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산책..........................'에 해당되는 글 343건

  1. 2009.12.15 술병마다 이름 쓰는 일본 대마도 선술집 52
  2. 2009.12.14 세계 최초의 19금 광고판? / 터키 에베소 64
  3. 2009.12.13 두아디라 교회터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20
  4. 2009.12.12 미다스가 손 씻은 곳? 황금 도시 터키 사르디스 19
  5. 2009.12.10 한국 아이와 너무 닮은 몽골 아이들 55
  6. 2009.12.08 상해 황포강의 보석같이 찬란한 야경 60
  7. 2009.12.06 라오디게아(데니즐리)는 왜 미지근했나? 36
  8. 2009.12.05 대마도 특선요리 이시야끼와 싱싱한 사시미 45
  9. 2009.12.04 남주기 아까운 비경 대마도 아소만 42
  10. 2009.12.02 대마도 서산사의 정갈하고 소박한 일본식 정원 29
  11. 2009.12.01 터키 빌라델비아 성요한교회와 이슬람사원 37
  12. 2009.11.30 칭기즈칸 신화 몽골군, 돈 내면 입영 면제? 69
  13. 2009.11.29 아름다운 일본 성문 대마도 아쿠라문(櫓門) 24
  14. 2009.11.28 대마도 만송원의 1600년 수령 미인 삼나무 28
  15. 2009.11.26 눈부시게 하얀 목화의 성 터키 파묵칼레 64
  16. 2009.11.25 대마도에 남겨진 아픈 역사의 흔적 46
  17. 2009.10.31 하늘과 물빛이 하나된 호반도시 터키 에이르디르 33
  18. 2009.10.30 몽골 바얀골 유치원의 귀여운 아이들 43
  19. 2009.10.24 이슬람 신비주의 도시 코니아, 현대적인 할인점 풍경 35
  20. 2009.10.23 작은 것이 아름답다! 대마도 이색 번호판 28
  21. 2009.10.22 끝없는 터키 평원에서 만난 양떼와 목자 46
  22. 2009.10.21 잃어버린 땅 대마도로 떠난 역사 기행 24
  23. 2009.10.21 초원의 나라 몽골의 아름다운 자작나무숲 22
  24. 2009.10.20 할머니도 하이힐도 즐거운 줄넘기 34
  25. 2009.10.16 터키 카파도키아 지하도시, 데린구유 36
  26. 2009.10.15 스머프 마을 터키 카파도키아 젤베, 파샤바 35
  27. 2009.10.14 몽골 게르에 가면 볼 수 있는 이것은? 39
  28. 2009.10.06 터키 카파도키아 데브렌트의 낙타바위 47
  29. 2009.10.05 몽골 주름잡는 한국산 중고차 55
  30. 2009.09.29 성상품 넘쳐 나는 이슬람 국가 터키 69


어느 도시의 참 모습을 보려면 밤거리를 다녀 보아야 한다고 한다.
대마도의 주도 이즈하라의 밤은 어떠할까....

낮에도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이즈하라...
밤에도 예외는 아니었다...아니 더  조용하였다. 도대체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호텔 일층은 타쿠시(택시) 승차장이었다.
백미러가 본네트 가운데 떡 하니 달린 모습은 에전에 우리 나라에 한 때 다니던 승용차들을 보는 듯 하다.
택시를 찾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택시가 지루하게만 보인다. 

가로등만 붉은 불빛을 내뿜고 있는 이즈하라 메인 스트리트엔 오가는 사람도 차도...별로 없이 적막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우리 일행의 두런거리는 소리만이 건물에 울려서 되돌아 올 뿐.. 

이즈하라 시내를 흐르는 개천 양 옆에 자리잡은 선술집들만 호박빛의 조명으로 행인을 유혹한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인지.....이름조차 아예 '부산정'이다.  

간판이 많이 낡아 있던 식당문에는 '생선회'라고 메뉴가 적혀져 있었다.
생선회는 일본어로  '사시미(刺身)'인데 이 말의 원뜻을 살펴보면 좀 무시무시하다.
'찌르다', '꽂다' 등을 의미하는 '刺'에 몸 또는 물고기나 짐승의 살을 뜻하는 '身'이 합쳐졌으니 “살을 찌르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무서운 말이 음식명이 된 데에는 유래가 있다. 옛날 일본의 막부시대에 오사카 성의 한 장군이 멀리서 온 귀한 손님을맞이했다.
수많은 음식과 더불어 특별히 준비한 여러 종류의 생선회를 먹던 중
손님이 "이것은 무슨 생선이기에 이처럼 맛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생선의 이름을 몰랐던 장군은 생선회를 만든 요리사를 불러 직접 대답하게 했다.
그 후부터 요리사는 장군에게 생선회를 올릴 때 작은 깃발에 생선 이름을 적은 다음 생선회의 살에 꽂아서 상에 놓았다고 한다.
이처럼 생선의 살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하여 '사시미'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낮에 보았던 '야끼또리(焼鳥,やきとり)'라는 이름의 술집(이자까야,居酒屋)은 야경이 더 아름답다. 

불빛과 광고 플래카드가 낮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한자와 히라카나가 합쳐져 문자라는 느낌보다는 또 다른 회화적인 느낌으로 내게 다가 왔다. 

들어 가는 입구가 참 이쁜 선술집(이자까야,居酒屋)앞에 서 보았다. 

분위기가 좋게 보여 들어가 보려고 하니 한국인 출입 금지다.
"죄송합니다...저희 가게에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로 인한 트러블을 막기 위해 한국인 손님을 받지 않겠으니 양해바랍니다."
굉장히 우회해서 안내문을 써놓았지만 결론은 한국인 손님 안 받는다는 소리...--;;
언어 소통이 아닌 그 무언가가 배후에 있는 것 같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불빛과 함께 가게 앞에 내걸린 노렌이 참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는데...... 

일본의 식당이나 선술집(이자까야,居酒屋)에서는 어김없이 가게 문 앞에 그 가게의 이름이 쓰인 '노렌(暖簾,のれん)'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노렌(暖簾,のれん)'을 가게 주인들은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데
아침에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내다 걸고 저녁에 문을 닫을 때엔 제일 나중에 걷어서 가게 안에 소중히 간직하며
가게에 불이 나면 다른 귀중한 물건을 꺼내기 앞서 노렌을 제일 먼저 구해 낸다고 한다.
백년이 넘게 된 가게 문 앞의 노렌은 역시 백년이 넘게 된 것이라 보면 된다고.....
일본의 가게의 전통과 역사를 나타내어 주는 가게의 심볼이라 할 수 있다.  

'미자만(味自慢...ㅋㅋ)'이라고 쓰인 노렌을 들추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오래 된 영화 포스터를 내거는 것이 여기도 유행인 듯 하다. 

여치인지 귀뚜라미인지 모를 장식물이 걸려 있고... 

아주 간단한 종이 공예품도 귀엽게 걸려 있었다. 

술집 안은 지극히 작았고 제일 안에 코딱지 만한 방이 하나 있었다.
많지도 않는 일행들도 다 앉을 수 없어 문턱에 걸터 앉아 술집 문 쪽으로 보고 내부를 찍어보았다. 

역시 방 문에 걸터 앉아 찍은 주방의 모습인데 주인 아저씨.....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방 벽에 걸려 있던 수많은 싸인 종이들을 보니 대미도 관광객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게 실감이 났다.
아! 오늘 밤 죽겠다....우째 자꼬....다녀 감......밤이 무섭다!!
한국 관광객들이 남긴 글귀를 읽으니 피식......웃음이 나왔다. 

선술집 벽장에는 커다란 댓병의 술병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술병마다 다 화이트로 이름이 써져 있는 것이다. 술병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먹다가 남은 술이 다 들어 있었다.이런 소주 댓병 한 병에 2,800 엔 정도이므로 우리 돈으론 거의  28,000 원이니 상당히 비싼 가격이다.
소주 한 병 따면 다 마시는게 당연할 뿐 아니라 때론 한 명이 서너병은 기본으로 비우는 우리네 음주 문화와는 달리
일본인들은 한 병 사서 얘기하면서 마시다가 남으면 술집에다 맡겨 놓고 다음에 와서 다시 자기 술병을 찾아 마신다.
물론 다음에 자기 술병을 찾기 위해서 술병에다 이름을 써놓는 것은 기본... 

마침내 나온 안주는 족발. 우리네 족발과는 달리 튀겨서그런지 기름기도 많다.
한 접시에 600엔(6000원)인데 양이 너무 적어서 하나씩 맛보니 금방 없어졌다.
나마 비루(생맥주) 한 잔은 580엔(5800원,우리네 생맥주 값은 얼마인지 궁금)이었다. 

 일행 중 한 분이 기념으로 싸인을 남기셨다.한글을 모르지만 받으며 좋아하는 주인 아주머니.
혹 다음에 대마도를 다시 오게되면 여기에 와서 저 싸인을 다시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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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베소(에페스,Efes)에서 넓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세르시우스 도서관 앞 대리석거리(마블거리)에 이르게 되면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걸까..? 모여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
그리고 왼쪽에는 하트 모양으로 추정되는 문양...
과연 이 문양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렇게 집중시키고 있을까?


이 길바닥의 대리석은 로마시대 에베소에 있던 '브로델(창녀촌,유곽)'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오늘날의 신용 카드 서비스와 같이 외상도 가능하다는 외상 장부이며
윗쪽의 하트 문양은 창녀촌으로 오시는 분에게는 마음을 다한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 옆에 새겨진 발자국 표시는 방향 지시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19금 표시라는 설이 있다고... 

당시 에베소는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으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으로 안내를 해주는 세계 최초의 광고판 이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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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장사 루디아의 고향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두아디라(Thyatira)의 현재 지명은  터키 아키사르(Akhisar)이다. 
소아시아 서부에 있던 고대 리디아 지방의 성읍이며  버가모(페르가몬)와 사데(사르디스) 사이에 위치하는 두아디라는 BC 300년 경에 셀레우코스 1세(시리아왕)에 의해서 헬라식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로마 제국 시대인 1세기에는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트로이 전쟁사를 썼던 서머나 출신 시인 호메로스가 “두아디라에서는 유명한 자주색 천이 생산됐다”는 기록을 남겼을 만큼 

두아디라는 염색업으로 유명한 도시였는데 그외에도 직조, 피혁, 도기, 빵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여신자  자주색 옷감 장수 루디아가 이 두아디라 출신으로 유명한데 사도행전 16장 13∼15절에는 사도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빌립보의 루디아 기념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겨진 사도 바울과 루디아

 

그리스 빌립보까지 가서 자주 옷감 장사를 했던 대상(大商)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를 세울 정도로 헌신적이었는데
빌립보에는 현재 루디아의 세례터가 남아 있고 그 자리에는 루디아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다.


 

두아디라의 교회터는 현재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고 석축과 담장 정도만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교회터도 빙 돌아가며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주택지 한가운데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교회 마당에는 여저기저 그당시의 건물 잔해만 남아 있을 뿐 루디아이 자취는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었다.


 

두아디라 교회터에서 나와 유적지 근처 동네를 잠시 살펴보았다. 오트바이를 개조한 정체 불명의 차에 다섯명이나 타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운전하는 흰 수염 아저씨의 머리에 쓴 뜨게 모자가 멋스럽다.


 

교회터 건너 옷가게 앞에 의자 앞에 앉아 있는 아가씨들의 사진을 찍어보았다. 한 아가씨는 히잡을 쓰고 한 아가씨는 맨 머리를 내놓고 있지만 둘은 친구인듯 보였다. 히잡 쓴 아가씨의 손에 담배가 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매우 보수적일 것 같은 터키에서는 담배에 관해서는 오히려 남녀가 평등해서 여자가 담배를 꺼내면 남자가 불을 붙여주는게 당연한 신사의 도리라고 한다.

 

 

동네 이발소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한국에서 온 이방인을 보고 신기해하며 몰려들었다. 터키 사람들은 외국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고 모두들 사진찍는 것을 매우 즐긴다. 벽에다 구두를 걸어 놓은 것이 눈에 확 뜨인다.


 

너무나 맛난 터키 아이스크림....터키 전통 아이스크림을 '돈두르마스'라고 하는데 돈두르마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포스팅하려고 한다. 아이스크림을 받는데 잘못하여 바닥과 손에 콘이 흘러내렸는데 이 가게 직원들은 친절하게도 새 아이스크림을 다시 주었을 뿐 아니라 수건을 가지고 나와 손을 깨끗이 닦아주기도 했다.
 

 

가게 앞의 재미있는 전봇대 낙서가 눈에 뜨인다.   낙서의 성적인 표현과 욕설은 만국 공통인 듯......

 

 

거리에서 낙서를 찍고 있는데 한 모녀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이 엄마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도 반갑다고 끌어안고 쪽쪽 키스를 해주었다.
어디를 가도 마음 깊숙히 우러나는 친절을 보여주는 터키 사람들, 두아디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터키 두아디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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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사데 (사르디스,Sardis)의 현재 지명은 Sahlili이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방 서머나 (현재 이즈미르) 동쪽으로 85 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옥한 도시인데 BC 1200년에는 옛 리디아 (루디아)왕국의 수도로써 군사상 상업상의 중심지였다.

고대 리디아 제국은 소녀들이 결혼할 때 지참금을 벌기 위해 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고대 국왕 칸다올레스는 경호원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부인의 나신을 훔쳐보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여왕은 그 경호원 기네스에게 목숨과 왕을 살해하는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는데 결국 기네스는 왕을 죽이고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의 조상이 되었다. 

 

 

또 리디아인들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오락거리를 많이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고 이곳은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생산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크로이소스의 아버지 알리아테스 왕이 고안해낸 발명품이 바로 우리가 요즘 쉽게 쓰고 있는 '동전'인데
맨 처음 동전은 황금과 은의 합금인 호박금으로 만들어졌고 아무런 글자도 쓰이지 않고 사르디스 왕실 휘장이었던 사자머리만을 새겼다.

 

크로이소스는 최소한 10톤의 황금을 쏟아 에페수스에 호화로운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하고 치장했는데
서양에서 '크로이소스만한 부자'라는 표현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에게 자주 비유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이 많이 나오는 까닭은 '황금의 손 미다스'가 이 곳의 팍톨루스 강가에서 목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신화에 따르면 미다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친구이자 숲의 신인 실레노스를 사로잡았으나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므로 디오니소스는 그 보답으로 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미다스는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음식마저도 손을 대면 금으로 변하여 먹을 수가 없었고 그의 공주조차도 금으로 변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된 미다스에게 디오니소스는 사르디스 근처에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목욕을 하게 하여서 황금의 소원에서 벗어나도록 했는데 그후 팍톨루스 강에는 사금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아크로폴리스는 난공 불락의 도시로 알려졌는데도 BC 549년에는 페르시아(바사)의 키루스 2세(고레스)에 의해,
BC 218년엔 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점령되는 비극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비밀의 종교가 성해 요한 계시록  3장 4절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폐허나 다름없는 사데 유적지에서 가장 장관을 연출하는 건축물은 단연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성경에서는 아데미 신전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위의 사진은 에페스(에베소)의 셀수스 도서관 옆 후미진 창고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찍은 것이다.

