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뜰 산책........................'에 해당되는 글 269건

  1. 2010.08.26 귀신의집 소문난 영덕 흉가 가보니.. 75
  2. 2010.08.25 흐린날 더 운치있는 사찰 청도 운문사 37
  3. 2010.08.23 막거리 먹고 자라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 27
  4. 2010.07.09 전주한옥마을의 멋진 전통 부채 31
  5. 2010.06.11 슬로시티 전주 한옥 마을의 중심 경기전 16
  6. 2010.06.09 당당함 돋보이는 호남제일성 전주 풍남문 29
  7. 2010.06.08 해운대 모래축제,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다 36
  8. 2010.05.28 전주 한옥마을,전통의 숨결 느껴지는 아름다운 골목길 36
  9. 2010.05.19 대구 약전골목 , 한약 내음 가득한 명물 골목 79
  10. 2010.05.14 YMCA 야구단 영화 촬영지, 전주 향교 20
  11. 2010.05.08 전주 한옥마을, 전통 한지 체험하기 62
  12. 2010.05.07 사랑과 추억도 익어가는 곳 청도와인터널 53
  13. 2010.05.05 바람의 언덕에서 만난 무지개 55
  14. 2010.05.03 전주 한옥마을의 완소 소품들 36
  15. 2010.04.28 삼덕동 주민센터, 아름다운 벽화와 기발한 정크 아트 27
  16. 2010.04.26 열두대문 만석꾼집 밀양 교동 손씨 고가 49
  17. 2010.03.29 밀양 아랑각에 어린 아랑의 슬픈 전설 24
  18. 2010.03.26 은밀한 햇살에 몸을 맡긴 밀양 영남루 22
  19. 2010.03.23 인천 차이나타운, 한국 속의 중국을 만나다. 75
  20. 2010.03.22 영주 부석사로 떠난 빛바랜 시간여행 63
  21. 2010.03.15 안동 체화정, 비오는 날의 운치있는 풍경 57
  22. 2010.03.10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의 신비로운 물안개 28
  23. 2010.03.08 추노 촬영지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65
  24. 2010.02.23 겨울연가 남이섬 아름다운 숲길 63
  25. 2010.02.20 경복궁 향원정, 왕과 왕비의 데이트 코스 14
  26. 2010.02.18 추노 촬영지 운주사의 소박하고 엉뚱한 석탑 33
  27. 2010.02.17 경복궁 자경전의 아름다운 꽃담 25
  28. 2010.02.12 추노 촬영지 운주사 칠성바위의 미스테리 8
  29. 2010.02.12 추노 촬영지 운주사의 와불과 소박한 석불 38
  30. 2010.02.08 1박 2일 촬영지 안동 도산서원에 남은 퇴계 이황의 향기 43



게재된 사진을 허가 없이 퍼가서 기사를 쓰는 일부 매체가 있습니다. 삭제 부탁드립니다.


제 블로그의 이 포스트 사진에만 유달리 저작권 표시 마크가 빠져 있었네요ㅠㅠ.


사진에 저작권 표시가 없다고 해서 저작권이 없는것은 아닙니다. 사진 정보가 엄연히 있으니까요.


이후로 제 사진을 허락없이 퍼가서 자신의 매체에 도용하는 사람은 신고할 예정입니다.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되는 행동이니까요. 



해마다 여름이면  TV와 극장가는 호러물로 채워지고

놀이동산 귀신의 집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선다.

등골이 오싹하고 비명이 절로 나오는 호러물도 부족하여

요즘은 깊은 산속 버려진 폐가나 흉가만을 골라 찾아 체험하러 다니는 동호회원들도 있다.

실제로 흉가를 체험하는 한 카페는 그 회원수만 해도 3만명을 자랑하고 있는데

회원들 중에서는 여자들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카페 회원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귀신이 있는지...귀신이 있다면 어떤 모습인지가 궁금해서

흉가를 찾아다니며 체험에 참여한다고 하는데 이들이 손꼽는 우리나라 3대 흉가를 보면

 

1) 영덕 장사해수욕장 앞 횟집.

6.25 때 수많은 학도병들이 처첨하게 희생된 곳에 세워진 유명한 흉가로 방송도 몇번이나 탄 곳이라
바로 옆에 귀신체험코스를 운영하는 펜션도 있는 곳이다.
'영덕 흉가'라는 검색어가 등록이 되어 있을만큼 유명한 곳.

2) 충북 제천 늘봄가든

공중파, 케이블에 자주 소개되는 흉가인데 규모가 상당히 큰 집이다.
제일 유명한 일화는 종업원 아가씨에게 음식을 주문했는데 나오지 않자
손님이 화가 나서 따졌는데
주인 왈, "저희는 그런 종업원이 없는데요" 했다는 얘기.

3) 경북 경산 안경공장.

안경공장 전에는 원래 섬유공장이었다가 망하고, 다른 공장 들어섰는데 그 공장도 망하고
그 후에 안경공장 들어왔다가 망하고 사장이 미쳐서 기숙사에 불지르고 자살했다는 소문이 무성한 곳.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근처에 코발트 광산이던 동굴이 있는데
거기서 6.25 때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이 굉장히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3대 흉가  중 필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흉가가 두 군데나 있는지라 호기심이 급발동한 필자.

웹 서핑 신공을 발휘한 끝에 영덕 흉가의 위치를 로드뷰로 확인한 후 카메라를 챙겨가지고 길을 나선다.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영덕 흉가를 체험한 사진 일부를 살짝 공개해드리고자 하오니
한 밤중에 이 포스트를 열어보시는 분이나
노약자나 임산부, 심신 허약자는 바로 여기서 웹 페이지를 닫고 나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진에는 다소 섬칫하거나 상당한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그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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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가 깊은 산속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영덕 흉가는 하루에도 수만대의 차량이 질주하는 장사 해수욕장 인근 7번 국도 도로상에 위치하고 있다. 

길 하나만 건너면 푸르른 동해 바다가 펼쳐지고 인근에는 너무나 해안이 고운 장사해수욕장이 있는데

황당하게도 바로 옆에는 그림같은 풍경의 팬션도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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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닦여진 진입로를 올라 흉가 마당에 들어서면 전형적인 80년대 풍의 2층이 자리잡고 있는데

폐가의 마당과 집 안팎은 버려진 쓰레기와 잡초로 무성하게 뒤덮여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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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는 지하 1층, 지상 2층에 별채, 샤워장, 화장실을 갖춘 아주 복잡한 구조이고

앞에는 컨테이너 박스와 지붕이 다 무너져 버린 수족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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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유리창 하나 없이 쾡하게 뚫려 있어서 입구부터 으시시한 느낌을 주는 이 집은

1980년대에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짓고 횟집으로 영업을 시작했는데

잠자는 동안 집이 흔들리고 벽이 갈라지며 창문이 깨어지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을 뿐 아니라

횟집 여사장이 새벽에 2층에서 머리 풀고 내려오는 귀신을 보았다며 혼절한 이후

집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려 오랫동안 주인없이 버려져 있는 상태라

그동안 귀신이 나온다는 무성한 소문 때문에 무속인들이 이곳에서 살다가 버리고 간 흔적만 남아있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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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로 들어서면 탁자가 다수 놓였음직한 넓은 공간은 텅 비어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난간이 거의 다 부서져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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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ㄱ자로 꺾어진 부분은 주방과 화장실, 내실이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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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로 쓰였음직한 방을 들여다 보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버려진 침대와 매트리스, 눅눅한 기운이 역력한 버려진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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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머리에는 무속인의 복채로 추정되는 '상담료 30,000원'이란 글씨가 퇴색된 채로 붙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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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와 습기가 가득한 벽은 온통 사찰의 달력과 달마도로 도배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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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들은 여기저기 반쯤 찢어져 펄럭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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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하나 없는 창틀에는 촛농이 여기저기 녹아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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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잃은 신발은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버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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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타일로 마감이 되어 있는 공간은 주방으로 추정이 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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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가를 다녀간 사람들의 뻘건 스프레이로 뿌린 낙서와 전화 번호가 이곳을 찾는 이를 반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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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 벽에는 이상한 액체가 흘려내려 기묘한 무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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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이 거의 다 부서진 2층 계단으로 올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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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의 색감이 정말 으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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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계단에서 새벽에 머리 푼 여자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여사장이 혼절을 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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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벽을 장식했던 베니어판은 오랜 방치로 인해 다 일어나서 너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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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중간에 서서 2층을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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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규모의 주택이라 역시 2층에도 방이 많다..
횟집으로 성업했더라면 방마다 손님으로 그득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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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손님 대신 거미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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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내려와 집의 동쪽으로 돌아가니 지하실과 별채가 보인다. 먼저 별채로 가보니 그곳도 역시 쓰레기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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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에는 벽의 갈라진 틈새로 담쟁이 덩굴이 비집고 나와 자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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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흉가의 하이라이트, 지하실로 가 본다.

담력이 상당히 센 사람이라도 이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은 대부분 꺼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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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입구부터 "살려줘"라는 무시무시한 낙서가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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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입구는 이상한 소파가 버려져 있다.

밟고 내려서니 물컹! 하며 발이 쑥 빠져  저절로 "으악!"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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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두워서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라 준비한 라이터로 지하실을 비추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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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역시 흉가에 왔다간 사람들이 남기고 간 이름들이 휘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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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자세히 비쳐보니 이불이며 옷가지, 화분 등 생활 쓰레기가 여기저기 버려져 있고

어둠과 함께 엄습하는 묵직한 기운과 축축한 공기가 저절로 등에 식은 땀이 흐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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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만 방 하나 정도 넓이의 지하실을 자세히 보니 내부는 2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가운데는 시멘트로 구획을 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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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로폼이 있기에 살며시 그 위로 발을 디뎌 보니 미끄덩! 하며 쭉 미끄러진다.

헉...무셔라.....자세히 보니 바닥에 썩은 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정말 기분 더럽다.

사람들이 이 지하실에서 가슴이 억눌리는 듯한 느낌과 뒷목을 잡아 끄는 듯한 느낌을 대부분 받는다던데

간덩이 부었다고 자부하던 필자도 이 지하실에서만큼은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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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하실은 군인과 사랑을 나누다 임신한 아가씨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서 자살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도 들려오는데...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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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살던 한 무속인의 말에 의하면 이 지역은 6.25  장사 상륙 작전 때 수많은 학도병과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던 곳이라서 

집을 떠도는 혼령이 10,000명이 넘게 존재한다고 하며 자신은 그 혼령들과 늘 대화하며 같이 살았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이 집을 면밀히 살펴본 지질학자는 이 집이 암반 구조 위에 세워진지라

수많은 차가 다니는 7번 국도의 강한 진동이 그대로 집으로 전해져 
창문이 흔들리고 벽에 금이 간다는 것이며

더우기 바로 뒷산에 레이더 기지가 자리잡고 있어서

핸드폰이나 카메라 등 전자기기의 오작동도 자주 일어나 사람들의 공포가 증폭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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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보아서인지......수많은 차들의 진동에 의한 강한 스트레스인지는 모르나

유명 경비업체도 지켜내지 못한 이 집을 주인은 내버리고 한국을 떠나버렸고

나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에 펴져나가
이 집은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귀신의 집'이 되고 만 것이다.


