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뜰 산책........................'에 해당되는 글 269건

  1. 2011.10.03 북촌마을 청원산방, 전통창호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리다 21
  2. 2011.09.21 북촌 한옥마을과 잘 어울리는 치과, '이 해박는 집' 16
  3. 2011.09.09 추석연휴 가족여행,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어때요? 23
  4. 2011.09.07 간월재 상공을 오색으로 수놓은 패러글라이딩 24
  5. 2011.08.12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에서 한여름 무더위 날려보내세요~ 32
  6. 2011.08.05 이기대에서 본 해운대, 광안대교와 오륙도 풍경 24
  7. 2011.08.01 포항 내연산 보경사 계곡의 아름다운 12폭포 25
  8. 2011.07.28 해운대 관광유람선 타고 돌아보는 광안대교와 오륙도, 영화 해운대 촬영지 24
  9. 2011.07.20 다니엘 헤니가 묵었던 북촌마을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 락고재 23
  10. 2011.07.06 타임머신여행에서 만난 병원, 북촌 계동길 최소아과 32
  11. 2011.06.29 부산 금정산, 도심 속 마음의 고향을 가다 26
  12. 2011.06.17 보현산 천문대, 별이 머무르는 곳으로 떠나다 28
  13. 2011.06.13 영덕 블루로드 석리 어촌마을의 나른한 오후 풍경 27
  14. 2011.06.10 영천자천교회는 아직도 남녀칠세부동석? 27
  15. 2011.06.08 바다가 그리운 날엔 청사포로 간다 28
  16. 2011.05.06 경상북도수목원에 찾아온 늦은 봄소식 31
  17. 2011.04.04 울산의 동피랑 신화마을을 아시나요? 36
  18. 2011.03.28 신선도 머물러갈 환상의 절경 부산 태종대 48
  19. 2011.03.23 자갈치시장의 별천지 하늘공원 전망대 32
  20. 2011.02.25 환상적인 부산 야경과 만나는 롯데백화점 광복점 전망대 31
  21. 2011.01.19 울기등대와 대왕암에서 본 환상적인 노을 39
  22. 2011.01.03 거가대교 개통! 끔찍하게 힘들었던 통행 체험 49
  23. 2010.12.14 1박2일 여행지, 최고의 일출 명소 울산 대왕암 45
  24. 2010.12.13 1박2일 광역시특집에도 나온 울산 간절곶 소망우체통 41
  25. 2010.12.06 1박2일 6대광역시 특집 강호동의 대구 미션 수행 명소 48
  26. 2010.11.01 주왕산 절골, 운치있는 가을 풍경을 만나다 48
  27. 2010.10.15 계산성당, 대구 근대 역사의 아름다운 증인 40
  28. 2010.09.08 슬프도록 아름다운 소록도의 창(窓) 33
  29. 2010.09.07 숨겨진 진주처럼 아름다운 곳, 경북 청도 48
  30. 2010.09.03 소록도에 가면 구라탑이 있다? 48


마치 타임머신 여행을 떠난 듯 6,70년대의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계동길.

차 두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은 계동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영진문고와 경기철물건재상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봉산 게스트하우스와 노란벽 작업실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북촌로6길.
얼마 걷지 않아 소나무 내음이 그대로 풍겨나는 듯 단아한 한옥집이 나타난다.

바로 서울 종로구 계동길 북촌마을의 또 다른 진주 '청원산방'이다.






나즈막한 담장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대문채에는 예스러운 글씨체의 '청원산방(淸圓山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담벼락에는 '성심예공원'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 창호 연구소'라는 팻말이 함께 걸려 있다.
이곳 청원산방은 전통창호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라고 하면 되겠다.





미리 전화를 걸어보지 않고 방문한지라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두들겨 보았더니
안에서 기척이 나더니 겨자색 셔츠를 입은 남자분이 나오신다.
바로 무형문화재 소목장이신 심용식 선생님이시다.
멀리 경주에서 청원산방의 소식을 듣고 집의 내부를 구경하러 왔는데
집안을 돌아보아도 실례가 되지 않겠냐고 물으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직접 집안을 안내해 주신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맞은 편을 바라보니 마주 보이는 안채에도 멋진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이름은 
‘계수헌(桂樹軒)’.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처럼 아름답다는 뜻인데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현판이라고 한다.
대문에 걸려 있는 '청원산방(淸圓山房)'이라는 현판과 함께 우리나라 서단의 거목인 초정 권창윤 선생께서
청원산방이 전통문화와 전통창호의 앞날을 은은한 달빛처럼 비춰 주길 바라는 기대와 소망을 담아 쓴 것이다.




일반적인 한옥의 창호는 한가지로 통일되어 있는데 반해 청원산방의 창호는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주 보이는 창호에 정자매화꽃살문과 솟을빗꽃살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대부분 두겹으로 된 청원산방의 문은 안쪽 문이 간결하면 바깥문은 화려하게, 바깥문이 장식적이면 안쪽문은 담담하게 만들어달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ㄷ자 모양으로 조붓하게 들어앉은 방들에는 귀갑살문, 완자팔각문, 정자살문, 꽃완자문......등 각기 다른 종류의 문과 창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통 창호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인 이집의 
문과 창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 방문객들에게 보여진다고 한다.

 




마당 한구석에는 꽃담이 잘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꽃담 아래에 나무로 꾸며진 수도도 있어 운치를 더해주기도 한다.




마당에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운 모래 위에 구들장돌로 된 댓돌이 깔려 있어서
마치 강물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댓돌을 밟고 집안으로 들어가 본다.





장지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방안으로 들어서니 8폭 매화 병풍이 다소곳하게 둘러쳐 있고 그 앞에 나무로 된 침상이 자리잡고 있다.





바깥에서 보는 창호 역시 아름답지만 이렇게 안에서 비쳐보이는 소박한 창호는 화려한 창호보다 더욱 아름답다.
이런 창호는 완자창의 기본인 사분합완자미서기문이라고 하는데 보통 화려한 꽃살문의 내부문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역시 안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완자교살문. 우리 조상들의 디자인 감각은 정말 너무나 현대적인 것 같다.






사분합아자미서기문의 제일 안쪽에는 채광과 외부 조망을 위해 유리를 끼웠다.
이맇게 다소곳하고 정갈한 창호로부터 화려하고 특색있는 창호까지 청원산방에는 모든 창호가 다 모였다.

서재 및 응접실의 용도로 보이는 방에는 책과 찻잔, 기념패등이 서가에 빼곡이 꽂혀 있었는데 서가 또한 방의 구조에 맞춰 직접 짜맞춘 것이다.





서재의 꽃완자문의 유리 너머로 보이는 안 마당과 꽃담이 너무나 아름답다.





바깥문은 소박한 세살문이고 안쪽에는 이렇게 화려한 꽃완자문을 두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서재의 남쪽 부분의 창호는 동산 위에 달이 든 것같은 모양의 달아자살문으로 되어 있다.
마치 만월이 방 안에 둥그렇게 뜬 것 같은 창호를 보니 어쩐지 안쪽으로 발을 디뎌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을 양쪽으로 살짝 밀고 들어서니 거기는 심용식 선생의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다. 이렇게 멋진 컴퓨터방이라니....
더구나 채광을 위해서 이곳의 창호는 한지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에 비치는 무심한 대나무가 마치 한폭의 그림같다.




컴퓨터방에서 왼쪽으로 꺾어 살펴보니 세상에......! 여기는 너무나 모던한 주방이다.
블랙과 화이트로 세련되게 매치를 이룬 주방 가구들을 보니 이런 집에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의 오른쪽에 난 빗살불발기문을 밀고 들어서니 이곳 또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이 펼쳐진다.




유리로 칸막이가 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은 놀랍게도 욕실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다.
욕실에 습기가 많은데 나무가 썩지 않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럴 염려가 없다고 한다.




집안을 하나 하나 설명하면서 설명해주신 후 심용식 소목장께서는
거북이 모양으로 된 대문 빗장까지도 닫았다 열었다 하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창호를 한곳에서 다 만날 수 있는 청원산방을 지으신 심용식 소목장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 되던 1969년부터 10여 년 동안
조찬형 선생에게서 전통창호 제작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톱밥가루와 6년을
함께한 끝에 수덕사에 첫 작품을 걸었다고 한다.





이후 심용식 소목장은 이광규, 최영한, 신영훈 선생을 만나 목재 고르는 법, 연장 다루는 법 등
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과 실습뿐 아니라
장인의 자세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안목을 배우며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국내외 중요 건축물의 창호 제작에 참여하여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1981년 성심예공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전통창호 제작활동을 했다.






그는 문 하나를 만드는 데 집 크기, 바람세, 빛의 양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까지 고려해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는데.......





좋은 나무를 찾느라 발걸음 내딛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오랜 세월 나무를 만지면서 축적한 감각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계보다는 수작업으로 모든 창호를 제작한다고 한다.

이러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철학을 집대성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6년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창호제작)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에는 ‘서울전통예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백 가지 전통창호의 명맥을 잇는 것은 물론, 전통 창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창작하기도 하는데......
 





그가 작업한 전통 창호 작업들을 보면 낙산사 원통보전, 동학사, 백담사 대웅전, 불국사 선원, 불영사, 석남사, 송광사, 
수국사, 수덕사, 운문사. 운주사,해인사 비로전 ......등 사찰의 꽃살문들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춘전, 양화당, 문정전, 창덕궁 인정전 등 궁궐의 꽃살문,




과천 제비울미술관, 교보문고 대문,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직동 운경재단, 양평 돌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사랑방, 프랑스 고암서방....등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전통 창호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공간인데도 옛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청원산방. 

아무리 훌륭한 전통문화라도 현대에서 고유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인정받아 재해석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서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하고 고민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개발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심용식 소목장.

창호 연구와 제작은 물론 자신의 예술 세계를 물려 줄 수 있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창호가 박물관에만 전시되어 있는 죽은 전통이 아니고 현대인과 함께 숨쉬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열정을 아끼지 않는 심용식 소목장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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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병원 가기를 싫어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가기 싫은 병원은 뭐니 누가 뭐래도 치과 병원이 아닐까?
필자는 십여년 전에 굳게 박힌 사랑니를 제대로 뽑지 못하고 쩔쩔 매는 의사 선생님 덕분에
30분 이상 치과 도구와 씨름하다 겨우 겨우 사랑니를 적출해내고 나니 
입가가 다 헐어버리고 피가 흘러내렸던 피가 맺혔던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는지라
아직도 치과 의자에 눕기만 하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온몸이 경직되어 버리곤 하는데......





북촌 한옥마을을 여유있게 돌아보고 언덕을 넘어 가회로로 내려오니 
길 가에 서 있는 한 아름다운 한옥의 이름이 '이해박는 집'이다.





돌도 된 입간판을 보아 하니 치과의 다른 이름은 E - 믿음치과인데
나무로 된 간판에는 '이해박는집'이란 재미있는 상호가 붙어 있다.
 




'이를 해 박는다......!
참으로 원초적인 묘사라 생각되어 대문에 가까이 가 보니 오래 된 사진 한장과 함께 해설이 붙어있기를......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1874~1926)의 인산(왕실의 장례)일에 우연히 찍힌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 간판입니다. 
1907년 순종 원년 종로에서 잇방을 개설한 최승용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사진 속에 있느 이해박는집이라는 간판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라고 쓰여있다. 치과의 건물이 한옥인 것도 참 친근감이 들지만 치과 이름이 '이해박는집'이라니....
참으로 북촌 한옥마을에 딱 어울리는 치과의 이름이 아닐 수 없고
이런 멋진 이름을 붙인 의사선생님은 정말 우리 말과 한옥을 사랑하는 멋진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병원도 장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는 구조라 드르륵 문을 밀고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이해박는 집 바로 옆에는 소나무 갤러리라는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는데
치과 대기실이 좁아서 바로 곁에 있는 집을 카페로 꾸며서 환자 대기실로 쓰고 있다고 한다.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치과 의자에 누우면 왠지 긴장이 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드는데
한옥으로 된 이런 멋진 치과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치과 가기 싫어하는 마음이 조금은 줄어들고
윙......하는 기계음 소리도 조금은 덜 무섭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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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된 것에 반해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 마을이다.
1908년까지 낙안군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낙안 읍성은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곽과 내부 마을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
낙안읍성 안에는 관아를 비롯하여 100여 채의 초가가 소담스레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데
아직도 전통적인 주거 공간을 지키며 그대로 생활하고 있는 서민들의 모습을 읍성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지방계획도시로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낙안읍성.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전통 문화를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낙안읍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낙안읍성을 찾는 이들을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성곽 동쪽에 위치한 낙풍루이다.




1834년(순조4)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걸로 보아 이전부터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고 일제 통치하에 관리 소홀하여 퇴락하여 없어졌지만 낙안읍성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복원되었다.




성곽에는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사방 30cm정도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음성의 동문은 낙풍루, 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이라고 부른다.
진남문 문루 위에 올라보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관광객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문루에 올라 이리 저리 드러 누워 누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기도 한다.





둘레가 1,410m인 성안의 면적은 약 40,000평 정도인데 성안에는 100여채 정도의 가옥들이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가옥은 초가의 형태가 많은데 이 초가들에는 실제로 85세대  229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 낙안읍성의 특징이다.





이 마을은 단순히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민속 마을이 아니라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터전이므로
읍성 안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주민들의 사적인 공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성 위에서 살펴보니 읍성 안 남쪽에 연꽃이 많이 핀 연지가 보인다.
이곳에 연지가 있는 이유를 옥사에 갇혀 있던 죄수들의 탈주를 막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고
성내에서 사용한 생활 용수가 연지를 거쳐 정화된 다음 수구를 통하여 성밖으로 빠지게 하기 위해 만든 연지라는 설도 있다.





백련이 소담스럽게 핀 연지도 있지만 이렇게 노랑어리연으로 가득 덮힌 연지도 있어 길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초가집 사이로 난 돌담길에는 이렇게 능소화가 이쁘게 드리워져 시선을 붙들기도 한다.





읍성의 남쪽이 백성들을 위한 거주 공간이라면 북쪽에는 행정을 위한 관아와 객사 등이 자리잡고 있다.
객사는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영접하고 머물게 하던 곳으로써
낙안 객사는 
1451년에 건립되어 1631년과 1857년 2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동헌은 조선 왕조때 지방 관아 건물로서 지방 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이다.







동헌의 동쪽 방은 수령이 서쪽 방은 관리들이 사용했는데 중앙 마루는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죄를 지은 죄수들을 격리 수용하던 감옥인 옥사는 남문으로 가는 길목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개 다른 고을의 경우 관아 옆에 옥사가 있기 마련인데 관아와 뚝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흉악범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옥사 안에는 이렇게 칼을 쓰거나 발에 족쇄를 찬 채로 수감되어 있는 인형들이 있어 들여다 보는 사람들에게 실소를 머금게 한다.


