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진 곳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은 통일 후에도 불안정한 국가를 걱정하여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다고 했는데
문무대왕의 사후 유해를 낭산에서 화장한 후 양북리 앞 바다 큰 바위에 장례를 치렀고 사람들은 이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1박2일에서 문무대왕릉이라 잘못 표기한 대왕암 공원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 위치한 약 93만㎡에 이르는 넓은 공원이다.
이 지역은 옛 선비들이 해금강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목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대왕암, 용굴, 탕건암 등의 기암 괴석과 함께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 15,000그루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바로 앞에는 1906년에 설치된 울기등대가 있어서 한동안 울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2004년에 이르러 대왕암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특히 용추암, 또는 댕바위라고도 불리는 대왕암은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부창부수라고.....문무대왕이 죽어 수중릉에 장사되니 그의 왕비도 이곳 울산의 대왕암에 묻혀 함께 용이 되기를 원했을까......?
이왕이면 문무대왕의 유골이 뿌려진 경주 봉길리 대왕암에 함께 묻히지 왜 경주에서 이렇게 먼 곳에 묻혔을까.....하는 의구심도 가져본다.




문무대왕비릉으로 전하는 대왕암은 육지에 있는 바위와 철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철교를 지나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 대왕암 정상에 오르면 의외로 정상의 공간이 협소함에 놀라게 된다.
십여명이 서면 금방 자리가 부족해지는 이곳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거의 날아갈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정상에서 눈을 들어 앞을 보면 탁 트인 바다가 펼쳐져 가슴이 다 시원해지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주변 바다의 물빛은 너무나 푸르고 주변에 둘러싼 기암괴석들은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대왕암 주변에는 남근바위, 탕건바위, 자살바위, 처녀봉, 용굴 등으로 이름지어진 기암괴석이 있어 가히 해금강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험천만한 벼랑 끝에 서서 낚시를 하는 모습들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장관인데 주변에는 간이 횟집들도 성업 중이다.




정상의 울타리에는 많은 사랑의 자물쇠들이 채워져 있는데 소금기가 많은 바닷바람으로 인해 거의 녹슬어 있는 모습을 본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와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연인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녹슨 자물쇠들이 미관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바다에 던져진 열쇠들은 바다를 오염시키게 되니 부디 삼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런 낙서들도 군데 군데 쓰여있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이곳 대왕암은 일출 명소로도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출이 빠른 곳이 대왕암이냐 간절곶이냐를 두고 3년간 분석한 결과
총 조사시간 108일 가운데 대왕암에서 해가 먼저 뜬 날이 94일(87%)이었으며 간절곶은 7일(6.5%)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월초와 12월말에는 간절곶이 1초 정도 해가 더 빨리 떠오른다고 해서
대왕암은 간절곶에게 새해 일출 명소의 영예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왕암 일출이 간절곶 일출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은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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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과 이견대(利見臺)주변에는 동해 바다의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맛집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곳은 필자의 단골 횟집인 일출 회식당이다.

횟집의 방 안에서 문무대왕릉을 환하게 조망할 수 있는 것이 이 식당의 큰 장점.
이곳에서 회를 주문해 놓고 조금 기다리면 육질이 쫀쫀한 자연산 회를 즐길 수 있다.





회를 주문하고 나오는 동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나온 작은 고구마는 맛이 너무나 달다.






너무나 달콤 새콤해서 여러 사람의 젓가락이 난무하는 비빔국수.





경주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볶은 콩가루 얹은 샐러드.





너무나 싱싱한 멍게와 해삼이 곁들어지는 건 물론이다.





겨울에 가면 곁들인 반찬으로 이렇게 과메기를 맛볼 수도 있다.





스테미너와 피부에 최고인 경북 동해안의 별미 과메기를 안 먹어 보신 분은 없으시겠지요?