흉가의 바로 옆에는 놀랍게도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멋진 팬션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팬션은 도리어 흉가 체험 특수를 톡톡하게 누리고 있다니 이 어찌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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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산내면을 지나 구비구비 운문사로 향하는 산길은
'운치있다'는 표현이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아침나절 내린 비로 인해 멀리 보이는 산허리에는 안개 구름이 낮게 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아름드리 숲들은 싱그러운 얼굴로 여행자를 반긴다.





운문사 입구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하니 도시 생활에서 찌들었던 스트레스가 일순간에 씻겨지는 듯 하다.





일반적인 사찰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서 걸어서 올라가다보면 숨이 차고 땀이 나기 마련인데
운문사는 계곡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차량으로도 사찰 입구까지 바로 진입이 가능하다.





아름드리 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기분좋게 걷다보면
금방 사찰 입구에 다다라 요즘 같이 더운 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호거산 운문사...호랑이가 살았던 산이라고 해서 호거산이라고 하나보다.





호거산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둘러싸인 산세는 예사롭지 않고 높은 산허리에 안개가 걸리니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범종루를 거쳐 들어선 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먼저 모으는 것은 바로 입구에 자리잡은 엄청나게 커다란 소나무이다.
마치 커다란 표고버섯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거의 땅을 뒤덮으며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처진소나무라 불리운다.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 정도의 이 아름다운 소나무는 천년 기념물 180호로 지정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처진 소나무 관련 상세 포스트 : 막걸리 먹고 자라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





운문사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운문사를 돌아보다 보면 한 사찰에 대웅보전이 두군데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운문사의 가장 중심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신 대웅보전인데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이 대웅보전은 1994년에 건립되었다.





운문사 신 대웅보전의 너무나 아름다운 꽃살문은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님의 작품이다.




















다른 하나의 대웅보전은 신 대웅보전의 앞쪽에 약간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라 시대에 건립한 운문사는 4번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 대웅보전은 조선 숙종 44년(1718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의 간격을 넓게 잡아 칸수에 비해서 건물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1994년에 새롭게 대웅전을 지은 후에  비로자나불을 봉안했으므로 비로전으로 불리우다가
문화재청에서 보물 835호로 지정한 이후에 원래의 이름인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다시 찾게 되었다.





2007년에 해체 보수하였으므로 단청이나 꽃살문이 너무 산뜻하여 세월의 흔적이  도리어 느껴지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 678호)은 높이 5.4m의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층 기단에는 앉아 있는 8부중상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만세루는 학승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으로써 주요 행사 때만 사용하는 곳이다.





운문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사찰에
전국 5대 비구니강원 중에 학풍이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운문승가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경내가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지만
승가대학은 학승들의 수행을 위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 내부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승가대학 건물 바로 옆의 공양간의 문이 열려 있기에 살짝 들여다 보니
비구니스님들이 공양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반들반들 윤이 난 엄청나게 큰 무쇠솥이 눈에 확 들어왔다.

240명의 학승들은 공부와 노동을 병행하고 있어 운문사 경내에서는 이처럼 청소를 하거나 농사일을 하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찰 경내는 드넓고 쾌적하며 대웅보전 뒤에는 야생화 단지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나 데이트하는 커플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더구나 사찰의 바로 옆 계곡에서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마져 불어오니 
요즘 같이 후텁지근한 날,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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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높고 물 맑은 청도가 자랑하는 천년 고찰 운문사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엄청나게 커다란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의 크기도 거대하지만 그 단아한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방문객들은 너도나도 소나무를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마치 커다란 표고버섯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땅을 기어가듯 뒤덮으며 자라고 있는
이 거대한 소나무는 천년기념물 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이다.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 정도인 이 소나무는 
처음에는 낮게 옆으로 퍼지는 나무의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자라면서 아래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고 한다.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는 어느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운문사 대부분의 절집이 소실되는 가운데서도 화마에서 살아남아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고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운문사에 있는 비구니 승가대학에는 약 240명의 여승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데
이곳의 스님들은 이 처진소나무를 스승으로 섬긴다고 한다.
다른 나무들은 자랄수록 가지를 위로 펼치는데 이 노송은 자랄수록 가지를 아래로 낮추기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겸허한 자세를 본받자는 것이다.



이 처진 소나무가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이 소나무가 '막걸리를 먹고 자라는 소나무'라는 것이다.
강남 갔던 제비가 오는 삼월 삼짇날은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막걸리 공양을 받는 날인데
승가대학에서 교육을 마친 비구니 스님들이 막걸리 열두 말에 물 열두 말을 섞어 이 노송에 부어준다고 한다.


막걸리 공양은 30여 년 전, 쇠약해진 이 소나무를 살리고자 선대 스님들이 고안한 지혜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처진 소나무는 오랜 수령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린 나무처럼 가지의 제일 말단까지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이는 막걸리가 나무에 좋은 비료의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인데

토양학자들 의 말로는 과학적으로 꼭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알코올농도가 5-6%에 불과한 막 걸리에 물을 타서 뿌리에 부어 준다면
알코올의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고 들어 있는 전분도 크게 비료역할 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막걸리의 성분이 물에 녹지 않은 토양속의 여러 비료성분을 녹여내어 나무에 이롭다는 주장도 한다.
다만 물탄 막걸리는 한참 가뭄이 심한 봄철에 나무에 물을 주는 효과와도 같아서
나무의 해갈에 도움이 되리라는 주장은 다소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임진왜란의 화마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운문사를 지키고 있는 처진 소나무....
운문사 천년 세월의 살아 있는 증인은 이 처진소나무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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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기온이 32도를 웃도는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요즘.
후텁지근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다 보니 에어컨 아래에서 얼음 빙수로 땀을 식히는 일도 잦아졌다.
시원하다고 에어컨을 오래 쐬다 보니 머리도 지끈지끈하니....여름 감기에 걸리기 일쑤이고
가끔은 덥다고 배도 덮지 않고 자다가 배탈에 걸리는 일도 다반사이다.

이 더운 여름,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옛날에는 어떻게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을까...?
높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방금 길어온 우물물에 두 발을 담그고
넓직한 부채 하나로 설렁설렁 바람을 일으키며 여름을 여유롭게 보내었을 우리 선현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우리 선현들의 여름 필수품 부채는 본래 더위를 쫓는 데 쓰였으나 점차 의례용 또는 장식용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전통혼례 때 신랑, 신부의 얼굴 가림용으로 쓰는 것은 의례용이며
화가, 서예가, 문인 등이 부채에 그림이나 시 구절을 써 넣어 집안에 보관하는 것은 장식의 역할이라고 하겠다.

한국, 중국, 일본 동양 3국에서는 일찌기 부채가 일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접부채는 극동의 명품으로 일본에서는 7세기부터 사용하였고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접부채가 처음 만들어져 명나라 때 크게 유행했다.
이른바 당선()이라 부르는 부채는 부챗살로 대(竹) 이외에 백단, 흑단, 상아를 사용했고 금, 은을 장식한 부채까지 등장하였다.
15~16세기경부터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역의 물결을 타고 중국의 부채가 유럽에 알려졌는데 
서양 사람들은 동양에서 건너간 부채를 진주 , 비단 등과 함께 매우 귀중한 물건으로 여겼다.

그후 17세기에는 파리를 중심으로 부채가 만들어졌고
18세기 유럽에는 부채가 크게 유행하게 되어 유럽 여성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식품이 되었다.
상아, 진주조개, 비단, 양가죽 등을 사용한 부채에 여러 가지 풍속도를 그려넣은 것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브리제라고 하는 노송나무 모양의 부채를 좋아했다.
19세기 초에는 한때 접부채가 부활했으나 그 뒤 점차 쇠퇴하고, 인쇄한 부채가 등장하였다.

한국에서는 가는 대오리(가늘게 쪼갠 댓개비)로 살을 만들고 종이 또는 헝겊을 발라 부채를 만들었는데
가장 질이 좋은 부채는 전북 전주, 전남 남평, 담양, 나주 등지에서 나는 부채이다.
전통 부채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데 크게 깃털로 만든 우선(羽扇), 자루가 달린 둥근 부채인 단선(團扇, 방구 부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선(摺扇), 용도가 다른 별선(別扇)등 크게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해 드리는 부채는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미선 공예'에 전시된 부채 작품들로
전시장 바로 앞에 펼쳐진 수백만원을 홋가하는 대형 부채에서부터 산수화, 각종 화조가 그려진
각종 멋드러진 부채들이 전시장을 가득히 채워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특히 아무 장식없는 하얀 부채에 먹물 한방울 떨어뜨린 후 

입으로 불어서 멋진 부채 그림을 탄생시키는 장인의 솜씨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 

요즘 같이 무더위가 계속 되는 날, 우리 선현들의 멋과 슬기가 담겨 있는 부채 하나 장만 하시어 
남은 여름을 여유롭게 지내보는건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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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의 도시 전주는 볼거리도 많고 체험할거리도 많다.
조선을 건국한 전주 이씨가 본(本)으로 삼고 있는 도시 전주는 원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으나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풍남문 로터리를 돌아서 한옥마을의 중심도로인 태조로로 들어서면
고딕식으로 장엄하게 지어진 전동성당이 먼저 눈에 뜨이고 한옥마을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그 중심부엔 전주 한옥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이 자리잡고 있다.

한옥마을의 상징이자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어진은 일반 초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서 조종(祖宗)과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으므로 
따로 봉안하는 장소인 진전을 지어 귀하게 보전했는데 전주, 경주, 평양 등에 각각 어진을 봉안했다.
어진 봉안처는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다가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 진전이라고 불리웠다.
 세종24년(1442년)에 와서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는데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의 어진 봉안처는 경기전이라 칭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주출입문은 종묘나 왕궁처럼 삼문으로 되어 있어 위엄을 더해 주고 있는데
가운데 문은 조상신이 다니는 문이므로 사람은 가운데 문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정문 앞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의 상징인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그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경기전을 들어 갈 수는 없으리라....
 이 하마비는 조선 후기에 경기전을 보수할 때 세워진 것이다.


출입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오는데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을 말한다. 

9m의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가운데 태극 문양으로 장식했다.



