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뜰 산책........................'에 해당되는 글 269건

  1. 2012.10.31 착한남자 송중기,문채원이 갔던 그 바다 동해 추암해변 27
  2. 2012.10.17 환상의 커플 철수네집이 있는 남해 독일마을 15
  3. 2012.09.26 단종의 슬픈 사연 어린 객사 영월 관풍헌과 자규루 10
  4. 2012.09.14 방랑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나선 영월 김삿갓유적지와 김삿갓문학관 19
  5. 2012.09.07 배롱나무 활짝 핀 병산서원의 우요일(雨曜日) 15
  6. 2012.09.05 비운의 왕 단종의 슬픔 간직한 영월 장릉 15
  7. 2012.08.22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자 영월 요선정 27
  8. 2012.08.01 자연이 그린 한폭의 한국화 영월 선돌 18
  9. 2012.07.30 한반도 지형을 그대로 옮겨 놓은 영월 선암마을 21
  10. 2012.07.26 일출과 일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호미곶 독수리바위 19
  11. 2012.07.02 가슴 시린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영월 청령포에 서다 24
  12. 2012.06.18 바다 위를 걷는다? 푸르름 가득한 영덕 해상산책로 21
  13. 2012.05.19 1박2일에 소개되어 유명해진 전통 수제 막걸리 20
  14. 2012.05.18 1박2일 출연진을 감동시킨 추억의 참기름집 18
  15. 2012.04.16 귀신고래가 하늘로 솟구치는 울산 정자항 풍경 20
  16. 2012.04.12 1박2일팀이 묵었던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 강릉 선교장 27
  17. 2012.04.09 이 시대 마지막 주막 '삼강주막'을 가다 22
  18. 2012.04.02 다시 찾아본 추억의 수학여행지 강릉 오죽헌 15
  19. 2012.03.26 1박2일 추억의 타임머신레이스에 나왔던 간이역 예천 용궁역 22
  20. 2012.03.22 벽화 속 추억 여행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을 가다 24
  21. 2012.03.19 김광석을 다시 그리는 '방천시장 골목여행' 23
  22. 2012.03.15 1박2일에 소개된 '시간이 멈춘 거리' 용궁 27
  23. 2012.03.08 1박2일 이승기가 다녀갔던 강릉 안목해변 커피거리 28
  24. 2011.12.22 쓸쓸함 감도는 청송 방호정의 겨울풍경 23
  25. 2011.12.14 99간 만석꾼집 청송 '송소고택'과 '송정고택' 21
  26. 2011.12.12 몰래 넘어가본 청도 운문사 금단의 구역 20
  27. 2011.11.25 '써니'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합천영상테마파크 27
  28. 2011.11.23 마지막 단풍 불태우는 가지산 석남사 16
  29. 2011.11.20 1300년 세월 한결같은 영국사 은행나무 15
  30. 2011.11.11 롯데백화점 옥상 공중관람차에서 본 울산 전경 24


여러분이 요즘 자주 보고 있는 드라마는 무엇인지......

필자가 요즘 빠져들어서 보고 있는 드라마는 송중기, 문채원, 박시원 주연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이하 착한 남자)'이다.

 

착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기억을 잃은 또 다른 여자를 이용하면서 갈등과 사랑이 증폭되어가는 정통 멜로드라마.

 

복수극이니, 기억상실증이니 하는 식상하고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성균관 스캔들'의 선비 구용하역을 비롯해서

언제나 밝고 샤방한 이미지를 보여주던 송중기가

나쁜 남자로 변신해 선보일 치명적인 유혹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방영전부터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어쩌다보니 첫회부터 보지 못했고

매주 방영되는 드라마조차 띄엄띄엄 건너뛰며 보다보니 스토리 연결이 제대로 안 되는지라 

휴일 하루 날을 잡고 집에 들어박혀 IPTV를 통해 드라마를 1회부터 재방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라마 여러편을 한꺼번에 몰아 폭풍 시청하고 있던 중, 8회에서

서은기(문채원)가 강마루(송중기)의 책상 서랍 속에서 찾아낸 한장의 사진에 눈길이 확 쏠렸다.

 

"우리들의 첫 여행, 꼭 가자. 재희♥마루"란 글이 뒷면에 쓰여진 그 사진은

푸른 바다와 기암 괴석의 멋진 풍경이 잘 어우러진 빛바랜 사진이었는데

보자마자 "어? 저긴 동해 추암 해변 아냐?"란 말이 절로 툭 튀어나왔다. 

 

 9회에서는 먼저 바닷가에 가 있던 서은기(문채원)를 찾아 강마루(송중기)가 찾아가게 되고

서은기는 "사진보다 훨씬 근사하죠?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하고 말하며

"우리 도망가요. 아무도 모르는데 가서 우리 둘이 살아요."라고 강마루를 붙잡는데......

이후 "송중기, 문채원이 갔던 저 바다가 대체 어디에요?" 하는 질문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착한 남자에서 송중기, 문채원이 복잡한 감정을 안고 섰던 해변은 바로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의 '추암해변'이다.

 

 

 

 

바닥이 그대로 다 드러나 보일만큼 투명한 옥빛바다와 잘게 부서진 고운 백사장이 눈부신 추암해변은 

미묘한 해안절벽과 함께 그리움이 배인 촛대바위, 그리고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한국관광공사의 '겨울철 가볼만한 곳 10선'에 선정되기도 한 곳.

 

 

 

 

추암 해변의 자그마한 동산에 오르면 바다에서 로켓처럼 불쑥 솟아오른 기암괴석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TV 애국가의 일출 장면 배경으로 자주 나오던 '촛대바위'이다.

전설에 의하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후 본처와 소실간의 투기가 날로 심해졌는데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한 남자만 남겨 놓았고 이때 홀로 남은 남자의 형상이 바로 촛대바위라고 전해내려 온다.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촛대바위 뒤로 솟아오르는

오메가 일출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진사들이 모여든다는데

촛대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 사진 찍기를 미션으로 받았던 1박2일의 한장면처럼

 꼭대기에 갈매기가 앉은 사진을 담아보려고 한참 기다려 보았지만

이날따라 오래 기다려도 좀처럼 갈매기가 바위에 앉지 않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촛대바위 주변으로 여기저기 솟아오른 크고 작은 기암괴석은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형제바위, 코끼리 바위, 부부바위 등으로 불리우는데

이것은 석회암이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특이한 모양을 이루고

바닷물에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옥빛 바다와 우뚝우뚝 솟아난 기암 괴석들, 그 위에 자라난 소나무들이 보기힘드는 절경을 이루는 이곳은 

옛부터 뛰어난 경승지로 '동해안의 삼해금강'이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조선 세조때 강원도 제찰사를 지낸 한명회는 이곳의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凌派臺)'라 부르기도 했다. 

 

 

 

 

기암들을 뒤로 하고 내려오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삼척심씨 시조인 심동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건립한 지방문화재 "해암정(海岩亭)"도 자리잡고 있어 잠시 볼거리를 전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찬바람이 초겨울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요즈음,

기온이 내려갈수록 물빛이 더욱 푸르고 청명하게 빛나는 동해안 추암해변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빛바랜 추억의 한 장면을 만들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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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모르겐슈테른, 마인스, 하이디 하우스, 괴테하우스,

쿠텐베르크, 헤네프하우스, 뮌헨하우스, 겔베하우스, 요한네스......

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이름은 유럽에 위치한 어느 집들의 이름이 아니다.

 

이 집들의 주소는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1133.

바로 남해군에 위치한 '독일마을'에 있는 집들의 이름이다. 

 

 

 

 

'독일마을'에서 만나는 집들은 모두 하얀 벽에 붉은색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다.

 

 

 

 

특이한 모양새의 우편함도 자이퉁겐이란 이집의 이름도 너무나 이색적이다.

 

 

 

 

알프스에서나 만날 듯한 집 문 앞에 서면 금방이라도 노란 갈래머리의 하이디가 나풀거리며 뛰어나올 것만 같다.

 

 

 

 

푸르른 야산을 뒤로 하고 아담하게 꾸며진 정원을 거느린 집은 마치 재벌가의 별장같은 느낌도 주는데......

 

 

 

 

너무나 이국적인 '독일마을'은 독일에서 일하다 돌아온 간호사와 광부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 마을이다.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첫 독일집이 생긴지도 벌써 십여년째이다.

 

 

 

 

6,70년대 어려웠던 시절,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간호사나 광부일을 하기 위해 독일로 파견되었는데

이분들 중 상당수는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 남아 공부하거나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수십년이 지나 독일에 체류하던 이들은 개별적으로 한국에 돌아올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오랫 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던터에 문화의 차이 때문에 귀국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해군에 독일마을을 조성하겠다는 김두관 남해군수의 끈질긴 설득은

이곳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붉은 지붕, 하얀 벽이 아름다운 34채의 집이 있는 이국적인 마을이 탄생하게 되었다.

 

 

 

 

지금은 실거주의 목적보다는 펜션이나 별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집이 많은데

이 마을에서도 유난히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집이 있다.

독일마을에 들리는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집은 바로 철수네집.

 

 

 

 

 오지호, 한예슬, 김성민, 박한별이 주연했던 MBC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장철수(오지호 분)의 집으로 나왔던 집이다.

 

 

 

 

극중 철수네집에서 장철수와 나상실이 짜장면을 먹던 장면은 '환커폐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장면인데

 1박2일 남해 특집에서 김종민이 철수네집에서 짜장면을 시켜먹는 미션을 수행하기도 해서 더욱 유명세를 탄 집이다.

 

 

 

 

독일마을에서 내려다보면 물건리 앞바다가 시원스럽게 눈에 들어오는데 바닷가에 길게 늘어선 방조림이 특히 장관이다.

370년전부터 조성된 이 방조림은 천년기념물 150호로 지정된 '물건방조어부림'.

 

 

 

 

물건방조어부림은 바닷가를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1500m나 계속 이어지는데

팽나무, 푸조나무, 상수리나무, 참느릅나무, 보리수나무, 동백나무.....등

만여그루의 나무가 우거진 방조림은 독일마을에서의 추억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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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읍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중앙로. 영화 '라디오스타'의 무대가 되었던 청록다방을 지나

영월중앙시장 앞에 이르니 번화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커다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대문 앞에 서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 곳은 강원도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된 관풍헌.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건립된 이 건물은 지방 수령들이 공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태조 1년인 139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참으로 오래 되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풍헌 마루 위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넓직한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은 건물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무게감이 있는데

팔작맞배붙임집인 정사 좌우에 날개처럼 익사가 붙은 형태로 모두 3동의 건물이 붙어있다.

그런데 오른쪽 익사는 전형적인 객사의 건물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정사와 왼쪽 익사는 꽃살문으로 치장하여 어딘지 사찰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자세히 보니 이 곳은 현재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바람을 보는 집'이란 낭만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관풍헌(觀風軒)은

조선 6대 왕 단종(端宗)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봉해져 있던 세조 2년(1456),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당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는데

큰 홍수가 나서 청령포가 침수될 위기에 이르자 거처를 이곳 관풍헌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단종은 관풍헌에 거처하는 동안 관풍헌 동쪽에 위치한 매죽루에 자주 올랐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슬픈 처지를 두견새((子規)에 빗댄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다고 전한다.

 

 

 

 

 누각의 한 쪽에 단종이 읊은 자규사가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누머리에 기대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비록 짧은 몇 마디의 시구절이지만 피를 토하듯 울어대는 두견새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어린 단종의 괴로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이때부터 매죽루(梅竹樓)는 그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로 바꿔불리우게 되었는데

선조 38년(1605년) 큰 홍수가 나서 누각이 허물어지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1791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그 터를 찾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누각의 남쪽 현판은 자규루,북쪽 현판은 매죽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는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발각되게 된다.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같은해 10월, 사약을 내려보내게 되고

 결국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 의해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그 슬픈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린 단종이 한양을 떠나 청령포를 거쳐 잠시나마 머무르며 그 머리를 누이었던 곳, 관풍헌.

춘삼월 밤 누각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울어대던 두견새(자규)의 소리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슬픔을 겪었던 자규루.

한 많은 인생을 산 단종도 가고 그리도 구슬프게 울어대던 두견새의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단종의 슬픈 발자취가 어려있는 이곳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쉽게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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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백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강원도 영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온다는 기약도 없어 

'편안하게 고개를 잘 넘으시라'는 뜻에서 영월(寧越)로 이름하였다 하는데...... 

영월군에는 최근에 특이한 이름으로 개명한 마을이 두군데나 있다. 

그중 하나는 영월군 서면. 한반도지형을 닮은 선암마을이 있어서  

마을의 이름을 '한반도면'으로 개명하였다.

 

  또 하나의 마을은 바로 '김삿갓면'이다. 

원래는 영월군 하동면이지만 방랑시인 김삿갓의 생가와 묘역이 있어서 

200910월에 이르러 마을 이름을 '김삿갓면'으로 개명하였다. 

 

마을 이름을 김산갓면으로 바꾸자 발길이 뚝 끊겼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김삿갓문학관을 비롯한 김삿갓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지난번 12일 여배우 특집에서는  

레이스미션의 최종목적지로 소개되기도 했던 영월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영월 시내에 승용차로 40분 거리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위치한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문학관은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산 난고 김병연의 일대기를 모아놓은 곳이다.

