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산책..........................'에 해당되는 글 343건

  1. 2010.08.06 이스탄불 술탄아흐멧 광장의 여유만만 아침 풍경 46
  2. 2010.07.31 즐거운 눈속임 이스탄불 매직카펫쇼 44
  3. 2010.07.30 죽여주는 그맛 ! 터키 아이스크림 '돈두르마스' 71
  4. 2010.07.29 다이어트 시켜주는 터키 길거리 체중계 77
  5. 2010.07.22 무한감동이 밀려오는 도시 이스탄불! 109
  6. 2010.07.21 대마도에서 만난 소박하고 정갈한 일본 음식 75
  7. 2010.07.20 다리 색깔로 달라지는 터키 그리스간 국경 38
  8. 2010.07.17 '저 바다에 누워?' 대마도 상대마장 호텔 25
  9. 2010.07.16 몽골 음주문화, 한국보다 더 화끈하네.. 39
  10. 2010.07.15 대마도 와다즈미신사는 바다 속에 신사문이 있다? 30
  11. 2010.07.13 환상적 일출과 월출의 에게해 네압볼리 25
  12. 2010.07.12 중앙 분리대도 있었던 로마 에그나티아가도 29
  13. 2010.07.05 그리스 조각미남을 만난 데살로니가 52
  14. 2010.07.03 빌립보의 거상(巨商) 자주장사 루디아 기념교회와 세례터 11
  15. 2010.07.02 세계문화유산 1호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19
  16. 2010.06.30 007의 배경이 된 공중수도원 메테오라 23
  17. 2010.06.29 이사할 때 머리만 떼가는 그리스 석상 40
  18. 2010.06.26 풍기문란 극심했던 고대 도시 유적 고린도(코린트,Corinth) 72
  19. 2010.06.23 경건함과 신비감 가득한 곳 밧모섬 요한수도원 33
  20. 2010.06.21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요한계시록 동굴 31
  21. 2010.06.18 일본에는 부적 자판기도 있다 32
  22. 2010.06.16 일본에서 만난 턱받이 두른 불상 26
  23. 2010.06.14 충격적인 성묘사의 몽골 세밀화 33
  24. 2010.06.10 우메보시, 그 몸서리치는 기괴한 맛! 25
  25. 2010.06.04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그리스 밧모섬 29
  26. 2010.05.17 은어가 돌아오는 청정 계곡 대마도 아유모도시 25
  27. 2010.05.10 통한의 다리 대마도 만관교(만제키바시)의 절경 55
  28. 2010.04.29 밤이 더욱 아름다운 도시 터키 쿠샤다시 42
  29. 2010.04.21 일본인의 장수 건강 식품 낫토 65
  30. 2010.04.13 몽골 칭기즈칸 말박물관, 세계 최대 규모에 놀라다 29


 

신비한 자연환경과 수천년에 걸친 문명의 자취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곳...
'신과 인간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온 땅, 세계의 박물관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중심 히포드롬(술탄 아흐멧 광장)에는 아침부터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대는데....

 이스탄불의 아침은 여유로우면서도 활력이 넘친다.
경찰은 광장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광장에 나온 사람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눈다.
노는지 순찰을 다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빵 상인의 수레 속에는 갓 구운 빵이 잔득 들어있다.
동그란 도너스같이 생긴 빵은 터키의 대중적인 빵 시미트(Simit).
동그란 고리 모양의 빵으로 위에 참깨가 뿌려져 있고 부드러운 에크멕과는 달리 조금 딱딱한 편이다.
깨가 많이 묻어 있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며 양이 상당하여 배고플 때 먹으면 그만이다. 

블루 모스크의 부속 건물인 레스토랑들에는 아침부터 손님 받을 준비가 한창이다.
이슬람 사원에서는 사원의 경비 충당을 위해 부속건물을 레스토랑이나 바자르에 세를 주는 경우가 많다.  

 레스토랑 옆에는 관광 상품점이 즐비하고 아침부터 가게 앞에 진치는 남자들도 눈에 뜨인다. 

