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산책..............................'에 해당되는 글 123건

  1. 2010.03.11 춘설로 뒤덮힌 아름다운 경주 51
  2. 2010.01.29 주말에 이색 무덤 데이트 어때요? 56
  3. 2010.01.26 경주 봉황대,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64
  4. 2010.01.04 신라밀레니엄파크 담목원의 재미있는 장승 68
  5. 2009.12.31 감은사지의 신비스러운 일몰과 야경 65
  6. 2009.12.20 장인의 숨결 느껴지는 경주 민속공예촌 33
  7. 2009.12.18 신라밀레니엄파크 토우에서 만나는 신라인의 해학 50
  8. 2009.12.11 문무왕을 화장했다는 능지탑지 49
  9. 2009.12.09 스웨덴 쿠스타프 황태자가 발굴한 경주 서봉총 46
  10. 2009.12.07 문무대왕릉, 정말 수중릉일까? 60
  11. 2009.11.24 선덕여왕 드라마 순례여행 떠나기 49
  12. 2009.11.10 덕만 배신한 비담의 난 근거지 명활산성 18
  13. 2009.11.09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문의 가을 35
  14. 2009.11.09 경주 통일전의 찬란한 가을 풍경 41
  15. 2009.10.26 김유신묘에 숨겨진 신비한 비밀 48
  16. 2009.10.12 보량,문희 두 여인을 사랑한 김춘추 61
  17. 2009.09.18 알천, 경주에선 너무 친숙한 이름 117
  18. 2009.06.09 '선덕여왕' 김유신 화랑산채, 미리 돌아보니.. 38
  19. 2009.06.08 '선덕여왕' 미실궁 직접 가보니 55
  20. 2009.05.18 서출지 연못에 하늘이 담겼어요. 27
  21. 2009.05.09 경주에 또 산불 났어요! 24
  22. 2009.04.27 담뱃불이 태워버린 아름다운 소금강산 45
  23. 2009.04.26 영산홍 활짝 핀 동네 산책길 12
  24. 2009.04.10 경주 보문단지에 산불 났어요! 14
  25. 2009.04.06 경주 보문의 봄날 두배 즐기기 45
  26. 2009.04.04 벚꽃 아래서 보는 안압지 야경 36
  27. 2009.03.31 최고급 주택,용머리 새둥지
  28. 2009.03.31 불국사 석등 앞에 줄서 있는 이유는?
  29. 2009.03.31 목련꽃 아름다운 첨성대의 봄날 28
  30. 2009.03.28 꽃남 윤지후 한옥 실제로 가보니.. 9


지난 겨울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고 한다.
강원도 산간 지역에선 내린 눈이 녹지도 않았는데 또 눈이 내려 뒤덮이고......눈이 정말 지긋지긋할 법도 하다.
하지만 경주에선 지난 2월에 눈이 살짝 내렸다가 금방 녹아버린 것 외엔 겨우내내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았다.
9일 아침에도 역시 아침에 눈이 조금 내리다간 언제 내렸냐는 듯 금방 다 녹아버려 모두를 실망시켰다.
그런데 10일 아침, 이상하게 창 밖이 환하여 평소보다 눈이 빨리 떠지길래 혹시나 하여 창을 열어보았더니
이런 놀라운 일이 있나.....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경주를 하얗게 뒤덮어버린 춘설(春雪)이라니....

 그러나 기쁨도 잠시, 도대체 어떻게 출근을 해야 하나.....하는 걱정이 먼저 앞선다.
경주는 워낙 눈이 오지 않는 곳이라 스노체인은 물론 눈 오는 날 운전한 경험조차 없으니 말이다.
할 수 없이 많은 경주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버스, 도보로 출근하느라 정말 북새통인 하루가 되었다.

오후가 되니 길에 쌓인 눈도 많이 녹아서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며 담은 춘설 사진 몇 장을 소개해 드린다.
내년에도 경주의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드린다고는 절대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한창 눈이 내리던 아침 8시의 경주 한전 사옥. 경주는 이렇게 한옥으로 된 공공건물이 많다.


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사적 328호 용강동 고분. 쌀밥처럼 눈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황성 공원에 위치한 경주 도서관, 역시 한옥이라 너무나 멋지다.


경주 시민의 휴식처 황성 공원, 눈이 덮힌 숲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다.


반월성 앞 초지 뒤로 멀리 보이는 숲은 계림. 4월이 되면 이 넓은 초지가 노란 유채꽃으로 가득해진다.


반월성 앞에 위치한 첨성대.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찍다.


 4월이면 벚꽃과 유채로 아름다운 반월성도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안압지 입구에서 본 세 전각.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눈은 하얀 눈은 너무나 정결하다.


장소를 바꾸어서 담아 본 안압지의 전각들. 호수 주위에 눈꽃이 피었다.


눈사람 만드는 연인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이다.


바람이 부니 나무에 쌓였던 눈들이 우수수 연못으로 떨어진다.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서출지의 설경도 일품. 남산에 올라 설경을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여름엔 연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이지만 겨울에는 이렇게 정자의 반영을 볼 수 있는 멋진 서출지.


보문단지로 들어가다 신호 대기 중에 담은 명활산. 비담이 난을 일으겼던 역사적인 산성에 눈꽃이 만발했다.


보문단지 입구 벚나무길이 너무 아름다워 운전 중에 노파인더로 셔터를 눌렀다!  나 미친거 아님...?


보문 단지 전경, 유람선 선착장이 보이고 멀리 엑스포 공원과 경주 타워, 경주 월드가 보인다.


호숫가 산책길이 아래로 보인다. 걸으면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날 것 같은 길.


호텔, 콘도가 보이는 보문 전경. 경주 시내보다 눈이 더 많이 내린 보문단지는 전체가 하얀 세상이 되었다.


한옥으로 된 보문 상가 대부분이 폭설로 인해 문을 닫아 길에 사람 하나 없다.


 오후 햇살을 받아 지붕 위의 하얀 눈이 반짝 반짝 빛이 난다.


상가길을 걸어서 돌아다니는데 사람 한명 만나기가 힘이 든다.


보문단지 안에 있는 국악 공연장도 지붕에 이쁘게 눈을 이고 있다.


사람들로 가장 많이 붐비던 선착장 앞 광장도 인적 없이 고요하기만 하고 호텔들도 너무 심심해 보인다.


산책길에서 본 유람선 선착장엔 유람선도 오리배도 모두 폐업이다.


한국 관광 개발 공사가 위치한 육부촌. 직원들이 나와 열심히 눈을 치웠다.


역시 육부촌의 위엄있는 전각 지붕을 배경으로 한 컷...


진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출사지인 보문정이 춘설 여행의 종점이다.

사람 가슴 설레이게 하는 춘설(春雪).....
이 밤, 자고 일어나면 가버린 님처럼 다 녹아버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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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담력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한밤중에 공동 묘지를 가서 묘지 앞에 숨겨 놓은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는 그런 미션들이 있는데
다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고 무덤 근처에서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기절 초풍해서 쓰러지곤 한다.

만약 경주 사람들에게 그런 담력 훈련을 시킨다면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희희낙락하며 미션을 쉽게 수행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부터 자랄 때까지 커다란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무덤으로 소풍을 가고.....무덤 옆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고.....심지어는 무덤 사이에서 데이트도 하기 때문이다.

휴일 한가로운 오후에 경주 노서리 고분군에서 앉아서 담소를 나누거나 무덤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가 무덤인지...아니면 아주 잘 가꾸어진 공원인지 의심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 곳에 가면 쌍쌍이 데이트하는 연인 또한 많이 만나게 된다.
젊어서부터 무덤 사이를 거닐며 데이트를 하는 경험을 하면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의 당연성을 일찍 체험하게 되고 성숙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만족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해 보며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노서리 고분군의 휴일 오후를 소개해 드린다. 
 

수학 여행 때 들리게 되는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은 담으로 둘러쳐져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시내 번화가 바로 옆에 위치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은 누구나 산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길 동쪽은 노동리 고분군(사적 38호),길 서쪽은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으로 불리운다.
노동리 고분군인 봉황대는 바로 전에 소개해 드렸고 바로 맞은 편 노서동의 넓은 평지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을 소개하면..... 

관련 포스트 :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경주 봉황대

 노서리 고분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크기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130호 고분이다.  

 130호 고분 앞에 작은 규모의 132호 고분이 겹쳐져 보인다. 

제일 앞은 마총(馬塚,말뼈와 안장의 조각이 나와서 마총이다), 두번째 작은 고분은 132호 고분,뒤는 130호 고분,
그리고 오른 쪽은 노서리 고분군 중 제일 커다란 규모의 쌍분 134호 고분이다. 

 134호 고분 앞에 스님이 서서 여인의 가슴 부분과 거의 흡사한 쌍분의 다소 므흣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필자를 계속 살피던 스님이 말을 걸어 왔다.
"이런 걸 왜 사진 찍어요?"
"그냥 자료로 쓸려구요...."
"성이 뭐에요?"
"왜 그러세요.....?"
"내가 아는 보살님과 비슷하게 생겨서요......"
"아...네....그렇군요.....^^;;" 

이 정도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가슴의 여인이라면 누구가 봐도 반할 것 같은데....이 아름다운 자태의 쌍분 위로 낮달이 이쁘게 떠올랐다. 

옆에서 본 쌍분의 모습도 아주 환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엉덩이 가운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다...^^;;
뒷쪽으로 보면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서 아예 길이 생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경주 시내 장난꾸러기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고분 위에 올라가서 야호~한 경험이 있을것이라고...
고분군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몇이나 고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목격되어 괸리인 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쫒아내곤 한다. 



무덤 사이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에겐 고분 뒷길이 손잡고 거닐기엔 딱이다.
 

  자전거 동호회원들도 비스듬히 기대어 지친 다리를 쉬어가긴 딱인 장소이다. 

호우총도 서봉총과 비슷하게 발굴 이후 분구가 없어지고 평토화된 고분이다.
1946년 이 곳에서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王 
十)'이라 쓰인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그 서체가 압록강 건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와 같은
예서체로 되어 있어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고분군의 제일 앞에는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되었던 서봉총.(제일 앞 분구가 없이 평평한 고분이다.)
가운데에는 금관총. 뒤에는 노동리 고분군에 속하는 봉황대 고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겹쳐져 보인다.
 

관련 포스트 :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1921년 부근 주민이 담장을 손보다가 우연히 유물이 출토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이다.
이 때 금그릇,은그릇,금반지,팔찌,유리잔 말안장,토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보게 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그 화려한 모습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세계 고고학계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경주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일제는 우리 고분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되고 무차별로 발굴을 하여 문화재를 출토해내고는
분구도 덮지 않고 내버려 두어 금관총의 모습은 동네 언덕같이 보인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최고의 경제적인 운동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고분 주위를 씩씩하게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도시락 싸 와서 고분 앞 벤치에서 연인끼리 나눠 먹는 것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데이트다.

"우리 같이 무덤 사이로 산책이나 할래요....?"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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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들이 듬성 듬성 들어 선 어느 시골의 자그마한 동산 위에 고목들이 자라는것이 보인다...
라고 사진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 것은 동산이 아니라 1950 년대에 찍은 '봉황대'라는 신라 고분의 모습이다.

무덤에 나무는 커녕 풀 한포기 자라나는 것도 꺼리는 우리네 정서로는 고분 위에 저렇게 큰 나무가 자랄 뿐만 아니라
하도 많이 오르고 내려 아예 큰 오솔길이 난 것이 무척이나 의아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어쩌리...
신라 왕자의 유택이던 이 고분은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람에 날려온 씨앗이 뿌리 박히고 자라서
어느 덧 거목이 되어 이 고분을 보금자리 삼아 자라고 있으니..
그것 또한 세월의 발자국이요....역사의 흔적인 것을.....

경주 대릉원 맞은 편 길 중간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양 옆에 산재해 있는 고분들을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노서리 고분군에 데해선 루비의 정원의 지난 포스트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에서 소개해 드렸고
이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황대'를 소개해 올린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고분 중 125호 고분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써 쌍분이 아닌 단일분 중에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무덤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봉황대'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데 이 고분 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대 흑백 사진에서는 봉황대 바로 코 앞까지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가옥들이 다 철거되고 빈 터에 터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고 휴식처를 조성하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동쪽에서 봉황대를 본 모습인데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 것은 나무들이 매우 크기 때문인 듯....
흑백 사진에 나와 있던 오솔길이 아직도 그 자리가 선명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듯....잔디가 밟혀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나 있다.
골수 신라 여인 '햇빛'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고분 바로 아래까지 미나리밭이 있었고 봉황대의 제일 꼭대기엔 6.25 때 만든 방공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이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단 너무나 친근한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봉황대를 빙~둘러가는 것이 멀다고 꼭 위로 가로질러 넘어다녔단다.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봉황대 꼭대기에 오르곤 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흔치 않던 시절, 봉황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 집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반해
봉황대 위에 오르면 그 공기조차도 아랫동네와 신선함이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도 시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분 위에 누워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헤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고......



봉황대 윗부분에서 어떤 남자가 연세가 오래 된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휜 고목을 열심히 찍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남쪽에서 본 봉황대의 모습은
동쪽에서 본 모습보다 더 안정적이고 따사로운 느낌을 준다.
  



봉황대의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터와 식리총터가 있는데
여기서 금관과 기마 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왼쪽 금령총, 가운데 봉황대, 오른쪽 식이총) 
  

 


금령총(127호 고분)은
1924년 발굴 때에 금관,금령,그리고 유명한 기마 인물형 토기가 나왔다.
5~6세기의 것으로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발굴 후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그냥 터만 약간 돋우어 놓았다.
출토된 금관에 금령(金鈴,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126호 고분)도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고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평평하게 두었다.
식이총에서는 특이하게도 금관이나 은관이 출토되지 않고 거북모양의 테두리 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신발의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실크로드 문화 유입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장식 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이총(飾履塚)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런 아름다운 고분 옆 데이트는 최상급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잔디는 금색으로 빛이 나서 색감의 대비를 이룬다.
 