장난기 많은 방문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체험하는 형틀.
일행 중 한명이 형틀 위에 팔을 뻗고 엎드리면 친구들은 형리의 손에서 곤장을 빼내어 엉덩이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신나게 휘갈기곤 한다.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간 객주의 벽에는 오래전에 찍은 듯한 낙안읍성의 설경 사진이 걸려 있었다.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낙안읍성의 전체적인 모습과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조선 초기의 삶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옛 고을의 기능이 그대로 살아 있는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살아 있는 전통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낙안읍성.
이번 추석 연휴, 가족과 함께 나들이하기에 좋은 최적의 장소로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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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알프스라 불리우는 신불산과 간월산의 중간에 위치한 간월재.
가을이면 영남 알프스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억새 평원을 자랑하는 곳이다.
여름에 찾은 간월재에서는 환상적인 억새평원을 볼 수는 없었지만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의 환상적인 활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활공을 하는 동안 패러슈트가 절벽의 바위에 걸려 대형사고가 날뻔한 사건도 목격할 수 있었지만
바람을 타고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패러글라이더들은 보는 사람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패러글라이딩을 배워 신불산과 간월산 하늘을 마음대로 오르내리고 싶었지만
두려운 마음에 감히 실행해보지 못하고 사진으로 담아온 패러글라이딩 현장을 살포시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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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들 사이에서 낙조 사진 촬영지로 이름난 부산 다대포.
붉게 타는 저녁 노을 아래 금빛으로 일렁이는 바다와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멋진 실루엣.
나는 언제 한번 저런 멋진 사진을 담아보나....하고 벼르고만 있던 중
갑자기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바람을 잠재울 수 없어 무작정 다대포로 향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운전해서 찾아간 다대포는 사진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다대포 연안정비사업의 일환인 방사림 조성을 위해 해변에 쌓아 둔 토사 더미가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진입로조차 제대로 찾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고

낙동강에서 떠내려 온 흙탕물과 찌꺼기로 인해 누런 파도만 무섭게 넘실댈 뿐
발을 담그기도 꺼려지는 지저분한 해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서쪽 하늘에 두텁게 끼어 있는 구름으로 인해 아름다운 낙조도 기대하기 힘든지라
멋진 낙조를 담겠다는 미련은 훌훌 털어버리고 
다대포의 자랑인 꿈의 낙조 분수쇼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총면적 3,510에 지름 60m, 둘레 180m,최대 분사 높이 55m로
'세계 최대 바닥 분수'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다대포 꿈의 낙조 분수.
평일 1회, 주말에는 2회의 공연이 이곳에서 벌어진다는데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제법 많다.




8시가 되니 이윽고 아름다운 음악이 사방으로 울려퍼지고 수많은 분수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웅장하고 화려한 곡에서부터 분위기있는 영화음악,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는 최신 가요까지
음악에 맞춰 색색의 분수가 춤을 추는 광경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드는 진기한 구경거리다.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호텔의 음악 분수가 유명하지만 이곳 다대포 꿈의 낙조 분수는
규모나 그 화려함에서 세계 최대의 분수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분수이다.





분수의 아름다움에 빠져 정신없이 사진 몇장을 찍다보니
그제서야 차 트렁크 안에 삼각대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삼각대를 가지고 왔으면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텐데......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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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서울 성곽길, 부안 마실길, 영덕 블로로드......
가는 곳 마다 건강을 위한 걷기 코스가 잘 마련되어 있는 요즈음.
부산의 둘레길이라 불리우는 '이기대 해안길'을 따라 걸어 보았다.

'이기대 해안길'은 총 8.6km에 이르는 해안길로 광안리의 민락동 회센터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안리 해수욕장, 용호만, 동생말, 어울마당, 농바위를 거쳐 오륙도까지 이르는 길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대 도시자연공원의 입구인 동생말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륙도까지의 약 4.6km에 이르는 길을 걷게 되는데
필자는 자연공원 관광안내소 지점에 차를 세우고 숲길로 내려가 이기대 해안산책로를 걷는 코스를 선택했다.





싱그러운 내음이 풍기는 숲길을 조금 걸어서 내려가니 눈앞에 바로 탁 트인 바다와 건너편 달맞이 언덕이 나타난다.

 




해안길에 서니 저멀리 광안대교의 수려한 모습과 함께 해운대의 마천루, 동백섬의 누리마루, 달맞이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광안대교의 모습은 광안리에서 보는 것 보다 전체의 모습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해안 언덕에 서서 발 아래를 내려다 보니 해안길 너럭바위가 참 희한도 하다.
크고 둥그런 물 웅덩이가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는데 꼭 공룡 발자국같이 생겼다.





바로 앞에 있는 표지판을 읽어보니 역시나...!
이 둥그런 자국은 6,500만년전 중생대 백악기말에 살았던 대형초식공룡인
울트라사우루스의 발자국 화석으로 추정된단다.





해안길 전체를 둘러가며 이렇게 너럭바위들이 둘쑥날쑥하며 자리잡고 있으니 보기에도 참 좋고
낚시를 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해안 동식물 관찰하기에도 참 좋은 곳이다.






이곳의 경관이 좋은 해안 바위를 '섶자리'라고 부르는데
'섶자리'란 '섶'과 '자리'의 합성어로 '물고기가 많이 모일 수 있는 잘피와 몰이 무성한 곳'이라고 한다.
잘피는 침수식물을 이름이고 몰 역시 해초의 일종이니
이곳에 홍조류, 갈조류, 녹조류 같은 해안식물이 무성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해안길을 오르며 내리며 걸어가는 동안 좌우에 조그만 야생화들이 여행자들을 반긴다.
섶자리에 해안동식물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갯까치수영, 돌가시나무, 해국, 메꽃.....등 아름다운 야생화까지 덤으로 볼 수 있으니 해안길 트레킹이 심심치 않다.





이쯤 해서 이기대란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기대(二妓臺)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좌수영의 역사와 지리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 '동래영지'에

좌수영 남쪽으로 15리에 두 명의 기생(二妓)의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고 한다.
혹자들은 이르기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 축하연을 열고 있을 때
당시 두 명의 기생이 함께 왜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투신했고 그 무덤이 이곳에 있어서 유래된 명칭이라고도 한다.





이기대 어울마당은 1,0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촬영장소로 유명하다.
119구조대원인 이민기와 해운대에 놀러온 날라리 강예원의 데이트하는 장면이 이기대에서 촬영된 것.
이기대에서 광안대교, 해운대 야경을 보면서
이민기가 사투리로 이기대의 지명과 유래를 설명해주는 바람에
강예원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해프닝을 겪는 극중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도 많이 계시리라.

이때 단순한 영화의 배경으로만이 아니라 직접 이기대라는 이름이 영화 속에서 거론되는 바람에
그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기대 산책로가 사람으로 붐비게 되었다고 한다.





 

평일에는 그나마 좀 한산하지만 주말에는 이기대 해안길을 찾는 사람들이 일일 평균 5,000명이 넘는다고 하니
영화와 함께 미치는 상승 효과는 대단한 것 같다.

 

 



이기대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이기대 해안길에서 가장 멋있다는 치미바위, 농바위까지 가지는 못 하고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 차를 몰고 승두말 언덕으로 향했다.



용호 농장이 있었다는 승두말 언덕은 SK뷰 아파트 군락이 마치 장성처럼 버티고 서 있어 입을 딱 벌리게 한다.

아파트 주민이야 오륙도를 눈 앞에 거느리는 최고의 경관을 접할 수 있어 더 이상 좋을 수 없겠지만
이기대 자연공원의 경관이 아파트로 인해 답답함을 주게 되니 보는 이로서는 마음 아픈 일이다.






탁 트인 바다 끝에 서 있는 승두말 언덕 아래 오륙도가 일렬로 서서 찾아오는 이들을 반겨준다.




부산의 랜드마크인 오륙도는 승두말 언덕에서 보면 두개의 섬으로 보이지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보면 밀물 때는 5개의 섬, 썰물 때는 6개의 섬으로 보인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본 오륙도의 모습은 필자의 지난 포스트에서 상세히 기술했으니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라며.....
오륙도 관련 포스트 : 가슴이 탁 트이는 해운대 - 오륙도 유람선 여행



 


처음 걸어본 부산의 둘레길 이기대 해안산책로.
사전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갔던지라 이기대 해안 산책로의 전체 모습을 살펴보지는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이기대 해안길의 아름다움과 부산 앞 바다의 치명적인 매력에 푸욱 빠져서
부산에 사는 사람들을 <억수로> 부러워하며 집으로 돌아왔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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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을 대표하는 산인 내연산은 해발 710m로 그리 높지 않고 능선도 완만하지만
크지 않는 산 속에 거느리고 있는 12폭포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영남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산이다.
일찌기 겸재 정선은 내연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내연삼용추>에 그 모습을 담기도 했다고 한다.

내연산의 주봉으로 알려진 향로봉은 전문 산악인들이나 찾는 험한 코스라서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문수암으로 올라 문수봉을 거쳐 계곡으로 하산을 하는데
등산을 즐기지 않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사시사철 사랑을 받는 곳이 내연산 계곡이다.

내연산 계곡, 또는 보경사 계곡이라고도 부르는 이 계곡의 정식 이름은 갑천 계곡이다.
이 갑천 계곡을 포항 시민들이 특히 사랑하는 이유는 
보경사 경내를 지나 연산폭포까지 비교적 완만한 계곡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등산로가 잘 갖추어져 있어 가벼운 운동화차림으로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내연산 입구에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한 보경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절 자체는 크게 불 것이 없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등산객들은 보경사를 관람하지 않고 내연산으로 바로 향하는 경우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입구에서는 여전히 연령, 단체 구분없이 2,500원의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고 있어서 등산객들과의 마찰이 많다.
필자도 입구에서 거금의 문화재 관람료를 냈지만 쿨하게 보경사를 그냥 지나쳐 바로 계곡으로 향한다.




내연산에 숨은 12폭포를 다 돌아보려면 거의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인 연산폭포까지 2.5km의 거리를 가볍게 걸어보기로 한다.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진 계곡 트레킹 코스는 평평하게 다져진 길은 아니지만 오밀조밀 심심치 않고
대부분의 길은 굳이 등산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될만큼 완만하고 편안하다.





오솔길을 오르면 왼쪽으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이어져 눈을 시원하게 하고




오르막에는 군데군데 이렇게 나무 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편안한 차림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대부분 숲길이라 요즘같이 더운 날에 피서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오르다가 계곡 옆 바위에 앉아 발을 담그고 놀면 금새 땀이 다 식고 물소리, 새소리와 함께 신선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다.




계곡이 깊고 물이 많은 산인 내연산 계곡에는 총 12개의 폭포가 있는데
상생폭포라는 이름을 가진 이 폭포는 주변 절벽과 절벽 위에서 자라는 나무들로 인해 주변 경관이 너무나 아름답다.




상생(쌍생)폭포의 왼쪽 바위를 기화대(妓花臺), 폭포 아래 소를 기화담(妓花潭)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절벽 위에서 풍류객과 가무를 즐기던 기녀가 술에 취해 절벽 아래 소로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비단결 같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폭포 줄기를 담으려면 삼각대를 가지고 와야 하지만
콤팩트 디카 하나 달랑 든 편안한 차림으로 걷는 계곡 트래킹이라 사진에 대한 욕심은 버리기로 한다.




보현 폭포는 이렇게 수줍은 듯 그 모습을 바위 뒤로 살짜기 숨겼다.
아름다운 그 자태를 드러내 주어도 좋으련만.....

보현폭포 이후로는 계곡을 따라 삼보폭포, 문수폭포, 잠룡폭포가 이어지는데
계곡 트레킹 코스 저 아랫쪽으로 폭포가 펼쳐지는 탓에 그 모습을 제대로 담기는 어렵다.





얼마 걷지 않으니 이내 구름다리가 나타나고 그 아래로 관음폭포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선일대와 비하대, 학소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구름다리, 그 아래 두줄기로 흘러내리는 관음폭포,
바로 옆 바위에 뚫려있는 관음굴, 
넓직하게 물이 고인 감로담이 이루어내는 모습은 가히 한폭의 그림이다.






겸재 정선도 내연산의 폭포를 좋아하여 그의 진경산수화인 <내연삼용추>에
잠룡폭포와 관음폭포, 연산폭포의 모습을 한폭의 그림으로 남겨두었다.



겸재 정선이 청하 현감으로 있을 때에 그린 <내연삼용추>에는 맨 위에서부터 연산폭포, 관음폭포, 잠룡폭포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출렁출렁거리는 구름다리를 건너 모퉁이를 돌아서면 12폭포 중에 가장 낙차가 크고 아름답다는 연산폭포가 나타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폭포에서 바위절벽의 높이는 30m 정도......




비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터라 물줄기는 옆 사람의 말이 잘 안 들릴 정도로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리고
날아 흩어지는 물방울은 폭포 앞에 선 사람들의 등줄기에 고인 땀을 일시에 식게 만들어준다.




떨어져 흩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계곡 위에 무지개 다리가 생겼다.
연산폭포에서 만나는 무지개는 그야말로 선녀들이 건너는 구름다리이다. 





폭포 아래 바위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새겨놓고 간 이름들이 여기저기 새겨져있다.
겸재 정선도 이곳을 찾은 기념으로 '정선갑인추(甲寅秋)'라는 글을 새겨놓고 갔다던데 바위가 위험하여 제대로 찾지 못했다.




다시 구름다리를 지나 관음폭포 앞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연산폭포의 윗부분으로 올라본다.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폭포의 윗부분이 이렇게 평온하고 고요하다니......
바위 위에 앉아 가져간 김밥을 먹으며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너무나 시원하고 온몸이 편안하다.




폭포가 떨어지는 학소대 꼭대기로 올라서 아래를 보니 연산폭포의 윗부분이 보인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정말 장관이다.




높은 절벽 위에 올라 서서 주변을 살펴보니 오금이 짜릿짜릿하게 저려오긴 하지만 아래서 못보던 새로운 절경이 반겨준다.





내친 김에 절벽 위에 납작 엎드려 아래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어보기로 한다.
이러다가 실수로 미끄러져 기암절벽 아래로 흩날리며 떨어지는 꽃(落花)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절벽을 깔고 엎드린 배가 간질잔질, 발바닥이 짜릿짜릿, 오금도 저려오지만 용기를 내어 절벽 아래를 보니
관음폭포 아래 아까 건너온 콘크리트 다리가 보이고 그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와 함께 이어지는 계곡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카메라를 줌인해서 보니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한참을 엎드려 있으니 어느새 절벽 위에 엎드려 있다는 두려움도 멀리 사라지고
주변의 산새 소리까지 귓전으로 들려오니 여기가 바로 신선경이 아닐까.....





"나 지금 내연산에 와 있거든. 근데 산이 되게 좋다.
폭포가 12개나 있는데 다 예쁘고 올라가기가 쉬워 너도 좋아할 것 같고......
다음에 같이 한번 와볼까 해서......"
영화 '가을로'에서 갑천계곡을 찾은 김지수가 유지태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함축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계곡을 따라 얼굴을 내미는 12폭포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
가족끼리 와도 좋지만 연인끼리 오면 더욱 사랑스러운 곳. 포항 내연산 갑천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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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 손꼽아 기다리던 바캉스의 계절이 돌아왔다.
산으로, 계곡으로, 바다로, 혹은 워터 파크로......
길지 않은 여름 휴가를 어디에서 보내야 최고의 바캉스가 될지 고민부터 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피서지는 뭐니뭐니 해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그렇게 사람이 많고 물도 더러운 곳에 뭐하러 가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풍성하고 비키니녀들의 터질 듯한 몸매와 함께
젊음이 살아 펄떡이는 해운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을 끄는 흡입하는 매력이 있는 곳임이 분명하다.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구별 안 될 정도로 자유롭고 화려한 해운대에서 즐길거리야 차고 넘치겠지만
오늘은 해운대 피서객들이 꼭 한번 경험해봐야 할 해운대 유람선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해운대 유람선은 해운대 해변의 동쪽 끝부분인 미포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는 '관광 유람선'이라는 간판보다 '마라도 횟집'이라는 간판이 훨씬 더 크게 눈에 뜨인다.
유람선 선착장 2층에 자리잡은 마라도 횟집은 영화 '해운대'에서 설경구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횟집으로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너무나 많이 등장하여 눈에 익은 곳이다.

  



유람선 선착장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고 내부 시설도 그저 그런 편이다. 




승선권을 사려고 개찰구에 가서 보니 승선료가 의외로 무지 비싸다.
대인이 18,000원, 소인이 11,000원이니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니다.

이렇게 비싼 승선료를 지급하고 유람선을 탈 만한 가치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승선권을 구입했다.
승선표에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꼭 기입해야 하는데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서 승선객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관광 유람선의 일주 코스는 두가지이다. '해운대 -  롯데백화점 광복점' 코스와 '해운대 - 오륙도' 코스.
필자는 해운대에서 출발하여 오륙도를 돌아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유람선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대부분 아랫층에 앉아서 유람하는 자리를 선택한다.






이렇게 작은 배로 바다 한가운데 나가면 위험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조금 들었지만
선장님의 든든한 뒷모습을 보니 약간 안심이 된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조그마한 미포 항구가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영화 '해운대'에서 하지원이 운영하던 포장마차 횟집은 사진 속의 빨간 등대와 노란 크레인 사이의 지점인 듯......