평생을 삿갓을 쓰고 방랑하던 김삿갓의 문학관 답게 건물의 지붕이 삿갓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배산임수의 최적의 자리에 세워진  김삿갓 문학관 앞 광장에는

김삿갓 시비와 그의 시와 함께 한 조각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하여 반역자로 낙인 찍히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안동김씨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오지 중의 오지인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 신동으로 평가되기도한 김병연은 

이후 영월 관풍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였다.

 

  조부의 과거를 모른채 자란 김병연은 시제가 나오자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형식의 내용을 썼고 그것으로 인해 급제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신랄하게 비판한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고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김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김삿갓이 방랑 중에 지은 시는 약 1,000여편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재까지는 456편의 시가 전해진다.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다.

 

 

 

 

광장에 전시된 조형물과 그가 남긴 시들을 읽어본 후 김삿갓 문학관 내부를 돌아보기로 한다. 

김삿갓의 친필 시, 책자, 영상물, 조형물 등 520여점의 김삿갓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난고김삿갓문학관의 입장료는 일반 1,000, 어린이는 500원이며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등이 있는데 전시실에는

김삿갓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 정암 박영국 선생의 연구 자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김삿갓의 생애를 상영하는 영상실에서는 영상을 통해 김삿갓의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난고문학실, 일대기실, 자료실 등이 있는데  

난고 문학실에는 1938년 이응수 작의 김립시집 외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각 서적, 간행물, 논문, 잡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대기실은 김삿갓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과정과 주거지를 복원한 모형들이 있으며 김삿갓 가계도도 상세히 전시되어 있다 

자료실에는 김삿갓이 입고 신었을 법한 신발, , 삿갓 두루마기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김삿갓의 친필도 확인할 수 있다.

 

 

 

 

김삿갓문학관의 맞은편에는 김삿갓 시비동산과 김삿갓의 묘소가 있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생전에 김삿갓이 살던 이곳은 푸르른 산과 시비, 조형물과 야생화들이 잘 어우러져 고즈녁한 느낌을 준다.

 

 

 

 

묘소 앞에 있는 시비 동산에는 발랑 시선 김삿갓의 유적비와 함께

 

 

 

 

서예대가 김응현 선생과 서경보 스님이 세운 석비들이 자리잡고 있어 볼거리를 더해 준다.

 

 

 

 

시비 동산에는 여러 형태의 조형물들이 있는데 그중 '환갑'이라는 조형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지나가던 아이들은 이 조형물을 힐뜻 보더니 '아니......이건! 임재범이잖아!" 하고 낄낄거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임재범이 삿갓을 쓰고 저 먼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방랑기 다분한 임재범, 방랑 시인 김삿갓......어딘가 통해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바닥에 놓인 연자매 한짝도 어딘가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2일 여배우 특집 레이스 미션 때 12일 깃발을 꽂았던 곳이다. 

여기 왔던 누구도 그 장면을 기억했음일까? 나무 지팡이 하나를 기념으로 꽂아둔 것에 피식 웃음이 지어진다.

 

 

 

 

계곡에 걸쳐진 무지개 다리를 건너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니 김삿갓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철종 14년에 전남 화순에서 세상을 떠난 김삿갓의 유해는 3년 뒤 그의 아들에 의해 영월로 옮겨졌는데 

묘소는 1982년 정암 박영국 선생에 의해 발견 되었고, 1984년에 안동 김씨 대종회에 의해서 잔디를 입힌 것이라고 한다. 

 

묘소를 본 사람들은 "아니, 묘소가 왜 이리 초라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초라한 묘소가 김삿갓의 외로웠던 인생 여정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고 

다듬지 않은 돌에 새겨진 묘비와 상석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의자유로움을 보는 것 같아 좋다.

 

 

 

 

김삿갓 묘소와 시비 동산 앞에는 이렇게 맑은 물이 흘러 청량감을 더해준다. 

망경대산, 마대산, 선달산, 형제봉 등 천m가 훌쩍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곳이라 산세도 너무 빼어나다. 

영월 여행에서 빠뜨리지 않고 들려보아야 할 곳, 바로 한평생을 유랑하며 살았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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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끝자락에 문득 차를 몰고 달려간 곳은 안동이다.

안동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드는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은 그냥 지나치고

한적한 비포장도로를 한참이나 털석거리며 달려간 곳, 병산서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더 귀한 곳.

마지막 숨겨둔 무릉도원과도 같은 병산서원은

언제 찾아가도 여행자를 배신하지 않고 그 신비함을 조심스럽게 드러내준다.

 

 

 

 

서원 입구에 이르니 겨울에 왔을 땐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던 배롱나무들이 진분홍 꽃망울을  화사하게 꽃 피웠다.  

 

 

 

 

서원 입구 복례문 양쪽에도 배롱나무(백일홍나무)들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만대루로 오르는 돌계단 위에도 진분홍 꽃망울이 등불을 화사하게 켰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입교당과 동재, 서재 사이에는 배롱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선비들이 배롱나무의 붉은 색에 현혹되지 않도록 강당 바로 앞에 배롱나무를 심지 않았던 것일까?
 

 

 

 

입교당 돌계단을 올라 마루에 걸터 앉아 잠시 쉬고 있으니 갑자기 먼지가 휘이.....일어나며 돌풍이 일어난다.

돌풍과 함께 어디선가 물내음이 묻어오기 시작한다. 소나기 한자락 하려는 것일까? 

 

 

 

 

불어오는 돌풍과 함께 물내음이 비릿하게 묻어오더니 피할 사이도 없이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긋기 시작한다.

 

 

 

 

쏟아붓듯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같이 사진 찍던 외국인들도 황급히 서원 마루 위로 올라 비를 피한다.

 

 

 

 

바람과 함께 묻어온 소나기는 서원 마루까지 적시며 한자락 시원하게 내리퍼붓더니 

이내 빗줄기가 약해지고 점점 개이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동쪽 하늘에 아스라한 무지개까지 만들어준다.

 

 

 

 

한차례 세찬 소나기가 지나간 서원 안 마당은 금세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물길이 만들어졌다.

참으로 신기한 자연의 조화들이다.

 

 

 

 

비 그치고 나니 배롱나무꽃과 이파리들이 물을 함빡 머금어 더욱 화사하게 빛난다.

슥슥 오려내어 액자에 넣어 집에다 걸어두고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은 풍경이다.

 

 

 

 

입교당 뒷쪽 열린 문 사이로 보는 만대루의 모습도 한폭의 펼쳐진 그림이 되었다.

 

 

 

 

입교당 뒤로 돌아가보니 더욱 크고 오래 된 배롱나무들에도 꽃들이 만발했다.

구불구불 길게 드리워진 배롱나무 가지들은 존덕사 삼문의 붉은 빛과 어우러져 더욱 운치를 더해준다.

 

 

 

 

진사청 문 옆에도 엄청나게 자란 배롱나무가 담장을 붉게 물들였다.

 

 

 

 

'비단 같은 꽃이 노을빛에 곱게 물들어 사람의 혼을 빼앗는 듯 피어 있으니 품격이 최고이다.' 라고 한

강희안의 '양화소록'의 싯구처럼 처연하도록 붉은 빛은 보는 이의 혼을 다 빼앗을 기세이다.

 

 

 

 

진사청 좁은 안마당의 하늘도 온통 배롱나무 꽃들로 뒤덮였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후두둑 떨어진 꽃들이 마당 안을 붉게 물들였으니 이게 바로 진정한 꽃 카페트로구나.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아니더라도 저 붉은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서야 이곳을 떠날 수 있으리라.

 

 

 

 

진사청을 나와 다시 만대루 아래를 거쳐 복례문으로 향한다. 

 

 

 

 

비를 머금은 복례문의 기와 지붕은 더욱 빛이 나고 배롱나무 너머 펼쳐지는 산의 나무들도 더 싱그럽게 다가온다.  

 

 

 

 

비를 머금은 만물은 마치 오월의 신록인양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푸르르니

열린 문을 통해 바라보는 여행자의 마음도 더욱 화사함이 더해진다.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 서로 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더불어 한 잔 하리라' 라는 성삼문의 싯구처럼

한여름을 수 놓는 배롱나무의 처연한 붉은 빛은 참으로 곱디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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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영월'을 생각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비운의 왕 단종을 떠올릴 것 같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단종의 기억이 서린

청령포, 영월 객사, 장릉 등 단종과 관련있는 유적지가 이곳 영월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7세 어린 나이에 한양을 떠나 외로운 육신을 뉘었던 청령포를 떠나

영월읍내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릉으로 향하였다.

  

다른 조선 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장릉.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충신들의 계획이 밝혀져

영월 청령포로 쫒겨나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사당하고 이곳 장릉에 묻히게 된다.

 

 

 

 

매표소를 지나 입구로 들어서니 단종과 장릉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단종역사관이 먼저 나타난다.

단종역사관에서는 단종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단종의 시대, 승하, 복권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어

 세자 즉위부터 단종대왕으로 복권되기까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지하에는 단종과 정비였던 정순왕후에 대한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 옆으로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9명의 수호군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 등 사용기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재실을 지나자 비각이 하나 나타난다.

무슨 비각인가 해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충신 엄홍도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여 차디찬 동강에 그 시신이 버려졌지만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두려워 아무도 선뜻 나서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 호장 엄홍도가 충절을 지켜 눈 내리는 밤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으로 가다보니 노루 앉은 자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다 여겨 그 자리에 관을 갖추고 단종을 장사지낸 후 그 사실을 숨겼다. 

충신 엄홍도에게는 고종 16년에 이르러서야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고 한다.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엄홍도 정려각.

영월의 '충절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장릉의 서쪽에는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과 우물인 영천, 배식단 등이 자리잡고 있는데

홍살문 아래부터는 신도라고 해서 일반인들의 보행을 삼가해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장릉은 ㄱ자로 꺾여 있는게 특이한 점이다.

 

 

 

 

능침은 이렇게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잘 정돈된 왕릉이 있고 언덕 아래로는 정자각, 배식단, 영천, 신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는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이후 숙종 7년인 1681년에 이르러 대군(大君)으로 추봉하였고,

숙종 24년인 1698년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은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승하한지 241년만에야 다시 왕의 칭호를 되찾게 된 것이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며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는데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봉분 아래에는 정령송이라 불리우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데 

정령송은 단종비인 정순왕후의 릉인 사릉에서 이식해 온 것으로

정순왕후가 소나무가 되어 단종의 곁을 언제나 묵묵히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영월 군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장릉.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있지만

청령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 누워있는 한많은 어린 왕을 생각하니

 아름다운 경관과 세계문화유산의 자랑스러움도 도리어 애처로움이 되어 여행자의 가슴에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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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월 청령포 주차장에 걸린 영월의 대표 명승 사진에서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갈 듯 자리잡은 요선정의 사진을 보는 순간

네비게이션에 '요선정'을 입력한 후 친절한 목소리로 앞길을 인도하는

네비아가씨의 인도를 따라 요선정을 찾아나섰다.

 

영월군 주천면을 지나 좌측으로 무릉리다리를 지나니

 남한강의 한 갈래인 주천강이 나타난다.

풍경이 아름다운 주천강가 벼랑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 바로 요선정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무덤 사이로 난 돌계단을 통하여 잠시 걸어 오르니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갈 듯 요선정이 자리잡고 있다.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 터는 그다지 넓지 않은데 정자의 규모도 아담하기 그지없다.

건물은 앞면 2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요선정이라는 이름은 조선 중기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의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정이라는 글씨를 새긴 것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정자의 앞면 오른쪽에는 이응호가 쓴 ‘요선정’, 왼쪽에는 ‘모성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거주하는 원씨, 이씨, 곽씨 삼성의 요선계 계원들이 주축이 되어 

1915년에 세운 정자라고 하니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지만

조선 19대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숙종이 직접 하사한 어제시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에 봉안하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고 숙종의 어제시 현판은 일본인 주천경찰서장의 소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인이 숙종의 어제시를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낀 요선계 회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여 어제시를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서 요선정을 건립하였다.

 

 

 

 

요선정의 앞에는 높이가 3.5m에 이르는 고려시대 마애불좌상이 있는데 암벽위에 부조로 새겨져있다.

불상은 살이 찌고 둥근 얼굴에 눈, 코, 입과 귀가 큼직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상체에 비해 앉아 있는 하체의 무릎 폭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체의 길이도 너무 길어 신체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고 옷도 두꺼워 신체의 굴곡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부처가 앉은 대좌 역시 무릎 폭에 맞추어 큼직하게 조각되어 전체적으로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전혀 맞지 않고

옷 주름과 신체 각 부분의 표현이 형식화되어 있어 고려시대 지방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강원도에는 이처럼 암벽면을 깎아서 만든 마애상의 유래가 매우 드문 실정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한다.

 

 

 

 

비록 역사가 짧고 규모도 작지만 숙종대왕이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해 수주면의 원씨, 이씨, 곽씨

삼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의 역사의식과 정성이 담겨 있어 역사가 매우 큰 정자, 요선정.

주천강가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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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의 자랑거리 한반도지형을 돌아본 후 

그곳에서 약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선돌이 있는 영월군 방절리로 향했다.

해발 320m의 소나기재 정상 휴게소에 잠시 주차를 하고

나무 데크가 잘 갖추어진 오솔길을 따라 5분여를 걸어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기묘한 모습의 바위 두갈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전망대 아래 두갈래로 갈라져 우뚝 솟아있는 높이 70여m의 바위는 선돌(立石).