나무들에 잎이 무성한 모습보다 개인적 취향으론 겨울에 나목일 때가 훨씬 멋지다.


 
뒤틀어진 고목의 줄기는 언뜻 보아도 수백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 보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의 일부분인데 봉황대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봉황대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니......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경주 땅을 배 모양에 비유해 침몰시킬 계략을 꾸몄다.
경주가 봉황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니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않도록 하고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개 쭉지에 금을 넣어 주라"고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든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이야기....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 2010년.....고분의 주인은 티끌이 되어 그 자취도 없어졌지만

고분 위에는 무심한 낮달만이 떠서 봉황대 위 거목들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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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이란 마을이나 절 입구,길가에 세운 사람 머리 모양의 기둥의 통칭인데
일반적으로 지킴이(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승은 벅수, 법수 , 벅시, 수살막이, 수살목, 장승, 장신 등 여러가지로 불리웠으나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부르는 이름이 장승이며 그 다음이 벅수이다.

우리네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속담에서도 장승과 관련한 말들이 많은데
키가 멋없이 큰 사람을 '구척 장승 같다'라고 표현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은 '벅수같이 멍하니 서있다'고 표현했다.

신라밀레니엄파크에는 여러가지 특이한 모양의 장승들을 모아둔 '담목원'이 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장승이 아니고 새로운 형태의 장승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나무 뿌리 부분이 하늘로 향하게 해서 조각한 장승, 신랑 신부가 마주보고 뽀뽀하는 장승,
혀를 날름거리는 장승, 팔을 길게 뻗은 장승.....생긴 모습도 가지가지이다.

사람들은 담목원의 장승을 만져보거나 사진 찍으러 가까이 다가가다가 깜짝 놀라곤 하는데
그것은 장승들이 말을 하거나 노래를 하기도 하고 혀를 길게 뻗어 날름거리든지
입술을 딱딱거리며 소리를 내거나 길게 내민 팔을 흔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신기한 장승들로 인해 이 담목원은 토우공원과 함께 어린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곳으로 유명하다.
전통을 잘 계승하면서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신라 밀레니엄 파크의 장승들을 몇 장의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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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입문하고 사진 관련 장비를 갖춘 DSLR 유저들은 한번씩은 일출 사진과 야경 사진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DSLR 카메라를 사고 2년이 된 필자, 아직 일출 사진을 위한 출사 한번 나간 적이 없었고 야경 사진도 삼각대 처음 사서 안압지 두어번 간 것 외에는 제대로 야경을 찍어 본 적도 없었다.

일출 사진 찍으려고 동트기 몇 시간전 부터 나가서 기다리는 것도 귀차니즘으로 인해 엄두를 못 냈지만  일출 사진이나 야경 사진 모두 다 어두운 곳에서 오랜 시간 인내하며 기다려야 사진 몇 장 건지는 작업인지라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사진을 혼자 찍으러 다니는 필자로서는 시도하기가 힘든 부분이었다........라고 사족을 붙이지만 사실은 구차한 변명일 뿐......^^


사실인즉 일출, 일몰, 야경 사진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 몇번 시도하다 흥미를 잃기도 했을 뿐 아니라 유수하고 막강하신 사진가들의 일출, 야경 사진을 보고 단번에 기죽어서 두손 든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설하고.....웬일인지......시간과 형편이 되어 간만에 찍은 일몰과 아경 사진을 부끄러움 무릅쓰고 살포시 올려보니
어설픈 사진이라도 한눈 살짝 감고 감상해주시길 바라며.....



인가가 거의 없는 언덕 위에 삼층 석탑 두기가 덩그러니 서 있는 감은사지의 야경은 보는 이에게 항상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데
해가 서산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도중에 찍은 사진에는 북서쪽 하늘에 구름이 끼어
서탑의 모습이 선명하지 않고 탑의 조명에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조명이 들어오자마자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진정하며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었는데
그 순간에도 하늘은 급속도로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위의 포인트에서 약간 비껴서 4개의 라이트가 보이게 찍고 나니 금방 하늘이 어두워져 더 이상 찍지 못하고 삼각대를 걷어야했다.
오랜만에 야경을 찍긴 했지만 보여드릴 사진은 달랑 세장 뿐인 것을 이해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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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단지에서 출발하여 불국사 가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길 왼쪽편에 위치한
전통 기와집들의 군락을 만날 수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경주 민속 공예촌이다. 


 토함산 아랫자락 2만평에 여기 저기 자리잡은 민속 공예촌은
소중히 간직하여야  할 선조님들의 얼과 멋과  솜씨를 계승하고자 모인 장인들의 마을. 


경주 시민은 물론 경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이곳은 

 도자공방,금속 공방, 목공예 공방, 자수정 공방, 자수·한복 공방 등 여러 공방과
민속 공예 전시관,신라역사과학관, 예촌공예화랑 등이 기저기에 한가롭게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특히 금속, 도자, 목공, 보석, 석공, 자수, 토기공예 등 18업체의 공방에서는 

 제조 과정 및 전시관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고

 

 수준 높은 공예품을 생산자로부터 싼 가격으로 직접 구매할 수도 있다.    

 특히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는 도자 공방은 방문한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데 

 

  몇몇 공방에 들어가 토기와 도자기 제품들을 집중적으로 돌아본다. 

 할로윈에 쓰면 알맞을 듯 한 호박을 갈라놓은 듯한 도자기. 

  소박한 모양의 함지박 안에 들어있는 호리병. 

 150cm이상의 깊고 오래된 논흙으로 구워 건강에 매우좋은 주전자와 솥. 

 함부로 쓰지 못하고 모셔두어야 할 것 같은 이쁜 꽃이 그려진 함지박. 

 장독 위에 놓여진 토우들도 너무나 이쁘다. 

 흙으로 빚었는데 마치 닥종이 인형같은 느낌이 든다. 

 집에서 실로 이빨 뽑던 그 시절 그 추억이 누구나 떠오르는 장면. 

 투박한 그릇, 섬세한 그릇,  큰 그릇, 작은 그릇... 

 아름다운 꽃을 담기에 부끄럽지 않을 멋진 화분도...  

  오묘한 빛깔로 인해 절로 눈길이 가는 자기. 

  은은한 빛으로 그 품위를 말해주는 다기 세트는 여자들을 유혹하고...  

 때론 이렇게 하나에 수백만원씩 하는 도자기가 있어 만져보다가 모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군데 군데 놓여진 장식 토우들은 까까머리 친구들과 놀던 그 때를 아십니까? 를 연상케 한다. 

 의복은 제대로 된 것이 없고 앞니가 빠진 그 시절 어린이들. 

 연탄 한장 사서 새끼줄에 꿰어가던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다. 

 언덕을 올라서 마을의 뒷편으로 가면 

 신라요를 비롯한 토기 공방이 있는데 토기의 제작 과정과 함께 도자기 가마 등도 돌아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전혀 다른 향가와 만엽가 (http://blog.daum.net/kmb2274)

특히 신라요의 도자기 명장 유호웅 선생께서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화장 기름병 등 드라마 소품 300 점을 직접 재현하기도 했는데....

이곳 신라요에서는 토기 만들기 체험 실습을 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든 도자기는 가마에 구워 택배로 보내주는 서비스도 하고 있으니 
어린이가 있는 가정은 가족 단위 체험 학습을 꼭 해보고 가시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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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밀레니엄 파크의 토우 공원은 신라 밀레니엄 파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다.
1,500년전 신라인의 해학어린 표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토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에서는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1,200개의 토우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아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든다.

천개가 넘는 토우들은 표정이 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 토우, 담 옆에 다소곳이 선 토우.
깜찍한 토우, 웃는 토우, 슬퍼하는 토우, 생각하는 토우, 환호하는 토우, 의심하는 토우,
무서운 토우, 심각한 토우, 고뇌하는 토우, 노래하는 토우, 지휘하는 토우.....

토우의 표정 하나 하나를 담다가 어느덧 토우의 표정과 함께 웃고 찡그리곤 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신라인의 해학이 묻어나는 신라밀레니엄 파크의 다양한 토우들를 몇장의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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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은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허리는 잘룩하며 높이는 108 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이 산에서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으니
나라에서는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에는 나무도 베지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달인이자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 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의 독서당도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와 오늘 소개하려는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자리잡고 있다.  
 

 경주 박물관을 지나 배반동 사거리에서 울산 쪽으로 100 미터 정도 지나 왼편 길로 접어들면
바로 능지탑과 선덕 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차 두대가 교행 할 수도 없는 좁은 산길을 
십여미터 정도 걸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탑이 바로 지척에 나타난다. 

실성왕 12년에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오르고 향기가 피어 올랐다더니만
능지탑을 처음 만난 이날에도 낭산의 바로 위에는 신비로운 구름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 m이다.   

 여느 탑의 형태와는 달리 특이하게 생긴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능지탑 혹은 연화탑으로 알려져왔는데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79 년에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정확한 원형을 알 수 없어 기단부 2 단만 토석 혼합으로 쌓았고    

 2층을 쌓고 남은 나머지 돌들은 옆과 뒷부분에 모아 두었다. 

 기단에는  12 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12 지상 중 3 개는 분실되었지만, 남아있는 9 지상은 비교적 정교하고 뚜렷하다. 

 동쪽은 호랑이,토끼,용(寅,卯,辰)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토끼의 상만이 남아 있다. 

 남쪽은 뱀, 말, 양(巳, 午, 未)의 지신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위는 말의 지상이다. 

 얇은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양의 지신상이다.  

 그리고 서쪽은 원숭이, 닭, 개(申, 酉, 戌)의 형상이 다 남아 있는데  

 얼굴 표정과 갑옷의 표현이 정교하여 마치 손오공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원숭이의 지상과 

 금방이라도 꼬끼오~하고 울 것 같은 닭. 

 서라벌의 멋쟁이 같아보이는 개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쪽은 돼지, 쥐, 소(亥, 子, 丑)의 지상이 다 남아 있는데  

 꿀꿀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돼지의 지상은 주둥이 쪽에서 보면 더욱 리얼하고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는 소의 지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이 날도 햇빛님이 해박하신 문화재 지식으로 능지탑의 이모저모를 잘 해설해 주셨는데
아름다운 손에 시선이 집중되어서일까? 쥐의 지상은 그 형상이 그다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12 지상은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에도 새겨져 있다. 
관련 포스트 : 비오면 비석 이름 바뀌는 신기한 김유신묘

 복원시에 미쳐 다 쌓지 못하고 주변에 쌓아둔 기단석을을 자세히 보면 앞에는 연화문을 잘 다듬었지만  

 뒤편은 자연석 모양을 그대로 두어 탑을 쌓았을 때 무너지거나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탑에서는 발굴 당시 큼직한 소조 불상 파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 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돌의 색깔이다. 

 쌓아진 기단석이나 쌓지 못하고 방치된 기단석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들이 모두 안쪽이 불에 그을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 탑지 안에서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나왔고 이렇게 불타 그을린 흔적이 나온데다 
 삼국사기의 기록까지 있어 이 곳이 문무왕의 화장지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장남이자  통일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일전을 벌여 제압한 후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군주이다.  

거듭된 통일 전쟁을 힘겹게 끝낸 문무왕은 생명의 줄을 놓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숨을 거두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  
그리고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고, 죽은 지 열흘 이내에 화장하라.”
하는 유언을 남겨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은 왕이었다.

   


  
 이렇게 화장된 문무왕의 유골은 감포 앞 바다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양지바른 무덤자리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조성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 
 

바닷가에서 보면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일 뿐 수중릉이 아니다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문무왕의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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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방문하면 곳곳에서 신라의 흔적과 만날 수 있는데특히 시내 중심가 가운데 여기저기 솟아 있는 커다란 고분들은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경주를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면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에는 꼭 들리게 되지만
주택지 한 가운데 위치한 노서동,노동동 고분군은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노서동 고분군 중에서도 서봉총이다.
서봉총은 노서동고분군(사적 제39호) 가운데 하나로 금관총의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며 고분의 일련번호는 129호 고분이다. 
서봉총이란 이름은 스웨덴의 한문표기인 서전(瑞典)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 모양이 장식된 데서 각 한 자씩 따서 서봉총이라 한 것이다.

왜 고분 이름에 스웨덴이라는 표기가 들어갔는지 의아하실 분이 있으실 것인데.....
사실 경주 시내에 있는 많은 신라 고분들은 안타깝게도 우리 손으로 조사한 것이 드물어서 
대부분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발굴 조사하였고
경주시의 개별 고분에 붙여진 번호 125호 고분,130호 고분.....등의 이름도 그들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금관총, 일제가 발굴 조사를 한 후 봉토도 덮지 않고 버려두어 아직도 이렇게 흉물스런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금관총이 우연히 조사된 이후 (금관총은 서봉총 바로 옆에 있다)
경주 고분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진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러한 출토 유물에 대한 욕심이 서봉총의 발굴조사를 추동했다.


이때가 1926년인데 마침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 6세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일본은 쿠스타프가 고고학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고분발굴이 한창인 경주에 그를 안내하였던 것이다.
위 사진은 경주에 도착하여 발굴중인 고분의 내부조사를 할 수 있게 배려받은
아돌프 황태자가 고분을 직접 발굴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그 뒤에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그의 부인인데 이들은 후에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다. 



발굴된 출토품 중에는 쇠솥 2개와 각종 토기,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는 신라의 전형적 형태의 금관이 주목할 만 한데
금관 안에 3마리의 봉황 모양 장식을 붙인 십자형의 내관(內冠)이 있어 서봉총이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서봉총은 금관총처럼 발굴 후 봉토를 덮지 않아 봉분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경주 시내 고분 중에서는 이렇게 일제가 발굴한 후 봉토를 덮지 않아 평토화된 고분이 부지기수이다.
무덤 속에 누워 있던 신라왕들과 왕족들이 무덤 속에서 일어나 통한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뒷부분의 큰 고분은 130호 고분이고 앞에 야트막하게 평평한 부분이 서봉총인데
발굴 전 고분은 남북길이 52m, 동서길이 35m, 높이 7m 정도였고
주위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어 봉토의 상당부분은 이미 깎여나간 상태였다는데
발굴 후 다시 봉토를 원래대로 쌓은 천마총(박대통령 시절에 발굴했다) 같은 고분과는 달리 봉토를 쌓아놓지 않아 그저 평지처럼 보인다.

