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뜰 산책........................'에 해당되는 글 269건

  1. 2014.07.18 울산 가볼만한 곳 / 국보 제285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서 22
  2. 2014.07.11 아나로그 추억박물관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군위 화본마을 산성중학교를 가다 14
  3. 2014.07.03 기찻길 옆 작은 마을, 군위 화본 마을 벽화 구경 14
  4. 2014.06.30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 군위 화본역 21
  5. 2014.06.23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산실 / 한국 최고의 99칸 전통 가옥 / 석주 이상룡 생가 안동 임청각 21
  6. 2014.06.16 [체험학습 갈만한 곳] 별빛같은 아이들의 새별배움터, 영천 자천교회 신성학당 14
  7. 2014.06.12 창호에 수놓은 아름다운 꽃송이, 통도사 꽃살문 11
  8. 2014.04.23 포항 블루밸리 사업으로 인해 매몰 위기에 놓인 중양서원 9
  9. 2014.01.27 귀신의 집 소문난 영덕 흉가, 4년 만에 다시 가보니...... 51
  10. 2013.11.08 80년간 숨어있던 힐링 명소 양산 법기수원지를 가다 17
  11. 2013.09.02 홀로 떠나는 힐링 여행, 동해 논골담길을 가다 20
  12. 2013.08.29 [삼척 가볼만한 곳]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곳 100선, 삼척 죽서루 25
  13. 2013.08.26 '워낭소리' 그 후, 할아버지 찾아 봉화로 가봤더니...... 70
  14. 2013.08.23 [서울 사진 찍기 좋은 곳]북촌 한옥마을 느리게 걷기 15
  15. 2013.08.19 힐링캠프 고택체험,서애 류성룡 징비록의 산실 하회마을 옥연정사를 가다 20
  16. 2013.08.14 바다와 터널의 환상적인 조화, 삼척 해양레일바이크 18
  17. 2013.08.12 최고의 피서지 추천, 봉화 닭실마을 석천정사와 석천계곡 21
  18. 2013.08.06 동화속 그림같은 바닷가 성당, 부산 죽성리 드림 세트장(부산 출사지 죽성 성당) 34
  19. 2013.08.01 사진 찍기 좋은 곳, 신록으로 힐링되는 경산 반곡지 20
  20. 2013.05.23 담양 죽녹원 부럽지 않은 울산 태화강 십리대밭 14
  21. 2013.03.04 1박2일 여행지, 세계최고의 오디오박물관 강릉 참소리박물관 14
  22. 2013.02.27 강릉 여행 1번지, 경포대에 올라 경포호를 바라보다 17
  23. 2013.02.25 연인들의 추억을 새기는 바다, 해맞이 명소 정동진 18
  24. 2013.01.24 경상북도수목원(죽장수목원)에서 만나는 겨울의 파노라마 21
  25. 2012.12.24 자연의 선물! 감탄이 절로 나오는 울산 강동 화암 주상절리 14
  26. 2012.12.12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향기가 풍기는 영양 주실마을 18
  27. 2012.12.10 남이장군의 전설이 전해오는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22
  28. 2012.11.26 육지 속의 섬 영양의 감추어진 보석, 서석지 23
  29. 2012.11.09 뜨는 출사지로 입소문난 세천리 왕따 소나무 33
  30. 2012.11.02 나는 새도 쉬어넘는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의 가을 33


 

 

한국의 대표적인 암각화로 꼽히는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

경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한번도 찾아보지 못한게 마음에 걸려서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토요일 오전에 반구대 암각화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내남네거리에서 포석로를 따라 좌우로 유적지가 펼쳐져 있는 한가한 길을 쉬엄쉬엄 따라 가다가

구불구불 멋드러진 소나무가 우거진 삼릉과 용장휴게소를 지나

내남농공단지에서 큰 도로로 접어드니 도로의 이름이 '반구대로'다.

양산 가는 길에 자주 오가던 도로의 이름이 반구대로였다니.....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도로의 이름이 오늘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주차장에 이르러 차를 세워놓고 조그만 다리를 건너 숲길로 들어서니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싱그럽다.

 

 

 

 

바깥 세상은 작열하는 태양이 내려쪼이는 한더위지만 숲길의 바람이 등허리에 맺힌 땀을 살포시 식혀준다.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군데군데 지렁이가 여기저기 꿈틀거리는 숲길 사이로 드리운 햇살이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한참을 걸어가니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반구대이다.  바로 건너편 산기슭 암벽에 암각화가 있는 것이다.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본 후 암각화가 있다고 짐작되는 곳으로 망원경을 겨누고 한참 살펴보았다.

하지만 암각화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도대체 암각화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운데 부분 파란 풀이 나 있는 윗부분이 암각화가 새겨진 부분이라고 하는데.......

 

 

 

 

200mm 망원렌즈로 당겨서 몇장 찍어 보았다. 확대하면 암각화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까?

 

 

 

 

사진이 선명하지 않은 탓일까? 수천년 세월의 흐름에 암각화가 희미해진 것일까?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을 이리저리 확대해 봐도 암각화 그림 상태는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반구대 근처의 사연댐의 수위가 차오르는 1년 중 몇개월은 물에 잠겨 있다는 암각화.

물에 잠긴 암각화가 아니라 물 위로 드러난 암각화의 존재와 주변형세를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하고 돌아서야 했다.

 

 

 

 

반구대 앞을 떠나 약 1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울산암각화박물관으로 가서 암각화 그림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1층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다양한 암각화의 사진.

이렇게 많은 암각화가  존재하고 있었다니!

 

 

 

 

2층에는 반구대 암각화의 모형이 커다란 벽면에 새겨져 있어 반구대에서 확인하지 못한 암각화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형에는 암각화에 새겨진 여러 형상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실제의 암각화도 이렇게 선명하면 좋으련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물 속에서 침식되기를 거듭한 결과 지금은 형상을 그 형상을 쉽게 관찰할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1971년에 처음 발견되어 알려진 반구대 암각화의 크기는 가로 8m, 세로 2m정도이다.

 

 

 

 

반반하고 매끈거리는 병풍같은 바위 면에 고래, 개, 늑대, 사슴, 호랑이, 멧돼지, 곰, 토끼 ,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들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최근 발견된 11점까지 함하면 모두 307점이다.

 

 

 

 

이곳에 표현된 동물들은 주로 사냥 대상의 동물이고 동물 가운데는 교미의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배가 물룩하여 새끼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모습도 보인다.

 

 

 

 

어떤 그림은 두 손을 얼굴에 모으고 춤을 추는 주술사의 모습과 그 아래 새끼를 업은 듯한 귀신고래와 왼쪽에 거북의 모습 그리고 U자형의 그물에 갇힌 호랑이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동물들이 많이 번식하여 사냥거리가 많게 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고기잡이배와 그물에 걸려든 고기의 모습을 묘사한 것도 실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주술적 행위로 보는데 아마도 당시에 반구대 지역이 사냥과 어로의 풍요를 빌고 그들에 대한 위령을 기원하던 주술적인 장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년이면 반 이상 물에 잠기는 반구대 암각화를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청은 카이네틱 댐(Keinetic Dam)이란 대안을 내어놓았다고 한다.

카이네틱 댐이란 암각화 전면에 수위 변화에 따라 높이 조절이 가능한 투명막(폴리카보네이트)으로 된 댐인데

암각화를 중심으로 앞쪽에 철근을 이용한 기초를 한 후 약 30m 길이의 원형 제방을 쌓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쓰면 암각화 바로 앞에다 시설물을 고정하기 위한 철근을 박아야 한다는데

이는 암각화 앞 80m 떨어진 지점에 생태 제방을 쌓자는 울산시의 안 보다 더 주변경관을 훼손하는 방법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에서 내놓은 카이네틱댐의 설치안 도면을 보면 반구대 암각화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만일에 카이네틱 댐을 이용한 임시제방건이 국회 통과를 한다면 이후에 반구대 암각화를 찾는 분들은 암각화는 보지 못하고 암각화 주변에 플라스틱 제방이 둘러싸 있는 흉칙한 모습만 보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울산시의 물 문제도 해결하고 반구대 암각화를 보존도 하는 방법이 정녕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일까?

반구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내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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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와 인접한 경상북도 군위.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골마을 군위에 요즘 사람들이 몰려 들고 있다.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선정된 화본역이 그곳에 있고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란 추억여행 전시장으로 새롭게 선보인 산성중학교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화본마을에 도착하여 화본역을 돌아본 후 차를 역 광장에 두고 한적한 마을길을 걸어가 본다.

역전상회를 지나 길 옆 담벼락에 그려진 삼국유사 관련 벽화들을 보면서 5분여를 걸어가니

푸른 숲에 둘러싸인 작은 학교 하나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오르고 내렸을 학교 앞 비탈길.

학생 수가 줄어들어 폐교가 되어버린 산성중학교는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란 테마 아래 추억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추억 속으로 여행을 하려면 교문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성인의 입장료는 2,000원, 어린이는 1500원인데 10명 이상 단체는 1,000원이니 입장료도 저렴한 편이다.

  

교실 8개의 폐교 건물을 추억박물관으로 개조했다는데 현관 문 위의 거대한 학생 모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운동장 한켠에는 여러가지 추억의 놀이 체험 코스와 함께 학교 앞 추억의 주전부리 가게가 인기리에 성업 중이다.

 

 

 

 

학교 앞 문구점 좌판 위를 가득 메웠던 추억의 불량식품이 너무 반갑다.

 

 

 

 

불량식품 먹으면 큰일 난다고 엄마와 선생님이 늘 말리셨는데 여기서는 보란듯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아팟치, 쫀디기, 뽀빠이, 자야, 아폴로, 오징어맛다리, 보석캔디, 씨씨200, 콜라맛 캔디......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불량식품들이 가득이라 주머니 가득 사서 넣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기 힘든 곳이다.

 

 

 

 

아이들은 먹는 방법도 모르는 쫀디기를 사서 구워먹는 사람들은 거의 3,40대들.......

쫀디기를 구우며 너도 나도 학교 앞 문구점에서 불량식품 사먹던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학교 앞 불량식품의 최고봉은 뭐니뭐니 해도 '달고나'이다.

학교 앞 문구점 앞에 쭈구리고 앉아 달고나 만들기에 열중했던 어릴적 소중한 추억은 누구나에게 다 있을 듯.

설탕이 담긴 국자를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녹여 소다를 조금 넣으면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는게 너무가 신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 부푼 달고나를 판에 거꾸로 엎고 꾹 눌러 납작하게 만든 다음 별이나 8자, 나무 모양을 찍는게 포인트다.

 

 

 

 

별이나 8자 모양을 부스러지지 않게 성공적으로 떼어내면 독수리나 큰칼 모양의 설탕 과자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는데......

언제나 마지막 단계에서 부러져 실패하곤 했던 생각이 난다.

 

 

 

 

추억의 놀이와 학교 앞 군것질 체험을 한차례한 후 추억 전시장인 교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입장권 점검은 고운 셔츠를 입은 화본마을 할머니께서 해주셨다.

 

 

 

 

현관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옛날 다방, 옛날 교실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다.

옛날 전시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포니 픽엎. 1976년에 처음 나온 포니에 이어 1980년대에 나온 포니2라고 한다.

당시 데이트하던 연인들이 다른 택시가 오면 손을 저어 돌려 보내고 포니 택시만 골라서 탔다고 할만큼 인기있는 차종이었다고......

 

 

 

 

옛날 교실 안에는 작은 책걸상과 함께 가운데 난로가 놓여 있다.

조개탄을 넣어 때던 커다란 난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는지 작은 사이즈의 난로가 놓여 있는게 약간은 아쉬운 점이다.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 놓고 공부하다 보면 밥이 타서 누룽지가 되는 냄새에 교실의 아이들은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수학이 아닌 '산수'를 배우고 교욱부가 아닌 '문교부'에서 나온 '국민교욱헌장풀이'를 배우던 그 시절의 교과서.......

 

 

 

 

75학년도에 5학년인 박인식은 지금 50살이 되어 있겠지?

좋은 점만 찾아서 써주는 요즈음 통지표와는 달리 나쁜 점이나 고칠점도 기록되어 있는 가정통신부.

"모든 활동에 의욕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생각하는 고상한 성격이 있나봐요."란 문구가 재미있다.

 

 

 

 

현관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추억이 골목길들이 재현되어 있다. 구멍가게, 연탄가게, 만화방, 문방구, 이발소, 사진관.....등

이제는 어디서도 보기 힘드는 6~70년대의 옛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춘 동네 사진관. 검은천을 뒤집어 쓰고 찍던 커다란 카메라가 놓여 있던 그 시절의 사진관이다.

 

 

 

 

엄마한테 야단 맞아가며 몰래 몰래 들락거리던 아이들의 휴게소 만화방.

 

 

 

 

공부 안 하고 만화만 본다고 야단치던 엄마가 '암행어사 박문수'같은 만화를 빌려오면 아이보다 더 열심히 보곤 했다지.....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인 연탄. 손글씨로 쓰인 간판이 정겹다.

 

 

 

 

 

상자처럼 작디 작은 방 안을 들여다 보니 1971년도 달력이 걸려 있다. 한장으로 일년을 커버하는 어렵던 시대의 달력.

 

 

 

 

비좁은 골목을 돌아서니 '열어보실래요?'라고 쓰인 작은 문이 있다.

문을 여니 컴컴한 뒷간 안에 볼일을 보다 화들짝 놀라는 표정의 인형이 앉아 있다.

나무 판대기를 대어 만든 뒷간을 보던 아이가 깜짝 놀란다. "이게 화장실이에요?"

 

 

 

 

오래전 학교 앞에 있던 작은 문구점. 요즘 쓰지 않는 문방구라는 간판이 정답게 느껴진다.

 

 

 

 

얼음덩어리를 올리고 슥슥 갈아주던 빙수 기계. 삶은 팥과 찹쌀떡, 시리얼, 과자 등을 올리고 시럽을 뿌린 화려한 팥빙수가 아니라

갈아낸 얼음 위에 빨갛고 노란 색소를 탄 물을 뿌리고 설탕만 뿌려줘도 최고의 빙수가 되던 그때 그 시절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 아이들이겐 최고의 핫 아이템인 딱지. 

주머니 불룩하게 딴 딱지를 넣고 휘파람 불며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의 입에는 저절로 휘파람이 나온다.

 

 

 

 

그 때 그 시절의 동그란 밥상 . 커다란 밥그릇에 비해 코딱지처럼 작은 반찬 그릇이 대조를 이룬다.

 

 

 

 

골목 여기저기엔 선거 홍보 벽보, 표어, 영화 포스터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한구석도 남기지 않고 열심히 새겨넣던 그 시절 광고. 치질 광고의 한자리수 전화 국번이 눈에 확 들어온다.

 

 

 

 

길지 않은 골목길이지만 한바퀴 돌고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엔 저런 딱지를 갖고 놀았어" 아이의 손을 잡고 설명하는 아빠의 눈이 반짝거린다.

불편함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던 시절, 뽑기에 걸렸던 설탕 과자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던 시절,

공중 전화 앞에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다가 올 통화에 가슴 설레었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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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이 꼽은 가장 아름다운 작은 기차역 화본역이 있는 군위 화본마을.

아담하고 아름다운 기차역만큼 마을 이름도 정겹고 아름답다.

 고즈녁하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인 화본마을은 의외로 볼거리가 제법 있다.

