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은 AD 79년 8월 24일이었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 폴리니우스의 조카 소 폴리니우스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2장의 서신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대 폴리니우스는 폼페이 인근 스타비아이에 있던 친구를 구하려 애쓰다가 죽었는데
이튿날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6~7미터의 화산재와 화산력으로 뒤덮여져 도시는 완전히 파묻히게 되고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16세기 말, 강으로부터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인부에 의해 폼페이는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 후 1738년 4월, 밭 갈던 농부가 곡괭이에 부딪치는 쇠붙이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입소문이 여기저기 퍼지게 되자
당시 가장 유명했던 토목기사 도메니코 콘타나가 적극성을 띠고 발굴 작업에 뛰어 들게 되고 폼페이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 간헐적으로 발굴은 계속되었는데
1938년 12월 11일엔 헤르쿠렐늄 극장에 세워진 돌벽,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 원형극장등이 발견되었다.
현재의 폼페이는 약 3/4정도가 발굴된 상태인데
이곳에는 많은 축융소(모직을 가공하고 세척하는 공장)가 있어 당시의 주요산업을 연구할 수 있다.
그 외 조각가, 공구제작자, 보석세공가들의 가게뿐만 아니라
가룸(피시 소스)·램프 공장들, 많은 포도주·식품 상점들이 발견되어 고대 생활의 다른 면들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이곳은 큰 신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폼페이에는 신전 뿐 아니라 집 안에도 많은 제단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추측할 수 없었던 가정 내의 종교생활까지 엿볼 수 있다.
신전은 무너진 채로 부러진 기둥만이 남아있다.
신전의 어느 부분은 돌기둥이 색이 마치 요즘의 것처럼 산뜻하게 보인다.
목욕탕이 있던 자리는 그 화려함과 규모로 보아서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케 한다.
폼페이는 지중해 전역으로 상품을 수출하던 활발한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상인들은 성문과 포룸 근처에서 음식과 숙소를 구했다.
상당히 멋진 식당과 여인숙들이 있었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값싼 곳은 방이 작고 어두웠으며, 손님들은 등받이가 없는 걸상에 앉았다고 한다.
창녀촌이 있던 골목을 걷다 보면 완벽한 돌 포장이 된 거리에 마차 바퀴에 의해 패인 자국도 관찰 할 수 있다.
창녀촌(루파나레, Lupanare)에 들어가 보니 작은 방 마다 돌침대가 놓여있고
방문 입구 위에는 다소 므흣^^한 그림들이 아직도 별로 색이 바래이지 않고 남아있다. 방마다 문 위에 걸린 그림의 체위는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유명한 항구였던 폼페이는 외국의 상인도 많이 드나들었던지라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창녀들의 주특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추정한단다.
아직도 오븐이 남아 있는 빵집 옆에는 돌절구도 남아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연자매와 거의 비슷한 절구는 네모난 구멍에 나무를 끼워 소나 말이 돌리게 해서 곡식을 빻았다고....
오븐이 완전히 갖추어진 빵집은 그 당시 일용 양식인 빵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오븐들 중에서는 발견 당시 속에서 빵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전시관에는 발굴 당시 나온 유적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은 화산재에 덮여 거의 사망했다고 하는데 죽은 시신의 모형조차도 안쓰럽게 안치되어 있었다.
이 곳은 폼페이의 휴양 지역인 스타비아이, 베수비오 화산에서 거리가 먼 지역이라 피해가 다소 적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넓은 폼페이를 하루에 다 돌아보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곳도 많지만 공개된 발굴지만 돌아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었다. 내리 쪼이는 태양 아래에서 엄청나게 넓은 폼페이를 돌아보는 것은 거의 사막을 걸러 여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심한 갈증으로 인해 거의 탈진 직전으로 휴양 지역까지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니 폼페이 관련 책자를 사라는 상인들의 호객 행위가 아주 심하였다. 한국말로 '싸다' 싸다!' 이러면서 따라오는게 겁나서 피하기만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거기서 책 한권, 작은 기념품 하나라도 더 살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여행 관련 책자나 기념품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을.....ㅠㅠ
여기서는 구하기도 힘든 자료를 왜 안 사왔던가.....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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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근래에 와서 지반 침하와 석호의 오염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베네치아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배를 타고 첫발을 디딘 베네치아는 마치 세계 각국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전 세계 사람이 다 여기로 여행을 온걸까...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 이유는 많은 여행객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북적대는 인파 속을 뚫고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베네치아의 광장 가운데 PIAZZA 라고 이름 붙여진 유일한 광장...... 