서봉총을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쌍분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전체적으로 땅콩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봉토와 상석도 없는 서봉총 앞에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서봉총 발굴 참가 기념비가 떡하니 서 있다.
당시 쿠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국왕이 된 후에 아돌프는 한국을 방문하는 간호사들에게 최부자집의 안채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 올 것을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최부자는 이방인에게 여인들만이 기거하는 안채 출입과 구경을 철저히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1994년에 쿠스타프가 다시 서봉총을 방문하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가 서봉총 맞은 편에 자라고 있다.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할 당시에 일인들은 발굴 현장에서 황태자가 좀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이미 출토되어 이미 수습되었던 고급 유물을 현장에 다시 놓아두는 등의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최고급 문화재가 일본의  외교전략의 수단이 되어 파헤쳐졌던 가슴 아픈 이야기인 것이다.

일본은 자기네들의 규모가 큰 고분은 천황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조사를 금지하고 있었던 터였다.
자기네 나라의 고분은 철저히 보존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조선의 고분을 파헤친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실로 불쾌하기 그지 없고 지금도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다.


세월이 흘러 무덤의 주인인 이름 모를 신라 왕자의 유택은 평토화되고
외국의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사실만이 부각되어져 있는 서봉총을 마주하니

씁쓸한 기운만이 한바탕 무덤을 휘....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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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무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바다 속에는 수장된 왕의 무덤이 있는데
이 바다 속 무덤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수중릉이다.
대왕암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수중릉은
신라인들의 호국 정신과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인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죽으면서 자신의 유해를 화장을 하여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문무대왕릉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고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고....

무왕릉이 수중릉이냐.....유해를 뿌린 산골처냐.....하는 두 견해는 오래 전부터 팽팽히 맞서 왔다.
수중릉이라고 하는 견해는 한장의 거석이 암초에서 채취한 것이 아니라 인근 육지에서 운반되었다고 보며 
방향이 정확히 남북을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앙에 인공으로 동서로 긴 수로를 만들었다는 점을 들어 수중릉이라 주장하고 있다.

산골처라는 견해는 가운데 놓인 돌이 인공적인 석관 덮개가 아니라 자연석으로 보는 주장인데
문무왕 비문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 등이 '삼국사기'의 내용과 똑같이 적혀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논쟁의 진위 여부는 덮개석을 들어내고
그 밑에 사리장치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문무왕의 국가에 대한 혼과 의지가 깃들어 있는 신성한 자리를
과학적인 조사를 위하여 들어낸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유해를 바다에 장사지내어서까지 왜구에게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왕의 구국 충정은 그 정신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지
그 안에 유해함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견대(利見臺)는 문무대왕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는데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은 것이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이 왜구의 진압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하였으나  마무리 하지 못한 감은사를  치세 2년 만에 완공을 하는데...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고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利見臺)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견대에 올라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부왕의 충정에 효심으로 답한 신문왕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다.
 



경주에 오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은 경주 시내와 불국사 등을 돌아본 후
외곽지의 유적들은 잘 보지 않고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보문을 지나 추령 고개를 넘어 동해 바다 가는 길로 들어서서 감은사지와 이견대, 문무대왕릉을 돌아보고
감포에서 싱싱한 회 한 접시 드신 후 가신다면 최고의 추억을 담아가는 경주 여행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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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지의 추억으로나 떠올려지던 경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기로 인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들 가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는 형편인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경주에서 어디서 무엇을 둘러 보아야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선덕여왕 드라마 관련 유적지를 휘리릭....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해드린다.


제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그 모습이 엎드린 이리(狼)의 모습이라 하여 낭산(狼山)이라 불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다 묻어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낭산에 릉을 썼는데 여왕 사후 30년이 지나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칭하므로
이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설화, 여근곡 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機三事)'로 불리운다.




사실 드라마가 뜨기 전까지 선덕여왕릉의 위치는 경주 사람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왕릉의 대접을 받는 김유신묘가 송화산 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가는 도로의 좌측에 위치해 릉에서 한참을 지나 유턴하지 않고는 진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왕릉 입구도 애매하다.
경주 시내 유적지마다 위치한 유적지 관리 사무소는 이곳에는 없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없고 차를 주차할 공간도 마땅하지 않는데
올해에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탐방객이 늘어나자 사천왕사지 앞에 겨우 몇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놓은데에 불과하고
차에서 내려서도 채소밭, 과수원, 소나무숲길...등 진입로같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릉이 나온다.



일년만에 다시 찾아본 선덕여왕릉은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던 작년보다는  어느 정도 릉 주변이 정화되어 있었지만
경주에 위치한 다른 릉에 비해서는 확연할 만큼 무덤의 떼가 잘 살지 않고 엉성하게 벗겨져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간에 드라마의 명성을 힘입어 외지에서 찾아온 분들이 제법 보였는데 릉 앞에 서신 분들의 태도는 다른 릉에 비해서 숙연하기만 하고
참배 왔던 분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박카스, 귤등이 상석 위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선덕여왕릉을 나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면 바로 건너편으로 통일전 가는 길이 나오는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세 영웅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아들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과 그들이 업적이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는 아니나 사계절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꼭 들려보야야 할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통일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낭산을 끼고 보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동네가 보문동인데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79년에서 632년으로 무려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당나라와 수교하고
대내적으로는 위화부, 선부서,예부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광법사 들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 힘쓴 훌륭한 왕이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힘없고 나약하여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더러
머리도 새카만 젊은 나이에 실권을 덕만에게 넘기고 일찍 사망하는 것처럼 왜곡 표현되기만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진평왕릉 역시 관리 사무소가 없고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진평왕릉의 주위는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며
주변이 너무나 호젓하여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 놓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한참을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인의 말로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의 진평왕릉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니 카메라를 가지고 석양 즈음에 다시 한번 가보아야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보문단지쪽으로 500m 정도가면 보문 호수 입구 바로 오른쪽에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명활산성은 지금까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비담의 난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곳이니 꼬옥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활산성을 둘러보신 후에는 보문 호수를 지나 엑스포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가볼 것을 권한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민속촌처럼 신라시대를 재현한 역사 체험 테마 파크인데
20여년전에 경주 보문에 역사 문화 체험 민속촌을 계획하고 건설하던 도중 워낙 방대한 공사 규모로 인해 부도가 나서
거의 십여년을 버려져 있던 마을을 삼부토건에서 매입하여 새롭게 조성해서  '신라 밀레니엄 파크'로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및 대형 사극 '천궤의 비밀', '여왕의 눈물', '화랑의 도'공연을 매일 관람할 수 있다 .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을 위해서 20여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 세트장을
직접 둘러 보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미실궁 앞에 위치한 김유신 화랑 산채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서 새로 지은 것인데
필자의 드라마 관련 포스트에 선덕여왕 촬영 당시 이요원,엄태웅,고현정...등 중요 배역의 직찍 사진이 있으니 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길 바란다.

김유신 화랑 산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공연장 역시 드라마에서 문노와 설원랑, 미실의 난 중의 출병 장면 등 드라마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곳.
여기서는 매일 2회씩의 '화랑의 도' 공연이 열리는데 화랑들의 검술과 신기에 가까운 마상 무예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장이다.



보문단지를 나와 시내쪽으로 와서 꼬옥 가보아야 할 곳은 당연히 첨성대.
과학적 건축 양식으로 주목을 받는 첨성대는 드라마에서는 엉뚱하게도 덕만이 공주 시절에 조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 조성시기는  '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인 서기 633년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는 632~647년으로 보는 바,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2년째에 쌓은 것이니
덕만이 공주 시절에 첨성대를 만들고 어쩌고...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첨성대 바로 앞에는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는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사다함을 추억하는 장면이라든지
소화가 어린 덕만을 안고 탈출하는 장면 들 많은 장면이 반월성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반월성 앞 수만평의 너른 초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유채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여름이면 황화 코스모스와 연꽃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며
반경 500m내에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계림,대릉원, 최부잣집....등 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서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어도 하루해가 부족할 정도이다.



반월성에서 대릉원 앞을 지나 최부잣집, 월정교 복원 현장이 있는 교동에 이르면 사마소 바로 옆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매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다시 백제군이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는다.
유신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병사를 시켜 자기 집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한다.
물을 다 마신 다음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이구나!" 하면서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는 멋진 기록.
지름 1.8m, 깊이 5.7m인 이 우물은 아직까지 남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밀집한 시내를 벗어나 서천으로 불리는 형산강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으로는 무열왕릉 , 오른쪽으로는 김유신묘가 위치해 있는데
왼쪽길로 1km정도 가면 선도산 동쪽 사면에 거대한 원형분 5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밑둘레 114m, 높이 약 8.7m의 거대한 릉이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은 왕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릉 동쪽에서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릉이 무열왕의 릉임을 알려준다.



무열왕릉을 나오면 반대편에 있는 김유신묘로 향하는 것이 좋다.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고 주변 숲도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김유신 묘 앞에 서 있는 오른쪽 비석에는 비오는 날에만 글씨가 바뀌는 신비한 비밀이 있으니 비오는 날 경주를 방문하시면 꼬옥 방문해 보시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분은 김유신의 무술 수련 장소 단석산에 올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단석산은 경주시 경계에 위치한 산 가운데 제일 높은 산으로 높이는 827m 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서쪽에 위치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단석(斷石)이 정상 부위에 있다.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들은 어린 김유신이 백만돌이처럼 하나,둘...세면서 쉴새 없이 검을 내리치던 장면과
엄태웅이 연기한 김유신이 산 정상에서 백만스물하나..백만스물둘....(^^)하면서 끝도 없이 바위를 목검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김유신이 내리쳐서 두동강이 났다고 전해오는 바위를 산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꼭 가보셔야 할 명소가 단석산이다.


필자가 언급한 유적지 외에도 경주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 씬과 문노가 앉아 있던 멋진 나무가 있는 암곡 등....미쳐 소개하지 못한 선덕여왕 촬영지 또한 너무나 많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드라마 선덕여왕, 곧이어 비담의 난이 전개될 것이고 선덕여왕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신화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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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49회는 완전 미실과 비담을 위해 쓰여진 극본인 듯 하다.
주연인 덕만과 유신의 존재감은 극히 미약한데 반해 미실과 비담에만 온통 드라마의 촛점이 맞추어졌으니.....


선과 악을 넘나드는 야누스적인 캐릭터로 언제 숨겨진 잔인성을 발휘하여 등을 돌릴지 항상 아슬아슬함을 주던 비담은
염종의 꼬드김에 귀가 한껏 얇아져 있는데다가 덕만의 명을 받고 나무 아래서 파낸 비서(秘書)가
막상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였다는 것을 알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비록 자신을 버린 어머니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를 전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미실에게서 돌아온 비담은 땅을 파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는 거짓말을 덕만에게 하게 되고
미실은 세종과 하종에게 비담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전하는데....
50회에서는 미실이 죽게되는 과정과 함께 절대 충성하던 비담이 덕만에게 배신하게 되는 과정이 서서히 전개될 듯 하다.

드라마에서 진지왕과 미실간의 사생자로 등장하는 비담(毗曇).

사실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전혀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누구의 아들인지....그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파기된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비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선덕여왕 재위 말기인 645년에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었으며
647년(선덕여왕 16년)에 비담의 난을 일으켜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다 반란을 일으킨지 10일만에 진압 당한 뒤
동조하여 난을 도모한 30 여명의 진골 귀족과 함께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비담의 가계는 구족(九族)이 멸하였다는 기록 뿐이다.


비담은 상대등이 된 후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유신, 춘추와 경쟁하게 되는데 점차 세력이 밀리게 되자
"여왕은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선덕여왕을 폐히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는 심히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는데
왕이 안에서 막아내자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유신, 춘추는 월성에 진을 쳤는데 공방이 10 여일이었지만 풀리지 않았다.

그 때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비담은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비담군은 사기가 충천해져 군사들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선덕여왕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유신은 여왕의 근심을 지혜로운 언사로 달래주고
경주 율동의 성부산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연에 매달아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리에 말을 퍼뜨리기를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반군들이 의심하게 하고
또 흰말을 잡아 제사를 하며 여러 장졸을 독려하며 싸우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충천하게 되어 10일만에 난을 진압할 수가 있었다.

이에 유신은 패주하는 비담 등 주모자를 잡아 목을 베고 그의 구족(九族)을 멸하는데
그 사이에 병환이 심했던 선덕여왕은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게 되고 
진덕여왕이 신라 제28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비담은 분명 진골 귀족들의 수장좌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에 오를만큼 당대 최고위 귀족이었지만
반역을 꾀한 죄로 역모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은 모두 파기된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더욱 출신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동안 신라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우리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했던 비담..
선덕여왕 비담의 유명세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 둘 찾기 전에는 세간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던 비담의 근거지, 명활산성을 찾아가 본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진입하다 보면 길이 둘로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보문호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음식점들이 있는 곳 바로 끝부분에 위치한 명활산성의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많은 분들이 찾는 보문단지 입구에 비담이 난을 일으켰던 근거지가 있다고 하면 처음 들었다고 놀라시는 분이 더 많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안내판을 지나면 비포장길을 100m도 채 들어가지 않아 바로 나타나는 산성이 바로 명활산성이다.


