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산책..............................'에 해당되는 글 123건

  1. 2009.03.26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 경주최부잣집 55
  2. 2009.03.25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경주 봉황대 14
  3. 2008.09.30 경주박물관에서 만난 아프리카 부처





  포근하고 화사한 봄날 오후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을 찾아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란 말..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사회지도층은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富不三代)"란 말이 있지만 경주 최부잣집의 경우엔 예외이다. 


12대 만석지기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정무공 최진립이다.

 청백리로 유명한 최진립은 지극히 검소해 300년 부의 토대를 닦았는데 

최국선을 비롯한 후손들은 최초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이앙법을 도입하고 원성의 대상인 마름을 없앴다.

또 만석 이상이 수확되면 나머지를 되돌려주는 나눔의 경영 철학을 실천해

소작농들이 스스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정착시켰다.



12대 300년 이상을 만석꾼으로 일가를 이룬 경주 최부잣집의 300년 이상을 이어온 <가훈>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아라.(큰 벼슬을 하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아라.(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에게는 후하게 대접하라.(신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마라.(남들이 어려울 때 재산을 모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가문의 며느리 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가난을 체험해 보아서 어려운 사람을 이해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교동에 자리잡은 최씨 고택을 돌아본다. 

최씨 고택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 경에 건립된 집이다.  

 이 고택은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는데  


 원래는 99칸이었던 이 집은 현재 대문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채로 오래 방치되었는데 


 근래에 옛 모습 그대로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하인들이 기거하던 곳은 대문채이고 


 대문채 옆 텃밭에서 마주 보이는 곳은 안채이며 오른쪽이 유명한 최부잣집의 고방이다.


최부자집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고방... 

 소작농들에게서 거둔 볏섬을 차곡차곡 쌓아두던 고방은 크기도 크거니와 건물의 높이도 엄청 높다.


 이 고방의 열쇠는 마님 만이 가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비어 있어 자물쇠로 잠글 필도 없다. 


 안채는 ㅁ자 모양이고 지금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는 듯 하다.


 안채 앞의 절구에는 오랜 세월을 거쳐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사실 이 집 뿐 아니라 입구 오른 쪽에 있는 요석궁(현재 음식점)을 비롯하여

이 일대에 있는 모든 집이 다 최부자의 집이다.


 만석 지기 최부자집의 일년 소작 수입은 삼천석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 일천석은  집 안에서 쓰고 일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데에,

나머지 일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에 썼다고 한다.

쌀 일천석이라면 당시의 경제 규모로선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최부자집에 과객이 많을 때엔 일백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집 안에 다 수용을 못해 최부자집 주변의 집으로 과객을 보낼 땐

반드시 과메기와 쌀을 같이 보내 손님을 대접할 수 있게 해주었고

과객들이 떠날 때엔 과메기와 하루 양식,노잣돈까지 챙겨서 보냈다고 한다. 


 최부자집의 과객 대접이 융숭하다는 소문은 경상도,전라도 뿐 아니라

이북 지역까지 널리 퍼졌다고....


이런 만석 지기 재산은 12대에 끝나게 된다.

하지만 자녀들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 것이 아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씨 고택을 방문하는 이들은 한결같은 감동을 받고 나서게 된다. 


  '부불 삼대(富不三代)'라고 부자가 3대를 이어가기 힘든 세상에

12대를 부를 누린 최부자집의 가훈에서 받은 교훈보다 더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그렇게 지켜 온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시켰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300년간 묵묵히 실천해 온 최부잣집의 교훈을 본받는

재벌이나 지도자들이 이 시대에도 많이 나타나 주길 바라면서 최씨 고택의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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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능원 맞은 편 길 중간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양 옆에 산재해 있는 고분들을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노서리 고분군에 데해선 루비의 정원의 지난 포스트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주말에 이색 무덤 데이트 어떠세요? 에서 소개해 드렸고

이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의 완결편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황대'를 소개해 올린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고분 중 125호 고분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써

쌍분이 아닌 단일분 중에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무덤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봉황대'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데

이 고분 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대 흑백 사진에서는 봉황대 바로 코 앞까지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가옥들이 다 철거되고 빈 터에 터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는 작업들이 계속되고 있다. 

동쪽에서 봉황대를 본 모습인데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 것은 나무들이 매우 크기 때문인 듯....
흑백 사진에 나와 있던 오솔길이 아직도 그 자리가 선명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듯....잔디가 밟혀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수 신라 여인 '햇빛'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고분 바로 아래까지 미나리밭이 있었고

봉황대의 제일 꼭대기엔 6.25 때 만든 방공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이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단 너무나 친근한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봉황대를 빙~둘러가는 것이 멀다고 꼭 위로 가로질러 넘어다녔단다.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봉황대 꼭대기에 오르곤 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흔치 않던 시절, 봉황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 집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반해

봉황대 위에 오르면 그 공기조차도 아랫동네와 신선함이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도 시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분 위에 누워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헤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고.... 

 

 

 봉황대 윗부분에서 어떤 남자가 연세가 오래 된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휜 고목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봉황대의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터와 식리총터가 있는데

여기서 금관과 기마 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왼쪽 금령총, 가운데 봉황대, 오른쪽 식이총)   

 

 

 금령총(127호 고분)은 1924년 발굴 때에 금관,금령,그리고 유명한 기마 인물형 토기가 나왔다.

5~6세기의 것으로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발굴 후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그냥 터만 약간 돋우어 놓았다.

출토된 금관에 금령(金鈴,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126호 고분)도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고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평평하게 두었다.