경기전의 면적은 49,590㎡로써 어진을 모신 정전 외에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신 조경묘, 예종대왕 태실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史庫)가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정전(보물 제1578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경기전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조선 태조 어진(보물 제931호)'때문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가로 150㎝, 세로 218㎝인 태조 어진은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현재의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좌우의 회랑에는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등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데
좌측 회랑에는 영조, 철종, 순종의 영정이 우측 회랑에는 세종, 정조, 고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지갑만 열면 매일 보게 되는 너무나 친숙한 세종대왕의 영정.


영조대왕의 영정.


철종의 영정...모든 어진이 유리 액자 안에 들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정전의 우물 천정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으며


본전의 회랑에는 어진 외에 경기전 책임자가 쓰던 가마인 가교, 제사에 쓰이는 향로, 향합을 받쳐드는 가마인 향정,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쓰이는 가마인 신연 등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경기전 정전의 입구인 내삼문 동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전주사고(史庫) 실록각'이 나온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에 하나인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의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전주사고가 있던 자리에 1991년에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전주 사고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사고로써 건물은 당시에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실록부터는 편찬할 때마다 주자로 인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른 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타버리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는데
안의와 손홍록이 급히 전주로 달려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 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화를 면하고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들이 번갈아가며 실록을 지켜 내었다. 
실록은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 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고  전주사고의 실록 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로부터 조선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여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귀중한 역사기록유산이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사스런 땅(慶基)에 지어진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존되어 
조선 왕실의 영원과 안녕을 바라는 점에서
전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
전주사고에서 실록이 보존됨으로 조선의 역사가 지켜진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장소이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뒤로 하고서도 경기전의 푸르름과 편안함은 전주 시민의 최고의 휴식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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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 마을에서 오목대, 경기전, 전동 성당을 둘러보고 길을 건너면
네거리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큰 문루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번 화재로 불타버린 숭례문과 거의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 문루는
전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풍남문(豊南門)이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의례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은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도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풍남문은 전주 4대문 가운데 남쪽 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1388년)에 전라 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거의 이백여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남문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 파괴되었는데
이후 영조 10년인 1734년에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명견루라 불렀다.


영조 43년인 1767년에는 전주성내를 모조리 휩쓰는 화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정해년 대화(丁亥年 大火)로 인해 명견루도 다시 불타 버리는 불운을 겪게 된다.
화재가 휩쓴 그 이듬해 전라관찰사 홍락인은 불타버린 명견루를 다시 중건했는데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재와 같은 2층루로 수축했고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던 1905년, 조선통감부는 폐성령을 내리게 되는데 
전주부성 4대문 중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는 와중에도 풍남문은 철거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풍남문은 조선 후기의 문루(門樓) 형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누대는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이며 높이는 17.2m에 이른다.

문루는 2층의 팔작(八作)지붕인데 하층은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상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면에 무지개 끝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하였다.
1980년에는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기도 한데
옛 문루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인 전주 풍남문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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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Sand, Feel Sand,Enjoy Sand.......
6회째를 맞이하는 '해운대 모래 축제(Haeundae Sand Festival)'의 축제 컨셉은 '보고, 느끼고, 즐기고'이다.

6월 4일에서 7일까지 해운대 해변에서 개최된 이 모래축제는 종래 관람 위주의 축제에서 벗어나
관람하고 체험하고 참여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모래를 소재로 한 친환경 축제이다.
3박 4일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의 축제 동안 축하 공연과 불꽃쇼를 비롯해서 전통 의상 패션쇼,
샌드 보드 패스티벌, 비치 발리볼, 비치 사커, 씨름왕 선발,모래길 따라 해운대 삼포 걷기 등
모래를 주제로 하는 다양한 전시 행사와 체험 행사가 개최되는데 많은 외국인들을 비롯하여
연인원 10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등 명실상부한 해운대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여러 전시 행사 중에서도 모래축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판타스틱 모래 조각의 세계'.
너른 해운대 해변 여기저기에 국내외 모래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모래조각전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작품 마다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정성이 가득하여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6월 7일을 마지막으로 해운대 모래축제는 막을 내리게 되고
며칠 동안 공들여 만든 모래조각 작품들은 그대로 무너져 다시 해변으로 돌아가게 된다.
영원하지 않은.... 순간의 아름다움이기에 모래 조각 작품들은 더욱 귀하게 보이는건 아닐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해변으로 돌아가버릴 모래조각 작품을 파인더 속에 담아 잠시라도 그 생명을 연장시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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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여채의 한옥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곳, 전주 한옥마을.

뻬곡이 늘어선 한옥에서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옛 선비와 아낙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한옥마을에는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정작 뒷골목으로 들어가보는 이는 잘 없다.
경기전이며 오목대, 향교, 전동 성당...그리고 수많은 전통 공예품 상점들이 서 있는 주도로에서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오래전 걸어다녔던 처마 낮은 골목길들이 나온다.

아이들의 뛰어다니던 소리, 두부 장수의 종소리로 아침을 깨우던 골목길,
어깨를 부딛치며 걸어갈만큼 비좁은 골목길은 대도시에선 이미 그 형태가 사라져가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은행나무길, 토담길....같이 정감있는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우리에게 선보인다.

하늘을 품고 땅을 안은 골목길의 낮은 담장들은 우리 한옥의 멋과 숨결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같은 형태가 거의 없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골목길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다.
언제 걸어도 정겨운 한옥마을 골목길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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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문화가 아파트 거주 형태로 바뀌고 도심에는 고층 건물들이 우후 죽순으로 들어선 현대인의 삶에서
옛날부터 우리 삶의 본질적인 자산을 그대로 담고 있던 '골목'은 사람들에게 소외받는 길이 되었다.
좁은 골목길은 늘어난 자동차를 위해 폭이 확대되긴 했지만
주차된 자동차를 피해 다니며 걸어야 하는 불편한 길이 되었는데.....

대구의 도심에는 아직도 저마다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정겨운 '골목'들이 남아 있다.
진 골목(긴 골목), 약전 골목, 떡전 골목, 방마치 골목(부잣집이 많아서 항상 다듬 방망이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골목),
뽕나무 골목, 종로 골목, 미싱 골목, 돼지 골목, 함석 골목, 성밖 골목, 신발 골목, 공구 골목, 자동차 골목, 오토바이 골목,  ......
이러한 도심의 골목이야말로 대구의 근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대구의 골목 중 오늘은 한약 내음 가득한 대구 명물 '약전 골목'을 소개해 드린다.




대구 약전 골목은 1908년 대구 성곽과 영남 제1관문이 헐린 자리에 도로가 생기고 이곳을 중심으로 약령시가 봄,가을로 열려 상가가 형성된 곳이다. 



약전 골목은 동성로 3가, 남성로, 계산동, 장관동 일대의 동서 800 m 정도의 골목에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한의원 20 여개소와 한약방 53 개소, 한약 도매업소 49 개소, 약업사, 인삼사 등 한의약 관련 업소 300 여개소가 모여 있는 이른바 한약의 메카이다.



대구 약전 골목의 시작은 효종 9년(16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경상 감영 안 객사 주변에서 열리던 대구 약령시로부터 비롯됐다.



약초를 취급하는 특수 시장을 이르는 이름인 약령시는 약초의 채취 및 출하의 시기에 맞추어서 해마다 봄 , 가을 두 차례 열렸는데  대구 ·전주 ·원주의 약령시가 3대 시장으로 꼽혔다.



효종 때부터 열리기 시작한 약령시는 일제강점기 때도 계속되었는데 대구의 경우는 음력 2월과 10월에 열렸고 이때는 전국에서 약초 재배자와 채취자, 상인과 약재 수요자가 모여들어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



대구에서 약령시가 개설, 발전하게 된 것은 경상도 지역을 둘러싼 태백과 소백 준령과 낙동강 등이 약재 생산의 보고로서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한약재는 농가 소득의 큰 수입원이었으므로 약전 골목에서 거래되는 약재는 대구 경제의 큰 축을 이루었고 이후 수백여년 동안 명성을 떨쳤다. 
한양에서도 구하지 못한 한약재는 대구 약령시에 가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전국의 한약재 집산지 구실을 했고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에 한약재를 공급해서 명실상부한 한약 물류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양약이 보급되고 일제 탄압 정책이 가중되면서 약령시는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그 자리에 들어선 약전 골목만이 한약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한약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약전 골목은 옛 명성을 다시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약령시 보존 위원회는 전통 약령시의 맥을 잇고 약령시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지역의 명소 약전골목을 무대로 '대구 약령시 한방 문화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658년 무렵부터 해마다 열리던 대구 약령시는 전국의 한의약업인과 지역민이 함께 어울려 약재를 사고 팔며 인심과 문물을 전하던 축제 그 자체였다.
약령시 개시일이 다가오면 여각과 객주집은 전국에서 몰려오는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며 전국의 출시자 또한 약재 매매와 만남의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다.
개시일에는 약령시 동, 서쪽에 커다란 아치형 솔문을 만들어 세워 축제 분위기를 돋우었으며 한약재 매매 외 일용 잡화점도 덩달아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약령시 주변의 여러 음식점과 술집 등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붐벼 야간에도 이들의 열기로 인해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이러한 약령시 개장 행사는 일제 강점기인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 약령시에서 지속적으로 열려왔는데 
이와 같이 약령시 개장 행사를 1978년부터 현대적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 이르렀고 올해도 5/1~5/5일에 개최되었다.





꼭 축제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는 언제나 다양한 한약재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약령시 한의학 문화관'에서는
한의약 및 약령시의 역사, 문화에 대한 전시, 영상물을 보고 체험할 수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관람객들에겐 언제든지 다양한 체험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양쪽에 빼곡이 들어선 한약방에서 풍겨나오는 한약재 냄새를 맡으며 오고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6~7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드는 대구 약전 골목.
대구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약전 골목은 대구 시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하게 간직해야할 귀한 추억의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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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공부보다 운동을 더 좋아하는 선비 호창은 

어느날 우연히 YMCA 회관에서 야구를 하는 신여성 정림과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호창의 아버지는 호창에게 서당을 물려받길 권유하지만 

호창은 정림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며, 야구라는 신문물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에 조선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이 결성되고 황성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YMCA야구단의 연습장이 일본군의 주둔지로 바뀌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결성된 야구단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송강호(호창) 김혜수(정림)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긴 여운을 남겨주었던 영화 'YMCA 야구단'.

전주 한옥 마을 한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전주 향교가 바로 이 영화의 촬영지이다.