 

사데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페수스와 사모스,그리고 디디마에 있는 다른 대규모 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중에 가장 큰 신전이다. 신전은 BC 550년 경 건설을 시작했지만 이오니아인의 반란에 파괴되었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복구를 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위용이 짐작되는 엄청난 높이의 신전 기둥  2개가 남아 나란히 서 있어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기중기가 없던 시절에 엄청난 크기의 돌을 잘라 빈틈 없이 쌓아 올린 기술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수 없다.

 

 

이 신전은 거리가 짧은 막다른 곳에 여덟개의 기둥을 두고 양쪽 가장자리에 20개의 기둥을 배치시키는 이오니아식 배열로 이루어졌는데 남아있는 기둥만 보아도 신전의 원래의 크기가 짐작이 되고 엄청난 높이의 기둥 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제단은 신전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구조는 건물 정면이 언덕 경사면을 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된다.

 



미쳐 복구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치되어있는 신전의 기둥을 보면 마치 무른 석고를 조각하듯 정교하게 조각되어있고....

 

기둥에서 떨어져 나동그라진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는 코린트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장식 기법 중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을 받는 장식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거대한 폐허 기둥 뒷편에는  벽돌로 된 사데 교회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현재의 남은 건물의 잔해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이라고 한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부요하였기 때문에 물질 문화에 빠져서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로 기록되어 있다. 

 

 

신전 바로 뒤에 있는 트몰루스(Tmolus, 해발 2,137m) 산은 마치 사람이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것 같은 형상의 산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리디아 왕국와 아르테미스 신전, 사데 교회의 흥망성쇠를 수천년 동안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었을 트몰루스산을 뒤로 하며 사데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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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몽골 봉사단원들이 울란바타르 인근 칸-울 지역 노인 복지 센터와 인근 지녁 아동들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에게 학용품 등 생활 필수품을 전달하고 함께 놀이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우너들은 칸-울 지역 아이들과 페이스 페인팅, 줄넘기, 공기놀이,
부메랑 던지기, 풍선놀이, 색칠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하며

봉사단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의 즐거운 표정을 하나 하나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돌아와서 하나하나 사진을 펼쳐보니
몽골 아이들은 어찌 그리 우리 아이들과 닮아 있는지 신기한 정도였다.




동네 앞 공터에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넓은 몽골 땅이다보니 동네 앞 공터가 다 초원이다.


비록 작지만 정성껏 마련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선물 받은 학용품을 그 자리에서 꺼내 즐겁게 색칠 놀이도 해보는데


큰 아이는 색칠이 제법 능숙하고 색채감도 뛰어나다.


우리 동네 순이를 보는 것 같은 외모......너무나 친근감이 드는 아이들이다.


봉사 단원 중 화가가 한분 계셔서 아이들 얼굴에 일일이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셨다.


이쁜 얼굴에 그려진 꽃은 물론 아름답고...


개구장이의 볼에 그려진 꽃도 아이를 기분좋게 한다.


태극기를 그려주니 너무나 신기해하며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도 한다.


몽골 적십자 단원인 여대생도 예쁜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을 했다. 역시 적십자 사랑이다.


아이들 곁에서 같이 페이스 페인팅을 한 몽골 자원 봉사 여대생 삼인방, 미스 몽골 모드가 즐겁기만 하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풍선.


풍선으로 강아지를 만들어주니 너무 좋아하며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이렇게 이빨 빠진 모습의 아이들의 웃음은 더욱 귀엽다.


이 아이들은 80년대 우리 동네 코흘리개 개구장이들과 어찌 그리 모습이 닮아 있는지...


이 애기는 자기의 풍선이 언니의 풍선보다 이쁘지 않다고 불평이다. 다시 만들어서 쥐어 주어야 했다.
 


눈 색깔이 신비롭도록 아름다웠던 아이는 풍선 트로피를 받았다.


이 개구장이 아이는 싸구려 플라스틱 썬글라스가 너무 잘 어울린다.


몽골 사람은 시력이 너무나 좋은데 이 아이는 안경을 썼다. 도시 생활은 몽골 사람의 눈도 나쁘게 하나보다.


이쁜 얼굴 모습도 눈길을 끌었지만 돌아올 때까지 한번도 웃지 않아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던 여자 아이.


오래 함께 놀아주며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으로는 무리였나보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어울렸던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기억에 남을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바라며..... 칸-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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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중국을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나라라고 했던가?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뒤떨어진 나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상해(上海, Shanghai) 공항에 내리자 마자 그 규모에 놀라게 되고
외탄의 서양식 건물과 황포강 주변에 늘어선 
수많은 고층 빌딩, 남경로의 화려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KBS 수목 드라마 '아이리스(IRIS)'의 상해 씬에서도
북한 공작원 김승우와 김소연이 황포강 야경을 배경으로 접선하는 장면들이 나와서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황포강의 동쪽과 서쪽의 야경은 상해 관광에서 제일 큰 볼거리라고 말할 수 있다.
낮시간대의 경치도 볼만하지만 황포강변을 구경하는데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무렵이다.
포서(浦西)의 모든 건물과 강 맞은쪽의 포동(浦東)건물들이 등불을 밝히는 저녁 시간의 풍광은 찬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황포강의 보석같은 야경을 감상하는데엔 황포강 유람선을 타는게 최고다.  

 

 

  레스토랑으로 된 유람선 등 각가지 모양의 유람선은 관광객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기에 충분한데  

 

 

 필자가 탔던 유람선도 설레이는 마음을 표현하는 듯 수백개의 반짝이 전구로 멋을 내었다.  

 

 

야경을 조망하기엔 배위로 올라가는게 최고...추운 날이지만 승선객들은 객실보다는 유람선 윗부분으로 올라가 야경을 즐긴다.  

 

 

 출발한 유람선은 황포강의 포동지역으로 돌아 항구 깊숙이 들어갔다가 포서 지역으로 돌아 출발지로 오게 된다.  

 

 

상해의 중심을 흐르는 황포강의 동쪽인 포동(浦東)지역엔  

 

 

 세계에서 제일 높은 88층의 호텔인 찐마오 빌딩, 상해국제회의중심 등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각 빌딩마다 색색의 조명으로 그 자태를 뽐낸다. 

 

 

  어떤 빌딩들은 건물 벽 전체가 전광판이다.  

 

 

 특히 동양 1위,세계 3위를 자랑하는 높이 468미터의 방송관제탑인
동방명주(東方明珠)는 어둠 속에 찬란한 빛을 발하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서쪽으로 보면 상해시 인민정부 청사를 비롯한 대형 빌딩들과 유럽식 건물군이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른 바 상해의 정치,경제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외탄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뱃사공들의 발자국에 의해 만들어진 강변길인 외탄(外灘,The Bund)은
상해의 상징이자 상해의 영혼이 숨쉬는 곳이며 상해 근대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 상해가 개방된 이후 영국의 조계지가 된 외탄 일대는
열강의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고층 빌딩가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 건축물은 당시 서양의 복고주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다양한 국가의 건축 양식이 모여 있어서 '세계 건축의 박물관'이라고도 불리운다. 

 

 

 외탄은 북쪽의 백도교로부터 남쪽의 금능동로까지 1.7km 거리에 52채의 서양식 건물과 동서양 빌딩들이 숲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식의 원형 지붕을 한 건물인 HSBC은행이 가장 유명한데
이 건물은 일찍 '수에즈 운하 동쪽과 극동지역사이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바로 옆 건물은 상해 세관이다. 

 

 

위로 올려다 본 상해 세관 건물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150년간 상해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우뚝 선 외탄에는 특히 은행 건물이 밀집해 있다. 

 

 

여기도 은행....저기도 은행....온통 은행 건물이다.  

 

 

또한 황포강 아래로는 푸동지역과 푸서지역을 잇는 외탄 관광 터널이 있는데 

 

 

푸서쪽 출입구는 외탄 진의 광장 북쪽에, 푸동쪽 출입구는 국제회의센터 남쪽, 동방명주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터널의 전체 길이는 646.7미터인데 내벽에 갖가지 색깔의 레이저와 조명을 사용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놓아서
터널 내를 이동하는 모노레일의 투명창을 통해 환상적인 조명과 레이저쇼를 감상할 수 있고
 객차 내에는 고음질의 음향 설비가 되어 있어 갖가지 효과음과 음악을 틀어줌으로써 터널 내에서 벌어지는 시각적 쇼를 한층 멋지게 느낄 수 있다.

   

 

 

 

 황포강변에 위치한 넓은 제방에는 야간 데이트를 즐기는 많은 연인들과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데
여행에서 빠져서는 안 될 추억의 위해 사진사도 여기저기 대기하고 있고 중국 여행의 묘미인 여러가지 먹거리 또한 빠지지 않는다. 

 

 

 군옥수수 하나 사서 들고 연인과 함께 외탄의 멋진 야경을 즐긴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추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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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는 현재 터키의 에페수스(에베소)의 동쪽 150km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데니즐리이다. 라오디게아는 인근에 있는 히에라볼리(파묵칼레)의 뜨거운 온천수를 수로를 통해 끌어다 썼는데 뜨거운 온천수가 히에라볼리에서 9km 떨어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다 보면 물이 식어서 미지근하게 되었으므로 라오디게아 주민들은 뜨겁지 못하고 미지근한 온천수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시록 3:15~16)" 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에 대해 책망하는 구절이 나오게 된다. 

 

미지근하다고 책망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폐허에 내리니 작열하는 태양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온천수는 미지근하였을지 모르나 오후의 햇살은 살갗이 따갑도록 강렬하여 모든 것을 다 녹아내리게 하는 듯 했다.

 

완전히 구워삶을 것만 같은 뜨거운 햇살 아래 폐허가 되어 잡초가 무성한 유적지를 돌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순례의 길과도 같은 여정이다.



유적지의 상세 배치도는 터키어로만 되어 있어서 읽어보아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영어로도 함꼐 써 주면 좋으련만.......

 

 

라오디게아는 AD 60년의 지진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되어 현재는 건물과 기둥들이 퇴락한 벽채가 되어 흩어져있는데 지진으로 무너진 폐허 위에서도 기둥 몇개는 용케도 남아서 서 있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유적지는 복구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크레인으로 무너진 건물과 기둥을 다시 쌓고 있었다. 

 

라오디게아 교회 유적지의 문은 아름다운 아취형으로 되어 있었다.

 

 

아취형 문앞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어서 공사중인 교회 담벼락 위로 올라가서 내부를 보았다.

 

내부는 제법 넓은 편이었고 건물은 문을 통과해서 또 다른 문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크레인도 없던 시절에 크고 무거운 돌을 반듯하게 잘라서 하나하나 올려놓은 건축 기술은 정말 놀랍기만 했고

 

나동그라져 있는 대리석 조각에는 소용돌이 치는 듯한 문양이 바로 어제 새겨놓은 듯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열심히 라오디게아 교회의 여기저기를 찍고 있는데 갑자기 공사장에서 홍길동 같은 아저씨가 아취 위로 나타나더니 사진을 찍는 필자를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를 나름 해석해보니 여기는 유적 복구중이라 출입 금지이며 사진을 찍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작업 반장인 듯한 이 터키 아저씨에게 유적 사진은 안 찍겠는데 당신 사진은 찍어도 되겠냐고 하니
(이 사람은 영어가 전혀 안 통해서 바디 랭귀지로...^^) 갑자기 이 아저씨.....입이 찢어질 듯 반가워하더니 잘 찍으라는 듯한 행동을 하며 카메라를 보며 폼을 있는대로 잡는 것이었다. 한컷을 찍고 나니 너무나 좋아하며 옆에 서 있던 S양도 같이 사진 찍자고 손짓해서 부르더니 카메라 앞에서 갖은 포즈를 다 취하는게 아닌가....


얼마나 우스웠던지......사진을 찍은 후 모니터로 보여주었더니 아주 만족해하며 아까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잘 가라고 친절하게 인사도 해주었다. 심심하고 허전하던 라오디게아의 폐허 위에서 만난 이 아저씨의 위트있는 행동은 라오디게아의 빈터를 보고 돌아가는 얼굴에 웃음이 그치지 않게 만들어 주었고 아직도 라오디게아를 생각하면 이 아저씨의 능글능글한 웃음이 살포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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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즐거움 중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여행지의 새로운 음식 체험이다.
어떤 나라의 어떤 풍습이든 잘 받아들이는 열린 사고와 함께
어느 나라 어떤 음식이든 즐겁게 먹어대는 글로벌한 미각을 가진 필자로써
대마도에 발을 디뎠으니 대마도 특산 요리 이시야끼(石燒)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이시야끼(石燒)는 대마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바다와 산에서 얻은 산해진미를 
달구어진 돌판 위에 올려 구우면서 먹는 대마도를 대표하는 요리이다.
두꺼운 돌판 위에 생선, 버섯등을 올려 놓고 구워먹는 맛은 일품일 뿐만 아니라
분위기 또한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이시야끼(石燒)의 일인분 가격은 3,000엔,우리 돈으로 30,000원이다.

다소 비싼 음식값 지출에 주머니가 후덜덜하고 떨리긴 했으나 식당에 들어서 베풀어진 음식을 보니
소찬 위주인 일본 상차림에 비해선 제법 잘 차려진 한 상이 기다리고 있다.
 

아삭하게 튀겨진 튀김에 곁들여진 깔끔한 양배추 샐러드.
 

먹어 보아도 식재료를 잘 알 수 없었던 부드럽고 달콤한 조림.
 

잘 차려진 참돔 생선회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우리 나라의 횟집의 푸짐하게 담겨져 나오는 회에 비하면 양이 적어 좀 감질나 보이고
접시 가운데 놓인 생선이 "왜 날 먹어???"하며 노려보는 것 같아 좀 무섭기도 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음식 생선회는 일본어로  '사시미(刺身)'인데 이 말의 원뜻을 살펴보면 좀 무시무시하다.
'찌르다', '꽂다' 등을 의미하는 '刺'에
몸 또는 물고기나 짐승의 살을 뜻하는 '身'이 합쳐졌으니 “살을 찌르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무서운 말이 음식명이 된 데에는 유래가 있다.
옛날 일본의 막부시대에 오사카 성의 한 장군이 멀리서 온 귀한 손님을맞이했다.
수많은 음식과 더불어 특별히 준비한 여러 종류의 생선회를 먹던 중
손님이 "이것은 무슨 생선이기에 이처럼 맛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나 생선의 이름을 몰랐던 장군은 생선회를 만든 요리사를 불러 직접 대답하게 했다.
그 후부터 요리사는 장군에게 생선회를 올릴 때
작은 깃발에 생선 이름을 적은 다음 생선회의 살에 꽂아서 상에 놓았다고 한다.
이처럼 생선의 살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하여 '사시미'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요리,이시야끼의 재료들.(4인분이다)

부다 니쿠 꼬지(돼지 꼬지)2개,생선살,피조개,홍합,조갯살,두부,버섯,양파,양배추,곤약,호박....
  