명활산성(明活山城)은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신라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으로 인정받아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활산성은
근래에 와서 일부 복원,축조되었는데 복원된 부분은 안팎이 돌로 짜여있으며 길이 50m, 높이 3m 가량의 2단으로 쌓았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또한 '명활산성작성비'가  1988년 석성(石城)의 북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데 

명활산에 산성을 쌓고 세운 기념비인 높이 66.8의 이 기념비는 현재 경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성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혀 있는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꽉 차게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①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 축조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 축성공사 실무자의 이름 및 담당거리,
④ 공사담당 위치, ⑤ 축성참가자의 수, ⑥ 공사기간, ⑦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첫머리의 '신미년'(辛未年)이라는 간지는 551년(진흥왕 12)으로 추정되며,
공사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은 성곽 축조 규모 및 인력 동원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비에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상인나두'(上人邏頭)·'장인'(匠人)·'서사인'(書寫人) 등의 여러 직명도 기록되어 있어
남산신성비와 함께 신라시대 사회제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비담의 난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법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인 김유신과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는데
이로써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비담의 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갔고 이들이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제가 실시된다.
이후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신라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신라 중대(中代)가 시작되었으며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의 신귀족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선덕여왕, 미실의 죽음도 눈앞으로 다가왔다.
덕만의 강적 미실이 죽고 나면 이제 비담이 덕만의 주적(主敵)이 되는 일만 남아 있는데
덕만을 흠모하며 덕만에게 완전한 복종을 하고 있던 비담이 어떻게 덕만에게 발꿈치를 들게 할지는 오로지 작가의 펜끝에 달려 있을 듯....
야누스적인 캐릭터지만 미워하면서도 배척할 수 없는 나쁜 남자 비담의 앞으로의 역할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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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가는 가을날에 찬란한 가을빛을 

눈으로...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경주에서도 남산 최고 명당 자리에 위치한 통일전. 
그 이름에서 대충 짐작이야 하시겠지만 통일전이란 곳은 통일 신라 시대 유적도, 조선 시대 유적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삼국 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국민의 전당이다. 
 

통일전은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고 본받자는 뜻으로 건립된 만큼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교육원과 함께
초중등학생들의 이념 교육장 형태로 이용되어 왔으며 경주를 찾는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곳은 특히 바로 옆에 서출지가 있고 남산 답사를 위해서는 꼭 거쳐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잠시 들려 둘러보고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더우기 통일전으로 들어가는 2km의 진입로는 환상적인 은행나무길로 유명하고 


주차장에 들어서서도 방문객들의 탄성이 이어지는데 
주차장 주변이 온통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단풍으로 어우러져 가히 환상적인 경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곳의 느티나무는 단풍나무보다 더욱 빨갛게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내곤 하는데

 느티나무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할 정도로 고운 색을 자랑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수련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아직도 몇 송이 남아 있는 수련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 준다.

 이 연못 주위의 벤치는 남산 답사로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기에 안성맞춤이고 

 연못 건너편의 금강 소나무 숲 주변 산책로는 솔향기가 그득하다. 

 너른 경내에는 귀한 수목들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뽐내는데.... 

 목련잎도 노란 물이 이쁘게 들었고... 

 단풍의 고운 자태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매일 매일 낙엽을 쓸어야 하는 관리인 아저씨의 마음 속에도 고운 단풍의 빛깔이 남아 있겠지..?
 

정문을 지나 너른 정원을 지나면 흥국문(興國門)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흥국문을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옆으로 난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본다. 

 담장 옆에서 본 목련은 또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 오고...  

 담장 기와 위에 떨어져 소복이 쌓인 솔잎은 가을의 정취를 한결 더하여 준다. 

 흥국문(興國門)이라고 쓰여진 현판....나라를 일으키라는 뜻으로 이름한 문이겠지?  

 흥국문을 지나면 두번째 정원이 나오는데 저 멀리 계단 위에 또 문이 하나 보인다. 

 흥국문을 지나서 나오는 두번째 정원에는 사적비(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를 비롯하여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제일 왼쪽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사적비가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는 문무대왕의 사적비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사적비이다.

 두번째 정원에서 본전이 있는 마지막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서원문(誓願門)이다.
삼국 통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 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이리라.. 

 서원문을 들어서면 본전인 '통일전'이 그 위용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울긋불긋한 단청을 칠하지 않고
서까래는 연갈색으로, 기둥과 벽은 하얀색으로 칠하여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을 주는 전각이다. 

 통일전(統一殿)이란 현판 아래 전각의 문 또한 순수하게 하얀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본전 안에는 삼국총일의 대업을 달성한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제일 왼쪽에는 태종 무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무열왕의 얼굴은 비교적 자애롭게 그려져 있어서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선덕여왕에서 김춘추 역을 맡았던 유승호가 나이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혼자 상상해 본다.

 왼쪽에 모셔진 문무대왕의 눈꼬리는 올려져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무열왕과 문무대왕의 영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오른쪽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으로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또 본전을 돌아가며 사면에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전각의 옆과 뒷편 회랑을 따라 삼국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전시되고 있다.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된 17점의 기록화는 그림 보존을 위해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지라
반사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회랑의 구석에서 본전과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맛인데 특히 여기서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궁'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회랑의 양쪽 코너에는 누각이 두개 있는데 신 벗고 올라서 보니 통일전 경내와 저 아랫 마을까지 훤히 다 보인다. 

 왼쪽 누각에서도 아름다운 경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누각에서 바란 본 풍경은 느티나무,은행나무,반송,목련...각가지 나무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대궐이다.
 

서원문 앞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 아래 은행나무가 줄지어 사열하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전을 다 돌아본 후 은행나무길로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차창을 내리고 비행기 날개처럼 팔을 길게 옆으로 뻗어 보았다.
옆으로 스치며 지나가는 세찬 바람 소리...
이 가을.....이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날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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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되기 전까지 신라시대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화랑정신을 자라는 청소년에게 강력히 심어주고 싶었던 박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는지
국사책에서도 중점적으로 나오곤 했는데...

경주 지역에 와서도 지금껏 관심받지 못했던 선덕여왕의 자취보다는 김유신의 자취를 찾는 것이 더 쉽다.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경주 톨게이트에 세워진 동상은 물론 

경주 시민의 휴식처 황성공원 언덕에도 김유신 동상이 서 있어 밤에도 환하게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그가 죽은 뒤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조(租)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후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며 사람을 배정해 무덤을 수호하게 했으며



뒤에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여 무덤의 양식은 왕릉이나 다름이 없다.



원형분인 봉분의 둘레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호석,護石)을 돌리고 
12방위의 둘레돌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겨 위엄을 더했다.



경주의 다른 왕릉에도 지신상이 있지만 조각의 우수함이나 모습의 거대함은 이 무덤의 것이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지신상의 크기는 각각 세로 96㎝, 가로 61㎝정도인데 모두 문관복을 입고
발을 양옆으로 벌린 정면상이나 몸과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한 측면상이다.
얼굴은 방향에 따라 해당되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손에는 삼지창이나 검 또는 도끼 등의 무기를 들고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십이지신상의 모습을 하나 하나 살펴본다면.....
 

 
                                       쥐                                                                                소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또 봉분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김유신이 죽은 후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른 후 묘비를 세웠지만 
그 묘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조선
조선 숙종36년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뒷면에는 崇禎紀元周甲後庚寅(숭정기원주갑후경인)라고 적혀 있다.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서편 비석의 묘비와 동편 비석의 묘비를 비교해 보는데 동편 비석 아랫 부분 마지막 글자가 이상하게 보인다.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이란 비명의 제일 마지막 글자가 다른 글자와 겹쳐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가 오면 비석의 글자가 릉(陵)에서 묘(墓)로 바뀐다는 바로 그 비석이다.



경주 문화재 지킴이인 솔뫼님을 만났을 때 비 오는 날 김유신장군묘의 비석을 한번 살펴보라고 하던 것이 생각나서
비가 오는 날 다시 김유신장군묘에 가보았는데 충분한 양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런지 글자가 다소 선명치 않다.
할 수 없이 땅바닥에 고인 물을 손으로 퍼서 글자를 적셔 보았더니 묘(墓)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가 무슨 이유로 비석의 묘비명을 바꾸어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 현상은 김유신묘를 찾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재미을 주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 경주에 와서 김유신장군묘를 찾는 분은 이 재미있는 비석의 글씨를 더 잘 관찰할 수 있겠지만
혹 맑은 날 방문했다 하더라도 문화 해설사 분들께서 비석에 물을 부어가며 재미있게 해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다가오는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선덕여왕과 관련된 경주 여행을 한번 계획해 보심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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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의 최종'병기 김춘추.
도대체 누가 주연이고 조연인지 모를 만큼 드라마에서 덕만보다 춘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한데
활짝 웃는 유승호가 클로즈업되며 드라마가 끝나면 보는 사람 또한 자신도 모르게 따라 미소를 짓게 된다.
너무나 훈훈하게 자라준 유승호를 보면서 흐뭇하지 않은 여성 시청자는 별로 없을 듯 한데
'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춘추는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고 하니
춘추 역으로 유승호를 기용한 것은 정말 완벽한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신라 제 29대 임금으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춘추....
아버지는 금륜태자의 아들 용수공이며 어머니는 어머니는 진평대제와 마야부인의 딸인 천명공주이다.
어린 시절에는 조용하고 말이 적었으며 사색이 깊은 아이였으나 권력 관계와 인간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으므로 
춘추의 커다란 뜻을 간파한 유신은 그를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받들고 군(君)으로 받들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연대는 춘추가 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결혼함으로 더욱 돈독해지게 되고 이어 두사람은 세력을 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게 되는데...
 


그럼...춘추가 문희와 결혼하게 된다면 선덕여왕 37회에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는 보종의 딸 보량은 어떻게 된건가?
춘추와 보량 사이의 러브 라인이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고 두사람의 애정 전선에는 이상이 없어 보이던데 ....
그렇다. 쉽게 말하면 신라의 미소년 공자 김춘추는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였으니 절묘한 '양다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겠다.



아끼던 명마의 목을 단 칼에 자를 정도로 결단력이 있던 김유신에게는 보희, 문희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유신의 동생 보희는 '서악(경주 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온 서라벌이 오줌으로 가득 차는 꿈을 꾸게 된다.
보희는 참으로 망칙하고 불길스러운 꿈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아침 동생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문희는 즉석에서 보희가 꾼 꿈을 사겠다고 제안한다.
불길한 꿈을 팔게 되어 기뻐한 보희는 무엇을 주고 꿈을 사겠느냐고 물으니 보희는 '비단치마'를 주겠다고 답한다.
흡족한 거래가 성립되어 문희가 옷깃을 벌리자 보희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고 말했고 문희는 보희의 꿈을 정식으로 사게 된다.

당시 비단치마는 국제 무역을 통해 수입되는 고가품이었는데 
'삼국유사'는 태종 무열대제 때의 포목 한 필 값이 벼로 30섬 혹은 50섬이라고 적고 있으니
지금 시가로 따져서 수백만원쯤 되는 포목보다 훨씬 비싼 비단치마를 꿈값으로 치룬 것이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망칙하게 들릴 수 있고, 개꿈이라고 버릴 수도 있는 꿈을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문희는
보희가 꾼 꿈에 내재한 가능성을 보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다.

열흘 후 유신은 춘추와 함께 축국(蹴鞠,제기차기)를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치마를 밟아 옷섶의 고름을 떨어지게 한다.
이에 유신은 자기 집에 가서 옷고름을 꿰매기를 청하며 춘추를 집안으로 불러들인다.
유신은 보희에게 춘추의 옷고름 수선을 맡기고자 하나 보희가 병중이었으므로 이에 문희가 나아가 바느질을 해주게 된다.
유신은 문희가 춘추의 옷을 바느질할 때에 '일부러 피하고 보지 않았다'고 하니
여동생을 매개로 하여 춘추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려고 하는 유신의 전략이 잘 드러나 보이는 부분이다.
유신이 깔아준 멍석....아무도 없는 집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불붙게 되고 1년쯤 지나자 문희는 임신을 한다.


이때 이미 춘추는 보종의 딸 보량(보라궁주,宝羅宮主)와 결혼해서 딸 고타소를 낳은 상태였다.
보량은 매우 아름다웠으며 춘추와 매우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는데 당시 춘추는 보량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량으로 인해 춘추는 임신한 문희를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할 뿐 아니라 문희를 멀리하게 된다.


 김유신의 집터에 남아 있는 우물 재매정(財買井). 유신의 집터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도산은 지난 5월 9일 일어난 산불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문희를 멀리하는 춘추의 태도에 다급해진 유신은 자신의 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신라 최대의 불쇼'를 벌이게 되는데
사전 계획에 따라 자신의 집 마당에 장작을 높이 쌓아놓고 임신한 문희를 꿇어 앉히고는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어찌 된 일이냐?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
하며 크게 꾸짖으며 어름장을 놓아도 데 문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유신은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고 온 서라벌에 소문을 퍼뜨린다.

그 때 춘추는 덕만을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는데 유신의 집에서 연기가 하늘로 자욱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공주가 유신의 집에서 나는 연기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좌우에서는 유신의 누이가 부모의 허락 없이 아이를 가져 화형에 처한다고 아뢴다.
이에 덕만은 누구의 아이냐고 되묻자 옆에서 듣고 있던 춘추,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며 용서를 구한다.
덕만에게서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는 질책을 들은 춘추는 
황급히 유신의 집으로 가서 화형 당하려는 문희를 구하게 되고 이에 포사(鮑祠,포석정)에서 길례를 행하여 문희를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얼마 안 있어 보량은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고 문희는 보량의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니 문명황후(文明皇后)이며
그녀의 장자인 법민은 바로 문무대제(文武大帝)이다.

