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산책........................../터키'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3.04.05 세상에서 제일 섹시한 춤 벨리댄스 47
  2. 2010.10.28 터키 여행 완소 가이드북 추천 37
  3. 2010.10.25 터키 요리, 그 환상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44
  4. 2010.10.14 공통점 많은 형제의 나라 터키와 한국 39
  5. 2010.10.11 터키에는 이방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37
  6. 2010.09.16 터키 국부 아타튀르크, 이런 지도자 어디 없나요? 46
  7. 2010.09.06 지름신 초강림하는 터키 그랜드 바자르 41
  8. 2010.09.02 터키/ 활력 넘치는 이스탄불 거리 풍경 44
  9. 2010.08.31 이스탄불 시내에서 본 '한국인'이란 간판 48
  10. 2010.08.19 1500년간 이스탄불을 지킨 아야소피아(성 소피아 성당) 55
  11. 2010.08.16 푸른 유리의 사원 블루모스크 29
  12. 2010.08.11 거대 전차경기장 유적 이스탄불 히포드롬 (술탄 아흐멧 광장) 35
  13. 2010.08.06 이스탄불 술탄아흐멧 광장의 여유만만 아침 풍경 46
  14. 2010.07.31 즐거운 눈속임 이스탄불 매직카펫쇼 44
  15. 2010.07.30 죽여주는 그맛 ! 터키 아이스크림 '돈두르마스' 71
  16. 2010.07.29 다이어트 시켜주는 터키 길거리 체중계 77
  17. 2010.07.22 무한감동이 밀려오는 도시 이스탄불! 109
  18. 2010.07.20 다리 색깔로 달라지는 터키 그리스간 국경 38
  19. 2010.04.29 밤이 더욱 아름다운 도시 터키 쿠샤다시 42
  20. 2010.01.21 터키 에베소의 사도요한 기념교회와 아르테미스 신전터(아데미 신전) 50
  21. 2010.01.14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 터키 에베소 29
  22. 2010.01.10 유일하게 칭찬받은 서머나의 폴리캅 교회 38
  23. 2010.01.06 터키 페르가몬의 붉은 성당 크즐 아블루와 화려한 고대 유적 56
  24. 2009.12.22 눈 부릅뜨고 노려보는 무서운 나무 58
  25. 2009.12.16 나이키 로고의 유래가 된 승리의 여신 니케 42
  26. 2009.12.14 세계 최초의 19금 광고판? / 터키 에베소 64
  27. 2009.12.13 두아디라 교회터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20
  28. 2009.12.12 미다스가 손 씻은 곳? 황금 도시 터키 사르디스 19
  29. 2009.12.06 라오디게아(데니즐리)는 왜 미지근했나? 36
  30. 2009.12.01 터키 빌라델비아 성요한교회와 이슬람사원 37


터키 여행자가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 것을 하나 들라면 바로 섹시하고 요염한 춤으로 알려진 벨리 댄스가 아닐까.....벨리 댄스는 고대 이집트 벽화에 춤추는 모습이 묘사되어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몸통(belly)과 허리를 흔들거나 비트는 춤은 사막지대에 사는 민족에게 특히 두드러지는데 뛰거나 발장단을 칠 만큼 단단한 지면이 아닌 모래땅에서는 발이나 손의 동작이 제한되므로 발밑을 고정시키고 몸통의 동작에 중점을 두는 춤을 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집트를 비롯한 중근동 각지에서 흔하게 벨리 댄스를 추어왔었지만 이슬람의 전파와 함께 여성의 노출도가 많은 춤이 경원시되면서 차차 그 화려함을 잃어가게 되었는데 비교적 계율이 엄격하지 않은 터키는 오스만 시대에 전래된 이후로 벨리 댄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전에는 사실 벨리 댄스를 직업으로 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시베르 잔'같은 가수들이 벨리 댄스를 통해 스타덤에 오르기도 함으로써 현재는 벨리 댄서 지망자들이 많아졌다고.....

 

 

터키에서도 유명한 관광 온천지역인 파묵칼레의 호텔 히에라폴리스에서는 투숙객들을 위한 벨리 댄스 공연이 저녁마다 펼쳐진다. 호첼 정원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아라베스크 풍의 음악과 함께 검은 옷을 입은 댄서가 무대로 등장하였는데 신비감을 주기 위해서일까...? 머리를 검은 두건으로 가리고 입장했다.

잠시 두건을 쓴 채 춤을 추다가 두건을 벗는데 보니 예상보다 미모가 돋보이는 벨리 댄서다. 영화나 TV에서 본 벨리 댄서들은 대부분 살집이 좀 있고 허리가  튼실한 여자들이던데 이 벨리댄서는 허리도 날씬하고 아랫배도 거의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슴이 풍만하고 키까지 큰 아주 바람직한 몸매와 용모의 소유자였다. 

 

 

요염한 몸 동작, 배꼽을 드러낸 아슬아슬한 복장을 입고 골반 아래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벨리댄스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춤이 아닐까? 무대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멋진 춤을 선보이는 벨리 댄서는 춤추는 내내 관중석을 보고 방긋방긋 웃어주기까지 하니 남자 관객들의 마음이 설레이지 않을 수 없다. 양손에 케스터네츠를 들고 아라베스크 음악에 맞춰 허리를 돌리며 춤을 추는데 우리나라의 아마츄어 벨리 댄서들의 허리만 열심히 돌려대던 댄스와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이 댄서는 완전 몸이 각각의 부위 별로 따로 노는 것이었다. 목을 흔들면 몸의 다른 부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만 왔다 갔다 하고
가슴을 흔들면 다른 부분은 가만히 둔 채 가슴만 흔들고 배를 흔들면 배 아래 위는 가만히 있고 배만 신기하게 흔들어지는 것이었다.

 

 

벨리 댄스의 절정은 이 댄서의 가슴 흔들기.....신체의 모든 부분은 움직이지 않고 가슴만 요동치며 움직이는데 더 놀라운 것은 양쪽 가슴이 상.하.좌.우로 각각 흔들어지는 것이다. 가슴을 따로 흔드는 이 묘기에서 남자 관객들의 괴성과 함께 우뢰같은 박수가 쏟아졌다...는건 두말하면 잔소리...^^

 

 

무대에서의 공연은 다 끝나고 이제 관객들에게로 댄서가 내려왔다. 이제 부터가 관객 서비스의 시작.....^^ 주로 남자 손님들이 많은 테이블을 찾아가 가슴 흔들기....배꼽 흔들기 들의 기교를 선보인다. 그러면 관객은 팁을 주는데 이 댄서는 받은 팁을 브라 안에 잘 갈무리 해두었다.(주머니가 없으니 가장 안전한 곳인 듯 하다..^^)

 

 

팁을 많이 받은 벨리 댄서......더욱 흥이 나서 케스터네츠를 흔들며 서비스로 배꼽 흔들기도 추가해서 관객을 즐겁게 하는데 남자들은 즐거워 죽을 지경인데 반해 동행인 여자들은 겉으로는 웃고 있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매우 띠꺼워하기도 하고 어떤 여자들은 벨리 댄서가 자기 앞으로 올 때에 남편의 손을 억지로 끌고 일어나 자리를 뜨기도 했다.


벨리 댄서의 독무가 있은 후에는 무대 위로 관객을 불러내었는데 서양과 동양 남녀가 각각 5명씩 불려나왔다. 그런데 서양 여자나 남자들은 제 나름대로 열심히 춤을 추는데 반해 동양인들은 쮸삣쮸삣하면서 수줍음을 타느라고 엉덩이 한번 제대로 못 흔들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유럽인,미국인,동양인.......한 사람씩 벨리 댄스를 흉내 낼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진 다음 제일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불러내었는데 터키 남자인 듯 했다. 조명이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깨까지 길러 늘어뜨린 머리, 적당한 콧수염, 탄탄한 근육의 20대 후반의 멋진 꽃미남이 앞으로 나오자 여인네들의 눈이 반짝이기 사작했다. 

이 남자를 '핫산'이라고 부르겠는데(핫산은 우리 나라로 치면 '철수'정도의 이름?) 이 핫산의 춤 솜씨는 우리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벨리 댄서가 어떤 동작을 하던 멋지게 따라할 뿐만 아니라 아라베스크 음악에 맞춰 너무나 섹시하고도 살짝 끈적한 댄스 동작을 우리에게 선보여주었다. 우리 나라는 남자 댄스 가수의 춤이 섹시함 보단 파워풀한 것을 중시하는데 비해 터키의 뮤비를 보면 남자의 춤도 어찌 그리 섹시한지.....핥을 듯 쳐다보며 허리를 꼬는 춤이 거의 여자의 춤이나 매 한가지인데.....이 핫산의 춤도 마치 그것과 같아서 여자 관객들의 시선을 한 눈에 모아버렸다. 

이 핫산의 벨리 댄스는 갈수록 절정에 달하여 음악에 몸을 싣고 흔들다 더워진(?) 이 남자....나중엔 웃도리까지 벗어 던졌는데 그 몸매가 가히 예술.....(몸이 그 정도니 과감하게 옷을 벗지.....^^ ) 나중엔 뒤로 허리를 완전히 꺾어서 춤추다  거의 바닥에 누워서 섹시한 동작의 춤을 추기까지했는데 그 때에 여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호텔 정원을 떠나 보낼 듯하였다. 환상의 춤 솜씨를 선보인 후 벨리 댄서와 함께 손 잡고 마지막 인사를 한 핫산.....관중들의 우뢰같은 박수와 함께  관중석으로 퇴장했는데 저 남자가 도대체 어디서 온 남자야....하면서 여자들의 웅성거림이 한동안 계속되었다는........^^  


이와 같이 터키에서 벨리 댄스를 관람하는 도중에는 반드시 관중을 불러내어 함께 춤추는 이벤트가 벌어지는데 터키에서는 벨리 댄스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며 젊은이들이 가는 디스코텍에서나 결혼식의 축하연 자리에서도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면 터키 남성들은 즉시 춤추러 나오곤 한다.

이후에 혹시 터키에서 가셔서 벨리 댄스를 관람하실 때에 댄서가 여러분을 지목하여 부른다면 어떻게 하실지....혹시 공연 때에 '하디.하디(자,자)' 라는 권유의 말을 하며 여러분에게 춤추기를 권유하면 망설이지 말고 무대로 올라가서 춤을 추어 보심이 어떠한지......
당최 춤을 출줄 모르신다고.....? 당신이 댄서의 벨리 댄스 흉내를 내든지 자신만의 막춤을 추든지 어떤 춤을 추더라도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엄청난 환호와 갈채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혼자 노는 것이 아니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즐기는 것. 그것이 터키식 놀이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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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재해 왔던 터키 여행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터키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을 몇 권 추천하고자 한다.

직접 현지를 방문한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이야 말해 무엇하리오만 직접 여행을 가지 못하더라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는 지식이 또한 쏠쏠하지 않는가..... 아래에 열거한 책들은 터키 여행기를 쓸 때에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준 책이라 특별히 추천할 뿐  출판사 측과는 눈꼽 만큼도 이해 관계가 얽혀 있지 않았음을 밝혀 두면서....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인 '인사이드 가이드'와 '디스커버리 채널'이 공동 작업한 '인사이드 가이드 시리즈'의 '터키'편.
터키인들의 삶과 문화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문가들의 자세한 소개글과 함께 터키의 매력적인 명소와 호텔, 레스토랑, 스포츠, 축제 등 여러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유적지마다 얽혀 있는 역사적 사실,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의 상세한 소개, 세밀한 현지 지도 탑재가 돋보이며 유명 사진 작가들의 작품성이 뛰어난 사진을 보는 맛이 압권인 책이다.

 

 

야심만만 세계 문화 정복 프로젝트 '큐리어스 시리즈' 제10권. 세계로 향한 지적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문화 체험 가이드북 <터키>편이다. 터키의 역사와 문화에서 사람들의 특성, 언어와 예절, 여행, 음식과 대중문화, 정착과 사업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터키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여행, 유학, 사업,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친절한 안내서이다.
 

 

터키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은 '작품' 수준의 사진이 실려 있어서 보는 사람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하는 책. 개인적으로는 터키인의 생활이나 국민성을 탐색할 때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다. 

 

 

테마가 있는 세계 여행 '터키'편. 터키의 교통정보, 숙박, 생활정보, 일반 상식, 관광명소, 요리에서 선물 고르기까지 여행을 떠났을 때 현지에서 필요한 정보를 망라하고 있다.
  

 

잡지 형식으로 많은 현장 사진을 함께 담고 있고 호텔과 식당의 주소와 연락처도 세세히 수록 되어 있다.  가볍지만 알찬 내용이라서 가이드 북으로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우리 실정에 맞도록 제작한 해외 여행 가이드 북 '세계를 간다' 제22권. 터키여행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해외여행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현지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여행 정보를 정리하였다.  

 

 

관광, 교통, 식사, 숙박 등 필수적인 여행 정보를 가득 담았으며, 해당 지역의 사회, 역사, 문화, 풍속 등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최신 개정판이 새로 업데이트 되었다고 하며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서인지 사진의 사이즈가 너무 작은게 옥의 티.....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은 터키의 문화와 정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읽기 쉽게 풀어낸 책이다. 현재의 모습을 뒷받침해주는 다양한 역사 이야기와 1만 년을 통해 보는 신화,성서의 무대를 접할 수 있다. 또한 역사와 유적 이야기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외대 터키어과를 나와 터키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터키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저자 이희철은 20년간 터키 연구에 몰구하여 터키의 정치뿐만 아니라 터키의 문화·역사에 남다른 정열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터키에 살면서 피부로 느낀 것을 서술하고 있어서  정확하고 생동감 있는 터키의 모습을 전해준다.

 

 

위에 소개한 책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의 저자 이희철이 20년 이상 터키에 살며 연구와 답사를 한 경험을 토대로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는 칭송을 받는 이스탄불의 문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풀어내고 있다.   

 

 

서양의 비잔틴 제국과 동양의 오스만 제국, 두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조화롭게 지니고 있는 역사의 도시인 이스탄불을 찾는 사람들이 유적지를 문화사적인 차원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문화 등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격동의 도시 '이스탄불'을 소개하는 책. 인류의 역사를 담은 유적들 이야기와 도시민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인 이스탄불의 곳곳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이스탄불이 탄생하기까지의 굴곡의 역사를 소개한다. 또한 동양과 서양의 각기 다른 모습들이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이스탄불을 통해 나와 다른 모습과 생각들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 글로벌시대에 적합한 삶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 이희수 교수는 이스탄불을 너무나 사랑하여 무려 85회를 방문하였다 한다. 따라서 그가 들려주는 이스탄불 이야기에는 인류의 역사를 담은 유적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도시민들의 생활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두 터키 홀릭이 터키 곳곳을 4년 간 누비며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터키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여행기록이다. 터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음까지 사로잡혀 바람처럼 자유롭게 터키 곳곳을 떠돌았다는 두 저자가  터키 사람들과 섞이면서 만들어낸 예측불허의 에피소드가 사진과 함께 맛깔스럽게 펼쳐진다.
 

 

하지만 첨부한 사진의 사이즈가 작고 사진의 선명도가 떨어지는 점과 개인의 체험기 위주라는 점에서 여행 지침서로 쓰기엔 추천할만 하지는 않다. 

 

 

장편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인데 1, 2권으로 되어 있다. 16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통해 동.서양 문명의 충돌과 화해의 역사를 조명하는 추리 소설.   

 

 

이야기는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외곽에 버려진 우물 속에서 시작되는데 우물 바닥에 죽어 누워 있는 시체 '엘레강스'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나흘 전에 살해당해 우물 바닥에 던져졌는지를 이야기한다. 세밀화가들 사이의 질투와 긴장감, 낯선 그림에 대한 종교적인 두려움과 그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은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패배감과 함께 세큐레와 카라의 불운한 사랑 이야기에 맞물려 전개된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는 인류 문화 유산을 총 정리해서 보여주는 명저 중의 명저.
그 중 '오스만의 화려한 황제 슐레이만'은 14세기 비잔틴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져 1923년 터키공화국이 건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던 대제국인 오스만 제국의 가장 화려한 팽창과 번영을 이룩했던 황제 슐레이만의 치적과 생애, 예술세계, 당시의 사회상과 역사를 원색의 사진, 삽화로 조명한 주옥같은 책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 당시 세밀화와 톱카프 궁전 보물 등의 방대한 사진 자료를 보는 맛이 쏠쏠한 책. 문고판이라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와 저렴한 가격도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의 장점이다.

 

 

이스탄불 소재 유적에 관해 가장 자세한 해설과 사진이 나와 있는 책. 아쉽게도 현지 터키 출판사에서 한국어로 출판한 책이라 이스탄불의 유적지 기념품 가게에서만 구할 수 있다.
 

 

'하기야 소피아'에 대한 설명만도 13쪽에 걸쳐 나와 있을  정도로 이스탄불의 유적을 상세하게 조명한 책. 현지에 여행을 가신다면 꼬옥 사서 소장하시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터키 여행 관련 도서 중 몇권을 소개해 드렸다. 혹, 이 중 한권이라도 읽으실 마음이 나셨다면 터키로 떠날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다 끝난 듯 하다.

자.....그럼 우리 함께 신화의 나라, 환상의 나라, 신과 인간이 함께 사랑한 땅 터키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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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요리는 프랑스, 중국 요리와 더불어 세계 3대 요리로 꼽힌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에서는
궁중 요리사들이
고대 로마 미식가들의 식도락과 비견되는 사치스러운 요리법을 개발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터키에서 물고기와 닭,고기,과일,야채 등 음식 재료가 풍부하게 생산되고 고대 아나톨리아에 뿌리내린 수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터키는 특히 야채 요리가 많이 발달하여 우리나라에는 잘 쓰이지 않는 가지 요리만도 5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요리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요리가 대부분이지만 모든 것이 여유로운 터키인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요리 자체를 즐긴다.

터키인의 주식은 빵과 고기류의 음식으로 거의 유럽 식단에 가깝고 풀 코스로는 수프, 샐러드, 메제(에피타이저), 주요리, 후식, 음료....의 순서로 나오는데 지방에 있는 아주 조그만 식당에 가더라도 규모와 서비스의 질은 다르겠지만 정식 코스를 밟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터키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수프 중에서 렌틸콩 스프(메르메지크 쵸르바스, Mercimek Çorbasi )는 터키의 된장국이라고 할 만큼 대중적인 수프인데  지방과 식당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렌틸콩 수프(Mercimek Çorbasi)는 우리나라 녹두죽과 맛이 비슷한데 함께 곁들여져 나온 레몬 즙을 뿌려서 먹으면 더 상큼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얇은 반죽 위에 간단한 재료를 얹어서 구운 라흐마준(Lahmacun)이라는 터키식 피자는 식사라기 보다는 터키의 패스트 푸드 감각의 음식이다. 코스 요리에서는 주요리가 나올 때까지 허기를 다스린다. 라흐마준(Lahmacun)의 맛은 피자에 못지 않고 크기 또한 상당히 커서 허기를 다스리다가 배부를 지경이다.

 


렌틸콩 스프와 함께 샐러드(Salatasi)가 나오는데 정육면체로 썬 토마토와 양파, 오이, 고추,
특이하고 향긋한 허브들을 이용하여 만든
양치기 샐러드(초반 살라타스, Çoban Salatasi))가 가장 대중적인 샐러드이다.

 

 

초반 살라타스와 함께 바게트같이 생긴 에크멕(Ekmek)을 렌틸콩 수프에 담궈먹으면 훨씬 부드럽고 환상적인 맛을 즐길 수 있다.

 

 

어느 식당에 가더라도 꼭 나오는 초반 살라타스와 메르지메크 초르바스는 터키의 국민적인 음식이다.  수프와 샐러드 다음으로 나오는 매제(Meze)는 전채(에피타이저)에 해당하는데 메제에는 요쿠르트, 가지 샐러드,토마토 다진 요리,작두콩 삶은 요리,피망 도르마....등 유제품을 사용한 것으로 부터 채소와 콩을 삶은 것까지 수십 가지의 종류가 있어서 매제로 메인 요리를 대신하는 사람도 있다고....... 

 

 

그리고 메인 요리의 순서가 되는데 터키에는 고기 요리가 주류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바다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생선 요리도 일품이다. 고기 요리는 잘 알려진 케밥이 유명하지만 그 밖에도 쿄프테, 피데, 돌마, 뵈레이, 티바. 사르마 .....등 다채로운 메뉴가 많다. 이슬람 교도가 많다보니 돼지 고기는 잘 사용하지 않고 양고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도 잘 아는 터키의 요리, 시슈 케밥(Şiş Kebab)은 쇠꼬챙이에 끼워 화덕에 돌려가며 구운 후 접시에 담아서 나온다. 