관련 포스트 : 포항 구룡포 명물 과메기




에피타이저로 나온 반찬을 다 비울 즈음이면 이렇게 푸짐한 자연산회가 들어온다.
대도시나 여느 다른 지방에서는 회의 양을 푸짐하게 보이기 위해 무채로 된 깔개(방석?)위에 회를 올리는 것이 보통인데
동해안 횟집에서는 대부분 아무런 깔개나 장식 없이 대접시나 보통 접시에 오로지 회만 올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갈개 위에 올라앉는 회에 비해 당연히 양도 많은게 특징일 뿐더러
근해에서 직접 잡은 자연산 회는 쫄깃하고 탱탱하여 입안으로 전해지는 신선한 바다의 내음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회와 함께 곁들여지는 조개탕을 한숟갈 떠먹으니 모두 다
"으~~ 시원~~하다~!!"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회를 다 먹었으면 매운탕을 빠뜨리고 갈 수 없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운 맛이 느껴지는 빠알간 매운탕의 국물은 정말 대박이다.
누구나 한 숟갈 떠먹으면 "커~~!!"소리가 절로 나오니 이 집에서 회가 하이라이트라면 매운탕은 가히 클라이막스가 아닐까.....?





회를 뜨고 남은 생선뼈와 머리로 끓이는 매운탕이라지만 의외로 살점도 두둑하니 들어있어 기분이 좋다.

매운탕을 떠먹다 보면 매운탕 안에는 수제비도 많이 들어있어 건져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매운탕에 들어 있는 수제비의 원료인 밀가루는 생선의 비린내를 제거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비린내 하나 없이 얼큰하고 담백한 매운탕을 끝까지 즐길 수 있어 좋다.





경주에 여행 오시는 많은 분들은 보통 시내 안압지,대릉원, 첨성대, 반월성,불국사만 돌아보고 서둘러 가시곤 하는데
필자는 보문호,덕동댐을 넘어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 푸르른 감포로 넘어오시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다.
가슴이 탁 트이는 푸르른 동해 바다와 함께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을 지척에서 보신 후에 
이렇게 싱싱한 자연산회도 즐기고 가신다면 그제야 경주에 다녀왔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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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덮인 화진포가 나를 부른다.
처음 화진포에 갔던 몇 년 전 겨울.....
어디가 호수이고 어디가 들판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새하얀 눈밭으로 뒤덮여 눈 앞에 펼쳐지던 추억 속의 화진포.

동해안 최북단의 화진포는 둘레가 약 16㎞나 되는 아름다운 드넓은 석호이다.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해당화가 붉게 피어
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이곳은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데
바로 옆의 화진포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얕아
명사십리에도 비견되기도 하는 바다이다.



화진포는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또한 유명한데 

호수와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의 환상적인 경치를 접해보면 

대한 민국 초기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이 왜 이곳을 여름 휴양지로 삼았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최근에 와서 화진포는 '가을 동화'촬영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근 속초의 청초호 부근 아바이 마을이 가을 동화의 주촬영지였는데
화진포는 어린 시절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해변에서 모래 그림을 그리면서 추억을 쌓던 장면과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 - 준서가 은서를 등에 업고 해변을 거닐다 은서가 숨을 거두는
라스트씬을 촬영한 곳이어서 연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가 되었다.  



화진포 바다에서 보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눈에 뜨이는데 바로 '화진포의 성'이라 불리우는 김일성 별장이다.
"김일성 별장이 왜 남한에 있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에게 사족을 붙인다면
한국 전쟁 이전엔 이곳이 38선 이북, 즉 북한 땅이었다는 것을 기억시켜 드리고
지금도 이곳은 군사 통제 지역인지라 이 지역의 상황은 지도에서 스카이뷰로 확인할 수 없다.  
 


이 건물이 처음부터 김일성 별장이었던 것은 아닌데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비행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강제 철거키로 결정하고
원산 해변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는 히틀러를 피해 망명해 왔던 독일 건축가 베버(H.Weber)에게
예배당으로 사용할 조그마한 별장 하나를 바다에 면한 암벽 위에 짓게 하였다.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베버는 1938년 회색돌로 원통형 2층 건물을 현 위치에 지었는데
화진포 해안 절벽 위의 송림 속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하얀  외관으로 인해 '화진포의 성(城)'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이곳을 점령한 북한은 화진포의 성을 귀빈 휴양소로 운영하였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8년부터 김일성의 가족들은 경관이 매우 뛰어난 화진포의 성을 여름 휴양지로 이용하였고
실제로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김정일 형제가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화진포의 성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계단에 그 당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확힌하게 된다.



계단 중간 쯤에 어린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이 집 앞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표시되어 있고
 


계단 바로 옆 축대에 그 당시 사진의 사본이 걸려져 있어 '화진포의 성'의 원래 모습과
김정일의 어린 시절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누군지 손톱으로 긁적거려 김정일의 얼굴을 훼손시켜 놓았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 화진포의 성 마당에 이르니 수심이 깊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벽 위에 위치한 집이라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다. 



