.





그라벤 거리의 상징은 뭐니뭐니 해도 페스트 종식탑(Pestsäule).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 작품인 1679년 비엔나에 대역병이 돌자 역병을 피해 비엔나를 떠나던 레오폴드1세 황제는
만일 역병이 곧 사라지면 감사의 탑을 세워 만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역병은 주춤해졌고 처음에는 목재로 이 탑을 세웠는데 이후 설계가 변경되어 10년 만에 지금의 구름 피라미드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중간에 레오폴드1세가 기도하는 형상이 있는 이 탑의 높이는 69피트(21m)이다.


 


비엔나에서 두번째로 오래 된 성당인 페터 성당.

11세기에 세워진 이 성당은 18세기에 바로크식으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그라벤 거리 끝에서 호부르크 왕궁까지 이어지는 거리는 콜마르크트(Kohlmarkt) 거리.
예전에는 이곳에 땔감을 파는 시장이 즐비하게 있어서
석탄시장(콜렌마르크트,Kohlenmarkt)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호프부르크 왕궁이 이곳에 들어서자 더 이상 땔감을 팔지못하고
대신 귀족 상대의 호화로운 상점들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샤넬, 루이 비통, 구찌, 까르띠에, 티파니......






이름도 굵직한 명품 샵이 즐비한 이곳은 비엔나를 대표하는 고급 쇼핑 거리이다.

 

 




밖에서만 보아도 지름신이 마구마구 일어나는 패션 아이템들을 보고 있노라니
시내 구경은 그냥 내던져버리고 매장 문을 밀고 들어서 카드를 긁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가 힘들다.
잠시 뱅글뱅글 돌아가던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른 후 비엔나 最古의 카페 <데멜>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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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이상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비엔나(빈, Wien)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말러, 쇤베르크.......
수많은 서양 음악가들이 그들의 본거지로 삼은 품위있고 아름다운 도시 비엔나.

과거와 현대가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도시 비엔나의 거리는 트램이 사통팔달로 다니고
벤츠 , 아우디 등의 고급 승용차를 비롯해 정류장에는 택시가 줄을 서서 기다린다.
하지만 비엔나를 비엔나답게 해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마부가 끄는 마차 휘아커(Fiaker)이다.






호프부르크 왕궁, 스테판 성당, 국립 오페라 극장.......비엔나 중심 거리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분주히 오가는 마차들이 비엔나 여행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준다.





휘아커(Fiaker)라는 말은 프랑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9세기 초반 파리의 생 휘아커
(St Fiacre)호텔에 앞에는 요즘 택시처럼 마차들이 모여들어 손님들에게 서비스했는데 
파리의 유행이 비엔나로 흘러들러온 이후 돈을 내고 타는 마차나 그런 마차를 모는 마부을
휘아커라고 불렀다.




비엔나에 휘아커(Fiaker)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93년이라고 하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1800년대에 마차가 인기 절정일 때에는 비엔나에만 마차 800여대가 있었고 마부는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수십대 정도가 호프부르크 영웅광장, 슈테판성당 옆, 그리고 국립오페라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휘아커는 대체로 두마리의 말이 이끄는데 거기에 반해서 말 한마리가 끄는 마차나 마부는 아인슈패너라고 한단다.
우리나라에서 비엔나 커피라고 하는 에스프레소 위에 휘핑 크림을 잔뜩 끼얹어 글라스에 담아주는 커피를 아인슈패너라고 하는데 

카페로 들어오기 어려운 마부들이 한손에 말고삐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설탕과 생크림을 듬뿍 넣은 커피를 마차위에서 마시게 된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아인슈페너는 혼자 있는 사람, 또는 별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는데
카페에 와서 갈데도 없는지 장시간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청승을 떠는 사람이 아인슈패너라나.....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겠지만 마부들 중에서는 여자 마부도 눈에 뜨인다.





까만 망또에 까만 중산모를 쓰고 마차를 모는 여마부들을 보니 남자 마부보다 더 멋져보이고 어쩐지 골라서 타고 싶은 마음도 든다.





비엔나 시내에서 휘아커(Fiaker)가 큰 길을 다닐 때에는 모든 차량에 우선하여 다닐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서울 중심지 대로에 이런 마차가 느릿느릿 다닌다면 어떨까.....
택시, 버스들의 경적 소리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아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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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춥고도 길게 느껴지는 유럽의 겨울 밤.
오후 2시만 되어도 마치 저녁 5시 해질녘 같은 느낌이 들고
저녁 5시 쯤 되면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시계를 보지 않으면 한밤중인가 생각될 정도인데
어두워져 춥고 스산한 느낌마져 드는 비엔나 거리에서도 유난히 따스한 느낌을 주는 곳이 있다.

비엔나에 여행오는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린다는 전통 레스토랑 '호이리게'.
호이리게 레스토랑이 밀집되어 있는 그린칭 마을은 도심에서 좀 떨어진 근교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마을의 전통적인 분위기는 비엔나의 고풍스런 맛을 한결 더해주고 있다.





'호이리게(Heuriger)'란 '그해 생산된 포도로 만든 햇와인(Heuriger Wein)' 이나 그런 '와인을 파는 선술집같은 레스토랑'을 이르는 말이다.

호이리게(Heuriger)는 올해의란 뜻을 가진 Heurig에서 기원되었다고 하니 오스트리아산 보졸레누보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되실 듯.



그린칭 마을에서도 가장 유명한 호이리게는 단연 Bach & Hengl.
호이리게 Bach & Hengl로 들어서니 노란 불빛과 함께 오스트리아 전통 장식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바깥에 탁자를 베풀어놓고 식사를 하며 호이리게를 즐기곤 한다는데
날이 추운지라 마당은 쓸쓸하기만 하여 레스토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독일 메르켈 총리와 클린턴도 왔다간 집이라고 알려진 Bach & Hengl의 벽에는
얼굴만 봐도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빼곡이 붙어 있다.
사진이 깔끔하게 붙어 있으니 유명인들의 싸인이 붙은 우리나라 맛집보다는 어쩐지 품격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음식은 주문하면 웨이터들이 테이블까지 가져다주는 부페식으로 
닭고기, 돼지고기, 소시지, 각종 샐러드와 피클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닭고기, 돼지고기, 모듬 소시지, 감자, 샐러드 등의 모듬 세트는 1인당 12.5유로 정도인데
이렇게 큰 그릇에 담겨져 나오므로 개인 접시에 덜어먹으면 된다.