한옥 마을에서도 사람이 잘 찾지 않고 조용하기만 한 곳. 전주 한옥 마을 속의 또 다른 세상, 전주 향교를 찾아가 본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으로 채색되는 전주 향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온전히 보존된 향교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경기전 북편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건물은 조선 선조 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주 향교의 현존 건물의 배치 형태는 들어가는 누각인 만화루를 지나면 정면에 일월문이 있고 일월문을 지나면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 서무가 있자리잡고 있으며 대성전 담 뒤로는 명륜당이 있는데
 서쪽으로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와 사마재 그리고 주위에 고직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대지 3130평에 모두 19동, 100칸에 이르는 방대한 전향교는 사적 제 3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의 동무와 서무는 배향 공간이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편의 동재와 서재는 강학공간으로 이분되는데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려조 처음 지어진 건물은 경기전 옆에 세워졌는데 경기전이 지어진 뒤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 때문에 태조의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 하여
      화산 기슭(중화산동)으로 이전되었다가 좌사우묘(左社右廟)에 어긋나고 전주성 밖이라 다니기에 불편해서 선조36년(160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향교에는 다섯 그루의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눈에 뜨이는데  향교 내 서문 앞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이나 된다.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은행나무가 벌레를 타지 않듯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대성전을 지나면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나온다.


 명륜당은 광무 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고쳐 지었는데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은 대성전과는 달리 전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이 명륜당 앞에서 촬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역시 강학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대칭을 잘 이루고 들어서 있다.




동재의 마루에 앉아 명륜당 마당을 보니 탁 트인 정경이 시원하기 그지없고
특히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그늘을 넓게 드리워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한옥마을의 중심거리인 경기전 앞이나 전동 성당 앞이 인파로 북적이고 있을 때도
마을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향교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일기 화창하고 신록이 짙어지는 오월, 한옥마을 속 또 다른 세상, 전주 향교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은행잎 떨리는 소리, 작은 새소리와 함께 느림의 미학을 느끼는 시간을 가져봄은 어떠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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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일원에서 열리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는 1997년에 처음 시작되었는데
올해는 '전주 한지, 한바탕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5/1 ~5/5일까지 개최되었다.


독특한 멋과 아름다움을 지닌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하고 전주 한지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되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는
전국 한지 공예 대전을 비롯하여 한지 뜨기 체험, 탁본 체험, 소망등 달기, 한지 공예 장터, 한지패션쇼, 한지 그림그리기대회,
 가족 문바르기 대회, 한지 공예 교실, 한지와 전통 문화 체험.....등 다양한 체험 행사와 이벤트가 벌어지는 전주 특유의 축제이다.


그중에서도 한옥 마을에 위치한 천양제지는 방문하는 사람들이 직접 한지 제작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원래 한지 제작 과정은 닥나무 거두기 -> 찌기 -> 껍질 벗기기 -> 담그기 -> 삶기 -> 씻기와 햇빛 쐬기 ->티 고르기 -> 두드리기 ->
해리 -> 종이 뜨기(초지) -> 물 빼기 ->말리기 -> 다듬기 
등의 엄청나게 복잡하고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제작 과정을 모두 다 체험하기엔 무리지만 닥종이 죽통에서 한지 뜨는 과정 정도는 누구나 체험해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지를 뜰 때는 외발뜨기와 장판 뜨기를 사용했다고 하나 현재는 개량법인 쌍발뜨기를 하고 있다.
 이는 쌍발뜨기가 잡기 편리할 뿐만 아니라 여러장 만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뜨는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발틀을 닥종이 죽이 가득한 지통에 담궜다가 들어올린다.


발틀에 담긴 닥종이 죽을 앞 뒤 양면으로 재빠르게 흔들어준 후 남는 원료는 다시 지통 속에 버린다.


발틀을 흔들어주면 물 때문에 탄성을 잃었던 종이 원료가 서로 얽히게 되는데
이때 대부분의 물은 발을 통해 아래로 버려지고  섬유층만 남아 발틀 안에 뿌연 종이막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이 어느 정도 빠지면 발틀을 열고 발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그리고는 편평한 곳에 엎어 놓고 로울러로 눌러 밀어서 물기를 제거한다.


그리고는 발을 살짝 들어내면 하얀 한지가 완성....전문가가 아니라도 멋진 한지 한장을 완성할 수 있다.


한지라고 하면 문살을 바르던 하얀 문종이만 생각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즈음 전시장을 돌아보면 너무나 다양한 한지가 생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한지로 만든 한복까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색감이나 조직의 우수성이 기존 섬유에 못지 않다고 하니...
새삼 우리 한지의 우수성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 느껴졌는데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런 전통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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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청도 소싸움 축제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청도 반시...정도?

경북 에서도 조그만 소읍에 불과한 청도에는
의외로 오래된 고택, 읍성, 서원 등을 비롯한 문화재가 산재해있다.
소읍이라고는 하지만 볼거리를 찾아다니다보면 하루에 다 돌아보기도 벅찬 청도 여행..
그 중에도 요즘 여행객들에게 특별히 각광받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청도 와인 터널'이다.



경북 청도군 남성현 송금리에서 문을 연 와인 터널은 부부, 연인, 가족, 친지의 즐거운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터널은 실제로 열차가 다니던 터널을 개조해서 와인 저장고 및 카페로 문을 연 것이다.


 열차가 운행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오래된 터널을 청도 와인(주)에서 감 와인 숙성고와 카페로 탈바꿈시켰다.


'와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포도로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감 와인이라는 것은 생소하게 들리실 것이나
청도 특산품인 '반시(감)'을 이용하여 만든 감 와인은 100% 감즙으로 만든 것으로
산업자원부 지역 특화 산업으로 선정되어 3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완성하여 2004년 10월에는 전통 식품 Best5 에 선정됐고
2005년 11월에는 부산 APEC 정상회의 참가대표단 리셉션 만찬주로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반시 모양같기도 하고 와인 저장통같기도 한 출입구를 들어서면 갑자기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어두움에 눈에 익숙해지면 천정에 쓰인 와인 터널-감그린이라는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입구엔 여러가지 감 와인(감그린) 샘플과 더불어 감 와인에 대한 소개글이 벽면에 적혀 있어 방문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와인 터널과 인근 세트장에서 SBS 월,화 드라마 '떼루아'가 촬영되었다고 하는데
김주혁(강태민), 한혜진(이우주) 주인공으로 열연했던
 떼루아는 
와인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한국의 전통주와 프랑스의 와인을 둘러싼 주인공들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 터널은 일제 제국주의 시절에 한반도를 침탈하고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하여 건설되었으니
우리 민족에게는 뼈아픈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 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에 완공된 이 터널(구 남성현 터널)은 
육면체의 화강암과 적벽돌을 3겹의 아치형으로 조적하여 건설하였는데
천정은 붉은 벽돌로 쌓고, 벽면은 자연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단선으로 열차가 운행 되었으며  터널은 지형적으로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사가 급하여
당시의 증기 기관차로는 힘이 부쳐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숨을 헐떡이며
이 고개를 
오르내렸을것으로 추정되며, 인근 남성현역과 삼성현역에서 기차를  회차하며 운행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노선은 개통 초기부터 구조적으로 경사도와 먼 운행거리가 문제시되어서 
1937년 평탄한 직선 노선의 터널이 개통됨에 따라 최근까지  특별한 용도 없이 방치되어 왔다가
(주)청도 와인이 감 와인(감그린)을 개발 후 숙성 저장고를 물색하던 중 이 터널을 활용하기로 결정하고
내부 정비를 마친 후 2006년 2월 부터 숙성 저장고 및 카페로
바꿈시킨 것이다.


청도 와인(주)의 하상오 대표는 감 와인을 만들기 전 대기업 식품 회사에 식혜를 납품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중 청도 특산물인 청도 반시로 만든 감 식초의 기능성에 착안, 와인 생산을 시도했다.
감이 삭아서 일순간 술로 변했다가 식초로 바뀌는 과정을 포착한 것이다.
2001년부터 2년여 동안 수십 차례에 걸친 실패에도 불구하고 와인 제조시험을 통해
그는 미생물까지 걸러내는 감 와인의 여과법과 발효법을 터득했고, 마침내 2003년 5월 감그린으로 출시하게 되었다.



청도는 납작하면서도 씨가 없는 감, 즉 반시로 유명한데 감 와인은 재료로 씨앗이 없는 청도감만 사용한다.
씨는 기름기와 약간의 독성을 함유하고 있어 씨가 있는 감을 이용해 술을 만들 경우
일일이 씨앗을 골라 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 

청도감은 씨앗이 없는지라 공정을 줄일 수 있고 특유의 높은 당도 또한 와인을 빚는데 더 없이 좋은 소재가 된다.

감 와인의 우아하고 깊은 맛은 감나무의 수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와인의 재료인 포도나무 수명은 고작 10년 안팎이지만 감은 10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감이 열린다.
감나무의 수명은 포도나무와 비교도 안될 만큼 길기 때문에 떫은 맛을 내는 탄닌(Tanin)성분이 포도에 비해 20%나 더 많아서

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심장병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내며 숙취 해소에도 그만이라고 한다.



이렇게 재탄생한 와인 터널은 현재 1.01km 길이에 높이 5.3m, 폭 4.5m규모로 15만병이 넘는 와인을 저장, 숙성하고 있다.


바깥 온도가 영하에 달하더라도 터널 내부는 연중 14~16도의 온도와
60 ~ 70% 의 습도를 유지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고

특히 여름철엔 최고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어서 이곳을 방문하려면 따로 긴 팔 셔츠 정도는 준비해서 가는 것이 좋다.


 터널 중 200m만 시음 공간과 와인 저장고로 활용해 오다가 터널 전체를 100~200m단위로 나누어
역사 기행 박물관, 빛이 없는 어둠의 공간, 와인 맛 감별 공간 등으로 새롭게 개발하였다.


특히 터널 벽에는 개인용 와인 진열장을 마련하여 방문객들이 자신의 와인을 이곳에서 전시, 숙성하는 서비스도 하고 있다.



 110년의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와인 숙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내 최대의 와인 터널.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연인들끼리 들린다면 감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이니
이 터널은 감 와인의 숙성 뿐 아니라 방문하는 분들의 사랑과 추억을 숙성시키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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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나다가....
바람 불다가....
비 오다가...
봄이라고는 하지만 날씨가
유난히 스산하고 변덕스럽던 어느날.

문득 차를 몰아 동해안을 질주한다.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는 성난 바다를 오른쪽으로 끼고
구비구비 해안선을 돌면
거기 탁 트인 동해를 가슴에 안을 수 있는 바다가 나타난다.



해맞이 공원. 등대가 있고, 힘들면 바라보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푸른 바다가 있는 곳.
등대 앞에 서니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바람이 불고 간간이 뿌리는 빗방울은 더욱 스산하여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어묵 국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차를 되돌리지만 정작 가야할 곳은 따로 있다.


바.람.의.언.덕......
거제도에 바람의 언덕이 있다지만 나의 바람의 언덕은 바로 이곳이다.


외계의 어느 곳에 불시착한 것인가.....발걸음을 일순간 얼어붙게 했던 바로 그곳. 영덕 풍력 발전소.
거대한 골리앗 같은 수많은 바람개비가 윙윙 거리며 돌아가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같이 바람이 불고 스산한 날에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이름을 다시 덧붙여준다.