 

되네르 케밥(Döner Kebabi)은 터키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음식 중 하나인데 양 한 마리를 잡아 살코기의 전 부위를 얇고 널따랗게 썰어서 마늘,양파즙,박하,각종 향료로 된 양념을 뿌려 하루 저녁을 재운다. 그 다음 날 회전판 가운데 일자로 세워진 쇠꼬챙이에 차곡차곡 고기를 끼워 둥글게 원통형으로 쌓아올려 서서히 돌려가며 굽는다. 표면이 익으면 익은 부분을 가늘고 긴 칼로 얇게 잘라내어 얇고 둥글넙적한 빵인 피데에 끼워먹거나 밥에 얹어 토마토 등의 야채와 함께 먹는다. 고기 몇 점에 양 한 마리의 모든 부위가 담겨 있는 셈이어서 부드럽고 맛이 환상이다.

 

 

괴프테(Köftecisi)는 케밥과 함꼐 터키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써 양고기를 다져 양념한 후 둥글넙적하게 빚어 화덕에 굽는 요리로 마치 우리나라 떡갈비와 비슷하다.

 

 

호텔이 아니더라도 터키의 대부분의 레스토랑 식탁에는 테이블보가 깔려져있는데 일반 가정에서도 식사 때에는 꼭 테이블보를 덮은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리넨으로 된 비싼 테이블보로부터 손뜨게로 정교하게 짠 예쁜 레이스 테이블보를 파는 가게를 많이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급 호텔의 부페 레스토랑에서
  테이블보를 깔지 않고
그냥 식탁 위에 종이 매트 한 장이나 작은 테이블 매트 한 장 깔고 음식을 주는 것을 여러번 본 적이 있는지라 그들의 정갈한 테이블보가 새삼 정성스럽게 느껴졌다.

 

 

터키 요리에는 또한 빵이 빠질 수 없는데 이들은 빵을 신성시한다고 할 만큼 중요하게 여긴다. 식사 할 때 아이들이 빵을 조금이라도 남겨선 안 되며 남은 빵이 있으면 버리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만약 실수로 빵 조각이 땅에 떨어지면 그 빵을 주워 입맞춤을 하고 경의의 표시로 이마에 가져다댄다.

 

 

터키의 대표적인 빵은 에크멕(Ekmek)으로 일반적으로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무한정 공급된다. 프랑스 바게트와 모양과 맛이 비슷하지만 길쭉한 형태의 바게트에 비해 타원형의 럭비공 모양에 가깝다. 주요리류가 고기류이기 때문에 대부분 이 빵에 고기를 싸서 먹는다.

 

 

에크멕과 함께 터키인의 대중적인 빵은 시미트(Simit)이다.  동그란 고리 모양의 빵으로 위에 참깨가 뿌려져 있고 부드러운 에크멕과는 달리 조금 딱딱한 편이다. 참깨가 많이 묻어 있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며 양이 상당하여 배고플 때 먹으면 그만이다. 
터키 빵 중에서 한국 사람의 입맛에 잘 맞는 빵에는 발론 피데(Balon pide)가 있다. 소금만 넣어서 반죽해서 전통의 화덕에 구운 빵 발론 피데(Balon pide)를 한국사람들은  걸레빵이라고 부르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속이 빈 공갈빵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중동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빵이다.

 

 

시골에는 아직도 이런 전통 화덕에서 구운 빵을 파는데 그 맛은 정말 환상적이다.

 

 

그리고 터키 고유의 발효 식품인 투루슈(tursusu,터키식 짠지)는 반찬 역할을 한다. 피클과 비슷한 오이 투루슈나 고추 장아찌와 비슷한 비베르 투루슈는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그리고 디저트는 대부분 살인적으로 달콤한  바클라바(파이를 벌꿀에 잰 과자), 과일 푸딩, ,여러가지 신선한 제철 과일등을 먹는다.
고기를 주식으로 사용하는 민족이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달콤한 과자를 후식으로 먹는 이유는 대부분 단 맛이 느끼함을 없애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터키의 풍부한 일조량으로 인해 모든 과일은 과일은 아주 싸고 신선하며 당도가 높아서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공해가 없으니 그다지 씻을 필요도 없는지라 포도도 껍질 채 다 먹는다.

 

 

시골에서는 과일 장수가 추를 사용한 저울로 무게를 재어서 판다. 과일이나 야채가 흔해서 박스 채로 사도 너무나 싼데 터키의 과일 가게에 가서 과일을 낱개로 사려고 하면 주인이 놀라서 쳐다 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음료가 빠질 수 없다. 다른 이슬람국가는 음주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반해 터키는 이슬람국가인데도 술에 대해서 제재가 없고 매우 관대하다. 술은 어디서나 간단히 구입할 수 있고 값도 싸다. 터키의 국민주인 라크(Raki),지방색이 풍부한 각 지방의 와인,맥주(Bira).....등 다양한 술을 다양한 요리와 함께 즐긴다.

유명한 '아이란(Ayran)'은 요쿠르트를 물에 희석하여 얼음을 띄워서 마시는 음료이다.  불가리아의 한 장수 마을이 요쿠르트로 유명해 진 적이 있는데 알고보면 그 마을은 터키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니 터키는 그야말로 요구르트의 종주국이랄수 있다.
그만큼 유목민의 후손인 터키인들에게 요쿠르트는 중요한 식재료이다. 이 요쿠르트는 신 맛이 나므로 꿀이나 잼을 타서 먹는 것이 좋다. 집에서 터키식 요쿠르트를 만들어 먹어 보면 금방 중독이 되어 시중에서 파는 요쿠르트는 멀리 하게 되기도 한다.

터키의 음료 중의 대표적인 것은 뭐니뭐니 해도 차이(Çay)일 듯.....차이는 터키에서 마시는 홍차인데 터키 사람들는 차이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여  차이와 함께 하루가 끝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차이를 빼놓고는 터키를 논할 수 없다. 차이는 중앙 부분이 약간 좁은 '차이파르다'라는 작은 컵으로 마시는게 일반적이며 여기에 옆에 곁들인 각설탕을 넣어서 먹는게 터키식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차이에 대한 추억담이 한 둘 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주 진하고 독특한 맛이 나는 터키 커피(Türk Kahvesi)도 환상의 맛! 커피 가루와 설탕과 물을 함께 끓여 거르지 않고 컵에 담은 후 가루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마시는데  다 마시면 잔 아래의 커피 가루가 입에 들어오므로 다 마시지 않고 아래에 찌꺼기를 조금 남겨 차 받침을 덮어 거꾸로 세운 후 컵에 생기는 무늬로 그날의 운세를 점친다. 터키인들이 커피잔 바닥에 생긴 무늬를 얼마나 빨리 풀이해내는지 놀랄 정도라고.......

                                                                                    

 

음식에 관한 한 터키인들은 대단히 창의적이어서 재료만 있으면 무슨 음식이든 잘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Hi~Seoul'이나  'Dynamic Korea' 처럼 터키를 상징하는 슬로건은 'Mosaic Turkey'인데 터키 음식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내려온 터키 전통 요리에 발칸 반도,아라비아,북부 아프리카....등  여러 정복지의 음식을 <혼합하여 재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환상적인 터키 음식으로 인해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되었는데 터키 음식이 더욱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우리 나라 사람의 입에도 그 간과 맛이 맞는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에크멕을 메르지메크 초르바스에 찍어먹는 날이 다시 오길 간절히 바라면서.....간단하나마 터키 음식 소개를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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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구 상의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한 점이 있겠지만
약 8,000km의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과 터키는 흡사한점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유사성을 들 수 있는데 터키어와 우리 말은
같은 우알타이어족에 속하여
문장 구성,문법,모음 조화 등이 우리말과 거의 비슷하고
리 말과 어순도 꼭 같이  S+O+V 의 순이다.

 터키와 우리나라 사람은 언어가 비슷하여서 그런지
사고 방식 면에서 일면 상통하는 점이 상당히 많고 감정의 표현 방법도 비슷하며
전통적인 관습이나 살아가는 방식에서 우리와 유사한 점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길거리에서 'SU'라고 쓰인 트럭을 보았는데 물어보니 놀랍게도  'SU'는 터키어로 "물(水)'이란 뜻이란다.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이라는게 새삼 실감나는 부분이었다.

 

터키를 찾는 사람들은 상점이나 백화점마다 유명 브랜드가 쫙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터키는 개방된 시장이어서 샤넬의 최신 디자인에서부터 각종 생활 용품까지 수입 안되는 것이 없는 곳이다.
우리들처럼 터키의 젊은이들도 나이키,아이다스,리바이스 등 
유명 상표의 옷을 입고 친구들 앞에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곳도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짝퉁 브랜드가 판을 친다.
 

 

 

 터키 사람들의 청결 의식은 대단하여 여자들은 하루 종일 집안을 쓸고 닦는데 시간을 들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해 열심히 자기 집을 쓸어서는 밖으로 휙...갖다 버리곤 한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터키의 거리에는 노점상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참으로 다양한 물건을 다양한 방법으로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노점상은 불법이지만 길에는 노점으로 넘쳐나고
아침부터 밤중까지 거리에서는 소리 높여 물건을 파는 여러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온다.
터키의 노점상들은 경찰이 나타나면 재빨리 몸을 피하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목청도 좋아야 한다고......
 

 

이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터키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매우 친절하다.
필자가 탔던 차가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길을 지날 때에 아무렇게나 주차해 놓은 승용차 때문에
전진도 후진도 하지 못하고 난감하게 끼어 었었는데 어디선가 한 
청년이 나타나
양 옆에 있는 가게들을 이리저리 다니며 운전자를 불러내어 차를 빼내게 하고
차 앞에 서서 "앞으로...뒤로...좀 더..."를 크게 외치며 차를 빼내게 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청년은 운전자가 고맙다는 말도 하기 전에 유유자적 자기 갈 길을 가버리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와 같이 터키인들은 친절이 넘치는데
시골 같은데서 누가 길을 물으면
자기 하던 일을 다 제쳐 놓고 아예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본 트럭 위의 생수병이 너무나 친근하다.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에선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돗물을 음료수로 먹지 않기 때문에  
물 배달 업체에 신청하면
일주일에 한번씩 커다란 물통을 배달해 주고 이렇게 빈 통을 수거해 간다.
신선한 물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즉가하는 추세라서
이스탄불 곳곳에는 주유소와 비슷한 시설의 물 판매소도 등장했을 정도라고 한다. 

 

 

멀리 갈라타 타워가 보이고 그 앞에 샛노란 택시들이 지나가고 있다.
택시를 잡을 때에는 우리처럼 손을 들면 되고 요금은 미터기로 계산하며 야간 역시 할증료가 있다.
택시 요금을 바가지 씌우는 일은 거의 없으나 운전자가 목적지를 정확히 아는지는 미리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고...... 

 

 

한국에 몇년 거주했던 한 미국인이 '한국에서 차를 몰면서 살아남는 재주'라는 글을 한 잡지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스위스의 어떤 자동차 경주 선수 또한 터키에서의 운전 경험은 '놀라운 일로 가득 찬 흥미진진한 경험'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다반사인 끼어들기, 추월, 급브레이크,경적 울리기......이런 것 또한 이스탄불에선 보통의 일과라고.....
 

 

 

이스탄불의 도로는 언제나 차로 가득 차서 차간 거리같은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운전자들은 모두들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서둘러 차를 몰며
엄지 손가락은 언제나 경적을 울릴 태세를 취하고 있다. 
경적을 울리는 방식도 우리와 비슷한데 짧게 한번 울리면 경고나 감사의 의미, 길고 끈질기게 울리는것은 강한 비난의 뜻이란다.
터키에서 운전하려면 이 모든 경고와 비난의 소음과 언제든 브레이크를 밟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운전 습관에서 느낄 수 있듯이 터키 사람들은 한국사람처럼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 편이라
조용하다가도 갑자기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핏대를 올리며 싸운다고 한다.
필자는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보딩을 기다리다가 항공사 직원과 승객이 다투는(!) 현장을 보게 되었는데
큰 소리로 말다툼을 하다가 심하게 흥
분한 항공사 직원이
갑자기 데스크를 발로 밟고 올라 붕~ 날아서 승객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구경 중에 최고가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했던가....?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둘러서서 보는데
항공사 직원이 승객을 때리며 싸우는 현장을 보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터키인들은 이렇게 주먹다짐을 하고 싸워도 술 한잔 마시고는 쉽게 용서하고 쉽게 잊어버린다고 한다.  

 

 

블루 모스크 부속 아라스타 바자르 옆 노천 카페에서 흥겨운 민속 음악이 흘러나오기에 가보니
남자들 여섯명이 서로 어깨를 잡고 일렬로 서서 즐거운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춤은
 중앙 아나톨리아의 민속춤으로 '할라이 댄스'라고 부른단다.
얼마나 신나고도 힘차게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아가는지
노천카페에 앉은 필자도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같이 끼여 춤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터키 사람들은 우리처럼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특히 터키의 젊은이들은 대중 음악에 열광하는데
터키 팝은 음악은 터키 풍이면서도 악기나 비트는 세련된 유럽식이다.
시장,레스토랑,버스 안 어디서나 노래를 틀어놓아 사방에서 열정적인 노래 소리가 들려오며
젊은 운전사가 차를 몰고 지나가면 그 안에서 들려오는 강한 비트의 음악은 도로의 콘크리트 바닥이 울릴 정도이다.
 
  
                    터키의 뮤직 비디오에는 19금으로 분류해야하지 않나..생각될 만큼 야하고 섹시한 춤이 난무하는데 
           
 여자의 춤은 물론 남자의 춤도 섹시하게 허리를 돌리며 추는 춤이 대부분이어서 이 곳이 정말 국민의 95%가 무슬림인 나라가 맞나....하고 의심이 드는 신기한 나라이다. 

이슬람에선 음악과 춤을 금한다.
   하지만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의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세속주의 채택으로 인해
  터키는 법률상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비교적 자유로운 이슬람국가이다.

                                           

오늘날 터키 지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종교적 억압과는 거리가 먼 나라를 발견하게 되는데 
 터키인들은 단체 관광을 가는 버스 안에서도 통로에서 춤을 추며 흥겹게 노래 부른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광버스춤을 추는 나라>라니.....정말 형제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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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는 이방인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고 한다.


이방인 혐오증이나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종족으로 섞인 터키 땅,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교차하고


융화되는 변화 속에서 사는 튀르키쉬(터키 사람)들은

누가 토종인지...누가 이방인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심지어 터키 땅에서 터키 말만 하면 다 튀르키쉬라고 느낄 정도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이희철 지음 '터키' 참조)

현대 복장을 한 여성과 히잡을 쓴 여성이 성 소피아 사원 입장료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현대 복장을 한 여성이 히잡을 쓴 여성에게 이 줄이 입장표를 사는 줄인지 아닌지를 물어본다.

       히잡 여성:(놀라며)아니..터키 말을 아세요?

       현대 여성:(당황한 듯)예...터키 사람이에요.

       히잡 여성:아~~ 전혀 터키 사람같지 않네요..외국인인줄 알았어요.

       현대 여성:당신도 전혀 터키 사람 같지 않네요. 아랍 사람이줄 알았어요.

      히잡 여성:엠함둘라(신에 감사하다는 뜻) 우리는 다 무슬림이고 터키 사람이죠..뭐....

      현대 여성:맞아요.  



토종이 이방인이 될 수 있고 이방인이 토종이 될 수 있는 것이 터키다.



눈이 작고 골격이 작은 우리 나라 사람도 터키에 가서 터키 말을 구사하면서

투르키쉬와 가장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도 한국 사람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타타르'라고 하면 의심들 하지 않고 믿는다고 한다. 
 


튀르키쉬의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방인이 '메르하바(안녕하세요)'란 말 한 마디만 해도 그들은 깜짝 놀라며

그들이 큰 일이라도해낸 것처럼 좋아하며 도와줄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 

 


그들은 경제적 여유와는 상관없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 손님을 접대한다.



아나톨리아(터키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아시아 지역을 말한다.)에선

여행자가 아무 집에서나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면  묵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방문객을 그렇게나 반기는 것은 낯선 방문객이 신이 보낸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터키의 가정에서 손님이 물을 청하면 받침 접시 위에 예쁜 수가 놓인 천이나 레이스로 된 컵받침을 받쳐서 물을 내오며

손님이 물을 마시는 동안 안주인은 받침 접시를 들고 기다린다.

이런 일은 손님 접대에 대한 터키인의 정성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수년간의 인구 이동과 그에 따른 문제로 인해 도시에서는 이런 손님 접대를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지만
 
터키 제일의 도시 이스탄불의 구석 구석에서도 이방인을 환대하는 터키인의 따스한 정()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가 있다. 



 'Dynamic Korea'처럼 터키를 상징하는 언어는 'Mosaic Turkey'이다.

 투르키쉬, 유러피안, 아메리칸, 아시안이 하나가 되는 곳.

분주함과 여유로움과 다양함이 한데 뒤섞여 있는 곳, 터키.  

터키의 거리를 자유롭게 거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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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어느 집을 가나 한결같이 그 집의 중심이 되는 벽에 걸려 있는 한 사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의 사진인데 터키인들은 그를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관공서와 학교에는 물론 식당이나 동네의 조그만 구멍 가게에도 그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화폐 개혁 전의 터키 리라와 화폐 개혁 이후의 예니 터키 리라,두 화폐의 가치는 같다.)   

모든 터키 지폐의 앞면에는 그의 초상화가 자리잡고 있으며 대도시의 큰 거리는 어김없이 아타튀르크 거리이다.
                                             

아타튀르크가 사망한지 70년이 되었지만 아타튀르크에 대한 터키 국민의 신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그가 사망한 11월 10일에는 온 국민이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터키 국민들이 아타튀르크에 대해 이런 절대적인 신망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첫째,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오스만 제국에서 터키 공화국을 세운 국부(國父)였기 때문이다.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였던 오스만 제국은 20세기 초반에 와서는 서구 강대국의 침략 위협을 받게 된다.
거기다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다가 패전하게 되니 패전국에 대한 연합국의 영토 분할 점령으로 인해
자칫하면 현 앙카라 고원 지대의 영토만 남을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무스타파 케말이 등장하여 열강에 의한 영토 점령에 반대하고 민족적 저항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데 
1921년 아나톨리아로 공격해 온 그리스 군대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대패시키니 다른 나라 군대 또한 스스로 철수하게 된다.
이후 1923년 로잔평화조약에 따라 공식 국가 승인을 받아 1923년 정식으로  터키 공화국이 선포된다.

무스타파 케말은 직업 군인이었으나 노련한 정치가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비젼과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터키 독립 전쟁을 지휘하였고 1923년 앙카라에 새로이 의회를 조직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둘째, 초대 대통령으로써의 무스타파 케말은 재임 기간동안 종래의 '이슬람 전통'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는 세속주의를 근간으로 한 서구식 근대화 작업을 하여 러시아와의 전쟁, 발칸 전쟁, 1차 세계 대전 등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터키인들의 긍지와 사기를 올려서 단합시키는 구심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일차적으로 행정 체계와 사법 체계, 교욱 제도가 바꾸었으며 헌법이 개정되었다. 
터키는 '정교 분리'의 세속 국가가 되었고 대대로 내려오던 '칼리프 제도'는 폐지되었다. 
메카의 정복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이어 받았던 칼리프 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로써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결단인가...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구분한다는 것은 이슬람 사회에서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슬람 범정, 이슬람 공직 제도, 이슬람 학교, 이슬람 종교 제단이 다 폐지되어서
오늘날 터키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자유의 나라>가 되었다. 


 


대대로 내려 오던 이슬람력 대신 국제 표준시와 국제 표준 달력이 채택되었으며

기존의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주간 공휴일이 변경되었고 성(姓) 사용법을 통과시켰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되었고 여성에게도 투표권과 참정권이 주어졌으며 공공 기관이나 학교에서 여성들이 히잡을 쓰는 것을 폐지하였다.



그 중 최고의 개혁은 문자 개혁이다.

말은 있되 글이 없어 아라비아 글자를 사용하던 터키 사람들에게 1928년 무스타파 케말은 라틴 문자를 기초로 하여
터키어 발음에 맞는 문자를 만들어 공포하였으니 터키인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의 문자를 갖게 되었다.
우리 세종대왕처럼 새로운 글자를 창조해 낸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가 국민을 위해서 자기나라에 맞는 문자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선 
세종대왕의 업적에 버금가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이 없이 지내던 터키인들에게 성(姓) 사용법이 의회를 통과하자
터키 국민들은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 즉 '터키의 아버지'라는 새로운 성을 선사하였다. 
이 사실이 보여주듯 그에 대한 터키인들의 사랑과 존경은 신에 버금 갈 정도이다.