도로에 있는 코카 콜라 캔의 모형이 눈에 뜨이는데 터키 어느 오지를 가더라도 모든 구멍 가게의 간판에는
어김없이 코카 콜라나 펩시 콜라의 로고가 붙어 있어 이 상표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실감하게 해 준다.   

 노란 옷을 입은 청소부는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거리를 청소를 해서 거리를 깨끗하게 유지한다.
터키 사람들의 청결 의식은 대단하여 TV 광고의 상당 부분이 세제 광고로 메꿔져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자기 집 외의 청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광장의 나무에는 비닐 봉지꽃도 여기저기 피어 있다.

교복 차림으로 광장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참견하는 현장.....

 "야...학교 안가고 뭐해....?" "지금 방학이거등여....?"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어느 곳에서나 청소년의 얼굴에는 반항심이 가득하다.
이 훈훈한 고딩들도 언젠가는 아저씨가 되어서 배둘레햄이 되겠지... 
손에는 시미트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아침은 광장에서 해결하는 듯 하다.

방학 기간인데 교복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터키의 학교에도 보충 수업이 있는 것일까...?
실제로 터키에는 대학 입학 경쟁률이 아주 심하여 터키의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교문을 나서면
학원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들을 잽싸게 학원으로 실어간다고.....   

동내 가게들은 우리네 구멍 가게들과 비슷하다.  '점방'이라고 하면 어울릴만한....
아,....물론 우리네 *마트와도 같은 대형 할인점도 곳곳이 자리잡고 있지만
터키의 동네 가게는 우리네 삼청동 뒷골목의 가게와 같이 미소가 절로 배어나온다.
냉장고  안의 수박 1/4 통, 구석의 계란판들도 은근히 귀엽다. 
 

하트 무늬가 로고인 ALGIDA란 아이스크림은 터키 전역의 가게에 다 깔려 있다.
그리고 생수도 거의 독점인지 Erikli란 생수는 가는데마다 없는데가 없다. 

 히포드럼 광장에 서 있던 Erikli 생수 트럭.
신선한 물에 대한 수요는 많아서 이스탄불 곳곳에는 주유소와 비슷한 시설의 물 판매소도 있을 정도이다.

아야 소피아와 블로 모스크가 있는 시내 중심지 '술탄 아흐멧 지구'는 더 이상의 도로 확장이 불가능해
이렇게 차 한대만 겨우 다닐 수 있는 일방 통행 도로나 진입 금지 도로가 많다. 

 오래 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섞여 있고 시가지는 매우 깨끗한 편이다.

 중심지의 도로는 돌로 깔려 있으며 보도 또한 많은 부분이 화강암이나 다른 돌로 포장되어 있다.

영국인 같은 북쪽 유럽 사람은 선풍기도 없이 생활하는 사람도 많지만 터키는 에어컨 시설이 잘 되어 있다.  .  

  우리나라처럼 전봇대나 기둥에 전단지를 많이 붙이는 점도 비슷한데
떼는 사람이 떼고 가면 돌아서서 그 자리에 바로 전단지를 풀칠해서 붙여 놓는다고... 

 택시는 Taksi 라고 표기되어 있다.
왜냐하면 터키어는 X 나 W 발음이 없어서 터키어 알파벳에는 이 두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택시 요금은 저렴한 편이며 잔돈은 팁으로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길가에 현대의 액센트가 주차되어 있다.
터키에서 굴러다니는 우리 차를 종종 볼 수가 있었는데
특히 경찰차로 쓰이고 있는 라세티를 보았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투어용 이층 버스......버스가 너무 너무 럭셔리하다.
보통 터키의 관광 버스나 고속 버스는 차가 아주 좋은데 벤츠같은 고급 기종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기사들은 차를 깨끗이 닦는데에 온 정성을 다 기울인다.
(근데 이 경찰은 사진마다 다 출연하는구나...) 
 