제일 높은 곳,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간간이 흩뿌리던 비가 그치니니 구름 사이로 파란 햇살이 나타난다.


폭풍 후처럼 드라마틱한 하늘 아래  버티고 선 바람개비는 더 당당하게 보인다.


아....바람개비 너머 바다 위로 선녀의 다리가 나타난다. 무.지.개.....다.


오늘 폭풍의 언덕에서 무지개를 만나러 스산한 하늘과 세찬 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무지개를 향해 양팔을 벌려본다.  세찬 바람을 타고 어느새 바다 위로 날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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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문화의 보고 전주는 지금 도시 전체가  들뜬 분위기이다.
전주 영화의 거리에선 제 '11회 전주국제영화제(JIFF:4/29~5/7)'가
전주 한옥 마을을 비롯한 인근지역에서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5/1~5/5)'가 열려
전주를 겹치기 축제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한옥 마을을 중심으로 열리는 전주 한지 문화 축제는 독특한 멋과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하고 전주 한지의 명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최되는데
한지 공예 대전 및 한지 패션쇼, 여러가지 한지 관련 체험 행사가 다양하게 개최되고 있어
행사 기간 동안 한옥 마을을 방문하는 가족 단위 여행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한옥 마을의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 노점들.
마을 특성에 맞는 소품들이 다양하게 선을 보이고 있어 하나하나 돌아보며 눈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여심을 사로잡는 완소 소품은 오가는 행인들의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데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완소 소품 몇 점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전 조각 보자기 하나 사서 창문을 장식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어느 소품이 가장 맘에 드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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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을 옆에 끼고 까마득한 고층 아파트 숲 사이에 섬처럼 폭...꺼져 있는 마을, 대구 삼덕동.
일제시대부터 이십여년전까지는 유력한 인물이 많이 살던 대구 최고의 부촌이었다.
아파트로 주거 형태가 바뀌고 사람들이 하나 둘...이 마을을 떠나면서부터
동네의 집들은 비워지고 저소득층이 사는 마을로 변모해갔는데
한사람의 제안으로 담장허물기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마을은 다시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골목 문화'가 이곳의 적산 가옥인
'빛살 미술관'을 중심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고 있다.



재개발 바람이 불어 사라질 뻔 했지만 이제는 대구의 골목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삼덕동,
미쳐 담장을 허물지 않은 집들은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 찾는 이들을 반겨준다.
골목 전체가 오픈 갤러리인 삼덕동에는 주민센터에조차 멋진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오늘은 주민 주민센터 벽에 그려진 멋진 벽화와 정크 아트 자전거 거치대를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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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의 큰 줄기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이 태어난 고장, 밀양.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장 밀양은 가는 곳마다 역사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고택이 즐비하다.



이 밀양에는 두 손씨 가문이 있는데 밀양 손씨(밀성 손씨)와 일직 손씨가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향교가 있는 마을 교동(校洞) 주위에는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 등 30여채의 고택이 밀집해 있다.



마을 고택 중은 특히 눈에 뜨이는 고택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61호인 '밀양 교동 손씨 고가'이다.
일명 만석꾼 집으로 알려져 있는 교동 손씨 고가는 택지가 무려 1,000평이 넘는 규모인데
안채, 사랑채, 중문간채, 아래층, 사당채,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사랑채 등으로 구성된 99칸의 큰 주택이다.



동편에 ㄱ자로 자리잡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큰 사랑채가 있고 그 맞은편 중문을 지나면 작은 사랑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행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과, 우측에 사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이 있으며 우측으로 진입하면 ㄱ자형의 화려한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집은 숙종 때 학자인 손성증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큰 사랑채는 손영돈이 1900년경에 근대공법을 원용하여 특색 있는 건물로 지었다.

사랑채의 누마루 하부를 벽돌로 쌓아 여느 누마루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대신 화려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1935년 불이 나 정침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으며 여러 해를 두고 지금과 같이 재건하였다.



창호문 대신 유리문을 끼워 화려함을 더한 사랑채 입구에는 몽맹헌(夢孟軒)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이집은 건물의 수도 많고 배치 형태도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등 내외 생활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은 집인데
왼쪽에는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과 측면에 창고·행랑방·찬간 등이 있는 별채가 ㅁ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왼쪽 뒤 높은 곳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역시 자물쇠로 잠겨 있다.



밀양 교동
손씨 고가는 현재 '열두대문'이라는 한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밀성 손씨 11대손인 손중배씨가 운영하고 있다.
열두대문이란 식당의 이름은 과거 이집의 대문 수가 열두개였다는데서 따온것인데
필자도 이왕이면 열두대문집에서 밀양 고택의 전통 밥상을 마주하고 싶었으나
반드시 예약손님만 받는 이집의 방침 때문에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이 교동에는 열두대문집 말고도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를 비롯해서 비슷한 규모의 고택이 많으니
시간이 허락하면 다른 가옥도 돌아보면 조선 후기 가옥 형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 후엔 언덕 위에 자리잡은 향교의 누각 풍화루에 올라 교동 전체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밀양의 '은밀한 햇살'을 느껴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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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嶺南樓)'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멋진 건축물이다.


남천강(밀양강) 건너편에서 당당한 모습의 영남루를 마주 대해 바라보노라면 오른쪽 언덕 아래에 사당이 하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남루를 돌아본 후 동쪽 문으로 나와 남천강변으로 난 계단을 한참 내려가 본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사당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배산임수의 멋진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작은 문을 통해서 계단 위에 있는 사당이 보이는데 노랑과 빨강이 주를 이루는 단청의 색감이 곱다.


아랑각(阿娘閣)이라 불리우는 이 사당은 은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미모가 뛰어났던 밀양 부사의 외동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은 얼굴만큼 마음씨도 고울뿐 아니라 글과 바느질 솜씨가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날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는 통인이 아랑의 고운 모습을 본 후. 그만 그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랑의 유모에게 뇌물을 주고 아랑을 꾀어내게 되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날밤, 통인은 영남루에서 달 구경을 하던 아랑에게 나타나 그동안 혼자 연모해 온 것을 아랑에게 고백하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달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아랑은 냉정하게 통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한 통인은 사모하던 마음이 그만 증오로 변하여  갖고 있던 비수로 아랑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아랑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후 밀양에는 부임하는 신임부사들마다 죽음을 당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밀양 부사로 오는 것을 꺼려했다.



이때  서울 남산골에 사는  한 대담한 선비가 자원하여 밀양 부사로 부임했다.
정말 소문대로 부임한 첫날 밤에 여자의 혼령이 나타났다. 
그는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길래  이렇게 부사가 오기만 하면 나타나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랑은 통인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이 선비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내일 한 나비가 나타나서 한 사나이의 머리에 머물테니 그가 곧 자신을 죽인 범인이라고 말했다.
부사는 처녀 귀신과 약속한 대로 통인을 잡아 처단하고 처녀의 묘까지 만들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밀양 주민들은 아랑각을 지어 그 처녀의 정절을 기리고 소원을 기원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밀양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6일이면 소복한 처녀들이 제관이 되어 제등을 밝히고 그의 정숙한 넋을 기리는 아랑제가 열린다.


아랑각 문을 통해서 보는 남천강은 푸르고 깨끗하기만 해서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겼던 곳이란걸 짐작하기 힘든다.
어린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김길태와 같은 인면수심의 치한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이 시기에
아랑처럼 억울한 희생을 당하는 우리의 딸들이 이 땅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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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으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긴 했다지만 
밀양은 그저 경상도 한 구석에 짱 박혀 있는 그런 조그만 소도시에 불과하다.
도시 자체가 그다지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시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나직한 돌담들이 우리를 반기는 곳.
'은밀한 햇살'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밀양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조차 온화하다.


밀양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영남루(嶺南樓)'이다.


추화산을 등지고 남천강(밀양강) 맑은 물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절벽 위에 좌우에 익루를 끼고 날아갈 듯 서있는 누각 영남루.
그 당당하고 날렵한 모습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부의 객사인 밀주관에 부속되었던 건물이다.
고려 공민왕(1365년)때 이전에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가 큰 누각으로 세워졌는데 임진왜란때는 밀양 객사와 함께 소실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년)에 중건된 것으로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물 중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16경중에 하나로 선정된 것을 미루어 볼 때 수려한 경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각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누의 양옆에는 각각 1채씩 부속 건물이 있는데
본루를 기점으로 좌측에는 침류당(枕流堂)을 우측에는 능파각(凌波閣)을 익루로 거느리는 특이한 형태이다.
특히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시킴으로
 당당하면서도 날렵한,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멋진 누각이다.


특히 기와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래 끝에 부착된 귀면와(鬼面瓦)인데 이것은 조선시대 귀면와 중 걸작품이다.


영남루 전면의 현판 글씨는 추사체의 대가 구한말 송파 하동주의 글이다.


마당 쪽에서 올라가는 계단 위에도 많은 현판들이 붙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인 중층 누각의 내부 모습은 시원하도록 넓다.
건물의 기둥이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누각의 내부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한 충량과 퇴량은 물론 대형 대들보가 모두 화려한 용신으로 조각되어 있는가 하면


봉황 등 화려한 꽃 무늬가 가득하여 특이한 내부 구조와 함께 하나하나 바라보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 




내부의 현판 중 유명한 것은 1843년부터 1844년까지 이 건물을 중수할 당시
이인재 부사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인 이증석, 이현석 형제가 쓴  현판인데 '영남제일루'는 이증석이 11세 때 쓴 글씨이다.


그리고 '영남루'는 이현석이 7세 때 쓴 글씨인데 각각 7세, 11세인 어린아이들이 이렇듯 힘차고 큰 글씨를 썼다니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다.
이 두 현판은 서예가들로부터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전해내려 온다고 한다.


그 외에도 누각 안에는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들의 시문 현판들이 즐비하다.




퇴계 이황이 영남루를 예찬하여 쓴 시도 눈에 뜨인다.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바라보니 눈 앞에 펼쳐지는 보는 남천강(밀양강)의 전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눈부시다.


강둑과 둔치의 체육 시설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여름철이면 마루바닥이 비좁을 정도로 누각을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영남루의 맞은 편에는 천진궁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역대 왕조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내부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비롯해서 부여, 고구려, 가야, 신라, 백제의 시조 위패와 고려 태조, 조선 태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대가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어버리고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천진궁은 건축적 가치에 앞서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감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영남루 마당을 자세히 보면 바닥에 돌들이 도드라지게 올라온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석화(石花)라고 한다.


연한 납석으로 이루어진 석화는 영남루 전체와 부근에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그 형태가 국화꽃 모양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비 온 후에는 그 자태가 선명하고 아름다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자연 유산이다.