혁명보다도 더 단호한 개혁 정치를 단행한 아타튀르크.....
오랜 세월동안 이슬람에 젖어있던 국민들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국민들은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심으로 잘 참고 견디며 따라주었고
그의 사후
오늘날까지 터키 국민들은 그에게 변함없는 존경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 같던 터키를 구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친 지도자.
'터키의 아버지(아타튀르크)'라는 그 이름과 같이 온 국민이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고 본받는 지도자.
우리에겐 이런 훌륭한 지도자 어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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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신의 초강림으로 인해 빈곤한 여행객의 주머니를 한순간에 비워버리게 하는 곳...

'그랜드 바자르(카팔르 차르싀)'는 외국인들이 이스탄불에 오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다.

외국의 수반들이 터키 대통령을 방문하면 영부인들은 어김없이 그랜드 바자르를 방문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수천개의 상점에서 판매되는 수백만 종의 물건들은 전 세계의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카팔르 차르싀'는 '지붕이 덮인 시장'이라는 뜻인데 이 시장은 동양 다른 나라의 지붕이 있는 시장의 원조가 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되는 실크 로드의 종착점이기도 한 이 곳은  오랫동안 동서양 문물을 교환하는 장소가 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비잔틴 제국 때 지어져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1461년에 크게 확장한 이후로 시장의 규모는 날로 커져 갔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입구는 18개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누루오스마니에 게이트와 베야즈트 게이트이다.

누루오스마니에 게이트의 박공 머리에는 의장용 무기와 책,깃발이 새겨져 있고

'카팔르차르싀(그랜드 바자르의 터키식 이름) 1461년' 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그랜드 바자르는 지금까지 12번의 강한 지진과 9번의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재난 때마다 복구되었는데 1894년 지진과 1954년 대화재 이후 가장 크게 복구되었다.

 


이 바자르의 전체 면적은 30 ha(약 93,000 평 정도)의 넓이이며 80개의 시장 거리에

약 3,500개 이상의 상점이 있고 15,000명의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시장 안에는 7개의 분수와 하나의 우물, 그리고 커다란 사원 하나와 12개의 작은 사원이 있고 

학교와 목욕탕도 있었는데 1894년 지진 후 복구에서 철폐되었다. 

 


오스만 제국 때에부터 이 시장은 상업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환전소와 은행 등 각종 경제활동이 행해지던 곳이었다.

 

 
오스만 시대에는 각종 향료나 섬유,나무 등을 파는 전문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19세기 중반까지 노예 시장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도망나온 사람들이 가지고 온

각종 골동품 등 왕실의 보물들을 이 시장에서 팔곤 했다.

 


또 유럽에서 들어온 각종 레이스 품목 및 고급 천,침대 커버 등도 이 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랜드 바자르의 메인스트리트에는 즐비한 보석상이 제일 많이 눈에 뜨이는데

이는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특히 금장신구에 돈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도시 여인들은 보석이 박힌 금팔지나 금반지를 선호하며 시골 여인들은 순금으로 된 귀걸이,팔찌를 많이 착용한다.

터키 남자의 부의 척도는 그의 아내가 착용한 금팔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터키인들은 여유 있을 때 금팔찌를 하나씩 사모은다.
 

 
그랜드 바자르의 어느 보석상 앞 거울에서 주인의 양해를 구한 후 귀걸이를 고쳐 끼우고 있을 때

보석상 주인이 "당신이 한 귀걸이가 무슨 보석이냐"고 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이건 이미테이션"이라고 했더니 그 주인은 "왜 이미테이션을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보석상 주인은 필자의 남편이 돈이 없는 아주 불쌍한 남자려니.....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질 좋기로 유명한 터키 카펫의 가장 오래된 카펫 생산지는 콘야인데 13세기에 이미 카펫 제작소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이스탄불 인근에 카펫 공장이 많이 들어서 손으로 짠 수공예 카펫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카펫은 면,양모,실크로 만드는데 양모로 된 카펫을 제일 선호한다.

60년 이상 된 수공예 카펫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은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제작 연도가 확실치 않을 때에는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여야 한다고 한다.

비싸지 않고 대중적인 카펫은 길게 짜 두었다가 손님의 원하는 대로 이렇게 잘라서 팔기도 한다.

관련 포스트 : 눈을 의심케 한 이스탄불 매직 카펫쇼

 


문양의 나라 터키의 접시에는 저마다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터키인들의 대표적 기념품  '나자르 본주(Nazar Boncugu)'는 파란색 바탕으로 된 유리에 까만 눈이 그려진 일종의 부적인데

열쇠 고리,키 홀더,목걸이,팔찌....각가지 형태로 다 있다. 

영어로는 이블 아이(악마의 눈)라고도 하는데 가장 강력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주위의 악마들을 도망가게 하며 타인의 질투나 질시를 빨아들여 주위의 재난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모든 집의 들어가는 입구나 상점의 문 옆에는 어김없이 이것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련포스트 : 밤이 더욱 아름다운 도시 쿠샤다시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터키의 기념품 가게도 본국에 돌아가기전에 돈을 다 쓰고 싶어하는

외국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쓸모 없고 조잡한 물건들이 많다.

바자르나 다른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흥정의 기술을 배워두어야 하는데

터키 상인은 가격을 얘기할 때 가장 높은 가격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깎아 달라고 하면 얼마에 사기를 원하냐고 묻는다.

상인이 제시하는 가장 높은 가격과 소비자가 원하는 가장 낮은 가격의 차이를 줄여나가다가

가장 적정한 선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데 그 가격은 대체로 처음 부른 가격의 반 정도가 되는 편이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요구하는 손님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니 주의할 일이다. 
 


터키인의 대부분은 청결을 소중하게 여겨 닦을 것이 없는 깨끗한 유리창도 닦고 또 닦는다. 
 


바자르 안에는 점포도 많지만 여러가지 편의 시설들도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카페도 군데 군데 있어서 '차이'를 마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즉시 '차이'를 배달해 준다.

우리나라처럼 쟁반을 들고 오트바이를 탄 아가씨가 오는게 아니고 잘 생긴 총각들이 '차이'를 들고 온다.

왜냐하면 식당이든, 가게이든, 카페이든 터키의 모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이기 때문이다.

대신의 여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간이 찻집에는 물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곳곳이 간이 음식점도......
 


쇼핑하다 지친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의자들도 군데 군데 마련되어 있다.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환전소도 군데 군데 있는데 카드도 받는다.

그러나 집집마다 카드 단말기가 없는 경우가 많아 카드를 들고 점원의 뒤를 따라 골목 사이로 들어가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도 카드를 든 점원이 하도 빨리 걸어서 앞으로 가는 바람에 골목에서 사람을 놓쳐 어리둥절했던 경험이 떠오른다.
 

 
 이 시장에서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흥정인데 터키의 상인들의 상술은 아주 특별하다.

그들은 터키식 차(차이) 한 잔으로 장사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거래는 차로 시작하여 차로 끝나게 된다.

 손님이 가게 에 들어오면 일단 차이부터 권하고 거래가 이루어지면 또 한번 차이를 권하는 것이다.

들어와서 차이 한잔 하고 가라는 말로 손님을 부르는데

차이를 얻어 마시고 물건을 사지 않고 나온다고 해서 욕 얻어먹을까...라는 걱정은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여기는 이스탄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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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사람이 동시에 사랑한 땅', 터키 이스탄불 거리는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과거와 현대가 뒤섞인 구시가지의 뒷골목에는 이 거리에선 말이 끄는 수레와 최신형 벤츠가 뒤섞여 다니며 
차들은 세울 곳만 있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주차를 하고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집들과 모스크의 첨탑보다 더 높이 솟은 호화 현대 아파트들이 뒤섞여서 조화를 이룬다.

시내 한가운데를 둘러싸고 있는 1,500년이 넘은 비잔틴 시대 성벽 유적 옆을 수많은 차들이 뒤엉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메트로, 트램, 버스, 돌무쉬, 택시.....등 다양한 교통 수단이 한데 뒤섞여 지나간다.

미니버스인 돌무쉬는 일반 버스보다 편리하고 싸서 서민들이 자주 이용한다.

'가득하다'는 뜻의 돌무쉬는 말 뜻 대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은데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승객을 태운다.

돌무쉬 운전자들은 동시에 여섯 가지 일을 해낸다고 하는데 승객들과 잡담을 하며 차창을 닦고,

맞은 편에 오는 돌무쉬 운전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요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며,

길가에 돌무쉬를 타려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 그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을 한다고....

고속 도로가 잘 발달된 터키는 도시의 오토가르(Otogar,장거리 버스 터미널)마다

 

'오토뷔스(Otobus,버스)'가 잘 구비되어 먼 거리를 냉방 장치가 잘 된 안락한 좌석에 앉아 갈 수 있다.

오토뷔스는 남자 차장으로부터 간식과 차까지 대접받을 수 있으며 화장실은 물론 뷔페까지 설치된 2층 버스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오토 버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벤츠 버스가 즐비하다. 

차를 타고 가다가 갖가지 살림 살이를 싣고 이사가는 트럭을 만났다. 세간 살이도 몇 안 되는 걸로 보아 자취하는 청년 둘이 이사를 가는 것일까?
 

우리네 이사 풍습처럼 거울을 제일 마지막에 실었는데 주인들도 짐칸에 실려서 이사를 간다.
 


터키의 고속 열차는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오가는 '푸른 기차'뿐이다.

그러나 터키에서 기차는 아주 안전한 교통 수단이며 기차의 등급은 없으나

식당차에는 제복을 입은 웨이터들이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다양한 메뉴를 날라다 준다고 한다.
 

 
터키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당이 있어서 누구나 자신의 기호와 주머니 사정에 알맞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

특히 이스탄불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굉장히 많은데 터키 요리는 세계 3대 요리에 속할 만큼 훌륭한 요리이다.

이 집은 되네르 케밥이 무지 맛있었던 식당으로 기억된다.

터키 사람들은 쪼끄마한 식당에 가도 식탁보를 정성스럽게 깔아놓는걸 잊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식탁 매트를 깔거나 유리를 깔지 않고 수가 놓이거나 레이스가 달린 하얀 식탁보를 정성껏 깔아 놓는다.

바자르에 가면 여러가지 종류의 레이스로 된 식탁보나 뜨게로 된 식탁보가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식탁보를 까는 것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이다.

 
식당 건물에 붙어 있던 전통 화덕인듯....요즘은 쓰지 않는지 주변이 깨끗하다.

 
 식당에서 남자들끼리만 식사를 할 때에는 초대한 사람이 계산을 하지만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할 때에는 남자가 반드시 음식값을 부담한다.이곳은 남성다움이 중요한 사회이기 때문...

 이 인형은 메뉴판을 펴놓고 바구니에 앉아 있는데 구두 사이즈가 맞지 않는지 신발을 반만 신은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터키의 식당 입구에는 가격표가 비치되어 있지 않다.입구가 지나치게 호화로운 곳은 대체로 음식값이 비싸지만 그것이 맛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식당 안은 좁아서 대부분 바깥에다 식탁을 베풀어 놓고 손님을 받는다.

유럽 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식당 바깥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다. 

간판도 제대로 붙지 않은 구멍가게에도 과일은 항상 풍성하다. 구멍가게 풍경은 우리네 옛날 가게 풍경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블루 모스크 축대 바로 맞은 편에 있던 한국 음식점이 있는데 음식은 그다지 맛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음식점 바로 옆에는 안내판도 없는 오래 된 유적이 있는데 이스탄불에는 이렇듯 가는 곳마다 길거리에 유적이 널려 있다. 

쟁반에다 무엇인지 먹을 것을 받쳐들고 가는 이스탄불 소년..음식 배달을 가는 것으로 보인다. 

쇼핑의 천국 터키는 가는 곳마다 활력이 넘친다. 유럽에서는 저녁 시간만 되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도시가 온통 적막에 쌓여 있는 경우가 많지만 터키는 도시 중심의 큰 상점과 백화점을 제외한 주택가의 모든 상점은 10시 이후까지 영업을 하며 관광객이 많이 찾는 해안가나 관광지의 상점들은 우리나라 처럼 새벽까지도 물건을 판다.

 터키의 가게 점원들은 친절하고 민첩하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물건을 구경하고 차나 한잔 마시라고 권한다. 이런 상황에 익숙치 못한 외국인들은 물건을 강매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지 않지만 마음이 약해서 차마 거절치 못하고 가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멋진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손님들은 가게 점원들과 마치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한 것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 받게 된다. 물건을 사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이스탄불 시내를 오고 가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첨단 패션을 잘 소화시키는 젊은이들이다. 여자들은 히잡을 두르고 몸에 피트되는 청바지를 입고 명품 썬글라스와 핸드백을 멘 언발란스한 패션이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지.....

원래 터키의 아가씨들은 미모가 출중한데다 대부분 피부가 하얗고 스모키 화장을 진하게 하므로 눈이 크게 부각되어 이방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여 여행자들은 아가씨들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면 면 여자나 남자나 대부분 배가 나오고 살이 찌게 된다.  

사원 근처의 히잡 여인들도  다른 이슬람 나라와는 달리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법으로 관공서나 학교에서 히잡이 금지되었지만 이곳의 여인들은 종교적인 이유와 패션으로 히잡을 즐긴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무슬림 남자들은 여자를 무시하고 가정에 관심이 없을 것 같으나 수퍼에는 온 가족이 다 함께 쇼핑을 오며 관광도 꼭 같이 한다든지 실제로 우리나라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연세가 꽤 된 히잡 아주머니가 캠코더를 휘두르는 것이 너무 멋져 보여서 포즈를 부탁했더니만면에 웃음을 띄면서 아주 다정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아야 소피아 앞에서 너무나 멋진 구두닦이 할아버지를 보았는데 너무 열중하고 있어서 인사를 못 걸어보았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어찌 저리 깨끗한 옷차림일까...그 점이 궁금하다. 

터키 사람들은 특히 유머 감각이 넘친다. 길거리에서 우리나라 장기와 비슷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는 "원 달라~!"라고 말한다.진짜인줄 알고 멈칫 하니 이 남자들은 막 웃으면서 카메라를 위해 기꺼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하늘색 정복을 입은 교통 경찰이 손짓하여 버스를 세운다.'운전 기사가 신호 위반을 했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열린 문으로 경찰이 뭐라 뭐라고 하니 운전 기사가 생수를 두병 전해준다. 아항......교통 정리를 하던 경찰이 더위에 목이 마르니까 물 좀 달라고 차를 세운거로구나... 참 재미있기도 해서 얼른 셔터를 눌러 경찰을 찍었다.


 

근데 사진 찍힌 교통 경찰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핸드폰을 슥...꺼내는 것이 아닌가..?  핸드폰을 꺼낸 경관....버튼을 삑삑....누르더니 필자를 향해서 조준하고 찰칵...!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관광객을 보고 핸드폰 사진을 찍는 교통 경찰이라니......!

정말 이스탄불에서나 볼 수 있는 여유만만하고 재미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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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시내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우연히  '코렐리'라는 간판을 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코렐리'는 터키어로 '한국인'이란 뜻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만났던 터키사람(튀르키쉬)들은 필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한결같이 " Do you know?  We are brothers~"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때에는 그저 한국전 참전이나 월드컵 때에 우리나라와의 친분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참 친밀하게 생각하는구나...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터키에서 돌아온 후 터키와 우리나라간의 관계에 대해서 책을 여러권 사서 읽게 되었는데 거기서 왜 튀르키쉬들이 한국인을 '형제(카르데쉬)', 또는 '피를 나눈 형제(칸 카르데쉬)'라고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예맥족이라고 보는데
이 예맥족은 만주 몽골계,튀르크계등을 포함하는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종족이라고......

한민족과 튀르크족은 공통의 조상을 갖고 한민족의 무리는 동쪽으로, 튀르크 족의 무리는 서쪽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본단다.
튀르크족을 중국에서는 흉노,또는 돌궐이라고 칭하는데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흉노는 고조선과 동맹을 맺은 일이 있고
돌궐은 수나라의 침입 때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같이 싸웠다고 하니
우리와 터키는 먼 옛날부터 같은 조상을 지닌 형제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지만 터키의 역사 교과서에는 이런 사실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터키사람들은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 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우리 나라와 터키가 더욱 가깝게 된 계기는 바로 한국 전쟁인데 한국전 당시 터키군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15,000명의 군인을 파견했고 전사자 등 인력 손실 인원은 3,216명에 이르렀다. 튀르크 군단은 16개국의 참전국 중 가장 용맹하기로 이름났었고 전쟁 중에 한국의 전쟁 고아들을 보살피기 위한 학교도 세웠다. 

한국전에 참여했던 참전 용사를 터키에서는 '코레 가지'라고 부르는데
터키의 어디를 가더라도 한국전 참전 용사나 그의 친척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코레 가지'들은 정말 한국을 사랑한다. 전쟁 이후 발전된 한국을 자기 조국이 발전한 만큼이나 기뻐하고 한국을 '바탄(조국)'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코레 가지'들이 터키 국민에게 심어 놓은 한국에 대한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터키사람들이 한국을 '형제(카르데쉬)'로 보고 더욱 가깝게 여기게 된 것은 '코레 가지'들의 한국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애정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기 위해 그들은 우리를 '피를 나눈 형제(칸 카르데쉬)'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한국전 이후 참전 용사들은 '코렐리(한국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게 되었는데
한 마을에 마흐메드가 두 명 있다면 한국전 참전 용사는 '코렐리 마흐메드'으로 불리우고 있다.
'코레 가지'들은 이름 대신 '코렐리(한국인)'라고 불리우는 것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오늘날 터키의 '코렐리'들은 한국의 대명사가 되었다.(이희철 저 '터키' 참조)

2002년 월드컵 준결승 때에 우리 나라와 터키의 대형 국기가 나란히 펼쳐졌을 때 
터키 국민은 큰 감동을 받았고 터키의 '코렐리'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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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누구에게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단 하나, 바로 '아야 소피아 (터키어,Ayasofya)',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Αγία Σοφία)'라고 불리우는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아야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 중 최대의 걸작으로 AD537년에 완공되었다.
교회가 건축된 이후로 제국의 멸망까지 새로운 많은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야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축물도 건축되지 못했으므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오르기도 했다.

  

 

이 건물은 537년에 건설되어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 동안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대규모의 복구 사업을 거친 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던 시절에 회칠하여 사라졌던 비잔틴 모자이크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1935년에 교회도,이슬람 사원도 아닌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써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아야 소피아를 방문하기 위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라고 쓰인 입구로 들어선다.

3개의 돔이 예배당인 아야 소피아는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첫번째 건축물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섯개의 돔 건축중의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의 구조를 보면 중앙 돔 정점까지의 높이는 56.6m 이니 무려 1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다. 

건물의 전체 길이는 100m이고 내부 공간의 크기는 75m X 70m로 내부 넓이는 7,570 평방미터(2,300평)에 이른다. 

 

 

 외랑 벽에는 아야 소피아의 역사를 알려주는 설명 판넬이 여러개 붙어 있다.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사실 이 자리에 세워진 세번째 건물인데 AD 360년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이
메갈로 에클레시아(거대한 교회)라는 목조 건물을 세웠지만 404년에 발생한 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416년에 다시 지어진 교회는 532년에 니카 혁명 기간 동안 반란군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두번째 교회의 토대와 계단,부서진 박공 부분은 현 '아야 소피아'입구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외랑의 한 부분에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작품들과 걸개,소형 액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외랑을 거쳐 내랑으로 들어서면 길이가 60m, 넓이가 11m인 내랑의 천정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여 있고 
벽들은 모두 대리석과 아름다운 돌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9개가 있는데 9개의 문 중 맨 끝의 3개씩 6개의 문은 일반인이 드나드는 문이다.
 한가운데의 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고 황제의 문 보다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관직자,사제,대신들이 사용하였다.
황제의 문에 붙어 있던 금판과 대신의 문에 붙어 있던 은판은 라틴군에 의해 도난당했다.  


 

 황제의 문 위 박공 머리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있는데
가운데 보좌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비잔틴 황제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고
양 원 안에는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엄청나게 거대한 돔이다.
동서로 31m, 남북으로 33m인 중앙 돔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는데 이 창으로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 준다.
당시에는 유리가 없었으므로 대리석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하여 창을 만들었단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4개의 창은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10세기경에 보수할 때 파손되어 채광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대리석 판을 얇게 잘랐으면 돌판을 통하여 빛이 비칠까...

 돔의 한가운데는 원래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 이 그림은 코란의 문구로 덮이게 되었다. 

 

 

본당의 후진의 반원 돔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다.
이층의 왼쪽 끝에 가면 더 잘 보이는 이 금빛 찬란한 모자이크는 그림 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고
 옆에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도 있다.