화이트 호이리게(Heuriger, weiB)를 시키면 이렇게 큰 유리병에 담아서 내어오는게 특이한데
맑고 투명한 호이리게의 빛은 보는 이들의 미각을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주 약한 음주에도 '깨꼬닥'하고마는 필자이지만 비엔나 특산 호이리게를 맛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조금씩 맛을 보았는데 맛은 보졸레누보와 거의 비슷한거 같았다.(술맛에 대한 평가를 정확히 내릴 수 없는 필자라 정확치 않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호이리게를 소다수와 섞어 마시기도 한다는데 대체 어떤 맛일지 그것 또한 궁금하다.





샐러드 후에는 스프가 나온다. 손잡이 달린 스프 컵에 담겨나온 스프는 보기에는 그냥 멀건 국물이다.





스푼으로 건더기를 떠보니 우리 소면같은 국수가락이 건져진다. 이것도 스파게티 종류인가....?
맛은 고기국에다 국수를 만 것 같은 맛이다. 거부감도 없고 맛도 제법 훌륭하다.





스프를 먹고 나니 감자와 함께 메인 요리가 나왔다.
본 고장 소시지와 정통 햄, 닭고기 등.....접시에 하나 가득 담긴 육류 들이 보기만 해도 침이 줄줄 흐른다.





우리나라에서 '줄줄이 비엔나'라는 CF로 유명해졌던 비엔나 소시지(vienna sausage)는
미리 조리한 원료육을 작은 창자 굵기로 성형하여 훈열, 가열한 제품으로
비엔나에서 처음 생산되기 시작해서 비엔나 소시지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4cm정도의 작은 소시지를 비엔나 소시지라고 말하는데
본 고장 비엔나 소시지는 사진에서와 같이 15cm 길이의 양 내장에 충전된 소시지로 독일어로는 Wienner라고 표기한다.




소시지, 햄, 닭고기, 감자.....등을 한 접시에 세팅해 보았다.
육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인 음식이지만 채식을 주로 하는 한국인들이라면 왠지 약간은 느끼한 식단.....
그것도 바로 앞에 산더미 같이 쌓인 각종 햄, 소시지들을 보며 먹으니 몇개 못 먹고는 금방 질려 포크를 놓아야 했다.

기타와 바이올린, 아코디언의 앙상블로 특징지어지는 슈라멜 음악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호이리게를 찾는 사람도 많다는데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두 팀이나 와 있었던터라 
이들을 위해 비엔나 전통 음악 보다는 만남 등 한국 음악을 더 많이 연주한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아....그리고 이 연주는 무료가 아니므로 반드시 팁을 준비해서 주어야 한다고 한다.





멋진 슈라멜 음악을 들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쳐가니 드디어 후식이 나왔다.





후식은 오스트리아에서만 맛 볼 수 있다는 사과 파이 아펠 스트루델(Apfelstrudel)이다.
아펠 스트루델은 크기가 보통 가로 30cm 정도 되는 두툼한 크기의 빵으로 
그 안에 사과를 통으로 썰어 넣고 말린 건포도를 함께 넣어 잘 구워낸 파이이다.





우리는 느끼한 육류를 먹고 난 후에 엄청나게 달콤한 파이나 케이크를 후식으로 먹는 서양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서양인들은 속이 썩도록 달콤한 파이나 케이크가 육류의 느끼함을 없애준다고 생각한단다.
하긴.... 술 먹은 다음 날 해장으로 계란 후라이나 햄버거를 먹는다니......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 같다.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아펠 스트루델.
하지만 속이 뒤집어지도록 달콤한 스트루델을 햄과 소시지, 닭고기등 육류를 잔뜩 먹은 후에 먹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뜨겁고 얼큰한 콩나물 해장국을 먹으면서도 "어...시원하다..!"라고 말하는 우리는 한국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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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한 동화처럼 아름다운 마을 블루마우로 가기 위해서는
비엔나에서 베른바흐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고속도로 상에는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한 특이한 모양의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다.





차에서 내려 휴게소 건물을 보니 "아!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이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직선을 거부하면서 모두 곡선으로 지어진 휴게소 건물 벽마다 강렬하게 내리그어진 원색의 선들.

그의 철학에 따라 유리창의 색깔과 모양 역시 어느 하나도 같지 않고 제각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휴게소의 이름은 아우토그릴(Autogrill). 원래 이름은 바드 피샤우(Bad Fitchau)이다.





둥글게 휘어진 계단을 올라 휴게소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니

둥그런 천정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둥, 그리고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에는 어디든지 있는 분수가 여행자를 반긴다.




외부의 모습과 달리 레스토랑의 내부는 훈데르트바서의 분위기가 다소 약한 느낌이 든다.





곡선으로 처리된 인테리어, 다양한 색상의 타일로 덮은 바닥이나 천정은 훈데르트바서의 작품 스타일이 그대로 살아 있으나

내부 인테리어는 어딘지 살짝 특징을 잃은 느낌이 드는데......





알고 보니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한 이 건물의 초창기에는 훈데르트바서의 색깔이 짙었으나
휴게소의 소유가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간 이후에 인테리어가 상당 부분 바뀌었다고 한다.



레스토랑에서 비엔나의 자랑거리인 '멜랑쥬'커피 한잔(3.78 유로)을 맛본 후 1층으로 내려가본다.





휴게소 1층에는 아담한 슈퍼마켓이 자리잡고 있는데  
슈퍼마켓의 바닥 또한 훈데르트바서의 예술 감각이 조화를 잘 이룬 하나의 작품이다.






하지만 1층에서 빠뜨리지 않고 돌아보아야 할 곳은 수퍼마켓이 아니라 바로 화장실이다.
입구로 들어서니 손으로 만지면 파란 물감이 묻어날 것 같은 문과 알록달록 개성있는 모양의 타일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화장실을 구경하기위해 휴게소에서 쉰다고 할만큼 오스트리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화장실인데
훈데르트바서의 초창기 디자인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생활 속의 미술관이다.