서강의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한국화가 펼쳐져 있는 것 같다.

혹자들은 이 선돌을 신선암(神仙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이한 풍경이 보는 이들에겐 마치 신선경같았던가 보다.

 

 

 

 

전망대 바로 옆 소나무숲 옆에 2m 정도 높이의 철제 계단이 준비되어 있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전망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한사람 정도 올라가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이런 계단은 

아마도 더 좋은 앵글을 원하는 사진가들을 위한 누군가의 배려인가 보다.

 

 

 

 

선돌 아래 깊은 소(沼)에는 자라바위가 있는데 

선돌 아랫동네 남애 마을에 장수가 태어나 적과의 싸움에 패하자

이곳 선돌에서 투신하여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이루어진다는 믿지못할 설화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현재의 38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선돌 밑으로 옛길인 신작로가 있었다는데

이 옛길에는 고종 42년 1905년에 목탄차가 다닐 수 있도록 석축을 쌓아 확장했던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光武九年李春和排路修勅乙巳二月一日>(광무9년이춘화배로수칙을사2월1일)라고 자연석에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

또 1820년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풍류 생활을 즐기던 오희상, 홍직필 등

세사람이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붉은주색(朱色)을 칠한것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선돌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서강(평창강)은 정말 푸르고 깨끗하게 보인다.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휘감아 흐르는 영월군 남면 북쌍리와 마을 뒤로 펼쳐지는 산들의 곡선이 너무나 평화롭다.

홍이간과 그 벗들이 보았던 것처럼 구름이 걸린 선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한참을 머무르며 시 한수 남기고 떠났으련만......

 

1박2일 영월편에 나와 더욱 알려졌던 선돌은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이 주연했던 영화 '가을로'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나를 놀라게 해. 저 아래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펼쳐지거든" 라는 김지수의 대사처럼 

선돌과 그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잠시 세상의 힘든 것들을 잊고 멍하게 빠져들게 하는 신기한 마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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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을 찾는 사람이면누구나 한번은 들리게 되는 곳,

그것은 한반도의 지형과 그 모양새가 꼭 같은 영월 선암마을이다.

차를 길가에 주차하고 내리니 관광객들을 위한 포차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 있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리라.

포차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로 허기를 채운 후 전망대로 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한낮의 찌는 듯한 더위는 산길을 오를 의욕조차 없어지게 했지만

그래도 목적지가 멀지 않다는데 용기를 얻어 오솔길을 조금 걸으니 금방 전망대가 나타났다.

 

 

 

 

 

아! 한눈에 보기에도 이건 한반도지형임이 분명하다.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반도 지형은 한눈에 보기에도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형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땅의 모양새만 한반도를 닮은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깊은 수심을 만들어

우리나라 강원도 땅과 깊고 푸른 동해 바다를 연상케 하고

남쪽으로는 평평하고 완만하게 펼쳐진 백사장이 남해안을,

서쪽으로는 들쭉날쭉한 사구가 우리나라 서해안의 들쭉날쭉한 해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자연의 조화는 참으로 신비하지 않은가!

사람의 손으로 빚은 것이 아닌데 이렇게 완벽한 축소 모형을 만들어내다니!

전망대에 선 사람들은 모두가 감탄해 마지 않으면서 이곳에서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전망대 바로 앞에는 무궁화도 피어 있어 한반도 지형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는데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동해 울릉도쪽에서 커다란 뗏목 하나가 나타났다.

 

 

 

 

하얀 깃발을 올린 뗏목에서는 한복을 입은 사공이 세명이나 서서 노를 젓고 있는게 하닌가?

아니, 이런 횡재가 다 있나!

한반도의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듯한 멋진 뗏목의 모습을 놓칠새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거......앞에 있는 아줌마! 옆으로 비키소! 쫌!"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뒤로 돌아보니 십여명의 남녀 진사 군단들이 포진해서 나를 째려보고 있다.

분명히 먼저 와서 전망대에 서 있던 사람은 나인데 뒤에 온 사람들이 비켜 서라고 소리를 지르다니?

 

"저 뗏목은 우리가 돈 주고 연출한거란 말이요! 같이 찍으려면 돈을 내던가....."

그제서야 난데없이 나타난 멋진 뗏목이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순진한 필자.

"뗏목을 돈 주고 불렀으면 한반도지형 전망대까지 돈 주고 샀던가요? 별 소리를 다 듣겠네요!"

라고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올랐지만 항의의 말 한마디 시원하게 못 해주고

옆으로 물러나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가 슬며시 돌아 내려오고야 말았다.

 

 

 

 

그 당시는 돈주고 연출한 그림에 방해가 된다는 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나왔지만

한반도 지형을 조망하러 온 많은 관광객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자기네들끼리만 좋은 포인트를 선점하고  서서

시끌벅적 웃고 떠들며 서터를 눌러대던 무개념 남녀진사들에 대한 기분나쁜 기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필자 자신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진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 적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연출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얼마나 좋은 사진을 남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이날 찍은 사진이 SLR클럽이나 사진 카페에 올려져 많은 사람의 칭찬과 추천을 받았을지는 모르나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사진만 생각하는 사진가들에게는 '무개념 초보찍사'라고 불러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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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포항시 남구 대보면 호미곶.

새해 해맞이가 아니더라도 호미곶 해맞이 광장은 1년 내내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호미곶 해맞이 광장의 가장 볼거리는 바다와 육지에 마주 보고 서 있는 상생의 손'

왼손은 해맞이 광장에, 오른손은 마주 보는 바다에 우뚝 서 있는데

해맞이 광장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이 상생의 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곤 한다.

관광객들 중에서도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 상생의 손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기 위하여

새벽부터 서둘러 이곳을 찾아 일출을 보곤 해가 뜨면 서둘러 돌아가곤 하는데.......

 

사실 호미곶이 일출과 일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란걸 아는 분들은 거의 안 계시는 듯 하다.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서 승용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까꾸리계는

동해안에서 '바다에서 뜨는 해'와 '바다로 지는 해'를 함께 볼 수 유일무이한 장소이다.

 

'까꾸리계'란 생소한 이름은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를 이르는 지명인데

내륙으로 연결되는 방향을 빼고는 모두 바다로 둘러싸인 대보면 구만리는 

겨울의 매서운 해풍을 받아 만든 청어 과메기가 유명했던 곳으로

이 청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파도에 많이 밀려와서

갈고리(까꾸리)로 끌어담을 정도로 흔하게 잡을 수 있던 곳이라서

그  지명을 '까꾸리계(鉤浦溪)'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지도에서 동해안으로 툭 튀어나온 호랑이꼬리(虎尾)의 가장 꼭짓점이 까꾸리계인지라
좌우가 바다인 이곳에서는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해돋이와 해넘이의 절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필자가 독수리바위에 갔던 날은 시간이 맞지 않아 해돋이도 해넘이도 담지는 못 하였지만

동해안 답지 않은 야트막한 바닷가 바위에 걸터 앉아 조개나 작은 물고기를 잡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에 이곳 까꾸리계에 올 때는 독수리의 짜악 벌린 부리 안으로

붉은 여의주 같은 해가 넘어가는 멋진 낙조를 감상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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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할 녕(寧), 넘을 월(越).......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의 이름을 

왜 '편안하게 넘어간다'는 뜻의 영월(寧越)로 불렀을까?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온다는 기약도 없어

'편안하게 고개를 잘 넘으시라'고 해서 영월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하는데......

 

인구 5만명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고장 영월에는 의외로 볼거리, 체험거리가 많다.

어린 왕 단종의 한과 눈물이 서린 청령포와 장릉,

시선 김삿갓의 풍류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동강과 서강,

구절양장 돌아가는 강물이 하늘을 담은 어라연, 한반도 지형,

동강사진박물관, 책박물관, 화석박물관, 아프리카미술박물관을 비롯한 수많은 박물관,

아나로그적인 감성이 물씬 묻어나오는 영화 라디오스타 촬영지 별마로천문대와 청록다방......

 

 

 

 

문득 북쪽으로 차를 몰아 영월로 향한 여행의 첫걸음은 어린 왕 단종의 슬픔이 담겨 있는 청령포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알려진 청령포는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청령포를 270도로 휘감아 흐르는 서강은 폭이 좁지만 수심이 깊어 배가 아니면 건널 수 없는 천혜의 감옥이었다.

 

 

 

 

청령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계단을 통해 강가로 내려오니 유람선 몇척이 여행객들을 손짓하고 있다.

입구에서 지불한 입장료 2000원에는 서강을 건너는 도선료가 포함되어 있어

바로 유람선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지만 수심이 깊어서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는 곳.

스피커에서 흐르는 트로트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람선은 청령포쪽 선착장에 닿았다.

동글동글한 돌이 깔린 자갈밭 뒤로 푸르게 우거진 숲이 시야를 압도한다. 청령포다.

 

 

 

 

아름드리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단종이 홍수로 인해 영월 동헌의 객사로 옮길 때까지

2개월 남짓 비통한 생활을 보냈던 단종어소의 모습이 드러난다.

 

 

 

 

대문 하나 없는 담장 안으로 들어서니 담장 왼쪽에는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했던 초가 행랑이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깨끗하게 복원된 기와집 한채와 단종어소임을 알리는 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봉해져 있던 세조 2년(1456),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상왕 복위를 도모하다 참형에 처해진 이듬해 6월,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당하고 다음날 이곳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고 만다.


 

 

 

단종어소 내부는 가구와 이불, 서안  몇개가 놓여 있을 뿐이고

한쪽 방에는 갓 쓰고 푸른 도포를 입은 단종과 그에게 절을 하는 선비, 관노 등의 인형이 초라하게 놓여 있다.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결국에는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사면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오도가지도 못하는 곳에 유배되어 버린 단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조그마한 반닫이 위에 놓여진 초라한 이부자리가 그당시 단종의 처한 서글픔을 소리없이 대변해 주는 듯 하다.

 

 

 

 

단종어소를 돌아보면 특이한 것은 주변을 감싼 소나무들이 단종어소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나무 한 그루는 아예 담을 넘어 마당 한가운데까지 가지를 뻗었다.

 

 

 

 

청령포로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조의 동생이자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사사되고 만다.

노산군은 다시 강등되어 서인(庶人)이 됐고,

결국 1457년 10월 24일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니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차디찬 시신으로 동강에 버려진 어린 임금이 안타까워 소나무조차도 어소를 향해 허리를 굽힌 것일까......


 

 

 

어소를 떠나 쪽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숲 한가운데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밑둥에서부터 갈라진 줄기가 하늘까지 뻗어 30m나 자란 모습이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나무의 수령을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단종의 비참한 유배 생활을 보고

단종의 절규와 슬픔을 들은 소나무라고 해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관음송을 지나 소나무 숲 뒤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노산대 쪽으로 올라본다.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검은돌로 마구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단종이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오는 망향탑이다.

 

 

 

 

망향탑에서 조금 더 가니 단종이 거의 매일 올라 한양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가 자리잡고 있다.

 

 

 

 

몇 사람이 겨우 비집고 설만한 좁은 꼭대기에는 노산대(魯山臺)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단종이 서서 한양을 바라보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어린 단종이 매일 올라서 한양 쪽을 바라 보았던 노산대의 가파른 벼랑 아래로는 초록빛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넘어갈 수 없는 저 강물과 첩첩이 에워싸인 산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아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노산대 위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가슴을 에이는 듯 싸늘하게 느껴진다.

 


 

 

노산대를 돌아 다시 아래로 내려오니 비석 하나가 숲 가장자리에 서 있다. 금표비(禁標碑)다.

이는 이곳에 일반백성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영조 때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뒷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가는 곳도 또한 금지하는데 해당된다. 승정 99년'

이란 뜻으로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린 단종의 서러움이 깃든 곳이지만 청령포의 강물은 그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푸르기만 하다.

많은 사람이 청령포에 와서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떠나지만

스쳐 지나가는 영월에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머물러버린 이가 있다.

조선왕조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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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덕 대게>를 떠올릴 것인데

영덕을 한번이라도 가보신 분들은 영덕 해맞이 공원, 영덕 풍력 발전소 등을 떠올릴 것 같다.

 

최근에는 바다의 푸르름을 만끽할 수 있는 <블루로드>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블루로드>는 제주 올레길처럼 영덕의 강구항에서부터 고래불 해수욕장까지 

50.5 Km 의 해안  문화 생태 탐방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최근에는  블루로드의 시작점인 영덕 강구면에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해상산책로>가 조성되어

영덕 해안 도로를 지나는 여행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7번 국도를 북쪽으로 주행하다 해맞이 명소인 영덕 삼사 해상공원 가기 바로 전인

오대양 횟집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해안도로인 삼사길로 접어들면  

저 멀리 바다에 걸쳐 놓여진 상큼한 색감의 다리를 만날 수 있는데

바로 시원한 바람과 푸르른 파도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영덕 해상산책로>이다.

 

<해상다리>라고도 부르는 영덕 해상 산책로는 마치 해안에 걸쳐진 하나의 부채와 같은 모양이다.