이 건물은 전쟁 중 훼손되어 1964년 재건축하였는데 외관은 처음과 변함이 없으나
실내는 현재 안보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게 매우 유감이다.
  전시관 벽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가 있었는데 대부분 건성건성 다 지나치고
건축물의 유래...김일성 정권의 수립 과정...등이 있으나 자세히 읽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당시 방의 모습을 재현한 소품들만이 눈에 띌 뿐인데... 



그 당시 의복과 제니스 라디오에 눈길이 가고.....
 


천정에 달려 있던 램프도 방문객의 시선을 잡는다. 



2층 전시실의 원형 방에 이르면 모두 다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창문을 통해 바다 풍경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절경'이라는건 바로 이런 경치를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
창문을 열고 바다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다.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옥상으로 연결이 된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화진포 호수와 화진포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오고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다.



건물의 벽 사이로 내다 보고 싶은데 두께가 있어서 쉽지가 않아 벤치 위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화진포성 위에서 내려다 보니 왼쪽의 호수와 오른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호수의 하늘빛 고요함과 대비되는 황홀한 에메랄드빛 바다색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이 해변의 모래는 조개 껍질과 바위가 오랫 동안 부서져 만들어진
모나즈 성분으로 되어 있어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고 개미가 살지 못 하는 모래라고 한다. 



앞에는 화진포 바다.....뒤에는 석호인 화진포 호수.....그 가운데 화진포 콘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콘도는 군인 시설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않고 슈팅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아저씨 발견.
아마 바다 한 가운데 섬 '금구도'를 찍는 듯 한데....
박격포 만한 엄청난 망원 렌즈와 무지 비싼 삼각대에 기가 죽은 필자는 몇 장 찍고 얼른 내려 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앞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섬 금구도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 온다.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는 광개토대왕릉이라고 한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 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3년(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이곳에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다고 하며
문자명왕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거북섬 성은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으며
산정 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섬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석축 보호벽과 방파성이 약 60m, 높이 170~230m,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앞으로 고성군에서는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원형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안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고 했던 문무왕처럼
광개토대왕도 자신의 숙원이던 남하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에다 자신의 무덤을 쓰게 한 것일까...?
눈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섬 금구도가 광개토왕릉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섬을 바라보니
감포 앞 바다에 서서 문무대왕 수중릉을 바라 볼 때와 같은 격한 감격이 가슴 속에서부터 물밀 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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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은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허리는 잘룩하며 높이는 108 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이 산에서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으니
나라에서는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에는 나무도 베지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달인이자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 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의 독서당도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와 오늘 소개하려는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자리잡고 있다.  
 

 경주 박물관을 지나 배반동 사거리에서 울산 쪽으로 100 미터 정도 지나 왼편 길로 접어들면
바로 능지탑과 선덕 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차 두대가 교행 할 수도 없는 좁은 산길을 
십여미터 정도 걸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탑이 바로 지척에 나타난다. 

실성왕 12년에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오르고 향기가 피어 올랐다더니만
능지탑을 처음 만난 이날에도 낭산의 바로 위에는 신비로운 구름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 m이다.   

 여느 탑의 형태와는 달리 특이하게 생긴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능지탑 혹은 연화탑으로 알려져왔는데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79 년에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정확한 원형을 알 수 없어 기단부 2 단만 토석 혼합으로 쌓았고    

 2층을 쌓고 남은 나머지 돌들은 옆과 뒷부분에 모아 두었다. 

 기단에는  12 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12 지상 중 3 개는 분실되었지만, 남아있는 9 지상은 비교적 정교하고 뚜렷하다. 

 동쪽은 호랑이,토끼,용(寅,卯,辰)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토끼의 상만이 남아 있다. 

 남쪽은 뱀, 말, 양(巳, 午, 未)의 지신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위는 말의 지상이다. 

 얇은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양의 지신상이다.  

 그리고 서쪽은 원숭이, 닭, 개(申, 酉, 戌)의 형상이 다 남아 있는데  

 얼굴 표정과 갑옷의 표현이 정교하여 마치 손오공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원숭이의 지상과 

 금방이라도 꼬끼오~하고 울 것 같은 닭. 