김춘추의 정실 부인이 되었지만 유신과 문희는 춘추의 배신 행위에 대한 앙금이 오래 갔다고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진정으로 화해한 때는 선덕여왕 11년(642)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백제군에게 전사했을 때이다.
고구려 사신길을 자청한 춘추가 "이번에 내가 고구려에 가서 저들에게 해를 당한다면 공은 무심할 것인가?"라고 묻는데
매부가 죽어도 가만히 있겠느냐는 말은 둘의 관계가 정상이 아님을 뜻한다.
이에 유신이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의 말발굽이 고구려, 백제 두 임금의 대궐 마당을 짓밟아버릴 것"이라고 답하여 
둘은 화해하게 되는데 이는 곧 신라 왕실의 핏줄과 가야계 군사력의 결합이기도 했다.
그 결과 김춘추는 성골 출신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 뒤를 이어 신라 29대 왕에 등극,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는다.


후일의 역사서에서는 남성들의 사적만이 기록되어 있지만 춘추와 유신의 정치적 결속에는 문희의 활약이 지대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가의 비단치마를 아낌없이 투자한 그녀의 비젼은 훗날 김춘추와 그녀의 자손들이 대대로 신라 왕실을 장악하는 위대한 유산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문희는 진정으로 멀리 내다 보는 혜안을 가진 슬기로운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통찰력이 부족하여 자신이 꾼 꿈을 비단치마와 바꿔버린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이에 춘추는 보희도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과 개지문을 낳았으니 김춘추는 문희,보희 두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맞아들인 셈이 되는데
유신, 춘추, 문희, 보희를 주축으로 벌어진 이 이야기는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같은 신라 최대의 리얼 스캔들이다.

드라마에서 현재 보량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춘추.
41회에서 춘추는 보량을 납치하듯 자신의 근거지로 데려오고 보량과 춘추의 결혼 문제로 세종 측과 설원랑 측은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앞으로 드라마의 전개가 어떻게 펼쳐질른지는 작가의 펜끝에 달려 있지만
선덕여왕에서 춘추와 보량, 문희의 삼각관계는 시청자에게 기다려지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보량역의 박은빈은 성공적으로 시청자에게 얼굴을 선보였는데 문희역의 배우역에는 또 누가 캐스팅될른지...?
벌써부터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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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에 소개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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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포스를 물리치고 단연 인기를 끌고 있는 비천지도의 화랑 알천랑.
알천(閼川, 577~686)은 역사적으로도 선덕,진덕여왕 시대 최고의 무장이며
신라 최고 의정 기관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을 역임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알천랑은 신라를 건국한 공신인 소벌공의 25대손으로 '알천'은 젊은 시절 이름이고 본명은 '소경'이다.
(성씨는 진주 소씨로 소지섭의 조상님이 되신다는...^^)

한 세대를 주름잡았던 알천의 업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선덕여왕이 듣고
두꺼비의 성난 눈의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므로 나라의 서남쪽 변경에 있는 옥문곡에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을 예지하고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마침 백제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 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그들을 쳐서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선덕여왕 7년 겨울 10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과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덕여왕 당시 술종,·임종,·호림, 염장, 유신
등과 함께
나라 일을 논의하기 위해 남산 우지암이란 곳에서 회의를 연일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좌석으로 달려들어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피하였지만
알천은 그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었을 뿐만 아니아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바닥에 던져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알천의 담력과 용맹은 당대 최강이었을 듯.....

그는 선덕여왕 7년(638)에 이찬 등을 지낸 뒤 각간(角干)에 올랐고
당시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회의 의
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이 화백회의 의장이었을 당시,
회의의 구성원은 술종, 임종, 호림, 염장, 유신
등이었다.
647년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진덕여왕 1년(6
47)에는 반란으로 죽은 비담
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였으니
알천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실력자라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알천은 화백회의에서 섭정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며 김춘추에게 양위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니 김춘추(유승호)는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
(太宗武烈王)이다.

당시에는 성골에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
알천이 정치적인 욕심이 있었더라면 왕위를 한번 노려볼만도 한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배경에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신흥귀족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
치적 책략이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무열왕 3년(656년) 무열왕은 신라개국공신인 소벌도리에게 문열왕(文烈王)의 시호를 내렸는데
일설에는 왕위를 양보한 알천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그의 선조인 소벌공을 문열왕으로 추봉하였다고도 한다.
그후 알천은 늦도록 손자가 없다가 꿈에 선조 소벌도리가 지목한대로
660년 3월 2일 금성에서 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뒤 며느리 석씨가 손자 복서를 낳았다.
이에 손자가 태어난 기쁨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천에서 경(慶)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알천은 581년에 태어나 6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110세로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린 인물이다.


알천랑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알천'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한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선덕여왕에서 이승효의 열연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경주 사람들에게 '알천'이란 이름은 경주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를 가려면 보문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강변을 따라서 보문단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덕동댐에서 시작하여 보문호수에 고였다가 경주시내를 관통하여 서천(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주의 중심을 흐르는 이 강이 바로 '북쳔(北川)'으로도 불리우는 '알천(閼川)'이다.



경주에서는 알천의 이름을 가진 지명을 강 인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알천을 따라 뻗은 북쪽 도로의 이름은 알천 북로이며 



알천의 북쪽 수직으로 뻗은 도로는 알천길이다.



주소에서도 알천길이라는 명칭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수퍼 이름도 알천 수퍼이다.



알천에 가로놓인 교량은 4개가 있는데 그중 교육청과 소방서를 연결하는 교량의 이름은 알천교이다.



특히 알천변의 고수부지에는 테니스장, 정구장, 족구장, 게이트볼장 등 체육시설과
인라인, 자전거, 산책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멀티풀 산책로가 갖추어져 있어 경주 시민의 휴식처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보문 입구에서부터 공설운동장 입구 경주축구공원까지 10개소에 이르는 잔디 축구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해마다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를 비롯하여 국가 대표 축구팀의 단골 전지 훈련 장소로 쓰이고 있는 경주의 자랑거리이다.



알천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경주의 알천과 관련된 지명을 소개하니
경주 알천이 알천랑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가...... 하고 오해하는 분도 계신 듯 하다.
하지만 알천의 역사는 육부촌 시절의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니
오히려 경주를 흐르는 중심 강인 알천의 이름을 따서 '알천(閼川)'이라고 이름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을 듯 하다.
그 점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


경주 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이 알천으로 인해 역사가 바뀐 사건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자면.....

신라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에 복두(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삼국유사는 이 꿈에 전혀 다른 두 해몽을 기록해 놓았다.
김경신은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라는
불길한 꿈 해몽을 듣고 불안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럴 때 여삼이라는 사람이 만나기를 거듭 청하여
"이는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여삼은 "복두를 벗는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라고 전혀 다르게 해몽했다.



이후 36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버리자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 중에서 왕위 계승 1순위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 때 김주원의 집은 알천(북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왕위 계승 2순위인 김경신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제 38대 원성왕이 된다.
이때 알천을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의 아들은 바로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오늘날에는 덕동댐과 보문호수가 세워져 치수 관리를 하는 바람에 알천의 물이 줄어들었지만
신라시대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나서 알천 양쪽 마을 전체를 다 덮칠 만큼 큰 강물이었으니
만약에 그때 비가 오지 않았고 알천물이 불어나지 않았더라면 김주원이 왕이 되었을 것이고 신라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또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된 화랑이 생겨난 배경에도 알천과 얽힌 이야기가 있으니....
신라 24대 진흥왕 원년인 540년, 
삼산공의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화랑의 전신)가 되었는데 그녀는 수하에 많은 낭도를 두고 있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南毛公主)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미진부(법흥왕의 외손인데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미실,미생을 낳음, 2세 풍월주)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녀의 이복자매인 지소태후 역시 미진부를 사랑하였으므로 남모를 도와 그녀를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준정은 남모가 원화가 되려는 것을 막고 자신이 계속 원화로 남아 있으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1세 풍월주)의 낭도를 그녀에게 더하여 주기까지 하니 준정은 투기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남모공주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는데 따르던 낭도들은 그녀의 행방을 찾느라 서라벌 곳곳을 뒤지다가 
궁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준정이 남모공주를 집으로 꾀어 술을 먹였다네
준정이 공주를 시기하고 있었다네
술 취한 공주를 강물에 빠뜨렸다네
공주는 돌밑에 깔려 죽었다네
불쌍한 공주는 아직도 물속 바위 밑에 누워있다네…

궁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를 궁 안에 살던 왕족의 아이들이 배워 부르면서 뛰어다닌 것인데
이는 사건의 내막을 아는 누군가가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퍼뜨린 것이다.
진흥왕의 황후 지소태후는 준정을 잡아들여 추국하니 정말 남모의 시체는 노래에 나오는것처럼 알천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준정은 남모에게 술을 먹여 쓰러지게 한 후 자신의 낭도들을 시켜 남모를 죽여 알천에 버렸던 것이었다.
이에 지소태후는 바로 준정을 사형에 처하고 원화 제도를 페지하고 선화(仙花,국선화랑)를 화랑으로 삼았으니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미녀인 준정과 남모, 2명을 원화로 뽑았으나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여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했다'고
단순히 준정이 자신보다 미모가 빼어난 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화랑세기 2세 풍월주 미진부편을 보면 지소태후가 남모의 낭도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위화공(원화가 폐지되자 1세 풍월주가 됨)으로 하여금 그 수를 갑절로 늘리도록 하자
세력에서 열세에 몰린 준정이 이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다 공주를 유인해 술을 먹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최대의 정치 단체인 '화랑도'의 탄생 배경에는 여성들의 이같은 세력 다툼이 숨어있었고 그 배경에 알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알천

알천과 관련해 북쪽인 동천마을과 남쪽인 구황마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도 하나 덧붙여 본다.
동천마을(새주소로 알천길)에는 신라 41대 헌덕왕릉이 있고 구황마을에는 분황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암곡 가내골 등 험준한 여러 계곡에서 급경사로 흘러내리는 알천의 물은 해마다 여름이면 두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어 동천사람은 헌덕왕릉에 빌고 구황사람들은 분황사 부처에게  빌었다.

구황마을의 기도가 세어지면 큰 홍수 때 알천물길이 북쪽으로 흐르게 되어 동천마을의 피해가 크고 헌덕왕릉이 훼손됐다.
동천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헌덕왕릉에 빌면 알천물길이 반대로 흘렀다.
그래서 물길이 북쪽으로 치우쳐 흐르면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에서 땀이 흘렀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는 분황사 부처가 땀을 흘렸다.

헌덕왕의 영혼과 분황사 부처가 치열하게 싸우자 알천 냇물의 홍수는 마침내
남쪽으로도 못가고 북쪽으로도 못가고 하늘로 치솟아 홍수가 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



우유빛깔 알천랑이 떠오르는 알천, 남모공주가 물속에 잠겨 죽었다는 알천, 김주원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알천(북천)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날만큼 큰 냇물이었다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물이 거의 줄어 든 상태이다.
경주시에서는 2010년 이후 형산강 물을 보문호수로 끌어올려 알천물이 사계절 가득 흐르게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주의 상징 '알천'을 느긋이 산책하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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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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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를  더해 갈수록 점점 흥미진진해져 가는 MBC 월화 드라마 선덕여왕,
덕만이 이제 계림으로 당도하게 됨으로 드라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월, 화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화랑들의 등장 씬....^^

낭천제 ,낭장 결의 등 화랑에 대한 역사적인 부분을 확인해 보는 것도 흥미롭고
미실 주위의 여러 화랑이나 카리스마 짱인 국선 문노를 비롯해
김유신,김춘추 등 '꽃미남' 화랑들이 등장할 예정이라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보고 있다.


화랑들의 등장 씬을 찍은 세트장 역시 신라 밀레니엄 파크 내에 조성되었는데
무술을 연마하는 '화랑 연무장'은 드라마에서 이미 간간히 소개되었고
곧이어 '김유신 화랑 산채'가 시청자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될 예정...

방송에서 아직 공개되지 않은 '김유신 화랑 산채'를 미리 돌아보았다.


미실궁과 화랑 연무장 사이에 자리잡은 김유신 화랑 산채.
아직 드라마 촬영 외에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어서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다.
바리케이드를 밀고 안내해 주시는 홍연무 문화 유산 해설사님.


야산 바로 아래에 둥글게 조성되어 있는 산채는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김유신의 화랑 시절 관련 장면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로 촬영된다고 한다.


산채의 조감도를 보시면 구조가 어느 정도 감이 잡히실 듯...
(조감도는 선덕여왕 홍보 블로그 http://blog.naver.com/seonduk 에서 빌려왔습니다.)


8동의 건물을 입구문에서 오른쪽 부터 차례로 소개하자면 오른쪽이 마굿간, 그 다음이 말먹이 창고이다.



먹이 창고 등을 비롯한 모든 건물의 지붕은 너와로 이어져 있다.



말목들이 가로질러 매어져 있지만 촬영 중이 아니라서 말은 여기에 없다.


문화 유산 해설사님이 먹이 창고 옆으로 난 통로로 안내를 해 주셨다.



통로 위에서 보면 반원으로 된 공간이 보이고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말들이 대기하는 곳이 있다.



반원 모양의 말 대기 장소엔 공연을 준비하는 말들이 대기하고 있다.
바로 마주 보이는 문으로 나가면 화랑 연무장으로 가게 되는데 일반인들은 통제가 되는 통로이다.



세상에 말처럼 섹시하기 그지없는 동물이 또 있을까.....너무나 잘 생긴 말들의 모습에 넋이 나가서
가까이 가서 말들을 찍으려고 하니 말은 스트레스 받으면 깨물기도 하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신다.


다시 계단으로 올라와서 먹이 창고 바로 옆 건물은 무기고로 쓰이는 건물이다.


조감도와 비교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


무기고와 붙어 있는 큰 건물은 바로 화랑 산채의 본채이다.



입구 문에서 보면 바로 마주 보이는 건물이 본채인 것이다.



본채라고 명명해 놓았으니 이곳에서 가장 많은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나..생각된다.



바로 정면에서 보니 햇살이 너무 강해서 지붕 아래가 그늘져 잘 보이지 않는다.


조감도를 보시면 사진보다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듯...


산채의 건물들은 통나무를 대충 도끼로 쪼아서 밧줄로 얼기설기하게 묶어서 기둥을 세우고 



거칠게 다듬은 판자로 벽과 바닥을 마무리하고 지붕은 너와로 이었다.