바다에 깊히 박힌 산책로의 기둥은 밝은 파랑색으로, 난간은 하얀색으로 칠해졌는데

하얀 난간과 파란색 다리에서 반사하는 화사한 햇살과 함께 

파란 하늘과 짙푸른 바다의 색감이 더해져서 눈이 부실 정도의 푸르름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

 

해상산책로 바닥 군데군데는 투명창으로 되어 있어 걸으며 발 아래 바다를 볼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는데

아직은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찾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형편이고

간간이 해안도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멈춰 둘러보고 사진을 찍거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늘에서 담은 스카이뷰 지도에서는 너무나 완벽한 부채꼴 모양의 해상산책로를 볼 수 있는데

다리 위나 해안에서는 산책로의 전체적인 모습을 앵글에 다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영덕 해상 다리에 처음 갔던 날은 바다기 너무나 잔잔하여 마치 호수 같았고 물빛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영덕 해상 산책로의 모습을 보았으니

바다의 또 다른 얼굴, 바다가 심하게 일렁이고 하얀 파도가 푸르른 해상 다리에 부딛혀 조각처럼 부서지는 날에

다시 한번 이곳에 오리라 생각하며 해안길을 떠나 다시 7번 국도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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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 준령이 높은 줄기가 감싸고 앞으로는 낙동강, 내성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 예천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라 

나라가 태평할 때 단물이 솟는다는 샘인 '예천(醴泉)'으로 불리워왔다.

 

물맛이 좋은 고장의 술맛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이치.

오래전부터 예천에는 수십개가 넘는 양조장이 있었다고 하나 

공장에서 대규모로 제조되어 나오는 각종 주류에 밀려

지금은 3개 정도가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 지난번 1박2일에 나와 유명세를 타게 된 용궁양조장을 찾아 보았다.

 

 

 

 

1958년에 지어졌다는 용궁양조장. 세월의 풍상이 건물에서 진하게 풍겨나온다.

 

 

 

 

붉은 벽돌 건물 옆으로 난 대문을 통해 양조장 안으로 들어가 본다.

 

 

 

 

막걸리 양조장이라 많은 사람이 일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사람의 기척이 거의 나지 않는다.

 

 

 

 

안으로 들여다 보니 시설도 조촐한데 왼쪽으로 난 방에도 막걸리를 양조하는 시설이 있다.

 

  

조금 있으니 나타난 양조장 사장님.

1박2일에서 출연진들에게 다짜고짜로 막걸리를 권하던 바로 그 사장님이다. 

인사를 드리고 양조장을 좀 돌아보아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니

혼자 분주하게 일하시던 사장님은 다짜고짜로 '막걸리 한번 맛볼랑교? "하면서 바가지 채로 권한다.

 

 

 

 

소주 한잔만 해도 갑자기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나는 특이체질인지라 절대로 술을 못 마시지만

물맛 좋기로 유명한 용궁의 전통 수제 막걸리를 어찌 그냥 지나치랴.

살짝 맛을 보기로 하고 입에 대어 보니 의외로 막걸리 맛이 되게 순하다.

예전에 맛본 적이 있었던 시금털털한 막걸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부드러운 맛이 난다.

같이 간 동료들도 막걸리맛이 너무 좋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양조장인데 분주하게 일하시는 분은 사장님 한분 밖에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일해서도 수요를 감당할 만큼 막걸리의 수요가 많지 않은 것일까?

  

소주나 맥주가 인기를 얻으면서 오랫동안 서민들의 술이었던 막걸리는

공사판이나 농촌에서 마시는 술로 인식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그 맛과 효능이 다시 알려지면서 다시금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효묘균이 그대로 살아 있는 우리의 전통 막걸리는 유효 기간이 닷새 남짓이라

이곳의 막걸리는 멀리까지 배달이 안 되고 오직 용궁면내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곳에 근무한 세월이 45년이 훌쩍 넘었다는 용궁 양조장 사장님.

막걸리병을 들고 포즈를 취한 모습에는 남다른 자부심이 풍겨 나온다.

다른 곳에는 없고 오직 이곳 용궁면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용궁 수제 막걸리.

물맛 좋은 예천에 들리는 여행자가 꼭 한번 거쳐가야 할 곳으로 강력히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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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추억의 타임머신레이스'편은 방영된지 한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방송 중 하나이다.

 

70년대에서 시간이 오롯이 멈춘 듯한 경북 예천 용궁마을은  

가을동화에서 은서와 준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회룡포마을을 비롯해서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이 110년 세월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예전에는 탄광촌을 오가는 사람들로 연일 붐비었던 역이었지만

지금은 오가는 사람 거의 없는 무배치 간이역인이 된 용궁역 또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한다.

 

용궁마을 양 옆으로 펼쳐지는 오래된 가게들과 빛바랜 간판들을 읽으며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걷다보니

어디선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겨나와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니 고소한 냄새의 근원지는 동부제유소.

바로 1박2일 제작진들이 OB팀과 YB팀에게 참깨를 주며 참기름을 짜 오라고 했던 바로 그 참기름집이다.

 

 

 

 

고소한 내음이 등천을 하는 동부제유소의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의 바쁜 손놀림이 먼저 눈에 뜨인다.

장날이라 집에서 수확한 참깨를 가지고 참기름을 만들러 온 손님들의 일거리가 밀린 듯 하여 돌아보기도 조심스럽다.

주인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일 하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웃으면서 흔쾌히 허락을 해주신다.

 

 

 

 

1박2일 방송에서 YB팀은 시장제유소에서, OB팀은 동부제유소에서 참기름을 짜게 되는데

시장통에서 가까운 시장제유소보다 동부제유소가 유달리 시청자의 기억에 남은 것은

젊었을 때는 용궁에서 한인물 했음직한 주인 아주머니의 환한 미소가 한몫했을 뿐 아니라

현대화된 기계를 쓰지 않고 아직도 수십년전 참기름 짜는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년전으로 돌아간 듯 추억이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고

갓짜낸 참기름을 조르르 부어 비벼낸 나물비빔밥은 강호동을 비롯한 1박2일 멤버들을

평생 잊지 못할 감동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가게를 돌아보니 오래된 물건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참깨나 들깨를 담아두었음직한 천 소쿠리는 도대체 그 언젯적 물건일까?

 

 

 

 

손님이 참기름을 짜달라고 맡긴 참깨 대야 옆에 놓인 성냥곽이 눈길을 끈다. 비사표 성냥이라니......!

바닥에 성냥이 놓여 있는 이유는 이 성냥이 참기름집에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요긴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참깨를 볶으려면 화로의 열이 충분히 달구어진 후 참깨를 넣어 볶아야 하는데

 

 

 

 

적정 온도를 알려주지 않는 수동 시스템이므로 참깨를 볶을만한 적정한 온도를 가늠하기 위해

이렇게 파이프 위에 성냥개비 하나를 살짝 올려놓는데

 

 

 

 

파이프 위에 놓인 성냥에 갑자기 확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하면 화로의 열이 충분히 달구어진 것이므로 

그때 바로 참깨를 부어 볶기 사작하면 되는 것이다.

 

 

 

 

뜨끈하게 달구어진 솥 안에서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면 

고소한 냄새와 함께 아련한 추억도 맞물려 돌아가는 듯 하다. 

모든 것이 예전 방식 그대로의 수동 시스템이기 때문에 주인 아주머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데

 

 

 

 

 

참깨를 볶는 화덕에서 김이 뭉실뭉실 솟아오르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할 때 쯤이면

 

 

 

 

잘 볶아진 참깨를 화덕 아래 나무 상자에 내려 한김을 식히고

 

 

 

 

다시 커다란 체에다 참깨를 옮겨 붓는데 이렇게 참깨를 식힌 뒤에 참기름을 짜야 더 고소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넓다란 체에서 한김을 날려보내고 식혀진 참깨를 커다란 베보자기에 옮겨담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베보자기에 거두어진 참깨는 참기름틀에 꽁꽁 싸서 넣어지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강철참기름틀에 밀어넣고 스위치만 켜면 참기름이 만들어지게 된다.

 

 

 

 

압착기에 스위치를 넣고 조금 기다리니 아! 동그란 구멍 사이 사이로 노란 참기름이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그동안 수많은 시간 동안 참기름을 먹어 왔지만 정작 참기름이 짜지는 과정을 보는 건 처음인지라 너무 신기하게 느껴진다.

 

 

 

 

압착기에서 '진짜 참기름'이 조르르 흘러내리니 정말 고소한 내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필자도 오랜만에 정말로 고소한 '진짜 국산 참기름"을 한병 손에 넣었다.

이 참기름으로 산나물 팍팍 무쳐 저녁상에 올릴 생각을 하니 절로 신명이 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년전으로 돌아간 듯 여행자의 빛바랜 추억들을 되살려 주신

예천군 용궁면 동부제유소 아주머니께 감사의 말씀을 다시 한번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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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 출항했던 어선들이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면

갈매기들도 따라 춤 추며 어선을 따라 모여드는 울산 정자항.

 

 

 

 

 

울산 북쪽에 위치한 정자항구는 고래잡이의 메카인 장생포항과 함께 울산을 대표하는 항구이다.

 

 

 

 

울산 도심에서도 제법 많이 떨어진 곳이지만 주말에는 모여드는 차들과 관광객으로 발 디딜 곳 없이 북적이는데

 

참가자미가 많이 잡히는 3,4월의 주말에는 만명 정도의 관광객이 운집하기도 한단다.

 

 

 

 

정자항에 이르러 차를 주차한 후 먼저 방파제로 향하니 등대의 모양이 참으로 특이하다.

 

고래잡이의 본거지인 울산의 항구답게 수면 위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귀신고래의 형상을 등대로 꾸며 놓았다.

 

 

 

 

 남방파제에는 하얀색의 귀신고래, 북방파제에는 붉은 귀신고래가 거대한 몸집을 들어올리며 수면 위로 힘차게 솟구친다.

 

 

 

 

이 등대들은 울산항만청이 7억5천만원을 들여 2010년년에 착공하여 완성한 것이라 하는데

 

 



등대의 높이는 10m 정도이고 등명기는 300㎜로 등대의 불빛은 16㎞ 떨어진 선박에서도 쉽게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비록 다른 등대에 비해서 높고 위엄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고래의 도시 울산을 상징하고 주변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 등대이다.

 

 

 

 

정자항에서 가장 인기있는 어종은 뭐니뭐니 해도 참가자미인데 

 

정자항은 1년 내내 참가자미를 잡는 곳으로 전국으로 유통되는 참가자미의 70%를 어획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항구의 조그마한 빈터 마다 여기저기 참가자미를 말리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배에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가자미는 선착장에서 직접 경매를 거쳐 활어는 직판장으로 보내고

 

죽은 고기는 건조 과정을 거쳐 밑반찬용으로 사용되는데 만원이면 비닐 봉지 하나 가득 말린 생선을 담아서 올 수 있어 좋다.

 

 

 

 

항구 바로 옆 좌판에서는 직접 잡은 생선과 조개등 해산물을 가지고 나와 즉석에서 회를 떠준다.

 

 

 

 

싱싱한 해삼, 멍게들을 보는 사람들은 그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좌판 앞에 앉아 회 한접시 하고야 일어서게 된다.

 

 

 

 

바로 옆에는 연안에서 낚시로 걸어올린 갈치가 그 은빛 비늘을 뽐내고 있고

 

 

 

 

네 마리식 꿰어 잘 말려진 코다리도 여인네들의 장바구니에 담겨질 날을 기다리며 햇살 아래 얌전히 누워있다.

 

 

 

 

항구 바로 옆에 위치한 활어직판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밖에서 보기에는 협소해 보이는데 내부에는 싱싱한 수산물들이 빼곡이 들어차 활기가 느껴진다.

 

 

 

 

아직 살아서 바구니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생선들은 종류가 제법 다양하다.

 

 

 

 

열기, 게르치, 도다리, 가오리, 가자미, 강도다리.......이름도 생소한 생선들이 너무나 많다.

 

 

 

 

생선들 가운데 누워 물을 신나게 찍찍 뿜어대는 멍게.

 

보기만 해도 멍게의 신선한 맛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소라도 너무나 이쁘게 플라스틱 대야에 담겨 있다. 이렇게 큰 소라를 회로 먹는다면 몇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다.

 

 

 

 

개의 생식기를 닮은 희한한 모양새를 닮은 개불.

 

너무나 징그러운 외관 때문에 먹기 혐오스러운 음식으로 분류되지만

 

손질되어 횟집 상 위에 올려진 개불은 그 꼬들꼬들한 맛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어종이다.

 

 

 

 

가자미, 도다리, 광어......이런 생선들은 너무나 비슷비슷하여 그 이름을 정확히 알긴 너무나 힘든 일이다.

 

가자미랑 비슷하게 생긴 이 생선은 강도다리라고......

 

 

 

 

대게라고 하면 누구나 영덕대게, 울진 대게, 구룡포 대게를 떠올리지만 정자에는 대게도 유명하다.

 

 

 

 

 정자 대게는 껍질이 얇고 크기도 그리 크지 않지만

 

대게의 향이 살아있어 찜, 탕으로 봄철 입맛을 돋우기에 그만이라고 한다.

 

 

 

 

울산 인근에서 최고의 횟감으로 참가자미를 꼽는 이유는 참가자미가 순수 자연산 어종이기 때문..

 

대부분의 횟감 생선들이 다 양식이 가능한데 반해 참가자미는 깊은 바다에 사는 어종인지라 양식을 할 수 없어 모두 자연산이다.