 

1938년부터 업무를 시작했다는 화본역은 오랜 시절 빛바랜 기차역의 낭만을 선물해 주고

 테마박물관으로 개조한 산성중학교는 엄마, 아빠 어렸을 적 추억이 모락모락 살아나개 해준다.

 

기차역과 붙어 있는 작은 마을 곳곳에는 삼국유사와 관련한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일연스님이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좁은 마을길을 걸어가며 건너편 길 의 벽화 몇점을 사진으로 담고 있자니

 픽업트럭 하나가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을 다 찍을때까지 기다려 준다.

여행객이 사진 찍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가던 길을 멈추는 차가 있다니.....

아마도 군위 화본마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흐뭇한 광경이 아닐까?

기찻길 옆 작은 마을, 화본마을에서 담은 벽화 몇장을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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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중부에 위치한 '군위'는 대도시인 대구광역시와 붙어 있으면서도 그 인지도가 안습인지라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뿐 아니라 '구미'와 그 이름을 헛갈리게 듣는 사람도 있는데......

인구 25,000명에 지나지 않는 한적하고 존배감없던 군위가 요즘 핫한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폐교의 아픔을 딛고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란 추억여행 전시장으로 새롭게 선보인 산성중학교와 함께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선정된 '화본역'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화본역까지는 생각외로 멀지 않은 거리다. 영천에서 의성 가는 길로 접어드니 길이 너무나 한산하다.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길이지만 한참을 가도 오고가는 차 하나 없다.

정말 이렇게 한가한 길이 있을까? 한편 신기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유유자적하며 한적한 길을 한참 가다 하니 산성중학교와 화본역이 있는 산성가음로가 나타난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걸까?

추억여행 전시장인 산성중학교 앞에는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을 비롯하여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화본역 옆 임시로 만든 공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본역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역은 장난감 레고로 만든 집처럼 작고 반듯하다.

연핑크색으로 옷입은 화본역은 기차가 주는 무겁고 중후한 이미지를 벗어나 가볍고 화사하다. 

1938년 보통역으로 업무를 시작한 화본역. 현재는 하루 여섯번 기차가 정차할 뿐이다.

예전에는 사람이며 화물을 꾸역꾸역 토해내던 역이었지만

이제는 기차를 타러 오는 사람보다 역사를 보고 즐기러 사람이 훨씬 많다.

 


 

 

역 구내를 돌아보기 위해서 500원을 내고 입장권을 발급받아 인증샷을 찍어 보았다.. 

멀리 뒤로 보이는 기차는 실제로 운행하는 기차가 아니고 열차 카페이다.

 

 

 

 

구내에 들어서 돌아보고 있는데 기차가 들어온다는 신호가 울린다.

다급히 선로를 피해 한쪽으로 비켜서니 화물차 한대가 굉음을 내며 달려온다.

화본역의 상징과도 같은 급수탑 아래로 육즁한 화물기차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기차가 지나간 후 선로를 넘어 뒷편에 있는 급수탑 쪽으로 가본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에 열차가 운행하기 위해 필요한 물을 공븍해 주는 건물이다.

더 이상 물을 공급해줄 증기기관차도 다니지 않는 시절, 많은 급수탑이 철거되어 흔적이 없어졌지만

화본역의 급수탑은 아직도 남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입구문을 통하여 급수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급수탑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천정까지 뻥 뚫려진 구조였고 가장자리에는 두개의 배수관이 자리잡고 있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펌프로 급수관을 통해 급수탑 높은 곳 물탱크에 물을 채워 두었다가

기관차가 역으로 들어와 정차하게 되면 물의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배수관을 통하여 기차로 물을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기능을 잃고 관광 명소가 되어 버린 급수탑. 지금은 이곳을 다녀간 연인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기원하는 낙서로 가득하다.

 

 

 


 

 

 

작지만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화본역. 지나간 세월의 흔적인 급수탑까지 돌아볼 수 있으니 더욱 좋다.

'네티즌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이란 수식어가 아니라도 한번쯤 들려 시간여행을 하기에 좋은 군위 화본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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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들이 유화를 그리 듯 펼쳐지던 어느 여름날, 안동시 법흥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동댐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은 통일신라시대의 '신세동 7층전탑', 바로 앞에 위치한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그리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 '임청각'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안동에 도착하여 임청각길 어귀에 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이내 철길 가림막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철길 가림막 앞에 펼쳐지는 웅장한 고, 바로 '안동 임청각(臨淸閣)'이다.

 

 

 

 

그런데 배산임수라는 말도 있듯이 탁 트여야 할 고택 바로 앞에 철길이 자리잡고 있다니 

일제 강점기 시절에 만들어진 철길이 임청각 바로 앞으로 지나가고 있다. 답답함이 바로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철길을 따라 평행으로 선 담장 너머 긴 바깥 행랑채가 장관이다. 행랑채가 이렇게 크니 고택의 규모는 또 얼마나 클까 생각했는데   

행랑채 끝 부분에 가서 건물의 규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단칸 맞배지붕의 대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99칸이나 되었다는 고택의 대문치고는 너무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초라하다는 느낌마져 든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초라한 대문은 아니었다 

본래는 장엄한 중층 누각형 대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처럼 작은 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부설한 철길에 있다. 일본인들이 왜 안동 시골구석에 철길을 만들었을까 

광산이나 농수산물이 풍성하지도 않은 이곳에 굳이 철길을 가설한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겉으로는 주민들의 교통 편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안동을 관리하는 것이 일본의 목표였던 것이다. 

 

일제가 낙동강 변으로 철도를 부설하고 도로를 뚫으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곳이 바로 임청각이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이 태어난 이집의 맥을 끊기 위해 임청각 행랑채 일부와 문간채, 중층 문루를 헐어내고 철도와 도로를 가설했다. 

임청각은 본래 왕족이 아닌 평민이 지을 수 있는 집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아흔아홉칸(99)칸이었는데

집앞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 건설로 인해 많은 건물이 헐리게 되고 지금은 본채 56칸과 군자정 8칸 등 70여칸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애초의 임청각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 선생이 

이곳 지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터전을 잡음으로써 시작되었고

1519년에 이르러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라는 시구에서 ()’자와 ()’자를 인용한 것이다

 

임청각은 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지를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지어졌는데

크게 정침(살림채), 군자정, 사당 등 세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가옥의 평면도를 보면 일(), ()자 또는 그 합자 형태인 용()자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자는 하늘을 나타내는 의미로,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고.....

 

 

 

 

임청각에서도 가장 눈에 뜨이는 건물은 별당인 군자정이다. 

군자정은 자 모양의 건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정침 쪽으로 한 칸씩 온돌방을 더 내어 붙여 놓은 모습이다





정자형 별당답게 누마루 형식에 사방으로 계자난간을 갖춘 쪽마루를 돌려 

바닥에 내려서지 않고도 난간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관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다



 

 

군자정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돌로 만든 물확이 있는데 이 물확은 손을 씻는 곳이다

실내로 들기 전에 손을 닦으라는 의미로 청결을 위한 주인의 배려가 눈에 띄는 부분이다.





누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주변에 꾸며 놓은 화단과 방지(方池)가 보이고 방지 옆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도 보인다.

방지는 크지않고 아담한데 가운데 석가산 대신 조그만 맷돌 하나가 대신 올라앉은 모습이 재미있다.

전면 온돌방의 세살무늬 덧문을 열어젖히면 안동댐에서 흐르는 강물과 강 너머 시간의 흐름도 감상할 수 있어 좋다

 

 



군자정 대청에 높이 걸린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로 새겨진 현판이라고 하는데

현판 아래는 임청각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훈장 등이 여러개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임청각은 그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이며 임청각의 소유주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주 이상룡선생은 경제적 풍요와 함께 종손으로서의 권위와 안일을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고난의 길을 자처했고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석주의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또한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3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집이다.

이곳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가 아홉분이나 된다고 하니 임청각은 명실상부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지(方池)를 지나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사당으로 올라본다. 사당 앞에 심기워진 배롱나무가 너무 아름답다. 

이 사당에는 4대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었지만 한일합방이 되자 석주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장주하여 현재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고 한다.

 

 

 


사당 툇마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담너머 군자정과 방지는 물론 임청각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법흥교까지 훤히 보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명승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강이 내려다보이는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이었다고 하는 임청각.

앞을 가로막은 철길만 아니었더라면 배산임수!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혔을텐데......

 

 

 

 

사당을 나와 군자정 앞을 거쳐 정침(살림채)으로 향해본다.  살림채인 정침은 안채중채사랑채행랑채로 나누어져 있는데 

복잡한 가옥 구조를 잘 연결시키는 다섯개의 마당(안마당사랑채마당행랑채마당대문진입마당 그리고 헛간마당 )이 높낮이를 달리하며 자리잡고 있어 효용성과 세련미를 더해준다.


 



사랑채 마당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엄텅나게 깊은 이 우물은 아직도 말항상 맑은 물이 그득하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이 가옥의 혈이 있는 장소로 훌륭한 인재 셋이 나온다는 전설이 깃든 특별한 우물일 뿐 아니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출생하신 우물 앞 방은 독립운동가의 정기를 받은 아이를 갖고 싶은 부부들의 숙박 요청이 쇄도한다고 한다. 


 

 

 

편의성과 세련미를 함께 갖춘 독특한 구조라는 안채.

안채를 보아야 고택의 진수를 보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문이 굳게 닫겨 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중채를 돌아 행랑채 문으로 들어서 본다. 행랑채는 문을 중심으로 안행랑채바깥행랑채로 나뉘는데 무려 13칸이나 되는 규모이다.

문 안에 있는 안행랑은 마님을 보필하는 하인들의 생활 공간이고  바깥 행랑채는 남자 하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라고......





안행랑채 끝에는 뒤뜰로 나가는 문을 만들어 하인들이나 안주인이 뒤뜰로 나가 화초나 채소를 가꾸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시 기존 토지의 경사를 잘 이용하여 오밀조밀 계단을 만들어 둔 것이 눈에 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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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행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문. 문은 안채에서 열고 닫을 수 있게 했다. 

이는 안채에 기거하는 여인들의 사생활을 보호 차원인 듯......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 가장 규모가 큰 임청각은 1519년에 지어졌으니 거의 500년이 되는 귀한 문화재이다.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은 안동시의 지원을 받아 고택을 수리한 후 민박을 받는 등 고가옥 전통체험장으로 가옥을 개방했는데.

방 3개와 대청 마루가 있는 군자정 한채를 빌려 하룻밤 숙박하는데 15만원 정도의 저렴한 체험비를 받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니보물로 지정된 귀한 고택에서 민박을 한다고? 500년이나 된 고택이 훼손이라도 되면 어쩔려고!'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아무리 잘 지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고 빈 집으로 두면 결국은 서까래가 썩고 구들장이 무너지고 마는 법.

사람이 살며 사용해야 집이 더 오래 가고 고택체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더 갖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주인들의 나라 사랑과 헌신이 더 감동적인 충절의 고택 안동 임청각에서 1박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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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머무르는 곳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이곳에는 1903년에 건립되어 무려 111년의 역사를 지닌 한옥 예배당 영천 자천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로 한국교회 건축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 공간을 갖춘 개신교 문화재이다.
독특한 건물의 원형이 잘 보존된 자천교회는 영남 지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자천교회 예배당의 역사와 내부 구조에 대해선 이전 포스트에서 상세 언급하였으니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관련 포스트 : 영천 자천교회는 아직도 남녀칠세부동석?

 

 

 

 

자천교회 옆에는 날렵한 처마가 일품인 고택이 자리잡고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신성학당(새별배움터)이다.

신성학당은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헌중 장로가 교회 내에 설립한 신성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배움터로서

내일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배움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신성학당이란 현판이 걸린 중문 위에는 녹슨 학교종이 하나 걸려 있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 건물의 나이는 교회 예배당보다 조금 더 오래 되었다고 하니 이 역시 100년이 훌쩍 넘은 건물인 것이다.

자천교회 설립자인 권헌중 장로의 소유였던 이 집은 일제 치하 어려운 시대에 교회를 섬기는 과정에서

가세가 많이 기울어 김경환 선생의 선대에 빚 대신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2007년에 고 김경한 선생이 교회에 기증한 것을 교회가 보수,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근대개화기의 전형적인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집은 약 600평의 대지 위에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ㄷ'자 가옥이었지만 'ㅁ'자 가옥으로 증축되어 안채, 사랑채, 좌.우 별채, 대문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제1학당은 3칸의 방과 각 1칸의 대청마루와 부엌, 그리고 넓은 툇마루 등 5칸으로 구성된 안채로서

현재는 소그룹 세미나, 성경공부, 각종 학습교실과 Church Stay를 위한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마당에 서서 들어온 곳을 바라보니 중문채에 역사자료실이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 창고로 쓰였던 곳을 개조하여 만들었다니 자천교회의 백여년 역사적 유물을 보관한 역사자료실치고는 너무나 소박하다.

 

 

 

 

자그마한 역사자료실 안에는 옛강대상과 주보를 제작했던 등사기, 권헌중 장로가 사용했던 한문성경을 비롯한 각종 옛 성경들과 성경공부 교재, 각종 유품, 강대상, 풍금, 돌화분과 자천교회의 역사를 알려주는 연혁, 사료 기록,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111년이 되는 교회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해 준다.

 

 

 

 

전시품 몇개를 소개해 드리자면 피아노가 없던 시절, 찬송가 반주를 담당했던 낡은 풍금이며......

 

 

 

 

1960년대에 사용했던 당회실 팻말과 강대상 종.....

 

 

 

 

여러가지 성경공부 교재도 전시되어 있다.

지금 쓰는 한글과는 너무나 다른 맞춤법이 눈에 들어오는데 <성경연구 삼백 문제>,<예수행적공부>라는 교재이다.

 

 

 

 

경동노회에서 주관했던 성경학교 수료 증서도 보인다. 1955년이니 벌써 60년이 다 된 수료증서이다.

 

 

 

 

권현중 장로가 1924년 당시 신명여학교에 다니고 있던 딸 권수기에게 쓴 친필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권수기는 신명여학교를 졸업(2회)하고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신명여학교에서 교사를 했다고 하는데

1924년 당시 대구시가 대구부(大邱府)였던 사실도 편지 봉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8년 상해에서 발간했다는 한문판 신구약성경은 권헌중 장로가 1914년에 구입해서 쓰던 성경이다.

 

 

 

 

컴퓨터 프린터는 물론 인쇄기도 가지기 힘들었던 시절, 주보를 인쇄하던 낡은 등사기도 한켠에 전시되어 있다.

 

 

 

 

역사자료실을 보고 중문을 나와 건물을 돌아가면 제2학당으로 쓰이는 4칸의 사랑채가 나온다. 

특별히 이곳은 영천시립도서관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사립문고인 <별빛문고>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데

소장 도서는 약3,000여권으로 교인들과 주민들을 위한 도서 대출, 그리고 방문객들을 위한 독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신성학당은 Church Stay, 한국 기독교 역사 교실, 독서 교실, 문화 체험 교실, 작은 음악회 증의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남신학대학교 영성훈련장과 전국 교회의 각종 수련회 및 소그룹 교육과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111년이 된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인 자천교회와 함께 돌아본 새별배움터 신성학당.