 조용한 '술탄 아흐멧 광장' 광장의 아침....
빛깔이 많이 바래어진 이 의자에 앉아 시미트와 터키 요쿠르트를 먹으며
오늘 하루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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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때가 되었으므로 호텔에서 식사를 한 후
이스탄불 중의 이스탄불, '술탄 아흐멧 지구'의 밤 풍경을 돌아보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여자들이 낯선 외국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않을까...생각되시겠지만
저녁만 먹으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암흑으로 변하는 유럽의 여느 도시와는 달리
터키의 밤 거리는 늦게까지 상점들이 문을 열 뿐만 아니라 의외로 안전한 편이어서
늦은 저녁 식사에도 불구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거리로 나섰다. 


술탄 아흐멧 지구는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토프카프 궁전, 지하 궁전, 그랜드 바자르...가 밀집해 있는
올드 이스탄불....그러니까 이스탄불 중의 이스탄불이다.


호텔에서 조금 걸어오니 트램 정류장이 있고 사람들은 앉거나 서서 트램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램(Tramvay)은 바크르쿄이라는 이스탄불 서부 지구부터 카바타쉬라는 베쉭타쉬 지역까지 연결하고 있다.
트램은 5~10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차내는 청결하고 에어컨 상태도 좋다. 
특히 이 트램은 우리나라 현대로템에서 생산한 것이라고 하니 더욱 자랑스러운 부분이다.


 오래된 오스만 시대의 건물과 신식 트램,그리고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이 조화를 이루는 곳, 이스탄불이다. 
 


 너무나 화려한 가죽 제품들이 많이 걸린 가죽 전문점에 들어가 백과 구두를 구경하였다.
주인은 아주 영어가 유창하였고 이 가죽 전문점엔 한국인이 많이 온다고 하였다. 
  


 얼마 안 걸으니 아야 소피아(성 소피아 사원)이 은은한 경관 조명 아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나타난다.
아야 소피아는 내일 밝을 때 돌아보기로 하고 토프카프 궁전 입구 쪽으로 가서 카펫과 기념품 가게들을 돌아보았다. 
한 기념품 가게 주인 청년은 나이가 스물 셋 밖에 안 됐는데 벌써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는 등 프라이드가 대단했는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혀를 굴리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귀를 쫑긋하느라 혼이 났다.  



 아야 소피아의 맞은 편 블루 모스크 앞 광장에 다다르니 터키 대학생 두 명이 말을 걸어 왔다.
수줍게 말을 더듬으며 말을 걸어온 이 대학생들은 "자기들의 영어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하고 싶단다. 
해양대 2학년생이라고 하는 이 학생들은 배를 타고 터키의 항구 도시를 순회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데
순진하고 예의바른 이 학생들은 비교적 또렷한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무지 힘들게.....' 대화를  한참 하다보니 모두가 회화의 밑천도 떨어지고...^^;;
다른 곳도 구경하고 싶은지라 좋은 여행 되라고 손을 흔들고 주고 헤어졌다.


블루모스크는 건물 전체를 비추는 조명으로 인해 밤에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요즈음은 유적지나 타워의 경관 조명이 잘 되어 
관광객을 불러모으는데 한 몫을 하고 있는데
오래 된 유적에 비쳐진 경관 조명은 낮의 모습모다 더욱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야 소피아는 이제는 박물관이 되었으므로 밤에는 입장할 수 없지만
블루 모스크는 이슬람 사원이기 때문에 밤에도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해 문이 열려 있어 

관광객들과 기도하러 온 사람, 더위를 식히러 온 이스탄불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모스크에서  만난 터키인 가족들은 아이가 '촉 규젤'하다니까 매우 좋아하며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촉 규젤 = 매우 아름답다, 아주 예쁘다)
알고 있는 몇 마디 안 되는 터키어로 얘기를 걸었는데 너무나 좋아하며 환하게 웃어주던 터키인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몇 몇 한국인인 듯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을 다른 관광지에서 만나면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 일이 많은데
이곳에서는 반가와 하며 '어디서 오셨어요...'하면서 기분좋게 인사를 주고 받기도 했다.
 이스탄불에 오면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지고 행복해 지는걸까...