 



이윽고 속력을 내기 시작한 유람선, 하얀 물살을 흩날리며 부두를 떠나자 해운대가 뒤로 물러나고 달맞이 언덕이 한눈에 훤히 들어온다.




달맞이 언덕이 뒤로 물러나면 해운대 해변에 위치한 호텔과 아파트 들이 차례로 시야에 나타나고

 



이윽고 동백섬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둥근 지붕의 누리마루 에이팩 하우스가 그 멋진 모습을 보인다.
누리마루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해운대 마린시티는 얼마나 높은지 숨이 턱 막힐 정도이다.
지난번 엄청난 화재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우신골든스위츠도 깔끔하게 새단장을 했다.





해운대 마린시티의 위용은 정말 대단하다. 여기가 도대체 한국인가.....의심될 정도로......
지금까지 마린시티의 스카이 라인을 뽐내던 더샵 아델리스나 대우월드마크콘도, 우신골드스위츠를 눈 아래에 두고
새롭게 들어선 해운대 아이파크나 대우 트럼프 월드 마린은 해운대의 스카이 라인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유람선이 속력을 더 높이니 해운대 서쪽에서 동쪽까지 한눈에 다 들어오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답답하던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이런 맛으로 비싼 돈을 지불하고 유람선을 타는거로구나!





마린시티가 뒤로 서서히 물러나니 이젠 광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 보이는 광안대교의 자태는 정말 수려하다. 광안대교 야경투어도 있다는데 다음번에는 꼭 밤에 유람선을 타봐야겠다.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하고 유유자적 항해하는 요트는 마치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유람선 2층에 서 있는 사람들이 새우깡을 던지니 갈매기가 전속력으로 유람선을 따라온다. 





인천대교 유람선에는 수많은 갈매기가 새우깡을 받아 먹으려고 전속력으로 유람선을 따라 온다는데
해운대 유람선을 따라오는 갈매기는 의외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해운대 갈매기는 까칠한 도시 갈매기인가 보다.




한참을 가니 이윽고 저 멀리 오륙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륙도와 함께 엄청나게 높은 고층 아파트가 눈 앞에 나타난다. 언덕 위의 성곽처럼 우뚝 서 있는 아파트는 오륙도  SK뷰이다.




오륙도가 보이기 시작하자 선장님은 마이크로 오륙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질 낮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은 유람선의 엔진 소리에 묻혀서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고......



 
유람선이 북쪽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니 드디어 하나 하나 갈라진 섬들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오륙도는 부산 북쪽 육지인 승두말로부터 가지런히 들어서있는 바위 섬들로
오륙도란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東萊府誌 山川條)에
“오륙도는 절영도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뫼의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五六島在絶影島東 峯巒奇古列之海中 自東視之則爲六峯 自西視之則爲五峯 故名之 以此)”라 기록된 바와 같이
 보는 사람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승두말에서 가까운 섬부터 우삭도(밀물시에는 방패섬과 솔섬으로 나눠짐),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의 순서로 늘어서 있는데
각 섬마다 수직에 가까운 해안절벽과 짙푸른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오륙도는 섬의 수가 5개 또는 6개로 보인다는 신비감과 함께
명실상부한 부산을 대표하는 섬으로 그 상징성이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유람선으로 오륙도를 한바퀴 돌아보니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노래가 저절로 입 안에 흥얼거려진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작곡자 황선우씨가 해운대 유람선을 타고 영감을 받아 이 노래를 작곡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해운대 - 오륙도 유람선에서 보는 풍경과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너무나 많이 닮아 있다.




오륙도를 돌아봤으니 아쉽지만 이제 출발지인 해운대로 돌아갈 시간이다.

유람선 선착장이 가까워지니 벌써 다왔나 생각이 들며 내리기가 너무 아쉽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유람선을 타고 부산 앞바다를 돌아보는 기분은 유람선 투어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밤에는 광안대교와 부산 야경을 즐기는 야경 유람선도 있다는데 다음번에는 광안대교 야경투어에 한번 도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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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순이 김선아와 삼식이 현빈이 알콩달콩 싸우다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맛갈스럽게 그려
공전의 히트를 쳤던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기억하시는지?
김선아, 현빈, 다니엘 헤니, 정려원 4명의 훈남 훈녀가 나왔던 이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고 재방 보고 다운 받아 보며 푹 빠져 살던 때가 엊그제 같다.

드라마에서 다니엘 헤니가 묵고 있던 멋진 게스트하우스가 대체 어딘가 하고 궁금해했었는데
최근에야 그집이 서울 계동에 위치한 락고재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락고재는 '내 이름은 김삼순'뿐 아니라 '영화는 영화다''비몽'등의 영화촬영지로도 유명하다는데
서울나들이길에 드라마와 영화에서 선보였던 게스트하우스 락고재를 찾아보게 되었다.

 




재동초등학교 뒷편에 위치한 락고재 앞에 이르니 생각 외로 문이 소박하고 단아하다.
입춘서가 붙은 대문의 문고리를 살짝 두드리니 주인 아주머니가 대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히 내어민다.






락고재를 한번 둘러보고 사진 몇장 찍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들어와서 잠시 둘러보라고 문을 열어준다.




열어주는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니 발밑에 바로 돌계단이 펼쳐진다.
우리가 많이 보던 여느 양반집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돌계단을 딛고 집안으로 내려서니 뒷뜰이 먼저 펼쳐지고 열린 대청마루 문 사이로 단아한 안뜰의 모습이 엿보인다.





전통 기와가 올려진 담장 아래 옹기종기 놓여진 장독들이 너무나 정겹다.
담장은 황토와 기왓장이 만나서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문양을 창조했는데
담장 한가운데 다소곳이 자리잡은 쪽문은 금방이라도 문을 밀고 수줍은 볼을 가진 처자가 얼굴을 살그머니 내어밀 것만 같다.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문양의 커다란 굴뚝은 주변의 소나무, 대나무와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다.





좁은 뒷뜰을 기역자로 꺾어 돌아드니 솟을대문채가 나타난다.
이 솟을대문이 락고재의 정문인 듯 한데 아마도 접근의 편의성 때문에 뒷문을 주출입문으로 쓰는가 보다.





'옛것을 즐기는 집'이라는 뜻의' 락고재(樂古齋)는
130년 역사를 가진 한옥을 인간문화재 정영진 옹이 개조한 한국 전통 문화 공간이다.





이집은 1934년 한국의 역사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조직했던 '진단학회' 건물로 쓰이기도 한 집인데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연립주택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의 주인인 안영환씨가 이집을 구입했다.





이후 2년 동안 세 명의 목수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낡은 집의 골격만 유지하고
기와, 담장, 정자, 연못, 장독대 등 전통의 멋을 살려 새로운 한옥으로 재창조해냈다고 한다.
 




대지 130평에 건평 45평, 방은 다섯 개이니 양반가의 한옥으로서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규모지만
안채, 사랑채, 정자, 정원 등 네 개의 영역으로 구성된 치밀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건물은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짜여졌는데 곳곳에 과거 양반들의 풍류가 녹아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선비들이 즐겼던 정자, 연못, 대청마루 등도 세심하게 되살려 머무르는 이로 하여금 멋스러운 풍류를 자아내게 한다.





특히 대청마루는 한옥이 품은 여백의 미를 더하며 청량감을 가져다주는데
대청문을 열고 시원한 마루에 등을 대고 누우면 한여름 무더위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





서울 도심인데도 집 안으로 들어서니 너무나 고요하여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마져 주는 곳이다.





담장과 처마 사이에 곁들어진 구불구불한 소나무, 푸르름을 자랑하는 대나무는 편안함을 더해주고 






댓돌 위에 놓인 검정 고무신은 아름아름 향긋한 추억을 되살려주어 정겹기만 하다.





락고재에서는 숙박 뿐 아니라 풍류를 즐기며 한국 전통 문화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데
전통 한정식과 함께 다도, 찜질방, 궁중한복, 김치 담그기 등
투숙객의 국적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한국 전통의 미를 전하고 있다고 한다.





숙박 예약은 어떻게 받느냐고 물어보니 아쉽게도 락고재는 개인에게는 방을 대여하지 않는단다.
열 명 내외의 팀에게 집 전체를 빌려주는 방식이라고 하는데
이유는 방문객의 국적이나 취향이 다르면 문화 공감대도 줄어들기 때문이라나!
아쉽다!!! 옛스러움이 묻어나는 이런 한옥에서 하룻밤 머문다면 오랫동안 잊지못할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텐데.....



소박하지만 기품과 위엄이 흐르고, 특별히 치장하지 않아도 멋과 풍류가 그대로 묻어나오는 우리의 한옥.
오랫동안 간직해온 우리의 정서가 그대로 스며들어있는 한옥이 잘 보존되기를 바라면서 락고재의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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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곳, 계동길.
지난 여름, 계동길을 걷다가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느껴지는 2층 양옥집을 만났다.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2층 양옥집의 이름은 '최소아과'





요즘 보기 힘들게 검은 글자를 반듯하게 새겨넣은 하얀 너무 간판.

마치 60년대 시골 읍내 병원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다.





오래 된 병원이라 간판만 남아 있을 뿐이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80세 할아버지 의사선생님께서 진료하는 병원이란다.





진료과목은 내과와 소아과.
내부가 궁금하여 병원 문을 살짝 밀고 들어가 본다.
1930~40년대에 지어졌다는 집은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이며 창틀, 마루바닥들이 모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문을 열고 살펴보니 진료실이라고 쓰여진 1층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여진 슬리퍼들.

진료받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지금도 진료를 하고 있는 병원이 분명하다.
현관에서 머뭇거리고 있자니 문 소리를 듣고 간호사 한분이 나와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저.....내부를 한번 구경할 수는 없나요?" 했더니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살며시 문을 닫는다.

맘 같아서는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만나 인사드리고 대화라도 나누어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대부분의 병원이 현대화되어 내부 인테리어를 화사하게 꾸미고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요즈음.
연세 많은 할아버지 의사선생님께서 진료하는 오래된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까......하는 걱정을 해보았다.

그런데 얼마전에 이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북촌마을에 소아과 진료를 받을 아이들이 많지 않아서 병원 운영에 지장을 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 의사선생님이 이제 더 이상 진료를 하지 못할만큼 기력이 쇠하신 것일까?


오랜 세월 그자리를 지켜온 많은 건물들이 개발, 또는 신축이라는 미명 하에 헐려

식당이 되고, 카페가 되고, 휴대폰 가게가 되는 요즈음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의 건강을 담당했던 이 유서깊은 소아과 병원이 없어진다면 너무나 서운할 것 같다.
혹시 할아버지 의사선생님께서 진료를 그만 두고 이 병원이 또 다른 주인을 만나더라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저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신식 건물을 짓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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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샤워를 하고 부산을 떨어본다.
여느 토요일 같으면야 밀린 잠을 보충하려고 이불 속에서 밍그적거리기가 일쑤겠지만
오늘은 지인 몇사람과 부산 금정산성 트레킹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날인지라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후 들고다니기 가벼운 NEX-5를 배낭에 챙겨넣고 집을 나선다.

여기저기 다니길 좋아하는 필자이지만 그동안 산에는 제대로 올라본 적은 없었는데
평소에 특별한 운동도 하지 않고 숨쉬기 운동만 열심히 해왔던 구제불능 저질 체력으로 인해
그리 높지 않은 동네 산이라도 조금만 오르면 금방 헉헉거리다 중도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필자인지라 지인들이 금정산에 가보자고 했을 때도 물론  단호히 거절했다.
"아......난 등산 정말 싫어하거등....올라가기도 힘들고 내려오기도 힘들어서....."하니
금정산은 케이블카 타고 올라갈 수 있는데 완만한 산등성이를 산책하듯 걸으면 되는 트레킹 코스라고
어린아이들도 쉽게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산 위에서 부산 시내가 훤히 보여 너무 좋은 곳이라고 한다.
부산 시내가 훤히 보인다는 말에 혹한 필자.
"그래? 힘들여 높이 올라가야 하는게 아니라면 한번 가보지 뭐......부산 전경도 사진 찍을 겸....."

금정산에서 내려보며 부산 전경을 찍을 것을 생각하니 출발부터 기분이 좋아진 필자.
황성공원에서 지인들을 만나 차에 태우고 네비게이션을 금강공원 주차장으로 찍은 후
가벼운 마음으로 차를 고속도로로 올리니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도로는 막힘없이 시원하게 잘 뚫린다.
요즘 대세인 나가수 노래를 모두 같이 흥얼거리며 운전하기 한시간 여.
금강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아직 오전인지라 주차할 공간도 넉넉하다.

 




부산 시민이 자랑하는 금강공원에 들어서니 입구부터 싱그러운 숲이 등산객들을 반기고 
입구에는 이렇게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분들의 유해를 모신 '동래 의총'도 만날 수 있다.





좀 더 쉽게 산에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로 한다.
금정산 케이블카는 '로프웨이'라고 하는데 케이블카라는 이름보다는 뭔가 있어보이는 느낌이 든다.
요금은 편도는 3,500원 왕복은 6,000원이다.




로프웨이를 타고 아래에 펼쳐지는 부산 전경을 멋지게 담어보려 벼르고 왔건만.....!
아침부터 도시를 감싸고 있던 안개는 당최 걷힐 줄 모르고 저멀리 부산 전경은 고사하고 발 아래 건물조차 희미하고 몽롱하다.




로프웨이 스테이션 바로 앞에 보리밥집이 있기에
아직 점심 먹기는 이른 시간이지만 브런치(?)로 보리밥 한그릇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5,000원 짜리 보리밥을 받아들고 보니 꽁보리밥에 가까운 수준의 밥이 카다란 그릇에 담겨져 나왔다.




콩나물, 취나물, 무나물, 열무 김치, 파김치 등을 보리밥에 올란 후 된장찌개 두어 숟가락 놓고 슥슥 비벼먹으니 가히 꿀맛이다.




보리밥으로 배를 불리고 자판기 커피 한잔 나눠 먹은 후 본격적으로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해가 나지 않고 흐린 날이라 사진 찍기에는 조건이 좋지 않지만 대신 자외선이 강하지 않을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된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더 큰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적 215호인 금정산성(金井山城)은 총 길이가 17,336m에 면적은 약 251만평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산성이다.

성곽은 내.외성으로 되어 있고 성벽은 1.5~3m로 쌓았으며 동,서,남,북 네곳에 성문을 거느리고 있다.




금정산에 언제 처음으로 성을 수축하였는지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조선 숙종(肅宗) 29년에 축성된 것이라고 한다. 




남문을 지나니 다시 돌로 덮힌 평탄한 산길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그야말로 노인들도 걸을 수 있는 무난한 코스이다.
 



산길이라기보다 공원 산책로 같은 길을 한참이나 걷다보면 이렇게 조그만 연못도 보이고......




숲길 좌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동도 하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커다란 식당들도 있는데 폐업해서 버려진 식당들도 간간이 보인다.
산길을 한참 가다보니 느닷없이 도로가 나오고 버스가 사람들을 토해놓는다.
산꼭대기로 올라오는 버스라니.....! 이런건 정말 부산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닐까?
버스가 오가는 길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니 갑자기 오르막길이 나타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니 등에는 금새 땀이 흘러내린다.

 



한참 오르막을 오르니 다시 문하나가 나타난다. 문의 이름은 동문이라고......




동문의 홍예 아래로 보이는 숲이 나무 아름답다. 가을에 오면 정말 경치가 좋은 것 같은 금정산성이다.





동문 아래에는 마침 금정산 막걸리 축제가 벌어지고 있어 등산객들에게 금정산의 명물 '산성 막걸리' 시음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줄만 서면 모두 산성 막걸리 한잔씩 얻어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필자는 비주류인지라 아쉽지만 그냥 통과......