인근에 위치한 보현산 천문대를 둘러보고 돌아가시는 길에 자천리에 들러 한국 교회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자천교회와

지역과 교회의 미래 세대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신성학당까지 돌아본다면

아이들 체험학습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뜻있는 영천여행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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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나 사찰을 방문했을 때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꽃살문'이다. 

우리 문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현대 미술 작품에서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단순하고 때로는 화사한...그리고 따스한 정감이 묻어나오는 꽃살문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만큼 독특한 자랑스런 한국의 문화 유산이다. 

 

최순우 전 국립 중앙 박물관장은 이렇게 우리 문살 무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조선 목수들의 손으로 가누어진 한국 창살 무늬의 아름다움은 때때로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능가할 만큼 세련된 '면의 분할'을 적잖이 보여 주었다. 

한국의 창살무늬가 지니는 아름다움의 차원은 사뭇 눈맛의 후련함을 맛보게 해준다. 

은근하게 둥글고 알세라 모를세라 모를 죽이면서 후련한 분할을 즐기고 있다"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하나 하나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창호에 수놓은 아름다운 꽃 송이, 양산 통도사의 꽃살문을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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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에 사시는 친척이 정든 시골집을 버리고 이사를 간다고 한다.

30여년 살아온 시골집을 두고 왜 이사를 가는가 의아해 했더니

마을 전체에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마을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고 세워지게 되는 국가산업단지의 이름은  '포항 블루 밸리 사업'.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동해면, 장기면 일원 620(187만평)이르는 방대한 면적에 시행되는데

 9926억원을 투입해 의료·정밀·광학기기 등 부품 소재 산업을 유치해

19조원의 생산과 6만명의 고용창출효과를 목표로 하는 사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갑자기 떠나게 된 사람들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몇백평 안 되는 집과 땅들을 다 팔아서 도시로 떠나봐야 아파트 한채 제대로 살 수도 없고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봐도 딱히 할 일도 없는 형편이다.

 

 

 

 

친척이 이사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골집의 정취를 맛보기 위해

중산리로 들어가던 중 마을 어귀에 있는 중양서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서원 입구에는 '중양 서원 결코 매몰할 수 없을 것'이란 글귀의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설 부지 마련을 위해서 동해면 중산리 마을 전체가 매몰되는데

마을 가운데 위치한 중양서원도 똑 같이 매몰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220년 역사를 지닌 서원인데 원형 이전하지 않고 그냥 매몰시켜 버린다니......

 

 

 

 

마을 대책위에서  서원 매몰을 막기 위해 LH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를 방문했을 때

LH공사의 답변은 이랬다고 한다. "서원 매몰은 포항시의 생각이다.

성동리 광남서원을 제외시킬 때 중양서원에서는 뭐하고 있었노?

토지 보상 이외에는 어렵다"고 단호하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중양서원의 매몰은 이제 막을 수 없는 현실이 된걸까?

 

 

 

 

그동안 마을에 올때마다 스치고 지나기만 했을 뿐 한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던 중양서원.

매몰되기 전에 한번 살펴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 중양서원 입구로 들어서본다.

 

 

 

 

외삼문의 이름은 망월문이다. 조그만 서원이지만 의외로 단아한 모습이다.

 

 

 

 

닫힌 문틈으로 내부를 들여다보니 강당 위에 중양서원이라는 현판이 선명하다.

혹시나 하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삐걱~ 하고 문이 안으로 열린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중산리에 위치한 중양서원은

조선 초기 문신 남은(南隱) 서섭(徐涉)을 주벽으로 서시복, 서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794(정조 18년) 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창건한 서원은 현재 당성 서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 위패가 모셔진 서섭은 세종 때 벼슬에 올라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지냈다.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았으며 단종 때 사육신의 순절을 애통해하며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중산리에 살고 있던 달성 서씨 문중의 구심점과 같았던 중양서원.

국가 산업 단지가 들어서게 되면서 매몰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지방 문화재라지만 옛것을 원형 이전하지 않고 매몰시켜버린다면

이땅에 있는 조상들의 발자취는 다 사라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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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에서 사진 삭제 부탁드립니다.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되는 행동입니다. 


 

 7번 국도를 통해 영덕으로 가는 중에 장사해수욕장 부근을 지나던 길이었다.

장사해수욕장 서쪽 언덕에는 우리나라 3대 흉가로 알려진 영덕 흉가가 자리잡고 있어서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흉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곤 하는데......

 

그런데 흉가 앞을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는데도 집이 어딘지 모르게 변해있는게 눈에 뜨인다.

4년전 답사했을 때 흉가의 벽과 지붕 부분을 도색한 백색 페인트가 상당히 낡아 있었는데

언뜻 지나가며 보아도 붉은색으로 다시 칠한 것 같이 보여 예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흉가에 이제 누가 다시 살게 되었나? 아니면 새롭게 장사를 시작해 보려고 수리 중인건가?"

흉가 앞을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뭔가 모를 변화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는지라

영덕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런델 뭐하러 자꾸 가보려고 하냐?"는 동행의 만류를 뒤로 하고

달님팬션 옆 가파른 언덕길로 올라가 잡초가 우거진 흉가 앞 공터에 차를 세웠다.

 

 

납량특집을 방영할 한여름도 아닌데 흉흉한 사진들을 올려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뭔데~~!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여름도 아닌 한겨울에 이 으시시한 사진들은 도대체 뭐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나 한밤중에 혼자 이 글을 열어보시는 분, 노약자나 임산부, 심신 허약자께서는

더 이상 아래로 스크롤하지 마시고 포스트를 닫고 나가시는 것이 정신 건강을 위해 좋을 듯 합니다.

(이하 계속되는 글에는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사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0년 8월 24일 영덕 흉가의 외관, 벽이 다 갈리지고 창틀이나 문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충북 제천 늘봄 가든, 경북 경산 안경 공장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흉가>로 알려진 영덕 흉가는

1980년대에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짓고 횟집으로 영업을 시작했는데

잠자는 동안 집이 흔들리고 벽이 갈라지며 창문이 깨어지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을 뿐 아니라

횟집 여사장이 새벽에 2층에서 머리 풀고 내려오는 귀신을 보았다며 혼절한 이후

집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려 오랫동안 주인없이 버려져 있는 상태의 폐가이다.

그동안 흉가에는 무속인들이 간혹 살다 가기도 했다는데 이집에 살았던 어느 무속인의 말에 의하면

이 집을 떠도는 혼령은 만명이 넘고 자신은 그 혼령들과 늘 대화하며 같이 살았다고 전하기도......

 

필자가 2010년 8월 24일 영덕 흉가를 처음 찾았을 때의 흉가의 상태와

그때의 에피소드는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련 포스트 : 귀신의 집 소문난 영덕 흉가 가봤더니......

 


 

 

차를 세우고 흉가 안을 잠시 살펴보려고 하니 옆에 탄 동행이 좀체로 자리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잠시 돌아보고 사진만 몇장 찍고 올테니 차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 후 

휴대폰과 카메라만 챙겨들고 흉가 마당으로 들어서 본다.

 

그런데 4년전과는 외관이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예전에는 벽에 칠해진 하얀색 페인트가 오랜 세월로 인해 여기저기 갈라지고 상당히 흉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붉은 색의 페인트로 새롭게 도색이 되고 갈라지거나 부서진 부분도 새롭게 수리를 한 흔적이 보인다.

 


 

 

시멘트 벽돌로 뼈대만 남아 있던 화장실도 새롭게 붉은빛 타일을 붙이고 내부 공사까지 했는데 또 집이 버려졌다!

벽에는 '인간이 악귀', '귀신이다, 귀신', '영가(=영혼: 육체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실체)의 집'등......

흉가에 왔던 사람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갈겨 놓은 을씨년스런 낙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화장실 옆 본채의 창은 예전에는 문틀만 남아 있고 창이라고는 없이 텅 비어 있었는데

이중창을 끼우고 장식을 하는 등 새롭게 변화를 시도한 흔적이 보인다.

 

 

 

 

앞쪽 창도 시멘트 부분은 붉은색으로 도색하고 하얀 새시 창문을 다시 끼웠는데 유리창이 다 깨어져있는 상태이다.

 

 

 

 

메인 홀 출입문도 역시 다 깨어지고 옆에도 흉가 체험하러온 장난꾸러기들이 쓴 듯한 글씨가 난잡하게 갈겨져 있다.

 

 

 

 

마당 앞 수족관 옆에는 이집에 살던 사람이 썼음직안 그릇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어 궁금증을 더하게 한다.

 

 

 

 

방을 들여다 보니 너덜너덜한 도배지와 끈적끈적한 장판지, 으스스한 달마도, 곰팡이로 도배 되었던 방도

도배를 새로 하고 장판을 새로 깔았지만 다시 버려져 사람이 살지 않는 방으로 되어 버렸다.

 


 

 

횟집이던 흉가의 주방도 다시 수리되고 새로운 찬장이 놓여졌지만

주방 또한 그릇은 다 내동댕이쳐지고 양념병 몇개만 남아 뒹굴고 있는 형편이다.
 


 

 

주방과 계단 사이의 방에는 아직 새것인 모기장 텐트가 펴져 있고 여러가지 물건이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다.

 물건의 상태를 자세히 보니 이집에 살던 사람이 다시 집을 버리고 떠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듯 보인다.

 

 

 

 

부황 뜨는 도구가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이곳에 와서 잠시 살던 사람은 몸이 많이 아팠던 것일까?

 아니면 귀신의 힘을 빌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던 사람이었을까? 

 

 

 

 

새로 이집에 와서 살던 사람은 왜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황망히 이집을 떠났을까?

갑자기 큰 일이 생겼거나......아니면 정말로 귀신을 만나고 식겁해서 이집을 버리고 도망가 버린걸까?  

흐트러진 옷가지들은 이집에 살던 사람들이 집을 떠났을 때 정말 정신없이 나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흉가의 큰 홀을 들여다 보니 무속인들이 불상들을 올려 놓는 제단같은 것이 눈에 뜨린다.

이전에는 바로 아래에 보여드리는 사진처럼 부서지고 삐꺽거리는 계단이 뼈대처럼 보이던 섬뜩한 곳이었는데

베니어판으로 계단실을 막고 하나의 독립된 방으로 만들어 무속 행위를 행했던가 보다.


 

2010.8.24 영덕 흉가 계단의 모습. 디디면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계단이 대박이었다. 


2010.8.24 영덕 흉가. 제일 큰 방에서 주방 쪽으로 본 상황 

 


 

 

계단 옆 방을 나와 2층으로 난 계단 아래에 서니 뭔가 모를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2010.8.24 영덕 흉가 계단. 설정샷입니당.....



바로 이 계단에서 새벽에 머리 푼 여자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여사장이 혼절을 했다지....

 


 

 

 

2층의 상황은 4년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새롭게 수리를 한 사람들이 2층까지 수리할 여력이 없었던가 보다.

 

 


 

 

방의 도배지는 이제 다 벗겨지고 콘크리트 벽만이 앙상하게 남았다.

 

 

 

 

흉가의 어수선한 창으로도 어김없이 따스한 햇살이 들어온다.

사람들은 정말 귀신을 보았기 때문에 이집을 버려두고 떠나 버린 것일까?

 

 

 

 

2층 베란다에서 아래 마당을 내려다 보니 처음 횟집일 때 지어졌던 수족관은 이제 지붕마져 다 무너져 버렸고

 


 

 

처음에는 그럴 듯 했을 베니어판 벽도 풍파와 빗물로 인해 삭아서 들떠 펄럭거린다.

 

 


 

 

2층을 다 돌아보았으니 계단을 따라내려가 건물 뒤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2층의 상황을 보니 뒷채도 예전과 거의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하면서......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건물의 외관과 앞부분은 어느정도 수리가 되어 있었지만

뒷채는 예전보다 더 심해진 채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벽은 반 이상 그을린 채로 방치되어 있고

 


 

 

천정을 마감했던 마감재는 다 삭아 너덜거리며 떨어져 내려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상태이다.

 


 

 

4년전에 봤을 때 부서진 채로 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문틀은 방향도 바뀌지 않은채 아직 그대로 누워 있다.

붉은 페인트가 으스스하게 묻어 섬칫하게 보이던 베니어판이 삭아서 형체가 없어졌고 다만 문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본채에 들어와서 전체적인 수리를 했던 사람은 별채 방은 손도 대지 않은채로 살다가 떠났나 보다.


 

 

 

 영덕 흉가에서 가장 소름끼친다는 지하실은 제일 마지막으로 살펴 보았다.

 들어서면 모두가 가슴이 억눌리는 듯한 느낌과 뒷목을 잡아 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지하실.

간덩이 부었다고 자부하던 필자도 "살려줘!"라고 써놓은 이곳에 들어서다가 

입구에 놓인 썩어버린 소파를 딛자말자 발이 푹! 꺼지는 통에 "엄마야! 라고 소리를 질렀던 곳이다.

 

이번에는 혼자인지라 지하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 하고 밖에서 자세히 살펴 보니

창으로 들어와 자라던 덩쿨은 그대로 말라버리고 입구의 '살려줘!'라는 글귀는 붉은 페인트로 지워져 있다.

안으로 목을 쑥 빼서 지하실 안을 보니 흥건하게 고여있던 썩은 물은 이제는 말라버린 듯 보이지 않는다. 

이 지하실은 군인과 사랑을 나누다 임신한 아가씨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서 자살했다는 얘기도 들려오지만......믿거나 말거나......

 

지하실 내부가 궁금하신 분은   관련 포스트 : 귀신의 집 소문난 영덕 흉가 가봤더니......


 

 

 

30여년이 넘게 비어 있어 귀신이 나온다는 흉흉한 소문과 함께 <대한민국 3대 흉가>로 소문난 영덕흉가.

버려졌던 흉가에서 다시 살아보려고 새롭게 창문을 끼우고 도색을 하고 도배를 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방에 차려진 제단으로 보아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사람 역시 무속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을 해 본다.

 

하지만 많은 돈을 들여 흉가를 수리했던 그 사람도 결국은 이곳을 버리고 떠나 다시 폐가가 되고 말았다.

이곳에 들어와 살던 모든 사람을 떠나게 한 것은 과연 귀신이었을까?

귀신을 제압하겠다고 흉가에 들어와 살던 무속인들은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버린 것일까?

아니면 새롭게 개척한 무속 사업이 뜻대로 안 되었기에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이 아닐까?

여러가지 경우를 다 생각해 보았지만...... 궁금증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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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블로거의 포스트를 통해 최근에야 개방된 아름다운 수원지가 양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리에 위치한 <법기수원지>.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서 1932년까지 5년여에 걸쳐 만들어진 이 수원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 없다가

201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방되어 80년간 감추어졌던 수원지의 비경을 비로소 드러내게 되었다고 한다.

양산IC에서 빠져나와 양산대학 교차로를 거쳐 양산시 동면 법기리에 위치한 법기수원지 입구에 이르니

수원지 안에는 전혀 주차시설이 없으니 입구 도로 한쪽에다 차를 주차하라는 안내문이 나온다.

아직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지 주말인데도 그다지 차량이 많지 않아 비교적 수월하게 차를 주차할 수 있었다.

 

 

 

 

수원지 입구에 들어서니 아름드리 히말라야시다 나무와 함께 하늘을 찌를 듯한 편백나무 숲들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들어서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압도하는 쭉쭉 뻗은 나무들.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수림지 내 나무는 7종에 총 644그루라고 하는데 그중 59그루의 히말라야시다와 편백나무 644그루가 가히 압권이다.