영남루를 한바퀴 돌아보고 내려오니 누각 아래 목련이 아름답게 피어 여행자를 반긴다.
은밀한 햇살은 밀양에 먼저 도달하여 꽃샘 추위 속에서도 아름다운 봄을 재촉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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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중국.....화교들의 집단 거주지 '인천 차이나 타운'.
'화교(華僑)'는 '중국 국적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그 나라에 활동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우리 나라에 화교들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우리 나라는 청나라에 근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 때 약 30여명의 상인들이 함께 들어오면서 공식적으로 화교의 유입이 시작되었는데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되고 지금의 인천 북성동 일대 오천여평에
화교들의 거주지역이 생기니  이 곳을 '청관거리(현 차이나 타운)'라고 부르게 되었다. 

화교 1세들은 고유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중국의 큰 명절인 춘절(설날)과 원소절(보름날)사이의 15일 동안 마을은 온통 축제분위기 였으며
집집마다 복을 기원하는 글을 빨간 종이에 써서 붙이고 색등을 걸어 놓고
해가 저물면 긴 장대 끝에 폭죽을 수 백개씩 달아 놓고 불꽃놀이를 즐겨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현재 화교 2·3세들이 170여 가구 500여명이 살고 있는 이 곳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 속에서 중국의 옛모습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이색 지대이다. 

낮의 차이나 타운은 지저분하고 한편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밤에는 또 다른 모습이 된다.
낮과는 또 다른 얼굴로써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하는 화려한 불빛.
병들어 야윈 몸 위에 분칠하고 붉게 입술을 바른 차이나타운의 야경은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는데....... 
차이나타운을 돌아다니며 군데 군데 찍은 이미지들을 무작정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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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처음 그곳을 들렸던 기억은 거의 10 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행중 여러곳의 사찰을 방문하곤 하지만 부석사 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빛 바랜 앨범 속 사진 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아스라이 남아 있던 부석사..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추위가 가셔지지 않은 어느 조용한 날에 다시 찾아본다.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서 부석사로 들어가는 길이 시작된다. 
 

 
 사과밭과 인삼밭 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숫길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나목이 늘어서 있는데도 이렇듯 아름다운데 가을에 단풍이 물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회가 된다면 가을에 다시 찾아와 사진으로 꼭 담아보고 싶다.

 
 천왕문 들어가기 전 왼쪽 편에 당당하게 서 있는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가 눈에 뜨인다.
행사가 있을때 사찰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필자의 앞을 가방을 멘 여학생이 담담하게 스쳐 지나간다.
갸날프게 생긴 여학생이 홀로 사찰을 찾다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천왕문을 향해 걸어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어쩐지 고독하게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아...산자락 아래 단아하게 펼쳐진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 서서 보니 수려한 산자락 아래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이 차례로 펼쳐져 있다. 


경내에서 제일 먼저 방문자를 맞아주는 건물은 범종루인데 이 건물의 전면은 동쪽을 향해 있고 측면이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는데 범종루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름은 범종루이지만 범종은 바로 옆에 있는 신범종각에 걸려 있고 범종각에는 큰 법고와 목어만이 걸려 있다. 


범종각을 지나면 다시 높은 계단 위로 안양루가 그 수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무량수전 앞마당 긑에 놓인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이 건물은 앞과 뒤에 걸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 편액에는 안양루라고 되어 있으니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문을 통하여 위로 바라보니 시선에서 약간 어긋나게 국보 제 17호인 아름다운 석등이 위치하고 있다.
 


연화대 위 8각 화사석 사이로 난 창을 통해서 무량수전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곳인데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려서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하였으며 1916년에 해체, 수리 공사를 한 건물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팔작지붕의 시초인 무량수전은 주심포 기둥이 절묘한 배흘림 기둥인 것으로 유명하다.
배흘림기둥이란 기둥 중간 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한 기둥인데
중간을 볼록하게 함으로 기둥 머리 부분이 넓어보이는 착시현상을 막아주고
건축물의 무게가 기둥의 중간 부분에 집중된다는 건축 구조 역학을 고려한 것이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왼쪽 뒷편에는 부석사 이름의 유래가 된 부석(浮石)이 있다.
부석은 우리 말로 '뜬 돌'인데 돌이 실제로 떠 있을 수는 없으니 아래 돌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이 부석에는 선묘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중국 여인인 선묘는 의상대사가 중국에 있을 때 그를 몹시 사모했다.
그러다 의상대사가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게 되자 선묘는 그만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만다.
그 뒤 의상대사가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을 때 이 자리를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죽은 선묘의 영이 돌을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도망가게 되어 그 자리에 부석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으로 올라 아래를 보니 안양루, 범종루를 비롯한 사찰 내의 건물들이 아담하게 들어앉은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도 보물 제249호로 지정된 단아한 석탑이 있는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1960년 석탑을 해체, 수리했을 때 3층 옥신에 있는 사리구멍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수습되었다.

 
3층 석탑을 지나 산기슭을 조금 올라가면 조사당이라는 고려시대의 목조건물이 있다.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은 1377년(우왕 3)에 창건되었고 1490년(성종 21)에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세부 표현이 간결한 모습이다.


정면 가운데에는 살문을, 그 좌우 옆칸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았는데  파스텔톤의 색감이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다. 

 
조사당 전면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선비화(골담초)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란 전설이 있는데
심하게 촘촘한 창살 속에서 자라고 있어 그 모습을 확인하고 사진에 담기는 조금 난감한 일이다.
조사당은 부석사 제2의 목조 건물로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산에서 내려오며 안양루 아래 펼쳐진 경치를 내려다 보니 맞은편 산과 마을에 저녁 안개가 은은하게 펼쳐져 있다.
안양루에 걸린 김삿갓의 시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를 떠올리며
쉴새 없이 셔터를 누르던 손을 잠시 멈추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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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노 촬영지를 찾아서'라는 컨셉으로 여행 계획을 잡은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세찬 비가 주룩주룩....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많은 고민에 빠졌지만 이왕 계획한 일이라...우중에 길을 나선다.
앞도 잘 안 보이게 자욱한 비안개 속을 더듬더듬 운전해 안동 시내에 도착하니 그나마 빗줄기가 좀 가늘어져 
병산서원 가는 길에 위치한 정자 체화정에 잠시 들려 운치있는 정경을 담아본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 위치한 체화정은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0호 이다.




이 건물은 진사 이민적(1702~1763)이 학문을 닦기 위해 마련한 정자로
순조 때 용눌재 이한오가 노모를 모시고 거쳐하기도 한 곳이다.



정자 앞에는 삼신선(三神仙)을 상징하는 3개의 인공 연못이 있는데 건물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졌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이다.


일반적으로 방 앞쪽에 퇴칸은 방 보다 적게 만드는데 여기서는 방의 크기와 같은 3칸 마루를 설치 하였으며
건물 사면에 난간을 둘러서 연못을 조망하기에 적당하도록 배려하였다.



체화정은 건립 당시의 연못과 정자가 잘 보존되어 있어 조경미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정자 난간에 기대어 조그마한 연못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너무나 고즈녁하여 오히려 비오는 날 찾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건물 양쪽에 수려한 자태의 배롱나무가 서 있어서 운치를 더해주는데
여름에 잎이 나고 붉은 백일홍이 만발한 정경은 겨울과는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아직은 추워보이기도 하지만 시원한 바람 부는 여름날
누마루 위에 다시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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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 위치한 하회마을은 '하회(河回)'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마을 전체를 감싸 돌아 '물도리마을'이라고 불리우는 마을인데
하회마을에서도 가장 안쪽인 소나무 숲 맞은 편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부용대(芙蓉臺)'가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화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부용대는 강변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이용해 건너갈 수 있는데
불어난 강물로 인해 나룻배가 운행치 않아 하회마을에서 벗어나 승용차를 이용해 먼길을 돌아 부용대로 향한다.


부용대 입구엔 화천서원(花川書院)이라는 제법 큰 규모의 사원이 자리잡고 있는 이 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맏형인 류운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유도문, 누각인 지산루, 강당인 숭교당이 좌우에 동서재를 거느리고 있어서 병산서원과 거의 같은 배치를 보이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이는데 
100 여년 동안 이어 내려오던 화천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96년에야 복원되었다.


화천서원 앞에 차를 주차하고 좀 걸어가니 서애 유성룡 선생이 건립한 옥연정사(玉淵精舍)가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정사(精舍)란 학식 높은 유학자가 학문을 강의하고 정신을 수양하던 곳을 이름인데


옥연정사는 류성용 선생이 만년에 임진왜란 때의 일을 추억한 징비록을 저술한 곳이니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옥연정사의 문을 지나 부용대로 오르니 아침부터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치긴 했지만 심한 안개가 끼어 시야가 분명치 않고 뿌옇게 흐려기만 하다.


64m 높이의 절벽인 부용대 정상에 오르니 햐아.....하회마을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진다.


바로 아래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하회마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방금 앉아서 쉬다 온 소나무 숲도 발을 디디면 사뿐히 내려설 수 있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부용대 정상에 서서 하회마을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니 아하.....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차 트렁크에 삼각대를 넣어두고 그냥 온 것이다. 좀 무겁더라도 삼각대를 가져와야 파노라마로 담을 수 있는데....
삼각대가 없으니 할 수 없이 선 자리에서 몸을 비틀어 화회마을의 전경을 이리저리 마구 담아본다.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고 손각대로 찍은 사진 4장을 붙여 억지로 파노라마를 만들어 보았다.
이어지는 부분을 자세히 보면 이미지가 많이 틀어진 것을 보실 수 있는데 부디 너그럽게 보아 주시길....

집에서 출발할 때 "모처럼 출사인데 웬 비...."이렇게 생각하며 궂은 날씨를 원망하며 나섰는데
내리던 비가 그치고 하회마을을 둘러싼 강과 산에서 신비로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환상적인 정경 앞에 서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카메라를 든 손마져 떨릴 정도로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절벽 끝으로 조심스럽게 더 다가서서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헉....64m 라고는 하지만 체감되는 엄청난 높이로 인해 발바닥이 짜릿짜릿하다.


강물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물내음을 맡으며 부용대의 시원한 경관에 취해 멍 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맞은편 산에서 피어오르던 물안개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하회마을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당황하며 어....어.....하는 동안 순식간에 하회마을은 물론이고 발 아래 강물과 숲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뿌옇게 흐려지고
부용대 정상으로도 물안개가 자욱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채 5분도 안 되어 발 아래 강물이 안 보일 정도로 주변이 안개로 가득해진다.
이미 4시를 넘어 5시가 가까워지는데 안개가 몰려오며 주변이 어두워지니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서둘러 부용대를 내려온다.


부용대 아래로 내려와 절벽 위를 바라보는데 바위가 꿈속의 장면처럼 희미하게 보이니 갑자기 머리와 눈 앞이 몽롱해지며
지금 이 자리에 선 나는 현실의 나일까....꿈 속의 나일까.....하는 착각마져 들기도 한다.