잘 달구어진 엄청 두꺼운 돌판 위에 각가지 재료들을 놓고 구워서 소스에 찍어먹으면 된다.

한 사람에 삼만원 씩이면 네 사람에 십이만원 짜리 차림상인데 약간 모자라지 않게 차려졌나...싶은 상차림은 의외로 배가 부르다.
배 부르고 기분이 좋으니 남은 대마도 여행 일정은 더욱 순탄하게 이루어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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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의 매력은 아름다운 삼림과 구비구비 이어지는 해안을 맘껏 가슴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인데 그 중에서도 하대마의 카미자까 전망대와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는 발 아래에 펼쳐지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의 절경과 아울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이다.

  

 

 

이즈하라 시가의 북방 약 4Km, 사스(佐須)방면으로 빠지는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높은 평지가 펼쳐진다.

바로 주변 경치가 빼어나 명승지로 알려진 카미자까 공원(上見坂園地)인데 이 곳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서 일본의 대표적 익곡(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전경과 영산으로써 신비하게 둘러서 있는 백악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이즈하라 마찌와 미츠시마 마찌와의 경계에 있는 카미자까공원은 그 비경으로 인해 

사계절을 불문하고 하이킹, 드라이브 등 가족 동반의 행락지가 되고 있다.  

 

 

이곳 역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장소인데

기존의 대마도를 지배하던 아비루씨와 외지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소우씨가
1245년 이곳 카미자까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인 후
소우씨가 승리하여
그 후 명치유신(1868년)까지 대마도주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신라계 부족과 백제계 부족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으나 어느 쪽이 신라계이며 백제계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곳의 공원 안쪽에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포대 진지 터와 내무반과 참호, 포대 등의 터가 있는데
지금은 무성한 덩굴로 뒤덮인 채 남아있다.  

 

 

공원 가운데에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있는데 마지막 대마도주  宗武志가 1964년에 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모양(魚型)을 깎으면서 가만히 바다 조류를 본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웃겠지만        

깊은 밤 세계지도를 펴고        

컴퍼스를 잡아       

섬(대마도)을 축으로 크게 돌린다."

 

아마도 대마도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듯 하다. 

      

 

대마도가 일본국에 편입된 이후 행정편제가 바뀌어 소다케유키(宗武志)는 도주(島主)의 자리를 잃고

대신 백작의 작위를 부여 받아 섬에서 떠나 도꾜로 거주지를 옮겼고

덕혜옹주와는 이혼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하여 오래 살다 죽었다고 한다.   

 

 

 전망대에 올라서 보니 아소만의 모습이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옅은 아침 안개 속에 가려져 저 멀리의 풍경들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크고 작은 섬들이 군데 군데 늘어선 아소만의 아기자기한 정경은 처음 방문한 이방인에게도 다정하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다시 차를 타고 구비 구비 산길을 돌아 와타즈미신사에서 가까운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는 차에서 내려 60m 정도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되는데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달리하여 대개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온다.

 

 

에보시타케(烏帽子岳)의 '에보시(烏帽子)'는 '까마귀 모자'란 뜻으로 사방이 다 보인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아소만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해발 176m의 전망대에 서니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누워있고 그 사이로 그림같은 바다가 절묘하게 펼쳐져 있었다. 

 

 

겹겹이 겹쳐진 산들과 바다에 떠 있는 107개의 크고 작은 섬,고요하고 평온한 바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서 생성된 리아스식 해안은 아소만을 대마도 최고의 비경으로 만들었다.

이 곳을 흔히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들 부르기도 한다는데

조각배를 빌려 타고 저 섬들의 사이 사이를 누벼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전망대의 위치를 표시한 안내판에는 부산과 일본의 한 중간에 있는 대마도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한 눈으로 보아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근접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쾌청한 날에는 거제도도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아래로 보이는 아소만 일대 연안은 한국인들이 즐겨찾는 낚시터가 몰려 있다.

연중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받는 아소만은 수온이 적절하여 각종 어류가 풍부한데

특히 대형 감성돔과 참돔이 많이 올라오며 물이 아주 맑아 인근에는 진주 양식장도 있다고 한다.  

 

삼림 자원과 해양 자원이 풍부한 아름다운 땅 대마도.. 
오랫동안 우리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곳이었는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대마도는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우리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쫒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신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에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과 만호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박위장군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에 이뤄졌는데
1429년에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7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는데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으니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무역을 허락하고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고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의 영토로 대마도가 편입되면서
일본은 대마도를 통치하게 되고 우리는 영원히 대마도땅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조선 후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서 대마도를 굳게 지키기만 했어도
오늘날과 같이 대마도를 일본에게 주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주기 아까운 땅......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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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이웃인 우리나라와 일본의 사찰은 의외로 다른 점이 아주 많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원은 단청으로 단장되어 그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일본의 사찰은 단청 기술을 전수받지 못해 단청이 아예 없고 탑도 없다.
우리나라 사찰에 들어서면 의례히 나는 독경소리도 들을 수 없고
오가는 스님들의 모습도 볼 수 없는 곳이 일본의 사찰이다.
대부분의 일본 사찰은 위패의 보관, 관리 수익으로 운영되며 월급제의 승려가 많으며
대처승이므로 당연히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고 사찰로 출퇴근을 한다.
옛날 일본의 사찰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는데
조선의 영향으로 요즘은 불상을 안치하고 운판도 거는 곳이 많다.  

아...그리고 일본의 신사문은 항상 열려있지만 절문은 항상 닫혀있다.

학술적인 목적이나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사찰 내부를 방문하려면 사전에 사찰측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 본토는 사찰보다 신사가 많으나 대마도는 의외로 29개소의 신사에 비해 사찰이 39개소로 더 많다. 

이즈하라에서 우리나라와 관련있는 사찰 서너 군데를 돌아보았는데 먼저 서산사(西山寺,세이잔지)를 소개해 드리자면

서산사는 대마 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다.

 

 

 

이 곳은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떼이안(以酊庵)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테이안은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 숙소로 제공되고 또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하는 일종의 관저였는데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이후 이떼이안이 서산사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도 사찰에서 운영하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다.  

 

 

서산사 절문 바로 앞에는 아주 아주 조그만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이런 소규모의 일본식 정원을 가레산스이(枯山水)양식의 정원이라고 한다.

흰 모래와 돌로 산수를 표현하는데 모래는 물이요, 바위는 산이다.

일본식정원은 물이 있는 곳에 조성했으나 이 양식 이후로 물없이 모래선을 물결로 표현한다.

무로마치 막부의 선종 사찰에서 시작되어 후대에 발전했는데 지금은 독립된 정원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절문을 들어서면 하얀 돌이 깔린 아주 좁은 정원이 있고 가운데 통로에 일렬로 늘어선 박석이 갈 길을 인도한다.

마주 보이는 문은 유스 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몇 발자국 가서 돌아서서 절문을 보고 찍은 사진을 보면 경내가 얼마나 좁은지 알수가 있는데
문 양쪽으로도 숙소로 쓰이는 방들이 보인다.

 

 

 

 

정원 오른쪽에 아주 쬐끄만 지장보살이 빨간 프릴 달린 턱받이를 하고 머리에는 핑크빛 뜨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에서 본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어린 영혼을 지워버린 몹쓸 짓한 부모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달래는 것이다.

 

 

건물 처마에서 아래 마당까지 길게 쇠줄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정원의 흙을 패이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일본인들의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세심함에는 두 손 들고 항복...

 

 

 

시간이 허락하면 이 유스 호스텔에서 자는 체험을 해보면 좋을텐데.....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리를 보니 호기심이 막 발동하는걸 꾸욱 억누르고 돌아섰다.

 

이떼이안(以酊庵)으로 쓰였던 건물 정면의 지붕 끝의 산 모양으로 생긴 구조물은 당파풍(唐破風)으로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 건축 양식에서는 박공이라 하는 것으로 에도(江后)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전해져서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김성일 선생의 시비가 수선사 경내에 서 있는데 이 시비는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것이다. 

 

 

좁디 좁은 사찰 경내에 힘겹게 서 있는 종루는 종치는 막대조차 밖으로 삐져 나와 있는데 묘지는 사찰 경내보다 훨씬 넓다.
일본 사찰은 묘지의 관리로 사찰 운영을 하기 때문에 신도 관리나 불사 보다는 묘지 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묘지에는 일본인 가족들의 납골묘가 가문별로 설비되어 있고
사찰 승려의 주 업무는 이 납골묘를 관리하고 관리비를 유족들에게 받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죽어서도 가족과 옆에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어서
마을 주택가 인근에 납골묘를 만들어 안치한다고 한다.  

 



심지어 집 안이나 방 안에 납골당을 만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무리 부모의 유골이라지만 무섭지도 않는가 보다. 

 

정실(正室)이라고 쓰여진 비석을 보니 일본에도 축첩이 성행했었나 보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태어나면 신사로 가서 그 조상신에게 참배로써 인사하고 자라면 결혼은 교회에서 서구식으로 치르고
죽으면 그 장례 절차나 매장 형식은 불교식을 따르고 사찰 묘지에 묻힌다. 
알다가도 이해하기 힘든 일본 사람들의 사고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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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빌라델비아(Philadelphia)의 현재의 지명은 터키의 알라세히르(Alasehir)이다. 고대 빌라델비아는 루디아 지방의 중앙 고원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있던 고대 도시로 교통의 중심지이며 서쪽으로는 버가모와 사데를 잇고 동쪽으로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를 잇는 도시였다.

버가모왕 아탈루스 2세(BC 159~138),곧 필라델푸스(Philadelphus)는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빌라델비아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합성어로써 '형제애'를 뜻한다고 한다. 빌라델비아는 헬레니즘 문화를 동방의 오지까지 전파하는 역할을 한 곳인데 BC 19년에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던 것을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건하여 소아시아의 중요한 성읍이 되었다.

 

성경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책망을 받지 않고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인데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사도 시대의 빌라델비아는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인해 성도들은 매우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도리어 이들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해 주었다.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력한 교회였으나 안으로는 내실이 있는 교회였는데 그들은 건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단을 물리쳤으며 여러가지 신앙의 시련이 닥쳐와도 요동치 않고 인내와 성실로써 잘 견디어 나갔기 때문에 '성전의 기둥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약속되었고 이 교회는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교회의 모본이 되었다. 

 

파묵칼레(히에라볼리)의 북서쪽으로 자리잡은 빌라델비아에 남아있는 성 요한 교회의 유적을 찾아가 보았다.
 

 

전성기 때에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되는 성 요한 교회는 터키에 자주 발생하는 지진으로 인해 거의 다 무너지고 아래는 돌로, 윗부분은 벽돌로 되어있는 두 개의 육중한 돌기둥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뿐이어서 찾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성 요한 교회는 기둥 두개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교회 유적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담장 바로 옆의 조그마한 주택은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색을 칠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옆 집의 벽은 샛노란 색으로 칠했는데 역시 터키 사람들의 남다른 색채 감각은 알아주어야 한다. 

 

 

성 요한 교회의 바로 맞은 편에는 조그마한 자미(이슬람 사원)가 자리잡고 있었다. 건축술이 아름다울 것도.... 사람이 많이 모일 것도 같지 않은  이 조그마한 자미의 나즈막한 담장을 타 넘으려던 꼬마애가 카메라에 잡혔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타 넘고 가려던 이 꼬마는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발견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얼음'이 되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던지.... 

 

 

마침 '여름 코란 학교(?)'를 마치고 하교하던 중이었을까? 고만고만한 애들이 팔에 커다란 코란을 안고 자미의 담 위에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었다. '메르하바'하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자주 볼 수 없는 한국사람이 신기한지 얘들이 도리어 우리를 보러 몰려 들었다.

아슬람이 주를 이루는 나라이긴 하지만 터키의 어린 여자애들은 히잡을 잘 쓰지 않는데 자미에서 공부하고 나오는 중이었는지 모든 여자애들이 다 히잡을 두르고 있었고 모두다 너무 이뻐보였다. 사진을 찍어주니 미소를 띄며 얌전히 포즈를 취해주었는데 저쪽 편 더 어린 여자아이들은 우리들도 찍어주지....하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도 이리 오라고 불렀더니  담장 위에 다소곳이 걸터 앉아서 아주 얌전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모두 9~10살 내외로 보였는데 모두 양 볼이 터질 듯이 통통한 것이 너무나 귀여웠다. 

 

 

좀 더 어린 아이들은 우리 나라 같으면 1~2학년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도 히잡을 써서 그런지 성숙해 보이고 미모도 돋보였다. 가운데 담장을 뛰어넘던 아이도 같이 앉아서 포즈를 취했는데 제일 앞의 여자 아이는 살짝 나온 똥배가 무지 귀여웠다.  

 

 

코란 학교의 왕언니들인가...? 5~6학년 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들은 어린 동생들에 비해 매우 의젓하고 벌써 여인네의 티가 난다.
크면 모두 다 한 인물 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는 이쁜 모습들이다. 집에서 싸 온 간식일까? 아니면 자미에서 나눠주는 간식일까?
간식을 먹다가 손에 들고 카메라 앞에서 제법 세련된 포즈를 취해 주었다.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아이가 손에 든 것은 터키의 전통 요쿠르트인 '아이란'이고 갱지같은 포장지에 싸인 빵은 터키의 국민적인 빵 '시미트'이다. 

 

 

교회 건너 그늘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던 연세 지긋한 아저씨들 또한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었다.
손자인 듯한 아이가 매우 귀엽다고 했더니 아주 아주 좋아했는데 동서고금을 비롯하고 손자 사랑은 다를 바가 없나보다. 

 

 

카메라를 가지고 동네를 싸돌아다니는 필자와 동행이 신기하게 보였는지 빵집 총각들도 일하다 말고 나와서 우리가 하는 행동을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터키인의 주식과도 같은 빵 '에크멕'이 진열장에 잔득 진열되어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에크멕은 필자가 지금껏 먹어본 빵 중에 가장 맛있는 빵으로 손꼽는 빵이다. 

 

 

빵집에서는 시미트,에크멕 등 터키의 전통 빵을 장작불을 때는 전통적인 오븐을 사용해서 굽고 있었는데
오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니 열기가 장난이 아닌 오븐 옆에 바싹 붙어서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빵집 주인인 듯한 아줌마와 그의 아들도 이방인을 위해 함께 포즈를 취해주었다. 옆에 있던 동행 S가 아줌마를 보고 "촉  규젤~(Very Beautiful)"이라고 하며 손을 둥글게 모으는 제스츄어를 하자 아줌마는 생전 처음 보는 S를 와락...안아주었고
시미트(참깨가 발려져있는 동그란 도넛 모양의 대중적인 터키빵)를 종이에 싸서 뭐라...뭐라 하며(가면서 먹으란 뜻인 듯.....)우리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받은 시미트를 한입 베어무니 고소한 맛과 함께 처음 만나는 사람도 이웃같이 대하는 빵집 아줌마의 인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빌라델비아에서는 성 요한 교회의 폐허와 그 근처 동네를 잠시동안 돌아보기만 하고 떠나야했다. 칭찬받는 믿음을 가졌던 빌라델비아의 교회터를 돌아본 것도 인상에 남았지만 이슬람 사원 앞에서 만난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순박하고 정감어린 모습들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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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펼쳤다.