어렸을 적 여자 화장실을 몰래 들여다보다 같은 반 여자 친구들에게 변태 취급 받은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필자의 시선과 함께 하시는 남성분들은 죄의식(?) 없이 여자 화장실 내부를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으니
이런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마시고 살며시 필자의 뒤를 따라오시길 바라며......

유럽 많은 나라의 공중 화장실은 사용료를 지불해야 편안하게 근심을 풀 수 있지만
이미 레스토랑에서 멜랑쥬 한잔을 마셨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서니 손을 씻는 공간이 정말 환하고 햇빛이 잘 비쳐 느낌이 너무 따스하다.
둘러보니 세면대 앞의 거울이 정말 환상적이다!





커다란 전면 거울은 어디서도 볼 수 없고 크고 작은 거울이 삐뚤빼뚤한 프레임 속에 오밀조밀 들어앉았다.





어떤 거울은 일부러 깨뜨려 놓았다.
깨진 거울을 세면대 앞에 붙일 생각을 하다니....정말 남들과는 다른 머리를 가진 훈데르트바서다. 






거울을 둘러싼 프레임의 색감이 정말 오묘하다.




바닥 타일도 컬러의 조화가 정말 예술이다. 왜 훈데르트바서를 색채의 마술사라고 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세면대가 위치한 곳에서 보니 너무나 컬러풀한 문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둥근 화장실의 가운데에는 훈데르트바서 건물의 큰 특징인 곡선 기둥이 자리잡고 있고
기둥을 중심으로 다양한 색감의 문들이 반원을 이루고 늘어서 있다. 



컬러는 약간 어두운 원색들인데 훈데르트바서는 이를 암다채(暗多彩, 둥겔분트)라고 불렀다. 








원색인 컬러에 물기가 더해져 더 짙은 색감을 나타내주는 암다채는 그의 그림에서 주조를 이루는 컬러이다.





레드, 블루, 옐로우, 그린, 블루, 블랙.....그리고 화이트......
어쩌면 촌스러울 수도 있는 색감들이 한데 어울렸는데도 자연스럽고 세련되기 그지없다.





화장실 내부 색감의 조화는 벽과 문에서 시작하여 바닥으로도 이어진다.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훈데르트바서는 깨어진 타일 조각 하나도 버리는 법 없이 이렇게 새로운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화장실에 들어와서 넋을 잃고 돌아보며 셔터를 계속 누르느라  볼일을 봐야 한다는 본연의 자세는 그만 망각해버린 필자!
이제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설 차례이다.

 



음.....여자 화장실도 별거 아니잖아.....하시는 분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화장실 칸 마다 같은 모양의 벽과 바닥이 하나도 없이 모두 다른 모습, 다른 색감으로 장식해 둔 것을 볼 수 있다.

훈데르트바서가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을 재디자인했다는 것은 일전에 소개해 드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예술가, 색채의 마술사 훈데르트바서가
이런 한적한 고속도로 휴게소와 화장실까지 디자인했다는건 약간 의외였다.
하지만 비싼 관람료를 지불하고 보는 전시회에서만 접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예술이 아니라도
우리 삶 속에 들어와서 생활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예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 아닐까.....? 

바쁜 일정 중이었지만 오스트리아인의 삶 속에 깊이 녹아들어 하나가 된 훈데르트바서의
친근하고도 특별한 미술관에 편안히 앉아 잠시 깊은 명상에 빠져 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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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테반성당과 더불어 비엔나(빈, Wien)를 더욱 비엔나답게 만드는 곳.
비엔나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손꼽히는 쇤브룬 궁전(Schloss Schoenbrunn).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남서쪽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 쇤브룬궁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다.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 유서 깊은 궁전은 
황제 요제프 1세를 위하여 피셔 폰 에르라흐가 1696년경 설계하여 1700년경에 완성하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 니콜라우스 파카시가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는데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한 곳이다.
 


쇤브룬 궁전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펼쳐지는 엄청난 크기의 건물이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해 버린다.
바로크식으로 지은 이 궁전은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인데 실내는 로코코 양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방이 무려 1,441개나 된다는 거대한 궁전은 길이도 너무 길어서 한 앵글에 다 잡히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누어서 몇장 찍어보았지만 역광인 관계로 건물의 모습이 너무나 어둡게 표현되었다.





궁전 입구에서 보면 건물의 엄청난 크기에 비해서 앞 정원이 썰렁하도록 평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듣기로는 
옛 합스부르크왕가의 황제들이나 황족들은 비엔나시민들의 눈을 많이 의식해서 
황제와 황족들이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걸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궁전의 내부는 로코코 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공랭식 난방 장치와 베르사유에는 없던 수세식 화장실도 비치했으며
화려하게 꾸민 방들에는 촛불을 담당한 하인만도 무려 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방 중에서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45개의 방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다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
남아메리카산 장미 나무 뿌리로 꾸민 방 등 어느 곳이든 일반인의 눈에 호사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며 
사방이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거울의 방은 여섯 살 된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입구에서 궁전 건물 쪽으로 가까이 가니 궁전 앞에는 여러가지 자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어지럽기 짝이 없다.
바로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기 위한 준비이다.
마켓이 문을 열면 화려한 장식품들과 함께 크리스마스에 쓰일 물건을 팔고 사고 즐기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이게 된다.
그런데 세계 문화 유산인 쇤브룬궁 안에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니....!
우리 같으면 경복궁 안 뜰에 북적거리는 야시장이 들어선거나 마찬가지일 듯.....





쇤브룬 궁전 내부를 관람하는데는 관람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궁전의 정원만 돌아보는데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궁전 정원을 돌아본 후 언덕 위의 글로리에테에서 차 한잔 마시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궁전 정원으로 향한다.

궁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식 정원으로 들어서니 이미 겨울인지라 
화단과 분수, 정교한 조각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은 다 어디로 가고......꽃이 있던 자리에는 거름더미만 한가득.....썰
렁함만 감돈다.
정원 가장자리의아름다운 조각상들도 추울까봐(?) 하얀 천으로 다 가려놓았다. 석상이 추위를 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놓는건지....
1.7㎢에 달하는 광대한 정원이라지만 볼것이 별로 없어 궁전 맞은편 언덕으로 향한다.




넓디 넓은 정원을 한참이나 걸어가서 뒤로 돌아보니 부드럽게 빛나는 노란색 외벽의 궁전이 너무나 따스한 느낌을 준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쇤브룬 궁전의 이 찬란한 노란색을
“마리아 테레지아 엘로우”라고 부른다고.....




