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뜰 산책........................'에 해당되는 글 269건

  1. 2010.02.04 입춘대길, 안동 고택의 입춘서를 소개합니다 52
  2. 2010.02.03 경복궁 근정전,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 28
  3. 2010.02.02 겨울연가 남이섬, 그 이름에 숨겨진 이야기 28
  4. 2010.02.01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유산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70
  5. 2010.01.22 통일전망대에서 본 그리운 금강산 85
  6. 2010.01.19 하조대에서 맞이한 눈부신 아침 56
  7. 2010.01.18 화진포 언덕 위의 작은 집, 이승만 별장 31
  8. 2010.01.15 화진포 송림에 자리잡은 이기붕 별장 23
  9. 2010.01.13 김일성 별장 화진포의 성과 광개토왕릉 금구도 35
  10. 2010.01.01 울진 망양정,바다 위로 날아갈 듯한 아름다운 정자 20
  11. 2009.12.28 호랑이해 최고의 일출명소 호미곶 해맞이 광장 82
  12. 2009.12.26 자살한 물고기? 재미있는 상징탑 43
  13. 2009.10.17 엣지있는 가을 패션, DDM에서 완성하세요~ 31
  14. 2009.09.21 영덕 구계 항구의 아름다운 등대 풍경 79
  15. 2009.08.30 한국의 10대 비경 청송 주산지 48
  16. 2009.08.14 영화 '약속'촬영지 전주 전동성당 60
  17. 2009.08.11 서울 가볼만한 곳 궁금하세요? 53
  18. 2009.07.11 100년 역사의 한옥 성당 강화 온수리 성공회, 24
  19. 2009.06.24 청도 석빙고, 조상들의 지혜로운 여름나기 39
  20. 2009.06.01 꽃담이 아름다운 청도 운강고택 32
  21. 2009.05.30 이승만 대통령의 피난처, 청도 만화정 20
  22. 2009.05.26 담 너머로 훔쳐본 내시고택 33
  23. 2009.05.23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운주사 불상 2
  24. 2009.05.22 대구의 양화진 묘지 / 청라 언덕 위 은혜정원을 아시나요? 20
  25. 2009.05.19 전주 한옥마을 한글간판 너무 좋아요 36
  26. 2009.04.22 삼덕동 골목은 오픈 갤러리 26
  27. 2009.04.20 '청라 언덕'이 어딘지 아세요? 52
  28. 2009.04.15 담과 마음을 함께 허물었던 대구 삼덕동 골목 32
  29. 2008.02.11 화재 직전 숭례문의 아름다운 자태 3


예년에 없던 강추위와 폭설로 인하여 어깨가 움츠려들기만 했던 이번 겨울

언제나 봄이 올까..... 먼먼 훗날의 일 같더니 
매서운 날씨 속에서도 어김없이 2월이 오고
봄의 시작을 알려주는 '입춘'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 왔다.

우리네 풍속에는 해마다 입춘이 되면 새 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입춘을 맞이하는 글을 써붙이는데
대궐에서는 신하들이 지은 '춘첩자(春帖子)'를 붙이고 민간에서는 '춘련(春聯)'을 붙였다.

이를 입춘서(立春書), 또는 입춘방(立春榜)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양반 집안에서는 손수 새로운 글귀를 짓거나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춘련을 써서 봄을 축하하는데
이것을 '춘축(春祝)'이라 하고  
댓구를 맞추어 두 구절씩 쓴 춘련을 '대련(對聯)'이라 불렀다.



이 춘련들은 집안의 기둥이나 대문, 문설주 등에 두루 붙이게 되는데

한번 붙인 입춘서는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그 다음해 입춘이 되면 전에 붙인 입춘서 위에 덧붙이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그리고 입춘서는 붙이는 시간이 중요한데 2015년 입춘은 1258분이므로

그 시간에 맞춰 붙여야 한다고 한다.

입춘을 맞이하여 안동 소재 고택의 문설주에 붙은 입춘서들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린다. 

 


대련에 가장 많이 쓰이는 글귀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란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됨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쓰인'건양'이란 19세기 말 고종 즉위 33년부터
다음해 7월까지 쓰인 고종 황제의 연호(1896∼1897)를 말한다.



 

  그 외 많이 쓰는 대련으로는  '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산처럼 장수하고, 바다처럼 부유해지기를 바랍니다)와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등이 있다.
 


그 당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뜻에서 집집마다 '건양다경'을 써서 붙였다고 한다.

퇴계 이황 고택 솟을 대문 양쪽에는  '
봉천리(奉天理) 계오생(啓吾生)'이란 대련이 붙어 있다.
 


이는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나의 생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퇴계 이황 고택의 안채에도 여러 종류의 대련이 붙어 있는데
오른쪽의 '가금불상(呵禁不祥)'은 '불길한 것을 꾸짖어 금한다'는 뜻이고
왼쪽의 '신다(神茶)'는 '울루(鬱壘)' 와 짝을 이루는 대련으로써
신다와 울루, 이 두 신은 귀신들이 다니는 문의 양쪽에 서서 모든 귀신을 검열하는데
남을 해치는 귀신이 있으면, 갈대로 꼰 새끼로 묶어 호랑이에게 먹인다고 믿는다.
 


 
조선 때 천문, 지리, 측후를 맡아 보던 관청인 관상감에서는
붉은 물감으로 귀신을 쫓는 글인 '신다울루(神茶鬱壘)'를 써서 궁중의 문설주에 붙여 두었다고 한다.
 


'문신호령(門神戶靈)'은 문의 신과 집의 영이란 뜻이다.
 


'문신호령(門神戶靈) 가금불상(呵噤不祥)'은 문의 신과 집의 영이 지키고 있으니 불길한 것을 꾸짖어 금한다는 뜻.
 


'정자계자(正自啓自)'는
'스스로 바르게 함으로 자신을 깨우쳐라'....
 


 
'화복무문(禍福無門) 유인소소(唯人所召)' ....이 두 귀절이 보통 짝을 이루는 대련인데
'화와 복은 들어오는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오는 것'이란 뜻...
사자소학 수신편에 있는 글귀이다. 



'육오배헌남산수(六鰲拜獻南山壽) 구룡재수사해진(九龍載輸四海珍)'.
이름있는 고택도 아닌 안동의 어느 평범한 골목집 기둥에 붙어 있던 입춘서도 눈길을 끈다.

'육오배헌남산수(六鰲拜獻南山壽)'는 여섯 자라가 절하며 남산의 장수를 집주인에 바쳐주며


  
'구룡재수사해진(九龍載輸四海珍)'은
아홉용이 사해의 보배를 실어와서 자기 집에 가져다 주기를 기원하는 입춘서이다. .
.

예전에 한옥에 살 때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쯤이야 누구나 써서 문설주에 붙였다지만
아파트식 주거에 익숙해 진 지금은 입춘서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새 봄엔 입춘서에 쓰인 글귀들 처럼 세파에 찌들어 힘든 우리네 가슴에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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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원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기 1925년의 광화문앞을 찍은 한장의 사진에서 그 당시 광화문 앞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민족의 수난기를 겪으며 일제로 인해 옮겨졌다가  박통 때 헐고 새로 지었다를 반복한 광화문은  2007년부터 다시 완전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라

온전한 경복궁의 모습은 광화문 공사가 다 끝나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광화문이 보수 중이라 현재 경복궁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얼굴 역할을 하는 문은 흥례문이다.
흥례문은 광화문 다음으로, 아니 광화문 못잖게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문인데 사람들은 이 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흥례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지금의 흥례문은 만든 지 15년밖에 안 된 새 문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경복궁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했던 문이 바로 흥례문이다.
일제는 1914년 경복궁에서 흥례문을 헐어 없애버렸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광화문은 정문이다 보니 옆으로 옮겨버리긴 했어도 놔뒀지만 흥례문은 가차 없이 경복궁에서 도려내버린 것인데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헐어버리면서 흥례문은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15년 밖에 안 된 흥례문은 건물에 밴 세월의 무게는 덜해도 그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앞에서 봐도 멋있지만 옆에서 보면 더욱 매력적인 건물이다.

 흥례문을 지나들어가면 내문(內門)인 눈 앞에 근정문이 나타난다. 

왼쪽에 보이는 유화문은 신료들이 궐내 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던 문이고 금천을 가로지른 영제교 건너편에 근정문이 자리잡고 있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고....  

  근정문은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朝參)의식을 행하거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인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인 것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니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가운데는 왕도(王道)가 있고 양 옆에는 품계석이 도열해 있는데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의 자리이다. 

'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다.

 근정전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필자도 임금님이 서셨던 월대에 올라  임금님의 시선으로 마당을 내려다 보았다.  

월대 위에 놓인 청동제 정(鼎)에 시선이 간다. 이 무쇠 솥은 실제의 용도보다 왕권의 상징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전각의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니 어좌가 보이고 어좌의 배경인 '일월오봉병'이 뒤에 펼쳐져 있다. 

 일월오봉병은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다섯 봉우리의 산, 폭포,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출렁이는 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월오봉병'은 임금의 권세를 상징하는 그림인데
조선시대 임금님의 앉은 보좌 뒤에는 빠짐없이 이 일월오봉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정전의 너른 바닥에는 방전(方塼)이 깔려 있고 내부에는 궁중 조회 의식에 따른 도승지,도청관들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2층으로 되어 있으나 건물 내부는 아래,위층 구분 없이 트여 있어 넓고 높다.   

실내에는 청나라에서 선물 받았다는 칠보대향로가 양쪽에 놓여 있는데
근정전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 않고 좀 생뚱맞은 느낌을 준다.
 

근정전은 새로 보수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단청의 색깔이 산뜻하고 화려하다.  

근정전 정면 문에서는 잘 안 보이는 천정 용문양이 동쪽 문에서는 보인다는
문화재 해설가 분의 말씀을 듣고 동쪽으로 돌아가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왕권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칠조 황룡이 천정에 돋을새김되어 있었는데  발톱이 일곱인 용이라서 칠조룡이라고 한다고.... 

 동쪽 문을 열고 전각 안을 들여다 본 모습이다.  

필자는 우리 고택의 창호문을 너무 좋아 하는데 

 경복궁 전각들의 문은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특히 무쇠를 엿가락 주무르듯 땋아놓은 문고리는 하얀 창호와 어울려 더욱 빛을 발한다.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사람은 어디든지 있는 법인지 궁궐 창호문에 구멍을 내어 놓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창호의 구멍난 부분으로 안을 한번 훔쳐보고 전각 뒤로 돌아가 본다. 
 

전각 뒤의 그늘에는 아직 눈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조선 시대에 태어 났으면 감히 밟아 보지도 못할 근정전 전각이며 마당을 다 헤집고 돌아 보니 정말 감개가 무량하다.

근정전 월대를 내려서서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편전인 사정전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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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있는 유원지 남이섬을 처음 찾은 건 10년전 쯤.....
호기심을 안고 강을 건너간 남이섬은 자연 경관 자체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나
무질서하게 들어선 위락 시설들과 정돈되지 않은 전체의 느낌은
마치 한물간 80년대 유원지 같은 느낌을 주어 아쉬운 맘을 안고 돌아서게 한 곳이었다. 
 
그 후에 드라마 겨울 연가가 이곳에서 촬영됨으로 인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하여 새롭게 태어난 남이섬은 오랜전 섬의 모습과는 많이도 달라져 있었고
겨울이 돌아오면 항상 다시 찾고 싶은 곳 중에 하나가 되었다. 

 남이섬은 2006년에 동화 속의 나라 '나미나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고 한다.^^

나미나라의 일일 국민이 되는 '하루 VISA(입장권)'는 하절기 8000원,동절기 6000원인데 왕복 도선 요금이 포함되어 있다. 
1년 단기 여권은 15000원인데 1년 내내 입장할 수 있다. 

 1일 나미나라 국민이 되는 입국 심사대는 그저 입장권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나미나라에 입국하는 국민들은 모두 다 들뜬 표정으로 입국장(!)을 지난다... 

  나미 나라 공화국 정문을 통과하면 나미나라로 인도할 배에 올라탈 수 있다.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승객들을 금방 나미나라로 인도하고 배에서 내리는 순간 모두가 나미나라 공화국의 일일 국민이 된다. 

왕자님을 기다리는 인어 공주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새로운 국민들을 환영한다. 

 북한강 안에 떠 있는 반달같은 남이섬. 1939년 이전까지는 홍수때만 생기는 섬이었으나 청평댐의 완공으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완전한 섬이 되었다.  

 섬의 둘레는 약 5 킬로미터,면적은 약 46만 평방미터이니 여의도의 1/5 쯤 된다. 

 1965년 수재 민병도 선생이 이 섬을 구입하여 메타세콰이어, 자작나무, 잣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나무들을 심고 

중앙부에는 잔디밭과 오솔길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전원의 풍치를 느낄 수 있는 섬으로 가꾸게 된다. 