안개로 인해 부용대를 내려왔지만 그냥 발길을 돌리기엔 너무나 아쉬워 인적 하나 없는 강변을 거닐어 본다.


절벽 바로 아래에는 이렇게 수석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그림같은 바위도 있는데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강변 모래톱에 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너무나 몽환적이다.


발길을 옮기지 못 하고 가만히 물안개를 바라보고 있으니 구름 낀 하늘, 물안개, 건너편 마을의 불빛이 모두 강물에 그대로 어린다.
하늘의 구름, 물 속의 구름.....땅 위의 물안개, 물 속의 물안개.....모두가 그대로 한폭의 멋진 데칼코마니다. 


처음 오른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의 정겨운 파노라마, 뭉실뭉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건너편 산의 장엄한 모습,
저녁 무렵 강물에 어리는 산과 구름, 물안개......꿈인지 현실인지 모든 것이 너무나 몽환적이다.
해지기 전에 하회를 벗어나리라 생각했던 발걸음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떼어지지 않고
하염없이 건너편을 응시하다 그만 그 자리에 털석.....주저 앉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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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드라마 '추노'의 자취를 찾아 안동과 영주로 떠난 날,
아침부터 세차게 내리는 비가 그다지 달갑지 않다..
먼저 추노의 주촬영지인 병산서원을 돌아보고 화회마을로 들어서니
빗속이라 관광객들도 뜸하고 마을은 고요하기만 하다. 

                           

 얼마전 1박 2일 안동편에서도 소개되었던 하회마을.
3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의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서
화회마을 어귀에서 시청자들과 줄넘기를 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의 씨족 마을로 유운룡, 유성룡 형제 대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다.
'하회(河回)'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마을 전체를 감싸돌아 '물도리마을'이라고도 불리운다.


1999년 영국 엘리바베스 여왕이 방문하여 더욱 명성을 얻게 된 이 마을은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민속마을인데

아쉽게도 요즘은 대부분의 마을집이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등
너무나 상업적으로 치우쳐 찾는 이를 씁쓸하게 한다.

 

몇번이나 다녀갔던 마을 구경은 간단히 건너뛰고 마을 끝부분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향한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눈을 들어 맞은편을 보니 소나무 숲 맞은 편에 펼쳐진 64m 절벽, '부용대(芙蓉臺)'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부용이란 연꽃을 이르는 말로써 처음에는 북쪽에 있는 언덕이란 뜻으로 '북애(北厓)'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솔밭을 지나 하회나루터로 내려서니 발 아래 넓게 펼쳐진 강변의 모래는 곱기만 하다.
 


평소에는 여기서 나룻배를 타고 강건너편 부용대로 오를 수 있으나
오늘은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난지라 아쉽게도 나룻배를 이용할 수 없다.



강 너머로 자세히 살펴보니 너무나 운치있는 고택들이 부용대 양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동쪽에 위치한 고택은 '옥연정사(玉淵精舍)'로
서애 유성룡 선생이 건립한 정사(학식높은 유학자가 학문을 강의하고 정신을 수양하던 곳)인데

선생이 만년에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의 일을 추억한 '징비록'을 저술하였으니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의가 있는 곳이다.



서쪽에 위치한 고택은 '하회겸암정사(河回謙菴精舍)'로
유성룡 선생의 맏형인 유운룡 선생이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을 위해 세운 것이다.



드라마 '추노'를 보면 많은 장면들이 화회마을 인근의 낙동강변에서 촬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른 사극에서 등장하지 않은 곳을 화면에 담기를 원하는 곽정환 감독의 로케이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4회에서 운신해있던 사찰을 빠져 나와 대길과 백호의 추격을 피해
나룻배로 강을 타고 내려가는 장면이 부용대 바로 앞에서 촬영되었다.

강을 건너지 못한 대길, 최장군, 왕손이 먼 길을 돌아 세차게 말을 몰고 달려오던 강변은


역시 부용대의 서편으로 하회겸암정사의 바로 앞 강변이다.
먼 길을 달려와 송태하와 언년이가 탄 나룻배를 향하여
애기화살을 겨누는 가슴 조마조마한 장면을 촬영한 곳도 바로 부용대 앞.

대길의 어깨 바로 뒷편에 옥연정사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대길이 서서 활시위를 당기던 곳에 서서 한컷 담아 보았는데 궂은 날씨로 인해 하늘이 하얗게 다 날아가버려 아쉽기만 하다.


강편 서쪽으로 한참 걸어와 부용대와 낙동강 동편을 바라본다.
대길의 화살 공격을 간신히 피하고 뱃사공(김경진 카메오 출연)도 내친 후
유유히 노를 저어 하류로 사라지는 송태하와 언년이의 모습이 기억에 남던 곳이다.



한떨기 연꽃같은 하회마을 부용대. 비가 와서 파란 하늘 아래 버티고 선 부용대는 담지 못했지만
맑은 날 본 부용대와는 또 다른 운치있는 느낌으로 보게 되었으니 비오는 날 나선 추노 여행은 도리어 행운의 여행길인 듯.....


다만 비가 내림으로 인해 나룻배를 이용해서 부용대를 오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아
자동차를 이용해서 한참을 돌아 부용대에 오르는 코스를 택하고 서둘러 하회마을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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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길

자작나무길
메타세콰이어길

맑다
푸르다
햇살을 삼킨다

설렌 가슴을 안고
싱그런 그대를 맞으면
외로움과 기다림의 시간
눈 녹듯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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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보면 왕과 왕비가 산책하다가
궁궐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오는데
아름다운 연못 위에 그림같이 지어진 2층 정자는
바로 경복궁 건청궁 앞에 있는 향원정이다.

사실 사극 드라마에서 이 향원정을 거니는 장면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향원정은 대부분의 사극 드라마보다 한참 뒤인 고종 때에 건립된 것이므로
웬만한 사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옥의 티가 되는 것이다.
  

  1873년 고종은 건청궁을 지으면서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을 파서 한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모지붕을 얹은 2층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는 뜻으로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구름다리도 만들었는데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다리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를 거쳐 밖으로 흘러 나간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했다. 

 연이은 추위로 인하여 향원지에는 얼음이 두텁게 얼어 있는데
눈을 단단하게 뭉쳐서 연못 위로 던져 보았더니 눈덩이가 쭈욱 미끄럼을 탄다.
예전의 어느 문인이 쓴 회고담에서 자기가 연애할 때
경복궁 담을 넘어가
향원지 얼음 위에서 몰래 스케이트 탔던 기억을 더듬던데...
요사이는 만들어내기도 힘든 추억같이 들렸다. 

따스한 봄이 오고 꽃이 피는 봄날이 오면 다시 향원정에 와서

왕비가 되어 저 다리 위를 한번 우아하게 걸어보고 싶다..

그럼 옆에 선 남자가 브레이크를 슬쩍 걸겠지?

"야...혼자 드라마 찍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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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수목 드라마 '추노'에서 그 이름이 대두되며 극의 흐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운주사'.
이곳에는 크기도 각각 다르고 모양도 각양각색인 불상과 석탑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 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많은 불탑과 석불이 이 곳에 있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산중턱에는 도선국사가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자 했으나 

공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결국 일으켜 세우지 못한 '와불' 두기가 나란히 누워 있고

와불로 가는 길에 있는 '칠성 바위'는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가 흡사한 원반형 석재가 

북두칠성의 배열대로 놓여 있어 호기심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이런 범상치 않은 와불과 바위, 수많은 석불과 석탑은 누가 무엇때문에 이곳에 조성해 놓았는지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세간의 호기심을 더하는 곳이 운주사이다.

필자는 운주사를 상징하는 와불과 다양한 석불, 칠성 바위에 대해 두번에 걸쳐서 포스팅한 바 있는데 
오늘은 특이한 형태의 불상들과 마찬가지로 운주사의 소박하고도 다소 엉뚱한 석탑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의 석불로 가득 찬 운주사.
이곳의 석탑 또한 모두 다른 사찰과는 다른 서투르기 짝이 없는 솜씨의 탑들이다.
 

 

예전엔 천불 천탑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17기의 석탑만 남아 있는데
석탑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다양한 개성을 뽐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의 석탑은 연꽃무늬가 밑에 새겨진 넙적하고 둥근 옥개석의 석탑과 동그란 발우형 석탑,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을 닮은 백제계 석탑, 감포 감은사지 석탑을 닮은 신라계 석탑,
분황사지 전탑 양식을 닮은 모전계열 신라식 석탑이 탑신석의 특이한 마름모꼴 교차문양과 함께 두루 나타나고 있다.   

 9층 석탑은 운주사로 들어가는 남쪽 골짜기의 첫 입구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커다란 바윗돌로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을 삼고 그 위로 윗층 기단을 쌓은 후 9층에 이르는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탑의 면이 사각형인 것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탑들과 같으나,
지붕돌 밑면에 받침을 생략한 모습이나 각 면에 마름모 안에 꽃 모양을 새긴 모습들은 보기 드문 예이다.
 이는 지방적인 색채가 뚜렷했던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운주사의 여러 탑 가운데 높이가 가장 높은 것으로,
원래 지방유형문화재 제8호였다가 1984년 보물 796호로 지정되었다. 

9층 석탑의 다음에 있는 7층 석탑은 높이 9.6m로 전남 유형 문화재 276호이다.
상륜부는 소실되었지만 비교적 단정하고 소박하며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아래서 위로 올려보고 찍은 드라마의 씬에서는 7층 석탑의 단정하고도 날렵한 자태가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운주사 쌍교차문 7층 석탑은 X자가 두개씩 새겨져 있는 문양이 무척이나 이채롭다. 

 마치 아이들이 문양을 빚은 듯한 이 탑은 신라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각층 탑신석에 쌍교차문(X)과 마름모꼴(◇)의 형태를 장식하는등
국내 석탑에서는 유례가 없는 특이한 장식을 보여주고 있다. 

경내의 다른 탑에 비해 비교적 안정감을 주는 쌍교차문 7층 석탑의 높이는 7.75m 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형태를 지닌 이 석탑의 이름은 원형 다층 석탑이다.
거북이 모양의 지대석이 1개의 돌이고 기단 면석이 각각 5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몸체돌과 지붕돌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다.
지대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탑은 전체적으로 매우 이색적인데 이 탑을 '호떡탑'이라고도 부른단다.
정말 잘 구운 호떡을 켜켜이 쌓아놓은 것 같은 엉뚱한 모양의 석탑이다. 

   운주사 원형 다층 석탑은 보물 798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앞 다층 석탑은 모전 석탑의 유형을 보이며 제작시기는 고려 시대로 본다.  

 운주사 경내에는 이른바 최고의 명당이라는 터가 전해지고 있는데 바로 대웅전 뒤편에 있는 작은 구릉이다. 