 

 

 돔 옆 네 코너에는 3개의 날개가 달린 체루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천사의 얼굴은 각각 사자,황소,독수리 ,그리고 천사의 모습이었으나
역시 오스만 제국 이후 다각형의 별 모양으로 덮여 버렸다.

 

 
중앙 안 쪽 부분에는 금색으로 장식된 '미흐랍(Mihrab)'이 있다.
미흐랍이란 '이슬람 중심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곳'을 말한다.
이슬람 교도들이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할 때 엎드리는 방향을 표시하는 것인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에 이곳에 미흐랍이 설치되었다.

 

 

미흐랍의 오른편에는 이슬람 예배의 설교단이 있는데 이슬람의 설교자인'이맘'이 금요일에 설교했던 곳이며
미흐랍의 왼쪽에는 1849년에 만든 오스만 술탄의 화려한 옥좌가 있다.

 

 

벽과 코너에는 8개의 거대한 원판이 걸려 있는데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있다.
 

 

 미흐랍의 오른쪽의 판은 알라, 왼쪽에는 무하메드,
그리고 나머지 판들에는 이슬람 초기 칼리프(종교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직경 7.5m의 이 둥근 판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훌륭한 달필이라고 하는데
아라비아 문자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는 글씨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아야 소피아를 짓기 위해 5년간 100명의 기술자와 10,000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에 있는 국가와 소아시아의 대리석 석광에서 가져 왔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와 수학자가 함께 설계해서 세운 이 건물은 가장 자리로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본당에는 40개,위층 갤러리에는 67개가 있고  돔 형식으로 된 이 건물의 한 가운데에는 전혀 기둥이 없다.

 

 

이 기둥들은 에페스의 항구 체육관,레바논의 아폴로 신전 등에서 가져 온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해서 로도스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이 운반되었다.
기둥과 벽의 대리석의 문양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도 자연스럽다.

 

 
하트 모양이 너무나 귀여운 기둥 앞에서 아야 소피아 경비원의 모습을 사진에 같이 담아 보았다.
눈웃음치기를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이지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엔 좀 근엄한 자세를 보인다.
그래야 더 공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그렇지만 이 직원의 굳게 다문 입에도 미소가 서려 있는걸 볼 수 있다.

 

 

 아야 소피아 안에는 이렇듯 고양이가 제 세상인양 돌아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슬람 국가는 거의 고양이 천국이랄 수 있는데 무슬림들의 고양이 사랑은 이슬람 예언자 무하메드가
자신의 옷자락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 옷자락을 잘랐다는 얘기에서 기인한다.
반면 개는 아주 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라서 그런 것일 듯....

 

 

 '눈물 기둥, 혹은 땀흘리는 기둥(Weeping Column)'라는 기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기둥의 물에 닿는 것만으로 병이 나으며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고대로 부터 내려오는 기둥인데
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기 때문에
현재는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판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한가운데 뚫린 구멍에 엄지를 넣고는 손을 떼지 않고 한 바퀴 돌릴 수 있으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
너도 나도 엄지를 넣고 돌려 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바퀴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입구의 오른 쪽과 왼쪽에 놓여 있는 1,250 리터의 거대한 대리석 항아리는 16세기에 페르가몬의 고대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거에는 문 밖에 놓여 있어서 이슬람 교도들이 물로 몸을 청결케 하는데 사용했다는데
발굴 당시 이 엄청나게 큰 항아리 안에 보물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2층 갤러리는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되던 곳이다.
갤러리란 건축물에서 벽을 따라 그 길이만큼 만든 좁은 발코니,또는 플랫폼을 말하는데
화랑(畵廊)을 뜻하는 '아트 갤러리'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갤러리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니고 비탈길인데 그 이유는 다른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에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갤러리의 한쪽 부분은 그야말로 '화랑'으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현대 타일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 갤러리에서 아래 층을 내려다 보니 사람이 자그마하게 보이는게 아찔하기 보이며 높이가 실감이 난다.

 

 

 갤러리 오른쪽의 입구에 있는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면 비잔틴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디시스(Deesis)'불리는 이 모자이크의 내용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인데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표정은 선명하고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다.

 모자이크를 보면 아랫부분이 회칠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자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3일간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이 허용되었지만
아야 소피아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메흐메드 2세는 이 건물을 파괴치 말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건물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교회는 이슬람 사원이 되었고 모자이크로 된 아름다운 기독교 성화들은 회칠로 뒤덮여졌다.
그리고 아야 소피아 건물 바깥에 네개의 미나레트(이슬람 첨탑)도 그 때 세워지게 된다.
1930년대 미국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성화 복원 작업으로 회칠로 뒤덮인 성화들은 이제 하나하나 옛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오른쪽 복도 안쪽 벽에 있는 모자이크는 요하네스 콤네소스 2세와 이레네 황후가
아들인 알렉시우스와 함께 (알렉시우스는 꺾어진 벽쪽에 있어서 사진에 담아지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께 헌금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왼쪽에 있는 모자이크는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여제(女帝) 조에와 그의 세번째 남편 콘스탄틴 모노마쿠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제 조에는 세번 결혼했는데 처음 이 모자이크에는 그의 첫남편인 로마노스 3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결혼할 때마다 모자이크에서 남편의 얼굴과 머리 위에 쓰인 문구를 바꾸었다.
72세로 죽은 조에의 얼굴만이 젊은 시절 얼굴 모습 그대로이다.

 

 

갤러리에서 내려와 출구인 남쪽 입구문으로 나가는 통로의 벽과 천정의 타일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아야 소피아의 내부를 다 관람한 후 나오는 마지막 남쪽 출구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예수께 왼쪽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 소피아를 손에 들고 예수께 봉헌하고 있어 시선을 끈다.

아야 소피아에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바라본 아야 소피아는 석양 무렵의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데
때마침 정원에 서 있던 검은 차도르의 두 여인과 함께 어울려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도대체 그 시대에 어쩌면 저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건축 기술로도 따라잡기 힘든 노하우가 자리잡고 있었을 듯 하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던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1500년 이상 한 자리에 서서 이스탄불의 흥망 성쇠를 바라본 건축물....
 아야 소피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역사의 흐름을 말없이 지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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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 장식된 푸른 유리창과 아름다운 타일로 인해서 '블루 모스크(Blue Mosque)'라고 불리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sultanahmet camii,술탄아흐메드 자미)'은 터키와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히포드롬의 동쪽에 있는 이 사원은 성 소피아 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에 있어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게 되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원래 이 자리는 비잔틴 제국의 궁전이 있던 자리인데 궁전은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다 파괴되었고 이 후 술탄 아흐메드 1세 황제는 성 소피아 사원을 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성과를 능가하려는 야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이 사원을 1609년에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하게 된다.

 

 

14세에 술탄의 자리에 오른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이 사원이 완공된지 1년만인 27세에 위장병으로 사망하였으니 권력과 부귀 영화도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을.....

 

 

   블루 모스크는 이스탄불과 터키 전역에서 6개의 미나레(첨탑)가 있는 유일한 사원이다. 술탄 아흐메드 1세는 건축가 메흐메드 아아에게 첨탑을 황금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는데  '금'의 터키어 발음은 숫자 '6'과 비슷하기 때문에 건축가는 이 점을 잘못 이해했고 그래서 금 대신에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6개의 미나레가 있는 사원을 지었다고 전한다. 

 

 

미나레에는 발코니가 2,3개씩 붙어 있어서 블루 모스크에는 총 16개의 발코니가 있다.
 

 

 

이 건물은 회교 신학교, 병원, 아라스타 바자르, 왕릉, 대상들의 숙소, 학교, 그리고 대중 우물이 사원과 함께 있는 사원 복합 건물이다. 사원 복합 건물을 짓기 위하여 비잔틴 왕궁,히포드럼(전차 경기장)의 관중석, 그리고 많은 귀족의 궁전들이 파괴되었는데 이 곳이 사원 자리로 선택된 것은 토프카프 궁전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의 부속 건물중의 하나인 아라스타 바자르(시장)는 사원의 축대 아랫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바자르이다.

 

 

사원의 부속 건물인 카페나 레스토랑의 임대료는 사원의 운영 자금으로 충당된다. 


 

외부에서 바깥 정원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모두 다섯개가 있는데 가장 중앙문에는 체인이 걸려 있다. 체인이 걸려 있는 이유는 말을 타고 사원에 들어오는 술탄이 다른 사람들처럼 경건하게 말에서 내려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계단을 올라와서 내부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3개가 있는데 내부 정원의 규모는 72 X 64m로 사원 본당의 규모와 거의 맞먹는다. 중앙에는 육각형 세정용 분수가 있는데 이슬람 사원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서 손발을 닦는 의식을 가지는 곳이나 지금은 그 기능을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이슬람 신도들은 남쪽과 북쪽 벽면에 있는 수도 시설에서 예배를 보기 전에 손발을 닦는다.
 

 
본당 입구에는 경찰과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고 이슬람 사원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하므로 비닐 봉지가 많이 구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입문은 나무문이나 철문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이렇게 장막으로 둘둘 말아서 가려놓은 것이 이채롭다.

 

 

입구의 높이를 낮게 해 둔 것은 역시 어느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일 듯.....

 

 

사원의 본당의 규모는 51m X 53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실내는 의자가 없고 모두 카페트로 되어 있는데 이 이미지는 빌려온 사진이라 필자가 방문했을 때의 카페트와는 다르다. 그리고 양 옆에 나무 벤치처럼 생긴 것들은 신발을 놓는 곳인데 밖의 신발장이 꽉 찼을 때 사용된다.  본당 안에는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오일 램프가 까마득한 천정에서부터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게 눈길을 끄는데 엄청나게 화려하고 거대한 이 크리스탈 오일 램프는 오래 전에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이슬람 사원에는 메카의 방향으로 '미흐랍'(이슬람 중심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곳 )이 있는데 가운데 서 있는 남자의 오른쪽 뒷편으로 미흐랍이 보인다. 

 

 

이 사원을 '블루 모스크'라고 서양인들이 부르는 이유는 사원 내부의 벽과 돔에 사용된 타일과 그림의 색들이 거의 푸른 색과 녹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사원의 내부 장식에 사용된 21,043개의 푸른 타일은 이즈닉 타일(이즈미르에서 생산한 타일)이다.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아치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뒤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들은 타일과 내부 장식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사원에는 전체 260개의 창문이 있는데 처음 지을 때 사용되었던 베네치안 유리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고 지금 있는 것들은 모조품이다.  중앙의 돔과 동서로 난 반원형 지붕,그리고 벽과 기둥에 쓰여진 글씨는 모두 이름난 서예가의 작품이며 내용은 코란의 인용문이다. 

 

 

바닥에 깐 카페트는 유명한 실크 카펫 제조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슬람 사회에서는 모든 기도회가 카펫이 깔린 바닥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터키의 카펫의 제조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바닥에 깔린 카펫을 자세히 보면 일일이 구획이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구획은 바로 한 사람이 앉는 자리이다. 이슬람 예배의 모습을 보면 엎드려 메카의 방향으로 절을 할 때에 줄이 매우 질서 정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질서정연한 줄의 비결은 바로 이 카펫에 있는 것이다.  

   

사원 안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였는데 관광객이 버글버글하는 시끄러운 실내에서도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코란 삼매경에 빠진 사람.....  

 

 

소지품은 내팽겨쳐 놓고 한 쪽 구석에서 누워 잠자는 사람.....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등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하고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들은 사원에 준비되어 있는 히잡으로 머리에 쓰거나 어깨를 가려야 한다. 이슬람 사원은 입장료는 없지만 출구에 준비된 헌금 상자에 돈을 넣으면 되는데 이슬람 교도나 이방인이나 돈을 넣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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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도 올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수많은 문화 유산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 역사지구' 안에는 톱카프 궁전 문을 나서면 성 소피아 성당이요, 그 맞은 편은 블루 모스크, 바로 옆은 히포드롬, 바로 아래는 지하 궁전, 조금 걸어가면 그랜드 바자르....이렇게 역사적인 볼거리로 넘쳐나니
이스탄불에 한번 발을 붙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기를 아쉬워 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히포드롬이 있던 '술탄 아흐멧 광장'은  가히 이스탄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데 광장 중앙에 있는 고대 유적들과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터키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적인 유적들이다.                                         

히포드롬(hippodrome)이란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영화 '벤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륜 마차 경기장'을 말하는 명칭이다. 이 경기장은 도시를 정복한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AD 2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AD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틴 대제가 규모를 확장하여 완성하였다.
                                               
한번에 10대의 전차가 경주를 한 히포드롬은 길이 480 m에 넓이가 120 m로 로마의 시쿠스 맥시무스 다음으로 큰 경기장(히포드롬)인데 'U'자 형태의 경기장을 중심으로 최대 10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40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

경기를 관람하는 시민들은 청팀과 녹팀으로 나뉘어 응원하였는데 나중에는 정치,종교적으로까지 대립하여 갈라진 두 팀은 히포드롬에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고...

 

 

전형적인 히포드롬은 언덕을 파헤쳐서 만들어졌으며, 굴착된 흙은 반대측의 관중석을 지탱하기 위한 둑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이곳 역시 땅이 편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히포드럼의 서쪽 부분에 축대를 쌓았는데 마르마라의 해변로를 통해 광장 쪽으로 오면 웅장한 축대의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히포드롬의 기능은 세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스포츠 및 예술 활동 장소여서 전차 경기 및 격투사들의 격투도 이곳에서 열렸다. 두번째 기능은 정치 무대로써의 기능이니 오스만 시대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의 폭동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세번째 기능은 비잔틴 황제들에 의해서 훌륭하게 장식된 야외 박물관으로써의 장식의 기능이다.

 

 

실제로 중앙분리대에의 장식된 '스피나'에는 전 세계에서 가지고 온 이집션 오벨리스크 기념비와 델피 신전에 있는 청동뱀 제단, 해시계 등 각종 기념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말 장식도 있었으나 1204 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현재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정면에 장식되어 있다. 

 

 

 'U'자 형태의 경기장 중앙에 세워진 기념물인 '스피나'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이집션 오벨리스크'인데 '디킬리타쉬'라고 부른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전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테우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 

 

 

연한 핑크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무게는 약 300톤이고 높이가 원래는 32.5m 였는데 수송 과정에서 밑부분의 40%가 깨어져나가 현재 높이는 20m 정도이다. 

 

 

 오벨리스크의 사면에는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의 용맹을 말해주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 부분의 몇 개의 인물화와 글자는 수송 도중에 떨어져나갔다. 

 

 

 맨 아래 부분에는 AD 389년에 만들어진 대리석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의 사면에는 히포드럼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후 무희들의 춤 추는 모습,전차 경기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조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 행해진 그림과 글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부조되어 있다. 

 

 

 100년마다 한번씩 평균 6.5 강도의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어도 이집션 오벨리스크는 피해를 입지 않고 1,600 여 년간 이곳에 끄덕없이 있어왔다. 바로 옆에 보이는 미나레(첨탑)는 술탄 아흐멧 사원(블루 모스크)의 미나레 중 하나이다.  

 

 

히포드롬에서 두번째로 오래 된 기념물은 BC 479년에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세워졌던 뱀기둥이다. 이 뱀기둥은 팔라테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AD 326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 곳에 세워 두었다. 뱀기둥은 세마리의 뱀이 몸을 서로 꼬고 올라간 모습이며 머리 위에는 직경이 2m가 되는 거대한 황금 트로피가 있었다. 

 

 

 그러나 이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오기 전에 벌써 분실되었으며 뱀들의 머리는 오스만 제국 때에 돌에 맞아 부서졌다. 이 머리 중에 하나는 1847년 성 소피아 성당 보수 공사 때에 발견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또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높이는 6.5m였으나 현재는 5m이다. 

 

 

 세번째 기념물은 콘스탄틴 기둥은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황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셀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히포드럼 광장의 중심에 세워 놓았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의 높이는 35m 이며 외부에는 원래 청동이 입혀져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초 라틴군이 이 도시를 접령한 후 청동을 떼어내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하여서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1894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심하게 부셔졌던 이 기둥은 최근에 다시 복구되었다. 

 

 

히포드롬 광장에 있는 독일 분수(빌헬름 분수)는 이 곳에 있는 기념물 중 가장 마지막에 세워진 것이다.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의 황제 카이세르 빌헬름은 자신에게 보내 준 환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 우아한 분수를 만들었다. 

 

 

이 분수는 그가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완성된 후에 기차로 이스탄불로 옮겨져 1898년에 히포드롬에 세워졌다. 

 

 

 분수의 안쪽 지붕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입혀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 준다. 

 

 

 이름은 독일 분수이나 분수의 기능보다는 샘 같이 보이는 분수이다.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길가 곳곳에서 샘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여행자들은 작열하는 땅 밑의 물이 그토록 시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이런 샘에서 나는 물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데 이런 물은 여행자의 갈증을 달래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술탄 아흐멧 사원 맞은 편, 히포드롬 맨 끝에 있는 건물은 오스만 제국 때에 유일한 고관의 궁전 이브라힘 파샤 궁전이다. 

 

 

 이 건물은 1520년 술탄 슐레이만 대제가 국무총리였던 이브라힘 파샤에게 선물한 것으로 지금은 터키 및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륜 마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던 히포드롬 광장 주변의 오늘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넘쳐 난다. 

 


 히포드롬 옆 블루 모스크에 부속으로 딸린 건물들은 사원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바자르나 레스토랑으로 운영되어 왔다.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관광 나와 열심히 설명을 듣는 유럽인 단체 관광객들도 보이긴 하지만 이륜 마차가 달리던 히포드롬은 이제는 이스탄불 시민들의 아침 산책 코스가 된다. 경찰도 근무를 하는지.....노는지 모를 정도로 여유로와 보이는 이곳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낭만의 도시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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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자연환경과 수천년에 걸친 문명의 자취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곳...
'신과 인간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온 땅, 세계의 박물관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중심 히포드롬(술탄 아흐멧 광장)에는 아침부터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대는데....

 이스탄불의 아침은 여유로우면서도 활력이 넘친다.
경찰은 광장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광장에 나온 사람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눈다.
노는지 순찰을 다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빵 상인의 수레 속에는 갓 구운 빵이 잔득 들어있다.
동그란 도너스같이 생긴 빵은 터키의 대중적인 빵 시미트(Simit).
동그란 고리 모양의 빵으로 위에 참깨가 뿌려져 있고 부드러운 에크멕과는 달리 조금 딱딱한 편이다.
깨가 많이 묻어 있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며 양이 상당하여 배고플 때 먹으면 그만이다. 

블루 모스크의 부속 건물인 레스토랑들에는 아침부터 손님 받을 준비가 한창이다.
이슬람 사원에서는 사원의 경비 충당을 위해 부속건물을 레스토랑이나 바자르에 세를 주는 경우가 많다.  

 레스토랑 옆에는 관광 상품점이 즐비하고 아침부터 가게 앞에 진치는 남자들도 눈에 뜨인다. 

도로에 있는 코카 콜라 캔의 모형이 눈에 뜨이는데 터키 어느 오지를 가더라도 모든 구멍 가게의 간판에는
어김없이 코카 콜라나 펩시 콜라의 로고가 붙어 있어 이 상표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실감하게 해 준다.   

 노란 옷을 입은 청소부는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거리를 청소를 해서 거리를 깨끗하게 유지한다.
터키 사람들의 청결 의식은 대단하여 TV 광고의 상당 부분이 세제 광고로 메꿔져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자기 집 외의 청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광장의 나무에는 비닐 봉지꽃도 여기저기 피어 있다.

교복 차림으로 광장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참견하는 현장.....

 "야...학교 안가고 뭐해....?" "지금 방학이거등여....?"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어느 곳에서나 청소년의 얼굴에는 반항심이 가득하다.
이 훈훈한 고딩들도 언젠가는 아저씨가 되어서 배둘레햄이 되겠지... 
손에는 시미트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아침은 광장에서 해결하는 듯 하다.

방학 기간인데 교복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터키의 학교에도 보충 수업이 있는 것일까...?
실제로 터키에는 대학 입학 경쟁률이 아주 심하여 터키의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교문을 나서면
학원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들을 잽싸게 학원으로 실어간다고.....   

동내 가게들은 우리네 구멍 가게들과 비슷하다.  '점방'이라고 하면 어울릴만한....
아,....물론 우리네 *마트와도 같은 대형 할인점도 곳곳이 자리잡고 있지만
터키의 동네 가게는 우리네 삼청동 뒷골목의 가게와 같이 미소가 절로 배어나온다.
냉장고  안의 수박 1/4 통, 구석의 계란판들도 은근히 귀엽다. 
 

하트 무늬가 로고인 ALGIDA란 아이스크림은 터키 전역의 가게에 다 깔려 있다.
그리고 생수도 거의 독점인지 Erikli란 생수는 가는데마다 없는데가 없다. 