일찌기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장방형의 광장 주위로 하얀 대리석의 열주가 늘어서 있는데 광장 동쪽으로는 산마르코 대사원, 두칼레 궁전이 둘러싸 있고 두칼레 궁전 앞에는 99미터의 대종루가 우뚝 서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시계탑, 사원의 맞은 편에는 나폴레옹의 날개 라고 하는 박물관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상징 산마르코 사원은 예수님의 제자 마가의 유해를 모셔놓은 사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산마르코 사원은 5개의 돔을 가지고 있는 사원인데 정면의 모자이크화는 사원의 창건유래를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광장 북쪽에 있는 시계탑으로 15세기에 건조된 건물이며 12시가 되면 청동상이 나와서 종을 친다.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광장 한가운데는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진 자욱과 군데 군데 낮은 곳에는 물이 고여있었고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비둘기들이 광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어미니 먹이라도 주려나 해서 많은 비둘기들이 내 주위로 다가왔다.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가면들을 파는 전문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 미로같은 좁은 골목에서 스파게티를 먹게 되었는데 내 앞에 나온 스파게티는 본고장의 스파게티가 이 정도인가 할 정도로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냥 스파게티면에 위에 얹혀진 초라해 보이는 소스....... 그런데 맛을 보니......^^ 이런게 원조의 맛인가보다. 허겁지겁 내 접시의 것을 다 해치우고 다시 덜어서 먹고나니 너무 배가 부르고 여행의 행복감이 느껴졌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화장실을 가니 많은 여행객들로 화장실은 만원.....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 수염을 기른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남자화장실을 쓰라며 자기들 차례를 양보해준다. 얼마나 고맙던지.......얼른 볼일을 보고 나와 그라찌에~하고 인사했더니 한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해 주었다.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많은 카페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플로라' 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 마니아인 내가 그냥 지나칠수가 없다. 1720년에 처음 문을 연 카페인데 카사노바,괴테,멜빌,바이런,프로스트.....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드나들었던 카페라고 한다.
카페의 입구는 하얀 커튼으로 장식되어있었고 내부는 생각보다 좁고 침침했다. 18세기에 중국풍이 유럽에서 유행이 되어서 내부는 약간 오리엔탈 풍으로 되어있었다. 에스프레소의 본 고장에 왔으니 한번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두 잔을 시켰더니 간장 종지만한 작은 잔에 새카만 원액같은 커피와 설탕 두개씩, 그리고 큰 물병을 쟁반에 담은 채로 내어왔다. 물병은 왜 줄까....? 아마 쓴 커피를 먹은 후 입가심을 하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생각되었다. 남편은 설탕을 하나 뜯어 에스프레소에 탔는데 난 원래 맛을 알고 싶어 그냥 살짝 맛을 보았다. 무지 쓰면서도 커피의 깊고도 진한 향이 우러나는게 먹을만해서 설탕도 타지 않고 그냥 먹었다. 다른 곳에서 먹던 것보다 한결 깊은 맛이었다. 베네치아까지 와서 세계 최초의 카페에서 맛보는 에스프레소라니..... 길이 기억에 남기고 싶은 커피의 맛이었고 그 이후로도 에스프레소를 자주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는데 건너 편에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한 청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난 반가운 맘에서 그 남자에게 카메라를 주려고 하니 남편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를 한다. 이탈리아엔 도둑이 많으니 절대로 카메라를 남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기억났나보다. 남의 호의를 무시한 것 같아서 약간 미안하기도 했고 설마 그 비싼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이 도둑이랴....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에 소매치기가 가장 많아서 배낭 여행 온 사람들의 물건을 잃어버린일이 허다하다는 말을 들으니 카메라를 잃어버리면 카메라 보다 그 동안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카메라를 넘기지 않은 것이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후 중앙 로비에 있는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이탈리아 남자가 약간 신경질을 내며 뭐라고뭐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었다. 영어이긴 한데 이 무슨 희한한 발음인가...... 이탈리아식 영어는 영어같지도 않고 마치 이탈리아어같이 들렸다. 다시 들어보니 네 자리에 가서 앉아서 웨이터를 부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리에 왔더니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지고 왔다. 돈을 주니 거스롬돈과 영수증을 다시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처럼 계산대에 가서 계산해야 하는 줄 알고 서서 지갑을 내밀었던게 좀 챙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문화의 차이니까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베네치아에 왔으니 곤돌라를 타지 않을 수 없다. 악사가 연주도 해주는 고급 곤돌라는 돈을 많이 내야 탈 수 있어서 난 평범한 곤돌라를 탔다. 배를 타고 베네치아 운하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동안 옆으로 지나가는 비싼 곤돌라에서 연주하는 음악도 덤으로 들을 수가 있었다. 사진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잇는 탄식의 다리이다. 죄수가 이 다리를 건너가면 사형장으로 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워졌다.