동문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솔숲이 우거진 산길의 연속이다.
가도가도 소나무숲......비슷비슷한 풍경인지라 사진 찍기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느긋하게 산길에 펼쳐지는 풍경을 즐기며 걸으니
새소리도 잘 들리고 공기도 더욱 신선하게 느껴진다. 한시간을 그렇게 걸었다.....사진도 안 찍고 묵묵히.....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걸어오다보니 사방이 탁 트인 지대가 나타나고 너무나 멋진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쉬다가 걷다가 하며 천천히 걸어왔더니 로프웨이 스테이션에서 이곳까지 거의 2시간이나 걸렸다.
높이 올라가거나 험난한 코스가 거의 없지만 방대한 넓이의 산성을 끼고 걷는 코스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산의 정상이 가까워지니 예사롭지 않는 바위들이 줄줄이 눈앞에 펼쳐진다.






돌을 떡 주무르듯 뭉쳐서 올려놓은 듯한 바위들.




저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바위들.




톱으로 잘라낸 듯 넓고 반듯한 바위들이 이리저리 포개어져 있는 기이한 모습을 보니
금정산이 그저 동네 뒷산인줄 알고 올라온 필자가 그만 부끄럽게 느껴진다.





산성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보니 저 아래 부산 시가지가 다 보였고 자세히 보니 해운대 앞 바다도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카메라로 찍어보기도 했지만 엷게 끼인 안개 때문에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아쉽지만 삭제해버려야 했다.





안개가 끼어 시계가 불분명하니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라도 보이는게 어디냐.....
언젠가는 맑고 청명한 날 올라 제대로 된 사진 한번 찍어보리라.....하며 다음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산 위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정말로 여유로워보인다.
이런 맛 때문에 사람들은 힘든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산으로 올라오는건가 보다.




 

북문을 지나면 해발 801m의 고당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북문에서 빤히 보이는 고당봉까지는 올라가야 금정산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걸어온지라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돌아서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고당봉을 가려면 우리 일행처럼 금강공원에서 시작하지 말고 범어사를 통해서 바로 올라오는 길을 택하는 것이 더 좋을 거 같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산성 위에 앉아 작은 휴식을 취하는 노부부들을 만나기도 하고
동문 근처 술숲에서 친구들 몇명밖에 없는 관중 엎에서 열심히 연주하는 대학생들의 어쿠스틱 기타 콘서트도 한참이나 듣고......
쉬며.....놀며.....걸어서 로프웨이 스테이션까지 오니 시각이 어느덧 다섯시.
금강공원에서 남문, 동문을 지나 북문까지 트레킹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여섯 시간 남짓 걸린 셈이다.
등산을 자주 다녀 근육이 많이 단련된 지인도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고 하고 필자 또한 살짝 무리한 듯 하나 기분만은 한없이 좋다.




로프웨이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며 보니 아침보다는 안개가 많이 걷히었다.
완전히 선명하지는 않지만 아침보다는 시계가 확실히 많이 트여 저멀리 전경까지 제법 잘 보인다.






처음으로 올라보았던 부산 사람의 마음의 고향 금정산.
비록 금정산성 전체를 다 돌아보지도 못했고 고당봉 바로 직전에서 발걸음을 돌리긴 했지만
도시 한가운데 있는 금정산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고

동네 바로 뒤에 마음의 고향과도 같이 아름다운 산을 가진 부산 시민이 또 한번 부럽게 느껴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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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서 시간이 정지한 듯 조용하고 아담한 시골 마을 영천 자천마을을 지나

보현산 정상의 천문대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정각리 별빛마을에 이르면

별이 머무르는 곳, 보현산 천문대로 오르는 하늘길이 시작된다. 





‘보현산 하늘길’은 보현산 천문대까지 찻길과 임도로 갈라지는데

별빛마을에서 보현산 천문대까지 자동차로 달리는 천수누림길은 9.3㎞.

온돌의 구들을 캐던 채석장이 있던 임도 구들장길은 보현산 8부 능선의 쉼터까지 5㎞길이다.





아리랑 고개보다 더 꼬불꼬불한 하늘길을 차로 오르다보면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짙어가는 보현산의 수려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문대에 오르기 전 하늘길은 연이어 S자를 그리며 돌아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환상에 젖어들게 한다.

좌우 길섶에는 온갖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하늘길을 오르는 이들의 눈을 유혹하고 있는데
야생화들의 손짓에 까딱 한눈을 팔다가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비명횡사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천문대가 있는 정상에 이르면 천문대 부대 시설과 함께 발 아래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끝없이 이어지는 먼산의 능선들은 한폭의 한국화를 연상시킨다.




보현산 천문대는 경북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있는 해발고도 1,124미터 보현산 정상 일대에 세워진 천문대이다.





국내 100개 산에 대한 청천 일수, 기상 조건, 주변 불빛의 영향 등을 고려한 결과 천체 관측에 최적의 장소로 선택된 보현산 천문대는

국내 최대 구경의 1.8m 반사망원경과 태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플레어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천문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친근하게 맞아주는 곳은 방문객 센터이다.

 



보현산천문대를 찾는 이들을 위한 공간인 방문객 센터에는 조촐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천체 사진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간단한 기념품을 실비로 구입할 수 있다.  


 




특히 전시관 한켠에는 이렇게 대형 체중계가 줄지어 서 있는데





지구에서 자신의 몸무게, 달에서의 자신의 몸무게를 비롯해서 목성에서의 몸무게,

태양에서의 몸무게까지 측정, 비교해 볼 수 있어서 호기심 많은 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방문객 센터를 지나 멀리 보이는 연구관리동과 숙소동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행정지원시설 및 실험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2층에는 연구시설과 관측자 숙소로 이루어져 있다.





천문대에는 이처럼 크고 작은 관측 시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기에 좋다.


 


전시관의 맞은편에 위치한 소박한 연구동은  태양망원경 관측실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자꾸만 문을 열었는지 입구에는 '문 열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1995년 이곳에 설치된 태양 플레어 망원경은
태양 활동 영역의 물질 분포, 자기장 변화를 동시에 관측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연구용 태양관측시설이다.


 


엄청나게 큰 태양 망원경 돔은 개방형(slide roof)으로 레일을 따라 움직일 수 있으며, 관측시에는 망원경이 외부로 완전히 개방된다.
 
  



보현산 천문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단연 <1.8m 광학망원경동>인데 
 4층에 광학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광학망원경동의 바로 옆에 거대한 콘크리트 원반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원반은 광학망원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주경(지름 1.8m)과 크기,모양, 두께가 같은 콘크리트 모형 거울이다. 1994년 망원경 설치 당시 망원경 구동부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주경 대신 이 모형 거울을 부착하여 실험하였다. 망원경 구동부 성능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 원래의 주경을 부착하게 됨으로 이 모형 거울의 임무도 끝나게 되어 이곳에 전시하게 되었다.





관측 시설을 제쳐 두고라도 해발고도 1,124미터 보현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천문대를 돌아보면 펼쳐지는 주변 경관이 참 수려하다.





발 아래로 끝없이 이어진 희미한 능선들은  마치 한폭의 한국화 같아서 바라보는 방문자들을 감탄케 한다.





또 천문대가 서 있는 산등성을 돌아가며 이렇게 나무 데크가 이어져 있어

우거진 숲에서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느긋한 산책도 즐길 수 있으니 웰빙 나들이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보현산 천문대에서 별을 관측하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는 날은 서운하게도 년중 1회에 한한다.

방문객들은 이곳에 오기만 하면 누구나 별을 관측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오기도 하지만
사실 이곳은 일반 시민 천문대가 아니고 대덕연구단지 소속 천문학 연구기관이기 때문에
일반 시민천문대와는 달리 일몰 이후에는 차량의 출입을 전면 통제하고 있다.
차량의 불빛 등은 천체를 관측하는 연구자에게 있어서 국가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1년에 단 한번 개최되는 야간 공개 행사는 영천시에서 주최하는 “영천보현산별빛축제” 때이다.
이때 영천시 홈페이지(http://www.yc.go.kr)를 통해서 신청을 하시면 야간공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일반방문객들을 위한 주간 공개 행사는 4, 5, 6, 9, 10월 네번째 토요일에 실시되어 고 있으니 유념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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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머무르는 곳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1970년대에서 시간이 일시 정지하기라도 한걸까? 
면소재지 토담 골목길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길지 않은 골목 끝자락에 이르니 트인 마당이 나타나고
늠름한 모습의 나무 종탑과 함께 기와를 올린 소박한 한옥 건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1903년에 건립되었으니 무려 10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간소한 한옥은
바로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452호로 지정된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로 한국 교회 건축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 공간을 갖추고 있는 개신교 문화재이다.
독특한 건물의 원형이 잘 보존된 자천교회는 영남 지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교회는 1903년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건립된 이 지역 신앙의 요람이다.





자천교회의 역사는 미국인 선교사와 서당 훈장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영남지역 선교 책임을 맡아 대구에 들어온 안의와(아담스, J.E.Adams) 목사는 경북 동부와 동북 지역 선교여행에 나섰는데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인 노귀재에서 고향인 경주를 떠나 대구로 가던 서당 훈장 권헌중을 만나게 된다.

깨어있던 선비 권현중은 안의와 목사에게 감화를 받아 대구로 이주하려던 이삿짐을 내려놓고 
자천리에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사랑방을 예배당겸 서당으로 삼아 낮에는 한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성경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교인이 서당 문동들과 노비와 머슴이 전부였는데
권헌중은 앞장서 상투를 자르고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불태워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깨어 있는 권헌중에게 감화된 신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고
1903년에 기와 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으니 바로 오늘날에 만날 수 있는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 예배당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는 가마니 공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 쓰이는 등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천지역은 한국전쟁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라 당시 모든 집들이 포화를 맞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교인들이 평평한 교회 지붕에 올라 흰 횟가루로 십자가를 그리고 'CHURCH(교회)'라 표시해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당시 영천 화북면 지역에선 이 자천교회와 교회 바로 옆 한옥만 폭격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배당 건물의 외관을 살펴보면 지붕을 넓고 평평한 우진각 지붕으로 얹은 것이 눈에 뜨이는데
우진각 지붕이란  건물 네면에 지붕면을 만들어 귀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도록 한 형태를 이름이다.
이는 전통 한옥의 대문에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독립 건물에 쓰여진 것은 흔치 않은 형태로
일(一)자형 예배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이 되었던 것 같다.





자천교회 예배당의 가장 큰 특징은 남녀 교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내부에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점이다.






25평 정도가 되는 작은 예배당의 정면에는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강대상을 두었는데
신자석에는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다.




                                                                                                       예배당 구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시는 자천교회 손산문 목사님

구한말, 유교사회였던 우리나라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사고는
초기 우리 교회들의 건축물들이 ‘一자형’과 ‘ㄱ자’형으로 지어서 남녀가 구분지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했는데
ㄱ자로 지어진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의 경우 한쪽 날개는 여자석이고 다른 한쪽 날개는 남자석으로 되어
설교자가 서는 강대상은 그 모서리에 위치함으로 남녀석을 번갈아쳐다보며 설교하게 되어 있다.
반면 ‘一자형’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실내 중앙에 기둥이 네개 버티고 있는데 
기둥을 이용하여 중간에 칸막이를 함으로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가 내외하여 서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남녀 신자석을 갈랐던 초기 교회들이 대부분 휘장으로 공간을 구분한 것과는 달리
자천교회 예배당에서는 아예 나무 칸막이를 만들어 공간을 양분한 것이 주목할만한 점이다.
 





설교를 듣는 남녀 신자들은 서로를 볼 수 없지만 설교자는 물론 남녀 신자를 모두 보며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자가 앞에 있는 칸막이로 인해 답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강단 앞에 서보니 예상 외로 설교자의 시야도 별로 가려지지 않고 답답한 느낌도 거의 들지 않는다.





현재의 사고로 보면 참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물의 배치이지만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교 국가에 웬 기독교 교회인가?' 라는 동네 주민들의 반대로 교회 건립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자명한데
오늘날처럼 남녀가 함께 섞여서 예배를 드렸다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겠는가?
이처럼 유교 문화를 지혜롭게 수용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지역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신자석 뒤쪽에 두 개의 방을 낸 것도 이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데 
남녀 신자들이 따로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도록 방을 낸 것이다.





천정을 올려다 보니 대들보와 기둥들이 그대로 다 드러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자재로 쓰인 나무들은 거의 다듬지 않은 목재들로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동네 목수들이 천장이며 들보, 기둥들을 모두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넉넉지 않은 교회 사정에서 목수들이 토속적이고 소박한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 교회를 건축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배당은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게 아주 튼튼한 구조로 지어졌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붕과 벽, 기둥 등이 많이 손상되고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등 훼손 정도가 심각하였다.
이에 2005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하여 안의와 선교사가 생활하던 방을 복원하고
일제시대 때 유리문으로 바뀌었던 창문들도 본래의 창호지문으로 복원하는 등
창문틀의 크기와 위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가의 조언을 거쳐 복원,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물 뿐만 아니라 마당 한켠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 종탑도 방문하는 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집집다다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교회 종소리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기능 외에 신자가 아닌 동네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리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말기, 일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모든 놋 제품을 강제로 징발하였는데
이때 자천교회의 종도 강제로 철거되어 나무 종탑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어두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해방이 되고 1948년에 이으러서야 새로운 종탑을 교회 마당에 다시 세우게 되고 종탑은 다시 구원의 목소리를 되찾게 된다.

집집마다 시계가 있어 대부분의 교회 종탑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
아직도 자천교회 나무 종탑은 은은한 소리를 내며 생명의 목소리를 주변에 널리 퍼뜨리고 있다.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하나님 주신 동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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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바다가 그리워 내달린 여행의 끝자락에서 만난 청사포.
떠나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최백호의 노래 '청사포'는 부산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 있는 작은 포구이다.
해운대와 광안리같이 세련된 바닷가와는 달리 청사포는 마치 작은 어촌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
양철 지붕집과 오래된 가옥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청사포는
마치 때 묻지 않은 시골 아낙네의 모습와 같은 포구이다.




마주 보는 방파제 끝에 수려한 모습으로 서 있는 하얗고 빨간 등대는 청사포의 상징과도 같다.
하늘이 맑고 고우면 좋으련만......
멀리서 찾아간 여행자의 바람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하늘은 뿌옇게 흐려만 있다.






방파제에 올라 하얀 등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 본다.
요즈음 많은 등대들이 저마다 특이한 모양새를 자랑하곤 하지만 역시 등대는 이렇게 단순하고 깔끔한 모양의 등대가 좋다.
 



방파제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고 있으니 갑자기 바다 가운데서 일어난 해무가 달맞이고개 쪽으로 밀려오는 것이 보인다.
 



바다 가운데서 밀려온 해무는 순식간에 맞은편 포구가 안 보일 정도로 뿌옇게 청사포를 덮어버린다.

 



해무는 바로 지척인 건너편 빨간 등대도 뿌옇게 보일 정도로 청사포 전체를 휩싸더니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서서히 걷히면서 따스한 햇살이 바닷물을 비추기 시작한다.

 



해무가 서서히 물러가니 방파제 양쪽의 등대는 다시 원래의 생기를 되찾는다.




다시 생기를 찾은 포구 안으로 가까운 바다로 나갔던 낚싯배들도 기분좋게 파도를 가르며 포구로 돌아온다.




등대 바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니 해무가 물러간 하늘은 눈이 아프도록 짙푸르다.





비록 등대지기가 아니더라도 저 아름다운 등대의 문을 통하여 위로 올라가
이마에 손을 올리고 망망대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푸른 모래의 포구'란 뜻의 '청사포(靑沙浦)'이지만 최백호의 노래에서처럼 푸른 모래는 이곳에서 만날 수 없다.




청사포의 명칭에는 이런 전설이 전하는데.......
아주 먼 옛날 금슬 좋은 한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은 고기를 잡으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슬픔에 잠긴 아내는 매일같이 남편을기다리던 해안가 바위에 올라 목 놓아 울었다.
이를 딱히 여긴 동해 용왕이 푸른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아내를 남편에게 데려다주었다.
이후 마을 이름은‘푸를 청(靑)’,‘ 뱀 사(蛇)’를 써 청사포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이름에 뱀이 들어가는 게 좋지 않다며 ‘모래 사(沙)’를 써‘푸른 모래의 포구’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푸른 모래는 없지만 청사포의 물결은 유난히도 짙푸르고 
발 아래 포구에는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여 퍼렇게 멍이 든 물결만이 오늘도 변함없이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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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따스한 오월의 휴일, 문득 죽장 수목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포항을 벗어나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 가다 청하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한적한 2차선 도로를 한참 가다 보면 서정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삼거리에서 유계리 쪽으로 핸들을 돌리니 곧이어 눈 앞에 나타나는 구불구불한 산길.
산길 따라 한참이나 커브를 돌아 오르다 보면 어느새 귀도 약간 멍해지고
구비구비 한참이나 산길을 돌아 고지대에 올라서면 저 건너 산봉우리들도 발 아래 펼쳐진다.