 

기름기가 많아 찰지고 고소한 맛이 일품인 참가자미는 특히 비린 맛이 없어 다양한 음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그중 정자항 사람들이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참가자미회다.

 

 

 

 

 

정자 활어 직판장에는 배에서 바로 직거래를 하기 때문에 매일 신선한 자연산 가자미가 바로 바로 들어오고 있다.

 

참가자미회를 맛보시고 싶으신 분은 활어직판장으로 가서 싱싱한 참가자미를 고르신 후 손질된 참가자미를 받아서

 

판장 부군에 위치한 초장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시면 된다.

 

산란전 살이 통통 오른 봄철이 참가자미가 가장 맛있는 철이니

 

지금 정자항에서는 싱싱한 참가자미회를 저렴한 가격에 맛 볼 수 있어 좋다.

 

 

 

또 자연산 미역도 울산을 대표하는 수산물 중 하나이다.
 

화암 주상절리가 있는 산하동을 찾으면 3~4월이면 바다에서 수확한 미역을 널어 말리는 진풍경을 볼 수 있는데

 

울산 미역이 맛있는 이유는 물살이 빨라 미역이 많이 흔들리며 자라기 때문에 부드럽고 맛이 좋다고........

 

'울산대장각'이라고 불리우는미역 한 오리면 산모들의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영양가와 맛 뿐 아니라 크기도 엄청나게 큰 것이 울산대장각이다.

 

 

 

봄날의 주말, 귀신고래가 하늘로 솟구치는 정자항에 들러 제철만난 참가자미회도 맛보고

 

울산 대장각도 한오리 사서 돌아간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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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무작정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던 여정을 멈추게 한 도시, 강릉.

영동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강릉 구경은 하루만에 끝내기엔 너무나 볼거리가 많다.

사시사철 푸르른 동해를 품은 경포대 해수욕장과 함께 커다란 석호인 경포호,

관동팔경의 하나로 그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수가 나올 것 같은 누각 경포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죽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과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생가,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강릉 객사문,

에디슨의 세계 최초 축음기 등 수백억에 이르는 소장품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 등등......

강릉에 소재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멋과 풍류를 사랑하는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고 싶은 집으로 꼽히는 곳은 단연 선교장(船橋莊)이다.

 

 

지난번 1박2일에 소개되어 출연진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기도 했던 선교장은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오른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연지(蓮池).

연지 안에 날아갈 듯 자리잡은 아름다운 건물의 이름은 활래정(活來亭)이다.

소나무 숲을 뒷배경으로 하고 연못 가운데도 멋들어진 소나무를 거느린 활래정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인데

이곳은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여름나절에 찾아왔더라면 연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연지를 볼 수 있을텐데.......

앙상한 가지만 남은 연지는 어쩐지 쓸쓸함만 더 해준다. 
 

 

활래정을 지나 선교장 앞에 서니 24간이나 되는 행랑이 시선을 압도한다.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처럼 길게 늘어선 행랑은 바로 하인들의 방.

그만큼 하인들의 수도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도망친다는 뜻의 '줄행랑'이란 용어가 이곳 행랑채에서 생겼다는 설도 전해 내려 오는 곳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보존되어 온 집이다.

선교장(船橋莊)이라는 명칭은 예전에 지금의 경포호와 연결된 수로가 있어

배를 대는 선교(船橋)가 집 앞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경포호와 선교장사이에 논밭이 들어서서

선교장 앞에까지 배가 들어오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에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원래는 아흔아홉간이었다는 선교장은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안채 주옥, 열화당, 활래정, 서별당, 행랑채 등 84간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열화당은 남자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로 1815년(순조15년)에 이후가 건립한 건물이다.

 

 

 


 

 

 

열화당(悅話堂)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귀거래사(野去來離)'의 구절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열화당 툇마루 앞에는 이렇게 서양식의 테라스가 덧대어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양반 살림집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물인 이 서양식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공사관 직원들이 영동지방 여행을 왔다가 선교장에 장시간 머무르다 간 후

 

그 답례로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에서 구리판을 들여오고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테라스는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큰 구조물이어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서별당은 이씨가의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 맞이에 주로 사용되었고 방과 마루의 모든 벽페가 문으로 되어 있어서

 

활달하고 개방적인 선교장 가족들의 성품과 면모를 보여준다.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를 전주이씨 가의 삶의 터전으로 삼을 때에 건립된 건물로서 

 

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이다.

 



 

 

안채, 별당, 사랑채를 이어주는 대문들이 한줄로 늘어선 모습이 멋스러운데 선교장에는 이런 대문이 모두 12개가 있다.


 

 

만석꾼 곳간채에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베풀던 선교장.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 선교장.

뒷산의 노송 숲과 활래정의 연꽃, 경포 호수 등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후덕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까지 거주하는 살아숨쉬는 공간인 선교장은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한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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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2일 경북 예천편 '추억의 타임머신레이스'에서  제시된 한자를 받아 쓰는 '과거시험 미션'을 치를 때

 한자사전에도 없는 엉터리 한자를 써서 시청자들의 폭소와 쓴 웃음를 자아내던 곳을 기억하시는지?

       과거시험을 치르던 바로 그 장소는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 예천군 삼강 주막이다.

 삼강주막은 사극에서 보던 '주막'가운데서 실제로 남아 있는 최후의 주막이라고 하여 찾아 보았다. 

 

 

예천군 용궁면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삼강교를 지나 풍양면에 이르면

세개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지점에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주막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 흘러오는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함께 만나는 마을의 이름은 삼강마을이라 하고

세 강이 만나는 곳에 지어진 주막의 이름을 예로부터 삼강주막이라고 불렀다.

 

 

1900년대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110여년이 넘은 삼강주막은 아직도 주막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막 내에는 1900년대에 지어진 주막과 함께 사공 숙소, 보부상 숙소, 원두막과 평상이 군데군데 위치하고 있어 

주막을 찾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도토리묵, 두부 등을 안주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예전에는 주모가 한상 차려서 손님 상에 일일이 가져다 주었던 삼강주막,

요즘은 손님이 직접 음식을 주문해서 가지고 가는 셀프 주막이 되었다는 점이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다.

 

 

원래 이곳에는 1900년대에 지은 사공 숙소와 보부상 숙소가 있었다.

당시 삼강은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물류 이동이 아주 활발한 곳이었는데

보부상과 길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나 오갈 만큼 분주한 곳이었다.

밤이 되면 낯 모르는 사람들이 호롱불에 둘러앉아 야담을 나누면서 잠을 청하던 곳이 보부상 숙소이며

 

 

보부상 옆에 있는 작은 오두막은 길손들을 실어나르느라 기꺼이 노를 찹았던 사공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 두 건물은 갑술년 (1934년) 대홍수로 멸실되었으나

2008년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2008년 복원하였다.

현재 삼강주막 내의 대부분 건물들은 민박 체험도 하고 있어 이곳에서 민박하는 사람들은

110여년 전 주막에서 하룻밤 묵던 이색적인 체험을 할 수도 있어 좋다.

 

 

강둑을 따라 주막 바로 옆에는 이렇게 커다란 '들돌'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들돌은 일반적으로 농촌의 청년들이 장성하여 어른으로 인정받는 의례에서 생겼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많은 물류의 이동에 따라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책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들돌은 상당히 커서 웬만한 장정들은 들어올리기는 커녕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큰 들돌로 힘을 측정한 것은 예전의 장정들이 힘이 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장정들이 힘 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일까? 그점이 궁금하다.

 

 

삼강주막 내 많은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지만

다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은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주막이다.

 

 

경상북도 민속 자료 제 134호로 지정된 삼강주막은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고 다소 초라하기까지 하다.

 

 

건물은 방 2간, 부엌 1간, 마루 1간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이지만 

주막의 기능에는 충실한 집약적 평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삼강주막의 중심인 부엌 문으로 안을 살짝 들여다본다.

 

 

안에는 소박한 찬장이 하나 놓여 있고 부엌 아궁이 위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가마솥 하나 가득 끓여진 국밥은 이 주막에 머물다 간 많은 사람들의 속을 따끈하게 덮여주었겠지......

 

 

부엌 흙벽에는 이렇게 주막 주인이었던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 장부로 그은 금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저렇게 금을 그어놓은 것만으로 누가 얼마나 외상으로 먹었는지 어떻게 알아낼까?

아마도 유옥연 할머니 만이 풀 수 있는 신비로운 수수께끼인 듯 하다.

 

 

그런데 주막엔 외부, 내부 할것없이 수많은 낙서들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장부였던 흙벽의 수많은 금들도 이렇게 유리를 씌워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오래 전에 훼손되어 없어졌을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 한다.

삼강나루의 나들이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로는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사용되던 삼강주막.

세월은 흘러 이곳을 기점으로 오가던 행인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이 스쳐간 흔적은 남아 오래된 발자취를 전하고 있다.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의 평상에 걸터앉아 옛 행인들처럼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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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최고의 추억거리인 수학여행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다녀 오셨는지?

학교가 위치한 지역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대구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중학교 시절에는 통영, 거제 등 남해안으로
고등학교 때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대구에서 밤 기차를 타고 아침 나절에 강릉에 내려서는 다시 전세 버스로 갈아타고 강릉 일원을 돌아본 후
낙산사를 거쳐 설악산을 한바퀴 도는 대략 그런 코스였던 것.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학여행에서 유적지를 제대로 돌아보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선생님이 눈여겨 보라는 유적지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맛있는거 사먹을 생각, 
밤에 숙소에서 친구에게 어떻게 장난을 칠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으니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어디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는건 당연한 결과인 듯......



수학여행 때에는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스쳐지나갔던 곳인 강릉 오죽헌을 새삼스럽게 다시 찾아 보았다.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 본 오죽헌은 마치 처음 찾아온 곳인 듯 새삼스럽고 생소하기까지 하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인 율곡 이이(1536∼1584)와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난 유서깊은 집 오죽헌.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율곡 이이의 동상이 먼저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매표소를 지나서도 오죽헌에 들어가는 입구인 입지문까지는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어릴적에는 "뭐 이렇게 많이 걸어가야 돼! 다리 아프게!"하고 불평이나 하곤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 "오...경내가 상당히 넓고 쾌적한게 좋은데?"하는 정반대의 생각이 든다.




입지문을 들어서니 너른 마당 저 편에 구오천원권에서 보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좌우를 둘러보니 방문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발 아래 청동으로 된 발판들이 눈에 뜨인다.




바로 지난번 <1박2일 도시여행 강릉편>에서 이수근이 수행했던
구오천원권 뒷면과 꼭 같이 사진 찍기 미션을 수행했던 바로 그 장소이다.

이 곳에서 발판을 밟고 서서 사진을 찍으면 구오천원권의 그림과 꼭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필자도 청동발판을 밟고 서서 구오천원권과 비슷한 시점으로 사진 한장 찍어보았다. 




지폐의 그림에 그려질 때엔 나무들이 담장에 미치지 못 할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이제는 훌쩍 자라 지붕을 넘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간의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오천원권 지폐의 전경을 담은 후 계단으로 올라가 오죽헌 안으로 들어가 본다.




문을 들어서나 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단청이 된 건물은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정화 사업 때에 어제각을 서쪽으로 옮기고 이 자리에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사의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라고 하는데 날렵한 지붕선과 잘 어울리는 휘호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 이이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문성사 앞에 동쪽을 보고 앉은 건물이 바로 별당인 오죽헌.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인 오죽헌은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강릉의 선비인 최치운이 처음 세웠는데 그 아들 응현은 사위인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다시 사위인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이후 후손들이 계속 관리해오고 있다.



오죽헌의 온돌방은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용꿈을 꾸고 율곡을 잉태했다는 몽룡실이다.





집 주변에는 이렇게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줄기는 손가락만 하고 검은 색을 띤 대나무가 바로 오죽(烏竹)이다.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이었던 권처균은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에게서 이 아름다운 집을 물려받았는데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권처균은 자신의 호는 물론이고 집 이름도 검은 대나무에서 착안하여 ‘오죽헌’이라고 지었다고......

오죽헌의 상징인 검은 대나무인 오죽의 그림이 율곡 이이 초상, 오죽헌과 함께 오천원 신권 얖면에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율곡은 소나무를 좋아하여 소나무 예찬도 지었는데 오죽헌 마당에 있는 이 나무는 율곡송이라 명명되었다. 




마당에는 이렇게 수령이 600년이 넘은 배롱나무도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600년이 넘은 나이이니 오죽헌 마당을 뛰어다니는 율곡 선생의 모습도 지켜보았을 배롱나무이다.





안채에서 서쪽으로 난 문으로 나가면 날아갈 듯한 처마를 머리에 인 사랑채가 그 날렵한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서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별당인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하고 다 철거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사랑채는 별당인 오죽헌과 함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툇마루에는 이렇게 하얀 주련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끄는데 이 주련의 글씨는 놀랍게도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라고......!