정원의 끝에 있는 넵튠의 샘(Neptune Well)도 겨울인지라 분수는 중지되었고 썰렁함만 감돌고 있다.
쇤브룬 궁전(Schloss Schoenbrunn)의 슐로스(Schloss) 는 궁전이나 성을 뜻 하며
쇤(Schoen)은 아름다운 또 브룬(Brunn)은 샘물이라는 뜻의 독일어이다.
그러니까 슐로스 쇤브룬은 '아름다운 샘물이 있는 궁전'이니 이 샘물은 궁전 이름의 유래가 된 샘물이라 볼 수 있다. 
 




한참이나 걸어 정원을 지나 언덕에 다다르니 보기에는 그다지 높아보이지 않는 언덕이 올라보니 장난이 아니다.
등에 땀이 흥건하도록 헉헉거리며 언덕 위에 올라서 아래를 보니 우와.....!
아름다운 정원과 노란색으로 빛나는 궁전이 훤히 보일 뿐만 아니라 저멀리 비엔나 시내 전경도 한눈에 다 보인다.
비엔나 사람들이 여름 별궁인 쇤브룬궁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언덕 위에서 보는 환상적인 전망 때문이 아닐까?



이 멋진 언덕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단연 글로리에테(Gloriette)이다.
쇤브룬궁의 언덕 위에 이 장엄하고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글로리에테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1757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전몰자 위령의 목적으로 세운 일종의 개선문이다.




시내에서 바라보는 글로리에테는 마치 쇤브룬 궁전위에 왕관을 올려놓은 것 같다고 하니 그것 또한 장관이리라.

아치형의 주랑과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그리스 신전풍의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건물 뒤로 지는 석양의 모습도 너무나 아름답다.





석양이 내리깔리는 글로리에테를 한바퀴 돌아본 후 글로리에테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개선문으로 지어진 이 글로리에테는 지금 시민들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250년이 넘은 귀중한 문화 유산을 카페로 쓰다니......! 
우리나라 같으면 줄 쳐놓고 올라가지도 못 하게 할텐데.....정말 비엔나 시민이 부럽기만 하다. 

카페 안은 새롭게 리모델링한 듯 깔끔하고 산뜻하다. 




화이트와 골드 베이지 칼라로 된 인테리어는 화려하면서도 세련미가 풍긴다.




케이크와 함께 멜랑쥬 한잔을 마시며 잠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가 된 기분에 젖어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리며 창 밖 하늘이 짙푸른 색으로 변한다.






바로 매직아워가 아닌가.....! 이렇게 앉아서 차만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니 너무나 환한 조명이 글로리에테의 주랑을 환하게 비춘다.





전체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한참 뒤로 물러가서 보니 너무나도 파아란 밤 하늘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글로리에테.
이건 완전히 황금 면류관이 아닌가.....!





황금 면류관은 바로 아래 물에도 있다. 이런 환상적인 반영이라니......!
여행 중에 이런 멋진 야경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가 않은 일인데.....!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셔터를 누르니 오리 한마리가 유유히 지나가며 반영을 흐트린다.

 



다시 한번 더 시도해서 반영과 함께 황금 면류관 같은 글로리에테의 야경 사진을 담는데 성공했다.
NEX-5의 '삼각대 없이 야경 찍기 모드'를 사용해서 찍었는데 비록 삼각대를 사용한 사진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글로리에테의 야경을 찍은 후 어두워진 언덕에서 내려와 궁전 앞으로 오니  아.....! 여기도 너무나 환상적인 야경이 연출된다.
낮에 보던 쇤브룬도 정말 아름답지만 밤의 쇤브룬은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네처럼 황금빛의 궁전으로 새로 태어난다.






거기다 여인네의 눈썹같은 초승달까지 궁전 머리에 아름답게 걸려 있으니 멋진 야경에 운치까지 더해준다.





시간이 부족하여 쇤브룬궁의 화려한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오후에 도착하여 쇤브룬의 노을지는 모습과 환상적인 야경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와 쇤브룬궁의 거울의 방을 거닐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숨결을 느껴볼 날이 있겠지.....
기약없는 기대를 해보며 어둠이 드리워지는 쇤브룬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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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에 여행 오는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건축물이 있는데
그것은 비엔나 시내 헤츠가세역(驛) 근처에 있는 한 시영 아파트이다.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획일적인 아파트만 보시던 분들이 이 시영 아파트 앞에 서신다면
여기가 동화의 나라의 일부인가......아니면 놀이 동산 건물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은 비엔나의 유명한 랜드마크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화가이자 생활 디자이너, 건축가, 환경주의자, 평화주의자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1928~2000)가 
비엔나 중심가에 있던 낡은 시영 아파트를 생물이 살아 숨 쉬는 아파트로 개조한 건물이다.





2차대전 이후 전쟁으로 피폐할데로 피폐해진 비엔나에서는 
서민들의 시급한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영 아파트들이 많이 지어졌는데
되는대로 지어진 시영 아파트들의 환경은 그야말로 열악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한다.
편의 시설은 하나도 없이 오직 주민들의 성냥갑 같은 방들이 복도에 감방처럼 줄지어 들어서고
수십 가구가 공동 수도 하나, 공동 화장실 하나를 공유해야 하는 형편이었다고....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 지어진 시영 아파트의 재건축을 위하여
비엔나 시청은 시영 아파트 재건축 디자인 공모를 했는데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디자인이 채택되게 된다.

딱딱하고 획일적인 건물들 일색인 비엔나 한가운데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한 알록달록한 동화의 집 같은 시영 아파트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 환경과 안 어울린다'는 염려 등으로 부정적 여론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입주 신청자가 3만명이나 폭주하는 등 많은 시민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되자
시영 아파트 재건축 프로젝트는 1983년에 시공하여 1986년에 완공하게 된다.
훈데르트바서는 비엔나 시민들을 위해 무보수로 참여했다는 재건축 프로젝트에 일화도 전한다.

완공식에 7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등 대성황을 이루자 아파트 재건축은 매우 성공적인 평가를 이끌어냈고
한 사람의 예술가가 엄청난 시너지를 창출해낸 모범 사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비엔나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비엔나의 명물이 되었다.