 강원도 춘천 남이도..... 남이섬은 행정 구역상 강원도 춘천시이나 들어가는 입구는 경기도 가평군에 속해 있다. 

 명색이 공화국인지라 행정관리청도 있다....^^  

 남이섬 이름의 유래는 섬에 있는 남이장군묘에서 온 것이다. 

 이 섬에 남이 장군이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덤이 있었고 그 곳의 돌을 함부로 가져갈 경우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고 한다.  

 이 섬을 개발한 민병도 선생이 이 돌무덤 자리에 봉분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글을 썼다. 

 세종 23년 1441년에 출생한 '남이'는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어머니가 태종의 딸) 명문가와 혼인했으며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5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된 희대의 풍운아이다.


 남이 장군의 결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남이가 어릴 때에 큰 길에 나가 놀고 있는데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보니 그 위에 귀신 하나가 올라 앉아 있었다 .
남이가 따라가 보니 하인은 좌의정 권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곧이어 집안에 곡성이 나기에 물어보니 권대감의 딸이 방금 죽었다는 것이라
남이는 권대감의 집에 들어가서 자기가 죽은 딸을 살리겠다고 했다.
별당에 들어 가서 보니 처녀의 가슴에 아까 본 귀신이 앉아 있는데
남이를 보자 곧 도망을 가버리고 죽었던 처녀가 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이가 방을 나오면 처녀는 또 숨을 멈추고 남이가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곤 했다.
그는 자신이 귀신을 본 이야기를 권람에게 하고 나쁜 귀신을 완전히 쫒아버린 후
죽었던 처녀를 완전히 살려내었으므로 권람은 딸의 은인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학교 다닐 때 연세 많은 국어 선생님께서 이 이야기를 너무나 실감나게 해 주셔서
아이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재미있게 들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던 남이 장군은
유명한 북정시(北征詩)를 읊어 그의 기개와 포부를 보여주었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로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 먹여 없애네.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

 
선생님께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 시를 외우면서 해 주셨던 이야기에서
남이 장군이 그 얼마나 멋지게 생각이 되었던지....
이 시를 연습장에 수십번 써가며 외웠던 기억이 난다.
마치 남이장군의 기백을 이어 받은 여장부가 되어 이 나라를 평정이라도 할 듯이....^^

 그런데 이 북정시가 문제였다.

서자로 태어나 호시탐탐 권력을 탐하던 간신 유자광은 예종 즉위 직후
男兒 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 이라는 구절을
男兒 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 -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 ) 으로 고치고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여 남이는 모진 고문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니 그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남이장군의 묘 앞에 서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떠올랐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물론 희대의 간신 유자광의 시기와 권력욕이 문제였지만
남이의 지나친 총명과 기개 역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으니
'지나치지 않고 적당하게 겸손할 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동화의 나라 남이섬에 올랐으니 남이장군의 무거운 역사는 잠시 뒤로 할 일이다.

즐겁고 신나는 일만이 이 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겨울 연가의 준상과  유진같이 모닥불 앞에 다정히 선 연인들처럼
 커피 한잔으로 몸을 따스하게 한 후 '나미나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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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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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8.35˚, 해발고도 70m......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는 통일 전망대의 현 주소이다. 
금강산 비로봉과 해금강을 바라보며 민족의 분단을 실감할 수 있는 곳,
7번 국도의 종점 '통일전망대'로 향한다.  


 매년 150만명에 달하는 실향민과 관광객들이 찾는 통일 전망대는 민간의 출입이 금지된 '민통선'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10㎞ 남쪽에 있는 통일안보공원에서 출입 신고서를 작성한 후 소정의 교육을 거쳐야 관람이 가능하다.  
출발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차 여러 대가 단체로 줄을 서서 운전해 가야 하는데 중간에 개인 행동을 하다가 
혹 북한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행중 정차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통일 안보 공원을 지나 조금 가니 "여기서부터 민통선입니다"라는 표시가 나온다.
검문하는 군인들에게 출입 신고서를 주고 출입 허가증을 받아 차 앞에 부착한 후 출입할 수 있다.

 찍다가 혼날까봐 허겁지겁 급하게 찍은 사진이 아쉬워 조수석 옆에 선 군인에게
"아저씨, 사진 찍어도 돼요?" 하니 무표정하게 "안됩니다!" 한다.    으이그.....물어 본 넘이 바보지....^^ 
 


민통선을 지나 조금 가니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동해선 남북출입 사무소이고 직진은 온정,금강산이다.
 통일부 남북 출입 사무소란 안내판이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금강산까지 27km...정말 지척이다. 
'금강산'이란 표지판만 봐도 가슴이 마구마구 설레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7번 국도다. 경주에서 여기까지 밟았는데도 아직도 7번 국도라니....!
부산에서 출발한 7번 국도가 북한땅까지 논스톱으로 쭈욱 이어질 날은 언제쯤 올까....


 드디어 도착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통일 전망대를 일괄해본다.
저곳에 올라 북한 땅을 바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진다. 



 높은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 통일전망대 마당에 서니 생각보다 장소가 협소하다. 



여기가 바로 통일전망대! 금강산, 해금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건물의 1층에는 북한 주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북한 생활 용품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2층은 북쪽이 전면 유리로 되어 있어 좌석에 편안히 앉아 쉬며 금강산과 해금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앞에 있는 기념비는 동해안 최북단을 수복한 기념으로 세운 351고지 전투 전적비다.
351고지는 통일 전망대 앞쪽에 있는 고지로 한국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산의 높이가 366m에서 351m로 낮아진 곳이라고....
산의 높이가 그 정도로 낮아지도록 치열했던 전투라면 군인들의 희생은 가히 어떠했을지...... 



 오른쪽에는 각도의 특산바위 13개로 우리나라 지도 모형으로 세운 민족웅비석탑이 서 있다. 



주차장의 남쪽에는 공군의 351 고지 전투 작전 기념비와 전투기가 전시되어 있고..... 



장갑차도 전시되어 있어서 어린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본 건물 옆에는 통일 기원 범종각이 있는데 범종은 지름 1.25m, 높이 1.87m, 무게 500근 규모이며 종신에는 비천문이 새겨져 있다.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통일 기원 기도소 및 교육장도 있어서 

전면 유리를 통해 실내에 앉아서 북한땅과 해금강의 전경을 볼 수 있다. 


 통일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남한쪽의 동해 바다 풍경이 시원스럽다.



 통일 전망대의 동쪽에도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서 있는데 

 

성모 마리아상은 높이 10.5m로 천주교에서 1986년에 세운 것이고 



미륵불상은  설악산 신흥사에서 세운 것이다.

  



전망대에 올라 북쪽을 보니......아!.......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금강산이 있다.

 


금강산이 바로 눈앞에 있다.....그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

 달리면 한달음에 갈 듯한 거리...거기에 금강산이 있는 것이다.



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최단 16㎞, 최장 25㎞ 밖에 되지 않아 일출봉, 월출봉...옥녀봉 등 금강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를 볼 수 있고
최고봉인 비로봉은 맑은 날에만 보이는데 해금강은 전망대에서 더욱 가까워 만물상, 부처바위, 백바위·구선봉 외에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로 유명한 감호 등 해금강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왼쪽으로 보니 금강산 육로길과 철로가 보인다. 저렇게 길이 잘 뚫려 있는데 오고가기가 그렇게나 힘들단 말인가....  
 


 전망대를 내려와 전망대 왼쪽 후미진 곳으로 가니 통일 전망대 교회가 나온다.
이 교회는 대한민국의 최북단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이다.



통일전망대 교회의 앞면은 이렇게 창고같이 되어있지만 후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교회 의자에 앉아서 금강산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데

지난번 통일전망대에 왔을 때에 교회 안에서 본 해금강의 기억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 이번 7번 국도 여행의 최종목적지로 삼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교회의 문을 미는 순간.....헉.....교회 문이 잠겨 있다.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그 때서야 "제가 없을 때 잠겨 있을 수가 있으니 다음에 오실 때에 전화하고 오세요..."라던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난번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왔지만 기도하고 있던 목사님도 만나뵙고 앉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조그만 예배당에 앉아서
금강산을 바라보며 북한 동포를 위해 기도하고 갔기 때문에 올해도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올라온 것이 불찰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인테넷 서핑으로 교회 안에서 본 금강산 사진을 찾아내어 첨부해 본다.
이 사진들은 '속초 중앙 성결 교회' 카페에서 모셔온 귀한 자료이다..게시해주신 분께 감사를 드리며.....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교회 마당에서 철조망이 쳐진 북한땅을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 앞에서 보니 금강산이 더욱 가깝게 보이고 해금강의 물빛은 더 오묘하게 아름답다.
발을 크게 디디면 닿을 듯한 금강산에 가보지 못하고 이대로 가야 하다니....
언젠가는 저 그리운 금강산에 나 꼭 올라 보리라.....다시 한번 다짐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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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는 겨울 아침.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천혜의 명승지 하조대를 찾아 본다. 


     7번 국도를 타고 양양군 현북면 하조대 해수욕장으로 들어서 하조대로 통하는 좁은 길로 오른다.


주차장 바로 옆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따스한 커피 한잔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른 아침인지라 주인도 없고 난로의 불도 싸늘하게 식어있다.
 


주차장에서 좌편으로 위치한 등대 바위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요즘  여러 가지 모양의 특이한 등대도 많지만 이렇게 새하얀 등대는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등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하조대의 아침 하늘은 어찌 이리도 푸르른지....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등대 문에 낙서가 한가득이다.


내현과 진환, 인규와 수정, 선미와 승근......


쇠사슬 난간에도 빼곡하게 새겨진 J와 S.....언제나 함께 ♡.....


달과 링의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되어 계속 아름다운 여행을 하고 있을까....?
약속은 둘만 하면 족할 것을...왜 남에게 이렇게들 자랑을 해야하는 것인지.....

 

이렇게 충성스런 시동생이 다 있나.....그런 얘기는 직접 하던지.....문자로 전하란 말이야!! 

많은 사람이 오는 관광지에서 유적이나 건축물에 이렇게 이름을 새기는 것은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기억해 주었으면.....

 

  등대를 나와 다시 반대편 언덕에 위치한 하조대 정자로 향한다.  


 

정자각 앞에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 세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하조대 정자는 조선 숙종 때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이후 퇴락하여 야러번 철폐와 중수를 거듭하였고... 



1940년에 팔각정을 건립하였으나 한국 전쟁 때 다시 불이 타버려 그 후 다시 육각정으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자의 하조대의 명칭은 조선 초기로 올라가는데
조선 개국 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지냈다 하여 하조대(河趙臺)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신을 벗고 정자에 올라서 정자와 주변 풍경을 살펴 본다. 

 


왼쪽으로는 등대 바위가 보이고 소나무 사이로 푸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진다. 

 

정자 난간의 작은 틈으로 보는 풍경도 나름 운치가 있다.


마치 한그루의 분재인양 고고하게 서 있는 절벽 위의 소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하조대 사진에서는 꼬옥 빠지지 않는 상징과도 같은 나무이다.
 



하조대에서 바라보는 아침 풍경은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다.


아침 햇살로 인해 반짝이는 금빛 바다는 날 반기며 그 넓은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주는 것 같다.

 

오래 오래 머무르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고 싶은 바다.
금빛으로 반짝이며 두팔 벌려 반겨준 바다에게 하륜과 조준에서 유래된 하조대(河趙臺)라는 이름 대신에  
'
賀朝臺(아침을 축하하여 맞이하는 곳)'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 주고 하조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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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번 국도의 끝,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화진포는 

 바다의 일부가 외해(外海)와 분리된 석호로 자연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천혜의 명승지이다. 



이 곳은 또한 대한민국 설립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별장이 모여 있는 곳인데 
김일성 별장인 '화진포의 성'과 '이기붕 별장', '이승만 별장'이 지척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이승만 별장이 있고 바로 뒤에 이승만 기념관이 2007년에 개관하였다. 



이승만 별장은 1954년 지어진 작은 집인데 이대통령의 하야 전까지 별장으로 사용했고
이 후 건물을 방치하여 폐허가 되었으나 1997년에 현 위치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마치 6,70년 대의 시골 동네 구멍 가게 같이 생긴 건물은 별장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의 규모인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별장으로는 소박함을 넘어 초라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하지만 야트막한 언덕 위에 위치한 이 별장의 넓지 않은 마당에 서면 화진포를 한눈으로 가슴에 안을 수 있으니
별장의 위치 조건으로는 더 이상 좋을 순 없을 순 없을 것 같다.
'지자요수(智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하더니 이박사께서 지척에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별장을 짓지 않고
호수를 바라보는 곳에 집을 지은 이유를 별장 앞 마당에 서서 호수를 바라 보니 그 맘을 이해할 것 같았다. 