사랑채를 지나 오죽헌의 가장 서쪽으로 가면 어제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어제각은 율곡 이이의 저서인 격몽요결과 그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여 놓은 집이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벼루를 궁궐로 가져오게 하고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바로 어제각(御製閣)이다.
구 오천원 앞면에 율곡 이이의 초상과 함께 율곡이 쓰던 벼루가
도안 그림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귀중한 벼루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딩 시절 수학여행으로 와서 주마간산격으로 스쳐지나갔던 강릉 오죽헌.
분명히 이곳을 다 돌아보고 돌아갔으련만 오죽헌 뒤의 대나무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아본 오죽헌은 처음 만나 본 듯 새롭기만 하다.
아무런 의욕없이 다만 선생님에게 등 떠밀려 돌아보았던 오죽헌이었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본 오죽헌은 새로운 추억의 수학여행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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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용궁역은 하루 종일 있어도 찾는 사람 거의 없는 이른바 간이역이다.
1928년 11월 1일 보통역으로 역무를 시작했던 용궁역.
바로 이웃한 문경이 탄광으로 호황을 누리던 70년대,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던 이곳도 
탄광 산업의 내리막과 함께 이용객이 서서히 줄어들고
2004년부터는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이 되어버렸다.

잠시 잊고 살아온 꿈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오롯이 추억과 벗하고 있는 용궁역.
오가는 사람의 흔적없이 적막감이 감도는 용궁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문경시 산양면을 지나 예천읍 용궁면의 작은 지방도로 들어서 얼마 안 가니 금방 눈 앞에 용궁역이 나타난다.
여느 역 같으면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겠지만 간이역인 이곳은 찾는 사람 없이 적막감만 감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니 매표구가 벽으로 막혀 있고 다른 역의 열차 운행 시간표가 매표구를 대신한다.

 

역 안쪽 문 옆에는 개찰구 대신 이렇게 표 넣는 함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함 안을 들여다보니 언제적 것인지 모를 열차 승차권 몇장이 버려져 있고
쓰레기통인줄 오해한 승객들이 버리고 간 양심도 눈에 뜨인다.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역의 이름, 용궁역.
바다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이 곳의 이름을 왜 용궁(龍宮)이라고 했을까? 
바다가 먼 만큼 바다를 그리워했기 때문일까?
 


어떤 연유에서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나 용궁역 구내에는 커다란 용 장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용궁을 상징하는 용이라지만 조용한 간이역에 서 있는 여의주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는 용 장식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인적 없는 기찻길 한가운데 서서 저 멀리 점으로 사라지는 기찻길을 바라 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찻길을 보면 왜 이리도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 기차로 떠나보낸 가슴 아픈 사연도 없는데.......



기찻길이 멀리 뻗어가 하나의 점이 되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우리들의 추억도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하나의 희미한 점으로 남기 때문에 애틋함을 더하는 것일까?

 
녹슬어 가는 철로와 함께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키며 닳고 또 닳아 온 침목은 그 빛이 날로 희미해지고



멀리 공부하러 나갔던 아들을 기다리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이던 벤치도 세월의 수만큼 낡아서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다시 이 자리에 앉을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 이제는 이 적막한 역에 머물러 줄 기차가 있을까?



아......! 적막감이 감돌던 간이역에 저 멀리서 기차가 들어온다. 혹시나 잠시라도 정차하지 않을까?

기차가 들어오는 설레임도 잠시, 잠시라도 머물러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저버리고
기차는 무심한 듯 여행자를 스쳐 지나가 버린다.

또 다시 감도는 적막함. 기침 소리마져 크게 울리는 고요함이 사방을 감싼다.


이미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둠이 사방에 서서히 내려 깔리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살아왔던 어린 날의 추억과 그리움 때문에 쉽게 간이역을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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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심을 가로지르는 신천에 놓인 12개의 다리 중에서
수성교 옆에 위치한 대봉동 신천대로 옆 방천시장 입구에 이르면
다리를 비스듬히 꼬고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는 가수 故 김광석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김광석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는 바로 이곳이 김광석이 태어나 5세까지 자란 곳이기 때문.
1964년 대구 대봉동 번개전업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광석은
5세까지 신천 옆 대봉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1968년 아버지를 따라서 상경했다.

1984년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한 그는 노찾사 1집에도 참여했는데
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 솔로로 데뷔하여 정규 음반 4집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후 꾸준한 활동으로 1995년에는 1,000회의 공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애잔하고 서정적인 노랫말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한국 모던포크의 계승자로 주목받던 그는 1996년 1월 스스로 생을 마감해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그의 자살은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팬들에게는 아쉬움과 슬픔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김광석은 쓸쓸하게 세상을 저버렸지만 그의 팬들은 아직도 그를 잊지 않고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을 찾아 그를 그리워한다.
그의 동상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방천시장 골목길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에는 
故 김광석을 추모하는 벽화와 글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데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는 가사와 함께 김광석의 민들레 홀씨를 부는 그림, 김광석의 이야기를 담은 짧은 만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주제로 만든 나무 우체통......등 감성을 자극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김광석의 생전 모습과 그의 노래와 관련된 벽화길을 걸으며
시장 모퉁이에서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어느새 그의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등병의 편지, 사랑했지만, 거리에서, 서른 즈음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일어나, 나의 노래, 광야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어느 60대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주옥같은 김광석의 노래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의 벽화 몇점을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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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심을 통과하는 신천에 놓인 다리는 12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수성교 바로 옆에 자리잡은 재래시장을 대구사람들은
방천(제방의 경상도 방언)을 따라 생겨난 시장이라고 해서 방천시장이라고 불렀다.

해방 이후 피난민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방천 둑 옆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이 시장의 시초인데

1960년대는 방천시장의 주력 품목인 싸전과 떡전을 비롯한
1,000여개의 점포가 이곳에 밀집하기도 해서 
서문시장,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 3대 시장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신천을 따라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소비자들의 발걸음이 백화점과 대형 마트로 몰리게 된 요즘
수많은 점포로 가득 차 문전성시를 이루던 방천시장도 그상권이 점점 축소되어
요즘은 65여개의 점포가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데.......
'문전성시 프로젝트'와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로
세간에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대구 방천시장을 찾아보았다.





방천시장 가장자리로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도심 한복판의 섬처럼 고립되어 버린 방천시장.




옛날의 영화는 어디로 가고 상당수의 점포는 낙후되고 빈 채로 버려져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슬럼가가 연상되기도 한다.




상업적으로 쇠퇴해가는 재래시장에 문화의 숨결을 불어넣어 전통 시장을 지역 문화 공간이자 일상의 관광지로 살리기 위한
'문전성시 프로젝트'에  방천시장도 문화체육관광부 시범시장 14곳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침체되어 가는 방천시장을 살리기 위한 첫번째 시도는 '방천시장 별의 별 별 프로젝트'이다.
공공미술과 재래시장의 만남을 주선한 '방천시장 별의 별 별 프로젝트'는 방천시장의 비어있는 점포를
예술 창작 공간으로 제공해
자신의 작업실을 시장 손님들에게 공개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시간을 가졌다.




방천시장으로 들어서보니 다른 재래시장과 달리 아케이드 곳곳에
현수막천에 시장 상인들의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 사진들은 '방천 상인들이 찍은 전통 시장 사진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방천시장의 삶과 풍경의 주인인 상인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담백하게 담은 이 사진들에서는
사진을 전혀 모르는 상인들도 즉석에서 사진기 이용법을 배워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장을 한바퀴 돌며 사진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평범한 일상을 일구며 살아가는 이들의
결코 평범하지 않는 특별한 순간 순간들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을 살리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래 시장을 찾는 발걸음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아직 저녁장 보기에는 이른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상인끼리 모여 시장 한가운데 길을 막고 윷놀이 삼매경에 빠진 모습도 보인다.




열심히 점포를 지키는 상인들도 썰렁하긴 마찬가지다.
시장이 너무 조용하니 물건을 사지 않고 사진만 찍는 것이 너무 송구스러울 정도이다.
문화와 예술이 만나는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라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 시장 본연의 목표인 상권 활성화가 더 중요한 일일 듯 하다.




사진만 찍고 가는 것이 미안스러워 모퉁이 도너츠집에서 '앙꼬 도나스'와 '찹쌀 도나스' 몇개를 사서 맛을 보았다.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것이  **도너츠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추억의 시장 도너츠 맛이다.




시장 바로 옆 방천길의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에서는 신천에서 멱을 감으며 유년시절을 보낸 
가수 김광석을 추억할 수 있는 벽화길이 마련되어 있으니 방천 시장과 함께 들려보면 금상첨화이다.




매주 토요일 3시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예술 문화시장이 '토요 컬쳐 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열리고 있다고 하니 
다음에는 꼭 토요일 오후에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천시장 골목을 지나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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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시에서 예천읍 쪽으로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금천 위에 놓인 산양교를 지나 924번 지방도로 접어 들면
시간이 멈춘 듯 거리마다 70년대의 풍경이 가득한 마을을 만나게 된다.

바로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1박2일에도 소개되었던 용궁로를 걷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년을 거슬러 올라 1970년대로 돌아간 듯
양 옆으로 펼쳐지는 오래 된 가게들과 간판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용궁면의 메인 스트리트인 용궁로. 나름 번화가인 용궁 사거리가 지척이건만
거리를 지나다니는 차들도 많지 않고 대로변에 위치한 주택 앞에서는 할머니 한분이 무심한 듯 집 앞 청소를 하고 있다.



도시에는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동물병원이 많지만 농촌인 용궁에 위치한 동물병원은 그야말로 '가축병원'일 뿐이다.
 


어렸을 적엔 동네 어디에서나 있었던 간판 '상회'.
요즘 어느 도시에 가든 '상회'라는 간판은 보기 힘든데 용궁 이곳저곳에는 '상회'라는 간판이 심심찮게 남아 있다.
용궁의 삼천리 상회는 운동화, 장화를 비롯하여 자전거, 농기구, 락카......등
농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춘 이른바 '만물상'이다.

 


농촌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호스, 플라스틱 통, 삽, 괭이, 갈퀴.......등을 파는 철물점.
요즘 보기 힘드는 연탄 보일러도 눈에 뜨인다.


 

요즘은 거의 입지 않는 무스탕도 세탁한다는 세탁소. 2층 건물은 지은지 50년도 더 되어 보인다. 

 


이발소와 미용실이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 장날이라 그런지 이발소에는 손님들이 제법 있어 보인다.
대도시의 이발소는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미용실을 가지 않는 시골 할아버지들 덕에
이 조그만 마을의 이발소는 아직 살아남을 수 있었나 보다.


전화번호 국번이 두자리라니.....! 초원이발관의 간판은 대체 언제적 것일까?
간판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북향집인데도 불구하고 낡고 삭아버린 간판의 글자가 세월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곳을 터전으로 미래를 점쳤던 용궁도사님은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 미래를 점치는 일을 그만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호미, 곡괭이, 삽 등 여러가지 농기구를 만들어 팔던 철공소.
큰 공장에서 제작되어 나온 농기구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요즈음
더 이상 철공소에서 농기구를 제작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간간이 들어오는 경운기 등 농기구 수리에나 의존해야 하는 철공소.......



승용차가 없는 시골 노인들에게 오트바이는 최고의 멋진 교통수단.
장날을 틈타 오트바이 수리하러 온 손님들로 인해 오트바이 가게 주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닭도리탕, 오징어구이, 매운탕을 파는 통일식당 아줌마의 요리 솜씨에 반한 것일까?
문이 열렸을 때 본 식당 안에는 의외로 장을 돌아보러 나온 아저씨들로 그득하다.


60년 이상 한자리를 고수해왔다는 참기름집은 유리로 된 나무 문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박2일에서 은지원 등 YB팀이 참기름 짜는 미션을 실행했던 제유소 옆을 지나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심하게 자극한다.


강호동 등 OB팀이 찾아가 수공업으로 직접 제조한 막걸리를 맛보던 용궁양조장.
1958년에 지어졌다는 벽돌집 외부를 다 덮어버린 담쟁이 덩굴은 50여년이 넘은 건물을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1박 2일 팀이 마지막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던 털보 사진관에는 다른 집처럼 1박2일 촬영을 했다는 플래카드도 붙어있지 않다.
집집마다 디지털 카메라가 한두대 쯤 있는 요즈음, 장날이 되어도 사진관을 찾는 발걸음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이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털보 아저씨는 아직도 계속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까?
사진관의 문을 밀고 들어가 확인해 못했던 것이 계속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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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부터 강릉에는 새로운 커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강릉은 경포대 등 산자수려한 곳에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던 곳이었는데
커피마니아라면 누구나 알만한 최고의 바리스터들이 강릉에 자리잡으면서
현재에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카페에서 커피와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커피 마니아들의 발길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크고 작은 커피 전문점이 150여곳에 이르는 강릉에서도 안목해변은 커피거리로 유명하다.
연인들이 자주 찾는 안목 해변은 즐비하게 늘어선 커피 자동판매기로 유명한 곳인데
해안에 하나 둘 커피 전문점이 늘어서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커피거리'가 되었다.
특히 얼마전 1박2일 강릉편에서는 이승기가 10가지 커피를 마시고 리액션을 하는
미션을 수행하기도 한 곳이라 
안목해변 커피 거리를 찾아 보았다.



 



바다와 함께 하는 커피 향을 즐기기 전에 해변을 거닐며 카페들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로 한다.


 



다른 해변이라면 횟집이 주를 이루고 있겠지만 이곳 안목 해변엔 횟집보다는 카페가 더 많이 눈에 뜨인다.


 



대부분의 카페는 규모도 크다.  3층에 걸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이런 화려한 카페도 많고......