 히포드럼 광장에 서 있던 Erikli 생수 트럭.
신선한 물에 대한 수요는 많아서 이스탄불 곳곳에는 주유소와 비슷한 시설의 물 판매소도 있을 정도이다.

아야 소피아와 블로 모스크가 있는 시내 중심지 '술탄 아흐멧 지구'는 더 이상의 도로 확장이 불가능해
이렇게 차 한대만 겨우 다닐 수 있는 일방 통행 도로나 진입 금지 도로가 많다. 

 오래 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섞여 있고 시가지는 매우 깨끗한 편이다.

 중심지의 도로는 돌로 깔려 있으며 보도 또한 많은 부분이 화강암이나 다른 돌로 포장되어 있다.

영국인 같은 북쪽 유럽 사람은 선풍기도 없이 생활하는 사람도 많지만 터키는 에어컨 시설이 잘 되어 있다.  .  

  우리나라처럼 전봇대나 기둥에 전단지를 많이 붙이는 점도 비슷한데
떼는 사람이 떼고 가면 돌아서서 그 자리에 바로 전단지를 풀칠해서 붙여 놓는다고... 

 택시는 Taksi 라고 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터키어는 X 나 W 발음이 없어서 터키어 알파벳에는 이 두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택시 요금은 저렴한 편이며 잔돈은 팁으로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길가에 현대의 액센트가 주차되어 있다.
터키에서 굴러다니는 우리 차를 종종 볼 수가 있었는데
특히 경찰차로 쓰이고 있는 라세티를 보았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투어용 이층 버스......버스가 너무 너무 럭셔리하다.
보통 터키의 관광 버스나 고속 버스는 차가 아주 좋은데 벤츠같은 고급 기종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기사들은 차를 깨끗이 닦는데에 온 정성을 다 기울인다.
(근데 이 경찰은 사진마다 다 출연하는구나...) 
 

 조용한 '술탄 아흐멧 광장' 광장의 아침....
빛깔이 많이 바래어진 이 의자에 앉아 시미트와 터키 요쿠르트를 먹으며
오늘 하루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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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때가 되었으므로 호텔에서 식사를 한 후
이스탄불 중의 이스탄불, '술탄 아흐멧 지구'의 밤 풍경을 돌아보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여자들이 낯선 외국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을까...생각되시겠지만
저녁만 먹으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암흑으로 변하는 유럽의 여느 도시와는 달리
터키의 밤 거리는 늦게까지 상점들이 문을 열 뿐만 아니라 의외로 안전한 편이어서
늦은 저녁 식사에도 불구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거리로 나섰다. 


술탄 아흐멧 지구는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토프카프 궁전, 지하 궁전, 그랜드 바자르...가 밀집해 있는
올드 이스탄불....그러니까 이스탄불 중의 이스탄불이다.


호텔에서 조금 걸어오니 트램 정류장이 있고 사람들은 앉거나 서서 트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램(Tramvay)은 바크르쿄이라는 이스탄불 서부 지구부터 카바타쉬라는 베쉭타쉬 지역까지 연결하고 있다.
트램은 5~10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차내는 청결하고 에어컨 상태도 좋다. 
특히 이 트램은 우리나라 현대로템에서 생산한 것이라고 하니 더욱 자랑스러운 부분이다.


 오래된 오스만 시대의 건물과 신식 트램,그리고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이 조화를 이루는 곳, 이스탄불이다. 
 


 너무나 화려한 가죽 제품들이 많이 걸린 가죽 전문점에 들어가 백과 구두를 구경하였다.
주인은 아주 영어가 유창하였고 이 가죽 전문점엔 한국인이 많이 온다고 하였다. 
  


 얼마 안 걸으니 아야 소피아(성 소피아 사원)이 은은한 경관 조명 아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나타난다.
아야 소피아는 내일 밝을 때 돌아보기로 하고 토프카프 궁전 입구 쪽으로 가서 카펫과 기념품 가게들을 돌아보았다. 
한 기념품 가게 주인 청년은 나이가 스물 셋 밖에 안 됐는데 벌써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는 등 프라이드가 대단했는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혀를 굴리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귀를 쫑긋하느라 혼이 났다.  



 아야 소피아의 맞은 편 블루 모스크 앞 광장에 다다르니 터키 대학생 두 명이 말을 걸어 왔다.
수줍게 말을 더듬으며 말을 걸어온 이 대학생들은 "자기들의 영어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하고 싶단다. 
해양대 2학년생이라고 하는 이 학생들은 배를 타고 터키의 항구 도시를 순회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순진하고 예의바른 이 학생들은 비교적 또렷한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무지 힘들게.....' 대화를  한참 하다보니 모두가 회화의 밑천도 떨어지고...^^;;
다른 곳도 구경하고 싶은지라 좋은 여행 되라고 손을 흔들고 주고 헤어졌다.


블루모스크는 건물 전체를 비추는 조명으로 인해 밤에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요즈음은 유적지나 타워의 경관 조명이 잘 되어 
관광객을 불러모으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데
오래 된 유적에 비쳐진 경관 조명은 낮의 모습모다 더욱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야 소피아는 이제는 박물관이 되었으므로 밤에는 입장할 수 없지만
블루 모스크는 이슬람 사원이기 때문에 밤에도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해 문이 열려 있어 

관광객들과 기도하러 온 사람, 더위를 식히러 온 이스탄불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스크에서  만난 터키인 가족들은 아이가 '촉 규젤'하다니까 매우 좋아하며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촉 규젤 = 매우 아름답다, 아주 예쁘다)
알고 있는 몇 마디 안 되는 터키어로 얘기를 걸었는데 너무나 좋아하며 환하게 웃어주던 터키인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몇 몇 한국인인 듯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다른 관광지에서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 일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반가와 하며 '어디서 오셨어요...'하면서 기분좋게 인사를 주고 받기도 했다.
 이스탄불에 오면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지고 행복해 지는걸까...


 '미나레(minaret,이슬람 사원의 첨탑,아랍어로 등대라는 뜻)' 에도 경관 조명이 이쁘게 비추인다.
블루 모스크는 미나레트가 여섯개 있는 터키 유일의 사원인데 미나레의 갯수에 따라 사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오일 램프가 까마득한 천정에서부터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오래 된 수백개의 크리스탈 오일 램프는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넓이의 바닥에는 실크 카페트가 깔려 있는데 카페트의 무늬는 일정하게 구획이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슬람 사원의 예배 광경을 보면 엎드려 절할 때 줄이 참 잘 맞춰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마다 앉는 자리가 구획지어진 이 카페트의 덕이라고 보면 된다.


오래 된 블루 모스크의 축대 아래에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시장 '아라스타 바자르'가 있다.



이 바자르는 블루 모스트의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방편으로 
오래 전에 지어졌는데


바자르 안의 많은 기념품 가게에는 주로 머리에 쓰는 히잡이나 스카프, 벨리 댄스 복장, 카펫, 도자기 등을 팔고 있다. 
 


바자르의 가게 앞에는 이렇듯 로마시대의 기둥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터키에는 수천년 된 유적들이 거리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혹은 티 테이블로.혹은 의자로 쓰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터키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놀라곤 하는데 왜 유적을 박물관에 두고 잘 보존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아니...길에 널려 있는 것이 모두 다 유적인데 어떻게 다 유리 속에 넣어두나요?" 하고 이상하다는 듯 반문한단다.



바자르 안을 구경하고 있으니 어떤 아저씨가 나타나서 갑자기 동행인 S양의 손목을 덥썩 잡더니 
"이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낙타 몇 마리에 저에게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일순간 깜짝 놀랐지만 앞에 선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걸 눈치 채고
"음...낙타 천 마리...? 아니 아니 이천으로 합시다~!! 빨리 이 아가씨 데려가고 낙타 이천 마리 주세요~"
라고 했더니 이 터키 아저씨, 함께 폭소를 터뜨리며 가게에 들어와서 차이나 한잔 하고 놀다 가라고 한다.  


 사진은 동행인 K양, 초상권 보호를 위해 면상 비공임당...^^

하도 강권하는 바람에 카펫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엄청나게 좋은 카펫도 있었고 조그마한 킬림도 있었는데
주인은 카펫 장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차이를 권하더니 
자기의 '매직 카펫쇼'를 보여주고 싶단다.
의자에 우리를 앉히곤 길이 120cm정도 되는 붉은색의 카펫을 한장 들더니
"혹시 심장이 약하지는 않으신가요? 놀라서 기절하지 말고 카펫에 눈을 떼지 말고 똑바로 지켜 보세요~"
하며 카펫을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다가 가게 바닥에 휙 내던지는 것이다.

뭥미...? 뭐가 매직쇼야.... 카펫이 뭐가 달라지기나 했나...? 하고 자세히 보다가 순간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분명이 붉은색 카펫을 바닥으로 던졌는데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은 하얀색 카펫이었다.
우리는 "와아~~~와아~~팬태스틱~!"하면서 박수를 쳤더니 우리의 리액션에 신이 난 이 아저씨...다시 카펫을 들더니
"이번엔 하얀 카펫을 붉은 카펫으로 바꿉니다~" 하면서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다가
다시 가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니 이번엔 카펫의 색상이 다시 붉은색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주인에게 "잠깐~!" 을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반대편에 서서 보니 카펫은 요술처럼 하얀색이었는데 다시 앉아 있던 방향으로 와서 보니 붉은색이었다.
그렇다.....이 카펫은 보는 방향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보이도록 짜여 있는 '멋진 예술품'었던 것이다.
 '매직 카펫 쇼'라.....ㅋㅋㅋ
정말 환상적인 매직쇼를 보여준 카펫 가게 주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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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를 대표하는 음식은 무엇일까?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터키를 대표하는 음식은 케밥과 요쿠르트,아이스크림이라고 한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터키 전통 아이스크림인 '돈두르마스'를 소개할까 한다.

'마라쉬 돈두르마스(Maras Dondurmasi)'는
300년 전 터키의 카흐라만 마라쉬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카흐라만 마라쉬 사람들은 하얀 눈이 내리면 
그 눈을 치우지 않고 동굴이나 웅덩이 같은 곳에 보관하고
입구에는 관목 줄기나 나무 토막을 덮어 여름이 와도 녹지 않도록 하였다.
 

 

 푹푹 찌는 여름이 오면 그 고장에서 생산되는 양이나 염소의 젖을 넣고 난초의 뿌리 가루,과즙을 넣어 

떡메 치듯이 계속해서 치대고 누르며 반죽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스크림은 찰떡 같이 되어 흘러내리지도 않고 길게 늘어난다.


이 돈두르마스는 칼로 썰어서 먹을 수도 있는데
찰지면서도 뒷맛은 부드러운게 한번 먹으면 아주 잊혀지지 않는 맛이 된다.


요즈음은 터키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음식이 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수입해와서 프랜차이즈점이 성업 중이다. 



현지에서 이 돈두르마스를 파는 상인은 대개 전통 복장을 하는데
수레 위에는 소리가 다른 여러가지 모양의 종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기회만 나면 돈두르마스를 사먹곤 했는데
그 맛도 맛이지만 파는 상인의 익살스러운 장난이 관광객에겐 큰 볼거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사원 옆 골목 돈두르마스 상인의 쇼는 그 중 제일 볼만하다.  


 

  갖은 테크닉을 다해 아이스크림을 비벼대어 푹 퍼가지고는
돈두르마스를 손님에게 주었다가.... 빼앗았다가.... 돌려서 떨어뜨리려 했다가.....
주려다가 빼앗아 가서는 종을 쳐서 울리고....큰 뭉터기 채로 퍼서 주려고 하다가......
손님의 입에다가 푹 집어 넣는 등 갖은 장난을 다 친다. 


 

환상적인 쇼를 보고나서 받아먹을 때의 그 즐거움으로 말하자면 2달러 정도의 아이스크림 값은 전혀 아깝지 않다. 

 

터키 남자들의 해학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돈두르마스 쇼에서 더 잘 드러나게 되고
특히 이쁜 여자가 손님일 때에는 돈두르마스 쇼가 가히 절정에 다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에는 손님들과의 기념 촬영을 먼저 제안하는 친절함도 잊지 않는데
터키 남자들이 여자들과 사진을 찍을 때의 특징은 
얼굴을 바싹 붙이거나 허리를 끌어안거나 어깨를 꼬옥 끌어안는 것이 다반사니
혹 터키 땅에 처음 가시는 여자분들은 당황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진의 여성은 K양. 초상권 보호를 위해 면상 비공개임당..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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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을 하는 동안, 길거리나 바자르에서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풍경이 있는데
다름 아니고 체중계를 길에다 내어놓고 앉아 있는 부녀자나 노인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는 사우나, 찜질방이 한 동네에도 몇 군데씩 있어서 갈 때마다 체중을 잴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이 체중계를 구비하고 있어서 하루에도 몇번 씩 자기 체중을 재곤 하는데
터키의 가정에는 체중계가 없는 집이 많다보니 길거리 체중계에 올라 자기 체중을 확인하는 사람이 많다.

오토가르(버스 터미널)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서는
덩치가 아주 크고 화려하기까지한 전자식 체중계가 놓여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간단한 가정용 구식 체중계를 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체중계를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이나 부녀자, 노인들이 많은데
저렇게 하루종일 지키고 앉아 있으면 대체 얼마나 벌까.....하는 생각이 들만큼
사람들은 대부분 체중계 앞을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체중계에 올라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는 없었다.


이스탄불에서 야경을 구경하러 술탄 아흐멧 지구로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트램길 바로 옆에서 손뜨개 용품을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 앞에 저울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밤이 깊었고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도 한산해지는 시간이라
뜨게용품을 사는 사람도 몸무게를 재는 사람도 없이 모두가 그 앞을 스쳐 지나가길래
체중 재는 장면을 기념사진으로 남기기로 하고 
사용료를 물어보니 두명에 1달러란다.
일행이 세 명이니 세 명에 1달러 해달라고 하니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No!"라고....ㅠㅠ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깎아달라고 조르니 마지못하는 듯 허락을 한다.

 
K가 먼저 체중계에 올라가고 필자가 체중 재기 인증 샷을 남기기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니
히잡을 쓴 이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강경한 어조로 "No photos !"라고 외친다.

대부분의 터키 사람들은 사진 찍히는걸 매우 좋아해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서로 찍으려고 포즈를 잡기도 한다.
찍은
사진을 모니터로 보여주면 너무나 즐거워 하며 크게 웃고 고맙다고 하는데 이처럼 거부하는 케이스는 처음이었다.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이 아주머니는 다른 이슬람권에서 왔거나 콘야 지방에서 온 수피파 교도가 아닐까..짐작해 보았다.
그런데 체중 재는 K의 인증샷을 찍다보니 아주머니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같이 찍히게 되었다.
이 사진을 히잡 쓴 아주머니가 보면 자기 영혼이 빠져 나갔다고 싫어하실까....?

 K가 올라가서 체중계 눈금을 보니 원피스에 샌들까지 다 신고 올라갔는데 몸무게가 2kg나 덜 나간다.
그 다음 S가 올라가도 -2kg, 필자가 올라갔는데도 마찬가지로 체중이 -2kg이다!
와우~! 팬태스틱.....! 너무 착한 저울이에요~!

이 엉터리 길거리 체중계는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이스탄불을 방문한 세 여자에게 <다이어트>를 시켜준 것이다.
너무나 쉽게 다이어트 시켜준 이 <착한> 저울에게 우리는 기분좋게 1달러를 지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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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 제국의 수도, 유럽과 아시아의 가교...이 명칭이 모두 가능한 곳은 세계에서 단 하나.....바로 이스탄불이다.


이곳은 단순히 이스탄불로만 부르기에는 성이 안 찰 정도로 '감동이 밀려오는 도시'이다.
터키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이희철 박사에 따르면이스탄불은 "아! 이스탄불..." 이란 감탄사로 로 불러야 느낌이 차 오는 그런 도시라고 한다.  

 역사 시간에 우리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던 동로마 제국이 AD 330년부터 AD 145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아 번창했고그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도 AD 1453년 부터 AD192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니1600년간 세계를 주름잡은 대제국의 수도를 지낸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골든 혼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 이미지 출처: http://www.reisenett.no

            이스탄불 2,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단 몇 줄로 줄여서 설명해 보면.... 이스탄불의 가장 오래 된 이름은 '라고스'였다.현재의 사라이부르누에 세워진 라고스라는 도시는 BC 660년  '비잔티움'이 이 도시에 세워질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비잔티움이란 명칭은 그 지역에 새롭게 거주한 그리스인 메가라 족의 족장 '비자스'의 이름을 딴 것인데이 명칭은 로마 시대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까지 계속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헤레나 여제, 이미지 출처: http://upload.wikimedia.org

 AD 324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상업,교통,방어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비잔티움에 도시 재건을 시작하여6년 만인 AD 330년에 완공하고 이름을 '노바 로마'로 하였으니 바로 '새 로마'라는 뜻이다.그리하여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바뀌게 된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그린 그림, 이미지 출처 :http://www.constantinople.org.uk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제국 내부의 경제 파탄 및 부패로 인해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두 아들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정치,경제적으로 강해지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 비해상대적으로 약해져 있던 서로마는 AD 476년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되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리던 동로마 제국에 의해 이어져 나가게 된다.

  성 소피아 성당(하기야 소피아)              

               로마 제국의 상속자이자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은 황제의 강력한 지배와 군사적 통치권을 강화하게 되는데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AD)때에는 국력을 확장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는등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스탄불 시내를 둘러싼 비잔틴 시대 성벽 

       이로써 비잔티움 천도 AD 330년부터 AD1453년 수도 함락까지  1123년간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격, 이미지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에 제동을 건 것은 11세기말 튀르크계인 셀주크 제국이었으니셀주크의 침공과  십자군 원정에 의해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비잔틴 제국은 점점 약소국으로 전락하다셀주크 투르크족이 건설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매드 2세의 침공으로 인해 AD 1453년 비잔틴 제국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 당하게 된다. 

  전성기 오스만 터키의 영토, 이미지 출처 :http://www.bahaullah.org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칭하는데 이후 16세기 쉴레이만 1세 황제 때에 동서 정벌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르는 최대의 영토를 가지게 된다.또한 메카의 정복과 함께 마호메트의 자손들에게 내려오던 '칼리프'라는 칭호를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이어받게 되니 오스만 제국은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1912년의 이스탄불,   이미지 출처 :http://www.dimitris.gr

  건국 초부터 쉴레이만 황제 때까지 오로지 영토 확장에만 주력해 왔던 오스만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하여 최대 전성기와 함께 점점 쇠퇴가 오기 시작하는데17세기 후반 빈공격 당시 곤경에 봉착한 것을 계기로 수 차례에 걸친 패전을 겪은 뒤 인해 제도를 서구화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한다.

 이스탄불 전경, 이미지 출처 : http://www.firstworldwar.com

20세기 초 열강들의 영토 점령으로 인해 패색이 짙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독일이 패전하자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될 형편에 놓이게 되고400년 이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온 그리스조차 아나톨리아(터키 중부의 땅)의 일부를 요구하고 나선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이미지 출처 :http://lh4.ggpht.com

 이 때 터키 공화국의 국부(터키어로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이 등장하여 열강에 의한 영토 점령에 반대하고 민족적 저항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데 1921년 아나톨리아로 공격해온 그리스 군대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대패시키니 다른 나라 군대 또한 스스로 철수하게 된다.1923년 로잔평화조약에 따라 공식 국가 승인을 받아 1923년 정식으로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니이스탄불은 제국의 수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륙에 있는 앙카라로 넘기게 된다.  

   이스탄불의 위스크다라 지역 (가이드북 스캔 이미지)


그러나 아직도 터키의 경제, 문화, 관광의 중심지는 이스탄불이라고 할 수 있으니 
터키 여행에서 이스탄불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앙꼬없는 진빵'이 되고 마는 격이다.

 동서양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  이미지 출처 :  http://www.information-turkey.net


딱딱한 역사를 읽어 내려가는데는 언제나 지루함이 따른다.
하지만 2,700년 내려온 이스탄불의 역사를 위와 같이 단 몇 줄로 간단히 기술하여 보았으니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인 이스탄불을 이해하는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자~그럼.....무한감동이 밀려오는 도시 이스탄불로 떠나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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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네압볼리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서는
에디르네에 위치한 국경을 통과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경을 통과할 때 프리 패스이다.
EU에 가입되어 있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끼리는
남의 나라도 옆 동네 가듯 아무런 제재 없이 차로 넘나들 수 있는데
터키는 아직 EU에 가입을 하지 못한지라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가려면 국경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경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 지대에는
도로를 제외하고는 여기저기 수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터키와 그리스의 관계는 우리와 일본의 관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제의 36년간의 통치를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후 400년간 오스만 터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독립후에도 발칸 전쟁 등 터키와 숱한 전쟁을 벌이다가 1921년 로잔 협정에 의해
터키 내에 살던 120만명의 그리스인과
그리스에 살던 45만명의 터키인을 서로 추방하였으니
현재도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만큼 서로 앙숙인 관계이며
특히 400년간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 사람들은 터키 사람들을 아주 아주 싫어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리스 국경에서 여권 검사를 하고 면세점을 들려보니
면세점에는 오직 술과 담배 뿐이고 화장실 외에는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터키 국경 지대의 편의 시설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을 통과하려면 그리 넓지 않은 강 하나를 건너야 한다.
특이한 것은 다리 난간의 색깔인데 강 한가운데가 서로의 영토 경계선이라서
그리스 영토 부분을 지날 때에는 강의 난간이 그리스를 상징하는 색인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강의 중간 부분을 지나 터키 영토인 다리 부분에 오면 난간의 색깔이 터키를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바뀌게 된다.