몽골인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칭기즈칸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기병을 앞세운 전격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시에 몽골 군대는 1인당 8~9 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는데 병사가 100 여명이면
말이 800~900 마리가 되므로 적들은 감히 몽골 병사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복지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데 한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리다 병사를 태운 말이 지치면
달리는 말을 세우지도 않고 말 위에서 다른 말로 올라타며 진격했으므로 군대의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해결 문제인데 몽골인은 원거리까지 별도의 식량 조달이 필요없는 유목민이었으므로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도 양고기 가루를 미숫가루처럼 말린 보르츠나 말젖으로 연명할수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늙은 말 부터 차례로 잡아 먹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저 싸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칭기즈칸 군대는 요즘의 인터넷 프로토콜 방식과도 같은 국제적인 통신망을 구축하여
근거리는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하고 장거리는 송골매를 이용하여 연락을 했다.
전령은 극소수의 부족 언어를 사용하는 군사를 보내어 도중에 체포 되더라도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 군에서 사용하는 통신 보안 방법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 정보망을 통하여 정복지 현지의 상인들을 보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몽골군은 무섭다'라는 소문을 적진에 퍼뜨리고 밤에만 활동하는 '검은 기마병'을 보내는 등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작전을 폈다.
또 몽골 군대의 지휘관들은 칭기즈칸부터 말단 병사까지 동일한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같은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노략질을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전리품이 생기더라도 아랫사람을 먼저 챙겼기 때문에 몽골군의 사기는 충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은 이국적인 문화를 잘 못 받아들여 나라는 쇠퇴일로를 겪게 된다.
칭기즈칸 시대에는 한집에서 병사 한명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으므로 100 만 정도의 인구에 병사가 10 만이나 되었는데 
라마 불교의 도입으로 인해 몽골의 군사력은 점점 쇠퇴하게 된다.
원나라 전성기의 몽골은 한집에서 한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집에서 한명 이상을 라마승으로 출가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병사 또한 점점 줄어들게 되니
몽골의 군대 제도는 와해되어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기게 되기까지 이른다.
이때문에 대제국 몽골은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게 되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로 유라시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몽골군의 현재의 모습은 어떨까.....?
울란바타르 손기노 카이르칸 지역에 위치한 군부대를 찾아가 보았다.



몽골의 정식 군대인 몽골 국군은 사회주의 정권 붕괴 후 몽골 인민군에서 계승된 군대이다.

몽골의 총병력은 9100명, 예비병력은 14만명인데 (2003년 통계) 병력은 사회주의시대보다 만명 정도 줄어들었고
몽골 군대의 장비는 주로 인민군 시대 소련으로부터 얻은 무기가 대부분인데  
전투기나 공격용 헬리콥터 등은 모두 퇴역해서 전력은 매우 약하다고 한다.




손기노 카이르칸에 위치한 군부대는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었지만 부대는 비교적 한산해 보였고



군인들의 복장과 복무 모습은 우리나라 군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의 입장에서 군부대의 겉모습만 보고 받은 인상을 피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겠지만
몽골 군부대에서 받은 인상은 '너무나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방문자를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군인 아저씨의 시선도 따스하기만 하다.



부대 강당에서 공식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초소 옆에서 트럼펫을 연습하는 군악대원들을 발견했다.



트럼펫 부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계속 연주해 달라고 했더니 카메라를 너무 인식해서인지 경직된 모습으로 악기를 연주했다.

그런데 이 군인은 나이가 상당히 되어 보인다. 도대체 연세가 몇이신지.....



나이 많은 군인들 뿐인가....하고생각했는데 형님들 앞으로 나이가 많이 어려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이 군인은 카메라 앞에 세웠더니 출입문 앞에 붙어서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너무나 어려 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군인 아저씨'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완전 중학생 같아 보이는 이 군인, 수줍은 듯 머금은 미소가 참 훈훈하다.
몽골의 군대 역시 우리와 같은 징병제로서 남자는 18세부터 1년간 병역의 의무를 진다는데
이 군인은 채 열여덟도 안 되어 보이는 듯..... 너무나 애띤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몽골에서는 일정한 돈을 내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병역대체금이라고 불리는 납부금을 납부하거나, 해외에 유학하는 등 26세까지 해외에서 지내면 병역의무는 소멸된다고 하고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면제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보다는 징병제도가 상당히 유연하다.

실제로 안내와 통역을 위해 같이 따라다녔던 몽골 항공 직원 '바야라'도
200만 투그릭(몽골 화폐 1투그릭은 우리 화폐 단위와 비슷) 정도의 병역대체금을 내고 군대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돈을 내고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군대를 가겠냐고 반문했더니 몽골 청년 바야라는
"솔직히 말해서 몽골 군대는 공부를 많이 배우지 못했거나
수백만 투그릭이 넘는 병역대체금을 낼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이 간답니다."

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돈으로 이백만원 정도 되는 병역대체금은 저소득층에게는 너무나 큰 돈이므로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군대를 면제받지 못하고 입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의 월급이 사회에서 받는 월급의 평균 수준은 되기 때문에 불만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데
어쨌든 이런 제도가 다른 문제가 없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돈을 내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라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돈 내면 군대 면제'되는 제도가 시행되었더라면 온 나라가 완전 난리가 났을터인데......



군부대를 떠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자꾸만 어린 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병역대체금 기백만원을 내지 못해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병역 의무를 잘 마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고
자신의 나라 몽골을 위한 애국심만은 어느 나라의 군인들보다 더 불타오르기를 마음 속으로 기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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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를 보고 대마 역사 자료관 뒤 편을 돌아 야트막한 언덕을 돌아내리니
눈 앞에 산으로 둘러싸인 학교와 일본 전통 건물이 나타났다.
킨세키죠(金石城)이라는 성터인데 거기에 성문,정원터가 있고 정원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도 있었다. 

 



킨세키죠(金石城)
은 1669년에 소오요시자네가 건설한 성인데
성터에는 대마도의 돌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과 성벽이 잘 남아 있다.

 

 

 

 

한구석에는 훌륭한 정원터가 남아 있는데 따로 입장료를 받아서 담장 밖에서 한 컷 찍었다.

 

 

 

 

 

 

성 입구인 야쿠라문(櫓門,노문)은 1990년에 복원된 건물인데

대마도에서 본 건물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문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모습을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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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유명 사찰 만송원(반쇼인,萬松院)을 찾아가는 길.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잡은 만송원은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의 산기슭 입구에 있다.

 

 

 

 

낙엽수림이 뒤덮힌 일대를 포함한 만송원은「쓰시마 번주 소가묘소」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곳이다.

 

 

 

 

 

이 사찰은 초대 번주 요시토시의 보리사로써

제2대 번주 요시나리가 아버지를 기리며 1615년에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한 곳으로 이 곳에 역대 쓰시마 번주와 그 일족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불사공구(佛事供具)인 삼구족(三具足 : 향로, 촛대, 고배)과 고려불(관세음보살반가사유상),

고려판경문 등이 있으며 조선에서 가져간 국보급 불상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사찰은 우리 나라나 중국의 사찰과는 외관이나 성질이 매우 다르다.

일본의 사찰은 외관상 신사와 매우 흡사하지만 신사는 반드시 도리이(鳥居)가 있는데 비해 사찰에는 그것이 없고

신사 주위에는 묘지가 없는데 일본의 사찰 주변에는 거의 대부분 묘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정문 오른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인왕상이 팔을 들고 서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어 '아'상이라고 하는데 범어에서 시작을 의미한다. 

 

 

 

 

정문 왼쪽에 있는 인왕상은 입을 다물고 있어서 '훔'상이라고 하고 이는 끝을 의미한다.

 

 

 

 

 

절의 정문은 닫겨 있어 옆으로 통해 돌아가니 다 사그러져 가는 매표소가 있었다.

입장료는 300엔....무지 비싸다.

일행이 열명이라고 하니 깎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반값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절 옆 문 바로 옆 담벼락에 돌로 만든 북이 서 있었다.

북에는 삼태극이 선명하고 또아리를 튼 용이 기둥을 휘감고 있는 이 북의 이름은 칸코(諫鼓,간고)이다.

 

 

 

 

 

우리나라의 신문고와 같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울리라는 것인데

영주가 선정을 베풀어서 인민들이 북을 칠 일이 없으므로 새들만 놀고 갔다고 하여

당시의 평화로움을 말해주고 있는데 실제적인 필요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세워둔 것 같다. 

 

 

 

 

산문(절문)을 안에서 본 모습인데 일본 사찰의 정문은 항상 닫겨 있어서 측문을 통해 들어온다.

현존하는 이 절문은 쓰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桃山:1568∼1600)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다.

 

 

 

 

만송원의 본당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몇 번의 화재로 인해 남아있는 것은 산문과 그 양 옆에 시립해 서 있는 인왕의 목상, 그리고 뒷산의 묘소 뿐이다.

절의 일주문을 지나 한참 가면 사천왕상이 나오고 대웅전,약사전,명부전,산신전....등등

여러 불각이 산재해 있는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달리 법당 하나 달랑 있는게 일본 사찰의 특징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쪽 끝에 삼구족이 전시되어 있었다 .

삼구족(三具足) 이란 동으로 만든 향로, 화병, 촉대(초를 꼽는 대) 세트를 말하는데

화병은 뚜껑에 사자가 앞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양이 특이하며

촉대는 새가 거북의 등위에 올라앉아 부리로 촉대를 물고 있는 진기한 모습이다 

 

 

 

 

이 삼구족은 조선통신사 기간 중 우리 왕실에서  대마도 번주에게 하사한 것이다.

 

 

 

 

 

신 벗고 들어간 법당은 다다미가 깔려 있고 우리 나라의 대웅전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굵은 대나무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

 

 

 

 

 

본당의 본존불은 십일면관음불(十一面觀音佛)으로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고려시대 불상이라고 하는데

내부가 매우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 나라의 법당만 보다가 만송원의 법당을 보니 여기저기 불구들이 널려 있는 모습들에서 매우 산만한 느낌을 받았다.

 

 

 

 

본당의 왼쪽에 까만 흑돌의 지장보상이 빨간 턱받이를 하고 있다.

일본 전국의 마을이나 절, 계곡 어귀에 있는 부조나 석상은 어김없이 지장보살인데

일본에서 본 지장 보살은 이렇게 한결같이 앞치마 같기도 하고 턱받이 같기도 한 옷을 입혀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곳의 지장 보살은 조선의 임금이 그동안 선린 외교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주는 등 국교를 다시 맺는데  많은 공헌을 한

대마도주 '소우요시토시'의 죽음을 애도하여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세 틀이 있었는데 대동아전쟁때 두 틀이 공출을 당해 무기로 사라지고 지금은 한 틀만 남게 되었다 한다.  

 

 

 

 

 

법당 오른쪽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 문장인 등나무 그림이 새겨져 있는 단아한 등이 걸려 있었고

그 옆의 유리창문으로 되어 있는 곳에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역대 장군들의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유리 사이로 보니 어두운 방 안에서 위패나 촉대등을 구별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인 등나무 문장이 벽지로 도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묘지는 햐쿠칸키(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마련되어 있다.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宗가 제10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묘지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번주와 그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이 하단에는 일족 및 소가(宗家)에서 출가한 사람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중에서도 대조선무역이 활발하였던 시기의 번주 요시나리(義成)와 요시마사의 묘는

다른 묘에 비해 훨씬 커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였던가를 짐작케한다.

 

 

 

 

이 곳은 일본 3대 묘지(万松院 / 石川縣 金澤의 前田家 / 山口縣 萩市의 毛利家)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사적이다  

 

 

 

 

묘지 쪽에는 둘레가 무려 6~7m나 되고 높이가 35~40m나 되는 삼나무(大杉)가 세 그루 있다.  

 

 

 

수령이 1600년이라고 하며 대마도에서는 최고령으로 나가사키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마도는 큐슈와 우리나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서인지 소나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잡목을 비롯한 삼나무와 노송나무를 쉽게 접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스기'라고 하는 삼나무는 수분을 흡수하지 않고 
물 속에서 쉽게 부패하지 않아
일본에서는 선박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한다.

사찰보다, 잘 보존된 묘지보다 더 부러운 것은 이렇게 오래 된 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마도를 돌아 다니는 동안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섬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삼림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미인의 다리같은 삼나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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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차로 12시간 거리를 가면 나타나는 파묵칼레는 터키에서 손꼽히는 온천 휴양지이다.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라는 뜻인 파묵칼레(Pamukale)는 목화솜을 깔아놓은 듯한 신기한 순백색 석회층으로 인해 유네스코 지정 세계 복합유산(세계에서 단 20 곳임)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오는 여행자는 신비한 경관 뿐 아니라 고대 '히에라폴리스(히에라볼리,Hierapolis)'의 유적도 함께 돌아볼 수 있어 좋다.

히에라폴리스는 BC190년에 페르가몬왕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옛날에 파묵칼레 테르말 뒤 쪽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플루토니움이라는 구멍 속에서는 마시면 죽는다고 알려져 있는 유독 가스가 나왔는데 이곳에 들어갔던 한 사제가 소량의 가스를 흡입한 뒤에 혼수 상태에서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진 이후부터 히에라폴리스(성스러운 도시)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이 도시는 비잔틴 시대까지 인구 십만명이 넘는 도시로 오랫 동안 결쳐져 번성하였으나 결국 셀주크 터키에 의해서 멸망하게 된다. 

 

 

유적 중에서도 '도미티안 황제의 문'이라는 3개의 연속 아치와 원통형의 탑으로 되어있는 건물이 눈에 뜨인다. 고대 도시의 남북을 관통하는 대로 끝에 위치한 이 문은 도미티안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AD 84~85년에 세운 문인데 로마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 '로만 게이트'라고도 불리우는 히에라폴리스의 상징적 건물이다.

19세기 말에 발굴이 시작된 유적 발굴 작업은 현재는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발굴 복원하고 있는데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한 빌립을 기념한 빌립 순교 기념 교회, 원형 극장, 목욕탕, 시장터, 체육관 등이 남아있다. 복원조차 힘들 정도로 방대한 유적으로 가득 차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유적들의 잔재는 당시 이 도시의 거대함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준다. 