벽은 황토로 바르고 나뭇가지와 대나무로 창틀을 만들었는데
화랑들의 무술 단련 기구 같은 소품은 할일이 없어 얌전히 옆으로 누워 있다.



저 문을 삐걱....열고 화랑들이 칼을 들고 나와주었으면 좋으련만....(그럼 싸인을 받겠지...? ㅎ)



본채에 이어서 왼쪽은  제1 별채, 오른쪽은 제2 별채이다.



특히 제 1별채는 2층으로 된 구조여서 본채보다 더 웅장해 보인다.



앞에서 바라 보니 어쩐지 극기 훈련장에 있는 시설과도 흡사해서
밧줄이라도 붙들고 뛰어내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든다.


역시 조감도와 비교해 보는 쏠쏠한 재미...^^


제 1별채에는 앞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탁자를 두고 빙 돌아가며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붙어 있는데 이곳에서 이루어질 화랑들의 대화가 궁금해진다.



쉼터 옆의 건물은 창고라고 하는데 어쩐지 외국의 통나무집 같은 느낌이 드는건 나만의 생각인지...



문화 유산 해설사님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며 한바퀴 돌아보고 화랑 산채를 나서니
이 세트장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활용될지 상당히 궁금하기만 하다.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를 필자와 함께 돌아본 블로거님들은 
앞으로 전개될 드마라 '선덕여왕'을 더욱 실감나게 시청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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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이 끝난 월화 드라마 시장을 허리케인같이 강타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

남성들만이 전유하던 왕의 자리를 공주의 신분으로 도전하여 성공한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일대기를 화려한 색채감과 풍성한 에피소드 등으로 펼쳐갈 예정인데....


이제 겨우 초반일 뿐인데도 선덕여왕 시청에 대한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선덕여왕의 최대 정적으로 종횡무진 맹활약을 하는 미실 고현정의 화려한 등장으로 초반 세몰이를 하더니
아역 배우 남지현 및 외국인 단역 배우의 출연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3,4회에서도
시청률 20%를 가뿐히 제끼는 고공 행진을 하고 있다.



평소에 사극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는 아니었으나 선덕여왕은 방영 이전부터 특별한 관심을 갖고 기다렸는데 
이는 국내 드라마 중 처음으로 신라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주 무대는  바로 계림(경주).
드라마의 많은 부분이 촬영되는 미실궁과 화랑 산채, 화랑 연무장 등의 오픈세트가
신라 밀레니엄 파크 내에 개장되어 경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드라마에서 타이톨 롤인 선덕여왕 못지 않게 강력한 캐릭터는 바로 고현정이 열연하는 미실.
왕족과 화랑들을 비롯한 서라벌의 뭇 남성들을 손아귀에 넣고도 모자라 황후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신라 시대 최고의 팜므 파탈 미실의 존재는 주인공인 선덕여왕 못지 않는 캐릭터이다.
드라마의 제목으로 선덕여왕보다 미실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는 네티즌들의 많은 의견이 있었던 것처럼
미실은 이 드라마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
드라마 중 많은 씬의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미실궁'이 궁금해졌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미실궁'....
'천년 고도'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미실궁 세트장은 지난 5월 14일에 오픈했다.



대나무 숲 저편으로 미실궁의 솟을 대문이 보인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위엄있게 서있는 홍살문 아래로 이어진 무지개 다리가 미실의 궁으로 인도한다.


무지개 다리 앞에 서서 궁을 바라보니 금방이라도 서슬이 시퍼런 미실이 걸어나올 것 같다.



잠시 정면에서 비껴 측면에서 연못과 무지개 다리를 살펴 본다.
아직 개장한지 얼마 안 되어 수련이 조금 엉성하게 자라있는 것이 맘에 걸리는데
드라마의 전개와 함께 이 연못의 수련도 점점 자라 무성해지겠지.


뒤로 좀 더 물러나 무지개 다리와 미실궁을 함께 잡아 보니 훨씬 더 안정감 있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무지개 다리를 지나면 높은 기단 위에 미실 본궁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계단을 올라 본궁 바로 앞에 서니 기둥과 인방의 화려한 장식이 눈에 확 들어온다.


서까래와 인방, 설주마다 화려하고 세밀한 문양을 그려놓았고


건물의 색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써서 위엄을 더해 주었다.
 


본궁에 이어진 건물은 제 1별궁인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주로 별궁에서 이루어진다.


본궁의 가운데 문을 밀고 들어서니 실내는 아무런 장식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문화유산 해설사이신 홍연무 선생께서 특별히 별궁 내부까지 안내해 주셔서 자세히 돌아볼 수 있었다.


별궁 내부도 천정과 설주, 인방에는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었으나 그외에 별다른 장식은 없었고 약간 썰렁하기까지 하다.드라마 촬영을 할 때마다 컨테이너 트럭에 커튼,카페트 등 소품과 기자재들을 잔뜩 싣고 와서 설치하는데

촬영이 끝나면 다시 모두 수거해서 차에 싣고 가버린다고 한다.


다른 드라마에 활용도 해야 하고 다음 촬영까지 그냥 두면 유실 우려도 있기 때문에 다 가져가는 것이리라..



실내에서 나와 본궁 기단 위에 미실궁 대문쪽으로 한바퀴 휘....둘러 본다.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은 제2 별궁이다.


 바로 반대편 제3 별궁에서 잡으면 아주 그림이 좋다.



제2 별궁은 방이 없이 회랑과 누각으로만 이루어진 건물이다.


제2 별궁의 누각 위에 서서 아래 연못이나 본궁, 맞은 편 제3 별궁을 바라 보는 정경이 평화롭다.


제2 별궁의 누각 바로 맞은 편 무지개다리 너머로는 제3 별궁이 자리잡고 있다.


제 3별궁 또한 ㄷ자 모양의 회랑과 누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연못을 양쪽에 두고 긴 회랑이 ㄷ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다.



넓고 큰 회랑은 시원하기도 해서 앞으로 연회나 결혼식 장소로 대여하지 않느냐는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미실궁 세트장은 그다지 넓지 않으나 드라마에서의 좋은 그림을 위한 공간들이 구석 구석 숨어 있다.


산으로 난 협문에서는 배역들이 드나들거나 문 뒤에 서서 대화를 주고 받는 장면들을 찍는다.



병사 대신 문화해설사님을 세우고 한컷 찍어 보았다.


협문이나 정문이나 모두 붉은색으로 통일미를 주고 문양도 통일미를 주었다.


실내와 실외에 놓인 이색적인 모양의 등대도 눈에 뜨이고.....


기단석에서 솟아 나와 구불구불 흐르는 물길도 이색적이다.

미실궁에 대한 자상한 안내와 해설을 해주신 문화유산 해설사 홍연무 선생님께서 감사를 드리며
선덕여왕의 또 다른 세트장인 '김유신 화랑 산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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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높고 푸르른 하늘 아래 파아란 연못.





이제 막 올라오는 조그만 연잎.

 한가로운 휴일 오후.

서출지 연못에는
하늘도 ...산도...구름도 다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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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주말 오후 한시경...
띠리릭....
울리는 전화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음성...
경주대학 뒷산에 산불이 났다고 한다.



헉.....또 산불...?
급히 창가에 가서 보니 소방서 뒷편으로 보이는 산이 연기로 가득 싸여 있는 것이 보인다.
산불이 나도 크게 난 듯....경주 시내 전체가 연기로 가득하다.



시내 전역에서 산불 난 산이 보이고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 오른다.



경주대학에서 멀지 않은 시내 충효동에서는 탄 나뭇가지가 날아 와서 길가에도 떨어지고
주차해 둔 차에는 재가 날아와서 새카맣게 변한다고 한다.



몇 주 사이에 우리집 뒷산과 앞산이 다 타버리는 셈이니 이 어찌 된 일인지.....
지금도 쉴새 없이 헬기가 날아다니면서 진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불의 규모로 보아 크게 산 전체로 불이 번진 듯 하니 걱정되어 가슴이 두근거리기만 한다.
오랫동안 정성들여 가꾼 아름드리 나무들이 잿더미로 변하기 전에
얼른 빨리 산불이 진정되어야 할텐데....



산불이 난 경주대학교 뒷산은 '선도산'이라고 하는데
바로 삼국유사에서 김유신 장군의 동생 보희가 서악(선도산) 꼭대기에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서라벌이 물에 잠기더라는 꿈을 꾸었다는 그 산이다.
이 때 보희는 꿈 꾼 것을 부끄러워 하며 동생 문희에게 지난 밤 꿈 꾼 내용을 이야기했는데
문희는 그 꿈이 길몽이라고 여기고 고운 비단 치마를 주고 그 꿈을 사게 된다.
그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공놀이를 하게 되는데
김유신은 짐짓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뜯어지게 한 후 보희에게 달아주라고 했으나
보희는 거절하고 문희가 김춘추의 옷고름을 달아주게 된다.
그로 인해 문희는 김춘추와 정분을 맺어 그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태종 무열왕의 왕비가 되게 되었다는 얘기.

김유신과 김춘추가 처남,매부간이 되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게 만든 역사적 배경이 있는 산인데....
삼국통일의 역사가 어린 선도산에 큰 산불이 나게 되니 
가뜩이나 보문 단지 입구 소금강산의 산불로 인하여 심히 놀란 경주 시민들의 가슴에
또 한번 큰 생채기를 안겨 주지나 않을지....


***********************************


제 카메라가 수리로 인하여 출장 중이라
현장 사진은 마침 현장에 있던 직장 동료가 폰으로 찍어 전송해 준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며....



오후 6시 경 상황이다.
산불이 많이 진화가 된 듯.....연기가 점심 때보다 훨씬 잦아 들었다.


선도산에서 제법 떨어진 동네에서도 매캐한 연기 때문에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니
바로 인근 선도산 아래 주민들은 불이 확산될까...하는 불안과 함께 심한 호흡 곤란을 느낄 것 같다.


쉴새 없이 날아다니는 헬기 등 119 의 활약으로 인해 많이 진화가 되어 가고는 있지만
잔불을 완전히 말소시키지 않으면 소금강산의 전례처럼 밤사이 또 불씨가 되살아날지도 모르는 일....
연이는 가뭄으로 바싹 말라있는 대지.....실낱 같은 불씨에도 산 하나를 다 태워먹을 수 있으니
 모두 모두 산불조심 좀 해주었으면.....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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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금강산을 옮겨 놓은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경주 '소금강산'.

4월 10일, 소금강산 줄기 보문단지 진입로에서 시작된 불은 사흘 내내 타들어가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졌던 소금강산 10ha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관련글: 경주 보문단지에 산불 났어요!




산불 진화가 완전히 마무리 되고 타버린 북천 강변의 나무들도 정리가 된 휴일 아침에 산불 현장을 다시 찾아보았다.


벚나무와 소나무로 장관을 이루던 보문단지 입구 소금강산은 새카만 숯산으로 변해버렸다.


산불이 난 곳은 산 속 깊은 곳도 아니고 바로 보문단지 진입로 도로 변이다.


운전자들이 무심코 창 밖으로 집어 던진 담배 꽁초 하나가 불씨가 되어 사흘 밤낮 타올랐던 것이다.


소나무는 화기에 약하여 조금만 불기운이 스쳐도 금방 다 말라버리는데
이 소나무들은 아예 밑둥치부터 새카맣게 타버렸다.


도로변에서 시작한 불은 소금강산 산등성이로 타올랐고
 맞은 편 북천 강변의 나무들을 모두 태우고 강 양쪽의 갈대밭도 모두 태워 버렸다.


가을날 보문을 찾는 사람들에게 멋진 추억을 남겨주던 갈대밭은 재만 남았다.


산책로의 돌들도 새카맣게 그을리고


작은 나무들은 물론....


십여년 이상 애써 가꾸어 왔던 나무들이 숯덩이인 채로 나뒹굴고 있다.


아예 다 타버려 밑둥치를 베어버린 아름드리 나무들도 부지기수.


완전 숯화석이 된 나무도 보인다.


이런....내가 산책할 때 앉아서 쉬곤 하던 나무 벤치도 시커멓게 그을렸다.
 

산책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도 예전처럼 밝아보이지 않는다.


휴일을 즐기러 보문단지로 가는 사람들은 입구에서부터 얼굴이 찌푸려질 듯...


그나마 그을린 돌과  흙 사이에서 생명력 강한 풀들이 머리를 밀고 올라오고는 있지만....


다시 예전처럼 울창한 숲이 되려면 적어도 30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담뱃불을 던진 그 운전자는 자신이 던진 담배가 소금강산을 새카맣게 태워먹은지 알고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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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휴일 아침..오랜만에 나가는 아침 산책이다.


가뭄 끝 촉촉히 내린 단비로 꽃과 풀들이 오랜만에 생기가 가득하다.


아....북천 둔치가 온통 영산홍과 좀씀바귀꽃으로 뒤덮였다.


가도가도 끝없이 꽃길이 되었다.


곧게 뻗어 있는 길에도....


구불구불한 길에도 온통 영산홍으로 뒤덮였다.


하얀 꽃,빨간 꽃,분홍 꽃...색깔도 다양하다.


지난 밤 내린 비로 꽃이파리 마다 대롱대롱 물방울이 달렸다.


비에 젖어서 이파리 빛깔이 더욱 더 선명하고 싱그럽다.


대롱 대롱 매달린 물방울은 금방이라도 발등 위에 똑.... 떨어질 것만 같다.


이렇게 큰 물방울 안에는 꽃도 하늘도 다 들어 있다.


찍어주어서 고맙다고 양팔을 벌리고 반갑게 인사하는 영산홍.


새로 돋아난 연둣빛 이파리들도 비에 젖어 한층 더 싱그럽다.


힘차게 양팔을 휘저으며 걷는 동네 아저씨의 뒷모습이 오늘 따라 더 경쾌해 보인다.