도르레가 달린 미닫이문을 드르륵.....밀고 들어가니 휑~한 거실 하나...쬐끄만 방 두개가 전부인 20평이 될까 말까한 조그마한 집이다.
거실 한 가운데 쓰시던 의자 위에 두 분의 모습을 쏙 빼닮은 밀랍 인형이 앉아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박사께서 앉아 책을 읽던 일인용 소파와 무릎 담요...그리고 발등상은 세월의 흔적으로 색이 많이 바래었다.
 


앞쪽 방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쓰던 화장대.서랍장,옷장들이 진열되어 있는 침실인데
손때 묻은 가구들이 무척이나 소박해 보인다..


 

직접 쓰던 좁고 딱딱한 침대와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불이 눈에 들어온다.
당대 최고 권력자가 쓰던 침대와 이불이 이처럼 초라하다니....
가구와 침구에서도 그 당시 우리 나라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이 미루어 짐작되어진다. 



한쪽에는 직접 입었던 평상복과 고름이 없는 개량 두루마기가 금방 벗어놓은 것 처럼 걸려 있다. 



그리고 여행 때 쓰던 이박사의 가방이 방 한켠에 얌전하게 놓여있다. 

 


달랑 방 두개에 하나는 침실..하나는 서재로 썼던 듯 뒷편 방에는 별장에서 쓰던 책상과 의자,
라디오, 타자기, 손때 묻은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읽던 성경은 펼쳐진 채로 책상 앞에 놓여 있다.



홑문으로 된 거실 유리창은 문을 닫아도 싸늘한 냉기가 문 틈으로 들어와서 방문자의 코트 자락을 여미게 한다. 
거실 문을 통해서 보는 화진포는 신비스럽도록 아름다운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프도록 서글픈 느낌이 드는걸까? 



별장 옆 빈터에는 생전의 휘호를 새겨놓은 비들을 돌아보고 바로 위에 있는 '이승만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원래의 별장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기념관인데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이 정식 명칭이다.
 


안에는 이박사의 어린 시절, 망명 시절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고......



 대통령으로 집무하던 시절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외에 생전에 쓰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친필 휘호가 쓰여진 연이 잘 보존되어 있고..... 



경무대에서 쓰던 놋그릇과 은수저.....



의사봉과 워싱턴 시장으로 부터 받은 행운의 열쇠, 돋보기, 만년필, 회중시계,낚시 도구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명성왕후 시해범 처단 방문(친필 복사본)등의 자료와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선출했음을 알리는 임명장등의 귀중한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의 유복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33세 때 제네바에서
58세의 저명한 동양인 이승만을 만나 사랑에 빠져 날계란 하나 사과 한개로 식사를 대신하며
평생을 조국통일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독립 운동가의 아내가 되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같이 살며 늘 한복을 입고 살았던 그녀의 모습은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한복은 검소함으로 본이 되었던 그녀의 삶을 대변해준다.




낡아빠진 그녀의 앞치마, 다 떨어질 때까지 사용하던 방석 커버도 보인다. 


 

십자수가 놓인 식탁보 옆에 더 꿰멜 데 없도록 낡은 프란체스카 여사의 장갑을 보니 
영부인조차도 꿰맨 장갑을 껴야 할만큼 가난에 찌들렸던 우리나라의 힘들었던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보인다.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당대 최고 권력자의 별장과 전시관은 암울했던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 것 같아
돌아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 당시 상황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화진포는 오늘도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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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는 바다와 호수가 함께 어우러진 천혜의 절경으로 인해 대한 민국 초기의 권력자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김일성 별장인 '화진포의 성'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별장과 함께 부통령을 지냈던 이기붕 별장도 자리잡고 있다.



화진포의 성과 화진포 콘도의 가운데 지점 송림 속에 자리잡은 이기붕 별장은 별장이라기보단 아주 소박한 여염집 같다.
이 건물 역시 화진포의 성과 마찬가지로 1920 년대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된 건물인데
해방 이후는 북한의 영토였던지라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 이후 당시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했기에 이기붕 별장으로 불리운다.

화진포의 성이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것에 반해 이기붕 별장은 해변 근처 송림 옆 나즈막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담쟁이 덩굴로 둘러 싸인 별장에는 오후 햇살이 환하게 별장을 비추고 있고 주위를 둘러싼 송림들의 자태는 고고하리만큼 아름답다. 

 

이 집은 동쪽으로는 해변을 등지고 서쪽인 호수를 바라보게 지은 형태인데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남향이나 동남향의 집을 선호하고 서향집을 잘 짓지 않는데 반해 이곳에 서향집을 지은 이유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고 서쪽의 아름다운 호수 전경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혼자 추측해 본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부통령의 별장이 이 정도인가...할만큼 작고 소박한 집이지만 돌로 된 외관은 오랜 세월에도 끄덕없을 만큼 아주 견고하게 보인다.
 

각진 반월처럼 길게 구부러진 작은 규모의 이 별장은 현재 실내는 원래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안보 전시관으로 꾸며 놓았다. 

 

실내로 들어가면 '대동단결 통일달성'이라는 이승만의 휘호가 먼저 눈에 뜨인다. 

 

실제 기거할 때의 별장의 모습 그대로 방과 부엌.....등이 있는대로 보존하면 좋을텐데 왜 하필 안보전시관으로 꾸며야 하는지......
휴전선에 인접한 지형 조건 때문인가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이기붕이 생전에 쓰던 기물과 그가 입던 두루마기가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이기붕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시물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요즘 보기드문 전화기, 라디오, 구형 타자기가 그나마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시실은 달랑 의자 몇 개,책 상 하나...침대 한개가 전부여서 금방 다 돌아본다. 

 

벽에 걸린 사진에서 이기붕,프란체스카여사,이승만 대통령,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박마리아가 눈에 뜨인다.
네번째 인물은 박마리아의 장남으로 이대통령의 양자가 된 이강석인 듯 하다.

박마리아는 1928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2년 비국 피바디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35년에 10살 연상이었던 이기붕과 결혼했다.
YWCA 총무, 대한 걸스카우트 및 대한부인회 이사들을 역임하고 1954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까지 역임했던 당대의 재원 박마리아...
그녀의 넘치는 재능이 독재 정권 권력 유지를 위해서 잘못 사용된 점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실세였던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60년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는 전면적인 관권 부정 선거로 치루어졌는데,
선거 결과 이승만은 대통령에,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4.19 혁명을 불러와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박마리아 일가는 결국 경무대에서 가족 동반 자살을 감행한다.
당시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이 권총을 이용해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결한 것이다.
부정 선거의 책임을 모두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사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누군가 타살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화진포에 자리 잡았던 당세의 권력자들.
그들의 목숨같이 여겼던 권력은 과연 얼마나 오래 그들의 옆에 있었는가.
권력이 얼마나 물거품 같은 것인지를 깨닳은 후엔 이미 때가 늦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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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덮인 화진포가 나를 부른다.
처음 화진포에 갔던 몇 년 전 겨울.....
어디가 호수이고 어디가 들판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새하얀 눈밭으로 뒤덮여 눈 앞에 펼쳐지던 추억 속의 화진포.

동해안 최북단의 화진포는 둘레가 약 16㎞나 되는 아름다운 드넓은 석호이다.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해당화가 붉게 피어
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이곳은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데
바로 옆의 화진포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얕아
명사십리에도 비견되기도 하는 바다이다.



화진포는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또한 유명한데 

호수와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의 환상적인 경치를 접해보면 

대한 민국 초기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이 왜 이곳을 여름 휴양지로 삼았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최근에 와서 화진포는 '가을 동화'촬영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근 속초의 청초호 부근 아바이 마을이 가을 동화의 주촬영지였는데
화진포는 어린 시절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해변에서 모래 그림을 그리면서 추억을 쌓던 장면과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 - 준서가 은서를 등에 업고 해변을 거닐다 은서가 숨을 거두는
라스트씬을 촬영한 곳이어서 연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가 되었다.  



화진포 바다에서 보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눈에 뜨이는데 바로 '화진포의 성'이라 불리우는 김일성 별장이다.
"김일성 별장이 왜 남한에 있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에게 사족을 붙인다면
한국 전쟁 이전엔 이곳이 38선 이북, 즉 북한 땅이었다는 것을 기억시켜 드리고
지금도 이곳은 군사 통제 지역인지라 이 지역의 상황은 지도에서 스카이뷰로 확인할 수 없다.  
 


이 건물이 처음부터 김일성 별장이었던 것은 아닌데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비행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강제 철거키로 결정하고
원산 해변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는 히틀러를 피해 망명해 왔던 독일 건축가 베버(H.Weber)에게
예배당으로 사용할 조그마한 별장 하나를 바다에 면한 암벽 위에 짓게 하였다.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베버는 1938년 회색돌로 원통형 2층 건물을 현 위치에 지었는데
화진포 해안 절벽 위의 송림 속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하얀  외관으로 인해 '화진포의 성(城)'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이곳을 점령한 북한은 화진포의 성을 귀빈 휴양소로 운영하였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8년부터 김일성의 가족들은 경관이 매우 뛰어난 화진포의 성을 여름 휴양지로 이용하였고
실제로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김정일 형제가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화진포의 성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계단에 그 당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확힌하게 된다.



계단 중간 쯤에 어린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이 집 앞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표시되어 있고
 


계단 바로 옆 축대에 그 당시 사진의 사본이 걸려져 있어 '화진포의 성'의 원래 모습과
김정일의 어린 시절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누군지 손톱으로 긁적거려 김정일의 얼굴을 훼손시켜 놓았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 화진포의 성 마당에 이르니 수심이 깊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벽 위에 위치한 집이라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다. 



이 건물은 전쟁 중 훼손되어 1964년 재건축하였는데 외관은 처음과 변함이 없으나
실내는 현재 안보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게 매우 유감이다.
  전시관 벽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가 있었는데 대부분 건성건성 다 지나치고
건축물의 유래...김일성 정권의 수립 과정...등이 있으나 자세히 읽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당시 방의 모습을 재현한 소품들만이 눈에 띌 뿐인데... 



그 당시 의복과 제니스 라디오에 눈길이 가고.....
 


천정에 달려 있던 램프도 방문객의 시선을 잡는다. 



2층 전시실의 원형 방에 이르면 모두 다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창문을 통해 바다 풍경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절경'이라는건 바로 이런 경치를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
창문을 열고 바다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다.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옥상으로 연결이 된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화진포 호수와 화진포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오고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다.



건물의 벽 사이로 내다 보고 싶은데 두께가 있어서 쉽지가 않아 벤치 위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화진포성 위에서 내려다 보니 왼쪽의 호수와 오른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호수의 하늘빛 고요함과 대비되는 황홀한 에메랄드빛 바다색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이 해변의 모래는 조개 껍질과 바위가 오랫 동안 부서져 만들어진
모나즈 성분으로 되어 있어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고 개미가 살지 못 하는 모래라고 한다. 



앞에는 화진포 바다.....뒤에는 석호인 화진포 호수.....그 가운데 화진포 콘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콘도는 군인 시설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않고 슈팅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아저씨 발견.
아마 바다 한 가운데 섬 '금구도'를 찍는 듯 한데....
박격포 만한 엄청난 망원 렌즈와 무지 비싼 삼각대에 기가 죽은 필자는 몇 장 찍고 얼른 내려 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앞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섬 금구도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 온다.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는 광개토대왕릉이라고 한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 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3년(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이곳에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다고 하며
문자명왕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거북섬 성은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으며
산정 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섬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석축 보호벽과 방파성이 약 60m, 높이 170~230m,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앞으로 고성군에서는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원형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안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고 했던 문무왕처럼
광개토대왕도 자신의 숙원이던 남하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에다 자신의 무덤을 쓰게 한 것일까...?
눈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섬 금구도가 광개토왕릉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섬을 바라보니
감포 앞 바다에 서서 문무대왕 수중릉을 바라 볼 때와 같은 격한 감격이 가슴 속에서부터 물밀 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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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경인년, 새해 새날이 밝아왔다.

부지런한 분들은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잠도 안 자고 기다리며
새해 첫 일출의 시간을 맞이하고 멋진 사진도 찍어 블로그의 탑을 장식하는데
난 편안하게 거실의 창문을 열고 '명활산성'위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새해를 맞이했다.

 원래 번잡한 곳을 가는 것을 좀 안 좋아하는데다 예전에 동해안으로 해맞이를 가는 길에
엄청나게 밀려 있던 차 안에서 신랑이랑 사소한 일로 대판 싸우고 차를 되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해맞이 알러지가 좀 생겼기 때문....^^
그 이후론 1월 1일의 번잡합을 피해 그 다음날이나 다른 조용한 날에
동해안으로 가서 늦은 해맞이도 하며 여유를 즐기곤 한다. 