원래부터 죽장면 상옥리와 하옥리는 포항 인근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운 첩첩산중 골짜기인지라
지금 같이 도로 포장이 되기 전에는 차 한대가 겨우 비킬 수 있는 그런 가파른 산길이었다고 한다.
도로 포장 전에 하옥으로 시정 시찰을 가던 포항시 유력 인사님의 관용 차량이 하옥리를 갔다 오면
어김없이 머플러가 너덜거리도록 망가져 버려 하는 수 없이 머플러를 교체하기도 했다는 곳이라니......

 

 



첩첩산속 고지대에 자리잡은 죽장 수목원.
입구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들어가니 제일 먼저 수목원대장군과 수목원여장군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수목원의 정식 명칭은 경상북도 수목원이지만 경북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에 위치해 있어 죽장수목원이라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친근감이 든다.
평균 해발 650m 고산지대에 위치하는 죽장수목원은 희귀한 고산식물과 여러가지 볼거리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면적이 3,222ha 로 국내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수목원이다.





험한 산들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봄도 더디 온다.
평지에서는 이미 나뭇잎도 많이 자라고 신록이 무르익는 계절이지만 고지대에 위치한 이곳 수목원에는 이제야 새봄이 찾아 왔다.





지금 막 뾰족이 내밀기 시작한 연둣빛 잎사귀들은 쳐다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다.





평지에서는 떨어져버린 배꽃, 복사꽃들도 이곳에서는 이제야 제철이다. 





햇살아래 눈부시도록 화사하게 피어난 복사꽃.




순결하도록 하얀 살빛의 배꽃도 수줍은 봉오리를 이제야 열었다.




조팝나무도 마치 팝콘이 터지듯  조그만 꽃봉오리들을 활짝 열었다.




산허리에 따사로이 비추이는 햇살 속에서 산철쭉도 다소곳이 피어나고.....





한귀퉁이 그늘에서 복주머니를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듯한 금낭화도 수줍은 자태를 뽐낸다.





꼬부라진 허리를 펴지 끝내 펴지 못하고 백발을 휘날리는 할미꽃. 곧 바람결에 그 하얀 머리카락을 날려보내겠지?




산골 수목원에 새봄이 오니 경내 너와집 앞에서 장작을 패는 남정네의 모습에도 따스함이 묻어난다.





입구에는 수목원대장군과 여장군이 버티고 서서 방문객을 반기더니 수목원에는 가는 곳 마다 장승들이 진을 치고 있다.





호숫가에 서 있는 가족 장승들. 아이들은 무얼 보고 저리도 놀란 표정을 지을까......?




때론 이렇게 우스꽝스런 표정의 퓨전 장승들도 걸어가던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호숫가 나무들이 연둣빛 새옷으로 갈아입으니 호수 물빛도 한결 부드럽고 따사롭다.






수생식물원 물위를 가로지른 나무 데크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따사로운 봄햇살을 맞이해 본다.
첩첩산중 수목원에 늦게서야 찾아온 따사로운 봄소식.
모질게도 추웠던 지난 겨울을 꿋꿋이 이겨내고 찾아온 산골의 봄소식은 더욱 반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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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낡고 오래된 집들이 헐릴 위기에 처해 있다가
마을의 벽에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지게 됨으로 재개발 계획이 유보되고
전국에서 찾는 방문객으로 연일 북적이게 된 통영의 동피랑 마을.

울산에도 동피랑과 같은 벽화마을이 생겼다는 소식을 이웃 skypark님의 블로그에서 접하고
언제 한번 가봐야 할텐데......생각하고 있던 중에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봄날 오후 문득 집을 나서 울산 '신화마을'으로 향한다.

울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신화마을'은
1960년대 당시 매암동 일대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철거 이주민촌이다..

장생포와 매암동 일대에서 고래잡이로 생활을 꾸려가던 주민들은
석유화학공단 조성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현재의 야음장생포동으로 이주하였다.

1980년대 초에 고래잡이가 금지되면서 일부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마을을 떠나게 되고
신화마을에는 현재 약 34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가려 철저히 소외된 신화마을의 주거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는데
재개발을 하지 못하여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있거나 
보일러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개발에서 소외되면서 옛 모습이 그대로 남은 신화마을은
문화체육관광부의 '2010 마을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고래를 주제로 한 '지붕없는 미술관'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가파른 마을 중앙길의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시멘트 담장과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는 알록달록한 색이 입혀지고 
골목길에는 신화의 골목, 암각화의 골목, 동화의 골목, 착시의 골목, 시의 골목, 꿈꾸는 골목 등 각각 다른 테마의 그림이 그려졌다.

사람들이 떠나고 인적이 드물었던 마을은 이제 주말이면 방방곡곡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여행지로 변신했다.
사진애호가들에게는 꼭 한번 찾아볼만한 이색적인 출사지 '신화마을'을 몇장의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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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살며 1시간 거리인 부산으로 당일치기 여행하기에 재미를 들인 필자.
이번에는 
오래전부터 연인들과 가족들에게 식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 태종대로 향해본다.

부산 영도 최남단의 해안인 태종대는 높이 250m의 삼면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식애로서
한국의 해안지형 가운데 관광지로 개발이 가장 잘 된 명승으로 
부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태종대라는 이름에서 조선 3대왕이며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을 떠올렸는데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국의 명승지를 다니던 중
이곳 영도의 절경에 도취되어 쉬며 활을 쏘던 곳이라고 하여

이곳을 태종대라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동래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태종대는 54만평이 넘는 광범위한 지역이므로 걸어서 돌아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예전에는 승용차나 관광 버스 등으로 태종대 일주가 가능했다고 하나 요즘은 태종대 안으로 개인 차량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므로
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태종대 입구에 주차를 한 후 '다누비'라는 순환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태종대 유원지의 자연 경관을 보호하고 이용객의 편의를 위하여 운행하는 이 열차는 
태종대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는 의미로 '다누비'로 지었다고 한다.

코스는 광장 → 태원자갈마당 → 구명사 → 전망대 → 영도등대 → 태종사 → 광장입구로써 
순환도로 4.3km를 운행하는 다누비 열차가 태종대 입구를 출발하여 정류장 5개소를 거쳐 돌아오는데 약 20 여분이 소요된다.
각 정류장에서 자유롭게 다누비 열차에서 내려 경치를 감상한 후 다음 열차에 탑승하면 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데
이용 요금은 1,500원으로 약간 비싼 편이나 광범위한 태종대를 걸어서 돌아보기란 다소 무리이므로
다누비 열차를 이용해서 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다누비 열차 위에서 왼쪽으로 펼쳐지는 태종산의 싱그러운 수풀 내음과
오른쪽 아름드리 해송 사이로 펼쳐지는 푸르른 바다를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보는 것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자갈마당, 구명사, 태종사......등을 다 돌아보는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지라
다누비 코스 중에서도 제일 인기있는 전망대와 등대 코스를 선택하고 입구에서 
2㎞쯤 되는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 내려본다.





전망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와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숲이 푸른 바닷물과 잘 조화되어 마치 해금강을 연상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저 바위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까?
전망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위는 이름이 자살바위이다.

저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시신도 찾을 길 없이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온다.



전망대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니 정말 속이 시원하게 탁 트여있다.
전망대 바로 앞에 보이는 조그만 섬의 이름은 생도. 주전자같이 생겨서 주전자섬이라고도 불리운단다.
이곳에서 청명한 날에는 대마도(쓰시마섬)이 보인다기에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았다.
이날 약한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도 자세히 보니 저멀리 기다랗게 누워 있는 대마도가 보인다.
56km 떨어진 대마도인데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저기도 우리 땅이면 얼마나 좋을까!




바다 끝에 서서 보니 지구가 둥글다는게 실감이 난다.
작은 카메라의 앵글 속에서도 이렇게 바다가 둥그렇게 나타나다니.....

고개를 돌려 전망대 오른쪽으로 보니 저멀리 거제도도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청명한 날이면 더욱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을텐데......




앞바다에는 쉴새없이 유람선들이 오고간다.
유람선을 타고 아래에서 위로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보고 느낄 수가 있겠지.

다음번에 오면 유람선을 타고 바다에서 태종대를 바라보고 싶다.





전망대 기념품점 앞 바구니에 담긴 조개들이 참 이채롭다.
각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하얀 조가비들을 보니 이쁜 조개를 찾아서 하염없이 해변을 걷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다누비열차를 타고  등대가 있는 곳에서 내려본다.
나무로 된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가야 등대에 이를 수 있다.
울창한 해송과 상록활엽수가 우거져 있어 도시 속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태종대에는 
60여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좁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새가 서식하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바다 헌장이 새겨져 있는 조형물 뒤로 하얀 등대가 눈 앞에 나타난다.
여느 등대와 비교해서 상당히 규모가 큰 등대이다.




 

태종대를 대표하는 신선바위, 망부석, 태운암 등을 보려면
바다를 향해 뽀죡한 손을 내밀고 있는 아취와 등대를 지나 또 한참이나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등대 아래에는 이와 같이 연인들의 사랑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낙서벽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이채롭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연인들은 이곳에 갈 때 꼬옥 화이트를 챙겨가시도록......






등대 바로 아래에 횟집들이 몇군데 성업중인 것이 보인다.
무허가인 것이 분명한 횟집들인데 얼른 내려가서 회 한접시 맛보고 싶은 유혹이 슬그머니 일어난다.

하지만 회를 먹고 느긋하게 있다 보면 다누비열차 운행 시간에 늦어
3km 정도 떨어진 입구까지 걸어가야 할 것 같아 유혹을 뿌리치고 선선바위로 향한다.





등대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자 나타나는 엄청나게 큰 너럭바위. 왼쪽은 태종바위, 오른쪽은 신선바위이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진 해안이 
푸르른 바다, 굽이치는 파도와 더불어 가히 절경을 이루니 신선이 놀고 가기엔 정말 딱인 곳이다.






벼랑 끝에 앉아 탁 트인 바다와 하나가 되어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이야말로 신선놀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태종바위 건너편 신선바위 위에 마치 사람 형상 같이 우뚝 선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신라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난 남편 박제상을 그리워하여 바다 건너편을 보고 통곡하던
박제상의 부인이 죽어 그만 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전설이 깃든 망부석이다.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두번에 걸쳐 기술한 적이 있으므로 아래 링크를 꾸욱 눌러서 확인하시기 바라며.....
관련 포스트 : 대마도 어촌에 있는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박제상 부인이 다리뻗고 통곡했다는 벌지지 
                  




태종대 바위들의 단애를 자세히 보니 정말 살아있는 과학 교과서이다.
아이들이 지층에 대해 궁금해할 때 여기 와서 보여주면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어떤 화가가 이렇듯 아름다운 색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으랴......마주치는 단층마다 색감의 조화가 오묘하기 그지없다.





벼랑 끝에 서서 아래 바다를 내려다 보니 아찔해지며 살짝 현깃증이 나기도 한다.
수백만이 사는 대도시 안에 이렇듯 환상적인 절경이 자리잡고 있다니...... 부산사람들은 축복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점심 때에 태종대에 도착했는데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바다 위에도 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노을지는 모습이야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태종대 바다 끝 절벽에 서서 등대와 바다를 배경으로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볼 수 있다는 건 쉽게 만날 수 없는 행운이다.





 
신선도 놀고 갈만한 절경에 심취하여 태종 무열왕도 쉬어 갔다는 부산 태종대.
하룻동안 신선이 되어 여유자적하다 어스름이 밀려오는 태종대를 뒤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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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포동 남항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자갈치 시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생선시장이다.
1945년 광복 후에 형성되기 시작한 자갈치 시장은 당시에는 남포동 시장이라고 불렀다는데
전쟁 이후 보수천 하구 일대 자갈 투성이었던 자리에 시장이 세워졌기 때문에 
'자갈'밭과 곳, 장소를 나타내는 처(處)가 경상도 방언으로 
'치'가 되어 '자갈치 시장'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바닥에 물이 흥건하며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리라 연상하고 왔지만
놀랍게도 자갈치 시장 본 건물은 너무나 멋지고 세련된 초현대식 건물이다.
여기가 도대체 자갈치 시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전쟁 이후 판잣집 가게들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던 자갈치 시장은
새롭게 건물을 짓고 '자갈치 어패류 전시장'으로 문을 열었는데

뜻하지 않는 큰 불이 나서 건물이 새카맣게 그을리게 됨으로
2007년에 7층 높이의 어마어마한 건물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7층으로 된 건물의 1층에는 활어 센터, 2층에는 회,건어물 센터,
3~6층까지는 뷔페, 한식당, 컨벤션 센터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7층에는 자갈치 역사관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자갈치 시장의 멋진 모습을 한 앵글에 담아보리라 하고 뒤로 뒤로 물러가 보았지만
건물이 너무 큰지라 앵글에 전체적인 모습이 당최 잡히지 않는다.
더 이상 물러가면 바다에 풍덩 빠질 형편이라.......부분만을 담고 만족해야 했다.
이럴 때 어안 렌즈가 필요한간가? ^^;;

맞은편 바다 쪽에서 찍어야 제대로 된 전경을 담을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자갈치 시장 홈피에서 살짝 빌려온 이미지를 보면 
건물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갈매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을 볼 수 있다.


1번 날개 는 <도약>이니 갈매기가 육지로부터 도약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고
2번 날개는 <비상>으로 도약한 갈매기가 하늘로 비상하는 모습,
3번 날개는 <활공>으로 비상한 갈매기가 푸른하늘로 활공하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도약, 비상, 활공 세단계로 날아간다니......!
항구에 위치한 자갈치 시장의 이미지에 딱 맞는 디자인이다.





자갈치 시장 건물 앞 넓은 테라스에 서니 부산 내항이 훤히 바라보인다.
여행 가방을 끌고 돌아다니는 관광객들도 제법 많이 보인다. 역시 부산 여행의 1번지 자갈치 시장이다.





어선들은 쉴새 없이 오가며 자갈치 수협 공판장 안으로 해산물을 실어 나르고.....





서남쪽으로는 남부민동과 초장동, 그리고 천마산도 바로 지척인 것 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부산 내항을 살펴 볼 수 없나 두리번거리던 중 좋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자갈치 시장 건물 옥상에 위치한 하늘공원(전망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7층을 지나 옥상으로 나가니 너무나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 펼쳐진다.
북적거리고 정신없는 자갈치 시장 바로 위에 이렇게 아늑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니......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올라간 지붕이 처음에는 배의 돛을 형상화한 것인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조감도를 보고서 갈매기의 비상하는 날개를 형상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전망대에 서서 바로 앞을 보니 동아조선소 및 작은 선박회사들이 건조중인 중소규모의 배들이 너무나 가깝게 보인다.





저멀리 남쪽으로는 가물가물 남항대교가 보인다.
2008년 7월에 개통한 남항대교는 영도구 영선동과 서구 암남동을 잇는 총연장 1.9km의 왕복 4차선 교량이다.
저 남항대교를 몇번이나 왔다갔다 했는데 이렇게 멀리 자갈치 전망대에서 보니 남항대교가 긴 다리라는게 새삼 실감이 난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얀 아치로 된 부산대교와 바로 옆 공사중인 영도대교 뒤로
봉래동과 영선동, 남항동이 펼쳐져 보이고 그 뒤로 영도구의 주산이라 할 수 있는 봉래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남포동, 광복동의 전경과 함께 용두산 공원도 눈 앞에 펼쳐진다.