 서라벌의 멋쟁이 같아보이는 개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쪽은 돼지, 쥐, 소(亥, 子, 丑)의 지상이 다 남아 있는데  

 꿀꿀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돼지의 지상은 주둥이 쪽에서 보면 더욱 리얼하고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는 소의 지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이 날도 햇빛님이 해박하신 문화재 지식으로 능지탑의 이모저모를 잘 해설해 주셨는데
아름다운 손에 시선이 집중되어서일까? 쥐의 지상은 그 형상이 그다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12 지상은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에도 새겨져 있다. 
관련 포스트 : 비오면 비석 이름 바뀌는 신기한 김유신묘

 복원시에 미쳐 다 쌓지 못하고 주변에 쌓아둔 기단석을을 자세히 보면 앞에는 연화문을 잘 다듬었지만  

 뒤편은 자연석 모양을 그대로 두어 탑을 쌓았을 때 무너지거나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탑에서는 발굴 당시 큼직한 소조 불상 파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 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돌의 색깔이다. 

 쌓아진 기단석이나 쌓지 못하고 방치된 기단석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들이 모두 안쪽이 불에 그을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 탑지 안에서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나왔고 이렇게 불타 그을린 흔적이 나온데다 
 삼국사기의 기록까지 있어 이 곳이 문무왕의 화장지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장남이자  통일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일전을 벌여 제압한 후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군주이다.  

거듭된 통일 전쟁을 힘겹게 끝낸 문무왕은 생명의 줄을 놓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숨을 거두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  
그리고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고, 죽은 지 열흘 이내에 화장하라.”
하는 유언을 남겨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은 왕이었다.

   


  
 이렇게 화장된 문무왕의 유골은 감포 앞 바다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양지바른 무덤자리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조성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 
 

바닷가에서 보면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일 뿐 수중릉이 아니다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문무왕의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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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지의 추억으로나 떠올려지던 경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기로 인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들 가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는 형편인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경주에서 어디서 무엇을 둘러 보아야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선덕여왕 드라마 관련 유적지를 휘리릭....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해드린다.


제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그 모습이 엎드린 이리(狼)의 모습이라 하여 낭산(狼山)이라 불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다 묻어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낭산에 릉을 썼는데 여왕 사후 30년이 지나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칭하므로
이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설화, 여근곡 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機三事)'로 불리운다.




사실 드라마가 뜨기 전까지 선덕여왕릉의 위치는 경주 사람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왕릉의 대접을 받는 김유신묘가 송화산 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가는 도로의 좌측에 위치해 릉에서 한참을 지나 유턴하지 않고는 진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왕릉 입구도 애매하다.
경주 시내 유적지마다 위치한 유적지 관리 사무소는 이곳에는 없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없고 차를 주차할 공간도 마땅하지 않는데
올해에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탐방객이 늘어나자 사천왕사지 앞에 겨우 몇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놓은데에 불과하고
차에서 내려서도 채소밭, 과수원, 소나무숲길...등 진입로같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릉이 나온다.



일년만에 다시 찾아본 선덕여왕릉은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던 작년보다는  어느 정도 릉 주변이 정화되어 있었지만
경주에 위치한 다른 릉에 비해서는 확연할 만큼 무덤의 떼가 잘 살지 않고 엉성하게 벗겨져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간에 드라마의 명성을 힘입어 외지에서 찾아온 분들이 제법 보였는데 릉 앞에 서신 분들의 태도는 다른 릉에 비해서 숙연하기만 하고
참배 왔던 분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박카스, 귤등이 상석 위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선덕여왕릉을 나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면 바로 건너편으로 통일전 가는 길이 나오는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세 영웅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아들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과 그들이 업적이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는 아니나 사계절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꼭 들려보야야 할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통일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낭산을 끼고 보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동네가 보문동인데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79년에서 632년으로 무려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당나라와 수교하고
대내적으로는 위화부, 선부서,예부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광법사 들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 힘쓴 훌륭한 왕이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힘없고 나약하여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더러
머리도 새카만 젊은 나이에 실권을 덕만에게 넘기고 일찍 사망하는 것처럼 왜곡 표현되기만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진평왕릉 역시 관리 사무소가 없고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진평왕릉의 주위는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며
주변이 너무나 호젓하여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 놓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한참을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인의 말로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의 진평왕릉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니 카메라를 가지고 석양 즈음에 다시 한번 가보아야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보문단지쪽으로 500m 정도가면 보문 호수 입구 바로 오른쪽에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명활산성은 지금까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비담의 난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곳이니 꼬옥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활산성을 둘러보신 후에는 보문 호수를 지나 엑스포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가볼 것을 권한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민속촌처럼 신라시대를 재현한 역사 체험 테마 파크인데
20여년전에 경주 보문에 역사 문화 체험 민속촌을 계획하고 건설하던 도중 워낙 방대한 공사 규모로 인해 부도가 나서
거의 십여년을 버려져 있던 마을을 삼부토건에서 매입하여 새롭게 조성해서  '신라 밀레니엄 파크'로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및 대형 사극 '천궤의 비밀', '여왕의 눈물', '화랑의 도'공연을 매일 관람할 수 있다 .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을 위해서 20여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 세트장을
직접 둘러 보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미실궁 앞에 위치한 김유신 화랑 산채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서 새로 지은 것인데
필자의 드라마 관련 포스트에 선덕여왕 촬영 당시 이요원,엄태웅,고현정...등 중요 배역의 직찍 사진이 있으니 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길 바란다.