곤돌라에서 내려 전통 방법으로 세공하는 크리스탈 장인이 있는 크리스탈 세공 공장에 들어가 보았더니 너무나 아름다운 크리스탈 수공품이 많았다. 이쁜 유리 그릇들이 너무 많았지만 여행에서 짐 늘리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작은 크리스탈 목걸이 하나 기념품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관광을 마치고 Laguna Palace Hotel 에서 묵게 되었다. 호텔은 아주 화려하고 시설이 좋았으며 가운데는 요트 선착장 까지 있는 큰 호텔이었다. 호텔 객실 내부도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있었는데 우리 나라 특급 호텔 보다 좋은 시설이었지만 1급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는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오래 되지 않으면 특급이 될수 없고 좁고 작은 호텔이라도 100년 이상된 건물이면 특급 호텔이 될수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베네치아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고 있었는데 아까 마신 에스프레소로 인해 잠은 전혀 오지 않았고
곤돌라와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이 밤새도록 머리 속으로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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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에 오르는 아침이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서면서 가방에 있는 다 꺼내 옷을 몇 개나 겹쳐 입었다. 티셔츠위에 티셔츠,그 위에 가디건,그 위에 점퍼.....이 정도면 최소한 춥지는 않겠지....하고 호텔 문을 나서니 이거 웬 일.....서늘한 기운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 든다.
융프라우 기차 여행의 시작점은 너무나 이쁜 인터라켄 오스트 역이다. 비가 약간씩 뿌리고 있어서 우산을 챙기고 우리 나라의 레스토랑 같은 인터라켄 오스트역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역에 얌전히 기다리고 서 있던 이쁜 열차에 오르니 차 한량에도 칸막이가 되어 마치 작은 방같이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융프라우로 가기 위해 인터라겐을 출발한 열차는 라우터브루넨, 벵엔을 거쳐 클라이네 샤이데크 역에 멈출 때가 돼서야 한숨을 돌린다. 클라이네 샤이데크 역은 ‘유럽의 정상’이라 불리는 융프라우요흐 역(3,453m)으로 향하는 관문. 그린델발트와 라우터브루넨 마을로 갈라졌던 철로는 이곳 간이역에서 만나게 된다.
인터라켄에서 가볍게 내리던 비는 산을 오르니 눈으로 바뀌고
중턱 쯤 오르니 이제 눈덮인 경치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클라이네 샤이데크 역에 내려서니 빨간 융프라우반(Jungfraubahn)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보니 신기한 것은 서로 등을 대고 앉는 의자가 높이와 각도가 차이가 있다. 이제부터 엄청난 급경사의 터널로 융프라우를 올라갈터인데 앉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아예 비스듬하게 들렸을 때를 기준하여 의자가 놓여진것이 신기했고 또 의자에도 히터가 들어와 매우 따뜻하였다. 있는 옷을 다 겹쳐 입었는데도 추워서 견딜수 없어 오돌오돌 떨던 내겐 반갑기만 한 의자였다.
철도 사이에 톱니가 있어 물려서 급경사에서 열차가 뒤로 미끌어지지 않게해 주는게 융프라우를 오르는 철로의 특징이다.
클라이네 샤이데크 역을 출발한 빨간 열차는 산 속터널로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수직과도 같은 1,134m 구간의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아이거와 묀히의 암반을 뚫고 16년 만에 완공된 이 철로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는데 암벽 터널 구간은 10km 가량 계속되고, 관광객들을 위해 터널 속에 있는 두 곳의 전망대에 열차가 잠시 정차하게 된다. 잠시 정차한 터널 속에 통유리가 붙어있기에 가서 유리에 바싹 붙어서 보니 유리 바깥 아래는 가물가물한 낭떠러지..... 그 이름도 유명한 아이거 북벽이란다. 높은 산 속의 터널에서 산의 바깥을 내려다 보다니...... 하지만 바깥에 내린 눈으로 사방이 너무 하얗게 뒤덮여 뭐가뭔지 경치를 분간할 수 없는 게 아쉬운 점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바닥과 벽이 온통 얼음으로 되어있고 여러가지 얼음 조각들이 전시되어있는 얼음궁전을 잠시 감상한 후, 유럽 최고 높이의 전망대인 스핑크스 전망대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날씨가 좋으면 섬 같은 봉우리 사이를 헤치고 강물처럼 뻗은 24km의 알레치 빙하와 그 뒤로는 국경을 넘어 프랑스 산악지역과 독일의 흑림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바깥엔 눈이 계속 오고 있었다. 눈이 와서 운치가 있기도 하였지만 설경을 감상하러 전망대 문을 여니 눈보라가 몰아쳐 구경은 커녕 몸도 가누기 힘들고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전망대 휴게소 실내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며 설경을 감상할 수 밖에 없었다.뛰어다니던 아이들과 체력이 약한 여자 관광객들이 이내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주저앉는다. 3,453m의 고도라 산소결핍을 느끼며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다. 난 너무나 다행히도 그런 증세가 전혀 없어 감사한 마음으로 전망대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전망대 입구 문 옆에는 빨간 우체통이 하나 있었다. 전망대에서 기념 엽서를 사서 융프라우 기념 소인을 찍어 이 우체통에 넣는 것이다.