 이 구릉 위에는 두 기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 원반형으로 생긴 삼층탑에는 아예 명당탑이란 명칭이 붙어 있다. 

 대웅전 뒤에 위치한 운주사 발형 다층 석탑은 일반적인 탑의 상식을 초월한 이형탑이다.
주판알같기도 하고 밥그릇을 엎어놓은 모양같기도 한 괴석은
원해 7석이었으나 지금은 4석만 남아 있다.
전혀 색다른 형태의 석탑이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고 기발한 조영기법을 보이는 석탑이다. 

 운주사 거북바위 5층 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유형을 따르고 있다. 

 거북 바위 7층 석탑 역시 2층에서 7층 탑신에 X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고려시대에 나타난 백제계 석탑은 유례가 없는 형태이다.   

칠성 바위 큰 암반 위에 건립된 칠성 바위 앞 7층 석탑은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 별다른 시설 없이 자연 암반 위에 탑신부만을 건립하였다.
 


 그 외에도 운주사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는 크기와 형태가 댜양한 수많은 탑들을 설명없이 소개드리면... 

  

  

 

 
   천년고찰치고는 유일하게 담장도 없이 상식을 파괴하는 서투른 모양새의 석불과 석탑으로 가득찬 운주사.
이름도 없는 장인들의 솜씨로 빚었는지 투박하고 어설프기까지 한 수많은 석불과 석탑들은 
마치 현대미술가의 조각 작품 전시회 같아 오늘도 호기심 어린 여행자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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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은
고종 4년(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되어서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길게 행각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남행각 서쪽에서 여덟째칸과 아홉째칸 두칸이 출입문인 만세문(萬歲門)이다.  

 

 문은 각각 네짝씩 당판문을 달아 여자들이 가볍게 여닫기 쉽게 하였다. 

 

 너른 마당의 오른쪽으로는 협경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마흔 네간의 자경전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중앙의 자경전은 대비가 낮시간에 거처하는 공간이고 

 서북쪽에는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침방인 복안당이, 동남쪽에는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다락집 청연루가 있으며
 이어 오른쪽으로 열두간의 협경당이 부설되어 있다.   

 

 자경전의 뒤뜰로 돌아가보면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유리 지붕으로 덧씌운 꽃담이 나오는데 

 

 바로 보물 810호로 지정된 자경전 십장생 굴뚝이다. 

 

 자경전은 왕실 최고의 여자 어른인 대비의 침전이므로 많은 온돌방이 마련되었고
그 방들에서 나온 여러개의 굴뚝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전 벽돌 담장의 일부를 한 단 앞으로 내밀어 생긴 벽 사이의 공간은 연기의 길이 된다.  
 

 굴뚝 벽면 중앙에는 큰 화면을 만들어 여러 모습들을 조형적으로 조각했다. 

 

 이 화면에는 장수를 주제로 삼아  

 

 솔,거북,사슴,불로초등 오래 사는 십장생들을 묘사했다.   

 아래 위로 작은 화면들을 만들어 여러 동물들을 배열했는데 학은 장수를, 박쥐는 부귀를,나티와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의미이다.
이 굴뚝은 나이 많은 여주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한 폭의 정교한 벽화라고 할 수 있다.  

 

 뒤뜰에서 나와 서쪽으로 난 출입문으로 나오면 주황색 벽돌로 축조한 꽃담에 눈길이 가는데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 육각문, 오얏꽃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사진으로 살짝 감상해보면.....   

  

 

 

 

 

 

 

 

 

 

 선왕이 승하하여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게 되면 왕의 모후인 대비는 자연히 대비전으로 물러앉게 되는데
 나이 많은 대비가 일반적이었겠으나 때로는 스물대여섯 나이에 대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밖으로는 화려해 보이나 내적으로는 외롭기만 했던 대비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그녀들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였을 꽃담.
자경전의 주인은 이미 가고 없으나 지금도 꽃담은 그 자리에서 고고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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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BS수목 드라마 '추노' 에서는 
원손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기를 원하는
훈련원 판관 송태하(오지호)와 언년이(이다해)가 운주사 와불이 누워있는 곳으로 오고
그들이 향하는 곳을 미루어 짐작한 이대길(장혁)과 그 패거리들도 운주사로 급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그들이 지나는 천불 천탑의 신비한 가람 운주사 산자락에는 칼로 도려낸 듯한 커다란 원반형 석재가 여기저기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누워 있는 커다란 원반형 석재는 모두 일곱개. 이 석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두 칠성의 배열 상태로 놓여 있다는걸 알 수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 가운데 유달리 우리의 눈에 띄는 북국성과 북두칠성.
북극성은 길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고 북두칠성은 국자와 같은 모양으로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특히 북두칠성은 민간신앙인 '칠성 신앙'으로 우리 민초들의 삶에 더 밀착되어 있었는데
사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북두칠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언뜻 보면 원반형 7층 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원반형 석재들은 
칠성 신앙의 조형물인 북두칠성석으로 보는 관점이 더 신빙성있게 대두되고 있다. 

언제....누가...어떻게 축조한지도 모른채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천불 천탑의 가람 운주사...
칠성 바위 역시 누가 언제 이렇게 커다란 원반석을 칼로 자른 듯이 잘라 이곳에 갖다 놓았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갖다 놓았는지......전혀 알려진 바가 없고
운주사에 대해 풀리지 않는 궁금증은 더욱 깊어져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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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 천탑의 가람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화순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석불로 가득한 곳이다.

이곳에는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인 불상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데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 들이 다른 석불과는 그 모습들이 판이하게 다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평면적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석불들은 정교함이란 찾을 수 없고 마치 유치원 아이들이 만들기 시간에 빚은 것처럼 소박하기만 하다.


특히 산중턱엔 도선국사가 하늘에 있는 석공을 불러 하루저녁에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불상을 만들다가
새벽닭이 울어 미쳐 못 일으켜 세운 부처라는 설화가 전해지는 와불 두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데
드라마에서 이 와불 앞에서 송태하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새로운 세상을 열것을 다짐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어 더욱 눈길을 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많은 불탑과 석불이 이 곳에 있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지금은 석탑 17기, 석불 80여기만 남아있어
역사 속에서 끝없이 유실되어온  세월을 살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양한 얼굴 모습으로 그 자리에 오늘도 누워 있는 와불과 다양한 모습의 석불들을 몇장의 사진으로 만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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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63번째 여행지 안동편에서 소개되었던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신 이 서원은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아서 도산서원이라고 불리운다.
이후 도산서원은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어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의 자세한 소개와 사진은 지난번 포스트에서 언급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고
오늘은 도산서원 경내에 위치한 전시관 옥진각에 전시된 퇴계 선생의 유품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도산 서원의 경내에는 유물 전시관이 한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옥진각이라 이름하는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퇴계 선생의 유품들을 하나 하나 살펴 보기로 한다.  

1585년 나주에서 간행한 목판본인 '퇴도선생 자성록(退陶先生自省錄-퇴계 선생의 호는 퇴도라고도 한다)'은
선생께서 타인에게 보낸 서간 중에서 거듭 음미하고 반성하여 엮은 책으로 58세 때 만들어졌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유교 철학의 주요 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선생 68세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올렸는데 선조께서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좌우에 두고 보셨다고 한다. 

'사문수간(師問手簡)'은 제자 월천 조목이 평소 선생으로부터 받은 서간 106통,시 16편,잡서 7편을 손수 책으로 만든 것으로 모두 8권이다. 

 '어제발문(御製跋文)'은 평소 퇴계 선생을 흠모하던 정조 임금이 1794년에 사문수간을 열람하고서
그 소감으로 발문을 지어 하사한 것인데 선생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며 읊은 시조로써 친필 목판본이다.
언지 편인 전 6곡과 언학 편인 후 6곡을 합하여 도산십이곡이라 부른다.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은 퇴계 선생이 옛 학자,명인들이 좌우명을 뽑아 편하여
심성수양의 자료로 삼아왔던 것을 제자 정구에 의해 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는 1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선생의 학문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스구리 교쿠수이가 선생의 서한을 뽑아 엮은 것으로 1811년 일본에서 간행한 원본을
선생의 8대손 초초암이 일본에 사신갔던 김이교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기구로 이것은 선생이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구면에는 성좌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왕궁이 아닌 민간 교육 기관에서 만든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외에 퇴계 선생의 유품으로써 '등경'이 있고.....

흑단연. 단계산 흑색 돌로 만든 '벼루'도 쓰던 유품이다. 

글을 쓸 때 종이의 양 쪽을 누르던 '옥서진'과 '세지(細枝)'가 있는데 세지의 용도는 미상이나 선생의 유품으로 전해 온다.
말 안 듣는 제자들의 종아리를 치기 위한 회초리는 아닌지....^^ 

매화연. 단계산 자색돌로 만든 '벼루'는 선생의 문인 김북애의 증정품이다. 

선생이 침을 뱉을 때 사용하던 도구인 '백자타호'인데 받침 접시 밑에는 '山'자가 묵서되어 있다.
오른 쪽은 선생이 사용하던 '장추(긴 빗자루)'로써 의이미라는 일년초로 만들었다.  
직접 마당을 쓰시는 퇴계 선생이라니....그 모습을 잠시 유추해본다.

'청려장'이라고 부르는 이 특이한 모양의 지팡이는 푸른 명아주로 만든 것이고

책을 읽을 때 사용한 검은색의 '목조 책상'은 낡을대로 낡아 귀퉁이가 다 헤어졌다. 

병을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청,홍의 대화살을 병가운데나 귀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기구인 투호도 있고 

 매화를 특히 좋아하던 선생이 앉으시던 매화 무늬의 '청자 걸상' 도 눈에 쏙 들어오는 유품이다.

  기대는 방석인 '안석'은 가는 왕골로 짠 길이 80cm정도 되는 유품이고 

왕골로 짠 '완석' 3개 중 한 개의 뒤에는 '이첨지댁 퇴계'라는 자필 글씨가 쓰여 있다. 

 
거의 국보급이라 할 수 있는 귀한 목판본도 귀중하게 느껴지지만
선생이 평소에 쓰던  벼루며 서진, 책상, 걸상 등 일상 용품과
침을 뱉던 타구, 기대앉던 안석, 아침 저녁으로 마당을 쓸던 긴빗자루까지 전시되어 있는 이곳은
퇴계선생의 소박하고도 고고한 향기를 피부로 느끼기에 충분한 곳인 듯....



퇴계 선생은 늦은 나이인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 군수,풍기군수,공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조선의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으며 조선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공천 한번 받아서 출사해보나...어떻게 하면 막강한 권력을 내 손에 쥐고 흔들어보나...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권력지향성 나으리들은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인격도야,후진 양성에 힘쓴  퇴계 이황 선생의 유품을 보며 깨닫는 것은 없을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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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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