 동해안 7번 국도는 부산에서 시작해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국토를 종단하는 국도.
그 길이도 대단하지만 7번 국도길의 풍광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경치이다.
많은 구간의 도로가 바다와 나란히 뻗어있어서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함께 차를 모는 맛은 정말 운전의 피로를 잊게 해 줄 정도이다.
바닷길 어디든지 가다가 세우기만 하면 해맞이를 할 수 있다는 것도 7번 국도의 장점.


 7번 국도의 수많은 해맞이 명소 중에서도 베스트에 꼽히는 망양정에서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울진군 근남면에서 왕피천을 옆으로 끼고 바다를 향해 해안도로를 달린다.

실직국(悉直國)의 왕이 이곳으로 피난해 숨어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은 왕피리,
마을 앞에 흐르는 냇물은 왕피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특히 은어의 서식지로 강태공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낚시 명소로
어느 지인은 여
름 휴가 때만 되면 왕피천에서 은어를 잡느라 휴가를 다 보낼 정도..
또 바로 근처에는 천년기념물 155호인 성류굴이 있어서 함께 돌아보면 금상첨화이다.



 해변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상가 뒤쪽으로 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야트막한 야산 정상에 바다 위로 날아갈 듯이 정자가 앉아 있다.


 이름하여 '망양정(望洋亭)'이니 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란 뜻이다.


망양정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옆으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앞으로는 푸르른 동해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드넓은 해변은 맑고 오염이 없는데다가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모기떼를 전혀 볼 수 없는 곳이라
여름밤에 텐트를 치고 해변에서 밤을 새워도 모기에 물릴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이 이 곳의 장점이다.



 본래 강원도의 동해안지방에는 명승지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를 일컬어 관동팔경이라 부르는데 



 강원도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경상북도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이 이에 해당하고 간혹은 월송정 대신 시중대를 넣기도 한다. 
 


특히 이들 팔경에는 정자나 누대가 있어 많은 한량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이에 얽힌 전설과 문학등이 가사로 전해져오고있다.


 

망양정은 고려때는 현재의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에 있었다고 하는데 1860년 철종1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그 이후 허물어 무너진 것을 1958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2005년에 심하게 낡은 것을 다시 해체하여 새로 지었으므로 아직도 단청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산뜻하다.



 조선 숙종은 관동팔경중 이 곳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여 손수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하사하기도 하였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글자를 써보내 정자에 걸도록 했으며



 정조대왕의 어제시(御製詩)의 흔적도 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외 망양정을 그린 그림으로는 정선의 '백납병(百納屛)' '망양정도(望洋亭圖)가 유명하다.


 

강호에 병이 깁퍼 듁님의 누엇더니  관동 팔백니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중략)

쳔근을 못내 보와 망양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무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은산을 것거 내여 뉵합의 나리난 닷,  오월 댱텬의 백셜은 므사 일고.

(하략)

각중에(갑자기) 왠 사설인고...하시겠지만
우리들이 고교 시절 국어 시간에 누구나 한번씩은 들어본 적이 있는 싯귀일 것이다. 

바로 송강 정철이 읊은 관동별곡에서 망양정에 대한 구절이다.


선조의 명을 받아 관찰사로 강원도에 가게 된 정철이 금강산과 관동 팔경의 아름다움을 연시조로 읊어쓰는데 이것이 바로 관동별곡.
시조에선 한양에서 출발하여 철원,금강산,총석정,삼일포,경포호,촉서루를 거쳐 망양정에서 달맞이를 하고 신선을 만나는 것으로 끝맺는데
관동 별곡에서 많은 구절이 망양정의 묘사에 치중된만큼
망양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고 아름답다.


망양정에  처음 오른 기억은 대학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울진 성류굴을 돌아보고는
망양정 바로 아래 살던 선배 집에 무작정 찾아간 것이 망양정에 처음 오르게 된 때.
처음 보았던 망양정 앞 바다는 무서울 만큼 짙푸르고 맑았으며 바람이 불면 파도 또한 거세게 밀려와서
30분 정도 바닷물에서 놀아도 수영복 안에 모래가 가득 차 있었던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망양정은 해맞이 뿐 아니라 보름날 달맞이 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바다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정자에서 보는 것은 해맞이보다 더 감동적인데
보름달이 떠오르면서 주변 바다가 금빛으로 반짝이며 파도치는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빛에 부서지는 금빛 바다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는데
새해 해맞이를 제대로 못 하신 분은 동해안 정자 위에서 대보름 달맞이를 해보심은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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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기축년 (己丑年) 소띠해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2010년 경인년 (庚寅年) 호랑이해가 코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해맞이를 하며 새로운 한 해를 기원하는데....
새해 해맞이의 장소와 형태는 각각 다르겠으나 
다양한 행사를 이웃들과 함께 즐기며 축제와도 같은 해맞이를 하고 싶은 분에겐
대한민국 최고의 해맞이 장소, 포항 호미곶 해맞이 광장을 추천하고 싶다. 

해마다 정동진 등 동해안 여러 곳에서 해맞이 행사가 성대히 벌어지고 있지만
정동진보다 5분 정도 먼저 시작되는 호미곶의 해오름을 보는 것은 새해를 가슴 벅차게 시작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더우기 2010 경인년은 '호랑이의 해'이니 '호랑이 꼬리(虎尾) 모양의 돌출한 육지(串)' 라는 뜻의 '호미곶(虎尾串)'에서
새해 해맞이를 하는 것은 남다른 경험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경부 고속 도로에서 대구를 지나 대구-포항간 고속 도로를 거쳐 포항에 들어서면
호미곶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길마다 늘어서 있으므로 호미곶으로 향하는 길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시내를 거쳐 포항 제철을 지나 도구 해수욕장을 끼고 돌아 구비 구비 호미곶 가는길은
왼쪽에 펼쳐지는 드넓고 짙푸른 바다와 저 멀리 포항 시내와 영일만이 한눈에 펼쳐지는지라
"<카 라이프>지가 추천하는 전국 10 대 드라이브 코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절경을 이룬다.
이곳을 운전하는 분들은 마치 이탈리아 소렌토의 언덕을 방불케 하는 경치에 연신 감탄사를 발하며 운전하곤 하는데
너무 경치에 빠져들다가는 자칫 바다로 바로 차를 몰고 뛰어들 수도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서 운전해야 한다. 

 

호랑이 꼬리의 끝인 대보면 호미곶 광장에 이르면 일만 삼천여평의 너른 부지에 기념 조형물, 채화대, 불씨함, 연오랑 세오녀 동상.....들이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광장의 왼쪽에 위치한 호미곶 등대와 등대 박물관이 눈에 확 들어오는데



1901년에 세워진 호미곶 등대는 1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호미곶 앞바다를 비추어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한 일등공신이다.


관련 포스트 : 등대 100년 역사 한눈에 보는 호미곶 등대 박물관   

 

12월 31일이 되면 호미곶 광장의 무대에서는 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게 될 것이고.... 

등대 앞에 보이는 앞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무쇠솥은 해맞이 행사에 참여한 방문객들에게 새해 첫 떡국을 대접할 것이다.

 

이곳에는 호미곶이라는 이름에 맞게 가로등도 호랑이의 형상이다.  경인년 호랑이해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가로등이 아닌가....

 

쌍호랑이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더 보기가 좋다.



너른 광장의 끝에 바다를 보고 반쯤 벌린 커다란 손과 물고기의 형상이 보인다.

 

물고기 형상은 포항을 대표하는 웰빙 음식 과메기 캐릭터이다.
스테미너 증진은 물론 피부 미용에 그만인 과메기는 구룡포와 대보를 비롯한 포항 근교 어촌의 특산 음식인데
실제로 과메기를 드신 분들은 경험해 보셨겠지만 과메기를 먹은 다음날 아침엔 피부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호미곶을 대표하는 기념 조형물은 '상생의 손'이라고 하는데 두개의 손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하나는 육지에....하나는 바다에서....

육지의 '상생의 손'의 높이는 5.5m 인데 바다를 보고 갈구하는 듯 왼손을 벌리고 있다. 

 

상생의 손은 보기보다 굉장히 규모가 큰데 
호미곶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상생의 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 때문에 '상생의 손' 앞은 비어 있을 때가 없다.

 

'상생의 손'의 일직선 상에는 '영원의 불'이 위치해 있다.

 

이'영원의 불'은 전국 체육대회를 비롯한 2002년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의 성화 채화대로써 
성화대의 화반은 해의 이미지이며, 두 개의 원형고리를 연결하여 국민 화합을 의미한다. 

 

성화 채화대 앞에는 세개의 불씨가 있는데 1999년 마지막 날 변산 반도 마지막 일몰의 햇빛으로 채화한 불씨가 보존되어 있고

새쳔년 1월 1일에 영일만 호미곶 일출의 정기를 모아 채화한 불씨로 새천년을 기념하는 불꽃을 삼았으며

 

새천년 1월 1일에 독도와 남태평양 피지의 일출 빛으로 채화한 것을 합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겼다. 

 

육지에 있는 상생의 손을 마주 보는 손은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



바다 속에 있는 '상생의 손'은 오른손인데 크기는 8.5m 로 육지의 왼손보다 훨씬 더 크기가 크다.
호미곶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바닷속 상생의 손은 갈매기에게도 지친 날개를 쉬어갈 수 있는 최고의 안식처이다.

 

울릉도, 독도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새해 해오름을 맞이할 수 있는 곳.....호미곶은 우리나라 최고의 해맞이 명소이다. 
더구나 호랑이의 해의 첫날에 호미곶 광장에서 맞이하는 상생의 손가락 사이로 새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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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 '유익한 정보 검색' 코너와 티스토리 메인 상단에 이 포스트가 나란히 소개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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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POSCO)을 지나 호미곶을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서 포항시 동해면 입구에 이르면
공항 삼거리에 재미있는 구조물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거꾸로 땅에 박혀 꼬리 지느러미만 하늘로 향한 물고기 형상이다.





보통의 마을 입구에는 보통 "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큰 뜻을 품자" 등의 구호를 새긴 표지석이나 상징물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 동해면 입구에는 이렇듯 글을 새긴 표지석 대신에 물고기가 땅에 머리를 들이박아 꼬리만 보이는 형상을 하고 있는게 특징이다.
이곳을 지나며 이 구조물을 보는 사람들의 평가는 지극히 엇갈리는데
어떤 사람들은 "윽...저게 뭐야..정말 황당하네...."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오...멋진 생각인데..?' 하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며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비늘이 번쩍이는 물고기를 볼 때 마다 필자는

땅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것 같이 보이는 저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밖으로 좀 꺼내주었으면.....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어쨌거나.....착하게 살자...라는 있으나마나한 표지석보다는
바닷가에 면한 동해면의 특징을 잘 살려준 상징물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떠하신지......?


(달리는 차에서 막샷으로 찍은 것이라.....수평조차 제대로 맞지 않은 사진을 올린 것을 이해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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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가장 소개할 만한 곳을 손꼽으라면...?

혹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고궁을, 혹은 인사동이나 청계천,한옥 마을....등을 추천하는데
남대문, 명동, 동대문 같은 쇼핑타운은 서울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빠뜨려서는 안 될 필수 코스.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바로 DDM(동대문)이다.

지방에 살고 있는 필자 서울 갈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친근한 곳 또한 DDM인데
여자들의 선호도 1위 관광지(?) DDM을 '요래의 서울 관광(This is Seoul)을 인용해 소개해 드린다.

이 가을, 엣지 스타일의 완성을 위해 요래와 함께 대한민국 패션 1번지 DDM으로 떠나볼까요?


 
[요래의 서울관광] 4화. Fashion of DDM(동대문) (1)



서울을 찾는다면 절대 빼놓지 말아야할 대표적인 쇼핑 명소 동대문시장.
다양한 업종의 수만개의 점포가 밀집한 국내 최대 규모의 전문 시장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특히 재래시장과 최첨단 쇼핑몰이 공존하는 패션 타운은 하루 4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찾고 있으며 패션의 중심으로 유명하다.
요래와 함께 서울의 패션을 책임지는 동대문을 살펴보자.



대한민국 패션의 중심, 동대문

동대문시장은 동대문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길게 이어지는 여러 시장을
함께 묶어 부르는 명칭으로 현재 30 여개 상가에서 약 30,000개의 점포가 영업 중이다.
재래시장과 현대적인 쇼핑몰이 빚어내는 역동적인 풍경과 다양한 볼거리는
남대문 시장과 함께 내외국인 모두가 가장 즐겨 찾는 쇼핑 장소로 꼽힌다.
무엇보다 의류, 패션의 중심지로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의 절반인 연간 약 250만 명이 들를 정도다.

