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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남쪽으로 약 40km,
운문댐 건설로 인해 새로 조성된 대천읍을 지나 금천면 신지리에 이르면
이차선 도로 양쪽에 예사스럽지 않은 고택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그중에서도 운강 고택은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1479~1560) 이 벼슬을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옛 서당터에 지어진 주택인데 영조 2년(1726) 박중응이 이집을 처음 지었다.
그후 순조 24년(1824)에 박시묵(朴時默)이 집을 중건하고
동창천 벼랑 위에는 별장 만화정을 새로 지었는데
운강 고택이란 이름은 바로 박시묵의 호 운강(雲岡)에서 이름한 것이다.
1912년에는 사랑과 안채를 크게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일반적인 다른 고택과 달리
다양한 보관 장소와 내외 분별에 신경을 쓴 설비와 공간, 주종을 명확히 구별해 놓은 화장실,
서당의 존재 등으로 합리적인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조선 후기의 상류 주택이다.
운강 고택은 길에서 바로 대문이 보이지 않고 대문으로 이르는 길이 ㄱ자로 꺾어져 있다.
골목과 대문이 정면으로 연결될 경우 찬 바람과 사악한 기운이 집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그 외문 끝에는 '운강고택(雲岡故宅)'이라 쓴 김충현(金忠顯)의 편액이 걸려 있다.
운강 박시묵 선생의 후손으로 운강 고택과 섬암 고택 등을 관리하고 계시는
퇴직 교사 출신의 박성규 선생님이 직접 안내해주시고 상세한 고택의 해설을 해 주셨다.
평소에는 관리 상의 이유로 인해 고택의 문을 잠궈 놓는 일이 많다고 한다.
대지가 1,770평이나 되는 이 고택은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집채의 동수가 모두 9동이나 되며
안 마당과 안채 후원·사랑채 후원의 공간을 넓고 여유있게 두는 등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주택이다.
대문채는 6간인데 왼쪽부터 외양간,곳간,문간방 2채,대문채,측간이다.
보통의 솟을대문집은 대문이 집의 중앙에 와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택은 대문간을 두번째 칸에 설치하여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둘러싼 건물 중 왼쪽은 큰 사랑채, 오른쪽은 중사랑채인데
큰 사랑채는 두벌대 기단을 써서 작은 사랑채보다 상위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지기방, 큰사랑방 2간, 대청 2간의 5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두방과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에는 들문이 달려서 여름에는 문을 다 들어올려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방문을 열지 않고도 바깥의 동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아담한 유리 조각을 문의 부분에 붙여 놓은 것이 눈에 뜨인다.
사랑 대청이 끝나는 뒷기둥에는 '내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각문이 하나 붙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선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이 일각문을 통해서 후원을 지나 안채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게 세심하게 꾸며져 있다.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사랑채와 중문 사이의 꽃담이다.
깨진 암수 기와를 활용하여 길상을 의미하는 吉자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등처럼 보이는 문양이 어우러져 있어 보는 이의 시선을 편안하게 유도한다.
근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아름다운 꽃담에도 여기저기 낙서를 해놓은 손길이 보인다.
어찌 가만히 버려두지 않고 무식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인지.....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대문에서 안으로 마주보이는 건물은 중사랑채인데 툇마루를 둔 2간의 온돌방과 마루가 있다.
서당으로 쓰이기도 했던 중사랑채의 왼쪽 1간은 누마루로서 서고라고 한다.
문 위에는 '백류원(百榴園)'이라 쓴 김충현의 편액이 걸려 있기에 이집에 석류나무가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중사랑의 후원이 원래의 백류원이었으나 지금은 석류나무가 없다고 한다.
중사랑채의 왼쪽에는 7간의 고방채가 있는데 과거에 수요가 많던 교통기구의 격납(格納)으로 쓰였다.
고방채의 제일 끝은 마굿간이니 요즘 같으면 차고라고 하겠는데 마굿간 뒤의 측간은 하인 전용이다.
사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마주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다른 분들의 답사 자료에서 본바로는 안채 마당에 둥글게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이 잘 다져져 있는 걸 보니 근래 보수하면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듯 하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2간 툇마루를 두었고 가운데 대청에도 문을 달아 놓았다.
안채의 대청문 역시 들문으로 되어 여름엔 시원하게 들어올릴 수 있게 된걸 보니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피부로 전해진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올라가지 마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는데
박성규 선생의 허락을 받아 들어가 안채의 구조를 살필 수가 있었다.
근래에 새로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문이며 벽지가 아주 산뜻하였다.