 

 

히에라폴리스에는 무덤으로 이루어진 '네크로폴리스(죽은 자의 도시)'가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히에라폴리스는 옛날부터 온천으로 유명한데다 의학이 발달한 곳이어서 수많은 환자들이 이곳으로 찾아 왔는데 병 치료를 하러 왔다가 낫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묻혔으므로 도시는 점점 무덤이 늘어갔다.
 

 

네크로폴리스의 무덤은 현재 12,000기 정도가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도굴로 파헤쳐진 것도 많다. 형태는 석관,집 모양의 무덤,큰 규모의 사원 형태 등 다양한데 무덤의 형태에 따라 생전의 직업과 지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죽은자의 도시는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게 해주어 사람들은 일순간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히에라폴리스 박물관은 2세기에 만들어진 대로마 목욕탕의 벽과 아치,돔을 살려서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신상,장식 조각,종교적 상징물과 히에라폴리스와 네크로폴리스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해 두었는데 너무 일찍 찾아간지라 문을 안 열어서 안을 돌아보진 못하였다.  

 

 

파묵칼레의 상징인 석회봉을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마치 새하얀 설산처럼 보이기도 하고 빙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석회층은 대지 상부에서 흘러내려온 석회 성분이 함유된 물이 오랜 시간을 거쳐 결정체가 되고 대지 전체를 덮은 것이라고.....

 

 

이곳의 석회봉은 길이 약 3km, 두께 약 300m, 아래 평지에서 보면 약 100m의 높이로 형성되어 있는데 가까이 가서 올려다 보면 훨씬 더 높다는 인상이 든다. 윗 부분의 석회봉에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같이 보이는 것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석회봉 위에 올라가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석회봉 아래 마을이 훤하게 보인다.



예전에는 이곳을 마음대로 출입했다고 하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는 석회층의 자유로운 출입은 금지되었다. 

 

 

파묵칼레의 석회봉은 정말 솜으로 만든 요새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 얼어붙은 폭포를 연상케도 한다. 온천수에 섞인 탄산석회 침전물이 수천,수억년 동안 두텁게 쌓여 만들어진 석회층이 마치 다랭이논처럼 펼쳐져있는데 여기에 고인 물은 아침 햇살을 머금을 때는 파아란 빛으로, 저녁 노을이 짙게 물들 때에는 붉은 빛으로 물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답다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터키에서 사 온 CD에 들어있던 사진 이미지에는 석회봉 온천풀장에서 수영하고 있는 환상적인 장면이 들어 있었는데 한때는 이렇게 수영을 즐길만큼 수량이 풍부했다고 하나 현재는 석회층 보호 차원에서 입장이 금지되어있으므로 여기서 수영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처럼 터키도 지나친 개발 붐으로 인해 온천은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대지진이 있었던 14세기에 파괴된 석회층보다 사람들이 마구 들어가서 파괴시킨 석회층이 더 심각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석회봉의 윗 부분까지만 출입이 허가되어있어서 신발을 벗고 석회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입구 나무로 된 계단 옆에 아무렇게나 신을 벗어 놓고 들어가면 된다. 

 

 

 아침이라 사람들은 많이 없었지만 먼저 온 사람들이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었다. 석회봉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서 맨발로 걸으면 마치 지압을 하는 것처럼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파여진 도랑을 따라 온천수가 아래까지 흐르고 있는데 석회봉 위 물도랑 사이로 걸어보는 것도 특이한 경험. 도랑 안은 밖보다 암석이 거칠어 지압하는 것 처럼 발에 자극이 심하고 어린 아이발 처럼 연약한 피부를 가진 사람은 발이 따가울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바닥에 깔려 있는 석회가루는 미네랄이 풍부해서 피부의 주름 개선에 특효가 있다고 해서 관광객들은 하얀 가루를 얼굴에 바르기도 한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사람들은 석회봉 윗부분 여기저기에 고인 물에 너도 나도 발을 담그고 첨벙거리며 즐겁게 놀기도 한다. 고인 물은 그다지 깊지 않아 발목 정도 잠기는 정도이지만 따스한 물의 온기는 온몸으로 퍼져나가서 발에 났던 상처는 물론 지쳐있던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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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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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골로새를 지나 라오디게아(지금의 데니즐리)로 가다보면 청옥같이 푸르고 아름다운 호수를 만나게 되는데 이 호수는 바로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에이르디르 호수다. (터키에서 제일 큰 호수는 반 고양이로 유명한 '반'호수이다.)  

 

 


마치 바다처럼 넓디 넓은 에이리디르 호수의 물빛은 신비로울 만큼 아름답다.

 


보통 빙하 호수의 물은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깔을 띄곤 하는데 에이르디르 호수는 빙하호도 아닌데도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터키의 하늘색을 그 가슴에 담아서 그런지 터키석 같은 물빛을 지니고 있다. 


호수가를 빙 둘러 한 바퀴 도는 구불구불한 도로는 가는 곳 마다 천혜의 관광지이다.
터키 사람들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은 바다나 호수가에 여름철을 지나기 위한 별장들을 가지고 있는지라 이렇게 아름다운 호숫가에는 아름다운 호텔 ,팬션 ,빌라들이 즐비하다. 


에이르디로 호숫가에는 가도가도 끝없는 올리브 농원이 펼쳐져있고 과일을 재배하는 과수원도 많다.
사시 사철 강한 햇빛이 내리쬐는 터키의 과일은 당도가 높아서 아주 맛있다. 터키에서는 과일 값이 아주 싸기 때문에 터키 사람들은 웬만하면 과일을 박스채 산다.


 

너른 호수를 옆으로 끼고 한바퀴 돌다보니 호수와 꼭 같이 '에이르디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호숫가 마을이 나온다. 에이르디르는 비록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BC500년에 이미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을 만큼 역사가 오래 된 도시이다. 호반도시 에이르디르는 다른 도시에서 보기 힘든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주변에는 에이르디르 호수 뿐만 아니라 찬드르라는 유명한 계곡과 코바다 국립 공원등이 자리잡고 있어서 찾는 이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오래 있어도 싫증나지 않는 매력을 가진 도시라고 한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에이르디르의 점심 시간, 케밥집 앞에도 밖에 나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점심을 먹으러 들린 호숫가의 호텔에는 건물  5~6층 높이의 자작나무 군락이 호텔 1층 천정을 뚫고 자라고 있다.
원래 나무가 자라고 있던 곳에 호텔을 증축하여 지은 둣 한데 나무를 베지 않고 건물과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호텔 내의 카페에 들어가 보니 카페의 주방 한가운데 아름드리 나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에이르디르의 중심부는 매우 작은데 성벽에서 보면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근처 예실섬에는 휴양도시답게 팬션이 밀집되어 있는데 섬이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매립되어 돌무쉬(조그만 합승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마을에 있는 오래 된 셀주크 성채 부근에는 15세기에 건설된 '흐르즈베이 자미'라는 사원이 있는데건물 뒷편에 미나레(첨탑)가 보이는 건물이 흐르즈베이 자미다.

 


흐르베이 자미 앞에 '된다르베이 마르마사(된바르베이 신학교)'라는 유적이 있는데 얼마전 복구되어 현재 쇼핑 몰로 사용되고 있다.
유적을 복구해서 쇼핑몰로 쓰다니.....정말 놀랍지 않은가?

에베소 바로 근처의 쿠샤다스라는 도시에도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둘기섬(귀베르진 아다스)'이라 불리우는 섬이 있는데
섬 전체가 아름다운 꽃으로 잘 가꾸어져 낙원 같은 이 섬에는 14,5세기의 아름다운 성채가 있다. 그런데 이 성채는 지금 복구되어 터키 청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이트 클럽이 되었단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터키에서는 기원전의 신전 기둥이 동네 아저씨들의 체스판이 되어 있고 로마 시대의 석관이 카페의 테이블로 쓰여 손님을 받으며 파묵칼레의 온천 수영장의 바닥에는 신전 기둥이 그대로 누워있는 정도이다.

놀란 외국인들이 터키 사람들에게 왜 이런 귀한 유적들을 박물관에 넣어 보호하지 않고 방치하냐고 물으면 터키 사람들은 참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라 전체에 유물이 천지삐가리이고(널려있고) 온 나라가 박물관인데 왜 유리 상자 안에 그것을 가두어 두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고.....실제로 이스탄불의 박물관에 가보면 유물이 하도 많아서 마구잡이로 쌓여있다는 느낌마져 든다고 한다.  

터키 사람들에게 유적이나 유물은 박물관의 유리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며 잠자면서 것이 아니고 동네 한가운데서 위치해서 그 곳을 드나들도 그곳에서 쉬며 사람들과 같이 숨을 쉬고 있었다. 터키의 유적은 이른바 죽은 유적이 아니고 살아있는 유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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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서쪽에 위치한 바얀골 지역(Bayangol District)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 적십자 지도자의 안내로 지역 유치원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적십자에서 준비한 선물 상자 전달과 함께
유치원 마당의 놀이 기구 정비 등 봉사 활동을 위해 방문한 것인데
유치원에 도착하니 원장 선생님과 아이들이 유치원 문앞에 나와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이들은 약간 긴장한 듯 부동자세로 서 있었는데 몽골 군복을 입은 아이는 카메라를 들이대니 거수 경례까지 한다.


깃발을 든 아이 옆 쬐끄만 여자 아이는 이 유치원의 스타인지 너무 이쁘게 차려입었다.


바얀골 지역 적십자 지도자의 소개로 원장선생님의 간단한 환영사가 이어졌는데 교사들이 간호사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것이 눈에 뜨였다.


이어 유치원 강당 안에서 아이들의 재롱잔치가 10분 정도 있었는데


몽골 군복을 차려입은 아이는 노래와 군인 흉내를 내어 박수를 받았고


인형같은 여자아이의 노래와 춤 솜씨에는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유치원 아이들의 즐거운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서로 먼저 찍어달라며 V자를 그리고 있는 아이들.


사진 찍을 때 V자를 그리는 포즈는 몽골에도 유행인가 보다.


그림을 그리다가 멈추고 의젓한 포즈를 취하던 아이.


팔뚝에 붙여준 문신 스티커를 너무 맘에 들어하던 아이.


무지 수줍어 했지만 반짝이는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아이.


토끼 흉내를 내며 깡충 깡충 귀엽게 뛰던 아이.


아주 꾀끄마한 체구지만 당차게 보이던 아이.


크면 몽골 씨름 선수가 될 거 같은 아이.

동그란 눈이 너무나 인상적인 아이.


그중 제일 눈에 띄는 아이들은 바로 이 커플이다.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거수 경례를 하던 아기 병사.


통통한 볼에 까만 눈이 얼마나 이쁜지..


자꾸 고개를 돌리며 뺨을 가리키며 뭐라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곰 푸' 스티커가 보이게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슴에 손 얹어 경례도 하고...아기 병사는 사진 찍히는 걸 너무나 즐거워했다.


덥다고 군복을 벗으니 옷안에도 병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바얀골 유치원 최고의 멋쟁이 병사는 연신 옷을 갈아입고 포즈를 취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이 아이는 예쁘게 찍어주겠다고 하니 손가락을 볼에 대고 배시시 웃는다.


눈이 어쩌면 이렇게 크고 까만지......사람인지 인형인지 구분이 안 간다.


리본 가발을 쓰고도 찰칵~!


사진 찍는걸 좋아하는 아이들 덕에 필자도 신이 났다.


이번엔 몽골 전통 의상을 입고 찰칵~!
왜 이렇게 옷이 많나...하고 궁금해 했는데 교사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옷을 계속 갈아 입혀 오는걸 보니 이 옷들은 유치원에 비치된 소품 의상인 듯 했다.


공산주의 국가였던 몽골인지라 지금도 유치원은 수업료를 전혀 받지 않고 국가에서 다 지원한다.
다음 기회에 따로 포스팅할 계획이지만 몽골 사람들의 자녀 사랑은 '자녀 숭배'라고 할만큼 유별나다.
살기가 힘들어도 자녀들 교육은 꼭 시키며 만약 여러 자녀를 다 교육시킬 형편이 안 되면 맏딸을 공부시킨다.


가족 사진이 한장도 없다고 말하는 이 가족은 엄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몽골 여행을 하는 동안 이런 아이들 사진 뿐만 아니라 다수의 현지인 사진들을 카메라에 담아서
돌아와서는 모두 인화하여 방문했던 지역대로 구분해서 몽골 적십자로 부쳐주었다.
지역 적십자로 사진을 꼭 우송해달라는 부탁도 함께 적어보내며
귀여운 바얀골 아이들을 비롯해 모두가 사진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혼자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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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면 터키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코니아(콘야,Konya)'라고 대답한다.
수도 앙카라에서 250 k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인구 80만이나 되는 대도시가 왜 제일 보수적인 도시일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코니아에 내려보았더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경에서 '이고니온'이라고 불리웠던 코니아는 선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로마,헬라 제국 시대에는 브르기아 지방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 시대에는 수리아와 에베소를 연결하는 유명한 상업 도시였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이 곳을 방문하여(사도행전 13:51)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 신자를 얻게 된 기록도 있으며(사도행전 14:1~7)

1071년부터 1308년까지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수도이었기도 한  유명한 도시이다.


그런데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코니아가 알려진 이유 중의 하나는
이 곳이 '메블레비'로 불리우는 터키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 종단의 발상지라는 사실 때문이다.
메블레비 교단의 창시자인 '메블라나 젤라렛딘 루미'는 글을 모르는 일반 대중도
쉽게 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마'라는 수행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세마'는 흰 옷을 입은 수행자들이 음악에 맞춰 끝도 없이 뱅글뱅글 돌며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방법이다.

수피즘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도 누구나 한 번 정도는
팔을 하늘로 치켜 들고 뱅글뱅글 도는 세마 명상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세마 명상춤은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의 정교 분리 정책에 의해서 일시 금지되었으나
지금은 완화 정책으로 인해서 다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메블레비에서 세마를 추는 사람을 '세마젠'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의상이 흰색인 것은 수의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춤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이 걸치는 검은 색 망또는 무덤을 뜻하고 머리에 쓰는 긴 모자는 묘비를 의미한다고.....
인간이 가장 겸손해지고 솔직해지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신과의 합일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란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나. 

이 곳 코니아의 메블라나 박물관에는 수피파의 시조 메블라나의 묘가 있으며
터키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온 몸을 검은 차도르로 휘감은 여성도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도시이다.

신비주의 이슬람의 도시 코니아는 셀주크 터키 술탄의 궁정이나 알라딘 자미(사원)등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도시이기도 하지만
현재는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어서 도시의 풍경은 황량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신개발 지역이 더 많이 눈에 뜨이는데
이런 주택 지구는 밋밋하게 지어진 아파트, 나무 하나 없는 주차장 때문에 너무나 삭막한 느낌이 든다.

신주택지구에는 주상 복합 스타일의 아파트가 많은데 우리처럼 베란다가 새시 유리로 되어있는 경우는 많이 없고
대개의 경우 베란다에 커튼처럼 커다란 흰 천을 쳐놓았다가 한낮에 태양이 내리쪼일 때 가려서 열기를 막아준다. 