 

 

 

 

좌우로 사열하듯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들은 모두가 수원지 조성 당시에 심겨진 나무들로

수령이 거의 80년 ~ 130년 정도라는데 대부분 아주 잘 자랐다.

 

 

 

 

편백나무숲 끝부분에는 별장처럼 아름다운 집이 한채 서 있어 가까이 가 보니 화장실이다.

예전에는 직원들의 관사로 쓰였던 집이었지만 지금은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화장실로 개조했다고 한다.

 

 

 

 

편백나무 숲 사이로 드리우는 오후의 나무 그림자가 너무 따스해보여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속 숲에 머무르며

나무로부터 뿜어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음껏 들어마시니 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듯 하다.

 

 

 

 

편백나무숲 옆에 다른 나무가 일열로 심겨져 있기에 자세히 보니 추자(호두)나무이다.

편백나무와 추자나무 아래에는 예쁜 모양의 벤치도 많이 놓여 있어 

지친 다리도 쉬어가고 도란도란 얘기도 나눌 수 있어 너무 좋다.

 

 

 

 

댐은 편백나무숲 옆에 자리잡고 있는데 총 길이 260m에 높이 21m로 흙을 쌓아 만들어진 댐이다.  

지금으로부터 86년전인 1927년 12월 20일자 동아일보에는 양산 법기리 상수원지 기공식 소식과 함께

수몰지 주민의 이주대책과 생계 문제를 거론한 기사가 크게 실리기도 한 것을 보아

그 때에도 이 수원지 댐 공사가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댐 아래에 서서 위로 서서 보니 계단이 까마득하다.

중앙에서 댐마루를 향해 사선으로 가로질러 놓여 있는 '하늘 계단'은 총 124계단!

80년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댐에 거슬리지 않게 겸손한 모습으로 방문자를 맞이하고 있다.

 

 

 

 

하늘계단을 오르다 멈춰 댐 마루를 올려다보니 그림같은 반송들이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댐마루에 올라 아래를 보니 댐마루 아래 숲들이 한눈에 펼쳐져 보인다.

 

 

 

 

활엽수가 별로 없어 단풍 구경은 별로이지만 풀 한포기에서도 가을 느낌이 난다.

 

 

 

 

댐마루에 오르니 수원지의 물보다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댐마루 여기저기에 서 있는 법기반송들이다.

 

 

 

 

반송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땅에서부터 '여러 갈래의 줄기로 갈라져 쟁반처럼 자란다'하여

'소반(쟁반) 盤'을 사용하여 '반송(盤松)'이라고 한다.

 

 

 

 

법기수원지 둑마루에는 7그루의 반송이 있는데 호수와 어우러져 그 자태가 일품이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수원지댐 건설 당시(1927~1932)에 옮겨 심어 수령은 약 130년이다.

이 반송을 옮겨심을 당시 벌써 나무의 수령이 50년 이상 되어서 어른 20명이 목도하여 댐 위로 옮겨심었다고 전한다.

 

 

 

 

구불구불 너무나 잘 자란 반송들은 그 가지를 옆으로 마음껏 뻗고 있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갈 때는 머리를 숙여서 가지 아래로 지나야 하는데 그것 또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반송 앞으로 펼쳐지는 수원지는 폭은 그다지 넓어보이지 않는데 건너편 산들과 어울려 너무 고즈녁하다.

 

 

 

 

맑디맑은 호숫물에는 건너편 산들이 그대로 담겨 있어 은빛 물결과 함께 가을산들이 미소짓는 듯 하다.

 

 

 

 

 

 

 

수원지 호수 우측면에 연하늘색 탑 하나가 서 있어 다가가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취수탑이다. 이 취수탑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 된 탑이라고 한다.

 

 

 

 

약간은 아쉬움이 남지만 법기수원지의 관람 코스는 여기까지가 끝이다.

전체 680만 평방미터 중에서 댐과 수림지 2만 평방미터에 한하여 전격적으로 개방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구역은 수원지 보호를 위해 개방이 제한되었다고 한다.

수원지가 비록 일제의 주도하에 건설되었지만 실제 댐 건설의 주역은 강제 동원되었던 우리의 선조들이다.

근현대의 격랑 속에서 우리와 함께 온갖 풍상을 함께 겪어온 근대 문화 유산이니 잘 보존되어야 할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히말랴야시다도 편백나무숲도 아름답지만 뭐니뭐니해도 법기수원지의 아름다움은

댐마루의 반송과 호수가 어우러져 그려내는 그림같은 풍경이다.

거기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호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힐링되는 장소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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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광 공사는 '가끔 혼자이고 싶어라, 훌쩍 떠나는 힐링 여행'이라는 테마 아래

가볼만한 곳으로 포천 허브 아일랜드, 공주 고나마루와 공산성, 동해시 논골담길을 선정했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의 선창가 달동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적하고 있는 논골담길(묵호진동)은

오징어, 명태가 많이 잡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이 지어졌던 마을이다.

한때는 개들도 만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만큼 북적대던 곳이지만

이후 어획량이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자 가난하던 마을은 더 썰렁해졌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던 잿빛마을이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10년.

잊혀진 묵호를 재발견하자는 취지로 마을 길과 담벼락에 묵호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지면서부터 소문을 들은 외지인들이 하나 둘 이곳을 찾게 되었다.

한때 잊혀져가는 마을이 벽화마을로 조성된 예는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이곳 논골담길 벽화는 이곳 사람들이 살던 이야기를 마을사람들이 그렸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끈다.

 

한두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 양쪽으로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을 얹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논골담길을 숨을 헐떡이며 걸어 오르다가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보면 눈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묵호항구의 모습도 멋진 볼거리이다.

벽에 그려진 그림 하나 하나, 길가에 피어 있는 앉은뱅이꽃들도 살펴가며 골목길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그림에 녹아든 묵호등대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듯 하다.

 

논골1길과 3길, 등대오름길.....어느쪽으로 올라가도 끝은 언덕 위의 묵호등대에 이르게 되는데

오늘은 논골1길을 통하여 묵호 등대가 있는 언덕까지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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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최순우 박사는 그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서두에서

삼척에 갔을 때 죽서루를 보고나서 새삼 유열에 잠긴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마치 병풍처럼 둘러선 푸르른 단애 위에 날아갈 듯 자리잡은 정자인 죽서루의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누대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덤벙주초의 희한한 조화미에 그 마음이 흥겹기까지 했다고 격찬하고 있는데......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을 즐기는 우리의 옛선비들의 풍류를 가장 잘 드러낸 곳.

관동팔경의 하나이자 보물 제213호로 지정된 삼척 제일의 자랑거리 죽서루(竹西樓)에 올라보기로 한다.

 

 

 

 

강원도 삼척시 임영로에 위치한 누각 죽서루. 입구에 들어서니 입장료도 무료인지라 더욱 감사하다.

 

 

 

 

정자의 규모가 꽤나 장대하다. 

정면 7칸, 측면 2칸이니 무려 14칸 규모의 2층 정자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다.

 

 

 

 

정자 바로 아래 이르러 보니 누각을 받치는 17개의 기둥의 길이가 하나도 똑 같은게 없이 모두 제각각이다.

절벽 위 일정하지 않는 바닥을 그대로 살려 기둥의 일부는 주춧돌 위에 놓고 일부는 천연의 바위 위에 그대로 놓았다.

 

 

 

 

생긴 그대로의 절벽, 바위 둔덕 위에 울멍진 높고 낮은 자연암석들을 적당히 의지해서 주초로 삼고

불가피한 곳에만 자연석을 옮겨놓고 기둥 길이를 여기에 맞추어 길게 짧게 마름질한 것을 '덤벙주초'라고 하는데

집터가 가지런하지 않으면 불도저로 밀거나 깎아서 반듯하게 만들고야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서양식 건축 방법과는 달리

우리의 덤벙주초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깊은 외경에서 우러난 멋진 조형 예술임이 분명하다.

 

 

 

 

자연의 암석을 계단 삼아 이리저리 디디며 오르니 정자 옆은 온통 너른 암반이다.

 

 

 

 

크고 작은 자연 암반 위에 짧고 긴 기둥들을 놓고 그 위에 멋스럽게 들어앉힌 2층 누각.

살포시 들어올린 처마와 함께 모든 것이 원래부터 있었던양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후 따가운 햇살도 거뜬히 막아주는 너른 정자 마루는 한여름 더위에도 옷자락 속으로 시원한 바람을 선사한다.

당일여행 중이 아니라면 한참을 머무르며 기둥에 기대앉아 잠시 낮잠이라도 청해보고 싶은 곳이다.

 

 

 

 

정자 난간 아래는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강물이 보인다.

나무들이 없으면 시원하게 경관을 조망할 수 있을텐데 역시 베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어 누각의 일부가 되었다. 

 

 

 

 

반대편에서 죽서루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정문을 나와 건너편 삼척동굴엑스포 주자장으로 향했다.

주차장 옆에 위치한 조그만 정자 위에 오르니 푸른 강물을 안고 절벽 위에 서 있는 죽서루의 풍광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삼척 시내를 휘감고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인 오십천 위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죽서루.

호탕한 자연 풍광 속에 화룡점정하듯 멋지게 들어앉은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우거진 나무들로 인해 누각의 전체 모습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쉽다.

누각 앞을 가로막고 자라는 나무 몇 그루만 베어내면 누각의 전체 모습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누각 위에서 보는 전경도 훨씬 시원할텐데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자연 암석들을 들어내거나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둔채로 주초를 세워 

자연과 건축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우리네 선조들의 자연사랑과 그 맥이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보일 듯 말 듯 드러나지 않는 우아한 수줍음이 때로는 다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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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날 아침, 문득 차를 몰고 봉화로 향했다.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주에서 출발, 탁 트인 7번 국도를 시원하게 달리다가 영해면에서 영양으로 가는 918번 지방도로 들어서니

간간히 오고 가는 몇대의 차가 눈에 뜨일 뿐 오고 가는 길이 너무나 한가롭다.

2차선으로 된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숨가쁜 고개를 넘어서니 드디어 봉화읍이다. 

 

읍내라고 하지만 내려쬐는 뙤약볕 아래 지나가는 행인조차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시장 앞 거리.

기웃기웃 요기할 곳을 찾다 식당 하나를 발견하고 문을 밀고 들어섰다. 식당 안 역시 한산하다.

식사를 시켜놓고 봉화읍 지도를 펴 살펴보고 있으려니 친절한 주인이 어디를 가보실 예정이냐고 묻는다.

워낭소리 할아버지댁을 가보려 한다고 하니 주인이 난색을 표하며

"거기 가 봤자 별로 볼 것도 없을텐데요. 그 할배 지금 집에도 없고 병원에 계시는데 오늘 내일..... 한다던데요?"한다.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3시간 반이나 차를 몰아 봉화까지 온 것은 단지 최원균 할아버지를 만나보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현재 병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집에는 아무도 없다니......

음료수라도 한통 사 들고 찾아가서 영화 정말 감동적으로 보았다고 인사라도 드리고 근황을 살피고 오려고 했는데......

안 계신다니 발걸음을 돌려야 하나.....생각하다가 그래도 영화에 나왔던 집이라도 먼발치에서 한번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원래 계획대로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란 네비 아가씨의 목소리를 듣고 주변을 살펴보니

<워낭소리 주연 최원균, 이삼순 부부의 집 200m>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상 최대인 300만의 관객을 모은 영화 '워낭소리' 주촬영지인 이곳. 봉화군에서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다.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명소가 되어 버린 할아버지의 집 앞은 워낭소리공원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워낭소리공원은 영화 장면을 담은 포토월이 반원 형태로 둘러져 있고

공원 가운데에는 할아버지와 늙은소 누렁이의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포토월에는 영화의 스틸 사진과 함께 영화 '워낭소리'를 보지 않은 분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까지 곁들여져 있다.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들이야 "아이구....번듯하게 잘 해놨네.."하고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워낭소리 영화의 여운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부분이다.

 

 

 

 

 

 

 

다리가 불편하신 최원균할아버지는 항상 늙은소 누렁이가 끄는 달구지를 자가용으로 타고 다녔는데

달구지 조형물에 앉으신 할아버지는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이 흥겨운지 흐뭇한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이다.

 

 

 

 

워낭소리공원을 뒤로 하고 할아버지댁으로 가기 위해 약간 경사진 언덕으로 올라가본다.

누렁이가 할아버지를 태운 달구지를 힘겹게 끌고 올라가던 장면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집 입구 길에는 이렇게 워낭소리 영화 이후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장승들도 눈에 뜨인다.

영화 촬영지를 관광지로 만들기 위한 지자체의 노력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나 보인다.

 

 

 

 

그런데 집앞에 이르니 영화에는 안 보이던 녹색 철문이 새로 생겼다. 영화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철문에는 '부모님 건강상 이유로 집을 당분간 개방 못 함.이라는 팻말이 붙여져 있다.

식당 주인의 말대로 할아버지께서 정말 많이 편찮으신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문 앞에 서서 철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집 내부는 영화에 나왔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집안에 늙은소 누렁이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장승도 세워져 있는 등 집의 모습이 많이 변했다.

영화 성공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니 여기도 관광객을 위한 포토존으로 변모시켜 버린 것일까?

 

 

 

 

질퍽하고 어수선하던 마당은 번듯하게 포장이 되고 사시던 집도 일부 보수를 한 듯한 모습이다.

 

 

 

 

철문 앞을 떠나 경사진 길로 내려오니 눈에 많이 익은 나무가 앞에 서 있다.

누렁이가 죽은 후 할아버지께서 누렁이와 항상 함께 하던 워낭을 들고 앉아 허탈하게 들판만 바라 보던 바로 그  나무이다.

 

 

 

 

주변의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죽은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는 영화에 나오던 모습 그대로여서 마음을 짠하게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 집 앞 밭의 꼴이 말이 아니다. 수백평에 이르는 밭 전체가 수박밭인데 수박이 모두 말라죽어가고 있다.

 

 

 

 

따지도 않은 수천개의 수박은 가지에 달린채로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고 있고 한곳에는 깨지고 터진 수박들이 썩어가고 있는 중이다. 

올여름 남부지방을 강타한 최악의 가뭄으로 수박들이 다 말라죽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수박을 가꾸던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쓰러져 입원하셨기 때문에 돌볼 사람이 없어 폐기된 것일까?

잘 자라던 수천개의 수박이 전부 내동댕이쳐져 썩어가는 모습은 할아버지의 병환 소식 만큼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할아버지댁을 나와 워낭소리공원에서 6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누렁이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포크레인으로 파서 매장한 후 둥그렇게 봉분을 해놓았던 누렁이의 무덤은 기념비와 함께 꽃밭처럼 단장되어 있었다. 

 

 

 

 

'누렁이(1967~2008)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노인이 30년을 부려온 소.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이 소의 나이는 무려 40살까지 살다 갔다.

소와 인간의 교감과 진심이 빚어낸 울림은삶의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었던 소, 누렁이 여기에 잠들다.'

 

 

얼마전까지도 시간만 나면 누렁이의 무덤 앞에서 한참이나 앉아 있다 갔다는 최원균 할아버지.

"이 소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거여...."하던 할아버지는 이제 그토록 사랑하던 누렁이를 따라 갈 준비가 되신걸까?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나도 모르게 먼산을 바라보았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종이던 최원균 할아버지께서

2013년 10월 1일 향년 85세로 임종하셨습니다.