높이 120m의 부산타워 꼭대기는 전망대가 있어서 부산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
부산 해양 항만청에서는 올해 부산 타워 꼭대기에 등대 등명기를 설치할 예정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부산타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등대로 기네스에 등재되게 된다고.....





아래 자갈치 시장에는 인파로 붐비는데 전망대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학교를 마치고 또래들과 어울리는 몇명의 학생들만이 앉아서 잡답을 나누고 있을 뿐 올라오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시끌시끌한 시장의 소리, 바로 앞길의 차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고 아늑하기 짝이 없는 곳.
하늘공원 전망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갈치 시장의 또 다른 별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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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 도시의 규모에 맞게 창출하는 경제 규모 또한 실로 엄청난데
부산에는 서울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대형 백화점들이 속속 들어서서 눈길을 끈다.

연면적 9만평의 규모로 세계 최대 백화점 기네스 인증을 받은 신세계 센텀시티점을 비롯하여
2009년 12월에는 롯데 백화점이 연면적 5만평 규모의 백화점이 부산 제일의 번화가 광복동에 잇따라 개장되었다.

2010년에 롯데 광복점은 아쿠아몰을 오픈하면서 최대의 음악 분수쇼(아쿠아스틱 쇼)로 기네스 인증을 받아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바다와 접한 sea-side 백화점>이란 컨셉을 내세운 광복점은
부산의 북항, 남항, 영도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옥상 전망대가 있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부산을 조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전망대로는 부산 타워나 황령산 봉수대, 부산 중앙 공원 등이 손꼽히지만
롯데 백화점 광복점 전망대는 도심 가까이에 위치해 있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쉽게 올라갈 수 있어 
접근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입장료가 무료라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으로 올라가 옥상정원으로 나가면 여느 백화점 전망대와는 차원이 다른 경관이 눈 앞에 펼쳐진다.





옥상 정원은 동편에 한곳, 서편에 한곳으로 두군데로 나누어져 있는데





여기저기 벤치가 놓여져 있어 쇼핑으로 지친 다리를 쉬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부인이 쇼핑하는 동안 남편들이 기다리는 휴식처로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옥상 정원에서 한층을 더 올라가면 사방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옥상 주변에 돌아가며 펼쳐지는데
전망대 한쪽에 엔제리너스(Angel-in-us Coffee)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게 먼저 눈에 뜨인다.
사방이 막혀 있는게 당연한 백화점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커피전문점이 있다니!
평소에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이곳에서는 항구의 낭만과 커피 향에 듬뿍 취해버릴 것만 같다.





어둠이 내려깔리기 시작한 전망대에 경관 조명이 이쁘게 켜져 있으니 저마다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기에 여념이 없다.
별자리가 이쁘게 그려진 조명탑 뒤로 은은한 보이는 부산 타워의 불빛이 조화롭게 보이고
가운데 세워진 다양한 조형물도 부드러운 불빛으로 인해 환상적인 느낌을 더한다.





DSLR 클럽에 올려진 광복점 전망대에서 찍은 야경 사진을 보고 혹하여 부산까지 찾아 온 필자.
야경 사진 하나 건져보려고 평소에는 잘 가지고 다니지도 않는 무거운 삼각대까지 메고 전망대에 올라왔는데......
아쉽게도 전망대는 눈높이까지 투명 가림막이 세워져 있는게 아닌가!
거기다 가림막 앞에는 스테인레스 봉까지 가로막고 있어 가림막 앞으로 바싹 다가서기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삼각대를 세워두고 찍는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샷이 나올리 만무하다.





12층이나 되는 높이에 위치한 전망대이니 만약의 사고를 대비키 위한 방책이었으리라....
밝은 대낮에 육안으로 부산항의 전망을 조망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야간에는 전망대 경관 조명들과 엔제리너스의 불빛이 투명 가림막에 반사되어 사진을 제대로 담기가 힘들다.

하는 수 없이 투명 가림막 위로 끙끙거리며 팔을 길게 뻗어 사진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 키에 대해서 큰 불만은 없었는데...... 이럴 때엔 정말 큰키가 부럽기만 하다!
남자들 키 정도만 되어도 투명 가림막 위로 팔을 시원스럽게 뻗어 사진 찍을 수 있을텐데.....
할 수 없이 까치발을 하고 투명 가림막 위로 팔을 길게 뻗어 사진을 찍었다.
"나와라~ 가제트팔!!!"이라고 속으로 크게 외치며!
까치발을 한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사진 몇장을 담고나니 금새 하늘에 어두움이 드리운다.


까치발 들고 바들바들 떨며 찍은 사진
몇장을 살포시 공개해 드리자면.....





전망대 동남쪽에서 담은 사진에는 컨테이너선들이 늘어선 부산항의 모습과 영도로 이어지는 부산대교,

영도 산중턱까지 자리잡은 건물들의 반짝이는 불빛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산대교의 노오란 불빛과 저멀리 산중턱에 아련하게 반짝이는 불빛의 조화는 부산의 대표적 야경 중의 하나.





전망대 남쪽에서는 부산대교의 모습과 함께 오른쪽 하단에 희미하게 보이는 영도대교가 보이는데 
영도대교 너머 남항대교의 경관은 하얀 띠가 되어 보는 이의 눈 속에 환하게 들어와 박힌다.





북쪽에 자리잡은 부산항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빙 둘러싸인 항만의 가운데 환하게 자리잡은 건물은 부산항 국제 여객 터미널.





북서쪽에서 담은 사진에는 남포동, 광복동 일대와 함께 용두산 공원과 부산 타워가 그 멋진 자태를 뽐낸다.

이날 부산의 하늘엔 약한 헤이즈가 끼인지라 야경이 선명하게 나오지 않은게 아쉬운 점이다.


필자의 이웃 중에는 유달리도 부산에 사시는 사진 블로거님들이 많다.
그분들이 소개해주시는 부산의 멋진 사진들을 보며 무한한 경외심과 부러움을 느끼던 필자.
'나도 따라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부산까지 내려와 생전 처음 부산 야경 사진에 도전해 보았지만
사전 정보의 부족과 사진 기술의 부족으로 부산 야경 첫사진은 완전 "실패!(나영석 PD버젼으로 읽어주시기 바람)"

살짝 시무룩해져 카메라를 거둔 후에도 한참이나 전망대를 배회하며 부산항의 불빛을 카메라 대신 눈 속에 담고 돌아왔던 어느 날.
다음엔 시야가 환히 트인 낮시간에 올라와서 맘껏 사진 찍고 커피도 한잔 기울이며 부산항의 낭만에 흠뻑 젖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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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그 끝머리가 깊숙이 방어진 반도에 꼬리를 감춘 곳,

대왕암을 비롯한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

옛 선비들이 '제2의 해금강'이라 부르기도 했던 울산의 끝 '울기(蔚埼)'



이곳에 자리잡은 대왕암 공원은 28만평에 이르는 넓은 공간에 펼쳐진 아름드리 해송림이 특징인데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던 이곳에 러·일전쟁 이후 해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인공적으로 1만 5천 그루의 해송림이 조성된 이후 울산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는 곳이다.





또 이곳에 위치한 기묘한 바위 중에서도 용추암, 또는 댕바위라고도 불리는 대왕암은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
1박2일 6대 광역시 특집에도 소개된 바 있는 이 대왕암은 육지에 있는 바위와 철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우리나라에서 간절곶과 함께 일출을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코 끝이 시리도록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피부 속 깊숙히 파고 드는 피톤치드를 몸으로 느끼며
공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대왕암을 향하여 입구에서 600m 정도 걸어가다 보면
바다를 바라보는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하얀 등대와 만나게 되는데 바로 105년 역사를 지닌 울기 등대이다.




일제가 동해와 대한 해협의 해상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세워진 울기등대는
고종 광무 10년 (1906년) 3월 24일 처음 불을 밝히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에서 3번째 오래 된 등대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울산 방어진항은 매월 6~700척의 어선과 3~4천명의 어부들이 드나들었고 포경업도 성업 중이었으며
관련 산업인 방어진 철공소와 무라카미(村上) 조선소가 들어서기도 한 분주한 항구였기 때문에
이 등대는 동해 남부 연안을 지나는 선박들의 안전을 지키는 등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맨 처음 6m 등탑으로 세워진 등대는 주변의 소나무가 점점 자라나 등대의 기능이 제한을 받게 되자 1972년엔 3m를 증축하게 되는데
그후에도 주변 소나무들이 점점 자라나게 되자 1987년 12월 12일에는 구 등탑을 증축하는 대신 새로운 등탑을 건설하게 된다.
현재 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남아 있는 구등탑은 구한말 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아서
2004년에는 대한민국등록문화재 106호로 지정된 바 있다.





구등탑 대신 1987년 24m의 높이로 건립된 신등탑의 경우 촛대 모양으로 조형미가 아주 뛰어나다.




울기 등대는 지금 단순히 등대의 구실만 하는 것이 아니라 휴양시설로도 이용되고 있다.
등대 주변에 콘도처럼 꾸며진 '송죽당'과 문인들이 시상을 떠올리게 하는 '문인의 방'등
주위의 솔 향기와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다바람 소리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특이한 하루를 남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등대 내에 100석 규모의 야외공연장이 있어 봄철, 가을철 주말이면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려
관광객들로 하여금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며, 오솔길공원, 문학공원 등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끈다.

울산지방 해양항만청은 겨울 방학 동안 간절곶 등대와 이곳 울기 등대에서 1박2일 동안 등대지기가 돼 보는 체험 행사를 운행하고 있는데
1월 30일까지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가족과 어린이들은 등대에서 이틀간 머물며 등대불 점ㆍ소등 주기 확인, 항로표지 장비점검, 해양기상 관측 업무, 등대 주변 순찰 등을 체험할 수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문의해 보시기 바라며.....





세간에 일출 사진 명소로 유명한 대왕암 공원이지만 오후 시간에 울기 등대를 방문하신 분들은 해질녘까지 기다려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등대는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와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하게 되니 등대가 불빛을 밝히는 저녁 시간까지 기다려
어둠을 가르는 등대의 불빛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보는 것 또한 흔하지 않은 체험이 될 것이니 말이다.





간혹 운이 좋으면 이렇게 가슴이 설레이도록 환상적인 노을을 만나 언제까지나 기억될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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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거제를 직통으로 이어주는 거가대교가 개통되었다기에
2010년을 보내기 전에 새로운 거가대교를 달려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부산 강서구 천성동 가덕도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사이 8.2km 구간을
해저와 해상으로 연결하는 거가대교는 부산 - 거제간 140km의 거리를 60km로 단축했고
주행 시간도 2시간 10분에서 50분으로 단축해서 유류비나 물류 비용을 크게 경감시켰다.

거가대교를 지나는 통행료는 국내에서 가장 비싼 수준인데
이는 거가대교가 GK해상도로(주)에서 건설한 민자도로이기 때문이다.
승용차와 승합차, 소형트럭은 만원, 버스와 트럭은 2만5천원, 트레일러는 무려 3만원의 통행료를
향후 40년 동안 받는다고 하니 이들이 벌어들이는 통행료는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듯.....

하지만 개통 기념으로 12월 31일까지는 무료 통행 기간으로 통행료를 받지 않는다는 소식에 현혹되어 길을 나서고야 말았다.
주말에 관광 버스와 승용차 등 7만여대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거가대교 진입로 곳곳에서 병목 현상을 빚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주중이니까 별로 밀리지는 않겠지....하는 생각으로 길을 나선게 화근이었다.





전국의 차량이 다 거가대교로 몰렸는지 양산 분기점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한 도로는 끝도 없이 지체, 서행을 반복하더니

부산 신항만 못 미쳐 녹산공단 입구부터는 아예 도로가 큰 주차장을 이루었다.
밀리다 서다를 반복하다 겨우 들어선 거가대교 입구, 역시 밀리기는 매한가지였다.





휴게소 진입 하는데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정말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고야 휴게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게소는 승용차와 관광 버스들로 혼잡을 이루어 주차 공간을 찾는데도 힘들 지경이고 휴게소 안은 사람으로 넘쳐났다.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휴게소 옥상 전망대로 올라가 보았다.






전망대에서 거가대교의 전체 모습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다와 주변 섬들과 어우러진 다리의 풍경은 가히 한폭의 그림이었다.





휴게소에서 출발해서 조금 가니 드디어 해저 터널 부분이 나타났다.

부산과 거제를 해저와 해상으로 연결하는 거가대교는 해저 터널 구간과 사장교 구간으로 나뉘는데
거가대교 8.2km 가운데 해저 터널(가덕 해저 터널) 구간은 3.7km에 이른다.

이 해저 터널은 침매 터널 공법으로 만들었는데 침매터널이란 바다 밑을 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 제작한 콘크리트 터널을 바다 밑 지반으로 가라앉혀 연결시켜 만든 터널을 말한다.
무려 길이 180m, 높이 10m에 무게만 5만 톤에 이르는 구조물 18개를 연결해서 만들었는데
가덕 해저 터널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저 수심 48m에 건설된 침매 터널이다.



                                                                                      이미지 출처 : http://www.gklink.com/

해저 터널을 지나니 드디어 거가대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장교 부분이 나타났다.

다리의 모양은 3주탑 사장교로
국내 최초의 다이아몬드형 주탑이 5개 세워져 있다.





오랫동안 밀리다가 거가대교에 오르니 차들이 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서행 차선인 3차선에서 천천히 운행하면서 한손에 넥스 -5를 쥐고 몇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주탑 바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니 다리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게 새삼 피부로
느껴졌다.





두개의 주탑을 지나 터널을 지나면 세개의 주탑이 있는 다리 부분으로 향하게 된다.





세개의 주탑을 다 지나니 터널 앞에 'Welcome 환상의 섬'이라는환영 문구가 나타났다.
여기서부터 거제시인것이다. 거제에 오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니....!
경주에서 2시간 걸려 올 수 있는 거리를 4시간 걸려 도착하고 나니 피곤하여 다리에 힘이 쭈욱 빠졌지만
다른 곳을 들리지 않고 거가대교를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유호리로 향했다.





유호리 방파제를 지나 야산으로 한참 오르니 저멀리 거가대교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었다.





가운데 섬을 사이에 두고 3개의 주탑과 2개의 주탑이 잘 어우러진 하얀 다리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하얀 다리....정말 낭만적인 모습이다.








이 다리 아래로 떠오르는 일출 풍경과 야경이 그리도 아름답다던데 시간이 없어 발길을 돌리려 하니 약간의 아쉬움이 앞섰다.







 밤의 거가대교는 조명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이 났다. 멀리서 봤다면 정말 환상이었을텐데......






거가대교의 야경은 돌아오는 길에 주행 중 담은 사진으로 만족해야 했다.






거제에서 돌아오는 길은 더욱 기막혔다.
오는 길이 엄청나게 막혔지만 돌아가는 길은 그나마 좀 나아지겠지...하는 기대도 한 순간.
거가대교 입구에서부터 대동 IC 까지 정말 끔찍한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다
양산분기점까지 와서야 겨우 제 속도를 내어 경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경주에서 거제까지 2시간에 주파할 수 있다는 거가대교.
이 날은 4시간 40분이 걸려 경주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거가대교 개통 전 먼 길을 돌아서 갈 때는 3시간 30분 걸렸는데.....!

2011년 1월 1일부터는 통행료를 징수하기 때문에 30% 정도 교통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동안 거가대교 인근 교통 상황은 나아질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거가대교를 통해서 거제도를 가실 분은 이런 교통 상황을 참고하셔서
GK 해상도로 교통 정보 안내 센터(1644-0082)로 문의하시면 실시간 교통 상황을 안내받으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이상은 통행료 2만원 아끼려다 길에다 기름값 더 내버리고 온 루비™의 거가대교 통행 체험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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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진 곳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은 통일 후에도 불안정한 국가를 걱정하여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다고 했는데
문무대왕의 사후 유해를 낭산에서 화장한 후 양북리 앞 바다 큰 바위에 장례를 치렀고 사람들은 이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1박2일에서 문무대왕릉이라 잘못 표기한 대왕암 공원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 위치한 약 93만㎡에 이르는 넓은 공원이다.
이 지역은 옛 선비들이 해금강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목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대왕암, 용굴, 탕건암 등의 기암 괴석과 함께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 15,000그루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바로 앞에는 1906년에 설치된 울기등대가 있어서 한동안 울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2004년에 이르러 대왕암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특히 용추암, 또는 댕바위라고도 불리는 대왕암은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부창부수라고.....문무대왕이 죽어 수중릉에 장사되니 그의 왕비도 이곳 울산의 대왕암에 묻혀 함께 용이 되기를 원했을까......?
이왕이면 문무대왕의 유골이 뿌려진 경주 봉길리 대왕암에 함께 묻히지 왜 경주에서 이렇게 먼 곳에 묻혔을까.....하는 의구심도 가져본다.