코니아 변두리는 훨씬 더 터키 색이 강하다.
삼륜 오토바이 뒤로 파랑과 초록문의 색감이 참 고운데 터키 사람들은 건물 색을 다양하게 쓰는 것이 특징이다.

 

터키의 어느 마을을 가도 그렇듯이 펩시의 간판이 자리잡고 있고
코딱지만한 잡화점에는 잡다한 생활 용품등이 길가에까지 전시되어있다.

가게 앞에 있는 엄청나게 큰 용량의 세탁 세제들이 시선을 끄는데 이것은 터키의 가정들이 예민할 정도로 청결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터키 주부들은 일상 중 많은 시간을 마룻바닥을 솔로 문질러 닦거나 속옷을 세탁하고 삶는 일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TV 광고의 많은 부분이 청소용품 광고로 채워져 있을 정도라고 한다.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관광지도 아닌 보수 이슬람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다 혹시 잡혀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들고 약간은 무섭기도 했지만......
호텔을 나서니 길에는 어디에서인지 뿌연 연기가 나와서 거리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울리며 온 도시를 내리덮고 있어
가슴을 찍어 누르는 듯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이 온 몸을 감쌌다 

그런데 아잔 소리가 나면 다 길가다 엎드려 메카 쪽을 향하여 기도할 줄 알았더니
아잔 소리가 나든 말든 길을 가는 사람들은 제 갈길을 가고 있다.

길에는 여자나 남자나  혼자서 다니는 사람들은 잘 없었고 가족 단위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히잡을 두르거나 검은 차도르를 발끝까지 덮어 쓴 여자 옆에는
자유로운 복장을 한 남편이 아이를 안거나 손을 잡고 따라 다니고 있어서

이슬람 가족들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매우 가정적인 분위기란 걸 한 눈에도 느낄 수 있었다. 

 

재래 시장은 우리나라 90년대 같은 분위기였는데  가게 마다 마네킨에다 옷을 입혀 세워둔 것이 특징이었고
특히 가운데 마네킨은 어디가 부러졌는지 노끈으로 목을 단단히 붙들어 매어 벽 사이의 철근에다 고정시켜 놓았다.  

 

가방, 신발, 속옷 등을 함께 파는 가게 앞의 남자 마네킨은 맨 머리에다 넥타이를 두르고 있다.
우리 나라의 노래방 패션이 터키로 옮아간건가...? 

 

터키의 극보수도시 코니아 재래 시장에도 어김없이 짝퉁은 넘쳐나고 있다.
마네킨들의 수염은 매직펜으로 직접 그려 놓는 센스....^^

시장에서 나와 다운타운을 걸어가니 조그만 애들이 떼를 지어 따라왔다.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는 도시인지라 자기들과 다르게 생긴 동아시아 사람이 무척 신기한가 보다.
아이들은 큰 눈을 반짝이며 신기한 표정으로 졸쫄 따라다녔는데 그 중에 용기가 있는 애들은 "Hello~~"하며 인사도 건넨다.
손을 흔들며 웃어주면 부끄러움을 타며 도망가기도 하고 어떤 애는 같이 손을 흔들며 까르르 웃기도 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길을 걸어오다가 마주치면 깜짝 놀라는 기색이 역력하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외지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코니아에 동아시아 사람이 나타나니 그들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자기네들끼리 힐끗거리며 쳐다보며 수근수근한다. 
"와...저 사람 봐라. 어디서 온 사람이야..? 중국 사람? 일본 사람? 아냐...한국 사람일거야....근데 여기에 웬 일로 왔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코니아 거리 구경을 하러 갔다가 도리어 그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 구경을 시켜준 형편이 되었다. 

재래 시장을 지나 중심가를 한참 가니 상당히 큰 Multi-Flex 가 나타난다.
할인점, 영화관,레스토랑이 모두 모여있는 복합 건물이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니 'Afra'라는 엄청 큰 할인점이 있다.



할인점  'Afra' 입구에 있는 간판 중 indirim 은 discount라는 의미인 듯....아마 그 날의 특별 할인 품목을 광고하는 것 같다.

할인점 안은 우린 나라의 매장과 거의 비슷하고 없는게 없는데 매장 안이 갖가지 물건으로 넘쳐나고 있다.
남편,아내,아이들.....온 식구들이 같이 쇼핑을 나오는데 애들의 수는 둘이나 셋,경우에는 네 명 씩도 데리고 나온다.
카트에다 애들을 태우는 건 우리 나라와 모습이 꼭 같다.
하얀 치마,검은 상의를 입고 검정과 흰색의 스트라이프가 있는 히잡을 두른 뛰어난 패션 센스의 아줌마가 눈에 뜨인다.
히잡(스카프)은 여자들의 패션 품목으로 대부분 수십개씩 가지고 있어 옷에 따라 바꾸어 매고 다닌다고 한다. 

 

트렌치코트와 히잡, 숄더백의 색감을 잘 맞추어 입은 아줌마들이 여기도 눈에 뜨인다.
아내들의 장보기에는 남편들도 꼭 따라 와서 같이 물건을 고르는게 아주 보기가 좋아보인다.
뒤에는 경품으로 차 한 대를 준다는 광고가 걸려있는데 우리 나라 마티즈와 모양이 같다. 마티즈인가.....?



역시 할인점에선 세일하는 옷을 사야 본전을 뽑는 법......
사진 찍는 이방인 여자가 신기해 보이는지 건너 편에서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며 신기해 하고 있다. 

 

갖가지 모양의 수제 소시지가 먹음직스러운 가공 식품 코너.
우리 나라 소시지는 거의 돼지고기로 만들지만 이곳엔 돼지고기 소시지는 없다.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할인점의 식육 코너에는 양고기가 대부분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아저씨인데도 몹시 수줍어한다.

 

촌두부같기도 하고 빨래 비누같기도 한 이것은 오리지날 핸드메이드 치즈.
수작업으로 만든 치즈라고 하니....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긴다.

 

땅이 기름지고 비옥한 터키는 과일과 채소의 천국이다.
모두 다 박스 채 과일을 사는데 우리 나라같이 과일 몇 개 사는 건 터키에서는 없다. 
그만큼 과일이나 채소등 농산물은 엄청나게 싸다.
터키가 국민 소득이 높지 않은데도 국민의 생활 수준이 그리 낮지 않은 것은
농산물이 아주 싸서 모든 식량이 자급자족되기 때문이라고..... 

과일 박스 뒤편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도르로 둘러싼 여자 발견.....
이스탄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차도르 입은 여인이 콘야에는 여기저기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대부분 터키 사람들은 사진찍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아주 시골 사람이나 골수 이슬람 신도들은 사진 찍는 것을 안 좋아하기 때문에 정면에서 찍을 수가 없어서 뒤에서 몰래 찍었다.

 

히잡이나 차도르로 둘러싸고 있지만 그녀들의 속옷은 우리네보다 더 화려하다.
소박하고 점잖은 여인들의 옷 속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심히 야한 속옷들을 입고 있다고 한다.
검은 차도르로 온 몸을 감싸고 눈만 내놓은 여자들까지도.....

향수 매장에서는 매장 전체에서 유일하게 여자 점원이 향수를 팔고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엄청난 미인이다. 
터키의 젊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초절정미인인데 그들의 신비로운 화장이 한 몫을 더 한다.
원래도 흰 피부에다 파운데이션을 하얗게 바르고 눈에는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는지라 크고 검은 눈이 더 신비롭게 보인다.
그리고 머리에는 히잡을 두르는데 옷은 자유롭게 입고 심지어 최신식 청바지도 잘 소화시킨다.
히잡에 청바지라.....무지 언밸런스한 것 같은데도 그녀들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에는 청바지에 선글라스, 명품 백을 들고 히잡을 쓴 멋진 여인이 즐비하다.



터키 사람들은 여자나 남자나 미혼일 때는 환상적으로 몸매가 이쁘지만 결혼하면 다 엄청나게 살이 찐다는게 슬픈 일이다.

 

키 19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꽃미남 청년이 할인점에서 치즈를 팔고 있다.
민간인이 이 정도 수준의 외모이면 연예인은 도대체 얼마나 잘 생겨야 한단 말인가.
치즈 파는 청년을 사진 찍으려고 주위에서 머뭇거리자 시선을 의식한 이 청년, 필자 쪽을 쳐다보고 눈을 찡긋하며 눈웃음을 친다.
여자랑 눈을 마주치면 어김없이 살인 미소와 눈웃음을 보내는게 터키 남자들의 특징.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이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나 좋아하며
치즈 포장하던 일도 잊어 버리고 한참 동안 포즈 취하기에 열중한다.

 

여자들이 서비스 산업에 진출하는 것을 꺼리는 터키에서는 계산대의 직원도 남자다.

 

이슬람의 나라답게 할인점의 서점에는  코란을 파는 코너가 있다.
코란의 가격은 24.212 YTL(신터키리라) 이니 우리 돈으론 약 2만원 쯤 되겠다.
15세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이 소년은 
사진 찍는것을 의식하고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빠알개지며 말까지 더듬는 것이 너무나 귀엽다.

사실 터키의 국교는 이슬람교가 아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는 이슬람의 오랜 인습이 터키 개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지 않고 정교 분리의 정책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 단체가 정당을 만들 수도 없고 일부다처제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관공서나 학교에서에서 히잡을 쓰거나 예배 행위를 하는 것은 금물이며
종교의 자유는 보장을 받아 모스크,기독 교회,유대인 회당이 공존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금요일 예배 시간에도 모스크 안에는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반면
모스크 밖에서는 그 시간에도 차 마시고 술 마시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밤 늦게까지 코니아의 다운 타운 구경을 하고 호텔로 가서 누우니 시장에서 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콘야는 골수 이슬람의 도시라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나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코니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미소가 넘쳤고 그들이 보는 시선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먼 터키의 한구석인 이곳 코니아 역시 '사람이 사는 도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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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현의 쓰시마시. 대마도의 정식 명칭이다.
인구는 약 38000명인데 그것도 해마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대마도.
면적은 약 708 제곱킬로미터이니 제주도의 약 40%의 넓이이다.
그렇게 면적이 좁은데다 삼림지대가 섬 전체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니
대마도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농사 지을 땅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

그래서 그런지 시내를 제외한 대마도의 외곽지 도로는 거의 다 차선도 없는 좁은 일차선 도로인데
가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만나면 두 차 다 서서 간신히 비켜 나간다.
그 차들조차 거의 다 경자동차인데도 불구하고..... 

 

 

대마도 제일의 도시 이즈하라의 메인 스트리트는 가운데 하천이 흐르고 도로는 양 편에 갈라져 있는데
보도같이 생긴 이 길은 인도와 차도 겸용이라서 사람과 차가 구분없이 같이 다닌다. 

 

 

보행자,자전거,자동차가 같은 길로 다니고 있는데 일본의 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반대 방향으로 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를 타면 내릴 때 왼쪽으로 내려야 하는데 좌측 핸들의 차에 항상 길들여져 있던지라 
버스를 탔다가 내릴 때에는 오른쪽으로 내리려고 하다가 아차...! 하고 방향을 틀기가 일쑤였다. 

 

 

버스의 번호판은 녹색과 흰색이 있는데 녹색 번호판은 그린 버스라고 해서 합법적인 영업을 할 수 있는 버스이며
흰색 번호판은 시로 버스라고 하는데 불법 영업 버스라서 사고시에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

 

 

대마도 자동차의 번호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26-98, 25-46, 18-91, 79-78, 66-77,  5 29..... 
작은 섬이라 자동차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런가? 번호판의 숫자가 매우 단촐하다.    

 

 

위에 있는 長岐라는 표시는 대마도가 속해있는 현의 번호이다.



<長崎 (나가사키)227    •  • 41>이라고 쓰인 관광 버스의 번호판이 눈길을 끈다.
번호판이 0041도 아니고  •  • 41이라니....정말 대마도에서나 볼 수 있는 번화판이 아닐까...?(본토를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너무나 작은 섬 대마도에는 버스라 해 봐야 얼마 되지 않아서 천단위를 쓸 만큼의 수효가 없기 때문에 •  • 41로 표기해두었다.

 

마치 레고 장난감 같은 히타카츠 항구의 지게차의 번호   2  16 이다. 

 

 

일본 사람은 교통 질서를 무지 잘 지킨다는데 그래도 사고는 나는지 터널에서 나오다 사고를 낸 운전자를 조사하는 경찰 발견...!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 주차장에 들어오고 나가는 차들에는 노란색 번호판들이 많이 보인다. 

 

 

노란색 번호판은 660 cc의 자동차로 케이지도오샤(경자동차)로 불리워진다. 

 

 

우리 나라 소형차보다(우리는 대부분 800cc) 더 규모가 작은데 
대마도 내의 대부분의 차들이 경자동차이라서 주차선 안에 차를 넣고도 넉넉하게 여유가 있다.  
그런데 위의 차들이나 아래 사진의 차들을 보면 하나같이 주차선의 중앙에 귀신같이 정확하게 주차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 사람들의 세심함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대마도주의 무덤 반쇼인으로 가는 길에도 차도가 일차선이라 길 가에 주차된 차들은 차도 옆에 엄청난 기술을 발휘하여 바싹 붙여 놓는다.
여기 저기 가는 곳마다 주차 질서 하나 만큼은 정말 칭찬할 만 한 일본 사람들이다.  

 

주택가에는 작은 택배차를 주차장 안 그물 속에 얌전히 앉혀 놓았다.
근처의 다른 집도 이렇게 그물을 쳐 둔 집이 많았는데 도대체 그물은 왜 쳐 놓았을까...? 자동차가 모기 물릴까봐....?
누구 아시는 분....!

 

 

이렇게 앙징맞고 이쁜 맞은 소형 트럭이라니....너무나 귀여운 차를 발견했다.

앞 모습은 더욱 귀여운데 칼로 중간을 뭉툭 잘라낸 듯 한 앙징맞은 이 차는 마치 프라 모델을 보는 것 같다.
꼬마 자동차 붕붕을 닮은 이 자동차는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들의 국민성이 살며시 느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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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카파도키아의 네브세히르를 떠나 서남쪽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를 지나 코니아(콘야,Konya)로 가는 길...
사도행전 14장 1절~7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하던 '이고니온 (Iconium)'은 바로 오늘날의 코니아이다.

코니아로 가는 길은 밀 추수가 끝난 듯 비어 있는 너른 평원. 몇 시간을 가도 끝이 보일 기미가 없다.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를 지나 버섯집들이 늘어선 카파도키아를 거쳐 코니아로 가는 여정 내내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핸들을 놓고 가도 될 정도로 일직선으로 쭈욱 뻗은 길이 계속된다.
우리 나라는 산지가 많아 고속 도로 조차도 커브길과 터널이 많은데 넓은 국토를 가진 터키에서는 5~6시간을 가도 끝도 없는 평원이 이어진다. 