고인의 빈소는 봉화해성병원 장례식장이고 발인은 10월 4일 오전 9시입니다.

할아버지는 본인의 뜻에 따라 먼저 간 누렁이의 곁에 나란히 묻힌다고 하는데

누렁이는 별세 3일전 9월 28일 워낭소리 공원 묘지로 이장되었습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삼순 씨(82)와 9남매가 있습니다.

 

비록 할아버지는 영면에 드셨지만 워낭소리 영화와 함께

최원균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할아버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 입니다.

사랑하던 누렁이와 함께.....

삼가 최원균 할아버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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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북 안동 하회마을.

하회마을을 안 가보신 분은 별로 없을 정도로 이곳은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 하는 곳이다.

 

하회마을을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돌아보다가 마을 끝부분에 위치한 솔숲에 이르면

낙동강 건너편에 깎아지른 듯 서 있는 절벽인 부용대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부용대의 위용에 취해 한참을 바라보다 보면 부용대 양쪽 숲속에 날아갈 듯 들어앉은 고택들이 눈에 들어온다.

부용대 왼쪽에 있는 고택은 겸암정사, 오른쪽에 있는 고택은 옥연정사와 화천서원인데

오늘은 부용대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를 잠시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옥연정사를 방문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번째 방법은 하회마을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한 방법은 하회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풍천면 사무소 맞은편으로 난 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안동 풍천면사무소를 지나 광덕교를 건너 바로 좌회전하여 좁은 길로 약500m 정도 가면 된다.

주차장 바로 앞에 있는 류성룡 선생의 형님 류운용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화천서원을 지나 

강변을 따라 약 100m를 걸어서 들어가면 옥연정사에 이르게 된다.

 

 

 

 

하회마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는 코스를 택하면 옥연정사의 왼쪽으로 난 문인 간죽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간죽문(看竹門). 대나무를 보는 문이라니...... 참으로 낭만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간죽문을 통하여 옥연정사의 마당에 들어서니 담장 아래 하얗게 핀 옥잠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꽃봉오리 모양이 마치 비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옥잠화는 향기가 좋아 향수의 원료로도 쓰인다고 하는데

이런 고택의 담장과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꽃이다.

 

 

 

 

옥연정사(玉淵精舍)는 실학의 대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난 서애 류성룡 선생이 거처하던 가옥이다

대가족의 살림과 사당이 있는 종택과는 달리 서애 선생의 학문과 만남의 독립 공간인 옥연정사는 

1576(선조9)에 건축을 시작하였는데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이란 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을 맡고 재력을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여 10년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집은 대문채와 함께 각각 안채(완심재), 별당(원락재), 사랑채(세심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안채인 완심재는 서애선생을 위해 10년 시주로 이곳을 지어준 탄홍스임이 기거하시던 공간으로

현재는 옥연정사지기 김상철씨 가족들이 기거하고 있다.

 

 

 

 

 

별당채인 원락재는 큰 방 1개와 마루로 이루어진 독채인데 이곳에 서애 선생이 주로 기거하셨다고 한다.

 

 

 

 

밖에서 보면 두개의 방으로 보이는 원락재는 문을 열고 보면 두칸 규모의 방 하나인데 

방 안에는 족자 두개와 이불을 얹을 수 있는 선반만 걸려 있을 뿐 아주 단촐하다.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 집의 이름을 원락재(遠樂齋)라 하였는데

이것은 논어 중에서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 옥연정사는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원락재와 세심재를 오픈하고 있는데

세심재 한칸의 대여료는 2인 기준 12만원이고 서애 선생이 직접 기거하셨던 원락재 방한칸의 대여료는 2인 기준 20만원이라고 한다.

고택체험료가 다소 높은 가격이긴 하지만 서애 류성룡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원락재에서의 하룻밤은

여느 고택에서 묵는 하룻밤과는 비교가 안 되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하물며 담장 너머로 구비구비 흐르는 낙동강과 하회마을이 펼쳐지는 이곳 옥연정사에서의 하룻밤이라면.....

 

1605(선조38) 낙동강에 대홍수가 일어나 하회마을에 있던 살림집을 잃게 되자 

이 방에서 은거하며 임진난을 회고하여 '징비록(국보 132호, 2010년 8월 1일 세계문화유산 등재)'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징비록'의 '징비'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인데 이책은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기록한 책으로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의 중요한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책이다. (대한민국 중요민속자료 88. 국보 132호)

 

 

 

 

원락재 왼쪽에 위치한 서당채의 이름은 세심재(洗心齋)이니 마음을 닦고 씻는다는 뜻이다.

 

 

 

 

 세심재는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으며 서애 선생께서는 이곳을 서당으로 쓰시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마당 담장 옆에는 분재와 같이 구불구불하게 자란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서애 선생이 심으신 나무라고 하니 그 수령이 무려 400년이 넘은 나무이다.

  

 

옥연정사에 가면 언제나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옥연정사지기 김상철씨를 만날 수 있다.

충효당(서애선생의 종택) 종손 어른의 허락으로 421년만에 옥연정사의 문을 활짝 열고

징비록의 역사의 현장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한 김상철씨의 이야기는 인간극장 등 각종 매체에서 만날 수 있다.

 

 

 

 

강 건너편 하회마을은 수많은 관광객으로 항상 북적이지만 이곳 옥연정사는 언제나 조용하다.

마을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외로움을 즐기고 싶었던 것일까?

서애 선생은 호를 서애(西厓:서쪽 벼랑)로 짓고 배를 타고 가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집을 지었다.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고 임진왜란을 어렵게 치룬 서애 선생의 삶과 생각을 함께 할 수 있는 옥연정사.

조용한 우리 가족만의 휴가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최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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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이 당일 여행으로 삼척으로 해양레일바이크를 타러 가자고 한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는 살짝 멘붕이 왔다. 뭐? 더운 여름날에 레일바이크를 타러 간다고......?

35도를 육박하는 살인적인 무더위에 바이크 페달 밟다 쓰러질 일이 있나.......도대체 누가 이따위 계획을 추진한거야!

살짝 빠질까 하는 생각도 났었지만 그래도 함께 떠나는 여행인데 싶어 마지못해 삼척으로 떠나는 차에 몸을 실었다.

 

 

 

 

경주에서 떠나 7번 국도를 따라 3시간 정도 달리니 강원도 땅이다.

해양레일바이크의 남쪽 기점이 되는 정거장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용화정거장.

구름 한점 없는 파아란 하늘 아래 서 있는 용화 레일바이크정거장 건물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크고 깔끔해보인다.

 

 

 

 

삼척해양레일바이크는 용화역 → 궁촌역, 궁촌역 → 용화역 까지의 5.4km의 운행 구간인데

용화역에서 출발하여 궁촌역까지 바이크를 타고 가면 그자리에서 다시 바이크를 타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고 편도운행이란다.

다시 바이크를 타고 왕복 10여km를 페달을 밟는 것은 무리이므로 돌아올 때는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온다고 한다.

운행 요금은 2인승이 20,000원, 4인승이 30,000원인데 10인 이상은 단체할인이 된다.(주말에는 단체할인이 안 된다고......)

레일바이크 운행은 1일 5회 정도인데 운행 시간은 삼척해양레일바이크 홈페이지를 이용하시기 바라며......

http://www.oceanrailbike.com/web/10383/site/contents/ko/c1/sub02.jsp

 

 

 

 

12시 30분에 출발하는 표를 예매하고 나니 출발 시각까지는 다소 많은 시간이 남아 점심도 먹고 바로 앞 해변 구경도 나섰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아래 해변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한낮이다.

이렇게 더운 날에 어떻게 1시간 동안 페달을 밟으며 바이크를 타지? 그냥 시원한 차 안에서 놀다왔으면 하는 마음이 앞선다. 

 

출발 시각이 되어 용화역 대합실로 오니 와.....바이크를 타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양레일바이크를 즐기러 왔던 말인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니 레일바이크들이 줄을 선 정거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열병식을 하듯 늘어선 레일바이크에 차례로 올라타니 약간은 두근두근해진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여 직원들이 일일이 안전바를 내려주고 브레이크 사용법을 알려주는 등 안전을 체크해준다.

한여름 뙤약볕에 레일바이크를 타면 피부가  새카맣게 그을리지 않을까 약간의 걱정이 앞서기도 했는데

레일바이크 천정 위에 설치된 플라스틱 캐노피가 햇볕을 어느 정도 차단해줄거라고 생각하니 약간은 안심이 된다.

 

 

 

 

자! 이제 출발이다. 처음에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레일에 연결된 자동동력장치로 인해바이크가  저절로 앞으로 굴러간다.

페달에 발을 얹고 힘을 주어 밟아보니 오! 뭔가 짜릿함이 다리로 전해진다. 이거......제법 재미있는데?

 

 

 

 

줄지어섰던 바이크들이 하나 둘 출발하여 조금 가니 이내 양옆으로 해송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이 나타난다.  

여름날에 힘들여 페달을 밟으면 땀이 흐르고 엄청 더울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덥지 않고 상당히 시원하다.

양쪽으로 우거진 해송들이군데군데 그늘을 만들어 주니 덥지 않고 바닷바람마져 솔솔 불어오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진다.

 

 

 

 

조금 가다하니 레일 옆으로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형이 나타난다.

툭 튀어나온 인형의 눈은 카메라. 바로 기념사진을 찍는 인형이다.

너도 나도 인형 앞을 지나갈 때는 하트를 그리거나 브이를 그리며 기념촬영을 한다.

이때 촬영된 사진은 종착역인 궁촌역에 가서 찾을 수 있다.

 

 

 

 

해양레일바이크가 운행되는 레일 옆으로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바다가 계속 펼쳐진다.

하얀 모래가 곱고 부드러운 용화해수욕장. 봐도 봐도 싫지 않는 아름다운 바닷길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 페달을 밟다하니 산이 레일을 가로막고 연이어 터널이 앞으로 나타난다.

 

 

 

 

'축제(Festival)'가 주제인 용화터널의 길이는 310m이다.

 

 

 

 

터널로 들어서니 사람들의 입에서 "아! 시원하다!"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페달을 밟아 오느라 등에 살짝 어린 땀이 일시에 식고 터널의 서늘한 기운이 옷깃을 스친다.

 

 

 

 

컴컴한 터널 안이 단조로울까봐 신비로운 느낌의 음악과 함께 레이져쇼가 연이어 펼쳐진다.

눈이 심심하지 않아 좋고 무엇보다 너무 너무 시원한 것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용화터널을 지나자마자 금방 초곡1 터널이 나타난다. 초곡2터널의 주제는 '신비'이다.

터널의 길이가 무려  1,014m이라니 첫번째 용화터널의 3배가 넘는 길이이다.

 

 

 

 

초곡1터널도 들어서자 마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들어서자마자 모두의 입에서 "어! 시원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래서 여름엔 동굴이나 터널을 찾는거로구나. 에어컨은 완전 저리가라 할 정도이다.

 가다보면 살짝 추위마져 느껴질 정도니 이 더운 여름날에 최고의 피서지가 아닐 수 없다.

 

 

 

 

초곡2터널은 신비한 루미나리에가 특징이다. 환상적인 조명에다 어울리는 노래까지 함께 나온다.

자세히 들어보니 록그룹 스틸하트의 'She's Gone'이다. 음악조차 한여름 레일바이크여행에 환상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터널이 끝나고 환한 햇살이 보이기 시작하니 아쉬움에 "아~~!"하는 탄식이 튀어나온다.

시원하기 그지없는 터널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으면 좋겠는데......^^ 

 

 

 

 

터널을 모두 지나면 또 이렇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가 펼펴지고

 

 

 

 

얖옆으로 해송이 늘어선 운치있는 길도 여유롭게 지나게 된다.

 

 

 

 

페달을 밟느라 거의 지칠 때 쯤이면 나타나는 휴게소.

약 10분 정도 정차하며 볼일도 보고 음료수도 마시고 한숨 돌리며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도 찍을 수 있어좋다.

 

 

 

 

레일바이크 휴게소에서 보이는 동해바다는 푸르르다 못해 눈이 시리다.

 서해도 좋고 남해도 물론 좋지만 바다는 역시 동해란걸 다시 한번 실감나게 해준다.

 

 

 

 

휴게소에서 잠시 쉰 레일바이크는 다시 마지막 도착지인 궁촌역을 향하여 운행을 시작한다.

궁촌역에 다다를 때 쯤이면 지친 다리를 쉬게 하기 위해 자동운행이 시작되어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궁촌역에 도착하면 2~2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다시 출발장소로 돌아올 수 있다.

 

처음으로 타본 삼척해양레일바이크. 처음 올 때는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았다.

기대를 가지기는 커녕 동료들에게 끌려 마지못해 왔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할 것 같다.

하지만 바이크에 올라앉아 힘차게 페달을 밟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한시간은 너무나 신나는 시간이었다.

거기다 무더운 여름날엔 시원한 터널에서 둥줄기가 서늘해지는 체험까지 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역동적인 체험을 원하는 가족 여행자들에게 후회없는 선택으로 추천하고 싶은 삼척해양레일바이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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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타는 듯이 찌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중부지방은 지리하게 계속되던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계속된다고 말하지만

남부지방 사람들은 '장마가 언제 왔었다고 끝나냐?' 하고 짜증을 내곤 한다.

예년에야 남부지방에서 장마가 시작하여 중부지방으로 이어졌겠지만

올해 남부지방에는 장마는 커녕 비다운 비조차 별로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차례 소나기라도 내리그어주면 달아오른 대지가 조금이라도 식겠는데

비도 오지 않으니 저녁이 되고 새벽이 되어도 한낮처럼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된다.

이럴때야 에어컨 시원하게 틀어놓은 실내가 가장 시원하겠지만

전력대란으로 인해 요즘은 어디를 가도 시원한데가 별로 없다.

하루종일 계속되는 무더위를 가라앉히고 함께 오른 체온을 식히기 위해서는 계곡 피서가 최고.

경북 봉화 닭실마을에 위치한 석천계곡으로 피서 여행을 떠나본다.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4대 길지 중 하나라고 극찬했던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닭실마을 주차장에다 차를 세워놓고 봉화읍내 방면으로 흘러가는 내성천 물길을 따라 좁은 농로를 걸어가본다.

타는 듯한 햇볕을 한손으로 가리고 좀 걸어가다보면 짙은 숲의 터널이 나오니 한결 걷기가 좋아진다.

 

 

 

 

숲길을 조금 걸어가니 이내 툭 터지듯 나타나는 시원한 계곡. 물소리만 들어도 시원함이 등줄기의 땀을 식게 한다.

 

 

 

 

계곡 바로 옆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를 미리 독점해버린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부러워진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석천정사와 그 아래 펼쳐지는 석천계곡. 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게곡 건너편으로 가서 석천정사를 바라보기 위해 계곡 바위 위로 놓인 나무다리로 건너가 본다.

 

 

 

 

나무다리를 건너가서 바라보는 석천정사는 주변 계곡의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나무나 수려한 경관이다.

 

 

 

 

권벌의 아들 권동보가 지었다는 석천정사는 암석 위로 석축을 쌓고 팔작지붕을 얹어 화사함을 더했다.