 '미나레(minaret,이슬람 사원의 첨탑,아랍어로 등대라는 뜻)' 에도 경관 조명이 이쁘게 비추인다.
블루 모스크는 미나레트가 여섯개 있는 터키 유일의 사원인데 미나레의 갯수에 따라 사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오일 램프가 까마득한 천정에서부터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오래 된 수백개의 크리스탈 오일 램프는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한다.
 엄청난 넓이의 바닥에는 실크 카페트가 깔려 있는데 카페트의 무늬는 일정하게 구획이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슬람 사원의 예배 광경을 보면 엎드려 절할 때 줄이 참 잘 맞춰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마다 앉는 자리가 구획지어진 이 카페트의 덕이라고 보면 된다.


오래 된 블루 모스크의 축대 아래에는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시장 '아라스타 바자르'가 있다.



이 바자르는 블루 모스트의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방편으로 
오래 전에 지어졌는데


바자르 안의 많은 기념품 가게에는 주로 머리에 쓰는 히잡이나 스카프, 벨리 댄스 복장, 카펫, 도자기 등을 팔고 있다. 
 


바자르의 가게 앞에는 이렇듯 로마시대의 기둥 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터키에는 수천년 된 유적들이 거리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혹은 티 테이블로.혹은 의자로 쓰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터키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놀라곤 하는데 왜 유적을 박물관에 두고 잘 보존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아니...길에 널려 있는 것이 모두 다 유적인데 어떻게 다 유리 속에 넣어두나요?" 하고 이상하다는 듯 반문한단다.



바자르 안을 구경하고 있으니 어떤 아저씨가 나타나서 갑자기 동행인 S양의 손목을 덥썩 잡더니 
"이 귀엽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낙타 몇 마리에 저에게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일순간 깜짝 놀랐지만 앞에 선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걸 눈치 채고
"음...낙타 천 마리...? 아니 아니 이천으로 합시다~!! 빨리 이 아가씨 데려가고 낙타 이천 마리 주세요~"
라고 했더니 이 터키 아저씨, 함께 폭소를 터뜨리며 가게에 들어와서 차이나 한잔 하고 놀다 가라고 한다.  


 사진은 동행인 K양, 초상권 보호를 위해 면상 비공임당...^^

하도 강권하는 바람에 카펫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엄청나게 좋은 카펫도 있었고 조그마한 킬림도 있었는데
주인은 카펫 장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차이를 권하더니 
자기의 '매직 카펫쇼'를 보여주고 싶단다.
의자에 우리를 앉히곤 길이 120cm정도 되는 붉은색의 카펫을 한장 들더니
"혹시 심장이 약하지는 않으신가요? 놀라서 기절하지 말고 카펫에 눈을 떼지 말고 똑바로 지켜 보세요~"
하며 카펫을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다가 가게 바닥에 휙 내던지는 것이다.

뭥미...? 뭐가 매직쇼야.... 카펫이 뭐가 달라지기나 했나...? 하고 자세히 보다가 순간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분명이 붉은색 카펫을 바닥으로 던졌는데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은 하얀색 카펫이었다.
우리는 "와아~~~와아~~팬태스틱~!"하면서 박수를 쳤더니 우리의 리액션에 신이 난 이 아저씨...다시 카펫을 들더니
"이번엔 하얀 카펫을 붉은 카펫으로 바꿉니다~" 하면서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다가
다시 가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니 이번엔 카펫의 색상이 다시 붉은색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주인에게 "잠깐~!" 을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반대편에 서서 보니 카펫은 요술처럼 하얀색이었는데 다시 앉아 있던 방향으로 와서 보니 붉은색이었다.
그렇다.....이 카펫은 보는 방향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보이도록 짜여 있는 '멋진 예술품'었던 것이다.
 '매직 카펫 쇼'라.....ㅋㅋㅋ
정말 환상적인 매직쇼를 보여준 카펫 가게 주인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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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를 대표하는 음식은 무엇일까?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터키를 대표하는 음식은 케밥과 요쿠르트,아이스크림이라고 한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터키 전통 아이스크림인 '돈두르마스'를 소개할까 한다.