문무대왕비릉으로 전하는 대왕암은 육지에 있는 바위와 철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철교를 지나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 대왕암 정상에 오르면 의외로 정상의 공간이 협소함에 놀라게 된다.
십여명이 서면 금방 자리가 부족해지는 이곳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거의 날아갈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정상에서 눈을 들어 앞을 보면 탁 트인 바다가 펼쳐져 가슴이 다 시원해지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주변 바다의 물빛은 너무나 푸르고 주변에 둘러싼 기암괴석들은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대왕암 주변에는 남근바위, 탕건바위, 자살바위, 처녀봉, 용굴 등으로 이름지어진 기암괴석이 있어 가히 해금강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험천만한 벼랑 끝에 서서 낚시를 하는 모습들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장관인데 주변에는 간이 횟집들도 성업 중이다.




정상의 울타리에는 많은 사랑의 자물쇠들이 채워져 있는데 소금기가 많은 바닷바람으로 인해 거의 녹슬어 있는 모습을 본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와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연인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녹슨 자물쇠들이 미관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바다에 던져진 열쇠들은 바다를 오염시키게 되니 부디 삼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런 낙서들도 군데 군데 쓰여있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이곳 대왕암은 일출 명소로도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출이 빠른 곳이 대왕암이냐 간절곶이냐를 두고 3년간 분석한 결과
총 조사시간 108일 가운데 대왕암에서 해가 먼저 뜬 날이 94일(87%)이었으며 간절곶은 7일(6.5%)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월초와 12월말에는 간절곶이 1초 정도 해가 더 빨리 떠오른다고 해서
대왕암은 간절곶에게 새해 일출 명소의 영예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왕암 일출이 간절곶 일출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은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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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대 광역시를 하루에 다 돌아보아야 하는 1박2일 광역시 특집은
강호동, 이승기, 이수근, 은지원, 김종민 멤버 5명이 각각 대구, 부산, 울산, 인천, 광주로 흩어져 
제일 먼저 시작한 대구 미션에 성공하면 다음 멤버들에게  미션을 전하는 릴레이방식이다.

제한 시간 7시까지 마지막 멤버가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인데
시간 내에 완수하지 못하면 대전 번화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미션!

맨처음으로 100년전 대구의 사진을 찍는 미션을 완수한 강호동,
울산에서 가장 큰 우체통을 찾아 소망 엽서를 보내는 미션을 완수한 김종민,
부산 보수동 책방에서 고서적 3권을 찾는 미션을 완수한 이승기도 이수근에게 미션을 전했는데
바로 광주 무등산 서석대 앞에서 20명에게 팬싸인회를 하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다.

겨울날 해질졐에 인적이 드문 무등산으로 올라간 이수근이 과연  생애 처음 팬사인회의 미션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
은지원은 무슨 미션을 어떻게 받고 모든 미션이 제한 시간 내에 성공리에 마쳐질지......궁금증을 증폭시킨 가운데
1박2일 6대 광역시 특집의 마무리는 다음 주로 또 미루어졌는데....

지난주 필자는 강호동이 돌아보았던 대구의 근대 문화 유산애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다.
방송에 소개되었던 선교사 챔니스 주택, 3.1운동 계단, 계산 성당, 대구 제일 교회, 정소아과 등에 대해
상세 포스팅 하였으니 세부 내용은 아래 관련 포스트를 참고하시길 바라며......



이번에는 김종민이 돌아보았던 울산의 명소에 대해 소개할까 한다.
김종민은 엉뚱하게도 김태희의 모교라는 울산여고를 찾아가서 네티즌들의 강한 질타를 한몸에 받기도 했는데
울산이 아무리 자동차, 정유, 조선, 석유 화학 공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라지만 어디 찾아갈 곳이 그곳 뿐이었을까?
그것 때문인지 울산여고 다음으로 찾아간 간절곶, 대왕암, 언양 불고기는 건성건성 훑고 지나가는 정도로 소개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한 도시를 소개해야 하는 중대 과제를 안은 김종민이 울산여고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은
울산 시민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을만한 중대 과오를 범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하지만 방송 리뷰는 필자의 주특기가 아니니 그점에 대해선 이만 각설하기로 하고.....
오늘은 울산편에서 소개되었던 동해안 일출 명소 간절곶과 소망 우체통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간절곶(艮絶串)이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일원에 돌출한 지역을 이르는 지명이다.





곶(串, Cape)이란 만(灣)의 반댓말로 바다 또는 호수로 돌출한 육지의 끝 부분을 이르는데 
다른 말로 갑(岬), 또는 단(端)이라고도 하며 대부분 등대가 설치된 경우가 많다. 
이런 지형이 크게 형성되면 반도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곶은 호미곶, 장산곶, 무수단, 송도갑, 간절곶 등이 있다.





구불구불 해안 도로를 운전해서 간절곶 입구에 들어서 보면 북쪽으로 울산항과 현대 조선소가 한눈에 보이고
인근에는
진하해수욕장, 서성포 왜성과 같은 명소들이 있어 찾는 이를 함께 반긴다.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는 울산 큰 애기 노래비, 박제상의 부인과 그 딸들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석상  등....

각종 조형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어 찾는 이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하지만 잔디를 보호한다는 취지하에 둘러쳐진 울타리와 통일미없이 들어서있는 조형물들은 상당히 어수선한 느낌마져 준다.





제일 높은 언덕 위에는 간절곶 등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다.

1920년 3월에 불을 밝힌 이래 90년 동안 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등대는 오늘도 여전히 울산과 부산을 오가는 뱃길을 환히 밝혀준다.





조형물 중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간절곶 소망 우체통!

이 우체통은 2006년 1월 1일 해맞이 행사 때에 높이 5m, 무게 7t 의강철 재질로 만들졌다.


이 우체통은 실제로 운영되는 우체통인데 우체통 뒷편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소망 우편 엽서가 비치되어 있다.
엽서는 무료인데 관광객들은 이 엽서에 <소망의 글귀>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우체통엔 넣은 엽서는 매일 1회 수거되어 실제로 수취자에게 배달되는데 1년에 약 4만 여통의 엽서가 소모된다고 한다.
이제 1박2일에까지 소망우체통이 소개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소망 엽서를 더 찍어내어야 할지.....


김종민은 은지원에게 "올해 안에 2세 계획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글을 담은 엽서를 보냈다.
소망이 이루어져서 2011년에는 은지원이 아빠가 된 원조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
필자는 간절곶에 몇번 갔지만 대부분 사진만 찍고 돌아왔는데
다음번에 온다면 남들이 하듯이 소망 엽서 한번 써서 부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 우체통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이 우체통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어서
이 소망 우체국은 간절곶을 대표하는 최고의 상징물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곳은 울릉도, 독도를 제외한 육지에서 새해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포항 호미곶과 울산 간절곶이 저마다 새해 일출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간절곶은 포항 영일만의 호미곶보다 1분 빠르게, 강릉의 정동진보다는 5분 빨리 해돋이가 시작된다고 한다.

울산에서도 일출이 빠른 곳이 대왕암이냐 간절곶이냐를 두고 3년간 분석한 결과 

총 조사시간 108일 가운데 대왕암에서 해가 먼저 뜬 날이 94일(87%)이었으며
간절곶은 7일(6.5%)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월초와 12월말에는 간절곶이 1초 정도 해가 더 빨리 떠오른다고 해서 
간절곶은 울릉도, 독도를 제외한 육지에서 일출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곳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참고로..... 내년 신묘년(辛卯年) 2011년 1월 1일 일출시간은 오전 7시 31분 23초라고 한다.





'간절'이란 뜻은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간절하다'라는 뜻의 '간절'은 아니다.
'간절(艮絶)'이란 이곳의 지형이 '긴 잔짓대(긴 대로 만든 장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생소하기 이를데 없는 '긴 잔짓대'란 뜻 보다는 어쩐지 '지성스럽고 절실하다'는 뜻인 '간절(懇切)'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오늘이 벌써 12월 13일! 이제 2010년도 십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다가올 2011년 새해에도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다 이루어지길 바라며.....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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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집에서 휴일을 즐기면서 1박2일을 본방으로 보았다.
12월 5일 분 1박2일은 대한민국 6대 광역시를 하루에 돌아보아야 하는 주먹을 부르는 특집.

강호동, 이승기, 이수근, 은지원, 김종민 멤버 5명이 각각 대구, 부산, 울산, 인천, 광주로 흩어져 
제일 먼저 시작한 대구 미션에 성공하면 다음 멤버들에게  미션을 전하는 릴레이방식.

제한 시간 7시까지 마지막 멤버가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인데
시간내에 완수하지 못하면 대전 번화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미션!

1박2일 멤버의 불행은 시청자들의 행복이니....멤버들이 고생을 하면 할수록 더 즐겁기만 한데
대체 이 많은 미션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흥미롭게 보고 있노라니.....

나영석 PD와 함께 대구에 도착한 릴레이 미션 1번 주자 강호동이 수행해야 하는 미션은 바로
"100년전 대구의 사진을 찍어라!"

100년전의 모습을 건직한 대구의 근대 문화 유산을 찾아 3장의 사진을찍는 것이다.

미션의 첫번째 대상은 3.1운동 계단, 두번째는 선교사 챔니스의 집, 세번째는 정소아과 의원이다.


지금이야 경주에 살고 있는 필자이지만 대구가 고향인지라
강호동이 찾아서 사진 찍어야 하는 곳은 필자가 너무나 잘 알고 사진도 찍으러 다니던 곳.
직접 뛰어놀기도 하고 자주 발로 딛고 다니던 곳이 TV에는 어떻게 비칠까 궁금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3.1운동 계단과 챔니스 주택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대구 동산 의료원 뒷동산에 자리잡은 청라언덕을 찾아가야 한다.

청라언덕에는 100년이 된 선교사 주택 3채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 건물들은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100년 된 3채의 주택 중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현재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고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현재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강호동이 미션으로 찾아야 하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현재 의료 박물관이 되어 있다.





191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미 캘리포니아에서 유행하던 방갈로풍으로 지어졌는데 지금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집이다.






이 집들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해서 '청라 언덕'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중고교 시절 음악책의 유명한 가곡 '동무 생각(思友)'에서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친구야"하는 가사의 청라 언덕이 바로 이곳!
청라 언덕은 필자가 어릴 때부터 대구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라고 혼자 점찍어둔 곳이기도 하다.



또 이 청라언덕에는 머나먼 조선까지 와서 목숨을 바쳐 선교 활동을 한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묻혀있는 무덤인 은혜정원도 있다.
비록 서울의 양화진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묘비들로 둘러싸인 이곳에 서면 저절로 옷깃이 여미어지게 된다.



챔니스 주택 바로 옆,  청라언덕에서 계산 성당 쪽으로 내려가는 제일 교회 옆 계단은 

대구 독립 운동 당시 만세 운동을 준비하던 대구 학생들이 헌병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길로써  3.1운동 계단으로 불리운다.





계단은 모두 90개로 3.1운동 당시의 
사진들이 90계단 양 옆을 장식하고 있는데
대구에서도 아는 사람만 알던 이길은 대구 골목 투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지금은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연인들이 조용히 데이트를 즐기거나 혼자 사색에 젖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인데
1박2일에 소개되어 버렸으니 사람들로 붐비게 되어 이곳 특유의 낭만과 고즈녁함을 잃을거 같아 걱정이 앞선다.,

3.1운동계단을 내려가 길을 건너면 고딕식 붉은 벽돌 성당이 나타나는데 바로 대구 계산 성당이다.





1902년에 첫 미사를 드렸으니 올해로 108년이 된 이 성당은 대구에서 제일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지은 이 성당은 지금도 더 잘 지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하기 이를데 없다.
성당 바로 옆 뽕나무 골목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 국채 보상 운동을 일으킨 서상돈 고택들도 자리잡고 있다.





계산 성당을 지나 바로 옆 약전 골목으로 들어서면 초입부터 한약재 냄새가 온 골목을 진동하는데 이 골목은 바로 대구 명물 약전 골목.
1,658년부터 약령시가 열리던 이곳은 지금도 한약방과 한의원 등 한약 관련 업소 300여개가 성업중이다.

약전 골목을 돌아보다 보면 고풍스런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대구 제일교회 구예배당이다.





112년의 역사를 지닌 대구 제일교회의 구예배당은 고딕 양식으로 1933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는 청라 언덕 위로 예배당을 이전하였기 때문에 구건물은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구 제일 교회와 계산 성당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정말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강호동의 마지막 미션은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에 등장하는 대구 최초의 주택 정소아과의 간판을 찍는 것.
진골목(긴 골목)에 자리잡은 2층 양옥 정소아과는 대구부자 달성 서씨의 저택으로 1937년에 건립되었다.
1947년에 소아과가 들어선 이후 내외부 수리 없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일제시대 상류층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지금은 진료를 하지 않고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정소아과의 사진은 미쳐 찍어놓지 못한지라 스샷으로 대신하는 점이 아쉬운데
가까운 시일에 정소아과를 비롯한 대구 진골목 기행을 다녀와서 여러분들께 공개해 드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강호동의 대구 여행 마지막은 강호동과 양준엽이 함께 한 대구 대표 음식 기행.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은 막창, 닭모래집.....납닥 만두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1박2일에는 동인동 찜갈비가 소개되는데
필자는 바로 지난주에 동인동 찜갈비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간단하나마 1박 2일 6대 광역시 특집에 나온 대구의 근대 문화 명소들을 소개해 보았다.
자세한 사진과 해설은 관련 상세 포스트의 링크를 눌러 확인하시길 바라오며....
다음 주에 이어질 다른 광역시 기행도 은근 슬쩍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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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지도에 소개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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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한창 깊어져가는 10월의 마지막 주말,
가을 주왕산을 못본지가 한참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차에 올라 길을 나섰다.
1시가 넘어 경주에서 출발한지라 주왕산 가까이 오니 벌써 3시.
좀 늦긴 했지만 빨리 걸으면 3폭포 까지는 보고 오겠지....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주왕산으로 꺾어들어가는 삼거리까지 오니 어.....이게 무슨 일!
삼거리 진입로에 경비업체 직원들이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차들을 우회시키고 있다.

진입할 수 없다고 차를 돌리던지 주산지 쪽으로 가라고 안내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주왕산 주차장은 물론이고 주차장에서 1km 넘게 떨어진 삼거리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관광버스로 가득 차서 도저히 진입이 불가능하단다.
이럴 수가....! 전국의 관광버스가 다 주왕산으로 몰려든건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항의할 상황도 아니라 하는 수 없이 주산지 쪽으로 차를 돌렸다.
하지만 주산지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도로가 관광 버스로 가득 차서 주차할 곳은 물론 교행도 힘든 상황이었다.
무슨 행사가 있는 것인지....아니면 단순히 행락객들이 한꺼번에 몰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원래 가려고 하던 주왕 계곡 트래킹 코스를 포기하고 그나마 덜 붐비는 절골 계곡으로 향했다.

주왕산은 대구나 경주, 포항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일 뿐 더러
계곡 트래킹 코스는 절경이 펼쳐지는 계곡 옆으로 넓고 평탄한 길이 이어져 있어
편한 운동화나 굽 있는 구두를 신고도 걸을 수 있는 곳이라 그동안 몇번이나 찾아왔었지지만
주왕산 남동쪽에 자리잡은 절골 계곡은 이번이 완전 초행길이다.