어쩌다가 야트막한 산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밀 추수가 끝난 끝없는 평원이 펼쳐지고..... 
가끔 가다 밀밭 사이로 올리브 나무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또 끝이 안 보이는 나른 초원이 가도 가도 계속된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언덕까지 말 위에 올라 그냥 내달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다. 



이렇게 넓디 넓은 땅들이지만 몽골 땅처럼 척박하지 않고 모두 경작이 가능한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터키의 농산물은 유난히 값이 싸고 맛 또한 뛰어나다.
농산물과 식료품 값이 싸니 국민 소득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식생활은 걱정이 없고 길에서도 구걸하는 사람이 보기힘든 곳이 터키이다.



가다가 보면 길을 막아서는 수백 마리의 양떼들과도  맞닥뜨리게 되는데
목자가 작대기로 길을 인도하려고 애써도 양떼들은 무작정 차 앞으로 달려들기만 한다.



기다리다 못한 차가 양떼 앞으로 서서히 바퀴를 굴려도 양떼들은 무조건 앞 양의 꽁무니만 보고 차 앞으로 돌진해 들어온다.
이럴 땐 사람이 지는 수 밖에.....할 수 없이 양떼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양들은 지독한 근시여서 바로 코 앞만 보이기 때문에 앞의 양의 궁둥이만 보고 무조건 따라간다고 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앞의 양의 꽁무늬만 따라가는 양들의 모습들은
갈 바를 모르고 앞만 보고 내달리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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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해외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세상 구경을 좋아하는 필자.
가보고 싶은 나라가 오대양 육대주에 수없이 널리 펼쳐져 있지만
그 중에 왠지 썩 내키지 않은 나라도 있었으니 바로.....지척에 있는 나라 일본이다. 

일본과 우리 나라와의 해묵은 감정은 뒤로 하고서라도
왠지 우리 나라와 비슷한 풍습과 풍경일 것 같은 선입견 때문에 일
본까지 궂이 가야 하나.....하고 주저하고 있던 때에
대마도 역사 탐방 팀에 합류하게 되어 일본 본토는 아니지만 대마도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 

 

 

항공편을 이용하지 않고 선박편으로 남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처음.....
경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여 여객선 부두에서 간단한 출국 수속을 거치고 검색대를 지나치니
에게게.....면세점이란게 달랑 점포 세 개.....
실소를 머금으며 조금씩 돌아보고 있으니 이내 시간이 되어 씨플라워호에 몸을 실었다.

 

 

 씨플라워호에 앉아서 내다 본 부산항의 전경은 매우 정겹고.... 

 

 

밤새 바람이 불고 비가 심하게 내려 일본 초행길의 발목이 잡힐까 걱정한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 듯
아침 하늘은 심히 푸르고 맑아 기분좋은 여행길을 시작하게 해 주었다. 

 

 

오륙도를 바로 지척으로 지나며 푸른 바다를 항해하여 대마도의 이즈하라항으로 향했다.
어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하늘은 맑고 햇살은 쪼이나 풍랑이 제법 높아 배의 일렁거림도 심하였다. 
아침 10시 30분에 부산항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이즈하라까지는 3시간....
그것도 이즈하라가 대마도에서 가장 아랫편에 위치한 항구이기 때문에 3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상대마의 히타카츠항에서 부산까지는 1시간 50분밖에 안 걸리니 우리 나라와는 정말로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부산항 까지는 49.5km이요, 일본의 후쿠오카까지는 138km이니
옛부터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대마도는 일본보다는 한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우리 역사 탐방 팀은 우리 나라와 대마도 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역사적인 유적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대마도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대마도는 원래는 우리 땅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대마도는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쫒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과 만호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박위장군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에 이뤄졌는데
1429년에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7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무역을 허락하고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의 영토로 대마도가 편입되면서 일본이 대마도를 통치하게 되어
우리 나라는 대마도 땅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즈하라항 입국장은 그야말로 코딱까리(?)만 하다.
배에서 방금 내린 한국인들로 방 하나 만한 입국 심사장은 넘쳐 나고 계단과 아래 층까지 줄을 길게 늘어 섰다. 

 

 

입국 심사 시에 그 이름도 악명 높은 지문 날인을 하게 되는데
양쪽 검지 손가락을 인식 기계에 대고 지문을 찍은 후 이어 정면 얼굴 사진도 찍는다.
처음 발을 딛는 일본 땅에 대한 느낌은 이 지문 날인 때문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먼저 찾은 곳은 화장실.....우리 나라와는 조금씩 다른 배치.
듣기로는 우리가 화장실 문을 마주 보고 앉아 볼 일을 보는데 비해 일본인들은 벽을 마주 보고 앉아 볼 일을 본다는데 (맞나...?)
그 이유는 갑자기 문을 확 열었을 때 얼굴을 마주치는 난감함을 피하기 위해서라나....
그럼 엉덩이를 보이는 난감함은 어찌 하라구...? 이런 생각도 들었으나 직접 확인한 바는 없다.  

 

 

대마도의 모든 화장실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혼용된 안내판이 꼬옥 붙어져 있다.
대마도 관광객의 90%가 한국인이라니 그럴 수도.....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지 말고 변기 안에 버려달라는 안내문이 어디나 빠짐없이 붙어 있는 것이 특색.


출국장을 빠져나오니 대합실도 초만원.
우리 나라 읍내 버스 터미널 만한 대합실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곳 없어 서서 창 밖의 이즈하라항의 풍경을 찍어보았다.
건너편 산 위의 듬성 듬성하게 늘어선 집들의 풍광은 우리 나라의 작은 섬에 내린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항구 전체가 무지 무지 한가롭다. 입항한 배도 거의 없고.... 

 

 

2층인 입국 심사장에서 일층으로 내려 오니 매표소가 두 군데... 

 

 

벽에는 출입항 시각표가 붙어 있다.  맨 앞에 쓰여 있는 嚴原이 이즈하라이다. 

 

 

사진 가운데 뾰족한 지붕의 건물이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인데 정말 규모가 작은 것이 한 눈에 느껴진다.  

 

 

카페리 터미널에서 나와 먼저 만난 모습이다.
이즈하라 시내는 너무나 작아서 차를 이용하지 않고 모두 도보로 관광을 하게 된다.

조그마한 일본의 차처럼 조그마하게 축소해 놓은 듯한 도시 이즈하라....
짐을 잠시 맡겨두고 걸어서 이즈하라를 한 바퀴 둘러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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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라면 파아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리고 그 초원을 가로지르는 양떼와 말들이 먼저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몽골의 전부가 아니니.....
몽골에도 산이 있고 호수가 있고 침엽수 우거진 아름다운 숲도 있다.

지난 번 울란바타르 인근의 나이람달 캠프장 게르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캠프장을 둘러 싸고 있는 산 중턱에 하얀 자작나무 숲이 눈에 뜨였다.
소녀 시절 읽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로 인해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던 자작나무.
무언가에 모를 향수에 이끌려 일어나자 마자 아침 햇살 머금은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로버트 포로스트의 '자작나무'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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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칸-울 지역에서의 주민들과의 즐거운 시간.


멀리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보기 위해 동네 공터로 놀러나온 사람들의 표정이 순박해 보인다.


마을 앞 공터에서 어른,아이 어울려 신나게 긴 줄넘기를 한다.


친구와 함께 넘는 줄넘기는 마냥 신나기만 하고...


한국아이와 꼭 같이 생긴 이 개구장이는 너무나 신이 났다.


꼬마야 꼬마야...뒤를 돌아라...하는 노래를 불러주니 너무나 잘 넘는다.


줄을 넘는 가락이 한 두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치마가 발라당 뒤집어져도 신나게 줄을 넘는 여자 아이.


너도 나도 푸른 하늘 높이..푸른 하늘 높이...신나게 날아본다.


앗...언니가 걸리는 바람에 꼬마의 하늘을 나는 묘기는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아이들만 넘을쏘냐....나도 예전엔 한가락 했었지...신나게 뛰어드는 아저씨.


헉.....들어가자마자 걸려서 중도 포기...쪽팔림의 표정이 예술이다.


이어 하이힐을 신은 아줌마의 과감한 도전~!


보랏빛 치맛자락 팔락이며 잘도 넘는다.


하이힐 신고도 신나게 줄 넘는 아줌마는 진정한 줄넘기의 달인~!


하얗게 머리 센 할머니도 용기내어 도전해 본다.


앗! 이런~! 할머니의 비행도 두번째 도약에서 그만 끝을 맺었다.
몽골 푸른 하늘 아래 너도 나도 즐거운 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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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시겠지만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카파도키아에는 지하 도시가  400 여 곳이나 산재해있다.
이런 지하 도시는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이용해 왔는데 
이 지하 도시들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응회암과 용암층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기암 괴석에 동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지상의 맹렬한 더위와 짐승의 습격을 피해 사람들이 이 곳에 살기 시작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미 만들어져있던 지하도시를 이용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이 지하 도시 중 유명한 곳은 카이막클리, 데린구유, 오즈크낙 등인데
그 중 '깊은 우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데린구유'는 가장 놀라운 도시다.
이 지하 도시는 1960 년대에야 발견되었는데 데린구유의 한 마을에 있는 닭이 조그만 구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생긴 주인이 당국에 신고를 한 것이 지하 도시를 발견한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를 떠나 찾아간 데린구유는 여느 관광지같이 북적대지도 않고 찾아오는 사람도 그다지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
한낮의 더위를 피해 동네 가게 앞 그늘에만 몇 사람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눌 뿐...... 광장 앞 풍경은 잠이 올 만큼 조용한 분위기다.



마을의 둥근 광장 주위에 자리잡은 관광 상품점은 들여다 보는 사람도 가게 주인도 보이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다.



허물어지다 만 듯한 2층 건물의 옥상에 사다리가 심심하게 걸려있고 앞의 하얀 건물의 옥상에는 잡초만 무성한데
그런 가게에는 알록달록한 카페트를 옥상에 척 걸쳐 놓기도 하고 빨래줄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기도 한다.
하얀 벽에 못을 쳐서 아무렇게나 걸어놓은 카페트들이 거의 다 그 지방에서 짠 수공품 카페트들인데
오랜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한 터키 카페트의 색감이 얼마나 화려하고 이쁜지 하나 사갖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가게 옆에는 허름한 천막이 쳐져 있는데 역시 천막 앞에도 카페트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가게 자리를  얻지 못한 상인의 소규모 점포일까.....?
도자기 공예품이나 작은 기념품을 팔고 있는데 거기 또한 들여다 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가게 주인들은......햇빛을 피해  건물의 그늘에 모여 앉아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다.
킬림(평직 카페트) 조각을 땅에 깔고 둘러 앉아 신문지 위에 빵,포도,차이를 베풀어 놓고 둘러 앉아
계란을 까고 있는 모습은 우리 나라 아저씨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사진을 찍으니 다정하게 쳐다보며 말을 거는데  "여기 와서 같이 차이나 한 잔 할려우...?"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카페트 뿐 아니라 저울이나 램프, 항아리같은 토산품등도 같이 팔고 있던 가게 안에 들어가서 매우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



데린구유 발굴 현장에서 흘러나온 출토품인데 놀랍게도 히타이트 시대의 인장이었다.



왼쪽의 네모난 인장은 사자가 표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아랫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삼각형으로 된 뒷부분에도 길게 홈이 파여져 있어 간편하게 끈을 꿰어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오른쪽 원형의 인장 역시 둥근 아랫부분에 끈을 꿸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하여 많이 마모되기는 했으나 말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도시의 흙 속에서 잠자고 있던 4,000년 된 유물을 손에 넣으니 감격으로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는데
이 인장들은 지금까지 여행 다니면서 손에 넣은 기념품 중에 가장 귀한 물건으로 남아 있다.



지하도시로 내려가는 입구에는 아기를 안은 아줌마가 좌판에 인형 몇개를 팔고 있는데 완전 수공예품 인형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인형은 데린구유 지방의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너무나 유명한 인형.
하얀 무명 옷에 무늬를 싸인펜으로 그리고 인형의 눈,코,입도 싸인펜으로 그려 놓은 너무나 소박한 인형이다.
어디에서도 살 수 없고 단지 데린구유에서만 살 수 있는 이 인형은...단돈 2달러이다....^^



동네 구경을 다하였으니 이제는 지하도시 데린구유로 내려가볼 차례.
지하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는 미나레(이슬람 사원의 첨탑)가 하나 있는 작은 '자미(이슬람 사원)'의 바로 옆에 있는데
오른 쪽에 나 있는 조그만 문을 통해 지하도시 데린구유로 내려가게 된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의 문은 둥근 돌문인데
외부의 공격을 받았을 때 돌을 굴려 통로를 막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돌문은 안 쪽에서만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가이드의 도움없이는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있어서 반드시 가이드를 앞장 세워서 들어가야 한다. 



이 곳의 지하는 방,부엌,곡물 저장소,동물 사육장,첩자들을 다루는 형틀, 교회,성찬이나 세례를 베풀던 장소,신학교,
그리고 지하 공동 묘지 등이 다 있어 지상의 생활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도시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하 도시는 총 20층으로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거대한 규모인데 현재는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8층까지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고  
데린구유의 터널은 이 곳에서 9km가 떨어진 카이막클리 지하 도시와도 연결되어 있어 
지상의 도시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하니 그 규모에 가히 입이 쩍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지하 도시의 통로는 한 사람이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이며 어떤 곳은 허리를 굽혀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다.



어둡고 좁은 이곳에서 폐쇄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호흡 곤란과 가슴의 압박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동굴 속의 방과 방들은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상당히 넓은 공간도 있는데 기둥도 세워져 있는 이런 넓은 공간은 대부분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초대 교회 당시 박해를 피해온 기독교인들이 지하에 숨어서 예배했던 십자가 형태의 교회 흔적도 찾아볼 수 있고 신학교의 흔적도 있다. 



물이 흘러나와서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있는 이곳은 세례를 베풀었던 장소로 추정된다. 

가이드가 후래쉬로 비추는 곳은 에어컨디셔너 기능을 하는 통기 구멍이다.
이 구멍은 지하도시의 각 층을 꿰줋고 지상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지하 도시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 준다.



카파도키아 지방에 수많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도 바깥으로 나가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고 하니 그 얼마나 답답했을까..
동굴 벽의 갈라진 틈에 손을 넣어보며 그 당시 사람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 보았다. 



지하도시 데린구유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고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빠져나오니 
다시 맞이하게 된 밝은 햇빛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한동안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하고 길을 걸어가야 했다.
단 몇 시간 동안이지만 암흑의 지하도시를 체험하고 나오니 바깥 세상의 공기는 달콤하기 그지 없었고 
밝게 비춰주는 햇빛도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햇살인 것 처럼 감사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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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 작품이라 칭송받는 터키 카파도키아.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카파도키아를 한번에 소개해 드리기는 힘들어
에센테페, 괴뢰메, 데브렌트, 파샤바....등 몇 지역으로 나누어서 포스팅하고 있으니
이미 올려진 카파도키아의 에센테페와 괴뢰메, 데브렌트의 풍경은 아래 포스트를 살짝 눌러 확인하시길 바라며
카파도키아 편 마지막으로 젤베 야외 박물관과 요정의 굴뚝이라 불리우는 파샤바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위르굽과 아바노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젤베 야외박물관 역시 괴뢰메 야외박물관처럼 입장권을 사서 관람해야 한다.