동대문시장은 크게 평화시장, 광희시장 등 현재 공사 중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구 동대문운동장) 주변의
도매중심 재래 상가와 두산타워, 밀리오레 같은 대규모의 현대적 패션 전문 쇼핑몰로 구분된다.
동대문 패션 타운의 특징은 다양한 기성 브랜드뿐 아니라 젊고 의욕적인 개별 디자이너들의 자체 상품이 많다는 점.
15,000
명이 넘는 디자이너들 덕분에 동대문에서는 최신 유행에 민감하고 개성적인 상품을 만날 수 있다.
품질도 뛰어나 한국은 물론 아시아 각국과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의 바이어들도 즐겨 찾는다.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나아가 아시아 패션의 중심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동대문에서 옷을 사려면 밤 시간을 이용하자

                         동대문 시장의 일반 업종 점포는 주간에 영업을 하지만 패션 관련 매장은 도매 시장의 성격상 야간에 개점하는 곳이 많다
                             1
층이나 실외 매장은 주간 영업을 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오후 8시 이후 문을 열고 일요일에는 대부분 쉬기 때문에
                                                                          방문 전 아래 상가별 정보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 출처 : 동대문패션센터 '2009 동대문패션페스티벌' 홈페이지(www.ddmfestival.com)




 




[요래의 서울관광] 4화. Fashion of DDM(동대문) (2)






동대문 주변은 볼거리와 놀거리도 가득!

옷을 사기 위해 동대문을 찾는 경우가 많지만 동대문 주변은 다른 품목의 재래시장 볼거리, 놀거리도 놓치기 아깝다.
특히 쇼핑을 하다가 지쳤을 때 바로 옆의 청계천이나 헌책방 거리, 포장마차, 재래시장의 먹자골목 등은 훌륭한 휴식장소가 된다.

1.신평화 패션타운 [자세히 보기]
30
년 전통의 전문 의류 도매 상가로 1000여 개의 매장뿐만 아니라 인터넷 쇼핑몰도 구축하고 있다.

2.
동대문 종합시장 [자세히 보기]
원단류, 의류 부자재, 액세서리, 혼수용품 전문 도소매 시장으로 패션의 명소로 성장하고 있다.

3.
동대문 헌책방거리 [자세히 보기]
청계천변 동대문 평화시장 1층에 자리한 헌책방 밀집 거리로 시중가보다 30~40% 저렴하다.

4.
동대문 창신동 완구 도매 시장 [자세히 보기]
국내 최대 규모의 완구, 문구 도매 시장으로 로봇, 인형, 각종 학용품과 파티용품 등 품목도 다양하다.

5.
흥인지문(동대문) [자세히 보기]
우리나라 보물 제1호로 서울 성곽의 8개 문 가운데 동쪽의 대문(大門)이다.





동대문은 365일 공연중

동대문의 대형 쇼핑몰 앞에는 작은 공연 스테이지가 있는 곳이 많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패션쇼, 음악 공연과 함께 사은 이벤트가 벌어진다.
특히 매년 9월에는 동대문패션페스티벌이 열려 다양한 보고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 출처 : 동대문 패션센터 2009 동대문패션페스티벌 홈페이지(www.ddmfestival.com )

                               
      

                                                                                                          


                                      사진과 만화로 재미있게 서울을 소개하는 요래의 서울 관광은 월간 포토넷 기자 심은식님의 기획 하에
                                   사진작가 김주원 님의 죽여주는 서울 사진과 일러스트 작가 이다(2da)님의 상큼발랄한 캐릭터 요래가 만나
                              내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서울의 명소와 한국의 문화를 더 깊에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서울시 공식 관광 홈페이지.
                                                           아래를 누르시면 요래의 서울 관광 전체 목록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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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포스트 : 서울 가볼만한 곳 궁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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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도시에 살아왔던 이유일까..

바다는 언제나 나에게 그리움이 된다.

한동안 의자에 앉아서 고개만 들면 동해 바다가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지냈는데
그 때 바다는 시시각각 그 물빛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는 늘 눈을 떼지 못 했던 생각이 난다.





바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태양과 구름, 바람의 세기에 따라 매일 매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바다는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더 드라마틱한 얼굴로 바다에 선 사람을 맞이하는데

특히 태풍이라도 쳐서 바다가 뒤집히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바다로 나가 남의 집 처마 밑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든지
아니면 바다 위 높이 선 절벽 위에 차를 세워두고 폭풍으로 일렁이는 바다를 바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간신히 잠재우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경주도 바다를 포함한 도시라 감포 바다에 종종 나가기도 하지만
도시 중심에서 바다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기에 이전보다 바다에 나가는 일이 적어졌는데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한구석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답답하거나 힘이 들 때에는 차를 몰아 동해안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부산에서 통일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7번 국도.
몇년에 한번씩은 겨울이 되면 끝까지 달려서 그리움을 달래곤 하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하고 영덕 구계항까지 달려보았다.

포항, 청하, 장사를 지나 조금 더 북쪽으로 달리면 오른쪽에 나타나는 조그만 항구.
세개의 등대가 서 있는 모습이 특히 아름다운 곳인데
빨간 등대 , 하얀 등대가 잘 어우러진 구계항의 풍경을 사진으로 소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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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주왕산 자락에 있는 주산지는 사진 작가들이 꼽은 '한국의 10대 비경'으로 유명하다.
언제부터인가 사진 작가들의 사진 작품에서 띄엄띄엄 소개되던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 봄'이 이 곳에서 촬영되기도 해서
이제는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길이 200m, 넓이 100m, 수심 8m의 이 아담한 저수지는
1720년 8월 조선 경종 원년에 착공하여 그 이듬 해 10월에 완공하였는데
현재까지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말라 밑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 조용한 호수 속에는 약 150년이나 묵은 왕버들 3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어서
호수의 물과 어우러진 신비스러운 경관으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과 사진 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러나 몰지각한 관광객과 일부 사진 작가들의 무분별한 자연 훼손으로 인해
주산지가 점점 훼손되어 가고 있어 주산지 물가로 진입을 통제하고 있는 요즈음이라
앞으로 주산지로 근접하여 사진 찍기는 매우 힘들 것 같아 보인다.
바람으로 물결이 일렁여 주산지의 비경인 물에 비친 반영이 아쉽기만 하지만
어렵게 찍은 주산지의 사진 몇 장을 살포시 올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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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보스와 여의사의 만남.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은 위급한 상황에서의 첫만남 이후 안타깝고 위태로운 사랑을 한다.
조금씩 서로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가까워지는 두 사람 공상두(박신양)와 채희주(전도연).

1998년 상영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가슴 아픈 사연으로 많은 사람을 눈물짓게 한 영화 '약속'.
당시 전도연과 박신양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식을 올리는 배경지로 등장했던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름다운 외관과 고색창연한 분위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성당은 바로 전주 '전동 성당'.
영화 '약속'뿐 아니라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지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한옥마을과 풍남문 한 중간에 고풍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운 성당이다.


정조 15년(1791년)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_과 권상연(야고보), 그리고 순조 원년(1801년)에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되었다.


이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보두네(Baudounet,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립에 착수, 1914년에 완공했으니 100년의 역사를 지닌 건물이다.


성당은 화강석을 기단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고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주며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에 비잔틴풍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12개의 작은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기둥에 8개 창을 낸 양쪽 계단형 돔이 있는
로마네스크풍의 독특한 양식은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이다.



건물의 주춧돌은 풍남문 성벽돌을 일부 사용했으며 벽돌은 공사를 담당했던 중국인들이 직접 구워서 만들었다.


좁고 길쭉한 본당에는 마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앞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고 뒷편에서 '살짝' 한컷만 찍었는데...


성당 내부는 외부보다 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데 명동 성당처럼 공중 회랑을 만들고 자연 채광이 되도록 많은 창을 내었다.


바깥에서 보는 창을 보면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감을 짐작키 어려운데....


역시 스테인드 글라스는 안에서 보아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옆의 '사제관'은 본당을 세운 뒤 2대 주임 신부였던 라크루(瑟)신부가 1926년에 세운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사제관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살필 수 있어 본당과 함꼐 역사적 가치가 큰 근대 건축물이다.


2002년 전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돼 현재는 전주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잘 돌아보지 않는 본당 건물의 후면으로 가보면 이 건물의 고고한 아름다움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전면은 성당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다소 어수선한 느낌도 있으나 후면은 아주 조용해서 사색하기에도 좋다.
1988년에는  10월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일부 소실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으나 

1992년까지 4년여간에 걸쳐 보수되어 현재는 깨끗한 모습이다. 


이 성당은 호남 지방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한국 최초의 순교터라는 역사적 의미로 인해 
국가지정기념물 제288호로 지정되었고 인접한 풍남문, 경기전과 더불어 전통 문화와 서양문화 간의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외관과 주위 경관 덕분에 전국 사진동호인들이 가장 많이 명소 중 하나이며 
사랑의 서약을 올리고자 하는 커플들이 특히 많이 찾는 전주 전동 성당.
이곳에서 사랑을 <약속>하는 커플들에겐 부디 영화와 같은 <이별>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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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나 내국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한국의 으뜸 가는 관광지를 들라면....?
혹은 제주도, 혹은 경주,혹은 설악산......사람마다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다양한 문화와 생활이 공존하는 <서울>이야말로 우리나라 최대의 관광지라고 생각이 된다. 

서울에 사시는 분이야 교통 혼잡하고 공기 나쁜 서울이 뭐가 좋다고......하시겠지만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서울 구경>이란 언제나 신나는 경험인게다.

하지만 막상 서울을 가게 되면 어디를 구경해야 하지....? 무엇을 보아야 하지..? 살짝 고민하게 되는데
정작 서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뽀족한 답을 듣지 못하는게 사실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도 서울의 구석구석 명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게 현실.

하지만 염려는 붙들어 매시길.....
서울에 사시면서 거주하는 서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분이나
지방에 살면서 서울의 명소에 대해서 정보를 원하는 분들에게 서울시 공식 관광 홈페이지 를 소개해 드린다. 

이 싸이트에는 서울의 관광 명소, 공식 행사,맛집 탐방, 서울 추천 코스등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사진과 만화로 재미있게 서울을 소개하는 '요래의 서울 관광(This is Seoul)' 은 
월간 포토넷 기자 심은식님의 기획 아래 사진 작가 김주원님의 죽여주는 서울 사진과
일러스트 작가 이다(2da)님의 상큼 발랄한 캐릭터 '요래'가 만나
내국인과 외국인들이 서울의 명소와 한국의 문화를 더욱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여러분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요래의 서울 관광]다섯번째 이야기를 잠시 소개해 드리면.....
 





요래의 서울관광

[요래의 서울관광] 2화. 한강 100배 즐기기(1)

당신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도시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은 영국의 템즈, 프랑스의 세느강처럼 대한민국과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강이다. 대부분 차를 타고 그냥 다리 위나 도로로 스쳐지나기 쉽지만 한강은 다양한 스포츠와 이벤트,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한 걸음만 다가서면 추억도 즐거움도 두 배! 한강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 살펴보자.






사계절 테마파크 수피아SUPIA!


한강에 간다면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워터 테마파크도 잊지말자. 멀리 있는 바다의 해수욕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다. 광나루, 잠실, 잠원, 여의도, 뚝섬, 망원지구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뚝섬, 여의도 야외 수영장이 리모델링을 통해 새롭게 단장했다. 수피아의 뜻은 한강의 옛이름이자 서울시의 수돗물 브랜드인 아리수Arisu에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를 결합한 것이다. 아이들을 위한 얕은 유아풀, 워터슬라이드를 비롯해 썬베드, 그늘막, 샤워장, 스낵코너, 수영복 판매점 등이 있어 맨몸으로 가도 얼마든지 수영과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계절 내내 다양한 공연, 전시등이 열리기 때문에 한강을 찾는다면 꼭 한번 들려보길 권한다.


수피아 정보 더 보기 <클릭>







야경이 아름다운 전망카페, 레인보우



자전거와 수영, 산책으로 지쳤다면 한남대교 위에 위치한 카페 레인보우에 들려 야경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해보자. 레인보우는 한강과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수 있어 전망이 뛰어나며 자전거를 타다가도 쉽게 올라올 수 있게 전용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있다. 경치를 감상하거나 비치된 잡지를 읽거나 땀을 식히기 좋다. 3층 카페에서는 다양한 음료를 판매하는데 이중에서 소주나 막걸리를 이용한 전통주 칵테일도 색다른 맛으로 인기다. 기왕 한국에 왔다면 한국식 칵테일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레인보우 카페는 아쉽게도 현재 한남대교 한 곳에만 있다. 하지만 앞으로 잠실대교, 광진교, 9월초 동작대교, 한강대교, 양화대교의 전망쉼터를 개장할 예정이다.