걷는 이도 앉아 쉬는 이도 다 꽃향기에 취하는 기분좋은 휴일이다.


떨어진 꽃잎마져 싱그러운 비온 후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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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하게 맑은 하늘이 오후가 되니 뿌옇게 흐려진다.
황사 때문인가 싶어 창을 열고 보니 창밖 하늘이 심상치 않다.
밖에 나와서 보니 산 너머에서 뭉게 뭉게 연기가 피어오른다.

보문단지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와의 약속에 늦을까봐 퇴근하자마자 부랴부랴 차를 몰고 보문 입구 샛길로 들어서니
경찰들이 교통을 통제하며 차들을 돌려 보내고 있다.

"아저씨....무슨 일인데요? 보문 쪽으로 못 가나요..?"
"지금 보문에 산불이 났기 때문에 교통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불편하더라도 우회해 주시기 바랍니다..!"

헉....보문 단지에 산불이....!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 유산이고 국립 공원 지구인 경주,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보문에 불이 났다고...?

 

차에서 내려서 보니 보문 입구 천군동 쪽에서 시꺼면 연기가 뭉게 뭉게 피어오른다.

알아보니 보문 단지 입구 북군동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보문 단지를 들어가다 보면 벚나무가 터널을 이룬 멋진 길이 나오는데
그 옆의 순두부집을 비롯한 여러 식당가와 펜션들이 즐비한 동네가 천군동이다.

보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시내로 핸들을 돌렸다.
소방차와 한전 응급처리반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머리 위엔 대형 헬기가 쉴 새 없이 날아 다닌다.

할 수 없어 친구랑 연락을 하고 반월성 쪽으로 핸들을 돌려서 유채밭 쪽으로 갔다.
유채밭에서도 보문에서 나는 연기가 훤히 다 보인다.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유채밭을 돌아보고 있는데도 마음이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걱정이 되어 자꾸만 산불난 쪽으로 시선이 가고 화사하게 핀 유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와의 시간을 제대로 보내는 둥 마는 둥 하고 헤어져서 집으로 왔다.
집 옥상에 올라가서 보니 산 너머에 아직도 타고 있는 불길이 뻘겋게 보인다.

보문 쪽으로 저녁 산책을 나간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북천 강변까지 불이 번져  산책로의 벤치도 불에 그을려 있고
나무들에도 불이 붙었다가 꺼진 것으로 보아 그 일대의 나무는 곧 다 죽을 것 같다고...

경주시에서는 소방 헬기 16대와 소방차 17대를 총동원해서 진화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제대로 진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져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상태이다.
밤 동안 산불이 얼마나 더 번져 큰 피해를 가져올지...

건조한 날씨로 인해 전국 곳곳에 산불이 번지고 있다.
인근 포항시 대보면에서 난 산불도 아직 잔불이 제대로 진화되지 않은 가운데
이곳 저곳에서 난 산불 소식은 참으로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안전 불감증으로 인해 손쉽게 버린 불씨 하나가
수십년 동안 키워 온 아름드리 나무들을 순식간에 태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산불 조심....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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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곳곳에 봄이 난리가 났다. 

 황성 공원, 대릉원에서 시작한 벚꽃이 흥무공원, 동부 사적지구를 돌아

이제 보문까지 화사하게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 보다 먼저 벚꽃이 피는 우리집 앞엔 이제 벚꽃 이파리가 눈같이 날리기 시작했고
우리집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벚꽃이 피는 보문은 이번 주간이 최고의 벚꽃철이다.


 

집에서 보문쪽을 내다 보니 보문 진입로가 온통 벚꽃길이 되었다.


 

작년 벚꽃 절정에는 자전거를 타고 보문을 여러 바퀴 돌았는데
보도에 인파가 많을 때에는 자전거가 통행에 많은 방해가 되기 때문에
차를 운전하여 보문에다 주차를 하고 걸어서 한바퀴 돌아보기로 하였다.


 

평일에도 사람이 몰리는 벚꽃철의 주말이니 차가 엄청나게 밀릴 것은 각오하고 나서야 한다.


 

느긋하게 벚꽃을 구경하며 차 안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으니 이럴 땐 차가 밀리는 것도 싫지는 않다.

 

먼저 보문 호수의 전경이 제일 잘 보이는 대명 콘도에 올라 본다.
12층에 스카이 라운지가 있어서 식사나 차를 즐기면서 보문호의 전경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선 보문단지의 전경을 잘 살펴 볼 수 있는데 인근의 호텔들과 경주월드,
멀리 황룡사 구층목탑의 형상을 본뜬 경주타워와 엑스포 공원 등이 한 눈에 보인다.


 

시선을 아래로 하니 호반으로 길게 이어진 벚꽃길 사이로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호반에 서 있는 멋진 메타세콰이어는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큰 오리배,작은 오리배가 지나가는 물살이 호반에 물결이 되어 전해 진다.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벚꽃길은 마치 폭신한 핑크 카페트 같다. 

콘도를 나와 걸어서 산책로를 걸어서 돌아 본다. 


 

보문정길로 들어서 본다.

 

멋진 정자 보문정이 물에 비친 반영을 찍기 위해 진사들이 항상 진치고 있는 곳이다.

 

호수에 떨어진 벚꽃잎이 푸른 물 위에서 더욱 하얗게 보인다.

 

보문호 한가운데는 이렇게 분수가 쏘아 올려지는데
높이 쏘아올려지는 분수라는것 외에 별다른 멋은 없다.

 

호반을 한바퀴 돌면서 보면 보문호 주변의 물가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능수버들처럼 벚꽃 가지가 아래로 드리워진 벚나무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벚나무는 '능수벚나무'라고 부르는 '처진개벚나무'인데
다른 벚나무와는 달리 가지가 아래로 쳐져서 자란다.

 

또 벚꽃잎도 다른 벚꽃과는 달리 작고 듬성듬성하지만
유달리 색깔이 발그레한 것이 특징이다.

 

보문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풍경은 벚꽃이 떨어져서 이렇게 호반의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모습인데
이 핑크색 벚꽃 카페트는 그 위로 밟고 올라서고 싶은 충동을 매번 들게 한다.


 

요즘은 관광 위주의 여행에서 체험 위주의 여행으로 흐는 추세이니
그냥 벚꽃 구경만 하는 것은 피가 끓는 젊은이들에겐 심심하기만 한 일...
보문 곳곳에 있는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쌩쌩 달리는 일은 너무나 즐겁다.

 

때로는 경주 역이나 터미널에서 자전거를 대여하기도 하는데
경주는 시내 전역에 걸쳐 자전거 전용 도로가 너무나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보문과 기타 유적지를 돌아보면 더 세세히 돌아볼 수 있어 좋다.


 

좀 더 다이나믹한 체험을 원한다면 사륜 오트바이 전용 체험장에서 신나게 달려볼 수 있다.
단....전용 체험장이 아닌 산책로에서 오트바이를 타는 행위는
많은 상춘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으니 조심하실 일.....
전동 오트바이는 오트바이를 타보지 않은 여자들도 쉽게 탈 수 있는데
배터리 소모 시간이 짧아 1시간 이상 타면 배터리가 방전되어
무거운 오트바이를 낑낑거리며 끌고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난감한 체험도 해 볼 수 있음...^^

 

보문에 왔으면 명물 오리배를 안 타 볼 수 없다.


 

어른,아이,온 가족이 큰 오리배를 타고 호수를 한바퀴 휘~돌아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호반으로 사열하듯 늘어선 벚꽃 감상도 확실히 할 수 있어서 좋다.

 

큰 오리배가 심심하신 분들은 커플용 작은 오리배를 타면 금상첨화.
순전히 다리힘으로 밟아서 노를 젓기 때문에 다리힘이 모자라는 분은 도전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남자들끼리 오리배를 타면 심히 쪽팔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헬륨 기구를 타고 하늘에 올라보는 것이 아닐까....

 

150 미터 상공까지 올라가서 보문단지 일대와 그 너머까지 구경할 수 있는데
이용료는 15,000원 상당으로 다소 비싼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헬륨 기구는 우리나라에 제주와 경주 두 곳 밖에 없는데
15억의 설치비 중 풍선값이 5억, 헬륨값이 1억이나 된단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호수 주변에 이렇게 자리를 깔고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거나

 

친구들끼리 모여 점심을 나눠먹고 호수를 바라보며 담소를 즐긴다.

 

호수는 생각보다 깊어서 익사 사고도 간혹 일어나니 이렇게 위험한 일은 삼가야 한다...^^

 

주말의 보문 단지는 완전히 연인들의 천국이다.

 

호반의 데이트는 사랑을 더욱 무르익게 하는데


 

가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여기저기서 봄날이 무르익어가듯 사랑이 무르익어 간다.

 

활짝 핀 벚꽃 아래서 연인들의 사랑도 활짝 피어나고

 

반짝이는 호수는 별이 되어 연인들의 가슴에 들어와 박힌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행복을 문자로 전하고.....


 

연인의 천국인 보문에서 혼자 걸어가시는 노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이기만 한다.

 

보문의 저녁이 돌아오면 호수에 떨어진 벚꽃에도 어둠이 젖어들고...

 

내년을 기약하며 돌아가는 사람들의 뒤편에서도 벚꽃은 환하게 웃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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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아름다운 경주.
그 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계절을 뽑으라면 '봄'이 아닐까..?

사월이 되면 경주 전역이 벚꽃으로 뒤덮히게 되니
관광객은 물론 경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꽃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 못 이루고 벚나무 아래를 서성이게 된다.
화사하게 꽃망울을 떠뜨린 벚꽃을 그냥 보내기가 못내 아쉬워
시내를 한바퀴 돌며 벚꽃 순례를 하고서야 잠자리로 들게 되는 것이다.

한낮에 햇빛을 받아 화사한 벚꽃이야 물론 아름답기 짝이 없지만
경관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하얀 밤벚꽃 또한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기에
 저녁을 일찍 먹고 안압지로 벚꽃 나들이를 나섰다.

경주에 오시는 DSLR 동호인들이 제일 선호하는 장소인 안압지.
안압지 전각들의 반영을 넣은 야경을 담아보기 위해 삼각대를 버티어 놓고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 진사들이 많이 눈에 뜨인다.

안압지 야경을 찍으려면 필수로 자리잡아야 하는 포인트는 제쳐 두고
안압지 서쪽 숲속 벚꽃나무 아래로 가서 삼각대를 펼쳤다.
그쪽에 진치는 진사님들은 아무도 없으니 늦게 가서도 맘껏 자리를 골라잡을 수 있다.

비록 안압지의 전각들이 다 잡히는 유명한 포인트는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벚꽃 포인트라고 명명한 곳에서 찍은 몇 장을 올려드린다.
혹시나 아나..?
내가 선점한 이 장소를 유명한 진사님들이 줄줄이 모방하여
안압지의 새로운 사진 포인트가 될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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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 들렸을 때의 일이다.

대웅전의 꽃살문과 자하문의 단청을 사진에 담은 후

자하문 옆 범영루의 법고를 찍으려 다가가다가  법고 바로 옆 마루에 신문지판이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골판지 같은 단단한 것을 넣고 밖은 신문지로 싼 것처럼 보이는 판 주위에는 여기저기 새똥이 흩어져 있었는데...

 

 

새똥의 흔적으로 보아 천정 어디엔가 새둥지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흔적은 없었고 다만 법고 위 천정 쪽으로 두개의 용머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일 뿐이었다.

 

 

그냥 돌아서서 가려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서 왼쪽의 용 머리 쪽을 자세히 보았더니

나뭇가지 같은 것이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용의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지은 것이다.

새는 나들이를 나갔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아직 마르지 않은 새똥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둥지 안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용의 머리를 깔고 앉아 지은 새둥지라....

여의주를 입에 물고 천하를 휘어 잡던 용도 그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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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 사람들의 필수 수학 여행지 불국사는 언제 가도 경내에 사람들이 바글 바글하다. 

 

 특히 대웅전 앞 석등 앞에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인 관광객들로 추정되는 이 사람들은 한 사람이 석등 앞에 손을 합장하고 한참이나 석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절하고 나오면
그 다음 사람이 석등 앞에 합장하고 서서 또 한참 바라보다 절하고.....
모두가 이렇게 줄을 서서 석등을 살피는 것이었다. 

"참 일본 사람들이란....저런거 구경하는데도 줄을 서서 봐야 하나....질서 의식이 투철한건 좋지만 너무 심하군..."
내심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좌우로 젓던 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는 시선이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다들 석등의 한 가운데 네모난 등집 창을 바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관광객들이 다 물러간 후에 나도 그들이 섰던 자리에 서서 등집의 네모난 창을 바라  보았다. 

네모난 창으로 보이는 것은...대웅전 안의 본존불의 얼굴이었다.
그랬다...!
석등을 대웅전 앞에 놓을 때에 석등을 통해서 부처의 얼굴이 보일 수 있도록 배치하여 놓은 것이었다.

 불국사에 들어서서 청운교,백운교를 계단으로 올라 자하문을 지나
봉로대(향로를 놓는 곳),연화문 석등,대웅전 현판, 대웅전 본존불......
이렇게 가람의 모든 배치가 일직선 상에 위치해 있는데
신라 장인들의 찬란한 솜씨와 더불어 계획적인 가람 배치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석등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하대와 중대에는 쌍잎의 연꽃문이 새겨져 있었고
사방으로 난 팔각형 등집의 네모난 창 주위에는 예전에 문을 달았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었다. 

 근데 하나의 궁금증을 풀고 나니 또 하나의 궁금증이 더해졌다. 
팔각으로 된 등집과 팔각 지붕돌(옥개석)부분이 만나는 부분에서 이상한 둥근 물체가 여러개 보이는 것이다. 

 둥글고 검은 물체는 팔각 지붕돌을 빙 둘러가며 골고루 박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 보니 그건 100원짜리 동전이었다.

 왜 동전을 옥개석 아래에 끼워넣어두었을까...?
관광객들이 복을 빌기 위해서 끼워둔 동전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확실하진 않다.