강폭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순식간에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오게 되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다리 색깔이 가운데서부터 달라지는지 볼 사이도 없이 넘어와 버리게 된다.


 드디어 국경을 넘어 터키의 영토로 진입한지라 버스 뒤편 창을 통하여 사진을 찍었다.
저멀리 파란 난간의 다리와 이쪽 붉은 난간의 다리 사이에 펄럭이는 두 나라의 국기가 눈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리스로 들어가기 위해 입국 수속을 기다리는 많은 차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리를 지나 터키 쪽 국경 검문소로 진입하니 '튀르키에'라는 터키의 국명이 선명하게 보인다.
검문소를 지나가면서 보니 보초병들이 지키고 서 있길래 차 안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더니
보초를 서는 군인이 '터키 남자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차가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든다.
보초병이 여자를 보고 눈웃음이라니....!


 터키 영토로 진입하니 그리스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는 지루함 때문에
차에서 내려 담배를 태우거나 삼삼오오 짝지어 얘기를 나누는 터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터키 국민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하게 성격이 무지 급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이는 길거리 노점상들은 너무나 친근하고 정겹게 보인다.
터키는 넓고 비옥한 토지로 인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과일들은 값이 싸고 당도도 높으며 무지 신선하다.
 


 국경 도시 에디르네를 지나면 이스탄불 시내로 들어오게 된다. 


이스탄불 길가의 가로수는 올리브 나무가 많고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여유로워 보인다. 


인구 1,200만명이 밀집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스탄불의 모습은 아주 활기차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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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요트와 에게해 크루즈선들이 늘어서 있는 해안을 통해 그리스 및 에게해의 다른 섬들로 연결이 되는 도시인 터키 쿠샤다시(Kusadasi).

 

 

반짝이는 아름다운 바다와 드넓은 백사장,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크루즈선들의 정박으로 인해 유럽인들이 즐겨찾는 이곳은 터키의 에게해 연안의 휴양 도시 중에서도 규모와 시설이 손꼽히는 리조트 도시이다. 
 

 

예전에는 거대 유적 도시 에베소(에페스)로 가는 경유지에 불과했던 이곳은 지금 수십개의 관광 호텔과 휴양촌이 해안선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레스토랑과 나이트 크럽은 나날이 증가하는 많은 관광객들로 그득하여 유럽의 여느 도시보다 더 북적거리는 곳이다.  

 

 

쿠샤다시 입구에 위치한 '비둘기섬'은 긴 방죽으로 본토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귀베르진 아다스'라고 불리우는 이 작은 섬은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 섬을 둘러 싼 14,5세기의 성채가 복구되어서 지금은 터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나이트 크럽으로 변모되었다. 600년이 넘은 오래된 성채를 나이트 클럽으로 변모시키다니....! 우리 같으면 보존한다고 일반인의 통제를 막았을 텐데....  온 나라 안에 이천년 넘는 고대 유적이 차고 넘치는 터키에서는 600년 된 성채 정도는 그저 생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쿠샤다시의 호텔에 짐을 풀고 배터리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으니 빨간 불이 점멸하며 이상 증상을 보인다. 아무래도 고장인 것 같이 생각이 되어 하나 새로 살 겸 쿠샤다시 다운타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SUV차량 처럼 생긴 택시를 불러서 타고 바자르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바자르 입구에 도착하니 이즈닉 타일로 장식된 공동 수도가 먼저 반겨준다. 이슬람 교도들은 정결 의식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은 물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꼭 공동 수도가 있다.
 

 

터키도 여느 유럽과 같이 서머 타임을 실시하므로 여름엔 9시나 되어야 해가 지는데  리조트 도시인 관계로 바자르에는 낮보다는 밤에 손님이 많아 낮시간에는 비교적 한산하다.

 

 

휴양 도시인만큼 유럽이나 터키 전역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아 길에 앉아 노닥거리는 사람이 많다.  

 

미용실 앞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남자들은 머리 하러온 여자 친구나 아내를 기다리는 듯..... 

 

 

이곳에서도 역시나 패스트 푸드점이 대세인 듯 거리에는 버거 킹, 프라이드 치킨집....등이 보이는데

 

 

터키의 청소년들은 주로 패스트푸드점 2층에서 밀회를 가지곤 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각처에서 오는 여행객들이 들끓는 곳이라 옷차림이나 애정 표현이 비교적 자유롭다.

 

커피나 아이스크림, 쥬스 등을 파는 카페도 성업 중인데 아이스크림은 1유로 정도이다.

 

 

바자르의 좁은 골목에 밀집한 상가들은 우리네 재래 시장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데 물건의 진열 상태도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으며 기념품가게들에는 마치 우리나라 관광지에서처럼 조잡한 물건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해적판 게임 CD와 유희왕 카드 같은 것을 파는 좌판을 지키는 꼬마는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주목받는 도시인 쿠샤다시의 부동산 가게에는 매물의 사진과 가격들이 유리에 빼곡이 붙어있다.  

 

 

환상적인 맛의 터키 케밥집의 다양한 메뉴가 눈에 확 들어온다. 

 

 

관광 안내용 모니터인 것 같은데 역시 우리네와 같이 무용지물인 듯.... 아무도 안 쓰는지 앞에 자전거와 모터 사이클이 주차되어있고 낙서만이 노란 페인트 위에 선명하다.

 

터키 사람들은 춤추고 노는 것을 무지무지 좋아하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디스코텍이나 가라오케가 빠지지 않는다. 이 곳에는 우리나라 처럼 관광 버스 춤도 성행하고 유럽에서 가장 큰 디스코텍도 터키에 있다고 한다. 

 

 

여러가지 색으로 무질서하게 간판이 난립한 것도 우리 나라와 비슷한데 네거리에 위치한 귀금속 가게 근처에서 카메라 전문점을 찾아냈다. 
 

 

카메라 용품점 안에는 디카가 많이 진열되어 있고 관광지라 일회용 카메라도 많이 볼 수 있다.

 

먼저 온 손님이 마시고 간 차이 잔이 얌전히 놓여 있는데 터키에서는 손님에게 차이 한잔 대접은 기본이다.

 

다운타운 한가운데 있는 복합 상가로 추정되는 건물은 터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 

 

각양각색 간판들이 조그만 점포나 사무실마다 들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다. 
  

 

호텔 셔틀 버스로 추정되는 차에 손님이 오르고 있는 모습은 쿠샤다시에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지중해에 가까운 쪽이라 야자수가 가로수로 자라고 있고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라 고급차가 많고 사람들의 행색이나 집들도 모두 깔끔하다.  

 

 

횡단 보도도 중앙선도 없는 길에는 차는 차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갈길을 간다. 

 

 

거리 뒷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보니 주차 수준은 우리 나라와 비슷해 보인다.  

 

 

세 시간 정도 다운타운을 돌아보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식사를 한 후 쿠사다시의 야경을 보기 위해 다시 나왔다.
낮에는 길도 잘 모르고 열기가 장난이 아니라서 택시를 타고 왕복했는데 9시쯤 되니 한낮의 더운 기온도 식어 한결 시원해진지라 해변 구경도 하면서 걸어서 바자르까지 갔다. 

 

 

다운 타운의 상점은 크루즈선을 타고 부두에 도착한 수많은 승객을 상대로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길거리에는 터키인과 유럽인들이 한데 섞여  마치 인종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쿠샤다시는 남녀의 차림새가 이스탄불 다음으로 세련되었던 곳이었는데 가는 곳 마다 훈남, 훈녀가 득시글거린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넘쳐나고 모두 밖에 나와서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음식을 즐기고 있다.  

 

 

길거리에 앉아 전통차 '차이'를 마시는 모습은 터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람 다니는 길에 아무 생각없이 놓여있는데도 테이블과 의자들을 다들 잘 피해다닌다.
 

 

음식점의 입간판들이 길에 버젓이 나와 있는 걸로 보아 간판에 대한 규제는 별로  없는 듯 하다. 

 

 

레스토랑에 앉은 사람들은 남녀 모두 축구를 보며 괴성을 질러대고 있는데 축구는 터키에서는 공통 언어여서 남녀 노소 다 축구를 모르고는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이라고. 

터키 전역에는 약 200 여개의 프로 축구팀이 있는데 축구 리그는 3 부로 되어 있어 거의 매일 축구 경기가 있기 때문에 터키 전국민이 축구와 함께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집마다 다 TV가 있지만 모두 카페에 모여 축구를 보는데 이는 우리처럼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질러가며 축구를 보는게 더 신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여행객이 주고객인 쿠샤다시의 바자르에는 갖가지 상품이 넘쳐나는데 우리 나라로 치면 "골라 골라 만원 샵" 정도인 "Everything is  10 Euro"라는 카피도 눈에 뜨인다.

 

유럽 관광객들은 여자나 남자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렇게 동네 장에 나온듯한 편안한 옷차림의 유럽 아줌마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이슬람이 대부분인 터키이지만 검은 머리에 스모키 메이크업을 진하게 한 터키 여자들도 이곳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거나 어깨를 노출한 정도의 옷차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터키 여자들이 미니 스커트나 핫 팬츠로 다리를 노출한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유럽이나 터키에서는 상체 노출보다 하체 노출이 더 심한 노출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 여성 여행객들이 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미니 스커트 등을 입으면 좋지않은 추파와 야유의 대상이 되든지 위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대형 크루즈선들이 매일 정박하는 자유로운 도시 쿠샤다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되니 안심해도 된다.  

 

 

선물 가게에 들어가 보니 특히 터키 도자기의 화려함과 퀄리티는 상상 이상이다.

 

 

길 양쪽에 빽빽하게 들어찬 관광상품점들은 가게의 규모도 대단하고  상품도 질도 상당히 높다.  가게마다 화려하고도 특이한 장식품들이 즐비하여 사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면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터키의 대표적 기념품은  파란 눈알이 그려진 장식품  '나자르 본주(Nazar Boncugu)'이다.

 

이것은 파란색 바탕으로 된 유리에 까만 눈이 그려진 일종의 부적인데
열쇠 고리, 키 홀더, 목걸이, 팔찌....각가지 형태로 다 있다.

 

 이블 아이(악마의 눈)라고도 하는 나자르 본주는 가장 강력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주위의 악마들을 도망가게 하며 타인의 질투나 질시를 빨아들여 주위의 재난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녀서 터키의 대부분 집의 들어가는 입구나 상점의 문 옆에는 어김없이 이것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념품 중에는 <의외로> 인물의 초상도 보인다. 이슬람 국가에선 예로부터 인물의 초상이 절대 금지되어 있어서 왕들 조차도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림이란 것은 오직 책의 삽화일 때만 존재할 수 있는데 이는 신성화, 우상 숭배의 염려 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왕들이 자신의 권세와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책 삽화의 주인공을 자신의 얼굴로 넣는 것이었는데
그런 책을 몇 권을 제작했느냐가 왕의 권세를 증명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후대 왕들이 취임하면 전의 왕들의 책들에서 얼굴만 자신의 얼굴로 갈아치우기도 했다고 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얘기임)  

 

 

이렇게 다양한 냉장고 자석이 많은데 왜 안 사왔지....여행지의 냉장고 자석 콜렉션이 취미인데 고르다가 못 사온 것이 내내 아깝기만 하다.    

 

 

 식료품 가게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터키 젤리가 눈에 뜨인다. 터키 젤리는 달콤하고 완전 죽이는 맛이다.  

 

 

 피파 스폰지밥 스파이더맨 등....익숙한 게임들이 눈에 띈다. 4개에 30유로.....20파운드....50 예니터키리라이고 테스트 해보고 사 가란다. 음반가게에서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의 음반을 달라고 하니 'Tarkan' 베스트 앨범을 추천해 주어서 처음으로 Tarkan을 처음 알게 되고 팬이 되었는데 CD의 값이 유달리 싼 것이 이상하다고 했더니 나중에 들어보니 불법 다운로드 복제 CD였다...ㅎ

 

 

터키의 대부분의 아파트는 주상복합이 많았다. 이슬람사원마저도 1층에는 바자르로 세를 주는 경우가 허다한데 바자르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사원을 운영한다는데 심지어 가장 큰 사원인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에도 수백년 전부터 모스크 아래에 '아라스타 바자르'라는 바자르가 있어서 사원의 수입을 충당하기도 했다고. 

 

 

 

 늦은 시간이지만 가게는 낮보다 오히려 손님이 많다.
 

 

 터키는 가는 곳마다 보석 가게가 널려 있는데 특히 금은 세공품이 주를 이룬다. 터키에서 남편들은 늘 아내에게 보석을 선물하는데 아내가 걸친 고가의 보석은 남자의 부를 상징한다고.....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에 갔을 때에 보석 가게 앞에서 거울을 보며 뺐던 귀걸이를 다시 끼우고 있었는데 보석 가게 남자가 필자가 하고 있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무슨 보석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이건 이미테이션"이라고 말했더니 그 남자는 "왜 당신의 남자는 당신에게 이미테이션을 사주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도 보석 가게 남자는 앞에 선 여자가 돈이 너무나 없는 불쌍한 여행객으로 보였으리라.... 

 

우리 나라 사람이 유럽이나 다른 곳에 가면 일본에서 왔냐고 먼저 물어보지만 터키에서는 보면 한국인이냐고 먼저 묻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카펫가게 아저씨는  필자가 코레에서 왔다고 하니 어느 도시에서 왔냐? 서울? 대구? 부산? 하며 말을 걸었다. 20년 전에 부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던 이 아저씨는 한국말도 '쬐끔' 한다.   

 

 

바자르 뒷골목으로 가면 유난히 타투나 피어싱을 하는 가게가 많다.

 

 

이슬람과 타투라...영 줄이 안 그어지는 조합이지만 이곳은 여행객들이 주를 이루는 도시라 그런지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나는 곳이다.  

 

 

뒷골목에서는 조명이 밝지도 않은 곳에서 길거리 문신질을 하고 있는 광경도 볼 수 있다. 

 

 

헉....도인을 방불케하는 옷차림과 등과 팔에 문신을 새긴 사람 발견. 터키 전역에서 이런 사람 처음 보았는데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가보다. 

 

유럽 관광지는 밤이 되면 길에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이 무지 썰렁하던데 여긴 12시가 넘어도 사람이 줄어들지 않고 점점 흥청거리고 청소년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닌다.

 

이슬람 신자가 대부분인 터키지만 이곳 쿠샤다시에서는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밤이 너무나 아름다운 젊음과 정열의 도시, 이곳은 터키의 '쿠샤다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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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작은 도시 셀추크(Selcuk)는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유적지 에베소(에페스,Efes)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에베소 도시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127개의 기둥이 있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알려졌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고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 등 기독교 유적들도 남아 있는 곳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너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를 찾아가 본다. 

 

그리스 밧모섬 사도요한기념수도원의 요한&nbsp;모자이크화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 주셨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옆에 있던 요한에게 자기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셨으므로 그 때부터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셨고 마리아의 말년까지 보살폈다.(요한복음19:26-27)


사도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 당시부터 네르바 황제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는데 교회 사학자 유세비우스(Eusibios)에 의하면 AD 37년~42년 사이에 있었던 헤롯 아그리파의 박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때에 요한도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에베소로 왔다고 한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황제의 독약과 뜨거운 기름통에 던져지는 심한 박해 속에서 살아났으며 밧모섬의 극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내며 요한 복음과 요한 1, 2, 3서를 기록하고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의 향년 95세였다.


사도 요한의 유해는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는데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축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황제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로 증측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퇴락하였고 일부 유적만 복구된 상태에 있는데 이곳에서 개종하고 회개한 유대인과 이방인에세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소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리석 바닥의 십자형 구멍에 물을 끌어들여 세례를 주던 이곳은 초대 기독교 이래 거룩한 곳으로 일컬어져왔다. 

 

 

사도 요한 교회는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에는 자미(이슬람 사원)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무너져 쌓여 있는 돌덩어리에는 그 당시 새겨진 묘한 낙서들도 간혹 눈에 뜨인다.
우리 나라의 고누와 같은 놀이판이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확실한 것은 그 당시 사람만이 알 일이다.

 

 

사도 요한 교회의 유적 뒤로는 비잔틴 시대의 성채가 자리잡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방문할 수가 없다.

 

 

사도 요한 교회는 너무나 퇴락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고 축소 모형에서 원래의 웅장했던 규모와 아름다움이 짐작될 뿐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사도 요한 교회 언덕 위에 서니 아래로는 마을의 한적한 전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마을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기둥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이다. 리디아의 마지막 왕인 크로이소스가 BC 550년경에 지은 이 거대한 신전은 어마어마한 크기(약 55×110m)로 인해 고대 7대 불가사의에 올랐는데 높이 19m에 지름이 1.2m나 되는 무게 24톤의 기둥이 127개나 있었다고 하고 신전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 작품이 즐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거대한 신전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를 원했던 헤로스트라토스라는 미치광이가 BC 356년 불을 질러 소실되었는데 그후 재건되고 다시 지진등으로 인해 파괴되고 복구되기를 7번, 결국은 더 이상 복구되지 않고 무너져 내린 기둥들은 교회나 궁궐 등을 짓는데 실려나가서 오늘날은 기둥 하나만 남아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형편이다. 
한 때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랭크되었던 어마어마한 건물이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든 현장을 그 당시 사람들은 예측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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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도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 터키 셀추크(Selcuk).
이 작은 도시에는 에베소 고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에베소 박물관,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성 요한 교회,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터,
제 2의 샤프란 블루라고 불리우는 오래 된 쉬린제 마을.....등등
돌아보기도 벅찰 만큼 엄청난 유적이 산재해 있으니 현재의 규모만 보고 결코 작은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듯...... 

그 중 우리의 주목을 받는 에베소(에페스,Efes) 도시 유적은 버가모(베르가마,Bergama) 유적과 함께
'에게해의 두개의 장미'로 격찬 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에베소(에페스)는 소아시아의 수도일 뿐 아니라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기원전 11세기, 그리스에서 온 이오니아인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도시는 비옥한 토지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에게해 연안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항구가 토사로 묻혀져 가고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이 점점 저하되어서 현재의 장소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였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 가면서부터인데
수많은 국제 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도시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으므로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2,3차 선교 여행 때 이 곳을 방문했고 세번째 선교 여행 때에는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나서
그것을 본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2통의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기도 했다. 

 

에베소 유적지 입장권

                                                                                                                                               

터키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가장 큰 에베소 도시유적지는 하루의 일정을 잡는다 할지라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인데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편하다.
유적은 드넓고 볼거리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바캉스 시즌에는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특히 여름에 돌아보려면 시원한 물과 모자, 선글라스는 필수품인데 안 그러면 금방 지쳐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누가 복음을 쓴 '누가의 묘'를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비록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의 일부만 보이나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고
이 후 비잔틴 시대에는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길에
본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명하였다고 한다.  
누가의 묘에는 한국어 안내판도 있었는데 에베소에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터키어 안내판은 없었다...^^)  

 

 

 약 1400명 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오데이온(음악당)'은 보통의 야외 극장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상부에 지붕이 덮여 있었는데 연극 공연 뿐 아니라 회의장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오데이온' 앞에 있는 이 붉은 토기관들은 서로 이어져 로마 시대의 상수도관으로 쓰인 것들이다. 

 

 

'오데이온'과 '국영 아고라' 사이에는 '바실리카(성당)'의 흔적이 있다.
이 곳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의 석상이 발굴되었는데 그 시대에 국영 아고라의 북쪽 광장문이던 것이 바실리카가 되었다. 

 

 

오데이온 옆에는 바리우스의 목욕탕 유적이 있다. 

 

 

목욕탕 유적을 돌아보는 수많은 각국의 관광객들로 이 곳은 가히 인종의 전시장이다. 

 

 

목욕탕은 폼페이와 같이 온돌형 구조로 되어있는데 우리 나라 사우나와 비슷하다고 한다.
로마 시대 목욕탕은 냉탕,온탕,증기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니 발달된 당시 로마의 목욕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공중 화장실 쪽에서 본 목욕탕. 중앙의 풀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다.   