레인보우 카페 정보 더 보기 <클릭>


* 아래의 한강 레인보우 페스티벌 홈페이지(http://hangangfest.seoul.go.kr)에 가면 영화, 공연, 전시 등 다양한 문화 이벤트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 [요래의 서울관광] 2화. 한강 100배 즐기기(2) 편은 8/17(월)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 기획,글 이연 / 사진 김주원 / 카툰 2da

[2009-08-07 11:29 입력 / 2009-08-07 16:29 수정] 기사제공 :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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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길상면에 있는 온수리 성공회 교회는
고딕식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일반적인 성당 건물과는 달리  

전통 한옥으로 지어져 찾는 이들에게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이 성공회 교회는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 가 1906년에 지은 건물이니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을 버티고 서 있음으로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교회 건축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귀한 사적이다.



건물은 시장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야산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붕 위에 솟아 있는 십자가가 이 건물이 성당 건물임을 눈치채게 한다.


 

대문 또한 우리 나라 전통 대문 양식을 본따 솟을 삼문의 종루로 지었고 지금도 종을 칠 수 있도록 줄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은 벽체가 회벽으로 되어 있던 것을 들어내고 원래대로 창살로 고쳐 복원했다고 한다. 
 


종루에 다소곳이 달려 있는 종은 곧 청아한 소리가 들려올 듯 하고 


 
종루 처마의 날렵한 선은 하늘로 날아가듯 솟아 있다.

 


본당의 건물은 정면이 세칸이고 측면은 아홉칸인 동서 절충식 강당형 건물이다.


100년의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건물이 깨끗한데 2004년 새 성당 축성 공사를 하면서 함께 복원 수리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서양식 성당 같지 않고 그저 수수한 우리 관아나 반가 가옥의 일부분 같아 친근감을 주는데 
정면 옆 출입문은 항상 열려 있어서 부담없이 그저 문을 드르륵 밀고 들어서기만 하면 된다.  


 
입구 문위에 '대한 성공회(온수리) 성안드레 성당'이란 현판이 다소곳이 걸려 있다.  
 


성당 내부는 간막이가 없이 통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두 줄로 네모난 기둥(고주)을 두어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전면은 집례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뒷면 亞자형 문 뒤는 집례 준비를 위한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듯... 


성당 내부 장식과 예배 집기 등을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성당의 바로 옆에는 야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새로운 건물이 3층으로 지어져 있다.
원래의 건물에 비해서 경건함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나만의 선입견일까..... 
 

 
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이 땅에 묻혀 흙이 된 주교의 비석 앞에 서니
이 민족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그들의 믿음과 희생 정신에 다시 한번 웃깃을 여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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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 읍성 바로 옆에는 특이한 돌구조물이 남아 있는데
무언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석빙고이다.
돌뼈다귀만 남은 석빙고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형태의 유적.
우리나라의 석빙고는 현재 경주,청도를 비롯하여 창녕,안동,현풍,영산 등에 6기가 남아 있고

북한에는 해주에 1기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에 있는 석빙고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석빙고 가운데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흙으로 다 뒤덮여 있고 입구 문만 보이는 경주 반월성 석빙고만 보아오던 내게 청도 석빙고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로마 시대 유적지와도 같은 느낌을 주어서
목조 건물 일색인 우리나라 여타 문화재에 비해 무척이나 색다른 인상을 안겨 주었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빙고는 현재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 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내부는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출입문을 두었다.





출입구 아래 쪽에 난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비록 지붕이 없고 뼈대만 앙상히 드러나 햇빛과 바람이 수시로 드나드니 석빙고로써의 기능은 상실한지 오래이지만

경주 석빙고와 달리 안이 훤히 드러다 보이고 아래로 내려가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으니 좋다.





한여름에 이 석빙고로 내려서면 지상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차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겨울에 강에서 떠온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했다는 석빙고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어릴적에 날씨가 많이 더우면 석빙고 안에 들어가서 더위를 피하며 놀다가 학교를 땡땡이치기도 했다며

근처 식당 아주머니께서는 석빙고에 얽힌 어릴적 추억을 신나게 말씀해주셨다.





비록 세월의 풍상으로 많이 허물어졌기는 하지만 자손들에게 잘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우리의 문화 유산,
청도 석빙고는 보물 제 3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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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남쪽으로 약 40km,
운문댐 건설로 인해 새로 조성된 대천읍을 지나 금천면 신지리에 이르면
이차선 도로 양쪽에 예사스럽지 않은 고택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그중에서도 운강 고택은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1479~1560) 이 벼슬을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옛 서당터에 지어진 주택인데 영조 2년(1726) 박중응이 이집을 처음 지었다. 
그후 순조 24년(1824)에 박시묵(朴時默)이 집을 중건하고
동창천 벼랑 위에는 별장 만화정을 새로 지었는데
운강 고택이란 이름은 바로 박시묵의 호 운강(雲岡)에서 이름한 것이다.



1912년에는 사랑과 안채를 크게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일반적인 다른 고택과 달리
다양한 보관 장소와 내외 분별에 신경을 쓴 설비와 공간, 주종을 명확히 구별해 놓은 화장실,
서당의 존재 등으로 합리적인 공간 구성이 돋보이는 조선 후기의 상류 주택이다.


운강 고택은 길에서 바로 대문이 보이지 않고 대문으로 이르는 길이 ㄱ자로 꺾어져 있다.


골목과 대문이 정면으로 연결될 경우 찬 바람과 사악한 기운이 집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그 외문 끝에는 '운강고택(雲岡故宅)'이라 쓴 김충현(金忠顯)의 편액이 걸려 있다.


운강 박시묵 선생의 후손으로 운강 고택과 섬암 고택 등을 관리하고 계시는
퇴직 교사 출신의 박성규 선생님이 직접 안내해주시고 상세한 고택의 해설을 해 주셨다.
평소에는 관리 상의 이유로 인해 고택의 문을 잠궈 놓는 일이 많다고 한다.


대지가 1,770평이나 되는 이 고택은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집채의 동수가 모두 9동이나 되며 
 안 마당과 안채 후원·사랑채 후원의 공간을 넓고 여유있게 두는 등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주택이다.  


대문채는 6간인데 왼쪽부터 외양간,곳간,문간방 2채,대문채,측간이다.
 보통의 솟을대문집은 대문이 집의 중앙에 와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이 고택은 대문간을 두번째 칸에 설치하여 비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둘러싼 건물 중 왼쪽은 큰 사랑채, 오른쪽은 중사랑채인데
큰 사랑채는 두벌대 기단을 써서 작은 사랑채보다 상위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지기방, 큰사랑방 2간, 대청 2간의 5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두방과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대청에는 들문이 달려서 여름에는 문을 다 들어올려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방문을 열지 않고도 바깥의 동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아담한 유리 조각을 문의 부분에 붙여 놓은 것이 눈에 뜨인다.


사랑 대청이 끝나는 뒷기둥에는 '내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각문이 하나 붙어 있는데


대문을 들어선 부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이 일각문을 통해서 후원을 지나 안채 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게 세심하게 꾸며져 있다.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사랑채와 중문 사이의 꽃담이다.
깨진 암수 기와를 활용하여 길상을 의미하는 吉자와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등처럼 보이는 문양이 어우러져 있어 보는 이의 시선을 편안하게 유도한다.


근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아름다운 꽃담에도 여기저기 낙서를 해놓은 손길이 보인다.
어찌 가만히 버려두지 않고 무식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인지.....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대문에서 안으로 마주보이는 건물은 중사랑채인데 툇마루를 둔 2간의 온돌방과 마루가 있다.
서당으로 쓰이기도 했던 중사랑채의 왼쪽 1간은 누마루로서 서고라고 한다.


문 위에는 '백류원(百榴園)'이라 쓴 김충현의 편액이 걸려 있기에 이집에 석류나무가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중사랑의 후원이 원래의 백류원이었으나 지금은 석류나무가 없다고 한다.


중사랑채의 왼쪽에는 7간의 고방채가 있는데 과거에 수요가 많던 교통기구의 격납(格納)으로 쓰였다.


고방채의 제일 끝은 마굿간이니 요즘 같으면 차고라고 하겠는데 마굿간 뒤의 측간은 하인 전용이다.


사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마주보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가 나온다.


다른 분들의 답사 자료에서 본바로는 안채 마당에 둥글게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이 잘 다져져 있는 걸 보니 근래 보수하면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듯 하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2간 툇마루를 두었고 가운데 대청에도 문을 달아 놓았다.


안채의 대청문 역시 들문으로 되어 여름엔 시원하게 들어올릴 수 있게 된걸 보니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피부로 전해진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습니다. 올라가지 마십시오"라고 쓰여 있었는데 
박성규 선생의 허락을 받아 들어가 안채의 구조를 살필 수가 있었다.


근래에 새로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문이며 벽지가 아주 산뜻하였다.


 
안방과 부엌이 접하는 부엌 귀퉁이에는 작은 찬마루를 두어 안방에서도 드나들 수 있게 문을 내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내부를 보니 4간이나 되는 아주 넓은 부엌은 집안 대소사 준비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웃방의 안쪽에도 간막이를 하여 반간의 찬광을 꾸며 놓았다.


우리나라의 가옥들이 방안에 수납 공간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집은 이렇듯 군데군데 수납공간이 많다.


양쪽에 방을 두고 가운데 대청 마루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청은 3간 크기 정도이며 기제시(忌祭時)의 제청(祭廳)으로 쓰인다고 하고


대청의 뒤편에도 역시 간막이를 해서 '여름 찬광'을 마련하였다. 


안방을 중심으로 찬마루, 찬광을 고루 분산시켜 다수화하여 곳곳이 수납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특히 툇마루 아래에는 두꺼운 널을 걸쳐서 여자들이 긴 치마를 입고 높은 툇마루에 오르기에 편리하도록 디딤돌을 대신해 놓았는데
곳곳에 이렇게 여성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눈에 뜨이는 주택이다.
 


동편에 가로 놓인 행랑채에는 부엌, 방, 마루, 고방,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에는 오랜 세월동안 디디고 빻아서 많이 닳아 버린 디딜방아가 놓여 있다.


방앗간 뒤편에는 2간 측간을 두어 안쪽은 안방 마님용, 바깥쪽은 행랑 하인용으로 구분 사용케 하였다.


 행랑채 부엌문 판자에 네모꼴을 크고 작게 뚫어 통풍이 잘 되게 한 점도 눈에 뜨인다.


안채의 남쪽에 가로 놓인 4간의 광채는 의류와 주류의 곡간이며 왼쪽에 세워진 6간의 간막이 없는 곳간은 곡간인데
엄청나게 큰 광채와 곡간은 이집의 살림살이를 짐작케 해주는 부분이다.
곡간의 남쪽에는 ㄱ자로 달아낸 뒷사랑이 있는데 이 뒷사랑과 곡간의 끝기둥 중간에 출입문을 내어
사랑채 후원에서 내정(內庭)에 직접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집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안채에 드나들기 쉽게 해놓은 비밀통로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안채는 후원도 정말 넓다..거의 뒷동산이라 할 만큼...


후원에는 바위가 일곱개가 있어서 칠성 바위라고 부르는데 매우 신성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안채와 마주 보고 있는 협문으로 들어서면 중사랑 후원이 있고 왼쪽에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중사랑 후원에서 다시 사당문으로 들어선다.

 
규모가 상당히 큰 사당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는데 해설을 해주신 박선생님은
밀양 박씨 가문이 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훌륭한 가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더니 
배우 박중훈도 박선생님의 사촌이어서 명절에는 고향에 내려온다고 살포시 덧붙이셨다.


사당 안에서 담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퇴계 이황 고택, 경주 최씨 고택.....여기저기서 고택들을 많이 답사해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운강 고택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넓은 저택이란 점에서 방문자를 놀라게 했고
무엇보다도 세심하게 관리, 보존되고 있어서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고택의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이 솟을대문을 드나드는 모든 분들에게 언제나
햇살의 따스한 기운처럼 경사로운 일이 넘쳐 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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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위치한 청도 운강고택과 만화정(萬和亭)을 찾아가는 길......
경주에서 출발하여 미스 네비가 인도하는대로 건천을 넘어 운문댐을 돌아 한참을 가니
 동창천을 옆에 낀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는 운치있는 정자가 보인다.



급히 차를 돌려 정자 앞 빈터에 세우고 담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만화정의 대문을 손으로 살짝 밀어보니 아뿔사....문이 잠겨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정자 담 옆에서 잡초를 제거하시던 분께 문의하니
마침 그분이 운강고택,섬암고택,만화정 등을 관리하고 계시는 분이셨다.


퇴직 교사이시면서 밀양박씨 후손으로 인근의 여러 고택들을 관리하고 계시는
박성규 선생의 뒤를 따라 만화정의 행랑채 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행랑채가 파란 철대문인 것에 마음이 걸렸다. 나무 대문으로 복원하면 좋을텐데...


볕 좋은 아침...행랑채와 곳간에 비치는 햇살이 눈이 부시게 따사롭다.