 



이승기가 다녀갔다고 플래카드를 붙인 이런 작은 카페도 눈에 뜨인다.
커피거리를 둘러보니 1박2일 촬영 때 이승기가 커피를 맛본 카페는 대부분 소규모의 카페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당도 아니고 카페 앞에 1박2일 촬영지라고 붙여놓는 것이 약간은 없어보이긴 했지만
길 가던 사람들도 멈추어서서 사진을 찍고 가는걸 보면 1박2일과 이승기의 효과가 참 대단하긴 한가 보다.


 



크고 화려한 커피 전문점을 스쳐지나서 손님이 많이 없는 작고 조용한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서 본다.




카페 안이 참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다.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에는 다 귀여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여성들이 딱 좋아할만한 카페이다.




군데군데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놓여 있어 둘러보는데도 눈이 즐겁고




친구들끼리 연인들끼리 오붓하게 앉아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기엔 알맞은 공간이다.




거기다 창가에서 바로 해변이 보이니 커피 향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게 되어 너무나 좋다.





안목해변에는 화려한 카페들이 줄지어 있지만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즐비하게 늘어선 커피 자동판매기이다.
 



식사 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안목 해변을 찾은 시민들은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향을 즐겼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카페라떼, 카푸치노.....레몬홍차 등 이곳 자동 판매기의 메뉴는 다른 곳 보다 훨씬 다양하다.


 



동전 몇개만 들면 바다가 바라보이는 자연커피숍에서 커피 한잔을 즐길 수 있는 매력을 지닌 곳이니
구태여 커피값이 비싼 카페에 들어가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 좋은 곳이 강릉 커피거리이다.


 



커피전문점 바로 옆에 커피 자판기가 놓여진 이색적인 그림이라니......!
강릉 커피거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재미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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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신성천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안동 길안천으로 합해지는 낙동강의 상류 신성계곡.
하얀 바위 계곡이 신비로운 행성에 온 듯한 백석탄 및 구비구비 비경으로 가득한
신성계곡의 들머리에 날아갈 듯 앉아 있는 정자 방호정을 찾아 떠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퍼 옆길로 들어서니 너무나 경악스러운 철제다리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예전에 놓여 있던 녹슬고 삐걱거리는 철제궤교도 이곳의 경관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지만
일본에 사는 교포 후손이 건설했다는 이 거대하고 튼튼한 다리는
아름다운 계곡과 절벽 위에 멋스럽게 올라 앉은 방호정을 일시에 시골 유원지 필이 나게 변모시켜버렸다.
산과 물이 휘돌면서 넓게 펼쳐놓은 공간에 앉은 방호정의 경관을 가리고 들어선 철제다리라니!
화가 치밀어 오르기는 하지만 이 다리가 없으면 방호정으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불평하고 있을 일만은 아니다.


다리 위에서 건너편을 바라 보니 뱀처럼 굽어져 돌아가는 물줄기 속으로
주저 없이 수직 낙하하는 절벽 위에 정자가 날아갈 듯 앉아 있다.


뒷산의 바위줄기가 뻗어내리다 물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에 만들어진 절벽에 그림같은 산수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기와 지붕이 참 특이하다. 하나의 건물에 기와기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하고 세련된 팔작지붕과
소박함과 절제된 멋이 있는 맞배지붕이 함께 섞여있다.


다리를 건너와 방호정의 옆에 서니 물길을 내려다 보며 바위 위에 우뚝 선 모습이 호탕하고 시원스럽기도 하지만


나뭇잎을 다 떨구어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방호정은 겨울날의 쓸쓸함을 안고 있다.


방호정의 좁은 옆길을 돌아드니 아래는 수직의 절벽으로, 물길이 그대로 내려다 보인다.
철제 난간이 가설되지 않았다면 앞으로 돌아들기가 겁이 날 정도이다.


방호정(方壺亭)은 방호 조준도 선생이 조선 광해군 11년(1619) 때 지은 정자다.
저 앞 멀리에 어머니 권씨의 묘를 모시고 그곳 바라보기 좋도록 바위머리를 터로 삼아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서는 창석 이준, 동계 조형도, 풍애 권익, 방호 조준도, 하음 신즙 선생 등이 학문을 강론하고 산수를 즐겼다고 한다.
  ㄱ자형의 평면으로 중심부분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놓았고,
꺾여 위치한 부분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을 놓았다.
정자 안에는 방호문집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많은 성현들의 제영현판이 걸려있다.


방호정은 방호정사(方壺精舍)로 불리워야 할 기능도 갖추고 있다.
'정(亭)'은 '놀기나 쉬기 위하여 경치나 전망이 좋은 곳에 지은 정자'라는 뜻을 갖추고 있고
'정사(精舍)'는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인데 방호정은 숙식을 위한 기숙 공간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학문을 닦고 수양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도 그 기능을 잘 갖추고 있다.


방호정 바로 옆의 건물이 방호강당인 것만 봐도 그러하다.
절경의 언덕에 들어선 정자임에도 불구하고 엄숙하고 절제된 학문의 장소로의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방호정의 주변은 높은 퇴적암의 절벽층을 보여주는 산들로 둘러쌓여 있고
바로 옆에는 은행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여름이나 가을에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또 북쪽으로 흘러 흘러 길안천으로 유입되는 물은 방호정 바로 위쪽에서 크게 휘돌면서 상당한 넓이의 퇴적지를 만들고
바로 앞 물길이 휘돌아나가는 곳에는 깊은 소까지 만들어져있어 여름에 물놀이하고 놀기엔 그만이다.


휘돌아드는 강물 위에는 잘 닳은 강돌들이 징검다리처럼 지천으로 쌓여있다.
강물은 얕아서 여기저기 이어져 있는 강돌을 디딤돌 삼아 강물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저 멀리 물이 휘돌아드는 곳에는 또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바지를 걷고 강물을 건너 물이 돌아드는 계곡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발길을 돌려 다시 다리를 건너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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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을 중심으로 해발 900m가량 깊은 산속에 폭 파묻혀 있는 경북 청송.
아직도 이곳은 속세와는 인연이 먼 듯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주왕산 국립공원이나 주산지 같은 아름다운 경치 뿐 아니라
오랫동안 잘 보존해놓은 정자, 고택 등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인데
청송군청에서 안동 길안면 쪽으로 914번 도로를 타고 가다 덕천사거리를 지나
 상덕천교에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옆으로 끼고 걷다보면
아흔아홉간 고래등 같은 송소고택과 마주치게 된다.




고택 앞 너른 마당에 서니 송소고택의 솟을대문이 위엄있게 여행자를 맞이한다.
홍살문으로 된 대문 윗부분은 복을 비는 의미와 악귀를 쫒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솟을대문  안을 보니 액자 속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송소고택의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눈 앞을 가로막는 담장, 바로 '내외담'이다. 
내외담 뒷편으로 왼쪽에는 큰 사랑채, 오른편에는 작은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내외담은 안채를 드나드는 여인네들이 사랑채에 모여 앉은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마주치는 거북함을 피하게 하기 위해 'ㄱ'자로 쌓아 올렸다.




사무실로 쓰이는 대문채 앞 향나무 고목 아래
송소고택을 9년간 지키고 있는 삽살개 껌껌이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송소고택(중요민속자료 제250호)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에 지은 집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라는 택호는 심호택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1880년에 지었으니 130년이 된 송소고택은 아흔아홉칸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보기 드문 고택인데
 아흔아홉칸은 조선시대 사가(私家)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청송 심씨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정승 13명, 왕비 4명, 부마 4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고려말에 이름을 얻은 청송심씨로 심덕부와 심원부 형제가 있었는데 
형 심덕부는 조선개국공신으로써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그의 다섯째 아들 심온의 딸은 세종과 혼인한 소현왕후이다.
 



하지만 아우 심은부는 이성계를 따른 형과는 달리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들어가서 두문불출하였고
그 후손들은 청송 일대에 내려와 심은부의 뜻을 받들어 살면서 오랫동안 부를 일구며 살았다.
경주 최부잣집과 함께 영남 2대 부자로 꼽히는 청송 심부잣집은
조선시대엔 주왕산이 청송 심씨의 소유였을 정도로 9대가 내리 만석꾼을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 상류주택의 전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송소고택은 
대문채·안채·별당· 큰사랑채·작은사랑채·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공간, 생활공간, 작업공간으로 공간이 잘 구분되어 있는 것이 측징이다.
안채와 큰사랑채 및 작은사랑채는 전체적으로 ㅁ자집 형태이고 각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는데 마당만 해도 모두 9개다.




고택의 뒤로는 4대 이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별묘 등이 자리잡고 있어 민속학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집이다.




고택 뒷편에 자리잡은 별당은 높이 솟은 누마루와 뒷산이 풍경으로 매우 경관이 아름답다. 




시집 안간 딸이 기거하는 별당문은 누가 드나들 때 삐꺽...소리가 나도록 연결 부위를 나무로 만들었고
문닫을 때 문이 헐거워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새로 나무를 깎아 연결 부위를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송소고택에서 옆문으로 나가면 또 한채의 고택이 방문자를 맞이하는데 바로 송정고택이다.


 


 
송정(松庭)은 심호택의 차남 심상광을 이름이니 송소고택은 큰집, 송정고택은 작은 집이 되는 셈이다. 
심호택의 4남 중에서도 송정 심상광은도산서원 및 병산서원의 원장을 했을 만큼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자손들이 청송을 떠나 거의
20여년 정도 방치됐던 고택은 작년 7월에 새롭게 수리를 하고  한옥체험관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박경진씨가 장기 임대해 ‘한옥 스테이’를 할 수 있도록 꾸민 이곳은
숙박용 방이 14개 있는데 화장실과 샤워장은 수세식으로 개량했다.




이곳의 숙박객에게는 아침 식사가 제공되며 밤에는 가마솥에 감자를 삶아 먹으며 따스한 아랫목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도회지에서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서만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깊은 산골 고택의 밤은 너무나색다를 것 같다.
창호지 불빛이 새어나오는 툇마루에 앉아 하늘에 총총한 별을 헤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 오랫동안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으리라.




이곳에서는 컴퓨터도 TV도 없다.
오로지 대문 옆 은행나무 위에서 까치들이 짖는 소리와 삽살개 짖는 소리가 아침 잠을 깨워줄 뿐이다.




3M 나일론 수세미만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진짜 수세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 수 있는 곳.
뜰에서 불 피우고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툇마루에 앉아 별 보고 삽살개와 놀며
'느리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바로 청송 송소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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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운(雲), 문 문(門)......
찬란한 가을빛이 스르르 사라져가고 있을 때 쯤 청도 운문사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돌담길을 지나니 '호거산운문사라'라는 현판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호랑이가 사는 산(虎居山)이라......!
운문사를 둘러싼 산들을 보면 정말로 호거산이라 불릴만큼 산세가 높고 험악하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다. 


 

여승들이 수도하는 절, 청도 운문사.
이곳 여기저기에서는 이렇게 일하고 있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커피 자판기 청소를 하고 있는 여승들도 볼 수 있어 약간의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


 

너무 늦게 간 것일까? 이미 오색찬란한 단풍은 다 떨어지고 겨울색이 완연하다.


 

경내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감나무 끝에 매달린 까치밥 몇개만이 앙상한 나무에 노란빛을 입혀준다.


 

아......이파리가 다떨어지고 남은 나무에 탐스러운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다!
탐스러운 모과 앞을 지날 때에는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며 한참이나 바라보게 된다.



 

비가 오락가락하다...... 구름이 짙게 드리우다...... 변덕스런 날씨가 계속되던 중에
잠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니 다소 을씨년스럽던 경내에도 따사로움이 감돈다.



 

비로전 뒤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비로전 뒷쪽 계곡 위에는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지만 자그마한 문과 함께 출입을 삼가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니 일행 중의 한명이 능청스럽게 손을 뻗어 문 안쪽 빗장을 열더니 다리 위로 올라선다.
"들어가면 안 되는 구역이라는데요?" 하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며 씨익 웃으며 앞길을 인도하길래 
자신도 모르게 살그머니 뒤를 따라 다리 위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다리 위에서 경내를 바라보니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여러본 와 보았던 운문사지만 새로운 각도에서 보니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다리를 건너니 경사진 길이 나타난다. 계단 대신에 놓여진 돌이 비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있다.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 뒤로 돌아보니 소나무 가지 아래로 펼쳐지는 다리와 계곡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일반인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금단의 구역으로 들어서니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운문사 경내와는 또 다른 고요함이 불시에 찾아온 침입자를 반긴다.


 

어.....! 여기는 작은 연못도 있고 그 옆에 팔각정도 자리잡고 있어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군데군데 놓여진 아기자기한 모양의 탁자와 의자들.
의자들은 놓여있지만 그 어디서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너무나 조용하다.



팔각정을 지나고 숲길을 지나 내리막길로 조금 걸어가니 작은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넓은 공간이 나타나도 고요만이 감돌 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군데군데 이렇게 귀여운 동물의 모양으로 키운 조경수들도 많은데 봐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드넓은 경내 군데 군데에는 정자나 암자가 세워져 있고 여러가지 돌 조각들이 놓여 있어 눈이 심심치 않다.
비가 많이 내리면 저 작은 다리 아래도 개울물이 졸졸 흐르겠지.


 

걸어가다 뒤돌아보니 뒤로 보이는 산에는 아직도 늦가을의 기운이 남아 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무들은 빛바랜 낙엽들도 다 떨구어 버리겠지.