'마라쉬 돈두르마스(Maras Dondurmasi)'는
300년 전 터키의 카흐라만 마라쉬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카흐라만 마라쉬 사람들은 하얀 눈이 내리면 
그 눈을 치우지 않고 동굴이나 웅덩이 같은 곳에 보관하고
입구에는 관목 줄기나 나무 토막을 덮어 여름이 와도 녹지 않도록 하였다.
 

 

 푹푹 찌는 여름이 오면 그 고장에서 생산되는 양이나 염소의 젖을 넣고 난초의 뿌리 가루,과즙을 넣어 

떡메 치듯이 계속해서 치대고 누르며 반죽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스크림은 찰떡 같이 되어 흘러내리지도 않고 길게 늘어난다.


이 돈두르마스는 칼로 썰어서 먹을 수도 있는데
찰지면서도 뒷맛은 부드러운게 한번 먹으면 아주 잊혀지지 않는 맛이 된다.


요즈음은 터키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음식이 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수입해와서 프랜차이즈점이 성업 중이다. 



현지에서 이 돈두르마스를 파는 상인은 대개 전통 복장을 하는데
수레 위에는 소리가 다른 여러가지 모양의 종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기회만 나면 돈두르마스를 사먹곤 했는데
그 맛도 맛이지만 파는 상인의 익살스러운 장난이 관광객에겐 큰 볼거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사원 옆 골목 돈두르마스 상인의 쇼는 그 중 제일 볼만하다.  


 

  갖은 테크닉을 다해 아이스크림을 비벼대어 푹 퍼가지고는
돈두르마스를 손님에게 주었다가.... 빼앗았다가.... 돌려서 떨어뜨리려 했다가.....
주려다가 빼앗아 가서는 종을 쳐서 울리고....큰 뭉터기 채로 퍼서 주려고 하다가......
손님의 입에다가 푹 집어 넣는 등 갖은 장난을 다 친다. 


 

환상적인 쇼를 보고나서 받아먹을 때의 그 즐거움으로 말하자면 2달러 정도의 아이스크림 값은 전혀 아깝지 않다. 

 

터키 남자들의 해학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돈두르마스 쇼에서 더 잘 드러나게 되고
특히 이쁜 여자가 손님일 때에는 돈두르마스 쇼가 가히 절정에 다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에는 손님들과의 기념 촬영을 먼저 제안하는 친절함도 잊지 않는데
터키 남자들이 여자들과 사진을 찍을 때의 특징은 
얼굴을 바싹 붙이거나 허리를 끌어안거나 어깨를 꼬옥 끌어안는 것이 다반사니
혹 터키 땅에 처음 가시는 여자분들은 당황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진의 여성은 K양. 초상권 보호를 위해 면상 비공개임당..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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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을 하는 동안, 길거리나 바자르에서 심심찮게 만나게 되는 풍경이 있는데
다름 아니고 체중계를 길에다 내어놓고 앉아 있는 부녀자나 노인들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는 사우나, 찜질방이 한 동네에도 몇 군데씩 있어서 갈 때마다 체중을 잴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이 체중계를 구비하고 있어서 하루에도 몇번 씩 자기 체중을 재곤 하는데
터키의 가정에는 체중계가 없는 집이 많다보니 길거리 체중계에 올라 자기 체중을 확인하는 사람이 많다.

오토가르(버스 터미널)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서는
덩치가 아주 크고 화려하기까지한 전자식 체중계가 놓여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너무나 간단한 가정용 구식 체중계를 놓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체중계를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이나 부녀자, 노인들이 많은데
저렇게 하루종일 지키고 앉아 있으면 대체 얼마나 벌까.....하는 생각이 들만큼
사람들은 대부분 체중계 앞을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체중계에 올라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는 없었다.


이스탄불에서 야경을 구경하러 술탄 아흐멧 지구로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트램길 바로 옆에서 손뜨개 용품을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 앞에 저울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밤이 깊었고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도 한산해지는 시간이라
뜨게용품을 사는 사람도 몸무게를 재는 사람도 없이 모두가 그 앞을 스쳐 지나가길래
체중 재는 장면을 기념사진으로 남기기로 하고 
사용료를 물어보니 두명에 1달러란다.
일행이 세 명이니 세 명에 1달러 해달라고 하니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No!"라고....ㅠㅠ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깎아달라고 조르니 마지못하는 듯 허락을 한다.

