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뭐니? 난 예쁜 꽃을 피우는 민들레야.

얼마만큼 예쁘니? 하늘의 별만큼 고우니?

그래, 방실방실 빛나.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네가 거름이 돼 줘야 한단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내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

어머나, 그러니? 정말 그러니?

강아지똥은 얼마나 기뻤는지 민들레싹을 힘껏 껴안아 버렸어요.

(권정생 / 강아지똥 中에서)


"하나님은 쓸데 없는 물건을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아동문학가 권정생.

권정생 선생이 살던 집과 그가 기거하며 글을 썼던 교회가 경북 안동시 일직면에 있다기에 길을 나섰다.





남안동 TG를 벗어나 조탑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니 바로 시골길이다.

공사중인 5층전탑 앞에서 안내판을 찾았다. 언제 세운건지 쩍쩍 갈라져서 알아보기조차 힘든 안내판이다.





개발과는 거리가 먼 듯 동넷길 옆 돌담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하다.

돌담 아래 피어 있는 작은 민들레들이 눈에 뜨인다. 강아지똥이 껴안아준 민들레꽃이다.





동네 구경은 잠시 미루고 안내판 바로 맞은 편으로 난 동네길로 접어들었다. 조탑안길이다.





동네 안길도 담장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 하지만 개발이 더디다고 탓하기 전에 왠지 친근감이 드는 곳이다.





마주보이는 길을 따라 계속 동네 골목길을 올라갔다.





빌뱅이 언덕 아래 권정생 선생 살던 집이란 팻말이 보였다.





바로 담장도 하나 없는 작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권정생 선생이 살던 집이다. 

앞에 서 있던 안내판이 아니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집 앞으로 길이 나 있는데 생가를 휘감으며 두갈레길이 나 있다.





집 앞 배추밭 너머로 생전에 종지기로 일하던 교회의 종탑이 보인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문간방에서 집필했다던 바로 그 일직교회이다.


  



길 바로 옆에 앉은 생가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말 작고 초라한 집이다. 





초라한 집을 일러 흔히 초가삼간이라 하지만 이 집은 삼간은 커녕 

두간의 방에다 뒷쪽 부엌으로 향하는 길에 겨우 지붕만 이어붙인 형국이다.





뒷편으로 돌아가보니 흙벽에다 함석을 덧대어 붙였다. 비에 젖어 벽이 무너지는 것만 겨우 가름했다.





이런 초라한 집조차도 강아지똥 발표 후 벌어들인 돈으로 80년대에 겨우 마련한 집이라 한다.

집 뒤의 빌뱅이 언덕은 고려장을 하던 시절 무덤을 만들어 놓았던 곳인데 

빌뱅이 언덕 아래 있던 상여 놓는 집을 수리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던 것이다. 

이 곳에 오기 전까지는 일직교회 종지기로 지내면서 교회 문간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37년 도쿄 빈민가에서 가난한 노무자의 아들로 태어난 권정생 선생은 

광복 직후 1946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빈곤과 전쟁으로 곧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





가난으로 인해 학교 대신 나무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을 전전하며 골목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9살 때 늑막염과 폐결핵 등의 병을 얻어 안동시 일직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돈을 벌려고 집을 나간 동생과 부모님께 도저히 그 이상 고생을 시켜드릴 수 없어

병에 걸린 자신이 차라리 죽길 바라며 밤마다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1965년 집안형편으로 인해 집을 나와 3개월 동안 걸식으로 방황하며 

오로지 죽을 생각만 했던 그를 도와준 이들은 그보다 나을 것 같은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29살, 다시 안동 일직으로 돌아와 마을 교회 종지기로 일하며 교회 문간방에서 홀로 생활했는데

떠돌이 생활 중에서도 많은 책을 읽은 그는 교회 문간방에 정착하면서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고난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생쥐, 개구리, 벌레, 별..... 등 주변의 것을 친구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1969년 그의첫 동화 주인공은 강아지 흰둥이가 싸 놓고 간 '똥'이었다.





'강아지똥'을 써서 제 1회 아동문학상을 수상하게되고 베스트셀러작가가 된 이후 돈도 벌게 되었지만

상여집을 수리한 작은 흙집에 살면서 검소한 생활 속에서 글을 쓰며 사는 것이 전부였다.





2007년 5월 17일, 권정생 선생이 세상을 떴을 때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동네 있어도 그 사람이 그리 유명한지 몰랐는데......

돈도 많이 벌었다는데 그리 가난했심더.....평생 옷 한벌로 지냈싱께......"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살던 곳 언덕에 뿌리고 집도 깨끗이 태워 없어 자연에게 돌려주세요."

선생은 마지막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는 남은 모든 것을 어린이들에게 돌려주었다.





선생이 생전에 남긴 글처럼 말년에 사시던 흙집은 불태워져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선생의 발자취를 남기고 그를 추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했던 분.

모든 어린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두루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동화로 표현했던 권정생 선생.

고난 속에서도 참된 인간성을 잃지않는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작은 흙집에서의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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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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