마루에 달린 창살을 열면 그대로 계곡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고 창살을 내려 외부 경관을 차단하면

은은한 자연의 소리에 독서를 즐기는 공간이 되니 그 효용성이 참으로 놀라운 건물이다.

 

 

 

 

수정 같은 계곡 사이로 정자가 들어앉은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풍경이다.

 

 

 

 

석천정사는 2012년 9월 16일 KBS 1박2일 경북 봉화편에서 편을 갈라 쿵쿵따 미션을 해서 세간에 알려졌는데

서울 근처라면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을 이런 명당이 봉화 골짜기에 들어앉은터라 찾는 이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텐트의 주인공인 듯한 몇몇의 대학생들만이 물안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겨 보는이들의 눈을 즐겁게 할 뿐이다.

 

 

 

 

정사 앞 계곡을 따라 한참이나 이어진 소나무숲길로 잠시 걸어가 본다.

 

 

 

 

계곡은 군데군데 너른 암반이 펼쳐져 있고 사이로 흐르는 물길은 그다지 깊지 않아 아이들 물놀이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물놀이가 아니더라도 소나무 그늘 아래 암반 위에 앉아 쉬노라면 옷깃 사이로 절로 솔바람이 스치운다.

 

 

 

 

계곡을 유유히 흐르던 내성천 강물은 석천정사 앞의 너른 암반을 만나서 작은 폭포를 이루는데 

암반을 따라 흐르는 작은 폭포는 물미끄럼틀 타기 놀이에는 안성맞춤이다.

엉덩이를 내리 깔고 물에 앉으면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 때문에 몸이 저절로 폭포 아래로 미끄러진다. 

 

물줄기와 함께 미끄러져도 그 아래 소가 크게 깊지 않으니 아이들도 놀기에 위험하지 않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이들도 어른들도 즐거운 비명 소리를 내어지르며 연거푸 물미끄럼틀을 타기에 재미를 붙인다.

최고의 물놀이 명당 석천계곡에 와서 사진만 찍고 있을 수가 없다!

얼른 카메라를 내어던지고 계곡 물 속으로 풍덩 몸을 내어던져 타는 듯한 더위를 잠시 식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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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클럽 등 여러 사진 커뮤니티에 게재되는 사진들 중에서 눈에 뜨이는 사진을 발견했다.

 푸른 바다를 뒤로 한 해변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올라앉은 하얀 성당의 사진이었다.

이런 멋진 곳에 성당을 지었네.....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실제로 미사를 드리는 성당은 아니고

예전에 SBS 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드림(Dream)'에서 오픈세트장으로 쓰였던 성당이라고 한다.

티맵에 죽성성당을 입력하니 죽성성당이라는 이름대신에 드림성당이라는 이름이 뜬다.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기장멸치와 기장미역으로 유명한 기장에 세트장이 있다. 

 

 

 

 

 기장읍에 들어서 죽성리 해안으로 진입하니 방파제 끝 저멀리 사진에서 봤던 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여름 오후의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성당과 바로 뒤에 서 있는 등대가 참 인상적이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나서는 더 이상 돌보지 않았는지 성당 마당에는 잡초가 여기저기 자라고 있고

지붕으로 이어지는 전깃줄도 다소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성당의 모양새는 참 아담하고 아름답다.

자세히 보지 않고 멀리서 보면 흡사 실제 미사가 이루어지는 성당같이 보인다.

 

 

 

 

 

 

 

성당 문은 굳게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는 없지만 아취형의 문 사이로 보이는 건너편 등대풍경도 참 아름답다.

  

 

 

 

수심은 깊어보이고 파도도 넘실대어 위험해보이데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바다에 몸을 담근다. 

한참을 놀다 차가와진 몸을 식히려 바위 위에 누우면 뜨겁게 달구어진 바위들도 따스하게만 느껴질 것 같다.

 

 

 

 

등대 뒷편 바위 위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보니 이곳 죽성리 성당 앞 바다는 참으로 절경이다.

해변 여기저기 크고 작은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 보는 이의 시선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강태공들이 어찌 이렇게 좋은 곳을 놓칠소냐. 위험한 바위 끄트머리에 서서 세월을 낚느라 여념이 없다.

 

 

 

 

뜨겁게 내리쬐던 해도 서서히 서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니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던 죽성성당에도 고요가 깃든다.

 

 

 

 

기장 죽성리 드림 세트장.....비록 진짜 성당이 아니고 드라마 세트장에 불과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아담한 성당과 어우러진 주변 바다의 풍광은 사진가들이 추천할만한 곳이라 생각이 된다.

더운 날씨에 사진 찍다 지치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몸과 마음을 쉬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다음번에는 등대 그늘 명당 한켠을 차지하고 앉아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오래도록 눈에 담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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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에는 주산지가 있고 경산에는 반곡지가 있다라는 말을 듣고 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섰다.

네비에다 경산 반곡지를 입력하고 경주에서 출발하여 경산시 남산면 반곡리로 향했다.

경산 IC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자인면 남촌 네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상대온천 방면으로 한참을 가니 한적한 시골길에 주변이 모두 복숭아밭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셨습니다.”라는 안내 멘트에 따라 시동을 끄고

주변을 살펴보니 .....이런걸 가지고.....’하는 생각이 일순간 든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사진찍기 좋은 녹색 명소'라든가 '미니 주산지'라는 닉네임을 듣고 찾아온지라

주산지 정도의 환상적인 경관을 상상했는데 이건 뭐 시골 동네에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저수지가 아닌가.

일순간 실망감이 앞서 살짝 힘이 빠졌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둑길로나 한번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둑길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많은 진사들의 입소문이 그저 허풍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구불구불 뒤틀리며 둑길로 혹은 물 위로 그 가지를 뻗은 왕버드나무들이 들어선 100여m의 둑길.

살짝 비에 젖어 싱그러움을 더해주는 왕버드나무들이 저수지에 드리운 반영들은 신비감마져 자아낸다.

군데 군데 생채기도 나고 커다란 구멍도 나 있는 왕버드나무들은 얼마나 오래 이곳에 있었을까?

혹은 300년 수령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둑길에 나란히 늘어선 나무들만이 알겠지....

긴 나뭇가지가 아래로 드리워지고 이파리들이 물 속으로 머리카락을 담그는 둑길의 끝은 마치 영원으로 이어진 길같이 느껴진다.

꿈같은 둑길은 얼마 걷지 않아 짧게 끝났지만 마음 속으로 들어온 신록의 싱그러움은 한참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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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2달 앞서 가고 있다더니 연일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아침에는 기온이 서늘하다가도 한낮이 되면 28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계속되더니

23일엔 경상도 지방의 수은주가 30도에 육박할 것 같다는 기상청의 예보가 들려온다.

벌써부터 뙤약볕에 조금만 걸어다니다 보면 탈진할 듯 하고 시원한 그늘을 찾고픈 마음 간절하다.

이같이 더운 날엔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 들어도 이마에 흐르는 땀이저절로 씻겨질 것 같은데......

 

 

 

 

울산 태화강변에 가면 시원하게 쭉쭉 뻗은 대나무밭이 강변을 떠라 길게 이어져 있어

도시의 생활에 찌들린 시민들에게 활력소가 되어 주고 있다.

 

 

 

 

태화강을 따라 조성된 이 대나무밭은 십리에 걸쳐 펼쳐져 있다고 해서 '십리대밭'이라고 불리운다.

 

 

 

 

본격적으로 대밭이 형성된 곳은 무거동 삼호교부터 태화동 동강병원까지인데

대밭의 폭은 2030m에 이르고  전체면적은 약 29m²에 이른다고 한다.

 

 

 

 

대나무밭의 역사가 뭐 그리 오래 되었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울산 십리대밭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시대에 큰 홍수로 인해 태화강변의 전답들이 소실되어 일대가 백사장으로 변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죽공예품의 가격이 오르게 되자 한 일본인이 헐값에 백사장을 사들여 인공적으 대밭을 조성하고

그 후 주민들도 앞다투어 대나무를 심음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 주택지로 개발될 뻔 하였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대숲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뻔한 것을 시민들이 막아낸 것이다.

 

 

 

 

그후 간벌작업과 친환경호안 조성작업, 산책로 조성작업을 벌여

십리대밭은 현재 울산을 대표하는 멋진 생태공원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대나무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걸으면 대나무밭 사이로 소올솔 불어오는 바람이 저절로 느껴진다. 

대나무밭 사이 사이에는 정자도 있고 군데군데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마련되어 있어 좋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손을 잡고 걸어도 좋고, 가족까리 자전거 하이킹을 떠나도 좋은 곳, 울산 태화강변 십리대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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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오죽헌, 선교장......강릉여행에서 돌아보아야 할 곳은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빠뜨리지 않고 들려야 할 필수 코스를 들어보라면

세계최대의 규모로 알려진 오디오 박물관 '참소리박물관'을 꼽을 수 있겠다.

 

십여년전인가 참소리박물관에 처음 방문했을 때에

좁은 공간에 빼곡이 들어찬 희귀한 소장품들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티맵에 참소리박물관을 입력하고  상냥하게 인도하는 아가씨의 고운목소리에 이끌려가니

예전에 있던 송정동 쪽이 아닌 경포 호수 옆으로 앞길을 인도한다.

송정동 솔밭 옆에 있던 예전의 참소리박물관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경포호 옆으로 옮겨진 박물관은 훨씬 더 커진 규모로 간만에 찾아온 여행객을 맞이한다.

 

 

 

 

1992년에 개관했다고 하니 올해로 20여년의 역사를 지닌 참소리 박물관.

정확한 명칭은 '참소리 축음기. 에디슨 과학박물관'이다.

 

 

 

 

입장권의 가격을 보니 성인이 7,000원. 상당히 센 가격이다.

입장료 가격을 본 일행 중 한명이 "뭐 볼거 있다고 이렇게 입장료가 비싸노..."하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일전의 경험으로 비추어 비싼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된 필자.

일행을 권유하여 입장권을 구입한 후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본다.

 

매년 50만명 이상의 내외국인들이 이곳을 찾는다는데 얼마전 1박2일 강릉편에서

은지원이 이곳을 다녀간 이후로는 찾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주말은 물론이고 주중에도 인산인해가 날 정도로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몰려오는 통에

 큐레이터들 중에는 과중한 업무를 견디지 못해 사표를 제출하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박물관은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과 에디슨 과학박물관 두동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두건물이 계단과 회랑 등으로 서로 이어져 있어 한쪽으로 입장하면 두 박물관을 구분없이 관람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관람해도 되지만 매시간 진행되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에디슨 최초의 축음기 틴포일(가운데)

 

 

이곳에는 축음기 발명전의 다양한 뮤직박스로부터 시작하여 에디슨 최초의 축음기인 틴포일,

세계에서 하나 뿐인 아메리칸 포노그래프(전세계 6대 중 유일하게 현존),

17개국에서 만든 축음기 4,000여 점 가운데 1,400여 점의 축음기와 음반 15만 장

 8,000여 점의 음악 관련 도서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어 100년 소리의 역사를 한곳에서 볼 수 있고

탄소 전구, 전기 자동차, 영사기, 계산기, 커피포트, 재봉틀, 타자기, 선풍기, 다리미......등 

에디슨이 생전에 발명한 각종 생활 용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세계 오디오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방대한 소장품은 모두 손성목씨 혼자 수집한 것이다.

손성목 관장은 여섯 살 때인 1948년 아버지로부터 컬럼비아 축음기 G241을 선물받았는데

1.4후퇴시에 월남할 때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축음기를 등에 짊어지고 월남했다고 한다.

휴전 후 강릉에 정착한 그는 건설회사에 취직해 중동파견 근무를 하고

이어서 국내로 돌아와 아파트 건설과 임대사업을 해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몽땅 축음기, 백열전구, 영사기, 촬영기 등의 수집에 쏟아부었다.

2000년 1월 운영하던 사업체가 부도가 나서 온 집안에 빨간 경매딱지가 붙었을 때에도

국제전화로 축음기 경매에 나섰을만큼 미친 사람처럼 축음기 수집에 열을 올린 그는

결국 수많은 축음기와 백열전구, 촬영기와 영사기 등을 수집하여

워싱턴에 있는 에디슨박물관보다도 더 많은 에디슨 축음기 진품들을 소장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헉 소리날 정도로 많은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어 슬쩍 돌아보는데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욕심으로는 하나하나 다 자세히 소개해 드리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몇장의 사진으로 간략하게 소개해 드린다.

 

 

 

 

서커스 오르간

 

 

 

 

폴리폰 뮤직박스

 

 

 

 

스텔라 17인치 뮤직박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축음기 레코드(가운데 까만 동그라미 모양)

영국 동전 페니만 하다고 해서 '페니 레코드'이다.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king'이 20초간 수록되어 있는

세계에서 몇장 안 남아 있는 레코드라고.......

 

 

 

 

클링저

 

 

 

 

레지나 뮤직박스

 

 

 

 

모양이 너무 예쁜 나팔형 축음기들.

 

 

 

 

너무 귀여운 세계각국의 턴테이블 카트리지 박스

 

 

 

 

수많은 에디슨 전구들.

 

 

 

 

에디슨 포틀랜드 주식회사 주식 원부

1899~1931년까지 주식 발행, 이동 등등 회사의 주식 변동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에디슨 일렉트릭 배터리카(1913년) 1913년에 전기자동차를 만들어내었다니......

 

 

 

 

수많은 에디슨 영사기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써 다시 한번 에디슨에게 감사드리며.....^^

 

 

 

 

초창기 계산기(1905)

 

 

 

 

에디슨 전기 재봉틀(1910)

 

 

 

 

수동형 세탁기(1820)

 

 

 

 

수많은 재봉틀, 다리미. 전기 청소기.......

 

 

 

 

에디슨 전기 오븐

 

 

 

 

에디슨 헤어 컬링기

 

 

 

 

에디슨 커피 포트 및 토스터기

 

 

 

 

에디슨 녹음기(1930)

 

 

 

 

에디슨 등사기

 

 

 

 

에디슨 전화기(1930)

 

 

 

 

에디슨 전기 다리미(1910)

 

 

 

 

오일 선풍기(1878)

수공제작한 현대 선풍기의 전신으로 전셰계에 몇대밖에 없다.

 

 

 

 

에디슨 와플기(1915)

 

 

 

 

에디크래프트 오토매틱 토스터(1920)

 

 

 

 

휴대용 축음기들.

 

 

 

 

1920~80년대까지 다양한 라디오, TV가 전시된 본관 2층

 

 

 

 

전 세계에 단 2대 뿐인 세계 최초 텔레비젼  베어드 30라인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젼 금성사 VD-191(1966)

 

 

 

 

축음기 소리부터 CD, DVD 까지 소리 역사 100년의 발전을 수억원짜리 스피커로 직접 들을 수 있는 음악감상실.

 

 

 

 

휴게실에 전시된 수백대의 고급 카메라들. 카메라덕후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곳.

 

 

cnr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과 에디슨 과학 박물관...... 5,000여점의 전시품을

 세세히 살펴보고 나니 머리가 띵해지고 방대한 규모에 살짝 멀미까지 나려고 한다.

들어갈 땐 입장료가 다소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헉 소리나는 소장품들을 찬찬히 돌아보고 나니

전시품의 희귀성에 비하여 7,000원의 입장료는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발명을 위한, 발명에 의한, 발명의 삶을 살았던 에디슨은 무려 1,093종에 달하는 특허를 출원했다.