김유신 화랑 산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공연장 역시 드라마에서 문노와 설원랑, 미실의 난 중의 출병 장면 등 드라마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곳.
여기서는 매일 2회씩의 '화랑의 도' 공연이 열리는데 화랑들의 검술과 신기에 가까운 마상 무예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장이다.



보문단지를 나와 시내쪽으로 와서 꼬옥 가보아야 할 곳은 당연히 첨성대.
과학적 건축 양식으로 주목을 받는 첨성대는 드라마에서는 엉뚱하게도 덕만이 공주 시절에 조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 조성시기는  '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인 서기 633년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는 632~647년으로 보는 바,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2년째에 쌓은 것이니
덕만이 공주 시절에 첨성대를 만들고 어쩌고...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첨성대 바로 앞에는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는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사다함을 추억하는 장면이라든지
소화가 어린 덕만을 안고 탈출하는 장면 들 많은 장면이 반월성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반월성 앞 수만평의 너른 초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유채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여름이면 황화 코스모스와 연꽃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며
반경 500m내에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계림,대릉원, 최부잣집....등 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서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어도 하루해가 부족할 정도이다.



반월성에서 대릉원 앞을 지나 최부잣집, 월정교 복원 현장이 있는 교동에 이르면 사마소 바로 옆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매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다시 백제군이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는다.
유신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병사를 시켜 자기 집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한다.
물을 다 마신 다음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이구나!" 하면서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는 멋진 기록.
지름 1.8m, 깊이 5.7m인 이 우물은 아직까지 남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밀집한 시내를 벗어나 서천으로 불리는 형산강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으로는 무열왕릉 , 오른쪽으로는 김유신묘가 위치해 있는데
왼쪽길로 1km정도 가면 선도산 동쪽 사면에 거대한 원형분 5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밑둘레 114m, 높이 약 8.7m의 거대한 릉이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은 왕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릉 동쪽에서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릉이 무열왕의 릉임을 알려준다.



무열왕릉을 나오면 반대편에 있는 김유신묘로 향하는 것이 좋다.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고 주변 숲도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김유신 묘 앞에 서 있는 오른쪽 비석에는 비오는 날에만 글씨가 바뀌는 신비한 비밀이 있으니 비오는 날 경주를 방문하시면 꼬옥 방문해 보시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분은 김유신의 무술 수련 장소 단석산에 올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단석산은 경주시 경계에 위치한 산 가운데 제일 높은 산으로 높이는 827m 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서쪽에 위치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단석(斷石)이 정상 부위에 있다.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들은 어린 김유신이 백만돌이처럼 하나,둘...세면서 쉴새 없이 검을 내리치던 장면과
엄태웅이 연기한 김유신이 산 정상에서 백만스물하나..백만스물둘....(^^)하면서 끝도 없이 바위를 목검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김유신이 내리쳐서 두동강이 났다고 전해오는 바위를 산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꼭 가보셔야 할 명소가 단석산이다.