건물은 정자인 만화정과 함께 행랑채, 하당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류주택 답게 곳간의 모양새 하나하나에도 신경쓴 것이 눈에 뜨인다.


행랑채 섬돌 아래서 보니 정자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행랑채에서 정자쪽 문에 서니 안뜰과 함께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진 정자가 보였다.


정자 바로 옆쪽으로 물빛이 고운 동창천이 흐르고 있는데 
바로 앞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막지 않았을 때는 더욱 기막힌 경관이었을 듯...


대문 안쪽에 서서 우러러 보니 하늘을 이고 있는 만화정은 마치 입으로 불면 날아갈 둣 가벼워 보인다.


주변 산수의 아름다운 풍광과 잘 어울리게 섬세하게 설계된 이 만화정은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운강 고택(별도 포스팅 예정)의 부속건물인데
운강 박시묵 선생(1814~1875)선생이 조선 철종 7년(1856년)에 지은후 공부하면서 강론하던 집이다.


정자는 한칸 마루를 중심으로 서쪽에 방 1간, 동쪽에 2간의 통방을 배치하고


막돌을 쌓은 기단 위에 장대석 테두리를 두른 2중 기단을 두었다.


처마는 길게 내밀고 네 모퉁이에는 활주를 세웠으며 누마루에는 삼면에 헌함을 돌려 바닥을 확장하였다.


마루는 한간이라 그다지 넓지 않고


부채처럼 넓게 조각한 판대공 아래


정자를 거쳐간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굵은 나무)와 섬세하게 조각된 화반대공(대공:마룻대를 받는 짧은 기둥)이 눈길을 끌고


도리의 모서리에도 이렇게 꽃 문양을 새겨져 있으며


용두가 받쳐져 있기도 하는 등 섬세한 장식이 인상적이다.


정자를 돌아 후원으로 가 보니


안뜰보다 넓은 후원에는 운강 박시묵 선생의 비가 서 있었다.


푸르른 강물과 어우러진 주변의 경관은 너무나 아름다워 더운 날씨에 등에 고인 땀을 식히기엔 안성맞춤이다.


만화정은 특히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민을 격려하기 위해 종창천에 왔을 때
이곳 방에서 숙식하였던 곳이기도 해서 더욱 유명한 정자가 되었다.


운문 들판의 이름은 원래 만화평(萬花坪)이라고 하는데
만화평을 굽어 보는 위치에 있는 이 집을 만화정(萬和亭)으로 지은 것은 운강선생의 큰 뜻이 있지 않을까.

안민영(安玟英)의 주옹만영(周翁漫英) 한 구절처럼 
모든 일이 화평하라는 뜻이리라....

이 하나의 마음이 화하면 기운도 화한 법 (這箇心和氣亦和)

나의 마음과 기운을 화하게 하여야 중화를 이루리라 (和吾心氣致中和)
냇물이 사해로 귀의함이 모두 살아 있는 것 같고 (川歸四海渾如活)
온 산에 꽃 핌은 모두 함께 화의 기운 얻음이라 (花發千山共得和)
풍채와 운치는 다 같이 삼대(夏殷周)의 순후한 학풍으로 돌아가리 (風韻同歸三代學)
공부는 요컨대 한 덩이 화에 있음이로다 (工夫要在一團和)
세간 만사 화가 귀한 것이니 (世間萬事和爲貴)

일마다 오직 화하면 모든 만사가 다 화하리라 (事事惟和卽萬和)


만사가 어수선한 이때에 만화정(萬和亭)에 올라 온갖 시름을 잊고 화평함을 누려보심이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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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유달리 고택과 누각이 많다. 
운강 고택,  만화정, 섬암고택 등의 오래 된  가옥들이 연이어 있어서 마치 한옥 마을에 온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가옥은 '내시 고택'이라고 불리는 '임당리 김씨 고택'이다.

이 고택은 궁중 내시로 정 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낙향하여 지은 집인데
이 가문은 임진왜란 전부터 16대 400여 년을 내시 가계로 이어져 온 가문이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이 고택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건물 구조도 일반 반가의 주택과는 다른 특성이 있어 내시 주택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고택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중앙에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눈에 잘 뜨일 듯 말 듯한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개천 위에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한참 걸어 들어가면 솟을 대문의 고택이 나타난다. 





솟을 대문 앞에 다다르니 헉......자물쇠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평소에도 문을 잠궈 놓는지 ......아니면 관리인이 어디 출타를 한건지 한참을 서성거려도 도무지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다.





키 높이 정도 되는 담장으로 인해 고택은 외부인들에게 그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자들이 쓰는 방법처럼 카메라를 한쪽 손에 들고 담장 안쪽을 향해 팔을 길게 뻗어 셔터를 마구 눌렀다.
카메라를 내려 모니터로 확인해 보니 담장 안의 풍경이 찍혔긴 한데 건물은 삐뚤빼뚤.... 수평도 맞지 않고 앵글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다.

수십번 실패를 거듭하니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기울어지지 않은 사진 몇 장을 건질 수가 있었고
사진으로나마 내시 고택의 내부를 일부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 가옥은 안채, 중 사랑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큰 사랑채, 사당, 대문채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구조로 보아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채란 집의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안채와 대면을 피하는게 상례라
대부분의 집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성
을 인정해 주는 구조인데 이 가옥의 경우는 예외이다. 
 

이 집은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 두 사랑채가 대문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위치해 있으며
작은 사랑채
중문을 통과 해야만 안채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다가 작은사랑채 판벽에는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관찰하기 위하여  ♡♡♡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랑채에 앉아 외간 남자의 출입이 있는지.....안주인이 어디를 가는지....하나 하나 감시할 수 있도록 된 구조이다.
성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바깥 주인으로서는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실제로 내시 가계 부인들은 토담으로 철저히 폐쇄된 안채에서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문 오른편에는 자그마한 연당이 있고 연당 남쪽에는 널찍한 빈터가 있는데 

사랑채 주위에도 빈 공간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집은 해방 후에도 지금 보다는 훨씬 집터가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동안 후손들이 땅을 많이 팔아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전답이 많아 천석꾼으로 불리었던 김일준은 인심도 후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환관(宦官)의 기원이 상고 시대 은나라 때까지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흥덕왕 때의 기록에서 이미 궁중에 환관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내시와 환
관의 개념을 같이 사용하지만 본래 내시와 환관의 개념은 달랐고 고려 때 까지만 해도 내시와 환관은 구분됐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나 주자학의 태두인 안향 등도 본래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내시로 일했다는데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을 독차지 하게
되면서 내시가 환관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환관의 형태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부모 혹은 친인척에 의해 거세를 당하거나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빈곤한 가정 경제를 면하고 환관이 되어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또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과 부역을 피하고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을 모셨던 16대 김일준이 왜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환관의 최고 벼슬은 종 2품인걸로 보아
김일준이 얻은 정 3품 통정대부 직첩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는 자리란걸 알 수 있다.

임당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서는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을 하지 않았고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내시 생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18대 이후
로는 혈통에 의한 가족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내시 고택.
고택 안에 살던 바깥 주인과 안주인이 인내해야 했던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니 고택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도 편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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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있는 사찰 중에서

운주사처럼 신비스럽고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곳은 없을 것 같다.

'천불 천탑'이라고도 불리우는 수많은 불상과 불탑들이

언제,....이 곳에 세워졌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수백년 동안 묻혀 있던 앙코르와트처럼 신비로 남아 있는데...

 

특히 이 곳의 많은 불상들은 입체감이 전혀 없이 납작한 것이

아이들의 솜씨로 찰흙판에 납작하게 빚어놓은 찰흙 작품을 보는 것 같이

못 생긴 부처들의 군상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부처의 얼굴은 너무나 소박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그 중에는 누가 건드렸는지...누가 삐치게 했는지...

조금만 더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마치 입을 삐쭉거리는 아이 얼굴 같은 불상이 있어 시선을 끈다.

 

이 불상을 만든 석공은 어떤 사연이 있어

이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불상을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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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으로 알려져 있는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 위에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기독교 순교자 묘지가 자리잡고 있으니 

바로 '은혜 정원(Garden of Mercy)'이다.

 

 

의료 박물관이 된 선교사 챔니스 주택 아래편에 위치한 은혜의 정원에는 10개의 묘석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데

대구,경북 지방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다가 순교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가 묻혀 있다.

찾아주는 사람 별로 없이 대구 경북 지역 기독교 선교의 발자취를 찾아온 소수의 사람들만이 다녀가는 외로운 묘지.

하나님의 나라와 꺼져가는 조선 땅을 위해 낯선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 활동을 비문과 참고 글에서 찾아 소개해 본다.

 

 

처녀 순교자였던 마르타 스윗츠(Martha Switzer)선교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써

본국에서 보장된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몸 바친다는 각오로 해외선교를 자원하여

1911년 대구땅을 밟은 뒤 월급도 받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사유 재산까지 다 바쳐 가며 사역하였다.

그녀는 대구명도학원에 2천원의 거금(당시 쌀 한가마 10)을 내고

연합회가 제일동포를 위해 전도사(강성숙)를 파송하자 남은 유산 550원마저 기부하였다.

바로 그녀가 남긴 유산으로 일본 나고야와 만주 한인촌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명예나 보수를 바라지 않은 진정한 사역자였으며

교회를 찾은 조선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헌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대구땅에서 18년간 봉사하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였다.

 

 

넬리 딕(Nellie Dick Adams,탁넬니)은 대구 최초의 장로교선교사인 아담스(Adams,안의와,安義窩) 선교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1897111일에 3개월 된 장남 에드워드(안두화 : 계명기독대 창설)를 안고 태평양을 건너와

대구 지역에 발걸음을 디딘 첫번째 여자 선교사였다.

날마다 대구 땅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 넬리 딕은

남문안 예배당(대구 제일교회)의 유년 주일 학교를 창립했고

제일교회 부인 주일학교 교장, 전도부인 담당, 부인 사경회 인도와 순회 전도, 신명학교 출강,

정규 전도 부인 강습회 출강 등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다양한 선교활동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다 19091031일 넷째 아이의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로 숨져

고국을 떠나 대구 은혜정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넬리 딕의 쌍둥이 자매 진(Jean)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넬리 딕 선교사의 묘에는 "She is not dead but sleepeth(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니)"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죽은 것이 아니고 아직도 이 땅과 이 땅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영혼은 살아서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쏘텔(Chase Cranford Sawtell,사우대)188119일에 출생하여 ,

19071016일 신혼의 나이에 이름도 잘 몰랐던 한국땅, 그리고 대구라는 곳에 왔다.

그에겐 한 가지 꿈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구 선교를 넘어 더 내륙지역이고 당시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경북 북부 지역 안동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는 안동땅을 향해 기도하며 대구에서 그 곳으로 가기위해 준비하던 도중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죽게 되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I am going to love them." 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자신은 죽지만 여전히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죽음에 가슴 아파한 동료 선교사들은 쏘텔의 소망을 간직하고 자신들이 안동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렇듯 쏘텔은 안동땅에 복음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고 오히려 한알의 밀알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안동땅에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타 스콧 브루언(Martha Scott Bruen,부마태)선교사는

남편인 브루언(Bruen,부해리) 선교사를 따라 1902510일 대구 땅에 왔다.

남문안 예배당 구내 초가에는 존슨의 부인 에디스 파커가 소녀들을 위한 바느질 반(sewing class)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르타 스콧 브루언은 그 소녀들을 대상으로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동산 위에 있던 부인용 사랑채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화이트하벤에서 1875년 출생한 그녀는

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사와 농촌교회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부인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1930102055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르타 스캇 브루언 선교사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원래 조선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브루언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브루언을 도와 자신이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올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사랑과 내조가 있었기에 브루언 선교사의 사역과 대구땅에 여성학교 교육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딸들도 은혜 정원에 함께 나란히 묻혔다.

 

 

은혜정원에는 대구땅과 조선을 위한 선교의 삶을 사시다 묻히신 분들 외에도 곳곳에서 작은 묘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인데 버디 핸더슨(Buddy Henderson)은 계성학교의 교장 핸더슨(Henderson, 현거선)의 아들로

192065일에 출생해 1921917일로 단명했다.

 

 

루스 번스턴(Ruth Bernsten)은 구세군 대구지방관 번스턴(Brigador Arnold Bernsten)의 딸로 스웨덴 사람이다.

아버지 번스턴은 6.25 이후 중립국 감시위원단 스웨덴 대표로 내한한바 있다.