평생 동안 계산하면 보름에 한번 꼴로 특허를 낸 꼴이라고 하니 놀랄 정도이다.

우리 곁에 너무나 가까이 있어 당연하다고 생각된 전등, 오디오, 녹음기. 다리미, 계산기........등등

생각없이 쓰고 있던 문명의 이기들이 거의 에디슨의 발명품이었단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감사할 수 있었고

이 무수한 에디슨의 발명품을 평생에 걸쳐 수집한 손성목 관장의 집념 또한 놀라울 뿐이었다.

강릉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들려보아야 할 곳은

바로 세계 최고의 오디오 박물관, 강릉 참소리 박물관이라고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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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햇빛이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이어 받아 우개지륜을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십 리나 뻗쳐 있는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맑고 잔잔한 호숫물이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싼 속에 한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여 물 속 모래알까지도 헤아릴 만하구나

 

한 척의 배를 띄워 호수를 건너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은 곁에 동해가 거기로구나

 

조용하구나 경포의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동해의 경계여

 

이 곳보다 아름다운 경치를 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고려 우왕 때 박신과 홍장의 사랑이 호사스런 풍류이기도 하구나

 

강릉대도호부의 풍속이 좋기도 하구나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운 정문이 동네마다 열렸으니 즐비하게

 

즐비하게 늘어선 집마다 모두 벼슬을 줄 만 하다는

 

요순 시절의 태평성대가 이제도 있다고 하겠도다 

 

 

- 정철 / 관동별곡(關東別曲) 에서 -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정철의 관동별곡 중에서 경포대를 묘사한 한 구절이다.

육순을 바라보는 국어 선생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 구절을 음미하듯 읊어주셨다.

그러면서 동별곡의 아름다운 귀절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심하게 꾸짖으셨는데......

열일곱, 철딱서니없이 자란 아이들이 고전의 아름다움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

보지 못한 경포대의 아름다움을 어찌 체감할 수 있었으랴......

 

 

 

 

다시 찾아본 강릉여행길, 정철이 읊었던 관동별곡의 경포대는 어떠한 모습일까.

경포호수변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소나무가 듬성듬성 느러선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본다.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야산을 몇걸음 걸으니 바로 경포대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공원 주변에는 다른 조형물도 있지만 강릉의 1번지 경포대에 올라애 제대로 경포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단 아래서 봐도 누각의 규모가 꽤 크다. 부연이 가설된 육중한 팔작지붕은 정자를 더욱 웅장하게 보이게 한다.

 

 

 

 

경포호를 향하고 있는 정자의 앞부분을 광각이 아닌 카메라로 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철제 난간에 기대어 한껏 몸을 뒤로 젖혀보아도 누각의 일부분만 카메라로 담을 수 있을 뿐이다.

 

 

 

 

경포호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경포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꼽히어왔다.

고려 충숙왕 13년인 1326년에 현재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처음 세워졌던 것을

중중 3년 150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고 그 이후 여러번에 걸쳐 중수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경포대의 현판 중 경포호쪽으로 걸린 현판은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이익회가 쓴 글이라고 한다.

 

 

 

 

누각은 앞면 5칸, 옆면 5칸의 규모인데 총 28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고 

우물마루로 짜여진 바닥은 3단의 단차를 두어

사용자의 신분 및 계급에 따라 자리 배치를 달리하는 점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율곡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판각한 것과

숙종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의 기문과 시판이 걸려 있다.

 

 

 

 

 

정자 난간에 서서 경포호를 바라보니 너른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렸을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관동별곡의 한구절,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맑고 잔잔한 호숫물'이라는 싯귀가 눈앞에 펼쳐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눈 감고 싯귀를 음미하던 국어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만 같다.

 

 

 

 

강남에 비 개이자 저녁안개 자욱한데

비단같은 경포 호수 가이없이 펼쳐졌네

십리에 핀 해당화에 봄이 저물고 있는데

흰갈매기 나지막이 소리내며 지나가네

 

정조대왕은 '강남소우석람암(江南小雨夕嵐暗)'에서 봄날의 경포호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겨울에도 이렇게 풍광이 아름다운데 봄날의 경포호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 너머로 마른 갈대만이 바람에 흔들리는 경포호지만

성현들의 시처럼 철쭉꽃, 해당화가 피고 벚꽃이 줄을 이어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날의 경포호를 혼자 상상해보면서 경포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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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던 길에 만난 정동진(正東津).

사실......들리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수년전에 처음 찾아보았던 정동진은 바다와 얼굴을 마주한 호젓한 간이역이 아니었다.

수많은 관광객으로 바글거리는 역사, 드라마의 인기를 입고 만들어진 엄청나게 큰 모래시계,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모텔과 식당, 거기다 뜬금없이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크루즈호텔까지.......

정동진역의 낭만은 간곳 없고 번득이는 상술만이 혼재한 곳이란 기억만이 남아 있다.

 

두번 찾을 가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냥 차를 몰아 스쳐가려다가

그래도 다시 한번......? 하는 생각에 갑자기 핸들을 꺾어 정동진으로 향했다.

 

 

 

 

붉은 기와를 머리에 이고 있는 정동진역의 아담한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해서 다시 번듯하게 증축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중 다행이다.

한적하기만 하던 어촌마을 정동진은 1994년 방영되어 최고의 시청율을 기록한 SBS드라마 '모래시계'가

이곳 정동진역에서 촬영되고 난 이후 하루 아침에 국내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정동진역, 역사도 작고 대합실도 자그마하다.

기차 운행 횟수도 별로 없지 않을까 의외로 운행 편수가 적지 않아 보인다.

주말에는 삼척까지 바다 쪽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는 바다열차도 운행된다고 한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의 가격은 500원이다.

입장권을 구매한 다음 방문 기념으로 정동진역 스탬프도 찍어 보았다.

 

 

 

 

대합실의 자그마한 문을 밀고 역 구내로 들어가니 바로 코 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철로 앞의 <오늘 해뜨는 시각>안내판이 이곳이 유명한 해돋이 명소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신라 때에 임금이 사해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알려진 이곳은

정초에는 새해 일출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이다.

 

 

 

 

해돋이 시각표 앞 하트 안에는 글씨를 쓴 돌맹이들이 소복이 채워져 있다.

"보*이랑 첫 여행, 나중에 결혼해서 다시 오고 싶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시작이야!"

"울산대 최강 커플 **이와 **"....같은 사랑의 언약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와서 사랑의 약속을 돌맹이에 새겨서 남기고 간

연인들의 사랑의 추억이 바래이지 않고 언제나 계속되어야 할텐데.......

 

 

 

 

철로 건너면 바다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떨기 해송이 눈에 들어온다.

모래시계에서 여주인공 고현정이 긴 생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서 있던 이 나무는

방송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한동안 몸살을 앓기도 했다.

 '고현정나무'라고 불려오다가 고현정이 결혼한 이후로는 '모래시계 소나무'로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수령 30년 정도의 소나무는 크게 불품은 없지만 정동진의 추억을 남길 포인트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양 광화문에서 정(正)동(東)쪽 에 나루터(津)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이름지어진 정동진.

소박한 자연석으로 된 표지석이 화려한 조형물보다는 도리어 마음을 사로잡는다.

 

 

 

 

동해남부선, 삼척선, 영동선.......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철도 노선의 역들 중 가장 해안 가까이에 있다는 정동진역은

현재는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 인정을 받은 역이기도 하다.

 

 

 

 

모래시계 이후에도 베토벤 바이러스, 우리 결혼했어요. 등 여러 TV프로그램이 이곳에서 촬영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으면서 앓는 몸살의 흔적은 정동진역 구내 여기저기에서 눈에 뜨인다.

 

 

 

 

무궁화호를 타고 해안을 달리며 기차 여행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기도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

기차가 정동진역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하니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썬크루즈 리조트나 조각공원은 들려본 적이 있는지라 패스하기로 하고 역사를 나와 해변으로 향해본다.

 

 

 

 

바다는 역시 좋은 것이다.

탁 트인 바다의 넉넉함은 정동진 마을의 어수선함에 상한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하다.

 

 

 

 

바닷가의 암초들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놀았던 정동진바다의 추억은 아이들에게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으리라.

  

바닷가 산책을 마친 후 기차 시각에 맞춰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와본다.

강릉역에서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기적소리를 내며 천천히 미끌어져 들어온다.

 

 

 

 

KTX도 좋고 새마을호도 좋지만 기차 여행의 낭만은 역시나 무궁화호인 것 같다.

너무 빨리 지나가 바깥을 보면 멀미나는 KTX보다는 

차창 밖으로 서서히 풍경이 밀려나는 기차를 타야 여행이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거기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동해 바다옆을 지나는 열차라면 더욱 더.......

 

 

 

 

스쳐 지나가버리려고 했던 정동진. 이제는 예전의 번잡함이 조금은 덜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역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기차,

해풍에 허리를 구부린 소나무가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을 만드는 정동진.

비록 영화의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동해 바다의 넉넉함과

기차가 역으로 들어올 때의 설레임은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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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 1-1번지에 위치한 '경상북도수목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경상북도수목원이라는 정식 명칭보다는

'죽장수목원'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리우는 곳이다.

 

3,222ha의 국내 최대 규모의 수목원이라는 것 외에도

평균해발 630m에 위치하여 고산식물을 많이 관찰할 수 있어 유명한 곳.

다른 수목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70여종의 고산식물원,

잠시 울릉도로 여행을 떠나게 해주는 울릉도 식물원을 비롯하여

반대편 내연산 자락까지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등

이곳에서 자연을 즐기며 감상하는데는 하루가 부족할 정도이다.

 

 

 

 

한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죽장수목원의 모습은 어떠할까?

주차장에 내려 잠시 걸으니 수목원 입구에 떠억하니 버티고 선 장승 부부가 방문자를 반긴다.

높이가 12m에 무게가 20t이나 나간다니......정말 대단한 크기의 장승이다.

 

 

 

 

찾는 이 거의 없는 한겨울의 수목원은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마져 들릴만큼 고요하기만 하다.

영하의 추위에 대부분의 식물들은 땅속으로 움츠려들고 실내의 식물들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꽃들이 활짝 피어나는 봄에 왔을 때에 야생화며 진귀한 식물들을 담느라고 정신이 없어

미쳐 돌아보지 못했던 수목원 전망대로 올라보기로 한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나무 데크로 되어 있어 걷기에 쉽고 오르기 편해서 좋다.

 

 

 

 

추운 하늘 아래 오들오들 떨며 늘어선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여행자의 마음을 붙잡는다.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보다 모든 집념을 떨구어낸 겨울나무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한참을 올라가보니 드디어 탁 트인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앞에 나타나는 수목원 전망대. 날아갈 듯 날렵한 기와 지붕을 이고 파란 하늘 아래 서 있다.

 

 

 

 

다소 풀린 날씨 덕에 수목원 아랫쪽은 따스하게까지 느껴졌는데 전망대에 이르니 바람이 윙윙~! 날려갈 것만 같다.

흐트러지는 머리를 모자로 감싸고 비틀거리며 전망대 2층으로 올라가 본다.

 

 

 

 

우와아~~! 탁 트인 정경과 함께 파란 동해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바로 앞 청하면을 지나 저멀리 보이는 바닷가 마을이 월포리 해수욕장이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4288 *1080의 원본 사이즈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NEX-5 파노라마 기능)

 

전망대에 비치된 망원경을 통해 자세히 보니 멀리 포항 시가지도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맑은 날이면 호미곶은 물론이고 경주 토함산까지 조망이 가능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4288 *1080의 원본 사이즈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NEX-5 파노라마 기능)

 

최고의 일출감상지로도 유명하다는 경상북도수목원 전망대.

이런 곳에 서서 동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만난다면 정말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언젠가는 나도 여기서 제대로 된 일출 사진 한번 찍어보리라 기약해보며 전망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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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서귀포, 광주 무등산 서석대, 경주 양남면 읍천리...... 

이들은 모두 희귀한 모양새의 주상절리가 있어 우리들에게 알려진 지명들이다.

 

  단면이 사각형 내지 육각형으로 된 긴 기둥 모양의 바위가 겹쳐져 있는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특이지질의 하나인데

마치 연필과도 같은 수많은 기둥이 세로로 또는 가로로 누워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오늘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곳은 울산광역시에 위치한 강동 화암 주상절리. 

경주와 울산을 잇는 31번 국도에서 1027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한참 내려가다  

화암 마을회관 주변에 차를 세우고 해변으로 나가면 바로 지척에서 주상절리를 만날 수 있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강동 화암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에 분출한 현무암 용암이 냉각하면서 열 수축 작용으로 생성된 냉각절리라고 하는데

용암 주상절리로는 동해안 주상절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화암주상절리의 생김새는 마치 목재더미를 한아름 안고 가서 해안에 내동댕이친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어떤 목재더미는 가지런히 누워있고 또 어떤 목재더미는 땅에서 솟아오른 것 같이 다양한 모습이다. 

주상체의 횡단면을 보면 마치 활짝 핀 꽃 모양을 연상케 하는데  

이 마을의 이름인 '화암(花岩)'역시 주상절리의 모양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화암주상절리는 모래 해변 바로 옆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뛰어나 누구나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주상절리 위로 뛰어다니고 심지어 그 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람도 있어서 

혹시나 그 모습이 금세 훼손되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포항 달전리 산중턱의 주상절리는 너무나 선명하여 멀리 떨어진 길에서도 그 모습이 생생히 보였는데

언젠가부터 산 위에서 흙더미가 서서히 무너져내리면서 그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을 본다.

지금 우리 가까이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을 보여주고 있는 강동화암주상절리도 그 전철을 밟지 않도록 

부디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물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부채꼴 모양으로 누워있는 경주 양남면 읍천리의 주상절리에서도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화암주상절리는

경주 울산 여행길에 가볍게 들러보기 좋은 곳이라 사진 몇장으로 간단히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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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국어시간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읊어보았을 명시 조지훈의 '승무(僧舞)'.

우리의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아름다운 시로 노래했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 주실마을을 영양 여행길에 잠시 들려보았다.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위치한 주실마을 주차장에 내리니 '풀잎단장'이라는 싯귀가 먼저 여행자를 반긴다. 

일찍부터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개화를 앞당긴 주실마을은 조지훈을 비롯한 한국문학의 대가들을 다수 배출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주실마을을 바라보니 매봉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장군천이 흐르는 마을의 모습이 너무 고즈녁하게 보인다.

배산임수! 굳이 명당을 운운하지 않더라고 따스한 햇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마을은 편안함을 안겨준다.

조선 중기 환란을 피해서 이곳으로 정착했던 한양조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경이 흡사 배 모양 같아서 주실이라 불리우며 

산골등짝이가 서로 맞닿아 이루어져서 주곡(注谷)이라 불리기도 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마을로 가기 위해서 마을 앞 장군천 옆으로 난 갈대길을 걸어본다.

마을에서 뚜욱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만 정사 하나가 여행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오지로 낙인찍혔던 영양, 하지만 그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였기 때문에 이토록 맑은 물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않았을까?

이런 곳에 살면 근심도 발 아래 내려 놓고 안빈낙도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장군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주실교를 건너 산책하듯 천천히 마을길을 걸어본다.

마을 어귀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자리에 자리잡은 솟을대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경상북도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호은종택은 조지훈이 태어난 곳이다.