 

 

목욕탕 옆에는 벽을 따라 아무런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이 늘어서 있는데
벽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화장실은 중요한 정보 교환의 장이 되었고 서로의 의사 소통을 위해 변기간의 거리도 상당히 좁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쓰고 버리는 하수가 이 화장실을 깨끗이 쓸어 내리게 되니
에베소 사람들은 이천년 전부터 최첨단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던 것이다. 

 

 

화장실 요금도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과 흘러 나가는 곳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는데
돈을 많이 내면 볼 일도 냄새 없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화장실 앞에도 물이 흘러서 볼 일을 보고 난 후 손도 씻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악사들이 화장실 앞에서 음악도 연주했다고 하니
에베소의 화장실은 정말 모든 근심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을 듯 하다.

화장실 유적지에 오면 모두 다 변기에 걸터 앉아 기념 사진을 남기는데
필자는 변기가 잘 보이라고 한국식으로 쭈그리고 앉아서 승리의 V를 날리며 한 컷 찍었지만 공개할 수 없는 것이 아주 아쉬운 부분이다....^^

 

 

'플레타네이온'은 시의회당이라고도 하는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였는데 사방은 각각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중앙에는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던 아궁이가 있었다. 

 

 

너르디 너른 에베소 일대는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발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 현장 뒷편 코린트 식의 열주 위에 선 석상에는 하늘거리는 옷자락조차도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도미티안 신전'터 옆에 있는 동상 받침대에는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 뱀들이 서로 꼬여있는 지팡이를 말함)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에베소 안의 모든 도로는 색색의 대리석으로 치장하여 빛을 받으면 더 눈부시게 빛난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에베소로 옮겨 오면서 문화의 전성기를 맞은 에베소인지라
아름다운 코린트식의 열주들에서도 이 도시를 거쳐 온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 하나 예사롭지 않은 유적들인데 방대한 지역에 유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보니 거의 방치된 느낌마져도 들 정도이다.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은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는 '헤라클레스의 문'에 장식되었던 것인데
왼손에는 면류관을, 오른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래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로고는 바로 니케 여신의 옷 자락 선(좌측 하단을 보라..)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후기 헬레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메미우스의 비'인데 폰토스의 난에서 에베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와 아들 가이우스를 조각해 두었다.

 

 

메미우스는 술라의 손자인데 3 대에 걸쳐 에베소를 지배한 인물이다. 

 

 

언덕길 아래로 내려서면 메인 스트리트인 '크레티아 거리'가 나타나고 저 멀리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 '세루시우스 도서관'이 보인다. 

 

 

'헤라클레스의 문'에서 '세르시우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리트 '크레티아 거리'는
당시 길 양쪽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많이 소실되었지만 현재도 몇개는 구경 할 수 있다.

 

 

이렇게 머리가 유실되고 몸체만 남은 석상이 너무나 많은데 예전에는 석상의 몸체만 만들어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들어서 석상 몸체에 접합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목이 없는 석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장난기 많은 관광객들은 대리석상 뒤로 올라가 석상의 몸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크레티아 거리의 바닥은 모두 평평한 색색의 대리석으로 포장되어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금새 얼굴이 따끔거린다.
"에베소에는 태양이 둘 있는데 하나는 하늘의 태양이고 하나는 거리의 대리석에 반사된 땅의 태양이다"
터키인 후세인 베이가 이렇게 말할 만큼 에베소의 태양의 위력은 대단하다.

 

'크레티아 거리' 중앙의 북쪽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샘'은 본래는 12m의 크기였으나 현재는 축소된 크기로 복원되었다.
샘 중앙에는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다.



부유한 상인들의 아케이드 거리의 모자이크화가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다.
길바닥 조차도 이렇게 색색의 모자이크로 장식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에베소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점 안에는 로마의 여러 속국에서 수입해 온 갖가지 화려한 명품들이 즐비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2층 개인 빌라들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자이크의 색과 문양의 조화 또한 예사롭지 않은 예술품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팔짱을 끼고 걸었을 이 거리를 필자도 허리를 펴고 보란 듯이 걸어 본다.  

 

 

입구 중앙에 코린트식의 돌기둥이 서있고 한가운데 있는 2개의 상부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있는 아치로 되어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은 '하드리아누스 신전'인데 AD138년에 완성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아치 앞에는 운명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있고 뒤에는 메두사가 조각되어있는데 사진은 메두사의 조각이다. 

 

 

크레티아 거리를 계속 걸어가면 너무나 아름다운 '세르시우스 도서관'이 나타난다. 

 

 

'에베소의 상징'이라고 할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세르시우스 도서관'은
로마 시대 집정관 세르시우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묘 위에 세운 기념물인데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계 제 3 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기둥과 벽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으며
정면의 벽에는 지혜,운명,학문,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여신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오스트리아의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파사드 뒤에는 목조 건물이 이어져 있었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또 지진 피해도 입어서
현재는 건물의 앞 부분만 남아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도서관은 유적지의 거의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으며 복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오른 쪽의 아취형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은 상업 아고라로 내려가는 문이다. 

 

 

도서관 옆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상업 아고라'의 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상을 찍었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도서관 바로 앞의 '대리석 거리' 벽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부조 장식물도 눈에 뜨인다.   

 

 

 '대리석 거리'는 '세루시우스 도서관'과 '대극장'을 이어주는 거리를 이른다. 

 

 

문자 그대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어 편안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터키의 유적지는 어딜 가든 고양이의 천국이라 이렇듯 '대리석 거리'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이쁜 고양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터키 에베소(에페스,Efes)에서 넓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세르시우스 도서관 앞 대리석거리(마블거리)에 이르게 되면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걸까..?
모여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
그리고 왼쪽에는 하트 모양으로 추정되는 문양...
과연 이 문양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렇게 집중시키고 있을까?



이 길바닥의 대리석은 로마시대 에베소에 있던 '브로델(창녀촌,유곽)'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오늘날의 신용 카드 서비스와 같이 외상도 가능하다는 외상 장부이며
윗쪽의 하트 문양은 창녀촌으로 오시는 분에게는 마음을 다한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 옆에 새겨진 발자국 표시는 방향 지시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19금 표시라는 설이 있다고... 

 

 

당시 에베소는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으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으로 안내를 해주는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말거나.....^^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그런 도시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대리석 거리의 끝부분에는 이만 사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던 터키 최대 규모의 '대극장'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AD 3세기에 피온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건립된 이 대극장의 관객석은 높이 38 m, 길이 158 m의 반원형 모양인데
청동과 도자기제의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음향 효과도 뛰어났다고 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화각이 좁은 똑딱이 카메라로 찍으니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극장 안 무대 위에 서니 마치 글레디에이터의 전투 장면이 벌어질 것 같은 위엄이 무대 전체를 감돈다. 

 

 

높이가 38m 나 되다 보니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약간 아찔할 정도이다. 

 



대극장 위에서 왼쪽으로 보면 '세루시우스 도서관'의 옆 모습이 보인다.
마주 보이는 아취 형태의 문은 기원전 3 세기경의 건물인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다.
이 문은 '세루시우스 도서관' 앞에서 '상업 아고라'로 이어진 문인데
아우구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디우스가 해방되고 나서 황제 일족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증한 문이다.

아취 문 앞에 늘어선 열주를 따라 '상업 아고라(시장터)'가 이어지는데
가로 세로 110 m의 넓은 터로 되어 는 아고라는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3 세기에 세워진 아고하는 카라카라 황제 시대에 벌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이 아고라에서는 청동 제품, 도자기 제품, 아라비아산 약용 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으며
'항구 거리'를 통하여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고라와 연결된 '항구 거리'는 대극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길이 500 m 정도의 거리이다.
항구 거리 양쪽에는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아르카디아 거리'로도 불리우는 이 거리는 바다로 이어지는 에베소의 현관이다. 

 

 

항구 거리 아고라의 끝에는 에게해가 있어 상선들이 줄지어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하구의 토사가 점점 쌓이게 되어 바다가 점점 메워지다보니 지금은 유적지에서 바다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항구 거리를 마지막으로 에베소 유적지를 나서니 에베소 북쪽 출입구 밖에는 많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마치 우리 나라 국립 공원 같은데에 늘어선 상점과 그 느낌이 너무 흡사해서 너무나 친근감이 든다.



상점 앞에는 터키의 국기가 새겨진 티 셔츠를 특히 많이 걸려 있었는데 터키 인들의 국기 사랑도 우리네 못지 않게 각별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관광상품점에는 특이한 전통 악기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고 그외에는 수공예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고학 유적지의 규모로는 세계에 다른 적수가 없는 에베소는 모든 세계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곳이다.
진지한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생각했던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
격식을 따지지 않는 여행객들에게는 나이키 신상이나 매음굴을 연상시키는 음란한 암시에 다시 한번 즐거워지는 곳.
'최초이자 가장 거대한 아시아의 중심지'였던 황금기의 에베소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면서
바울이 에베소로 들어올 때 이용한 아르카디아 길을 따라 에베소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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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00만의 이즈미르(Izmir)는 이스탄불,앙카라에 이은 제 3의 도시로써 터키의 주요 산업지이며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세계 여행가들이 들려서 볼만한 역사적인 볼거리는 적지만 에베소(에페스)와 페르가몬 유적 관광과 함께 에게해 연안 리조트로 가는 기점으로써 여행에서 주로 기지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이다. 

 

 

이즈미르는 성경에 서머나(스미르나)로 기록되어 있는데 신약 시대에도 잘 지어진 공공 건물들이 즐비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호메로스의 출생지이기도 한 서머나에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여 세운 신전이 있어 그 곳에서 황제 숭배가 행해졌는데 이곳 신자들은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함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굴하지 않아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칭찬을 받은 교회로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었다. 

 

 

옛날부터 내려온 국제 도시답게 도시는 깨끗하고 세련된 분위기였는데 가로수가 대부분 야자수인 것이 인상적이었고 

 

 

역동적인 터키 제 3의 도시답게 곳곳에 건설 중인 건물이 눈에 많이 뜨였다.

 

 

서머나 거리를 이리저리 헤매다 목적지인 폴리캅 교회 앞에 도착하니 이미 5시가 넘어 교회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할 수 없어 교회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는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부를 못 보고 가기엔 너무 서운하다고 사정했더니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왔으니 관람 시간이 늦었지만 특별히 예배당 문을 열어주겠다고 하며 교회 뜰로 안내해주었다

 

 

교회 문이 잠겨 있는지라 사무실 계단을 통해 올라가서 가서 다시 아래로 계단을 내려가니 조그만 뜰이 있었고 맞은 편에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외관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그다지 큰 것 같지 않았다. 

 

 

아주 소박한 교회 문을 통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내부는 상당히 넓었고 장식도 너무나 화려하였다.  

 

 

맨 앞의 제단은 비잔틴 교회의 전형적인 장식으로 잘 꾸며져 있었는데 

 

 

제단 가운데에는 폴리캅 감독의 형상이 있었다.

 

 

교회 내부를 돌아보니 예수님의 성화는 옆 쪽에 위치하고 있고... 

 

 

어린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로부터.... 

 

 

여러 성인들의 조각...등.... 

 

 

교회 전체를 돌아가며 빼곡이 성화와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다.  

 

 

입구쪽 유리 상자 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형상이 실제 크기의 형상으로 조각되어있었는데 옆구리에 창에 찔린 흔적에서 물과 피가 흐르는 모습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이 교회를 폴리캅 교회라고 부르는 까닭은 사도 요한의 수제자 폴리캅(Polcarpus) 감독이 시무하였던 곳이기 때문인데 AD 160 년에 교회를 핍박하던 박해자들이 폴리캅 감독을 잡아서 예수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였을 때에 그는 "예수님을 믿은지 86년 동안 주님은 한번도 나에게 잘 못 하신 일이 없는데 내 어찌 주님을 모른다 하리오.." 라고 대답하여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화염 속에서 찬송을 부르며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로 왼 쪽 아래 부분에 폴리캅의 화형 장면이 천정화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는 계시록 2장의 기록이 바로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이며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주님의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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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분열 이후, 아타루스 왕조인 필레타이로스가 기원전 281년에 건국했다는 페르가몬(Pergamon) 왕국. 페르가몬 왕국의 유적이 남아있는 터키 베르가마(Bergama,버가모)를 찾아가 본다. 

페르가몬 왕국은 문화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중에서도 도서관 수준은 세계 최대급이었다. 페르가몬에 질투심을 느낀 이집트는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는데  곤란해진 페르가몬은 양피지를 발명해내었다.
'페르가몬의 종이'란 뜻의 양피지(parchmen)는 책 한권에 드는 양의 가죽이 양 15 마리분이어서 제작 비용이 상당했으나 파피루스보다 튼튼하고 양면에 문자를 적을 수 있었던 덕분에 책은 '두루마리'에서 '책자'로 변했고 도서관의 책 보존은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양피지 발명으로 인해 페르가몬 도서관은 장서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서 당시 약 20 만권의 장서를 보유하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세계 제 2의 도서관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페르가몬 왕국은 문화와 상업,의학의 중심지였고,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처럼 계속 발전할 수 있었지만 이 후 비잔틴, 아랍, 터키를 거쳐 오면서 왕국의 특색은 엷어지고 점점 몰락해가서 현재 남아 있는 페르가몬의 유적은 산상 도시 아크로폴리스(Akropolis)와 고대 의료시설인 아스클레피온(Asklepion)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버가모(베르가마)에서는 아크로폴리스와 아스클레피온 유적을 뒤로 한채 강을 걸쳐 세워져 있는 아주 당당한 건축물을 둘러 보았는데 바로 '크즐 아블루(Kizil Avlu)'이다.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인 2,3 세기에 건립된 이 건축물은 원래 고대 이집트 여신 사라피스를 모시는 거대한 신전이었지만 후일 비잔틴 시대부터는 로마 국교인 기독교 교회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었다.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버가모는 소아시아에 있는 7대 교회중 한 곳이었다.



버가모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과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던 도시였기에 초대 교회 당시 신전에서 올리는 제사로 인해  도시 전역이 항상 연기로 자욱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버가모 교인들의 신앙 생활은 단지 입으로만 읊조리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삶이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터키어로 '크블 아블루(붉은 관)또는 '레드 바실리카(붉은 성당)'라고도 한다. 현재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붉은 외벽만 남아있을 뿐인 이 거대한 건물은 60*26 m 의 면적과 19 m 의 높이를 자랑한다.

 

 

본래 빨간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대리석을 덧붙여 감추어지게 되었는데 이 곳의 대리석은 오랜 시일을 거쳐 떨어져 나가고 최근에는 마루를 덮고 있던 대리석 마감재만이 온전하게 붙어있다.  

 

 

 떨어져 나간 부분들은 일부 새 벽돌로 복원이 되고 있었는데

 

 

무너지지 않은 일부 문들은 정말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어 크즐 아블루의 전성기를 짐작케 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마을과 성채가 정말 액자 속의 그림 같다. 

 

 

이 건물 분수대 아래로는 셀리누스 강에서 물을 운반하는 지하 터널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거대한 크즐 아블루의 주변에는 당시 건물의 부서진 조각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터키는 지진이 많은 곳이라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유적이 크즐 아블루 주변에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다. 

 

 

이곳에는 유대인 회당도 있었던지라 대리석 기둥에 쓰인 히브리어도 발견할 수 있다.

 

 

깨어진 돌판들과 부서진 채로 맞춰진 조각들이 그 시대의 자취들을 무언으로 알려주었다. 

 

 

크즐 아블루의 문을 나서니 담 옆에는 무화과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크즐 아블루 입구에는 술탄의 우아한 세탁소처럼 상점마다 굉장히 공교하게 짠 카펫들이 걸려있어 보기만해도 눈이 즐겁다. 버가모(베르가마) 에서는 염소 가죽과 신선한 백색 치즈, 과일과 튤립, 꿀, 요쿠르트, 피스타치오등의 특산품이 많이 생산되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특산품은 역시 버가모(베르가마) 카펫이다. 버가모(베르가마) 카펫은 아직도 손으로 짠 구식 방식으로 만들어지므로 최상급의 카페트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카펫을 구입하려고 돌아볼 때에는 너무나 말끔한 색상의 카펫은 주의하는 것이 좋다고. 



카펫 상점마다 다양한 사이즈와 길이의 카펫과 킬림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킬림은 비단으로 짜거나 수를 놓거나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평평하게 짠 여러가지 유형의 융단이나 자루를 말하며 카펫은 이러한 직물에 매듭으로 단단함과 부피감을 더한 직조 공예품을 말한다. 카펫과 킬림은 때로는 아주 길게 짜서 소비자가 원하는 길이로 잘라서 팔기도 한다.  

 

길 가에 카펫을 깔아 놓은 모습은 마치 우리 나라 추수기에 벼를 말리는 풍경을 연상케 하고 담장에 늘어놓은 다양한 색상의 카펫도 이채롭다.

 

 

 노상에서 카펫을 팔고 있던 부자의 포트레이트를 찍어보았다. 부자의 얼굴과 포즈가 똑 같은게 너무 재미있다. 

 



"원달라~~원달라~~~"를 외치며 엽서를 팔고 있던 아저씨는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You're so good~" "You're so beautiful~"을 남발하며 칭찬해 주더니 엽서를 안 사고 그냥 돌아서서 오니 따라와서 엽서를  공짜로 선물해 주었다. 차를 타고 출발하는데도 차창을 보고 계속 손을 흔들어줘 가슴이 찡했다. 

 

페르가몬의 산상 도시 유적 아크로폴리스(Akropolis)의 대극장은 해발 333 m 언덕의 급경사면을 이용해 만들어진 부채 모양의 야외 극장으로써 엄청난 높이와 규모를 자랑한다. 80 m나 되는 까마득한 관객석은 층계가 3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려 일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아래쪽의 귀빈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을 만큼 화려한 극장이다. 여기에서는 배우가 맨 아래의 무대 중앙에 서서 보통의 목소리로 말하여도 가장 맨꼭대기의 관객의 귀에 편안하게 들리는데 이러한 구조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건축에 대한 견해에도 좋은 교훈을 준다. 이 언덕의 맨 위에서 보면 너무 높아서 발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급경사면이지만 전망이 뛰어나서 버가모(베르가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고.... 

푸른 하늘에 순백색의 기둥이 아름다운 이 건물은 페르가몬의 상징인 트리야누스 신전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전인데 기둥이 늘어선 회랑이 신전의 세 방면을 에워싸고 있다. 트리야누스 황제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완성되었다.
현재 아름다운 코린트식과 이오니아식 열주가 복원되어있다. 

육체보다 정신을 중요시했던 고대 종합의료센터 아스클레피온(Asklepi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에서 유래한 아스클레피온에서는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건설된 기원전 4세기에 이 곳에서 의료가 실시되었다. 외부 공기로부터 영향을 차단하는 회랑,성스러운 물,극장,도서관,진료소,신전 등을 겸비한 당시 최대의 의료 진료소이자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강 온천이었다.
유명한 카라카라 황제도 이 곳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스클레피온에서도 '성스러운 길'은 당시에는 기둥이 아치 형태로 서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150 m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극장으로 이어지는 이오니아식 열주가 계속되는 북쪽의 콜로네이드(회랑)은 당시에는 지붕이 덮여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멋드러진 열주만 서 있다. 쭉쭉 뻗은 열주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버가모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했다. 고대 페르가몬 왕국의 아크로폴리스나 아스클레피온같은 유적을 두고 그냥 떠나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서머나로 가야할 시간이 임박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아쉬운 맘을 뒤로 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엽서 파는 아저씨와 카펫 장수 아저씨의 차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뒤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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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에베소를 갔을 때에 잠시 어느 공장 앞에서 정말 무서운 나무를 발견했다. 언뜻 보기에는 자작나무 같은 이 나무를 자세히 보는 순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나무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날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수십개의 눈을 크게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데 한참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오싹할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파리나 나무 줄기는 자작나무와 거의 비슷한데 이렇듯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는 나무는 생전 처음 보는지라 너무나 신기하기만 하다. 이 나무의 이름이 무언가 해서 경상북도 수목원 홈피에 문의글을 올렸으나 한참이 지난 지금도 답이 없다.



여러분은 이런 나무를 보신적이 있으신지...?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나무 앞에 서신다면 어떤 느낌이 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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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이와 같은 카피를 내세우며 혜성같이 나타나 
80년대 우리나라 스포츠 브랜드를 일찌감치 제패한 '나이키(NIKE)'

나이키는 1972년 빌 보어먼이라는 육상 코치와 필 나이트라는 육상선수가 만나 탄생된 이후로
수없이 난립하는 많은 스포츠 브랜드 중에서도 여전한 인기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데....