이 우체통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우체통이라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에서 보내는 융프라우 소인이 찍힌 엽서 한 장은 보내는 이만큼이나 받는 이도 감동적이지 않을까. 맑은 날 다시 와서 융프라우 정상에 다시 서리라.... 다짐하며 내려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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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가까워질 무렵......언덕위에 아주 멋진 성이 있어서 무슨 성일까...궁금하던 중
호텔에 도착해서 로비에 꽂혀 있던 관광 안내 책자에서
그 성이 schloss thun 이라는 박물관으로 쓰이는 고성이란걸 알게 되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성조차도 이렇게 아름답다니......
묵게 된 호텔은 Holiday Thun ...... 유럽의 호텔 답게 로비도 아주 소박하였다. 키를 받아 2층에 올라가니 어두운 2층 로비에는 오래된 유럽식 고가구와 오래 된 멋진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 옆에 오래 됐음직한 중세 기사의 갑옷.....!
너무 어두워서 사진 찍기는 생략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주 소박한 가구와 이쁜 침대 둘.....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도록 작은 욕조.... 모든 것이 작고 소박하였지만 오랜 연륜이 묻어져 나오는 듯 하였다.
발코니로 나가는 커튼을 젖혀보았더니 세상에나....! 발코니 바로 앞은 아주 조용하고 조그마한 호수...... 그 위로 얌전히 드리워진 나뭇가지와 아주 심심한 듯 놓여진 조그마한 조각배들.... 그 주위를 들러싸고 있는 그림같은 집들...... 여기는 우리가 그렸던 파라다이스임에 분명하였다.
행복에 취해 잠도 잘 올 것 같지 않아 누워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펑펑......! 하는 소리가 계속 났다. 일어나 커튼을 젖혀 보니 우리가 툰에 온 것을 어찌 알고 환영이나 하려는 듯 하늘 가득히 불꽃 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너무 흥분하여 속옷 바람으로(!) '와아~!' 소리를 지르며 발코니로 뛰어나갔다.
그 날 밤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발코니에 서서 오랫동안 불꽃 놀이를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행복한 툰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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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는 프랑크푸르트는 평온하고 풍요스럽게 보였다. 비행장이 러시아워여서 몇십분 동안이나 착륙을 못하고 프랑크푸르트 상공을 선회했는데 붉은 지붕의 장난감같은 이쁜 집들과 축구의 강국 답게 시내에 수도 없이 널린 잔디축구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은 후 아주 간단한 수속을 마쳤다. EU국가들은 줄 서서 여권에 도장만 꽝!...... 검색대조차도 거치지 않아서 아주 좋다.
프랑크푸르트 마인 공항은 유럽의 중심 공항이라는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아주 소박했는데 아무리 화장실을 찾아도 안 보여서 공항직원에게 물어서 꼬불꼬불 숨어있는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쌓인 휴지...시설도 엉망이라서 깨름찍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왔다.
근교의 Achat Hotel은 호텔이 무지 소박했다. 로비도 작고,엘리베이터도 거의 코딱지...... 그런데 방에 도착해 키를 아무리 돌려도 손잡이가 빙빙 돌아가기만 하고 문이 안 열리는 거다. 할 수 없이 직원을 불렀는데 키를 3번이나 돌리니 문이 열리는거였다. 우습기도 하고 약간은 챙피하기도 하였다.
방에 들어가니 아주 깨끗하였는데 욕실을 보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작은 욕조라니.....사방 약 90센티정도의 크기에 사람하나 들어가서 서면 딱 맞을 정도의 크기여서 씻을 때도 샤워커튼 안에서 조심조심..... 시차 적응이 안 되어 새벽 2시 반에 잠이 깨어 뒤척이다 잠자는걸 포기하고 아예 일어나 버렸다.아침에 일어나 호텔에서 프랑크 소시지를 맛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본고장 소시지의 맛이구나!!!" 할 정도로 너무나 맛이 있었다. 몇개나 먹었는데 지금도 그 소시지의 맛은 잊혀지지 않는 맛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정식 이름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 즉,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이다. 560㎞나 되는 마인강을 끼고 있고 794년 칼 대제가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1120년 이후 독일의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며 전차가 다니고, 최근 금융 보험 은행업이 발달하여 방크프르트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다. 유럽 전체의 교민이 약 35,000명 중 이 곳에 5,500여명이 거주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중심 뢰머 광장의 동상은 저울을 들고 시청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라는 의미란다. 우리나라 시청 앞에 갖다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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