식이총에서는 특이하게도 금관이나 은관이 출토되지 않고 거북모양의 테두리 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신발의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실크로드 문화 유입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장식 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이총(飾履塚)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런 아름다운 고분 옆 데이트는 최상급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잔디는 금색으로 빛이 나서 색감의 대비를 이룬다. 

 

 

나무들에 잎이 무성한 모습보다 개인적 취향으론 겨울에 나목일 때가 훨씬 멋지다.

 

뒤틀어진 고목의 줄기는 언뜻 보아도 수백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 보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의 일부분인데 봉황대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봉황대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니......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경주 땅을 배 모양에 비유해 침몰시킬 계략을 꾸몄다.

경주가 봉황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니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않도록 하고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개 쭉지에 금을 넣어 주라"고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든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이야기.... 

 

 

세월이 흘러 흘러 2010년.....고분의 주인은 티끌이 되어 그 자취도 없어지고

무심한 낮달이 떠서 봉황대 위 거목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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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휴일날...오랜만에 경주 국립 박물관을 찾았다.

9월 23일부터 '신라, 서아시아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말까지 무료 입장이어서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이 특별전에는 신라 유물 110점 외에도 일본 미호 박물관,오카야마 시립 오리엔트 박물관,

도쿄 고대 오리엔트 박물관 소장의 서아시아 지역 문화재 49점이 함께 전시되었다 해서 더 흥미로웠는데 

신라와 관련된 서아시아 지역 유물도 관람하고 유물 진을 찍어 포스팅도 하려고

카메라를 가지고 입장했더니....헉....이런 일이 있나.

특별 전시는 촬영 자체가 금지다....ㅠㅠ

 

 

경주 국립 박물관의 모든 전시품은 플래쉬나 삼각대 사용을 제외하곤

전시관에서의 촬영이 허락되기 때문에 여기도 그려려니...했는데.....

할 수 없이 카메라를 접고 전시물을 둘러 보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사진을 잘도 찍어댄다.

나도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촬영이 금지된 유물을 몰래 찍는다는게 도리가 아닌거 같아

그냥 눈으로만 둘러보고 다른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고고관,안압지관...등 유물 전시관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니 참 날씨도 좋다. 

 

 

하늘도 푸르고 날씨는 청명해서 박물관으로 온 관광객이 참으로 많았다. 

 

 

박물관 여기저기에는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선생님과 함께 견학 온 아이들도 이렇게 추억의 한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다.

 

 

박물관 마당에는 이렇게 목이 없는 부처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8~10세기 경에 만들어진 석조 여래 좌상들이다. 

 

 

왜 이렇게 목이 없는 부처가 많을까...

'전혀 다른 향가와 만엽가'를 저술하신 '정광선인글돋선생'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첫째,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불사 파괴와 야외 석조물 파괴 등(불두 파괴는 정체성을 파괴 시키는 행위이므로)

       궁궐에서도 이단을 몰아내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중종때 조광조의 소격서의 혁파이다. 소격전(도교 및 민간신앙)이 폐지된다.

 

둘째, 몽고 병의 신라 침입으로 황룡사 목탑이 불타고 곳곳에 절이 파괴된다. 

고려인들이 몽고을 몰아내기 위해 부처님이 불력을 이용하기 위해

       고려 속장경,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몽고병은 불상 파괴가 극에 달한다. 

 

셋째, 임진왜란 때 승병이 도처에 일어난다.

승병의 중심에 黨聚(당취,싸움하는 승려)가 있다.

서산대사를 비롯한 사명대사 ,영규스님 등이 당취이다.  

승병의 거처가 사찰이다.

왜병들이 사찰을 불지르고 파괴한 원인이 바로 당취와 싸움이었다.

        

넷째, 일제시대 메이지 유신이후 일왕을 신으로 추앙하는 시대가 온다.

일본에서도 神社 외 절의 석등 및 부처 파괴가 일어난다.

        일제 강점기에 전국 곳곳에 신사를 짓고 강제참배를 강요한다.

       남산은 특히 불교의 요람이다.

곳곳에 산재한 부처들을 철처히 파괴하는 행위가 이뤄졌을 것 같다.

(참조:http://blog.daum.net/kmb2274/17035203)

 

 

 

하긴 고대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그리스,터키에도 가면

이렇게 목이 없는 석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는데

목이라는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가늘고 취약한 부분이라

더 쉽게 훼손이 되지 않았나....생각도 해 본다. 

 

 

 이렇게 목이 없는 부처가 외국 관광객들에겐 매우 신기한가 보다.

목 없는 부처를 발견한 한 무리의 외국 관광객...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 하더니 모두다 부처 뒤에 가서 머리를 얹고 기념 사진을 찍는다.

머리를 정교하게 땋아내린 이 여자분은 가나에서 온 관광객이다.

머리가 아주 이쁘다고 했더니 아주 좋아하며 만면에 웃음을 띄었다. 

 

 

이 친구는 특히 더 시끄럽다.

나도 앞에 서서 이 재미있는 친구를 향해 사진을 찍으니

"Hey~~ I'm African Buddha~~!!"

라고 떠들어대면서 웃고 장난치며 너무나 즐거워 한다.

 

 

 이 아프리카 부처 역시 가나에서 왔는데 이름은 'Samuel'이란 친구다.

사진을 부쳐 달라고 내게 자기 메일 주소를 적어 주었다.

가나에서 온 '짝퉁 부처'인 사무엘이

한국에서 여행하는 동안 즐거운 추억을 많이 가지게 되었으면 하고

경주에서의 좋은 추억도 오래 간직했으면 한다.

자기 얼굴이 한국 블로그 뉴스에 뜬걸 알면 더 기분 좋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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