이렇게 지어진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대지 총면적은 1,543㎡이고,
층수는 3층부터 9층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52호가 거주하는 각 주택의 규모는 30~150㎡ 정도인데 주택 외에도 4개의 사무실, 16개의 개인 테라스,
3개의 공동 테라스, 2개소의 어린이 놀이터와 윈터가든(winter garden),
카페로 구성된 복합 주거 시설로 자리잡았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는 전경을 찍기 위해 도로를 가로질러 반대편에서 보아도 전체의 모습이 앵글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자연에는 바로 잰 듯한 반듯한 직선은 없다'인위적인 직선을 거부한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은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앞길도 이렇게 자연의 동산을 그대로 옮겨온 듯 완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앞에 서서 위로 올려다 보니 건물 외벽에 자라나 있는 나무와 함께 제일 먼저 알록달록한 벽의 색감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화이트, 옐로우, 레드, 블루, 블랙.......건물에서는 잘 쓰지 않는 화사하고 다양한 색채가 모두 한 곳에 쓰였는데
훈데르트바서에게 다채롭고 눈부신 색깔의 집은 행복한 집과 같은 의미이다.

 



유럽의 겨울이 대부분 그렇듯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를 방문한 날도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 많이 흐린 날이었다.
어제 저녁 살짝 내린 비로 인해 건물은 부분적으로 비에 젖어 있어 사진이 많이 우중충하게 나온 것이 흠이다.
훈데르트바서는 비오는 날에는 모든 사물이 비에 젖어 고유의 색감이 더 빛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오는 날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자기의 중간 이름을 레겐탁(Regentag, 비오는 날)이라 짓기도 했지만
화가가 아닌 초보 사진가에게는 흐린 날 보다는 밝고 화사한 날의 사진이 더 나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훈데르트바서는 건물이나 집을 지을 때 그 안에 자신의 이념과 꿈을 반영하고 싶어 했는데
블루마우 리조트, 슈피텔라우 소각장, 쿤스트하우스빈에서처럼 훈데르트바서의 집들의 창은 하나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단독 주택을 지을 수 없어서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 사는 요즈음, 
남이 설계하고 지은 집으로 이사온 사람들은 획일화된 아파트에서 자신의 존재와 개성을 드러내기는 힘든 일이라서
창문을 에워싼 공간만큼은 스스로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훈데르트바서는 이 권리를 '창문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이 창에서 팔을 뻗쳐 닿는 범위는 개인의 공간이며 그 공간만큼은 세입자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다’
라는 문구를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세입자 계약서의 첫 문구에  써넣었다고 한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모든 세입자는 자신의 창문을 알록달록하게 칠할 수도 있고 색색의 타일로 장식하기도 한다.

식물을 키워 이렇게 덩쿨이 드리워지게 창문을 장식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목걸이처럼 사슬을 걸기도 하며
혼자만의 발코니로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볼 수도 있다.





일본에 여행 다녀온 기념품일까....? 이렇게 일본 남자 어린이날의 상징인 고이노보리를 드리워 남들보다 튀어보이는 집도 보인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의 알록달록한 건물 외벽에
풍성하게 자라나 있는 나무들은 보기만해도 행복한 집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데
그가 디자인한 건물은 어디나 지붕과 마당은 물론 계단과 실내에까지 무성한 식물로 넘쳐난다.

 




우리를 보호해주고 살 공간을 제공해 주는 집을 제 3의 피부라고 표현했던 그는

집이 세워짐으로 인해 빼앗겨버린 식물의 생활 공간을 식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빼앗은 식물의 공간을 건물에다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디자인한 모든 건물은 옥상과 마당, 계단을 가리지 않고 식물을 심었다.





심겨진 식물은 우리의 삶에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주고 인간은 식물로 인해 기쁨이 더욱 넘치게 되는데 
인간은 식물을 통해 그늘을 얻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먼지와 소음에서 벗어나 편안한 느낌을 받게 된다.



또 자연을 그대로 집의 일부로 들여놓기를 원했던 훈데르트바서는 
풍성한 나무와 함께 꼭 물이 흐르는 분수를 건물에 설치했는데 이제는 겨울이라 기능이 분수의 기능이 중단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사유 재산의 개념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시영 아파트가 임대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임대 아파트는 일정한 거주 기간이 지나면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비엔나의 시영 아파트는 한번 거주한 사람은 평생 그 집을 비우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상속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수에 알맞은 집을 임대할 수 있는데 독신자는 작은 크기의 아파트를 ,
결혼해서 가족의 수가 늘어나면 여러 가족이 살 수 있는 더 큰 아파트를 임대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건물, 같은 면적의 아파트에 산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소득에 따라서 임대료가 다르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소득이 적은 가장이라도 가족의 수가 많으면 큰 아파트에 살면서 임대료를 적게 내고
소득이 높은 독신자는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임대료를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재정적인 능력이 부족한 가장이라도 내 가족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공간을 저렴한 임대료로 얻을 수 있다니....!
서민 복지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환상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평생 번 돈을 저축해도 서울 소재 아파트 하나 사기 힘든 형편이라
모든 사람들이 집 장만에 혈안이 되어 있지만
이렇게 평생 임대해서 살 수 있는 아파트가 주어진다면 집 장만을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살아 숨 쉬는 예술 작품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도 정말 좋지만 서민 복지를 위한 오스트리아의 임대 아파트 제도는 정말 부러운 부분이었다.
우니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한시바삐 도입되어 우리 서민들의 휘어진 허리가 쭉 펴질 때가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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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데르트바서의 미술 작품과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을 돌아보기 위한 오스트리아 여행,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Wien)에서 남서쪽으로 약 150km를 달려
스티리아(Styria, Steiemark)주에 위치한 바른바흐(Barnbach)로 향한다.
스티리아의 주도 그라츠(Graz,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에서 얼마 멀지 않은 바른바흐는 
스티리아주 보이츠베르크구에서도 가장 조그만 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은 도시로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곳에 훈데르트바서가 새롭게 디자인한 성 바바라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롭다 못 해 한산한 느낌까지 드는 시골 마을 바른바흐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성바바라 교회에 이르니
바로 앞에 보이는 교회 건물....
아.....교회가 너무 예쁘네....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유럽을 여행하는 중에 그 도시를 대표하는 교회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날아갈 듯 가벼워보이는 교회는 처음이다.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과 함께 근엄하고 묵직하게 버티고 있다면
훈데르트바서의 교회는 쓸데없는 권위를 훌렁 벗어 던진 듯 가볍고 행복해 보인다.