안방과 부엌이 접하는 부엌 귀퉁이에는 작은 찬마루를 두어 안방에서도 드나들 수 있게 문을 내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내부를 보니 4간이나 되는 아주 넓은 부엌은 집안 대소사 준비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웃방의 안쪽에도 간막이를 하여 반간의 찬광을 꾸며 놓았다.
우리나라의 가옥들이 방안에 수납 공간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집은 이렇듯 군데군데 수납공간이 많다.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대청 마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청은 3간 크기 정도이며 기제시(忌祭時)의 제청(祭廳)으로 쓰인다고 하고
대청의 뒤편에도 역시 간막이를 해서 '여름 찬광'을 마련하였다.
안방을 중심으로 찬마루, 찬광을 고루 분산시켜 다수화하여 곳곳이 수납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특히 툇마루 아래에는 두꺼운 널을 걸쳐서 여자들이 긴 치마를 입고 높은 툇마루에 오르기에 편리하도록 디딤돌을 대신해 놓았는데
곳곳에 이렇게 여성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눈에 뜨이는 주택이다.
동편에 가로 놓인 행랑채에는 부엌, 방, 마루, 고방,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에는 오랜 세월동안 디디고 빻아서 많이 닳아 버린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방앗간 뒤편에는 2간 측간을 두어 안쪽은 안방 마님용, 바깥쪽은 행랑 하인용으로 구분 사용케 하였다.
행랑채 부엌문 판자에 네모꼴을 크고 작게 뚫어 통풍이 잘 되게 한 점도 눈에 뜨인다.
안채의 남쪽에 가로 놓인 4간의 광채는 의류와 주류의 곡간이며 왼쪽에 세워진 6간의 간막이 없는 곳간은 곡간인데
엄청나게 큰 광채와 곡간은 이집의 살림살이를 짐작케 해주는 부분이다.
곡간의 남쪽에는 ㄱ자로 달아낸 뒷사랑이 있는데 이 뒷사랑과 곡간의 끝기둥 중간에 출입문을 내어
사랑채 후원에서 내정(內庭)에 직접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집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안채에 드나들기 쉽게 해놓은 비밀통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안채는 후원도 정말 넓다..거의 뒷동산이라 할 만큼...
후원에는 바위가 일곱개가 있어서 칠성 바위라고 부르는데 매우 신성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안채와 마주 보고 있는 협문으로 들어서면 중사랑 후원이 있고 왼쪽에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중사랑 후원에서 다시 사당문으로 들어선다.
규모가 상당히 큰 사당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는데 해설을 해주신 박선생님은
밀양 박씨 가문이 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훌륭한 가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더니
배우 박중훈도 박선생님의 사촌이어서 명절에는 고향에 내려온다고 살포시 덧붙이셨다.
사당 안에서 담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퇴계 이황 고택, 경주 최씨 고택.....여기저기서 고택들을 많이 답사해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운강 고택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넓은 저택이란 점에서 방문자를 놀라게 했고
무엇보다도 세심하게 관리, 보존되고 있어서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고택의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이 솟을대문을 드나드는 모든 분들에게 언제나
햇살의 따스한 기운처럼 경사로운 일이 넘쳐 나기를 기원하면서...
안 마당과 안채 후원·사랑채 후원의 공간을 넓고 여유있게 두는 등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주택이다.
대문채는 6간인데 왼쪽부터 외양간,곳간,문간방 2채,대문채,측간이다.
보통의 솟을대문집은 대문이 집의 중앙에 와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택은 대문간을 두번째 칸에 설치하여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둘러싼 건물 중 왼쪽은 큰 사랑채, 오른쪽은 중사랑채인데
큰 사랑채는 두벌대 기단을 써서 작은 사랑채보다 상위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지기방, 큰사랑방 2간, 대청 2간의 5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두방과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에는 들문이 달려서 여름에는 문을 다 들어올려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방문을 열지 않고도 바깥의 동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아담한 유리 조각을 문의 부분에 붙여 놓은 것이 눈에 뜨인다.
사랑 대청이 끝나는 뒷기둥에는 '내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각문이 하나 붙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선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이 일각문을 통해서 후원을 지나 안채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게 세심하게 꾸며져 있다.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사랑채와 중문 사이의 꽃담이다.
깨진 암수 기와를 활용하여 길상을 의미하는 吉자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등처럼 보이는 문양이 어우러져 있어 보는 이의 시선을 편안하게 유도한다.
근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아름다운 꽃담에도 여기저기 낙서를 해놓은 손길이 보인다.