 혹시 석등 아래에다 동전을 끼워놓은 이유가 정녕 복을 빌기 위함이라면
문화재를 훼손하면서까지 소유하고 싶은 그 행복은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자기의 마음 속에 있다고 살짝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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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국보 31호로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술병 모양의 이 첨성대는

높이 약 9.5m로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되어 있으며 총 석재수는 음력의 일년의 날 수와 같은 362개이다.

13단부터는 내부가 비어 있어서 가운데 난 출입구를 이용해서 사다리를 타고 아래 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라 추측된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처음이고

이어 고려사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기록은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에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그밖에도 서운관지나 문헌비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일제 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와다[和田]라는 일본인인데

1910년에 그는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우리 나라 학자인 홍이섭도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 것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상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박동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 해방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첨성대가 실제로 개방식 돔으로써 관측에 불편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어 상설천문대로 보기 어렵다는 학설이 있으며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 보다는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또한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고 주장하고

토속 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추측하는 학설도 있다.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데

구조적으로 볼 때에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다 하겠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 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지배적이다.

 

첨성대가 천문대이든 아니든 첨성대는 신라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동부 사적 지구 부근을 돌아보는 사람들 중에선

첨성대 앞에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담장 밖에서(사실 담장 밖에서도 거의 다 보인다) 대충 둘러보고 가는 사람도 있고

안으로 들어가서 슬쩍 보고는 "흠....겨우 이런 거였어...첨성대가...?"라며 실망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너무나 소박한 외관으로 인해 소흘히 여겨지는 곳.한 번 휘익 돌아보고는 다른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중간 기착지....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기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숭례문이

우리 눈 앞에서 소실되고 난 뒤에 그 아름다움과 중요성이 새롭게 조명되었던 것을 떠올리며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에 다시 한번 첨성대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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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나 월요일을 맞이하는 스트레스는 막중하기만 하다.

하지만 요즘 여학생들은 물론, 주부들까지 은근히 월요일 밤을 기다리곤 하는데

바로 '꽃보다 남자' 가 대한민국 누나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꽃남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인터넷은 물론, 어딜 가나 '꽃남'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인데

 극중에서 F4 멤버가 살고 있는 호화 주택들 또한 시청자들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금잔디를 놓고 구준표와 삼각 관계를 벌이는 윤지후의 

이색적인 한옥집이 대체 어디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다. 

  

 

 

 전대통령의 손자이기도 한 윤지후의 으리으리한 한옥집은 다름아닌 경주에 위치한 '라궁' 

 

 

무한도전 촬영 등을 비롯한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이미 여러번 소개되기도 한 곳이지만

꽃남 촬영을 계기로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라궁에서 숙박하거나

기념 사진이라도 한번 찍어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이 때....

경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특심(?)한 필자가 라궁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라궁 밀착 취재(?)를 위해 선약을 하고 신라밀레니엄파크로 향하니

담당 직원을 만나기도 전에 부푼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인다.  

 

 

신라밀레니엄파크 주차장에서 왼쪽 산 아래 한적한 길로 접어들면 라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라궁의 입구엔 방문객들이 서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기념 촬영에 빠지지 않는 것은 다름아닌 '구준표나무'이다.  

 

 

 꽃남  8회, 금잔디와의 정식 데이트에서 윤지후는 그녀를 바이크에 태워 자기 한옥집으로 데리고 가게 되는데 

 

 

 두 사람의 데이트를 미행한 구준표는 금잔디에 대해 접혀지지 않는 마음을 괴로워하며 윤지후의 집 앞에서 서성거린다. 

 

 

  질투심으로 괴로워하던 구준표, 급기야 담 옆에 서 있던 나무를 사정없이 발로 차며 화풀이를 하고는 

혼자 길길이 뛰다 돌아가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구준표에게 수난을 당하던 나무가 담 옆에 불쌍하게 서 있다.

내가 갔을 때에도 그 작은 나무는 구준표의 거친 발길질 때문에 지지대 하나가 살짝 뽑혀 있었는데 며칠 전 보수되었다. 

 

 

 8회 방영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구준표나무'는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오는 사람들마다 구준표나무 옆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 나무가 부디 튼튼하게 잘 자라주어야 할텐데.... 

 

 

 구준표가 애태우며 왔다 갔다 하던 돌담길도 여학생들에겐 필수 사진 촬영 코스가 되었다.

 

 

 

  이렇듯 인기를 누리고 있는 라궁은 우리나라 유일의 한옥 호텔인데 

 

 

  '신라밀레니엄파크'의 한 부분인  '라궁(羅宮)'은 '신라의 궁궐'이란 뜻이다.  

 

 

 기존의 한옥들과 달리 전통 한옥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대에 맞게 과거를 재해석하여, 새롭게 현대화한 기능을 담아 재탄생시켰다. 

 

 

 이것은 문화재 형태로만 존재해오던 과거 유산을 실용적 건축물로 재탄생시킨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5월 완공한 라궁은 국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목수 107명 ,석공 16명 등

전통 한옥 장인들이 모이는 유래없는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데

경복궁 증축 이래의 전문 목수 최대 동원이라는 기록을 남기도 했다. 

 

 

  처음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곳은 관리동.

로비, 리셉션데스크, 레스토랑이있는 관리동은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라궁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화려함을 보여준다.   

 

 

 자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금잔디와 꽃남 F4들이 반겨 맞아 준다.

 

 

이어 중정(中庭)을 가운데 두고 ㅁ자 형의 로비가 이어지는데

2층 건물을 그대로 터놓은 서까래 천장과 이를 받치고 있는 육중한 대들보가 그대로 다보이니 시원하기 그지없다.  

 

 

 높은 천장과 독특한 조명등으로 인해 '라궁' 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는 위엄과 기품이 드러난다.  

 

 

 

천장 아래는 대형 노리개와 둥근 한지 조명등이 설치 미술작품처럼 걸려 있다.  

 

 

 그 외에도 물결치는 파도처럼 곡선을 그리는 조명등을 비롯해

모든 인테리어가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특별한 멋을 더해준다.  

 

 

  이 종이 공예 작품들은 공예 작가 차현림씨의 작품이다.  

 

 

 중정을 중심으로 사방을 돌아 리셉션 데스크로 연결되는 관리동의 1층에는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전통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ㅁ자 형 로비에 둘러 싸인 중정에는 열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서 있는 나무가 있는데 

어느 공간에서나 창을 통해 이 중정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한지로 된 문살 앞에 휴식하듯 놓인 화분과 토기,가구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오후의 빛이 잘 비쳐드는 아담한 리셉션 데스크의 직원들은 예약차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느라 분주해 보였다. 

 

 

 

 호텔 직원들은 다 이렇게 신라인 복장을 하고 근무를 하는데  

 

 

 꽃남 방영 이후 더욱 많이 알려진 라궁에는 평일에도 예약이 밀려들고 있다는 후문이....  

 

 

 

 관리동의 2층은 한식 레스토랑인데  여기에서 라궁을 찾은 이들을 위한 식사가 준비된다. 

 

 

 녹두전, 제주생갈치구이, 소갈비찜 등으로 이어지는 한정식이 저녁 메뉴이며,

아침으로는 정성스럽게 끓인 죽도 제공된다는데 숙박 요금에는 석식과 조식이 다 포함되어 있다. 

 

 

 특히 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라궁의 운치있는 전경 덕분에 그 맛이 배가가 된다고....  

 

  

 

 전체 건물의 구조는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ㄴ자로 객실이 연속해있으며

로비가 있는 관리동과 함께 ㄷ자를 구성,

뒤쪽 산으로 이어지며 빙 둘러싸인 ㅁ자형을 구성한다.  

 

 

 라궁의 배치도를 보면 복잡한 이 건물의 구조 이해에 조금은 도움이 되실 듯....  

 

 

 호텔의 꽃은 객실....오천평이나 되는 대지 위에 세워진 라궁의 객실은 16개에 지나지 않는다.   

 

 

 길게 이어지는 지붕을 공유한채 독립된 각 객실이 회랑을 따라 이어지는 형태로 지어졌다. 

 

 

 객실의 형태는 앞쪽 호수로 돌출된 누마루형, ㄷ자형을 기본으로 하는 마당형,

그리고 스위트룸,로열 스위트룸 총 네가지 유형이다.  

 

 

  작은 연못이 있는 서쪽편에서 보면 객실은 누마루형과 마당형이 교차되면서 이어지고 있는데 

 

 

 누마루만 반복되면 외관상 모양이 좋지 않기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호수쪽으로 돌출된 누마루가 있는 누마루형과 상대적으로 마당이 더 넓은 마당형이 교차되도록 하고  

 

 

 양끝에 각각 스위트룸을 마련, 반복의 끝에서 약간의 변주를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어떤 하루를 누릴 수 있을까?

리셉션 데스크에서 키를 받아든 직원의 안내를 받아 회랑 맨끝에 위치한 객실로 향했다. 

 

 

  라궁의 제일 가장자리인 이 방은 '로열 스위트룸'이다. 

 

 

 카드 키를 갖다 대면 열리는 현대식 호텔문 대신 삐거덕거리는 나무대문이 기다리고 있다.  

 

 

 대문을 열고 빼꼼이 들여다 보니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올라서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내부는 29평 정도인데 대청 마루, 안방, 침실, 미니바, 누마루 스파,마당이 자리잡고 있다.  

 



 

깔끔하게 마감된 대청마루에는 장지문을 뒤로 하고 전통미를 가미한 소파가 갖추어져 있다.



 

한옥이니까 당연히 방바닥에 이불을 펴는 좌식 구조이거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객실 내의 모든 가구는 입식인데 좌식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사람들을 배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 온돌이 도입되기 전인 신라 시대에는 침대, 의자등을 사용한 입식 생활을 했으므로

신라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대청 마루문은 유리 미다지로 되어 있어 창을 열지 않아도 툇마루가 달린 아늑한 마당이 다 보인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이면 마루 문을 열고 남서쪽에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에 느긋하게 몸을 맡기며

복잡한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잊고 있었던 고요의 미덕을 오랜만에 흠뻑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만날 수 있다.  

 

 

 대청마루 오른편에는 침실이 자리잡고 있다.

 

 

 

 조용하고 아늑한 침실은 적막함 속에서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서인지 TV조차 비치해 놓지 않고 있었다. 

 

 

 침실의 모든 가구는 금빛 장식을 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는데  

 

 

 불꽃 모양 스탠드를 밝히고 붉은 빛에 금빛 수를 놓은 침구 속에 파묻히면 

마치 신라의 임금이 된 듯한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스파가 따로 있지만 객실에는 화장실 겸 욕실이 2개 더 있는데 여기는 침실 옆의 욕실이다. 

 

 

 대청 마루를 통해 거실의 구실을 하는 안방으로 들어가면

라궁 특유의 금장식이 더해진 전통가구들이 양쪽에 놓여 있다. 

 

 

 대형 TV가 자리잡고 있는 화사한 문갑.  

 

 

불꽃 모양 금관 장식과 드리개 장식을 인용한 옷장. 

 

 

 금관 달개의 모양을 응용한 문고리. 

 

 

다양한 종류의 화려한 문갑이며 장식장들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전화기도 방 안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안방 맞은 편 왼쪽은 미니바인데 

 

 

 차를 마실 수 있는 용품들과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다.

 

 

 이 객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누마루에 있는 '스파'이다.

 

 

 

사방이 장지문으로 둘러싸인 이 스파는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임금님의 욕실 같지 않은가. 

 

  

 욕조의 크기는 제법 커서 2~3명이 들어 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경주는 수돗물조차 수질이 좋기로 유명한데 온천수의 수질이야 더 설명할 것도 없다.  

 

 

 더욱 기억에 남는 온천욕을 즐기려면 장지문을 활짝 열어도 될 듯.... 

  

 

로열 스위트룸에선 누마루 밖에 선 대나무가 살짝 시선을 가려주니  

 

 

  장지문을 열어둔 채로 햇살 비치는 누마루에서 스파를 즐기는 짜릿함도 체험해 보면 좋을 듯... 

 

 

 

 로열 스위트룸을 나와 마당형 일반 디럭스룸의 대문도 열어보았다. 

 

 

 한옥 마당 가운데에 특이하게도 노천 스파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일반 호텔에서도, 기존 한옥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경험이다. 

 

 

 ㅁ자형 한옥으로 둘러싸인 노천 스파는 대문만 닫으면 바로 은밀한 공간이 되어

낮에는 환한 햇살 아래, 밤에는 달빛 아래서 환상적인 온천 체험을 하게 해 준다. 

 

 

 이 디럭스룸의 면적은 23평 정도라고 한다. 

 

 

 

객실 동쪽 언덕에는 세 채의 오래 된 한옥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숙재헌'이라 불리는 이 고가들은 댐공사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한 건물을 옮겨 놓은 것이다. 

 

 

 

 라궁이 현대화된 최신 한옥이라면 숙재헌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낡은 한옥이다. 

 

 

 시대를 초월해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두 한옥을 비교해 보는 것도 아이들에겐 충분한 체험 학습이 될 것 같다.

  

 

 

 하루종일 필자와 함께 라궁을 둘러보신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의문이 생기실 것 같다.

아니...그럼.....윤지후의 방은 대체.....어딘데.....?? 

 

 

 라궁의 외부는 윤지후의 한옥집이 분명하나 윤지후의 잘 꾸며진 거실이며 침실은 이곳에 없다.

우리가 '꽃남'에서 만나게 되는 윤지후 한옥집의 실내는 단지 드라마 세트일 뿐이다.  

 

 

  라궁 방문객 중 운이 좋은 분은 드라마 출연진들을 불시에 만날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갈 때마다 방송국 스텝들과 마주치곤 했으니....

 

하지만 이곳에서 준표나 지후를 못 만나더라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를 마시길 바란다.

박태환을 닮은 '신라 꽃남'이 여러분들을 신라 천년의 향기 어린 '라궁'으로 인도해 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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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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