성 바바라 교회(Church of St. Barbara)입구에는 그가 디자인한 건물에는 빠질 수 없는 분수가 자리잡고 있다.





역시 겨울이라 분수에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성모상인가 했더니 광부와 건축업자의 수호성인인 성녀 바바라상이란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디오스쿠루스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그의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그녀를 탑 속에 가두었다고 한다.
어느날 부친은 그녀가 크리스챤이 된 것을 발견하자 그녀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으나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여 기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힌 그녀는 이번에는 재판관 앞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벌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의 부친은 그녀를 산으로 끌고가서 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끝내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고.....




교회 파사드(facades)엔 마치 유치원 아이가 그린 듯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심볼들이 한가득 새겨져 있다.





교회 첨탑 높은 곳을 장식하며 화려하고 근엄하게 자리잡고 있기 십상인 시계는
여기서는 가볍게 변모했으며 심지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두개의 시계 중 하나는 상식을 뒤엎는 시계!  아예 윗부분이 없다.
그리고 시계의 숫자도 8,9,10,11,12,1,2,3,4......뿐이다.  도대체 5,6,7은 어디로 실종된거지?
시간을 어떻게 보는건지 아무리 보아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지 궁금하다....아시는 분 조언 주시길....




교회 파사드(facades) 왼쪽에 새겨진 이 심볼을 보고 왜 국민은행 로고가 여기에 있지?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하는 분이 계셨는데
P자에 X자가 겹쳐진 이런 십자가 모양의 심볼은 카톨릭 교회의 제단이나 제구에 많이 쓰이는 것을 본다.
이는 그리스어인 '크리스토스(Xρωτδ = XPISTOS)'의 앞에 두 글자 X와 P를 따온 말로서
영어로는 크라이스트(Christ)로, 한국에서는 그리스도라고 읽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말이다.
읽을 때는 '엑스 피' 나 '피 엑스'로 읽으면 안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 한다고.....
크리스 마스를 뜻하는 X-Mas의 X가 바로 이 키로 (XP)를 뜻하는 말로서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를 의미하는 말이다.




파사드의 왼쪽에는 이렇게 돛을 단 배가 그려져 있다.
어쩐지 훈데르트바서의 자유로운 영혼을 감싸 주었던 보트 레겐탁(Regentag)과 같은 느낌을 준다.





파사드의 옆면엔 대형 십자가와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이 모자이크로 되어 있다.





교회 첨탑에는 오스트리아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양식인 황금색의 꾸뽈(Coupole)이 눈에 확 들어온다.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에는 어디든지 이 꾸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블루마우, 그리소 심지어는 슈피텔라우 소각장의 높은 굴뚝에도 이 꾸뽈 양식이 채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꾸뽈(Coupole)이란 러시아 -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양파 모양의 돔을 일컫는 말인데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의 돔 등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 정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꾸뽈은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형상화한 것으로 둥근 양파 머리는 촛불을, 그 위의 십자가는 촛불의 심지를 의미하는데
러시아 정교회 건물에 하나같이 꾸뽈이 서 있는 것은
꾸뽈이라는 촛불이 인간의 간절한 기도의 염원을 하늘을 향하여 대신 태운다는 의미라고 한다.





종탑의 옆면과 뒷면에도 역시 시계가 있는데 옆면의 시계를 자세히 보면 '스마일'의 형상이다.
이마에 해당되는 윗부분에는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 하트가, 웃는 입 모양은 움직이지 않는 믿음을 상징하는 닻이,
그리고 두 눈은 알파와 오메가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는 요한계시록 1:7~8절의 말씀에서 따 온 것이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슥슥 그린 것 같은 이 형상들을 보니 보는 필자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교회를 둘러싼 마당에는 특이하게도 세계 모든 종교를 의미하는 열두개의 문들이 서 있다.
기독교, 유태교, 불교,  이슬람교, 일본의 신도, 기타 원시 종교의 상징물까지.....





Friedrich  Zeck 신부의 계획에 따라 훈데르트바서는 세인트 바바라 교회를 재 디자인하는 일을 허락했는데
훈데르트바서는 교회 주변 또한 이 계획에 포함시켜 달라고 했고 세계 모든 종교를 의미하는 열두 개의 문들을 디자인했다.













유대인인 훈데르트바서가 카톨릭 교회 마당의 12개의 문에 각 종교의 상징을 박아 둔 것은 그의

종교 다원주의 성향 때문인 듯.....
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자신의 민족이 겪는 아픔을 똑똑히 목도했기에 종교가 서로 관용하고 대화함으로 평화를 유지하길 원했다.





이 교회를 재디자인한 것은 1987년인데 화가인 훈데르트바서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현대 건축들이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신념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의 메마른 건축들을 치료하여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동거의 공간으로 탈바꿈 시키고자
크고 작은 건축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게 되면서 ‘건축 치료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의 예술이 ‘행복한 삶의 추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그가 인간이 실질적인 삶을 영유하는 공간인 건축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연의 굴곡을 그대로 보존하고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에 식물이 자라나며 불규칙하며 둥글게 굴려진 구석과 모서리’ 등
그가 추구한 공간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행복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훈데르트바서는 암다채(暗多彩)를 좋아하지만 성 바바라 교회 벽의 색감은 전혀 어둡지 않고 너무나 가볍고 밝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둡고 음산한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묘한 느낌을 주는 파스텔톤의 벽은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까지 있다.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에 대한 철학을 생각하며 교회 건물과 마당의 상징물들을 다 훑어 본 후 내부를 보기 위해 교회 문을 밀고 들어가 본다.





눈 앞에 펼쳐지는 교회의 내부는 의외로 외부와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훈데르트바서가 재디자인한 건물이니 교회 내부도 의례히 구불구불한 곡선과 울퉁불퉁한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교회 안은 의외로 평범하다고 느껴질만큼 단순하고 간결하다.