 

금단의 구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여승들을 만나 눈총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하고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한바퀴 다 돌아보고 나오는데도 다행히 한사람의 여승들도 만나지는 못했다. 


 

작은 문으로 나서니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다리가 눈 앞에 펼쳐진다.
여기서부터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리라.

 

 

운문사 돌담길을 지나 사리암으로 가는 길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여승을 만났다.


 

한참을 걸어가더니 마주 오던 여승을 만나 한참이나 담소를 나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서서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는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허락없이 금단의 구역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 괜스레 미안하여 빠른 걸음으로 그들 곁을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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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콘서트 7080 등의 성공으로 불어온 추억의 아날로그적 트랜드는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써니'를 관객수
744만명을 기록하게 하였고
극중 하춘화 역할을 맡은 무명의 강소라를 단번에 톱스타 반열에 올려 놓았다.

영화 '써니'에 삽입된 보니엠(Boney M)의 '써니(Sunny)',
리쳐드 샌더슨의 '리얼리티(Reality)' 등 귀에 익은 음악들 또한
80년대를 경험한 기성세대에게는 눈부신 지난 날의 추억에 대한 향수를,
8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에게는 눈과 귀가 즐거운
이색적인 문화 트렌드를 접해보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는데......

영화 '써니'에서 거리 시위 도중 패싸움하는 장면을 비롯하여
80년대 초반 서울거리를 그대로 재현해낸 곳은
바로 경남 합천군 용주면 가호리에 위치한 합천영상테마파크이다.


합천읍에서 합천댐 관광지 방면으로 15분 정도 이동하면 만날 수 있는 합천영상테마파크는
흥행 신화를 이룬 '태극기 휘날리며'의 평양 시가지 전투 장면을 촬영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모던보이, 전우치, 바람의 파이터, 포화 속으로, 써니...등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고
서울 1945, 에덴의 동쪽, 욕망의 불꽃, 제중원, 태왕사신기, 경성스캔들......등
다수의 드라마와 뮤직비디오, CF등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테마파크 내부는 193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서울 시가지를 그대로 재현해 놓아
테마파크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데
필자가 갔던 날에도 일부 세트장에서는 소규모의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인사의 팔만대장결, 장경판전 외에도 기암괴석이 향연을 벌이는 가야산,
전국 최대 규모의 철쭉 군락지를 자랑하는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는 황매산......산행 후
돌아가시는 길에 영상테마파크도 돌아보신다면 기억에 오래 남을 멋진 합천여행이 될 듯 하다.


가야산 해인사 여행길에 함께 돌아보았던 합천영상테마파크의 이모저모를 해설 없이 사진으로 소개해 드리니
영화와 드라마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는 쏠쏠한 재미를 맛보시길 바라며......
사진의 양이 너무 많아 
해설없이 소개해드리는 것을 이해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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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하순으로 접어드니 남쪽에 자리잡은 경주의 단풍들도
그 아름다운 날개를 떨구고 낙엽이 되어 이리 저리 바람에 쓸려다닌다. 
매서운 겨울이 오고 아름다운 가을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는건가 생각하니
괜스레 떠나려고 하는 가을이 아쉬워 붙잡고 싶어진다.

그런데 남녘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니 
가지산 석남사의 단풍은 아직도 여전히 붉게 타고 있다고 한다.
가지산 석남사라면 경주에서는 채 한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  
일하던 중에 잠시 시간을 만들어 가지산 석남사로 떠나본다. 


경부고속국도에 들어서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리자니 이내 언양 JC가 나타난다.
톨게이트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이내 석남사 입구이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길을 건너려고 눈을 들어보니 길 건너편이 온통 붉은 물결이다.





아직도 이렇게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단풍잎을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가 정말 고운 빛이다.
제대로 물이 들지 않았다거나 썩은 이파리 하나 없이 모두가 붉게 붉게 타오르고 있다.

거기다 단풍이파리가 다른 곳의 단풍과 비해서 현저히 크기가 작다.
이렇게 이파리가 작아서 늦게까지 붉게 타오르고 있는걸까?




어설프게 보이는 버스 정류장도 붉은 단풍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더욱 운치있어 보인다.
왠지 '가을우체국 앞에서'가 아니라 '가을정류장 앞에서'라는 노래라도 지어 불러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버스 정류장 안에서 보니 창 너머로 보이는 단풍나무는 누가 그린 것 처럼 구도가 완벽하다.
그야말로 액자에 넣어놓은 최고의 그림이다.


 



붉게 타는 단풍길을 뒤로 하고 일주문으로 들어서본다.




일주문 안에는 아쉽게도 단풍나무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양쪽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었고 떨어진 낙엽들은 길가에 포근하게 쌓였다.


 걸어갈수록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온다.



 
절집에 가까워올수록 나무들은 더 앙상해지고 늦가을의 쓸쓸함이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전해져온다.


 


한참을 걸어가니 드디어 절집이 나타난다.


 



가지산(伽智山)에 위치한 석남사(石南寺)는 신라 헌덕왕 16년인 824년에 도의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절이 위치한 가지산은 예로부터 산수가 깊고 그윽하며 빼어난 준령으로 천연절경을 이룬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가지산은 다른 이름으로  석안산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석남사(石南寺)는 석안산의 남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석남사가 유명해진 것은 이곳이 비구니들의 수행 도량으로 이름난 절이기 때문이다.



창건된지는 오래 된 사찰이지만 여러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옛모습은 찾기 힘들고
지금 석남사의 면모는 비구니 인홍 주지승이 취임한 1957년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문화재로는 창건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남사 부도(보물 369호)와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5호인 삼층석탑,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4호인 석남사 수조가 있을 뿐이다.


  

절 마당 한켠에 있는 석남사 수조는 고려말이나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재료는 화강암이다.


 

절집은 오래 되지 않았으나 여승들이 있는 사찰이라 그런지 경내가 깨끗하고 담장 하나도 오밀조밀하기 이를데 없다.




담장 옆에는 아직도 꽃잎을 떨구지 않는 구절초가 수줍은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름난 승려들의 유골을 넣어둔 돌탑을 부도라고 하는데
석남사 부도는 이 절을 처음 창건한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석남사 부도는 보물 369호로 지정되었다.

 



절집과 부도를 돌아보고 내려오니 선원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스님과 고양이가 눈에 뜨인다.

 

연신 눈치를 보며 빵 부스러기를 먹고 있는 절냥이가 너무 안쓰럽게 보인다.

절냥이야~~ 널 해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고 천천히 먹으렴~

절집을 다 돌아보고 다시 일주문 밖으로 나와서 다시 보아도 역시 할말을 잊게 만드는 단풍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단풍을 뒤로 하고 어찌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떠나는 가을을 보내기가 너무나 아쉬워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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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대표하는 나무는 무엇일까...?
단풍나무는 화려하기 그지 없는 붉은 손바닥으로 유혹하여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은행나무의 고고함과 위용을 따라 잡기엔 어딘가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



깊어가는 가을날 찾게 된 충북 영동 영국사 입구에는
입이 떠억 벌어질 만큼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은행나무가 어찌나 큰지 너무나 커서 멀리서가 아니면 카메라에 다 잡히지도 않는다. 

이럴 때 쓰라고 광각 렌즈가 있는거구나......광각 렌즈를 질러 봐.....? 잠시 고민에 빠지게 하는 거대한 나무이다.


 너무나 위풍당당한 이 은행나무는 영국사 창건 당시인 문무왕 8년(668년)경에 심어졌다고 하니 수령이 1,300년은 족히 될 것이다.



은행나무의 높이는31.4m, 가슴높이 둘레 11.54m 정도인데  가지는 동서 21.2m, 남북 26.7m로 넓게 퍼져있다.
 


 사방으로 이리 저리 뻗어 나간 가지를 지지하기 위해 여기저기 버팀목을 받쳐 둔 것이 눈에 뜨인다.



 서쪽편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하나는 아예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아기 은행나무는 지면에서의 높이 3m 정도에서 어미 나무와 연결되어 있는걸 볼 수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 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특히 많이 분포하는데
다른 나무보다 병충해가 적은 은행나무는 가로수나 정자나무로도 많이 심겨져 우리에게 많이 친숙한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은행 열매는 혈액 순환 개선에도 도움이 되니 우리에겐 너무나 고마운 나무가 아닐 수 없다. 


담장을 살짝 넘어 은행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앗....그런데 본전도 못 찾았다. 은행 열매의 독특한 냄새가 발 밑에서 완전 진동을 한다.
가까이 가지는 말고 멀리서 즐기는 것이 더 좋을 뻔 했다.

 

영동 영국사의 이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큰 나무로
문화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223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풍경 소리도 함께 들려 올 것 같은 산사의 절경에 젖어 있노라니


은행잎을 책갈피에 고이 간직하던 어릴적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나도 모르게 은행잎 몇개를 주워 수첩에 고이 끼워두었다.
어느 날 수첩을 펼치다 바삭 마른 은행잎을 발견하게 되면 오늘의 추억도 새로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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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옥상 위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공중관람차가 있다!"
놀이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공중관람차가 백화점 옥상에 자리잡고 있다면 믿지 않는 분이 많으시리라.





하지만 백화점 옥상 공중관람차에 대한 정보는 100% 사실이다.

거대한 공중관람차를 힘들게 머리에 얹고 있는 건물은 바로 울산 롯데백화점 멀티 프라자.




울산 롯데백화점 멀티프라자 7층 옥상 위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공중관람차를 처음 보았을 때엔
'저게 뭐야! 뜬금없이 백화점 위에 웬 공중관람차? 놀이공원도 아니고.....
백화점까지 가서 누가 놀이기구를 탄다고 저런걸 저기에 세워놓았대? 그리고 정말 불안해 보인다.
태풍이라도 불어서 무너지기라고 하면 완전 대형 사고일텐데?'하고 우려까지 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광란의 쇼핑을 즐기다 지친 눈과 다리를 쉬기 위해서 7층 옥상으로 올라가 공중관람차 앞에 서는 순간,

하늘 위에서 울산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에 어느새 티켓을 끊고 관람차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관람차 바로 아래 서서 위를 올려보니 그 높이와 규모가 의외로 거대해서 입이 쩍 벌어진다.
18mm렌즈로는 아무리 뒤로 물러서도 그 모습이 다 잡히지도 않는다.

땅 위에 서 있는 관람차도 꼭대기에 이르면 사방이 훤하게 보이고 내려다 보면 아찔할 정도인데
이미 7층 높이의 옥상 위에 세워진 관람차의 꼭대기에서라면 차원이 다른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멈추지 않고 서서히 돌아가는 관람차 한대를 서둘러 잡아 타고 자리에 앉으니 설레임에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안전을 위해서인지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관람차 창으로 보이는 전경이 조금은 뿌연 느낌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뭐 별거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오른 관람차인데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니 의외로 손발이 짜릿해지며 쾌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롯데백화점 본 매장과 멀티 프라자 사이에 자리잡은 광장이 발 아래로 멀어지고 그 아래 사람들도 개미같이 조그맣게 보인다.





롯데백화점과 멀티프라자를 이어주는 롯데 시네마 건물도 하늘 위에서 보니 또 다른 모습이다.






롯데 시네마를 발 아래로 밟고 관람차가 고도를 높이니 저 멀리 달동과 신정동의 아파트 군락들까지 한눈에 다 들어온다.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웃백과 베니건스가 바로 아래에 펼쳐지고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파란 지붕이 그 규모를 자랑한다.





좀 더 고도를 높이니 저 멀리 자리잡은 이마트와 삼산동 한화 꿈에그린아파트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북쪽을 보니 롯데백화점 바로 옆에 자리잡은 울산 롯데 호텔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다.



고개를 돌려보니 백화점 바로 맞은편에 있는 대성스카이렉스의 쌍둥이건물도 당당한 모습으로 관람차에 탄 사람들을 반긴다.



이제 공중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에 다다르니 저멀리 울산 공단의 모습도 희미하게 눈에 잡힌다.
땅 위에 자리잡은 공중관람차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위치라서 그런지 제일 높은 곳에 다다르니
높은 곳에 올라가길 너무나 즐기는 필자도 발바닥이 약간 짜릿짜릿해진다.
이 정도 높이라면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 할 것 같다.




정점을 찍은 공중관람차는 다시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시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롯데백화점 뒷편에 자리잡은 울산고속버스터미널의 모습도 서서히 아래로 깔리기 시작한다.




나란히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는 고속버스들이 장난감 버스처럼 너무나 귀엽다.




서서히 고도가 낮아지니 공중관람차 옆에 자리잡은 귀여운 놀이기구들도 손에 잡을 듯 들어온다.

 


서서히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벌써 끝난거야? 한바퀴 더 돌려주지....." 내리려 하니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관람차가 아래에 도착하니 그때까지 발바닥이 짜릿하고 너무 무섭다며 엄살을 부리던 친구의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공중관람차에서 내려오니 하늘에 서서히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타본 관람차 중에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울산 롯데백화점 공중관람차.
발 아래 화려한 놀이동산의 풍경이 펼쳐지는게 아니라 울산 시민들의 삶의 현장인 시가지가 그대로 펼쳐진다는게 아주 이색적이다.
야간에 관람차에 올라 내려다보는 울산의 야경 또한 볼만하다고 하니 다음에는 좀 더 늦은 시간에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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