필자가 언급한 유적지 외에도 경주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 씬과 문노가 앉아 있던 멋진 나무가 있는 암곡 등....미쳐 소개하지 못한 선덕여왕 촬영지 또한 너무나 많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드라마 선덕여왕, 곧이어 비담의 난이 전개될 것이고 선덕여왕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신화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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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가는 가을날에 찬란한 가을빛을 

눈으로...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경주에서도 남산 최고 명당 자리에 위치한 통일전. 
그 이름에서 대충 짐작이야 하시겠지만 통일전이란 곳은 통일 신라 시대 유적도, 조선 시대 유적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삼국 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국민의 전당이다. 
 

통일전은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고 본받자는 뜻으로 건립된 만큼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교육원과 함께
초중등학생들의 이념 교육장 형태로 이용되어 왔으며 경주를 찾는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곳은 특히 바로 옆에 서출지가 있고 남산 답사를 위해서는 꼭 거쳐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잠시 들려 둘러보고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더우기 통일전으로 들어가는 2km의 진입로는 환상적인 은행나무길로 유명하고 


주차장에 들어서서도 방문객들의 탄성이 이어지는데 
주차장 주변이 온통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단풍으로 어우러져 가히 환상적인 경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곳의 느티나무는 단풍나무보다 더욱 빨갛게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내곤 하는데

 느티나무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할 정도로 고운 색을 자랑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수련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아직도 몇 송이 남아 있는 수련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 준다.

 이 연못 주위의 벤치는 남산 답사로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기에 안성맞춤이고 

 연못 건너편의 금강 소나무 숲 주변 산책로는 솔향기가 그득하다. 

 너른 경내에는 귀한 수목들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뽐내는데.... 

 목련잎도 노란 물이 이쁘게 들었고... 

 단풍의 고운 자태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매일 매일 낙엽을 쓸어야 하는 관리인 아저씨의 마음 속에도 고운 단풍의 빛깔이 남아 있겠지..?
 

정문을 지나 너른 정원을 지나면 흥국문(興國門)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흥국문을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옆으로 난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본다. 

 담장 옆에서 본 목련은 또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 오고...  

 담장 기와 위에 떨어져 소복이 쌓인 솔잎은 가을의 정취를 한결 더하여 준다. 

 흥국문(興國門)이라고 쓰여진 현판....나라를 일으키라는 뜻으로 이름한 문이겠지?  

 흥국문을 지나면 두번째 정원이 나오는데 저 멀리 계단 위에 또 문이 하나 보인다. 

 흥국문을 지나서 나오는 두번째 정원에는 사적비(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를 비롯하여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제일 왼쪽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사적비가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는 문무대왕의 사적비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사적비이다.

 두번째 정원에서 본전이 있는 마지막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서원문(誓願門)이다.
삼국 통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 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이리라.. 

 서원문을 들어서면 본전인 '통일전'이 그 위용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울긋불긋한 단청을 칠하지 않고
서까래는 연갈색으로, 기둥과 벽은 하얀색으로 칠하여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을 주는 전각이다. 

 통일전(統一殿)이란 현판 아래 전각의 문 또한 순수하게 하얀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본전 안에는 삼국총일의 대업을 달성한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제일 왼쪽에는 태종 무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무열왕의 얼굴은 비교적 자애롭게 그려져 있어서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선덕여왕에서 김춘추 역을 맡았던 유승호가 나이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혼자 상상해 본다.

 왼쪽에 모셔진 문무대왕의 눈꼬리는 올려져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무열왕과 문무대왕의 영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오른쪽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으로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또 본전을 돌아가며 사면에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전각의 옆과 뒷편 회랑을 따라 삼국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전시되고 있다.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된 17점의 기록화는 그림 보존을 위해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지라
반사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회랑의 구석에서 본전과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맛인데 특히 여기서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궁'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회랑의 양쪽 코너에는 누각이 두개 있는데 신 벗고 올라서 보니 통일전 경내와 저 아랫 마을까지 훤히 다 보인다. 

 왼쪽 누각에서도 아름다운 경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누각에서 바란 본 풍경은 느티나무,은행나무,반송,목련...각가지 나무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대궐이다.
 

서원문 앞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 아래 은행나무가 줄지어 사열하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전을 다 돌아본 후 은행나무길로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차창을 내리고 비행기 날개처럼 팔을 길게 옆으로 뻗어 보았다.
옆으로 스치며 지나가는 세찬 바람 소리...
이 가을.....이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날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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