 
K가 먼저 체중계에 올라가고 필자가 체중 재기 인증 샷을 남기기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니
히잡을 쓴 이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강경한 어조로 "No photos !"라고 외친다.

대부분의 터키 사람들은 사진 찍히는걸 매우 좋아해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서로 찍으려고 포즈를 잡기도 한다.
찍은
사진을 모니터로 보여주면 너무나 즐거워 하며 크게 웃고 고맙다고 하는데 이처럼 거부하는 케이스는 처음이었다.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이 아주머니는 다른 이슬람권에서 왔거나 콘야 지방에서 온 수피파 교도가 아닐까..짐작해 보았다.
그런데 체중 재는 K의 인증샷을 찍다보니 아주머니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같이 찍히게 되었다.
이 사진을 히잡 쓴 아주머니가 보면 자기 영혼이 빠져 나갔다고 싫어하실까....?

 K가 올라가서 체중계 눈금을 보니 원피스에 샌들까지 다 신고 올라갔는데 몸무게가 2kg나 덜 나간다.
그 다음 S가 올라가도 -2kg, 필자가 올라갔는데도 마찬가지로 체중이 -2kg이다!
와우~! 팬태스틱.....! 너무 착한 저울이에요~!

이 엉터리 길거리 체중계는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이스탄불을 방문한 세 여자에게 <다이어트>를 시켜준 것이다.
너무나 쉽게 다이어트 시켜준 이 <착한> 저울에게 우리는 기분좋게 1달러를 지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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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 제국의 수도, 유럽과 아시아의 가교...이 명칭이 모두 가능한 곳은 세계에서 단 하나.....바로 이스탄불이다.


이곳은 단순히 이스탄불로만 부르기에는 성이 안 찰 정도로 '감동이 밀려오는 도시'이다.
터키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이희철 박사에 따르면이스탄불은 "아! 이스탄불..." 이란 감탄사로 로 불러야 느낌이 차 오는 그런 도시라고 한다.  

 역사 시간에 우리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던 동로마 제국이 AD 330년부터 AD 145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아 번창했고그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도 AD 1453년 부터 AD1923년까지 이곳을 수도로 삼았으니1600년간 세계를 주름잡은 대제국의 수도를 지낸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골든 혼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 이미지 출처: http://www.reisenett.no

            이스탄불 2,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단 몇 줄로 줄여서 설명해 보면.... 이스탄불의 가장 오래 된 이름은 '라고스'였다.현재의 사라이부르누에 세워진 라고스라는 도시는 BC 660년  '비잔티움'이 이 도시에 세워질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비잔티움이란 명칭은 그 지역에 새롭게 거주한 그리스인 메가라 족의 족장 '비자스'의 이름을 딴 것인데이 명칭은 로마 시대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까지 계속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헤레나 여제, 이미지 출처: http://upload.wikimedia.org

 AD 324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상업,교통,방어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비잔티움에 도시 재건을 시작하여6년 만인 AD 330년에 완공하고 이름을 '노바 로마'로 하였으니 바로 '새 로마'라는 뜻이다.그리하여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바뀌게 된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그린 그림, 이미지 출처 :http://www.constantinople.org.uk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제국 내부의 경제 파탄 및 부패로 인해AD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후 두 아들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정치,경제적으로 강해지고 있던 동로마 제국에 비해상대적으로 약해져 있던 서로마는 AD 476년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되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리던 동로마 제국에 의해 이어져 나가게 된다.