처음 찾아보는 절골. 매표소를 지나 좁은 산길을 조금 지나니
이내 계곡에 드리운 다리 뒤로 기암괴석 절경이 드러난다.
산행의 시작부터 만나게 되는 아기자기한 계곡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다 멈추고, 멈추다 흐른다.
양쪽으로 병풍을 둘러친 듯한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이 어울려 마치 별천지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휴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붐비는 주왕 계곡에 비해 상대적으로 절골을 찾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발길이 뜸하다보니 인위적인 손길이 가해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오히려 주왕 계곡에 못지 않다.

가는 가을을 아쉬워 하는 듯 형형색색 잎사귀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절골 계곡.
 비록 설악산이나 내장산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잔잔한 계곡길 사이로 이리저리 건너다니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운치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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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많던 여중생 시절, 단짝 친구와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그 앞을 지나다니던 대구 계산동 성당.

호기심에 성당 문을 살며시 밀고 안을 훔쳐 보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던 성당의 높은 첨탑, 하얀 미사포를 곱게 쓰고 미사를 드리던 여자들,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기도하던 긴 머리 아가씨의 모습도 바로 엊그제 일인양 생각나는데....






대구 나들이길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계산성당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았다.





담장허물기 운동으로 사라진 담장 둘레에 새롭게 만든 화단엔

금강소나무, 배롱나무, 화살나무, 철쭉 등이 심겨져
예전보다 더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데




건물은 108년이나 된 역사가 무색하리만큼 깨끗하여 돌아보는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다. 
 
 
 

 

성당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기념 성수대가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내부 장식은 간결하고 깔끔하며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느낌이 앞선다.
 

 
양쪽 벽에 늘어선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주는데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스테인드글라스 중에는 한복 차림의 성인도 눈에 많이 뜨인다.




갓을 쓰거나 사모관대를 한 이들 성인들은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초기 대구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이다. 

 계산 성당의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신나무골, 세방골에서 에배를 드리다가

1886년에는 대어벌(현 인교동)에 있던 정규옥 승지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정규옥 승지의 집은 관청이 아닌 건물로는 대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899년, 한국식 십자형 목조 성당으로 지어진 본당의 축성식은 성탄절에 거행되었는데

사방에서 축성식을 구경하기 위해 신자와 비신자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력한 지진이 대구 지역을 휩쓸었던 1901년 2월 4일,

제대 위에 올려둔 촛대가 진동으로 쓰러져 제대보와 양탄자에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일어나 이 아름다운 목조 성당은 전소되는 참변을 맞게 된다.


한국형 성당을 화재로 잃게 되자 그 위치에 현재의 벽돌로 된 서양식 성당을 세우게 되는데


설계는 프랑스 선교사가, 건축은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벽돌을 굽는 기술이 우리나라엔 없었던지라 중국인들이 벽돌 공장을 새로 새워 건축을 했으며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건축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서 조달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는 열차로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서 대구로 우송되기까지 했다.


1902년 12월 3일 첫미사를 드린 후 1903년 11월 1일 열린 성당  축성식에는 영호남지역 선교사들이 대부분 참석하였고,
 
사방 2백리 안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축성식에 참여하려고 대구로 모여 들었다.

이 축성식에는 인근 주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고,

대구 감사와 지역 유지들도 초대에 응해서 대구 전체의 축제날과 같았다고 한다.




대구에선 전래가 없었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보면 너무나 잘 튼튼하게 서 있어서 성당 건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기와집과 초가집 밖에 없던 시절에 이렇듯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니.....정말 놀랍기만 하다.


이 성당 건물은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건축된 서양식 건물이고 서울,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이다.

경상도 지역을 통틀어 가장 오래 된 이 성당은 현재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당에서 시인 이상화가 영감을 얻어 그의 시 '나의 침실로'를 지었으며

1950년 12월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이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경북지사가 주례사를 했는데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했다는 일화는

대구사람이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계산 성당 주변 일대에는 우리나라 근대 문화 유적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옆 뽕나무 골목 안에는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구의 중심이었던 종로, 약전골목, 진골목들을 돌아볼 수 있다.



 

또 계산성당과 마주 보는 언덕은 바로 가곡 '사우(思友)'의 배경이 된 '청라언덕'인데

이곳에는 102년 역사의 대구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초창기 의료 선교를 담당했던 선교사 주택이 박물관으로 남아 있어서

대구의 근대 문화 거리를 돌아보는 골목 투어의 기점이 된다.


108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제 자리에 서 있는 계산성당.


오늘도 여전히 대구의 근대 역사를 알려주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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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건립된 소록도의 '감금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소록도 병원장이 

징계 검속권을 남발하여 한센병 환자를 강제로 구금하고

감식(減食) 처분, 체형 등을 가하던 역사적 건물이다.

일본인 원장의 철권 통치에 불복하는 환자들은 감금실에 강제로 격리 조치되었는데  

이 감금실에서 무수히 많은 한센인들이 죽어서 나가거나 신체 불구가 되어 출감했으며 

살아서 나가는 사람들은 강제 정관 수술을 시켜 내어보내지곤 했었다.




또 바로 옆에 위치한 '검시실'은 감금되었다가 유명을 달리한 한센환자들을

검시하고 단종 수술을 단행하던 곳이라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섬뜩한 느낌마져 준다.





민족의 어두웠던 시절, 불치의 병마에 시달리던 그들을 다시 한번 좌절시킨 소록도.

감금실 한쪽에는 한센환자 김정균님의 시가 빛바랜 채로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말해 준다.




작은 창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 보며 얼마나 자유를 목말라 했을까?

이제는 부서진 채로 남아 슬프게 다가오는 소록도의 창(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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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어떤 분들은 중국 청도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경남인가...? 하며 갸우뚱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는 고장이 청도이다.
그러다가 청도소싸움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하면
아하...그곳...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경북에서도 한쪽 구석에 짱 박힌 조그마한 소읍 청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의외로 오래된 고택, 읍성, 서원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있어
가볼만한 곳을 찾아다니다보면 며칠에 걸려 돌아보기도 벅찬게 사실이다.

필자는 그동안 숨겨진 진주 같은 청도의 이모저모를 여러번 포스팅해 드렸는데
오늘은 청도의 가볼만한 곳의 대략적인 소개와 아울러
그동안 미쳐 소개해드리지 못한 곳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더 상세한 소개는 설명 아래 링크된 포스트를 누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운강고택 및 만화정 (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이 다시 중수한 대주택이다. 
이 주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자형으로 되어 쌍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 주택이다. 





만화정(萬和亭)
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운강 박시묵이 1856년경 건립한 정자로 수학을 강론하던 곳이며
동창천을 끼고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운치를 배려해 놓았다.
주변의 경관이 이름답고 건물 또한 견고하고 섬세하며
6.25때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섬암고택 (문화재자료 제268호)

운강 박시묵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 공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안채와 중문채, 사랑채, 헛간채, 도장채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대문채는1990년 도로확장공사 시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운강고택을 중심으로 한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중심 몫을 하고있다.






임당리 김씨 고택 (내시고택, 대한민국중요민속자료 제245호)

이 고택은  조선시대 궁중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선암서원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1506~1543)선생 두분을 향사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고종15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




청도읍성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

이 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石築城)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규모는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읍성철거정책으로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와서 읍성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청도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읍성 외곽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비석이 서 있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가 2008년 청도 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 모두 30기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 제323호)
이 석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청도 동헌 (문화재 자료 제 403호)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인 청도 동헌은 관찰사, 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졌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들어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 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
옛 관아 건물은 용도가 폐기되고 동헌 건물은 학교 교실로 활용되면서 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도주관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위패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양쪽에 동 . 서헌의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청도 척화비 (문화재자료 제109호)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강한 경고문구가 적혀 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운문호
청도군 운문면 밀양강 지류를 막은 인공 호수 운문호는 댐 길이 407m, 높이 55m, 유역 면적 301.3㎢, 저수 용량은 1억3500만톤으로 
1일 37만톤의 용수를 대구, 경산, 영천, 청도군에 공급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댐이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가며 펼쳐지는 댐 지류의 고즈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운문호 주변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청도 운문사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년기념물 180호) 
운문사 앞 뜰에 자라는 처진 소나무의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해마다 승려들이 이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막걸리를 부어주는 정성을 다하고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매전면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295호)
소나무의 품종으로는 금강송과 처진소나무, 산송, 황금나무, 다행송이 있는데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형을 가진 것으로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이곳 매전면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m로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같이 처진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청도 와인 터널

청도에서 여행객들에게 특별히 각광받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청도 와인 터널이다.
경북 청도군 남성현 송금리에서 문을 연 와인 터널은 부부, 연인, 가족, 친지의 즐거운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터널은 실제로 열차가 다니던 터널을 개조해서 와인 저장고 및 카페로 문을 연 것이다.
바깥 온도가 영하에 달하더라도 터널 내부는 연중 14~16도의 온도와 60 ~ 70% 의 습도를 유지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고
110년의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와인 숙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내 최대의 와인 터널이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연인들끼리 들린다면 감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




화양 큰줄다리기

일부 복원된 청도 읍성 안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격년으로 열리는 도주문화제에서 쓰이는 줄이다.
화양 큰줄
다리기가 영남의 줄다리기라 할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 행사규모의 크기가 엄청나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고장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음력 정월대보름을 중심으로 한 부락 또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또는 남.북으로 편을 갈라 남녀 노소의 마을사람들이 줄을 당기어 승패를 다투고 그해의 흉풍과복을 점치기도 한 민속놀이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주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점세적 년중행사로 삼한 이래 벼농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양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고대사회로부터 행해진 민속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문장상으로는 18세기에는 도주줄, 19세기에는 영남줄, 20세기 초반에는 읍내줄, 1983년부터는 화양줄이라 부르고 있다.


청도 소싸움 축제 


자연과 하나 되는 문화 관광의 메카인 청도에는 이렇듯 도주 문화제, 정월대보름축제, 청도 반시 축제...등 각종 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그중에도 제일의은 역시 소싸움축제가 아닐까?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싸움은 이제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로, 한국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협동 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부활되고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 축제....청도에 들리는 분들이 빠뜨리지 않아야 할 최대의 볼거리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청도소싸움.kr/)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해드린 청도의 문화재, 민속놀이는 그저 일부분일 따름이다.
언급한 곳 외에도 가볼만한 곳이 산재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소개해 드리지 못하고 일부분만 소개해 드렸다.
남겨진 청도의 진주는 다음 기회에 더 소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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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소록도(小鹿島)'.
섬의 면적은 15만평 정도로 아주 작지만 깨끗한 자연 환경과 해안 절경,역사적인 기념물 등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 소록도이다.

하지만 이 섬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을 찾을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 섬은 전체가 나병이라고도 하는 '한센병' 환자의 병원이요, 요양원이기 때문이다.





소록도의 중심인 소록도 병원을 지나 한센병 자료관과 검시실, 감금실 사이로 난 길을 쭉 가면
아늑하고 아름다운 공원이 하나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소록도 중앙공원이다.
소록도 중심에서도 아주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는 중앙공원을 돌아보기 앞서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공원 가운데 '구라탑'이란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확 들어온다.


아니...구라탑이라니....!
탑 이름의 뜻을 생각하기 앞서 제일 먼저 김구라가 떠오르는 것은 웬 일인지....^^
김구라가 막말로 인터넷 방송을 뜨겁게 달군 공로를 높이 사서 세운 공로탑은 설마 아닐테고....

                                                             

공원으로 들어서니 너무나 아름답게 가꾸어진 나무 들 가운데 자리잡은 하얀 탑이 눈에 들어온다.
날개를 활짝 편 천사가 무언가를 밟고 서서 창으로 찌르려고 하는 형상이다.






가까이 가서 탑을 자세히 보니 바로 정면에 쓰인 이름.....
구.라.탑....!

바로 구할 구(求), 문둥병 나(라:癩), 탑 (탑塔)....
바로 '나병에서 구해낸다'라는 내용의 탑이다.
바로 아래 '한센병(나병)은 반드시 낫는다'는 표어도 함께 쓰여 있었는데....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나병이라고 불리우던 '한센병'은 고대로부터 천벌이나 천형으로 묘사되었으며
나병환자를 이르는 속어인 '문둥이'라는 말은 전라도나 경상도 지방에서는 욕설일 정도로 옛날부터 멸시의 대상이었다.

또한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는 한센인들이 자신의 병을 치유키 위해 어린아이들의 간을 내어먹는다는 괴소문이 퍼져서
마을에 한센인이 들어오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돌을 던져서 쫒아내기도 하고 
어떤 마을에서 아이가 사라지면 한센인들을 의심하여 이들을 잡아서 학살하기도 하는 등 사람다운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되어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은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강제 수용했는데
당시 일본인 수호(周防正季) 병원장은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한센인을 동원하여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하였다.
심지어는 1940년 8월 20일에는 환자들에게 강제 징수한 기금으로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를 기념하여 매달 20일을 '보은의 날'로 정하고 환자들을 자신의 동상에 참배까지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호 원장은 부당한 처우에 항거하는 환자들을 감금실에 강제 구금하고 감식, 체형을 가하였는데 
감금실에 갇힌 한센인들이 죽게 되면 해부를 해서 시체를 모욕했으며 






살아서 출감하는 한센인들은 옆에 있는 검시실로 끌고 가 강제 단종수술(정관절제수술)을 했으니
이는 한센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일본인 원장의 어이없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제 노역, 가혹 행위로 환자들의 불만을 증폭시킨 수호원장은 나중에 이춘상이라는 환자에 의해서 살해되었는데
수호원장을 살해한 이춘상은 어이없게도 일제 법원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졌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센인들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처우는 달라지지 않아서 
전국 각지에서 무분별하게 소록도로 강제 송치했으며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행을 가하고 강제 노역을 시킬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나 다를 바 없이 강제 구금과 강제 불임 수술이 행해졌다고 한다.





이후 많은 아픔을 뒤로 하고 소록도에서 나온 한센인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기가 일쑤였고
가족이나 친지들도 행여나 감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인해 인척 관계를 끊고 대면하지 않았다.
지금 소록도에 남아 계신 많은 한센인들은 이미 완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한센병에 대한 편견으로 가족 친지들 옆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남으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또 한센인 2세들은 미감아(나환자의 자녀로 아직 병에 감염되지 않는 자)라는 굴레를 평생 동안 지고 살아야 했으며
학교에서는 소외 당하고 사회로 나와서도 제대로 된 직장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할 때에도 불이익을 당하는 등 평생을 쓰라린 가슴을 안고 눈물 흘리며 살아야 했다.






암조차도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닐 정도로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에도 한센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견해는 무지하기만 하다.
필자가 소록도를 돌아보러 간다고 할 때
"거길 왜 가요? 나병 옮으면 어떻게 할려구요?"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심지어 'Daum 지식'에는
"정말 나병환자들은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병이 나았을까여?
글쎄 먹었을지 안 먹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먹은 사람은 병이 나았을까여?"
라는 황당한 질문도 떡 하니 올라와 있는 것을 본다.






나병이라고 하기도 하는 한센병은 microbacterium reprae라는 박테리아에 의하여 전염되는 병인데 
노르웨이의 Hansen이라는 사람이 이 박테리아를 발견해서 한센병이라고 불리워졌다.
이전에는 서구에서도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어 환자 격리만 시켰으나
1940년대에 이르러는 미국에서 댑손, 리팜피신 등의 약이 개발되게 되어 한센병은 드디어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고
'전염성'의 경우에는 리팜피신 3알이면 전염력이 99.99%가 사라지기 때문에 
한센인이 일반인과 같이 생활한다고 해도 절대로 전염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아직도 여전히 한센인들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는 계층에 속한다.
현재 소록도나 시설, 그리고 한센인 정착마을에 사시는 분들은 이미 환자가 아니고 완치된 분들인데도 
세월이 흘러도 개선되지 않는 사회의 편견은 한센인들과 그 가족들을 두번 죽이고 만 것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섬 소록도.
소록도 중앙 공원에 서 있는 '구라탑'의 천사가 마귀와도 같은 병마를 창으로 찔러죽이듯이
한센인들의 육체의 병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아픈 상처도 깨끗이 치유함을 받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하면서.....
탑신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구....라.... 탑....
한센병은 반드시 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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