루스 번스턴은 1918107일 출생하여 1919128일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Our Darling Rut"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바바라 챔니스 (Babara F. Chamness)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925년에서 1941년까지 대구에서 근무한

챔니스(O.Vaughan Chamness, 차미수) 션교사의 딸이다

챔니스 선교사는 애락원에서 농사와 축산을 지도했으며 애락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조엘 로버트 핸더슨(Joel Robert Henderson)은 남침례교 선교사 Willie G. Henderson의 아들로

1964년 태어나서 몇 시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헬렌 맥기 윈(Helen McGee Winn)은 북장로교 윈(Rodger E. Winn,인노절) 선교사 부부의 갓난 딸이다.

윈은 안동에서 경안노회를 창설하고 안동성경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헬렌 맥기는 19131110일에 출생하여 열흘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당시 우리나라는 모든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었던지라

선교사의 자녀들은 태어나서 채 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한 가운데 죽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먼 이국 땅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자녀를 가슴에 묻어야 했던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슬픔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들, 딸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사랑했던 조선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분들의 마음에 있었기에.....

그들의 삶은 계속되고 이 땅에 선교의 꽃이 활짝 피게 된 것이다.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도 이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리라."

-- 은혜정원 표지판의 글에서--

 

참고 포스트 : 의료 선교 박물관(http://blog.naver.com/mslee1116)

메디 시티 - 건강(http://blog.naver.com/msl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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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마을은 역시 간판도 달랐다.

처음 가 본 전주 한옥 마을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글로 된 깔끔한 간판들이었다.

더 크게, 더 자극적으로, 더 눈에 띄게....
거리의 간판들이 국적 불명의 상호로 온통 뒤범벅된 요즈음
한글로만 된 간판도 이렇게 눈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간판만 들여다 보고 걸어도 하루가 즐거운 전주 한옥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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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삼덕동의 골목 벽화는 하나 하나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마을의 역사만큼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완성도가 높고 지속성이 있는 벽화를 만들기 위해 

타일이나 병뚜껑, 항아리조각 등이 모두 동원되어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벽화 작품을 만들었다.



보는 사람이나 집 주인들에게도 애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게 정성이 깃든 삼덕동의 벽화.

앞으로도 수준높은 벽화가 많이 그려지길 기대하며 삼덕동 벽화 순례를 떠나 본다.










































 




















삼덕동 골목.....참 좋지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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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 생각....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원제는 '사우(思友)'였지만 제목을 쉽게 풀어 써서 '동무 생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발표된 이곡은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애창곡이 되었다고 한다.

여고 시절,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이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며
(곡의 후렴 부분을 이중창으로 부르면 진짜 멋지다)
곡 중에 나오는 '청라 언덕'은 어디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교 후에 친구와 들리곤 했던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이 '청라 언덕'이란 사실을 얼마전에 알게 되었다.


이 곡의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한 후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 제일의 명문 여학교인 경북여고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곡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의 선교사 주택 세채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 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산동 언덕을 지칭한 말이다.
(동국대학교 이혁우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하였다.)


따스한 휴일 오후,추억의 '청라 언덕'을 찾아서 봄나들이를 했다.
'청라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동산 병원 뒷편, 신명 여고 옆길등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제일교회 옆 
긴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


오랜만에 올라보는 '청라 언덕'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선교사 주택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나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선교사들은 이제 없고
세 주택들은 선교 박물관,의료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는데
공휴일은 실내를 참관할 수 없어서 정원만 돌아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멧돌로 늘어놓은 십자가 형상이 특히 눈에 뜨였다.


대구 읍성 철거 (1907) 때에 나온 안산암으로 기초를 쌓고 붉은 벽돌로 벽을 만든 이 집은
아래는 서양식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로 이은 특이한 동서양 절충식 집이다.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옆에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대구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병원장 존슨 박사가 서양 사과나무 72그루를  처음 들여와서
한국 최초로 이곳에서 재배함으로써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금 있는 사과나무는 바로 그 나무의 자손목이다.


또 전국 담장 허물기사업의 하나로 유서 깊은 동산 의료원의 담장과 문을 헐었는데
담장의 일부와 초창기 교회의 종들을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두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이 되었는데


이 건물은 푸른 담쟁이 덩쿨로 뒤덮여 있어서 '청라 언덕'의 유래가 된 듯 하다.


 미 캘리포니아 남부 방갈로 형을 채택한 주택으로 1910년에 지어졌다.


이 주택 역시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다.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현재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었다.


현관 앞에 게양된 태극기에서 그당시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이 느껴졌다.


청라언덕을 다 둘러보아도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백합꽃은 찾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에 나오는 "백합 같은 내 동무야"는 단지 상징적인 표현인데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백합화는 찾을 수 없었지만 청라 언덕에는 등꽃과 라일락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벚꽃잎이 장독대며 돌절구에 살포시 떨어져서 청라 언덕의 운치를 한결 더하여주었다.


추억의 청라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나 또한  '동무 생각'을 나즈막히 불러 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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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인 구시가지 삼덕동에 대한 나의 기억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서민들이 살았던 우리 동네에 비해서 대구 시청 근처에 있던 삼덕동은
일제 시대부터 이십여년전까지는 대구 시내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살던 대단한 동네였다.

아파트가 많은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 되고
주민들이 근교의 대규모 개발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겨 가면서부터

이곳의 집들은 하나 둘 비워지고 빈 자리는 점점 저소득층으로 채워지게 되는데
IMF이후는 주민들의 삶이 급격히 기울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라고 했다.





삼덕동이 다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담을 허물면서였는데
담장허물기는 한 사람의 아주 작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예쁜 정원을 정성껏 가꿨는데 혼자보기는 아까웠다는  대구 YMCA 중부지회 김경민 관장이
자기 집 담장을 먼저 허물면서부터 각 가정의 정원은 골목의 공동 정원이 되었다.

그리고 담을 허무는 데만 그치지 않고 동네 어린이들의 환경 그림을 받아 골목에 전시하고 마을 잔치를 하나 둘 열어갔다.



방치되어있던 점포는 수리해 물물교환 형식의 재활용 가게로 열고 벽화만들기, 골목주차선 지우기 등의 운동이 이어졌다.



담장을 허물고 생긴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전국에서 제일 많은 벽화이다.
담장을 허물어도 남아 있는 다른 집에 회색 집 벽만 덩그러니 있다면 뭔가 삭막한 느낌이 들수가 있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설치작가 김정희씨의 지휘 아래 마을의 벽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삼덕동의 벽화는 동피랑처럼 페인트로 칠해져있지 않고 하나 하나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마을의 역사만큼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완성도가 높고 지속성이 있는 벽화를 만들기 위해
타일이나 병뚜껑, 항아리조각 등이 모두 동원되었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벽화 작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인 벽화는 보는 사람이나 집 주인들에게도 애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삼덕동에는 지금 20채에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200채의 집에 벽화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담장허물기운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허물어진 담 위로 마을 주민들의 정이 오갔고 마을미술관, 마을문화관, 녹색가게, 어린이집이 만들어졌고 마을잔치가 벌어졌다. 
새로운 골목 문화가 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어 있던 적산 가옥인 삼덕초교 교장 관사를 교육청과 1년 넘게 교섭을 벌여 위탁받아 '빛살미술관'으로 선을 보였다.

담장을 허물어 둘레에는 나무를 심고 뒤뜰은 남새밭으로 만들었다.



경매에 넘어갈 뻔 했던 맞은편 보리밥집도 우여곡절 끝에 불하받아 개조와 신축 작업을 벌인 후에
현판 '마고재(麻姑齋)'를 달고 풍물, 국악 강습과 공연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술관과 마고재가 있는 거리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고재 대청이나 안방에서 쉬거나 또 나무 아래 의자에서 얘기도 나누고 미술관 그림들을 일삼아 둘러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담장 허물기 사업의 출발지, 동네 미술관과 국악당, 그리고 동네 축제가 있는 곳.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라는 주제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삼덕동을 벤치마킹하려는
공무원, 시민단체들이 전국 곳곳에서 방문하고 있지만 지금의 현실은 조금 어려운 사정이다.



몇 발자국만 나가도 고층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진 대도시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보물 같은 삼덕동에도 재개발 바람은 어김없이 불어왔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주민들과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 갈등이 벌써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허물어진 담장 사이로 새로운 마음의 담장이 더 높게 날카롭게 세워졌다.


10년이 넘게 마을만들기 운동이 펼쳐져 많은 성과를 거둔 이곳이 갑자기 불어 온 재개발 바람.
재개발로 높다란 아파트가 이곳에 지어지면
기껏 허물었던 담장과 마을의 벽화와 마을회관과 미술관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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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사이 숭례문이 속절없이 다 타 버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다 타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연.실.색.......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을 다 견디고
꿋꿋이 살아서 육백년을 건재해 온 국보 1호

 .

 .

지난 달 숭례문에 사진 찍으러 갔을 때에 그 수려함과 장엄함에 반하여
아무런 제재도 없이 누구나 그 근처를 다 오갈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또 저녁이 되어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다는 점에 내심 놀란 적이 있었다.

무방비 상태인 것이 비단 숭례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화재에는 취약한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화재 진압 장비 하나 번듯하게 없이
달랑 소화기 몇 대 비치되어 있는 것이 정말 불안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루 밤 사이에 속절없이 타서 무너져 버리다니..... 

                                                                                              

조선 시대에 화재가 났다 하더라도 대처하는 것이 이보다는 나을 듯 하다.
자기 집,자기의 재산이면 이렇게 안일한 대처를 했을까.....
정말 어이없는 화재로 인해 우리의 국보 1호를 몇 시간 만에 홀랑 태워먹었다.
이렇게 참담한 기분이 있을까....
눈물이 나고 목이 메인다....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 우리 나라의 자존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건지...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담은 숭례문의 모습을 쓰라린 심정으로 공개할까 한다.
지난 달 남대문 카메라점에 부속품을 사러 갈 때에 숭례문 바로 옆에 차를 주차했기 때문에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숭례문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었다.

원형대로 복원하는데에는 거의 5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이제 당분간 보기 힘든 아름다운 숭례문의 모습을 몇 장 여러분 앞에 올려 드린다. 

 

 

평소에 그 옆을 지나쳐도 힐끗 올려다 보기만 했지...자세히 살필 생각을 별로 안 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숭례문은 그 위엄과 수려한 자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비둘기들이 휘...날아서 숭례문 지붕으로 모여 앉는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숭례문은 서울 성곽의 정문이다.  또한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 7년(1398년)에 처음 건립한 후 세종30년(1448년)에 크게 고쳐 지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숭례문 중앙 현판의 글씨는 지봉유설에 의하면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어 일반 백성들이 드나 들 수 있게 하였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석축과 새로 보수하여 끼워넣은 석축이 혼합되어 있다. 

 

 

홍예문 위에 정면 5 칸,측면 2 칸인 2 층 문루를 세우고 문루 위에 다시 처마를 4 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처마 끝은 여러 개의 나무로 짜 맞추어 댄 전형적인 다포(多包) 양식의 건물이다. 

 

 

숭례문의 잡상(雜像)은 모두 아홉인데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잡상 뒤에 비둘기가 잡상의 일부분인 것 처럼 앉아 있다. 

건물 내부의 2층 바닥은 널빤지로 깐 나무이고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 만이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깐 우물 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성곽 흔적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숭례문의 육중한 철문 안으로 들어가 본다.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는 문갈고리들도 장중한 대문의 위세에 한 몫을 한다. 

 

 

 

 홍예문 안 쪽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이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석축들의 흔적.... 전란이 스쳐 간 상처들이 곳곳에 있었고.... 

 

 

 

 

천정화는 세밀하고 화려하여 목이 아프도록 오래 쳐다 보게 만든다. 발이 넷 달린 청룡의 모습. 마주 보고 있는 황룡의 모습. 구름의 모습이 단순화, 회화화되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숭례문 안 쪽의 사진을 찍고 나오니 웬 청년들이 나와서 주변에 꽂혀 있던 깃발을 거둔다. 

 자세히 보니 아까 퇴근하던(?) 수문장과 수문군이다.
숭례문 근처 어디인가에서 복장을 갈아입고 나와 깃발을 수거해서 다시 일반인의 모습으로 퇴근하는 것이다.  

 

 

 

웬 여자가 촌스럽게 남대문 사진을 찍고 난린가...하는 표정으로 흘깃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숭례문 앞을 지나가는데 대부분 한번 올려다 보지도 않고 지난다.
그들에게 숭례문은 매일 생각없이 스쳐 지나는 길가의 전봇대나 다른 바 없이 느껴진다.

 언제나 바로 옆에서 늘 있어온 그림자 같은 숭례문.....
너무나 가까운 곳에 편안하게 있어서 우리에게 그 귀중함을 전해 주지 못하였나 보다.
우리의 유산,우리의 귀한 문화재는 다른 이가 와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때에 우리 것은 보존되어지는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이 여느 문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을 본다.
숭례(崇禮)의 두 글자가 위 아래로 있을 경우 불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로써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는데
현판의 그 불꽃이 숭례문을 한순간에 태워버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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