  성 소피아 성당(하기야 소피아)              

               로마 제국의 상속자이자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은 황제의 강력한 지배와 군사적 통치권을 강화하게 되는데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AD)때에는 국력을 확장하고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는등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 명실상부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스탄불 시내를 둘러싼 비잔틴 시대 성벽 

       이로써 비잔티움 천도 AD 330년부터 AD1453년 수도 함락까지  1123년간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격, 이미지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에 제동을 건 것은 11세기말 튀르크계인 셀주크 제국이었으니셀주크의 침공과  십자군 원정에 의해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비잔틴 제국은 점점 약소국으로 전락하다셀주크 투르크족이 건설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매드 2세의 침공으로 인해 AD 1453년 비잔틴 제국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 당하게 된다. 

  전성기 오스만 터키의 영토, 이미지 출처 :http://www.bahaullah.org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칭하는데 이후 16세기 쉴레이만 1세 황제 때에 동서 정벌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르는 최대의 영토를 가지게 된다.또한 메카의 정복과 함께 마호메트의 자손들에게 내려오던 '칼리프'라는 칭호를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이어받게 되니 오스만 제국은 모든 이슬람 국가의 맹주로 군림하게 된다.

  1912년의 이스탄불,   이미지 출처 :http://www.dimitris.gr

  건국 초부터 쉴레이만 황제 때까지 오로지 영토 확장에만 주력해 왔던 오스만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하여 최대 전성기와 함께 점점 쇠퇴가 오기 시작하는데17세기 후반 빈공격 당시 곤경에 봉착한 것을 계기로 수 차례에 걸친 패전을 겪은 뒤 인해 제도를 서구화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한다.

 이스탄불 전경, 이미지 출처 : http://www.firstworldwar.com

20세기 초 열강들의 영토 점령으로 인해 패색이 짙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데 독일이 패전하자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될 형편에 놓이게 되고400년 이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온 그리스조차 아나톨리아(터키 중부의 땅)의 일부를 요구하고 나선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이미지 출처 :http://lh4.ggpht.com

 이 때 터키 공화국의 국부(터키어로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이 등장하여 열강에 의한 영토 점령에 반대하고 민족적 저항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데 1921년 아나톨리아로 공격해온 그리스 군대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군대가 대패시키니 다른 나라 군대 또한 스스로 철수하게 된다.1923년 로잔평화조약에 따라 공식 국가 승인을 받아 1923년 정식으로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니이스탄불은 제국의 수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륙에 있는 앙카라로 넘기게 된다.  

   이스탄불의 위스크다라 지역 (가이드북 스캔 이미지)


그러나 아직도 터키의 경제, 문화, 관광의 중심지는 이스탄불이라고 할 수 있으니 
터키 여행에서 이스탄불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앙꼬없는 진빵'이 되고 마는 격이다.

 동서양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  이미지 출처 :  http://www.information-turkey.net


딱딱한 역사를 읽어 내려가는데는 언제나 지루함이 따른다.
하지만 2,700년 내려온 이스탄불의 역사를 위와 같이 단 몇 줄로 간단히 기술하여 보았으니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인 이스탄불을 이해하는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자~그럼.....무한감동이 밀려오는 도시 이스탄불로 떠나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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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사들은 소박하고 정갈하다. 소박하다 못해 이걸 먹고 어떻게 사나...할 정도.

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양이 알맞지만 양이 큰 남자들에겐 도무지 성에 차지 않을 듯 한데...

대마도 여행 중 먹었던 일본의 음식을 간단하게 사진에 담아 보았다.   


 


일반적인 아침 상차림이다.
흰 쌀밥에 미소 된장국,미역 무침,단무지(다꾸앙) 몇 조각, 삶은 계란 하나, 엄청나게 작게 구운 김 대여섯장,
고등어 구이 반의 반토막, 그리고 낫토와 우메보시.... 


단무지를 고춧가루 양념으로 살짝 무쳤다.  우리나라에서 밥상에 올랐으면 손도 안 댔을 음식인데....
다꾸앙으로 알려진 단무지는 일본 음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 경험해 본 낫토(納豆)는 우리나라의 청국장과 비슷한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발효 음식이다.

낫토의 끈적끈적한 물질 속에 들어있는 ‘낫토키나제’라는 효소가 혈전 용해 능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일본에서의 낫토의 소비가 급증했다고 한다.