어찌 가만히 버려두지 않고 무식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인지.....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대문에서 안으로 마주보이는 건물은 중사랑채인데 툇마루를 둔 2간의 온돌방과 마루가 있다.
서당으로 쓰이기도 했던 중사랑채의 왼쪽 1간은 누마루로서 서고라고 한다.
문 위에는 '백류원(百榴園)'이라 쓴 김충현의 편액이 걸려 있기에 이집에 석류나무가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중사랑의 후원이 원래의 백류원이었으나 지금은 석류나무가 없다고 한다.
중사랑채의 왼쪽에는 7간의 고방채가 있는데 과거에 수요가 많던 교통기구의 격납(格納)으로 쓰였다.
고방채의 제일 끝은 마굿간이니 요즘 같으면 차고라고 하겠는데 마굿간 뒤의 측간은 하인 전용이다.
사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마주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다른 분들의 답사 자료에서 본바로는 안채 마당에 둥글게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이 잘 다져져 있는 걸 보니 근래 보수하면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듯 하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2간 툇마루를 두었고 가운데 대청에도 문을 달아 놓았다.
안채의 대청문 역시 들문으로 되어 여름엔 시원하게 들어올릴 수 있게 된걸 보니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피부로 전해진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올라가지 마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는데
박성규 선생의 허락을 받아 들어가 안채의 구조를 살필 수가 있었다.
근래에 새로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문이며 벽지가 아주 산뜻하였다.
안방과 부엌이 접하는 부엌 귀퉁이에는 작은 찬마루를 두어 안방에서도 드나들 수 있게 문을 내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내부를 보니 4간이나 되는 아주 넓은 부엌은 집안 대소사 준비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웃방의 안쪽에도 간막이를 하여 반간의 찬광을 꾸며 놓았다.
우리나라의 가옥들이 방안에 수납 공간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집은 이렇듯 군데군데 수납공간이 많다.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대청 마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청은 3간 크기 정도이며 기제시(忌祭時)의 제청(祭廳)으로 쓰인다고 하고
대청의 뒤편에도 역시 간막이를 해서 '여름 찬광'을 마련하였다.
안방을 중심으로 찬마루, 찬광을 고루 분산시켜 다수화하여 곳곳이 수납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특히 툇마루 아래에는 두꺼운 널을 걸쳐서 여자들이 긴 치마를 입고 높은 툇마루에 오르기에 편리하도록 디딤돌을 대신해 놓았는데
곳곳에 이렇게 여성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눈에 뜨이는 주택이다.
동편에 가로 놓인 행랑채에는 부엌, 방, 마루, 고방,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에는 오랜 세월동안 디디고 빻아서 많이 닳아 버린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방앗간 뒤편에는 2간 측간을 두어 안쪽은 안방 마님용, 바깥쪽은 행랑 하인용으로 구분 사용케 하였다.
행랑채 부엌문 판자에 네모꼴을 크고 작게 뚫어 통풍이 잘 되게 한 점도 눈에 뜨인다.
안채의 남쪽에 가로 놓인 4간의 광채는 의류와 주류의 곡간이며 왼쪽에 세워진 6간의 간막이 없는 곳간은 곡간인데
엄청나게 큰 광채와 곡간은 이집의 살림살이를 짐작케 해주는 부분이다.
곡간의 남쪽에는 ㄱ자로 달아낸 뒷사랑이 있는데 이 뒷사랑과 곡간의 끝기둥 중간에 출입문을 내어
사랑채 후원에서 내정(內庭)에 직접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집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안채에 드나들기 쉽게 해놓은 비밀통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안채는 후원도 정말 넓다..거의 뒷동산이라 할 만큼...
후원에는 바위가 일곱개가 있어서 칠성 바위라고 부르는데 매우 신성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안채와 마주 보고 있는 협문으로 들어서면 중사랑 후원이 있고 왼쪽에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중사랑 후원에서 다시 사당문으로 들어선다.
규모가 상당히 큰 사당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는데 해설을 해주신 박선생님은
밀양 박씨 가문이 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훌륭한 가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더니
배우 박중훈도 박선생님의 사촌이어서 명절에는 고향에 내려온다고 살포시 덧붙이셨다.
사당 안에서 담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퇴계 이황 고택, 경주 최씨 고택.....여기저기서 고택들을 많이 답사해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운강 고택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넓은 저택이란 점에서 방문자를 놀라게 했고
무엇보다도 세심하게 관리, 보존되고 있어서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고택의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이 솟을대문을 드나드는 모든 분들에게 언제나
햇살의 따스한 기운처럼 경사로운 일이 넘쳐 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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