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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63번째 여행지 안동편에서 소개되었던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신 이 서원은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아서 도산서원이라고 불리운다.
이후 도산서원은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어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의 자세한 소개와 사진은 지난번 포스트에서 언급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고
오늘은 도산서원 경내에 위치한 전시관 옥진각에 전시된 퇴계 선생의 유품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도산 서원의 경내에는 유물 전시관이 한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옥진각이라 이름하는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퇴계 선생의 유품들을 하나 하나 살펴 보기로 한다.
1585년 나주에서 간행한 목판본인 '퇴도선생 자성록(退陶先生自省錄-퇴계 선생의 호는 퇴도라고도 한다)'은
선생께서 타인에게 보낸 서간 중에서 거듭 음미하고 반성하여 엮은 책으로 58세 때 만들어졌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유교 철학의 주요 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선생 68세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올렸는데 선조께서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좌우에 두고 보셨다고 한다.
'사문수간(師問手簡)'은 제자 월천 조목이 평소 선생으로부터 받은 서간 106통,시 16편,잡서 7편을 손수 책으로 만든 것으로 모두 8권이다.
'어제발문(御製跋文)'은 평소 퇴계 선생을 흠모하던 정조 임금이 1794년에 사문수간을 열람하고서
그 소감으로 발문을 지어 하사한 것인데 선생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며 읊은 시조로써 친필 목판본이다.
언지 편인 전 6곡과 언학 편인 후 6곡을 합하여 도산십이곡이라 부른다.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은 퇴계 선생이 옛 학자,명인들이 좌우명을 뽑아 편하여
심성수양의 자료로 삼아왔던 것을 제자 정구에 의해 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는 1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선생의 학문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스구리 교쿠수이가 선생의 서한을 뽑아 엮은 것으로 1811년 일본에서 간행한 원본을
선생의 8대손 초초암이 일본에 사신갔던 김이교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기구로 이것은 선생이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구면에는 성좌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왕궁이 아닌 민간 교육 기관에서 만든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외에 퇴계 선생의 유품으로써 '등경'이 있고.....
흑단연. 단계산 흑색 돌로 만든 '벼루'도 쓰던 유품이다.
글을 쓸 때 종이의 양 쪽을 누르던 '옥서진'과 '세지(細枝)'가 있는데 세지의 용도는 미상이나 선생의 유품으로 전해 온다.
말 안 듣는 제자들의 종아리를 치기 위한 회초리는 아닌지....^^
매화연. 단계산 자색돌로 만든 '벼루'는 선생의 문인 김북애의 증정품이다.
선생이 침을 뱉을 때 사용하던 도구인 '백자타호'인데 받침 접시 밑에는 '山'자가 묵서되어 있다.
오른 쪽은 선생이 사용하던 '장추(긴 빗자루)'로써 의이미라는 일년초로 만들었다.
직접 마당을 쓰시는 퇴계 선생이라니....그 모습을 잠시 유추해본다.
'청려장'이라고 부르는 이 특이한 모양의 지팡이는 푸른 명아주로 만든 것이고
책을 읽을 때 사용한 검은색의 '목조 책상'은 낡을대로 낡아 귀퉁이가 다 헤어졌다.
병을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청,홍의 대화살을 병가운데나 귀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기구인 투호도 있고
매화를 특히 좋아하던 선생이 앉으시던 매화 무늬의 '청자 걸상' 도 눈에 쏙 들어오는 유품이다.
기대는 방석인 '안석'은 가는 왕골로 짠 길이 80cm정도 되는 유품이고
왕골로 짠 '완석' 3개 중 한 개의 뒤에는 '이첨지댁 퇴계'라는 자필 글씨가 쓰여 있다.
거의 국보급이라 할 수 있는 귀한 목판본도 귀중하게 느껴지지만
선생이 평소에 쓰던 벼루며 서진, 책상, 걸상 등 일상 용품과
침을 뱉던 타구, 기대앉던 안석, 아침 저녁으로 마당을 쓸던 긴빗자루까지 전시되어 있는 이곳은
퇴계선생의 소박하고도 고고한 향기를 피부로 느끼기에 충분한 곳인 듯....
퇴계 선생은 늦은 나이인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 군수,풍기군수,공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조선의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으며 조선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공천 한번 받아서 출사해보나...어떻게 하면 막강한 권력을 내 손에 쥐고 흔들어보나...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권력지향성 나으리들은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인격도야,후진 양성에 힘쓴 퇴계 이황 선생의 유품을 보며 깨닫는 것은 없을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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