나이키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의 비결은 제품의 품질과 디자인에 그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날렵한 부메랑이 날아가는 듯한 특이한 로고 '스워시(Swoosh)'야말로 나이키 인기의 일등 공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사모트라케의 니케

          
나이키(NIKE)의 브랜드 네임은 '승리(Victory)'라는 뜻인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전하기 위해 42.195Km를 달렸던 그리스 병사가 기도를 올린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유래되었다.
로마 신화에서 니케는 역시 승리를 뜻하는 빅토리아(Victoria)여신에 해당되는데 니케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이 바로 '나이키'이다.

나이키 창립 당시 회사를 상징할 만한 로고를 찾던 보어먼, 나이트 두 동업자는
포틀랜드 주립대학에 다니던 여대생 캐롤린 데이비슨(Caroline Davison)에게 로고 디자인을 의뢰하는데
캐롤린은 여신 니케의 날개와 옷자락에 흐르는 선에서 영감을 받아
승리를 표현하는 V를 부드럽게 뉘어 놓는 현재의 로고를 만들어 내어 나이키의 열정적인 스포츠 정신과 승리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이때 캐롤린은 나이키 로고 "스워시(Swoosh)" 를 넘기고 단돈 35달러를 받았는데
현재의 나이키 로고 이미지의 가치는 약 100조원에 이른다고 하니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로고를 넘긴 캐롤린은 많은 돈을 챙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이후 나이키 탄생과 번창은 시대와 딱 맞아 떨어졌는데 야심에 찬 미국 베이비 붐 세대의 개인주의와
자기 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은 조깅 붐으로 이루어졌고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운동화는 세계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으니
나이키는 스포츠 품목으로는 유일하게 코카콜라에 이어 유명 브랜드 2위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캐롤린이 영감을 얻었다는 니케의 온전한 모습을 터키의 에베소(에페스, Efes) 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다.

니케는 티탄 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전쟁의 여신이기도 한 아테나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단독으로 그려질 때는 날개가 달려 있고 종려나무 잎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 있는 니케 신전의 니케(파이오니오스의 니케)는 승리의 상징인 날개가 없다.
그것은 승리의 여신인 니케가 날아가지 말고 영원히 아테네를 지켜주길 원하는 시민들에 의해 그 날개가 잘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개 잘린 니케는 아테네를 지켜주지 못했는데
터키의 침공을 받아 아테네의 상징 아크로폴리스가 터키 총독 관저로 쓰이기도 하고

1687년 베네치아가 아테네를 침공했을 때에는 베네치아군이 쏜 포탄이 파르테논에 쌓아둔 화약을 폭발시켜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이 날아가 파괴되고 신전 안의 박공부에 붙어 있던 많은 조각상은 산산조각이 나서 오랫동안 쌓여 있었다.
이후 엘긴이라는 사람이 대부분의 조각품을 자기나라 영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이후 조각품 대부분은 대영박물관 파르테논 특별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고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편이니....
아테네 시민은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자른 댓가를 톡톡이 치른 셈이다.

 


하지만 엄청난 스포츠 마케팅 효과를 창출해낸 일등공신 '에베소 니케'의 아름다운 날개와 부드러운 곡선의 옷자락은

강인한 스포츠 정신에 영향을 미친 덕분인지......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이천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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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베소(에페스,Efes)에서 넓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세르시우스 도서관 앞 대리석거리(마블거리)에 이르게 되면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걸까..? 모여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
그리고 왼쪽에는 하트 모양으로 추정되는 문양...
과연 이 문양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렇게 집중시키고 있을까?


이 길바닥의 대리석은 로마시대 에베소에 있던 '브로델(창녀촌,유곽)'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오늘날의 신용 카드 서비스와 같이 외상도 가능하다는 외상 장부이며
윗쪽의 하트 문양은 창녀촌으로 오시는 분에게는 마음을 다한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 옆에 새겨진 발자국 표시는 방향 지시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19금 표시라는 설이 있다고... 

당시 에베소는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으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으로 안내를 해주는 세계 최초의 광고판 이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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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장사 루디아의 고향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두아디라(Thyatira)의 현재 지명은  터키 아키사르(Akhisar)이다. 
소아시아 서부에 있던 고대 리디아 지방의 성읍이며  버가모(페르가몬)와 사데(사르디스) 사이에 위치하는 두아디라는 BC 300년 경에 셀레우코스 1세(시리아왕)에 의해서 헬라식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로마 제국 시대인 1세기에는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트로이 전쟁사를 썼던 서머나 출신 시인 호메로스가 “두아디라에서는 유명한 자주색 천이 생산됐다”는 기록을 남겼을 만큼 

두아디라는 염색업으로 유명한 도시였는데 그외에도 직조, 피혁, 도기, 빵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여신자  자주색 옷감 장수 루디아가 이 두아디라 출신으로 유명한데 사도행전 16장 13∼15절에는 사도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빌립보의 루디아 기념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겨진 사도 바울과 루디아

 

그리스 빌립보까지 가서 자주 옷감 장사를 했던 대상(大商)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를 세울 정도로 헌신적이었는데
빌립보에는 현재 루디아의 세례터가 남아 있고 그 자리에는 루디아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다.


 

두아디라의 교회터는 현재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고 석축과 담장 정도만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교회터도 빙 돌아가며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는 주택지 한가운데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교회 마당에는 여저기저 그당시의 건물 잔해만 남아 있을 뿐 루디아이 자취는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었다.


 

두아디라 교회터에서 나와 유적지 근처 동네를 잠시 살펴보았다. 오트바이를 개조한 정체 불명의 차에 다섯명이나 타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운전하는 흰 수염 아저씨의 머리에 쓴 뜨게 모자가 멋스럽다.


 

교회터 건너 옷가게 앞에 의자 앞에 앉아 있는 아가씨들의 사진을 찍어보았다. 한 아가씨는 히잡을 쓰고 한 아가씨는 맨 머리를 내놓고 있지만 둘은 친구인듯 보였다. 히잡 쓴 아가씨의 손에 담배가 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매우 보수적일 것 같은 터키에서는 담배에 관해서는 오히려 남녀가 평등해서 여자가 담배를 꺼내면 남자가 불을 붙여주는게 당연한 신사의 도리라고 한다.

 

 

동네 이발소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한국에서 온 이방인을 보고 신기해하며 몰려들었다. 터키 사람들은 외국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고 모두들 사진찍는 것을 매우 즐긴다. 벽에다 구두를 걸어 놓은 것이 눈에 확 뜨인다.


 

너무나 맛난 터키 아이스크림....터키 전통 아이스크림을 '돈두르마스'라고 하는데 돈두르마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포스팅하려고 한다. 아이스크림을 받는데 잘못하여 바닥과 손에 콘이 흘러내렸는데 이 가게 직원들은 친절하게도 새 아이스크림을 다시 주었을 뿐 아니라 수건을 가지고 나와 손을 깨끗이 닦아주기도 했다.
 

 

가게 앞의 재미있는 전봇대 낙서가 눈에 뜨인다.   낙서의 성적인 표현과 욕설은 만국 공통인 듯......

 

 

거리에서 낙서를 찍고 있는데 한 모녀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이 엄마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도 반갑다고 끌어안고 쪽쪽 키스를 해주었다.
어디를 가도 마음 깊숙히 우러나는 친절을 보여주는 터키 사람들, 두아디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터키 두아디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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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사데 (사르디스,Sardis)의 현재 지명은 Sahlili이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방 서머나 (현재 이즈미르) 동쪽으로 85 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옥한 도시인데 BC 1200년에는 옛 리디아 (루디아)왕국의 수도로써 군사상 상업상의 중심지였다.

고대 리디아 제국은 소녀들이 결혼할 때 지참금을 벌기 위해 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고대 국왕 칸다올레스는 경호원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부인의 나신을 훔쳐보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여왕은 그 경호원 기네스에게 목숨과 왕을 살해하는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는데 결국 기네스는 왕을 죽이고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의 조상이 되었다. 

 

 

또 리디아인들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오락거리를 많이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고 이곳은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생산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크로이소스의 아버지 알리아테스 왕이 고안해낸 발명품이 바로 우리가 요즘 쉽게 쓰고 있는 '동전'인데
맨 처음 동전은 황금과 은의 합금인 호박금으로 만들어졌고 아무런 글자도 쓰이지 않고 사르디스 왕실 휘장이었던 사자머리만을 새겼다.

 

크로이소스는 최소한 10톤의 황금을 쏟아 에페수스에 호화로운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하고 치장했는데
서양에서 '크로이소스만한 부자'라는 표현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에게 자주 비유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이 많이 나오는 까닭은 '황금의 손 미다스'가 이 곳의 팍톨루스 강가에서 목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신화에 따르면 미다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친구이자 숲의 신인 실레노스를 사로잡았으나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므로 디오니소스는 그 보답으로 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미다스는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음식마저도 손을 대면 금으로 변하여 먹을 수가 없었고 그의 공주조차도 금으로 변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된 미다스에게 디오니소스는 사르디스 근처에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목욕을 하게 하여서 황금의 소원에서 벗어나도록 했는데 그후 팍톨루스 강에는 사금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아크로폴리스는 난공 불락의 도시로 알려졌는데도 BC 549년에는 페르시아(바사)의 키루스 2세(고레스)에 의해,
BC 218년엔 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점령되는 비극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비밀의 종교가 성해 요한 계시록  3장 4절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폐허나 다름없는 사데 유적지에서 가장 장관을 연출하는 건축물은 단연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성경에서는 아데미 신전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위의 사진은 에페스(에베소)의 셀수스 도서관 옆 후미진 창고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찍은 것이다.

 

사데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페수스와 사모스,그리고 디디마에 있는 다른 대규모 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중에 가장 큰 신전이다. 신전은 BC 550년 경 건설을 시작했지만 이오니아인의 반란에 파괴되었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복구를 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위용이 짐작되는 엄청난 높이의 신전 기둥  2개가 남아 나란히 서 있어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기중기가 없던 시절에 엄청난 크기의 돌을 잘라 빈틈 없이 쌓아 올린 기술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수 없다.

 

 

이 신전은 거리가 짧은 막다른 곳에 여덟개의 기둥을 두고 양쪽 가장자리에 20개의 기둥을 배치시키는 이오니아식 배열로 이루어졌는데 남아있는 기둥만 보아도 신전의 원래의 크기가 짐작이 되고 엄청난 높이의 기둥 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제단은 신전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구조는 건물 정면이 언덕 경사면을 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된다.

 



미쳐 복구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치되어있는 신전의 기둥을 보면 마치 무른 석고를 조각하듯 정교하게 조각되어있고....

 

기둥에서 떨어져 나동그라진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는 코린트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장식 기법 중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을 받는 장식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거대한 폐허 기둥 뒷편에는  벽돌로 된 사데 교회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현재의 남은 건물의 잔해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이라고 한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부요하였기 때문에 물질 문화에 빠져서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로 기록되어 있다. 

 

 

신전 바로 뒤에 있는 트몰루스(Tmolus, 해발 2,137m) 산은 마치 사람이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것 같은 형상의 산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리디아 왕국와 아르테미스 신전, 사데 교회의 흥망성쇠를 수천년 동안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었을 트몰루스산을 뒤로 하며 사데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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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는 현재 터키의 에페수스(에베소)의 동쪽 150km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데니즐리이다. 라오디게아는 인근에 있는 히에라볼리(파묵칼레)의 뜨거운 온천수를 수로를 통해 끌어다 썼는데 뜨거운 온천수가 히에라볼리에서 9km 떨어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다 보면 물이 식어서 미지근하게 되었으므로 라오디게아 주민들은 뜨겁지 못하고 미지근한 온천수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시록 3:15~16)" 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에 대해 책망하는 구절이 나오게 된다. 

 

미지근하다고 책망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폐허에 내리니 작열하는 태양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온천수는 미지근하였을지 모르나 오후의 햇살은 살갗이 따갑도록 강렬하여 모든 것을 다 녹아내리게 하는 듯 했다.

 

완전히 구워삶을 것만 같은 뜨거운 햇살 아래 폐허가 되어 잡초가 무성한 유적지를 돌아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순례의 길과도 같은 여정이다.



유적지의 상세 배치도는 터키어로만 되어 있어서 읽어보아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영어로도 함꼐 써 주면 좋으련만.......

 

 

라오디게아는 AD 60년의 지진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되어 현재는 건물과 기둥들이 퇴락한 벽채가 되어 흩어져있는데 지진으로 무너진 폐허 위에서도 기둥 몇개는 용케도 남아서 서 있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유적지는 복구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크레인으로 무너진 건물과 기둥을 다시 쌓고 있었다. 

 

라오디게아 교회 유적지의 문은 아름다운 아취형으로 되어 있었다.

 

 

아취형 문앞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어서 공사중인 교회 담벼락 위로 올라가서 내부를 보았다.

 

내부는 제법 넓은 편이었고 건물은 문을 통과해서 또 다른 문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크레인도 없던 시절에 크고 무거운 돌을 반듯하게 잘라서 하나하나 올려놓은 건축 기술은 정말 놀랍기만 했고

 

나동그라져 있는 대리석 조각에는 소용돌이 치는 듯한 문양이 바로 어제 새겨놓은 듯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열심히 라오디게아 교회의 여기저기를 찍고 있는데 갑자기 공사장에서 홍길동 같은 아저씨가 아취 위로 나타나더니 사진을 찍는 필자를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를 나름 해석해보니 여기는 유적 복구중이라 출입 금지이며 사진을 찍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작업 반장인 듯한 이 터키 아저씨에게 유적 사진은 안 찍겠는데 당신 사진은 찍어도 되겠냐고 하니
(이 사람은 영어가 전혀 안 통해서 바디 랭귀지로...^^) 갑자기 이 아저씨.....입이 찢어질 듯 반가워하더니 잘 찍으라는 듯한 행동을 하며 카메라를 보며 폼을 있는대로 잡는 것이었다. 한컷을 찍고 나니 너무나 좋아하며 옆에 서 있던 S양도 같이 사진 찍자고 손짓해서 부르더니 카메라 앞에서 갖은 포즈를 다 취하는게 아닌가....


얼마나 우스웠던지......사진을 찍은 후 모니터로 보여주었더니 아주 만족해하며 아까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잘 가라고 친절하게 인사도 해주었다. 심심하고 허전하던 라오디게아의 폐허 위에서 만난 이 아저씨의 위트있는 행동은 라오디게아의 빈터를 보고 돌아가는 얼굴에 웃음이 그치지 않게 만들어 주었고 아직도 라오디게아를 생각하면 이 아저씨의 능글능글한 웃음이 살포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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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빌라델비아(Philadelphia)의 현재의 지명은 터키의 알라세히르(Alasehir)이다. 고대 빌라델비아는 루디아 지방의 중앙 고원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있던 고대 도시로 교통의 중심지이며 서쪽으로는 버가모와 사데를 잇고 동쪽으로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를 잇는 도시였다.

버가모왕 아탈루스 2세(BC 159~138),곧 필라델푸스(Philadelphus)는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빌라델비아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합성어로써 '형제애'를 뜻한다고 한다. 빌라델비아는 헬레니즘 문화를 동방의 오지까지 전파하는 역할을 한 곳인데 BC 19년에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던 것을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건하여 소아시아의 중요한 성읍이 되었다.

 

성경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책망을 받지 않고 유일하게 칭찬만 받은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인데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사도 시대의 빌라델비아는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인해 성도들은 매우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도리어 이들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해 주었다.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력한 교회였으나 안으로는 내실이 있는 교회였는데 그들은 건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단을 물리쳤으며 여러가지 신앙의 시련이 닥쳐와도 요동치 않고 인내와 성실로써 잘 견디어 나갔기 때문에 '성전의 기둥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약속되었고 이 교회는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교회의 모본이 되었다. 

 

파묵칼레(히에라볼리)의 북서쪽으로 자리잡은 빌라델비아에 남아있는 성 요한 교회의 유적을 찾아가 보았다.
 

 

전성기 때에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되는 성 요한 교회는 터키에 자주 발생하는 지진으로 인해 거의 다 무너지고 아래는 돌로, 윗부분은 벽돌로 되어있는 두 개의 육중한 돌기둥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뿐이어서 찾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성 요한 교회는 기둥 두개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교회 유적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담장 바로 옆의 조그마한 주택은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색을 칠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옆 집의 벽은 샛노란 색으로 칠했는데 역시 터키 사람들의 남다른 색채 감각은 알아주어야 한다. 

 

 

성 요한 교회의 바로 맞은 편에는 조그마한 자미(이슬람 사원)가 자리잡고 있었다. 건축술이 아름다울 것도.... 사람이 많이 모일 것도 같지 않은  이 조그마한 자미의 나즈막한 담장을 타 넘으려던 꼬마애가 카메라에 잡혔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타 넘고 가려던 이 꼬마는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발견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얼음'이 되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던지.... 

 

 

마침 '여름 코란 학교(?)'를 마치고 하교하던 중이었을까? 고만고만한 애들이 팔에 커다란 코란을 안고 자미의 담 위에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었다. '메르하바'하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자주 볼 수 없는 한국사람이 신기한지 얘들이 도리어 우리를 보러 몰려 들었다.

아슬람이 주를 이루는 나라이긴 하지만 터키의 어린 여자애들은 히잡을 잘 쓰지 않는데 자미에서 공부하고 나오는 중이었는지 모든 여자애들이 다 히잡을 두르고 있었고 모두다 너무 이뻐보였다. 사진을 찍어주니 미소를 띄며 얌전히 포즈를 취해주었는데 저쪽 편 더 어린 여자아이들은 우리들도 찍어주지....하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도 이리 오라고 불렀더니  담장 위에 다소곳이 걸터 앉아서 아주 얌전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모두 9~10살 내외로 보였는데 모두 양 볼이 터질 듯이 통통한 것이 너무나 귀여웠다. 

 

 

좀 더 어린 아이들은 우리 나라 같으면 1~2학년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도 히잡을 써서 그런지 성숙해 보이고 미모도 돋보였다. 가운데 담장을 뛰어넘던 아이도 같이 앉아서 포즈를 취했는데 제일 앞의 여자 아이는 살짝 나온 똥배가 무지 귀여웠다.  

 

 

코란 학교의 왕언니들인가...? 5~6학년 쯤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들은 어린 동생들에 비해 매우 의젓하고 벌써 여인네의 티가 난다.
크면 모두 다 한 인물 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는 이쁜 모습들이다. 집에서 싸 온 간식일까? 아니면 자미에서 나눠주는 간식일까?
간식을 먹다가 손에 들고 카메라 앞에서 제법 세련된 포즈를 취해 주었다. 분홍색 카디건을 입은 아이가 손에 든 것은 터키의 전통 요쿠르트인 '아이란'이고 갱지같은 포장지에 싸인 빵은 터키의 국민적인 빵 '시미트'이다. 

 

 

교회 건너 그늘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던 연세 지긋한 아저씨들 또한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었다.
손자인 듯한 아이가 매우 귀엽다고 했더니 아주 아주 좋아했는데 동서고금을 비롯하고 손자 사랑은 다를 바가 없나보다. 

 

 

카메라를 가지고 동네를 싸돌아다니는 필자와 동행이 신기하게 보였는지 빵집 총각들도 일하다 말고 나와서 우리가 하는 행동을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터키인의 주식과도 같은 빵 '에크멕'이 진열장에 잔득 진열되어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 에크멕은 필자가 지금껏 먹어본 빵 중에 가장 맛있는 빵으로 손꼽는 빵이다. 

 

 

빵집에서는 시미트,에크멕 등 터키의 전통 빵을 장작불을 때는 전통적인 오븐을 사용해서 굽고 있었는데
오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니 열기가 장난이 아닌 오븐 옆에 바싹 붙어서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빵집 주인인 듯한 아줌마와 그의 아들도 이방인을 위해 함께 포즈를 취해주었다. 옆에 있던 동행 S가 아줌마를 보고 "촉  규젤~(Very Beautiful)"이라고 하며 손을 둥글게 모으는 제스츄어를 하자 아줌마는 생전 처음 보는 S를 와락...안아주었고
시미트(참깨가 발려져있는 동그란 도넛 모양의 대중적인 터키빵)를 종이에 싸서 뭐라...뭐라 하며(가면서 먹으란 뜻인 듯.....)우리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받은 시미트를 한입 베어무니 고소한 맛과 함께 처음 만나는 사람도 이웃같이 대하는 빵집 아줌마의 인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빌라델비아에서는 성 요한 교회의 폐허와 그 근처 동네를 잠시동안 돌아보기만 하고 떠나야했다. 칭찬받는 믿음을 가졌던 빌라델비아의 교회터를 돌아본 것도 인상에 남았지만 이슬람 사원 앞에서 만난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순박하고 정감어린 모습들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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