한양에 터전을 잡고 살던 한양조씨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호은 조전(壺隱 趙佺)은 주실마을로 피신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집은 둘째 아들 조정형이 지은 집이다.

집터를 잡을 때 매방산에서 매를 날려서 매가 앉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당시에 소실된 것을 1963년에 이르러 복구하였다.

 

 

 

 

 

집은 자 형태로 되었는데 안채인 정침과 관리사로 나뉘어 있고 

안채는 정면 7, 측면 7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인데 보온을 위해서 유리창문을 덧댄 것이 특이한 점이다.

 서쪽에는 조지훈의 태실이 있고 대문에는 한말부터 태극기를 조각·채색하여 끼워두고 있다.

이집의 가훈은 삼불차(三不借)인데 재물과 사람(양자) 그리고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호은종택을 나와 마을 안쪽에 있는 옥천종택으로 향했다.

영조 때의 문신 옥천 조덕린1694(숙종 20)에 지은 집이다.  

 

 

 

 

살림채인 정침과초당사당으로 구성된 17세기 말 대표적인 양반주택인 옥천종택은

두꺼운 널을 자 모양으로 붙여 박공으로 처리한 지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살림채 바로 옆에는 초당으로 된 별당이 있는데 서당의 구실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초가 이엉은 삭아도 너~무 삭아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올겨울엔 새로 이엉을 이었으면 좋으련만!

 

 

 

  

옥천종택을 나와 바로 맞은편에 자리잡은 창주정사로 올라가본다.

 

 

 

 

창주정사는 옥천 조덕린선생이 문하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정면 4칸의 건물에 가운데 2칸을 마루로 하고 창주정사라는 현판을 달았다.

 

 

 

 

창주정사에 서면 주실마을이 한눈에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오가는 이도 별로 없이 참으로 평화로운 마을이다.

 

 

 

 

참나무, 느릅나무들이 우거진 매봉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나니 어느덧 돌아갈 길이 급하게 되었다.

조지훈 문학관과 조지훈 시공원을 비롯하여 그가 수학했던 월록서당도 보고 가야 하는데!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된 주실마울숲도 돌아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니 아쉬움이 앞선다.

다음번에 오게 된다면 제일 먼저 문학관을 돌아보고 조지훈과 그의 시의 향기를 마음껏 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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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에 '무진장'이 있다면 경북에는 'BYC'가 있다."는 말이 있다.

전북의 산간벽지 오지 삼총사가 무주, 진안, 장수라고 한다면

경북에는 봉화, 영양, 청송이 거기에 버금가는 오지라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통이 불편하기로 유명하여 '육지 속의 섬'으로 불려왔던 영양.

하지만 전국의 도로망이 사통팔달로 잘 뚫려진 요즘의 영양은

오지라는 오명을 벗고 자연이 살아 숨쉬는 웰빙 청정지역으로 조명받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곳 영양으로 가기 위하여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던 차는 영덕에서 갈라져 안동행 34번 국도로 접어든다.

청송 월전 삼거리에 이르러 영양행 31번 국도로 꺾어 얼마 가지 않으니 바로 입암면이다.

입암면사무소를 지나 잠시 가니  눈앞에 거대한 규모의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바로 입암(立巖)이라는 지명이 있게 만든 영양 최고의 경승 선바위이다.

 

 

 

 

선바위 관광지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선바위가 서 있는 반변천 강변으로 향한다.

선바위가 위치한 남이포 일대는 일찌감치 풍경을 앞세운 관광지로 개발됐지만

영양 땅이 워낙 깊다 보니 평소에 찾는 이 거의 없어 관광지라 이름 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영양고추전시관, 야생화 수석전시관을 비롯해 관광지구에 위치한 몇몇 조형물들이 시선을 끌기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의 위용에 이끌려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반변천을 사이에 두고 선바위 앞에 서니 정말 바위가 엄청나게 크다.

크롭바디의 렌즈로서는 화각이 모자라 당최 한 화면에 담기지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넥스-5를 이용하여 파노라마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옆으로 길게 찍히는 파노라마 사진의 기능상 약간의 왜곡과 함께 윗부분이 약간 잘린 사진이 억지로 만들어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 남이포는 반변천과 창기천의 물길이 한데 모이는 합수지점이다.

양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면서 Y자 모양의 지형이 만들어졌는데

두 물길이 합수부의 지형을 예각으로 뾰족하게 깎아내 독특한 지형이 바로 선바위이다.

 

 

 

 

선바위를 뜯어가며 자세히 보니 그 형상이 참으로 독특하다.

마치 커다란 한덩어리의 케이크 같기도 하고 어느 한쪽은 부풀어 오른 컵케이크를 보는 것 같다.

육즁한 바위임에도 불구하고 손톱으로 깔짝거리면 귀퉁이 한덩어리가 뜯어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선바위를 사이에 끼고 Y자 형태로 흐르는 반변천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다.

 선바위의 깊게 패인 주름과 함께 바위 위 나무들과 하늘의 구름까지 환하게 비쳐보이니 마치 거울같다.

 

 

 

 


이런 특별한 지형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없을리 없다.

남이포와 선바위에 전해내려오는 전설 한도막을 옮겨보자면.......

 

남이포 인근 연못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이 역모를 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용을 토벌하기 위해 급히 남이장군을 파견했다.

남이장군은 치열한 교전 끝에 용 두 마리의 목을 베고는 석벽에다 자신의 초상을 검 끝으로 새겼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려다 지형을 보니 언젠가 다시 도적의 무리가 일어날 기세라 큰 칼로 산맥을 잘라서 물길을 돌렸다.

이때 남이장군이 마지막으로 칼질을 한 흔적이 바로 선바위라고 한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전설이지만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5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된 희대의 풍운아 남이장군과

어디서도 보기 힘드는 장업하고 기이한 바위 선바위에게는 걸맞는 전설이 아닐까?

 

 남이장군은 간신 유자광의 모함에 의해 스물여섯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가 칼질을 해서 만들었다는 선바위는 아직도 그자리에 남아 굳건하게 남이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는 남이포의 뾰족한 끝자락에 세운 정자 남이정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 석문교도 있어 눈길을 끈다.

석문교를 건너 남이포의 물가를 따라 남이정까지의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살며시 손짓하며 필자를 불렀지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차가운 강바람으로 인해 거닐어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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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이 불편하고 낙후되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우던 경북 영양.

내륙 깊숙이 자리 잡아 고추와 반딧불이 밖에는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영양에는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으로 불리우는 정원인 서석지가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연못 속에 수많은 돌들이 있어 ‘상서러운 돌들의 연못’이라 불리우는

서석지(瑞石池)를 찾아서 경북 영양으로 출발한 차는

네비 아가씨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인도를 받아 911번 지방도로 들어선다.

한참을 가도 마주 오는 차도 별로 안 보이는 한적한 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니

오른쪽에 서석지라 쓰인 조그만 팻말이 눈 앞에 나타난다.

네비 아가씨의 말로는 아직 백여m 더 가야 한다는데!

스쳐 지나려던 차를 급하게 한쪽에 세우고 서석지 입구로 내려서본다.

 

 

 

 

서석지로 들어가는 널찍한 길 초입에 비가 하나 세워져 있어 보니

바로 석문 정영방 선생을 기리는 석문정선생사적비(石門鄭先生事蹟碑)이다.

서석지를 조성한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1577∼1650)은 퇴계 이황 - 서애 유성룡 - 우복 정경세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삼전(三傳)의 제자로 알려진 분으로 성리학과 시에 능하였으며,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다한다.

 

 

 

 

사적비를 살펴보고 고개를 돌리니 서석지의 전경과 함께 엄청나게 큰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서석지의 상징과도 같은 400년 묵은 은행나무 고목이다.

그런데......! 은행잎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나목만 남아 있다.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힌 서석지를 마음에 두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을 때 왔더라면 너무 멋진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을텐데.....

같은 경북지방에서도 남쪽과 북쪽의 기후는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는게 새삼 실감이 났다.

 

 

 

 

대문 앞으로 올라서니 바닥은 떨어져 겹겹이 쌓인 은행잎으로 흙이 안 보일 정도이다.

붉은 흙담과 잘 어우러진 노란 은행잎 카페트를 사뿐히 즈려밟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본다.

 

 

 

 

담장과 90도로 꺾어진 문 안으로 들어서니

아! 눈 앞에 펼쳐지는 서석지의 단아한 모습이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서석지의 전체적인 공간 구성은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강학처인 경정과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등 선비의 네가지 벗을 심어놓은 사우단,

한가지뜻을 받드는 서재인 주일재, 경정 뒤편 담너머에 자리잡은 자양재와 서고인 장판각,

연못 앞에 400년 된 은행나무, 그리고 약 90여개의 상서러운 돌로 채워진 연당이 있다. 

 

 

 

 

 정자인 경정 앞에 자리잡은 요(凹)자형 연못의 규모는 가로 13,4m, 세로 11.2m 정도인데

경정과 맞은편 주일재를 오가는 통로 외에는 연못이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서석지는 연못이 마당이고 마당이 곧 연못인 셈이다. 

 

 

 

 

서석지라(瑞石池)라는 이름은 연못 안에 약 90여개의 상서러운 돌이 있어 붙여졌는데

연못 속의 돌들에게 붙여진 철학적이고 심오한 이름은 무려 19개나 된다.

‘경정잡영’에서 석문선생은 서석지의 돌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읊었는데

서석지를 읊은 '경정잡영' 中' 상경석'이란 시를 보면 그의 깊고도 심오한 학문이 느껴진다.

 

돌은 안으로 아름다운 글을 머금고도

오히려 그 있음을 나타내기 꺼리는데

사람은 어찌 실속에 힘쓰지 않고

명예만 얻으려고 급급하는가

 

 

 

 

요(凹)자형  연못의 튀어나온 부분에는 선비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국화를 심어 ‘사우단’이라고 불렀는데  

연못의 동북쪽에 있는 주인의 거처인 주일재는 연못을 바라보게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사우단을 바라보게 배치했다.

 

 

 

 

연못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강학당인 경정은 사방에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는데

여름날 연꽃이 필 때 경당 계자난간에 기대어 연꽃의 향기를 맡는 것은 가히 신선놀음이라고 한다.

 

 

 

 

 

‘경정(敬亭)’이라는 편액이 걸린 정자의 마루는 앞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너무 운치가 있다.

 

 

 

 

 경정 뒤켠으로 돌아 정자의 뒷문을 열고 보니 문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가히 한폭의 그림이다.

누마루에 앉아 서석지와 은행나무의 풍광을 즐기며 시를 짓던 석문선생과 그 벗들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 하다.

 

 

 

 

 

 경정을 거쳐 주일재 옆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두채의 수직사(守直舍)가 나오는데 

 

 

 

 

큰채에는 자양재(紫陽齋)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자양재의 서편에는 장판각이 있는데 장판각이란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니 오늘날의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장판각을 거치면 이렇게 다시 흙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구조인데

한바퀴 도는데 몇십 걸음이면 될만큼 규모는 아담하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으로 불리우고 있다.

 

 

 

 

연당 안의 연꽃이 활짝 피어 보는 이들을 설레이게 하는 여름철을 비롯하여

대문 옆 400년 묵은 은행나무가 모두 물들어 그 노란 손을 흔들 때는 물론이고

겨울철 함박눈이 내린 모습 또한 절경이라는 영양 서석지.

연꽃도 다 시들어 대궁이만 남고 은행나무도 다 떨어져버린 늦은 가을날에 찾아오다니......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텐데......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내년 가을을 기약해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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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변두리의 산업단지 한모퉁이 절개지에 남아 있는 노송 한그루가

요즘 SLR클럽을 비롯한 각종 사진 갤러리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어느 사진가가 우연히 발견하고 세천리 소나무를 찍은 일몰 사진을 올린 후

주말이면 이곳으로 하루에도 수십명의 사진가들이 몰려드는 중이라고 한다.

 

대구 가는 날 시간을 내서 세천리에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중

대구에서의 볼일을 서둘러 끝내고 네비에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 145-2를 입력한 후

다짜고짜 세천리 소나무를 찾아가 보았다.

 

 

 

  

 

주인공인 나무는 대구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 있는 나무로

성서5차 산업단지를 위해 절개된 언덕받이에 홀로 우뚝 서 있다.

마치 한그루의 분재처럼 뒤틀려 허리를 구부린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이 나무는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전 마을 뒷산에 있는 나무로 마을의 상징이었다.

보상 협의 중으로 아직 철거되지 않은 마을이 뒤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나무가 서 있는 야산도 개발되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만 무성하게 나돌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죽어서 꺾이고 껍질이 벗겨진 가지도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미인 소나무를 혼자 '세천리 왕따 소나무'라고 이름해 본다.

 

 

 

 

세천리 소나무는 일몰 때 역광으로 담아야 대박이라고 해서 일몰시간에 맞추어 다시 가보니

 7~8명의 사진가들이 미리 와서 삼각대를 벌여놓고 기다리고 있다.

막상 세천리 소나무를 찍으러 왔지만 준비가 안 되어도 너~~무 안 되었다.

삼각대도 없고 손에는 겨우 18-55렌즈를 물린 넥스-5(NEX-5) 하나가 고작이다.

엄청 화려한 장비로 포진한 사진가들 틈에 끼어 같이 셔터를 누르려니

약간의 쪽팔림이 있었지만 꿋꿋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 몇장의 사진을 담아 보았다.

 

 

 

 

사진갤러리에서 각광을 받은 세천리 소나무 작품을 보면 소나무 아래서 자전거를 세우고 있다던지

소나무 아래서 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모습의 사진들이 자주 소개되는데

이 사진들은 대부분 모델이나 동네 주민들에게 수고비를 주고 연출하는 사진이라고 한다.

필자는 다른 사진가의 아내와 아이가 포즈를 연출하고 내려오는 것을 살짝 어부지리로 찍어보았다.  

 

 

 

 

일몰이 붉게 타올랐으면 더욱 좋으련만 짙게 끼인 구름으로 인해 원하는 일몰빛은 나오지 않고

결국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버려 더 이상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마음에 드는 사진은 한장도 없었지만

뜨는 출사지로 각광받고 있는 세천리소나무를 이웃분들께 소개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에

허접한 사진이나마 올려드렸으니 이해하시기 바라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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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서 새재(조령,鳥嶺)으로 불리웠던 문경새재.

경상도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갈 때면 꼭 넘어야했던 문경새재는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한 아웃도어차림의 등산객들로 발디딜 곳 없이 붐빈다.

 

 

문경새재가 위치한 주변 주흘산, 조령산의 가을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을 비롯하여 정자와 주막 터, 각종 비석 등이  

선비들이 과거보러 가던 옛길을 따라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마지막 가을의 향취를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는 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문경새재에는 국내최대규모의 드라마 오픈세트장도 있어 찾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세트장으로 처음 출발한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트장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고려시대 세트장을 완전히 허물고 새롭게 조선시대로 모두 탈바꿈한 것을 볼 수 있다.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이곳에서 새로 태어난 

광화문, 경복궁, 동궁, 서운관, 궐내각사......등을 실물처럼 만나보실 수 있다.

세트장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새재옛길을 걷기 위한 본래의 계획도 잊게되기가 일쑤인데

궁궐 건물과 양반집, 초가집 등 130여동에 이르는 건물을 돌아보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단풍이 절정에 이른 10월의 마지막날에 찾아본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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