 

 
이렇게 외부와 내부가 다른 것은 훈데르트바서는 교회의 외부 디자인과 마당의 종교적 상징물을 디자인하고
교회 안 인테리어는 지역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 내부 장식도 훈데르트바서 스타일로 했더라면 더욱 통일미가 있었을텐데.....조금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훈데르트바서는 교회 내부의 두군데만 디자인했는데 그 중 하나는 교회 출입문 왼쪽 세례반 뒤에 있는 나선형 창문이다.





훈데르트바서는 나선은 생명의 원초적인 형태이며 자연과 닮은 유기적인 형태라고 생각했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나선은 인간의 삶과도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했다.
하나의 나선은 가늘고 약하지만 돌고 돌아 겹쳐질수록 그 세계는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인 동시에 다른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훈데르트바서의 나선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양과 색의 배합이 우리나라 부채 태극선과도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하나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은 제단 위 예수 그리스도상의 후광 부분이다.





십자가상의 예수상에서 비치는 후광은 빛의 습성상 똑바로 나가지만 
직선으로 된 부분도 자세히 보면 삐뚤빼뚤한 모자이크 타일을 붙여서 완성했다.
직선의 표현도 곡선으로 하는 훈데르트바서. 정말 누구도 하기 힘든 발상의 전환이다.




훈데르트바서의 색채 감각과 그의 남다른 생각이 함께 빚어낸 멋진 작품 성 바바라 교회.
날이 흐리고 우중충한지라  아이들의 그림 같이 천진난만한 이 교회를 환하게 담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 날아갈 듯 가볍고 쾌활하고 즐거운 교회에 찬란한 햇살이 비추어주었더라면 더욱 화사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그의 천진함과 자유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을까.......
떠날 시간이 되어서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하는 소리를 여러번 들은 후에야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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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산에 안 올라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이말은 직장 동료들이 필자를 놀릴 때 가끔 하는 말인데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몇년전 필자는 폐지로 가득한 쓰레기산을 정복한 경험이 있다.

털어놓긴 민망한 일이지만 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서를 폐지로 분류해서 내버렸기 때문이다.
처리가 완결된 문서이기도 하고 이미 보존 기간도 지난지라 아무 생각없이 폐지로 내어보내버렸는데
바로 며칠 후 그 문서가 황급히 쓰일 일이 생겨 꼭 찾아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할 수 없이 폐지를 수거해 간 재활용센터를 수소문하여 전화를 거니
그날 수거해간 폐지가 경주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영천의 재활용 공장으로 갔다는 소식.
급히 차를 몰아 폐지 수집장까지 간 필자와 동료 직원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 했는데
5층 아파트 높이로 쌓여 있는 엄청난 폐지 쓰레기산을 보고는 모두가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난 쓰레기산 아래에 위치한 폐지들은 이미 썩을대로 썩어 냄새는 코를 진동하고
그 위에 다시 무질서하게 쌓이고 쌓인 폐지들은 원래의 존재가 뭔지 모르게 다 뒤섞여있는지라
필자가 버렸던 폐지 박스를 찾는다는건 해변에서 잃어버인 바늘 찾기 같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전날 경주에서 온 쓰레기차가 버리고 간 지역을 중점적으로 몇시간이나 뒤진 끝에
기적과도 같이 내버렸던 문서 박스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쓰레기산을 다리가 아프게 오르 내리던 동료들은 기쁨에 못 이겨 모두 부등켜 안고 소리를 질렀고
온몸에 먼지를 뒤덮인 것도 잊고 모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쓰레기산을 내려왔다는 황당스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

그날 몸에 배인 쓰레기 냄새가 집에 가서 샤워 해도 잘 없어지지 않았다는 동료들의 푸념은
"쓰레기산에 안 올라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란 놀림으로 두고 두고 회자되었는데.....


이렇듯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쓰레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필자인지라
이름만 들어도 품격이 넘치는 비엔나 여행 일정 속에 <쓰레기 소각장 방문>이 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유쾌한 일이 못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화가이이자 건축 치료사인 훈데르트바서가 외관을 개조했다는 쓰레기 소각장이라지만
그래봤자 냄새나는 쓰레기 소각장이지 별수가 있겠어......하는 다소 시큰둥한 마음을 안고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으로 향했다.




비엔나 지리에 익숙치 못한 슬로바키아 출신 운전 기사로 인해 비엔나 시내를 한참이나 돌아 겨우 도착한 슈피텔라우(Spittelau).
버스에서 내려 눈을 들어 보니 히야......비엔나의 11월에는 좀체로 보기 힘드는 멋들어진 하늘 구름 아래
희한하게 생긴 건물이 소각장으로 향하는 육교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펼쳐져있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원색으로 빛나는 건물들을 보니 지금까지의 무관심은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무한셔터질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도나우 강 운하 변에 서 있는 쓰레기 소각장이라니.....더구나 바로 옆에는 지하철역까지!
정신을 차리고 소각장 건물을 자세히 보니 하얀 외벽에는 파랑 빨강 검정 등 원색의 문양이  강렬하고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황금빛 구슬을 올렸다.





그리고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알록달록하게 치장한 창들이 눈에 쏘옥 들어와 박혔다.




그중에도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당당하게 치솟은 거대한 굴뚝.
마치 올림픽 성화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 같기도 한 굴뚝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금빛 찬란하게 빛나며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소각장 굴뚝에 도입한 꾸뽈(Coupole: 러시아,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양파 모양의 돔)은
훈데르트바서가 디자인한 건물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슈피텔라우 소각장의 자세한 안내를 받기 위해 먼저 관리동 건물로 향하였다.




관리동에도 건물 곳곳마다 어린 훈데르트바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에는 자로 그은 듯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직선으로 된 
기둥을 거부했던 그는 
건물 입구의 기둥도 둥그스름한 항아리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했다.



로비에 들어서니 여기저기에 전시되어 있는 예술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곳 슈피텔라우 소각장 로비에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한달 주기로 교체 전시되는데
주로 훈데르트바서의 자연주의를 따른 사진 작품과 조각 작품들이 많았다.
쓰레기 소각장에 현대 미술 전시라니......정말 상식을 깨는 소각장이다.


컨퍼런스룸에서 간단하게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의 변천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1971년 설립된 이 소각장은 1987년까지는 여느 쓰레기 소각장과 다를바 없이 그저 밋밋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7년, 과열로  인해 대형 화재가 발생하게 되어 쓰레기 소각장의 기능이 중단되는 일이 생겼는데

비엔나 시장 헬멋 질크는 화가이자 환경 운동가, 건축 치료사인 훈데르트바서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의 외관 개조 작업을 맡게 했다.