카파도키아에서도 젤베 협곡은 아마도 카파도키아 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이 거주했던 종합 도시였을 것이다.


이 곳 역시 화산과 침식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특수 지형에 암굴을 파고 사람이 거주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암굴의 규모나 여러가지 시설 면에서 다른 곳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이다.


그들은 거주지는 물론이고 교회,방앗간,물 저장 탱크 등 모든 시설을 다 갖추고 있었다고.....


실제로 1950년대까지만해도 여기엔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풍우와 지진 때문에 바위가 붕괴될 위기에 놓여져 지금은 근처로 이주했다고 한다.


벽화가 있는 몇 개의 동굴과 협곡은 산과 산을 잇는 가느다란 터널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곳곳에 사다리가 걸려있으며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도 있다.


동굴 안에는 내부가 연결되어 2~3층으로 되어 있어 생각보다 넓다.

 

주거와 저장 창고 외에도 교회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젤베는 기독교 수도사의 은둔 지역이었으며 기독교도와 이슬람 교도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는데


아래는 교회인데 위에는 모스크의 뾰족한 첨탑이 서 있는 동굴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동굴 교회의 벽화에는 인물 대신에 사슴,포도,십자가 등의 상징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교회 안에서 창문을 통해 본 젤베 계곡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길 가다 차를 세우고 돌아볼 수도 있는 파샤바(파샤바흐체)는


커다란 송이 버섯을 연상시키는 바위와 3개의 버섯 모양의 바위가 연속해서 붙어있는 요상한 골짜기.


파샤바의 버섯 바위를 현지 사람들은 '요정이 춤추는 바위'로 부르는데 이는 바위 속에 요정이 살고 있다고 믿은데서 유래되었다

 

또한 세상을 등지고 산과 바위로 숨어 들어가 신앙 생활을 할 것을 주장한
고대 수도사 성 시메온이 거처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수도사의 골짜기'라고도 불리운단다. 


외계의 도시같이 특이한 이 곳은 특히 '스타워즈1'의 촬영지로도 유명하고


1981년 미국에서 TV 에니메이션 시리즈로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스머프’에 등장하는 버섯집 또한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파아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요정의 굴뚝들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스머프들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길 옆에 서 있는 성화 같은 바위도 눈길을 끄는 바위 중의 하나이다.

유럽의 세련된 관광지와 달리 터키 대부분의 관광지는 우리나라 관광지 앞과 그 모습이 너무나 흡사한데 어설픈 상점들이긴 하지만
이 지방에서 나온 여러가지 원석들과 금속 공예품, 질좋은 도자기 제품들을 싼 값에 살 수 있다.


특히 아라베스크 무늬의 여러가지 쟁반들과 접시, 냄비 받침들은 카파도키아 최고의 기념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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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의 손님 대접은 아주 극진하다.
길 가다 늦어 아무 집에나 가서 잠자리를 청하면 재워주는 것은 당연하고
떠날 때는 음식까지 싸주며 친절하게 길 안내까지 해 준다.





전통적으로 게르에 들어가게 되면 게르의 상석에 앉은 사람이 아이락이나 수태차를 권하던지 
작은 병에 담긴 '코담배(센떼노)'를 방문객에게 건네는데
코담배를 건네면서 "건강하세요~!(에롤 멩흐 바이가라)"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한 후
"여행이 편했느냐'"라고 물으면서 말문을 터나간다.

하지만 절대로 손님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며,무슨 일로 길을 나서게 되었는지는 캐묻지 않는다고 한다.





코담배는 담뱃잎이 아닌 향료와 약초를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대부분 옥으로 만든 향수병에 들어있다.
모양과 크기는 매니큐어통 정도인데 뚜껑에 달린 귀이개 모양의 도구로 가루를 꺼내어 엄지 손톰에 바른 후
조심스럽게 흡입하면서 냄새를 향유하는데 강한 향료와 매콤한 냄새가 나서 매우 자극적이므로
갑자기 들이마시면 재채기와 콧물,눈물이 나와서 당황하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코담배를 상대방에게 줄 때에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 하며
조금 꺼내어  코담배를 받은 사람은 코담배를 코에 대어 냄새를 맡은 후 그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데

이것은 게르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축복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만약에 거부하면 그것은 무례한 일로써 주인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뜻이 된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바퀴 돌아가며 코담배 냄새를 맡으면 인사가 끝나게 되고 병은 주인에게 돌려준다.

코담배통은 몽골에서는 필수품으로 다양한 크기와 재질이 있는데
어떤 것은 금으로 장식한 것도 있어서 그 사람이 가진 코담배통으로 그 사람의 부와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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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만든 최고의 예술 작품이라 칭송받는 터키 카파도키아.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카파도키아를 한번에 소개해 드리기는 힘들어
에센테페, 괴뢰메, 데브렌트, 파샤바....등 몇 지역으로 나누어서 포스팅하고 있으니
이미 올려진 카파도키아의 에센테페와 괴뢰메의 풍경은 이전 포스트를 확인하시길 바라며....




카파도키아에서도 '데브렌트'는 위르귑에서 차로 약 15분, 괴레메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젤베 야외 박물관을 가기에 앞서 잠시 데브렌트에 들려본다. 



다양한 형상을 한 흰색의 바위들이 물결치듯 펼쳐진 데브렌트의 별명은 '상상력의 계곡'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재미있는 형상을 한 바위들이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무한하게 펼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곳의 흰색 바위들은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만지기만 해도 떨어져나갈 정도로 부드러워서 비나 바람에도 쉽게 침식하기 쉽고
어떻게 보면 마치 밀가루 반죽을 주물러서 세워둔 듯 하게 보인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거친 후 깎여진 기묘한 바위들은 푸른 하늘 아래 더욱 눈부시다.

이곳에는 특히 성모 마리아 바위가 있는데 줌인하지 못하여 그 형태는 분명하지 못하나 저 먼 곳을 응시하는 마리아상의 모양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데브렌트 최고의 명물은 거대한 낙타 바위.
낙타가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듯한 형상인데 가끔 진짜 낙타도 주위에 누워 있어 볼 거리를 선사하는 곳이다.



낙타 바위 건너편에는 몇몇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관광객들을 위한 터키 전통 복장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게 이채롭다.



여러가지 악세사리나 손으로 수놓은 화려한 색상의 가방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데
심플한 의상에 이렇게 화려한 가방 하나 걸치면 에스닉한 패션을 선보일 수 있지 않을지...

기념품 가게 안을 들여다 보니 목걸이, 귀걸이 등의 수공예 악세사리와 수놓은 가방 등의 기념품 속에서 
이마가 훤하게 벗겨진 터키 아저씨가 하얀 뜨게질 수공예품을 팔고 있었다.
청결 의식이 뛰어난 터키 사람들은 평상시의 가정의 식탁에도 반드시 하얀 린넨 식탁보나 뜨게 식탁보를 애용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는 곳 마다 이렇게 손으로 직접 뜨게질한 수공예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대머리 주인이 계속 손을 놀리고 있어서 보니 그에 손에 들려진 것은 다름아닌 뜨게 바늘과 뜨게실.....
가게 안에 진열된 모든 화병 받침과 테이블보 등 장식 뜨게용품은 다 이 남자가 직접 뜬 것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모자라고 하는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니
의식이라도 하는 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뜨게질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 아저씨가 직접 뜨게질한 화병 받침 하나 사오지 않은 것이 살짝 후회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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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중 그 나라 도로를 주행하는 한국차를 만나 반가웠던 경험이 있으신지?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한국차는 마치 한국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갑기 이를데 없는데...
몽골 여행을 다녀보면 여기가 한국인가...생각될 만큼 많은 한국 차가 운행되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몽골 전역에 다니는 차의 2/3가 한국에서 수입해간 차라고 해도 과연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버스는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들여온 것임은 물론이고 
새로 칠을 하거나 외관상의 변화를 주지 않고 한국에서의 모습 그대로 운행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게 해 준다.



현대의 로고가 선명한 청색 버스는 노선표지판 양쪽에 태극기와 몽골 국기가 함께 새겨져 있고


문에는 자동문, 매연저감장치 부착버스라는 표식이 그대로 붙어 있는게 보이는데
심지어는 번호판, 회사명, 버스 노선표까지 그대로 부착하고 운행하는 버스도 볼 수 있다.



버스 안에 붙어 있는 노약자 보호석이란 표식과 함께 붙어 있는 좌석 표지는 이 버스의 전적이 한국 직행버스였음을 말해주고


커튼을 비롯한 버스 안의 모든 부착물은 한국에서 쓰던 그대로이다.


짐을 잔뜩 싣고 가던 이스타나에는 전 주인의 핸드폰 번호가 선명하게 남아 있고


천주교 용대 공소(공소: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의 그레이스는
전방 장병들을 실어나르던 임무를 마치고 울란바타르의 식당 앞에 주차되어 있다.


긴급구호 앨뷸런스도 '환자 이송'이라는 표지가 아직 선명하다.


몽골에서는 엑셀과 엑센트 베르나 소나타가 주로 택시로 활용되는데


몽골에서는 자가용으로도 택시 영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다 승객을 차에 태우고 돈을 받을 수 있어서
살기 힘든 사람들은 온가족이 24시간 교대로 속칭 나라시 영업을 해서 돈을 번다.


그런 까닭에 그레이스 같은 낡은 승합차도 달동네의 택시로 요긴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마티즈 택시도 손님을 태우고 동네를 활보한다.


길에 다니는 차들을 살펴보면 엘란트라, 엑센트.....등이 많이 보이고


승합차도 그레이스, 스타렉스, 이스타나....등 한국산 중고차가 많이 보인다.


동네 앞을 신나게 달리는 소형 트럭도 현대 차이고....


곳곳에 현대 소형 트럭이 눈에 뜨인다.


이건 그 이름도 유명한 봉고 프런티어.


봉고 트럭은 가는 곳마다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눈에 띄는 차는 단연 베르나이다.


여기도 베르나..


저기도 베르나...


노란 베르나...


날개도 달고 바퀴도 제각각으로 튜닝(?)해서 한껏 멋을 낸 베르나..


소나타 옆에도 베르나...온 길가에 베르나가 휘젓고 다닌다.


몽골의 자동차 수입업자는 한국에 와서 제일 싼 차를 골라서 수입한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싼차를 구입하다보니 고장도 잦고 3가지 등급의 휘발유중에서 가장 싼 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 고장이 잘 난다.


그래서 고장이 나면 낮은 기술로 고치기 힘든 신차보다는 엑셀같은 기계식 자동차를 선호하기도 한다고.....


울란바타르 시내를 다니면 한국 중고차 뿐 아니라 이렇게 오른쪽 핸들을 사용하는 차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오른쪽 핸들의 차는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한 차이다.


교통 체계나 도로 체계는 우리와 같은데 이렇게 좌측 통행차와 우측 통행차가 섞여서 다니는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죄측 통행 도로 체계에서 우측 핸들차를 모는 것이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No  Problem !" 이라며
안전하게 몰기만 하면 어느 쪽 핸들이냐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은 한국차가 싸서 좋기는 하지만 일본차나 독일차가 전반적으로 품질이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


먹고 살 만한 부유층들은 한국차를 타지 않고 일본차나 다른 수입차를 많이 탄다고 한다.


몽골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사업가분의 말씀에 따르면 현재 몽골에는 1억 3천만원이 넘는 차들도 주문하고 기다릴 정도로
고급차의 수요가 많아서
메르세데스 벤츠는 현지에 서비스 공장까지 신축하고 있고 
현대,기아차 전시장만 외곽에 있을 뿐
다른 일본과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거의 대부분 울란바타르 시내에 전시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한국산 차가 몽골 전역을 주름잡으며 달리고 있지만 최고급으로는 평가되지 못하고 
다만 서민들이 타는 중고차로만 인식된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도 좀 더 기술 개발을 하고 지속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해서
몽골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자동차 시장에 한국 차의 위상이 더욱 더 높아질 때가 한시바삐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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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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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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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국가 터키의 성 풍속도는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다소 혼란스럽게 한다.

과년한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남자랑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
그녀의 오빠나 아버지가 '명예 살인'을 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곳이 터키며
거리에서 손 잡고 다니거나 애무하는 연인들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성범죄가 서양 나라에 비교하여 현저히 적은 걸 보면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는 결코 아닌 듯...
그러나 신문,잡지나 거리의 벽에는 오히려 여성의 상품화 및 개방이 수위를 넘는 듯한 사진이 가득하고
TV의 외설스러운 프로는  밤 시간대에만 아니라 낮에도 토플리스 여자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터키 여행 중 사서 살짝 펴 본 잡지책에는 심하게 선정적인 그림이 많았는데
엄청나게 야한 만화책이 19금 딱지도 없이 팔리고 있어서 여행자를 놀라게 한다.

터키의 국도를 버스를 타고 지나는 길목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많은 좌판이나 길거리 상점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이런 정체 불명의 시커먼 액체를 파는 노점이 길거리에 수도 없이 깔려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상인들은 지나가는 차마다 큰 소리로 호객을 하며 와서 사라고 외치곤 하는데 휴게소에도 이런 액체가 즐비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용기에 담아파는 이 액체는 다름아닌 정력제.
내용 성분이나 그 효능이 정말로 믿을만 한지는 알수가 없지만 가는 곳마다 이런 형태의 정력제가 많았는데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만국 공통인 정력 신드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인 듯......

이토록 터키는 이슬람권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여서 모든 이슬람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이슬람권의 뉴욕이나 마찬가지인 터키는 또한 이슬람권에서 음악 등의 대중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사우디,이라크 등 다른 이슬람권에선 아예 허용도 안되는 대중 음악들은 터키의 라디오와 TV를 온통 점령하고 있다.

터키의 모든 대중 가요의 주제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노래하는 사랑 타령의 노래이며
터키 음악이나 뮤비는 그 선정적인 강도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낮시간에도 터키의 식당에 켜진 TV 에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가수가 온 몸을 더듬으며 끈적거리는 춤을 추고 있는데
뮤직 비디오에 나오는 남녀 가수들의 야하디 야한 노래와 섹시 댄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 나라가 관연 이슬람이 90% 이상인 나라인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 수준이 다른데서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여자에게는 순결을 강조하고 처녀성을 기대하는 반면
남성의 경우에는 성적인 관심을 억누르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권장하고 성적인 경험을 은근히 자랑하는데서 기인한다.
사회 전반에 남성을 위한 성상품이 넘쳐나는 곳, 바로 이슬람 국가 터키의 성풍속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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