친구인 환경 운동가 베른 로이치의 영향을 받았던 훈데르트바서는
쓰레기 소각장에 대한 근본적인 반감을 갖고 있었던지라 리모델링 사업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엔나와 같은 대도시는 아무리 분리수거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쓰레기 자체를 없앨 수는 없고
생산된 쓰레기를 처리할 쓰레기 소각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소각장 개조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스폰서링이나 자신의 작품 판매 수입을 통해서 리모델링 비용도 분담하였다.

2년 반에 걸친 리모델링 작업을 거친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은
마침내 최신식 배기 가스 정화 기술이 장착된 친환경 소각장으로 재탄생하게 되는데
기계, 환경과 예술이 공생하는 조화의 본보기이자 자원 낭비를 막아주는 공업 단지 건설의 뜻을 품고 있던
훈데르트바서의 꿈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리모델링 과정과 소각장의 현황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비디오를 시청한 후 관리동에서 나와 
가파른 계단을 올라 직접 쓰레기 처리가 이루어지는 소각장 현장으로 가보았다.





소각장 마당에는 반듯하게 생긴 주황색 쓰레기차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는데 
비엔나 전역에서 수거된 쓰레기는
재활용 쓰레기와 소각할 쓰레기로 구분한 후 소각할 쓰레기는 트럭에 실려와 이곳 소각장에서 태워지게 된다.





쓰레기차는 쓰레기 투입구로 후진하여 들어가 쓰레기를 투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바깥으로 전혀 쓰레기가 흩어지지 않고 깨끗하게 집하장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어 무척이나 위생적으로 보였다.
냄새가 진동하고 쓰레기 풀풀 날리는 쓰레기 매립장이나 소각장을 예상했던 필자로써는 정말 부럽게 생각되는 부분이었다.





견학 코스를 돌아보기 위해 소각장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동화의 집같이 너무나 이쁜 건물이 눈에 뜨였다.





이는 시각을 다투는 쓰레기차 운전자들이 건물 안 까지 들어가지 않고도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게 배려한 외부 화장실이란다.
운전자들의 화장실조차도 이렇듯 아름답게 꾸며준 훈데르트바서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피부로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창을 통해 아래로 내려다 보니 순서를 기다리며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주황색 쓰레기차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쓰레기차인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렇게들 깨끗한거야......





견학 코스인 건물의 계단과 복도 곳곳에는 이렇게 훈데르트바서의 작품과 그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가는 곳 마다 붙어 있는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보니 여기가 쓰레기 소각장인지 훈데르트바서 미술관인지 아리송할 정도였고





슈피텔라우 소각장 측은 물론이고 비엔나 시민들이 훈데르트바서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계단과 복도 여기저기에는 훈데르트바서의 작품 전시와 함께 쓰레기 소각장에 대한 소개와
소각 과정을 보여주는 모형들도 자리잡고 있어서 방문하는 관광객들과 학생들의 이해를 도와주고 있었다.




소각장의 하이라이트(?)인 쓰레기 집하장 견학도 빠질 수 없다.
집하장은 상부에서 유리를 통해서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친환경적으로 처리하는 쓰레기라 해도 쓰레기가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는.....^^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중앙 통제실.
이곳에서는 현재 연간 25만 톤의 도시 쓰레기를 처리하여 60MW의 증기 및 전기를 생산, 소각시설 자체 전기로 사용하거나
인근 6만여 세대에 온수를 공급하는 등 비엔나시 아파트 37%에 열 공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 통제실은 일반인들의 관람이 불가능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공개해주신 관계자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한때 도시 한가운데 흉측하게 자리잡고 있어 시민들에게 외면받아야 했던 쓰레기 소각장은 

훈데르트바서에 의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되어 비엔나의 공기를 더 깨끗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각에서 발생하는 여열을 비엔나 6만 가구에 공급함으로 화석 연료의 사용을 줄여 친환경 시설로 거듭나게 되었다.

친환경 소각장이란 기능적인 부분도 물론이지만 훈데르트바서의 멋진 디자인이 더욱 눈길을 끄는 슈피텔라우 소각장은 
현재 각 나라의 공무원들을 비롯해서 5~6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비엔나의 관광 명소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서울시에서도 슈피텔라우 소각장을 견학한 후 훈데르트바서의 디자인을 벤치마킹한 소각장을 노원구에 건립했는데
안타깝게도 건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지역 주민과 서울시와의 마찰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서울시가 중랑구, 노원구, 동대문구의 쓰레기를 함께 처리할 계획으로 하루 800톤 소각이 가능한 소각장을 세웠는데
소각장 주변의 주민들이 타 지역 쓰레기의 반입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
할 수 없이 노원구의 쓰레기만 처리하기로 한다는 임시 협약을 맺고 한동안 노원구의 쓰레기만 처리했는데
서울시는 노원구의 쓰레기만 처리한다면 소각장 가동률의 17~18%만 가동하게 되니 비효율적이라고
다시 타 지역 쓰레기 반입을 주장하고 나서는 통에 주민과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혐오 시설이 들어서게 되면 주민들이 가스통까지 들고나와 격렬한 시위를 하는 것을 가끔 본다.
이는 팽배한 지역 이기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련 기관의 시책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커져있다는 것이 더 문제일 것이다.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이 아름다운 외관은 물론이고
분진이나 각종 유해 물질을 걸러내는 최첨단 장치가 완벽히 갖추어져 있어 공해 물질을 거의 배출시키지 않는데 비해서
노원 소각장은 대기 오염 방지시설인 백 필터(Bag Filter)나 경찰 필터(Police Filter)등의 설비를
예산 부족이나 장소 협소를 이유로 설치하지 않은 것이 주민들의 불신의 이유라고 한다.

이런 일련의 불협 화음이 부디 잘 해결되어 우리의 소각장도 주민의 의견을 반영한 환경 친화 시설이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과 함께
슈피텔라우 소각장의 아름다운 외관만 벤치마킹하지 말고 환경 파괴를 최소화시킨 사례까지 벤치마킹한다면
우리의 혐오 시설들도 아름다운 변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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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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