낫토를 그릇에 붓고 곁들여진 소스를 첨가해 열심히 비벼서 발효된 콩들 사이에서 끈적끈적한 실과 거품이 많이 생기면 밥 위에 얹어 먹으면 된다.


 

상 위에 김치 같이 곁들여져 나오는 '우메보시'
'우메보시'란 매실을 소금에 절인 다음 차조기 잎을 넣어 만든 매실 장아찌를 말하는데

매실은 식욕을 북돋우고 배탈을 막아주며 피로회복에도 놀라운 효과를 보여

현대인의 체질이 산성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건강식품으로 불릴 만큼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우메보시를 맛본 대부분이 사람들의 평에 따르면 그 맛은 '몸서리 쳐지는 기괴한 맛'.....!



점심 상차림에는 식당에서도 야외에서 먹는 것 처럼 이렇게 도시락으로 나왔다.

흰 쌀밥,생선 조림,다꾸앙,오징어 무침,생선 튀김,해초 무침, 그리고 생선 국.... 대마도 답게 온통 해산물 반찬 밖에 없다.

채소는 달랑 다꾸앙 두 쪽 뿐...

옆에 곁들인 생선국은 약간 비린 맛과 함께 특유의 향이 있어서 약간은 역겹기도 했지만 

여행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강인한 체력이 아니던가....

다꾸앙 한 쪽 안 남기고 싹쓰리해서 도시락을 다 비웠다.



히타카츠에서는 더 간소한 점심을 먹었다. 초밥 다섯 조각.



그리고 튀김 우동 한 그릇이 전부이다.

식사 양이 많으신 분들은 일본 여행 가시려면 배고플 것을 각오하고 가셔야 한다...^^



히타카츠의 호텔에서 먹은 저녁 상 차림은 아침과 점심에 비해선 제법 성찬이다.

 


노란 다꾸앙, 하얀 다꾸앙,(그게 그거구만...ㅠㅠ), 조린 삼겹살 한 조각, 칼치 구이(그것도 한 도막이 아니라 슬라이스된 반도막이다).

조개 한 개(한개라니...우리 나라같으면 있을 수가 없는 상 차림...ㅋㅋ) 그리고 칼치 구이 위엔 빨간 색의 생강 맛 나는 이상한 줄기 하나.

 


또 생선 조림...(대마도의 밥상에는 야채 반찬이 거의 없다.) 

 

 

그리고 사시미 여섯 조각이 곁들여졌는데 사시미는 자연산이라 그런지 아주 신선하고 입에 넣으니 살살 녹는 기막힌 맛이었다.
 

 

일본 쌀밥은 그 품질이 최상급이다. 쌀의 품질이 매우 좋아 밥이 고슬고슬하고 풍미도 있다.  



그리고 메인 요리인 전골요리.

한 상에 냄비 하나 떠억 올리고 네 명이 숟가락을 같이 담그고 떠 먹는 우리네 찌게나 전골과는 달리

일본의 모든 요리는 개인적이기 때문에 전골도 일인분이다.

여러 가지 조갯살에 두부,양파,팽이 버섯,당근,쑥갓...등을 넣고 조그만 화로에 올려 보글보글 끓여 먹는다.

맛은 달콤하고도 깔끔한 맛이다. 

해외 여행을 다니시는 분들 중에는 현지 음식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가는 곳 마다 한국 음식점을 찾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외국에 여행을 가서도 한국 음식만을 고집한다면 여행의 참 맛은 느끼기가 힘드리라....

행지에서 먹는 음식중에는 특유의 향으로 인해 정말 입에 대기가 힘든 음식도 많지만 

어떤 곳으로 여행을 가서 현지의 음식을 체험해 보지 않으면 그 나라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리.

음식이란 건 한 나라 사람들의 생활이요, 문화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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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네압볼리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서는
에디르네에 위치한 국경을 통과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경을 통과할 때 프리 패스이다.
EU에 가입되어 있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끼리는
남의 나라도 옆 동네 가듯 아무런 제재 없이 차로 넘나들 수 있는데
터키는 아직 EU에 가입을 하지 못한지라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가려면 국경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경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 지대에는
도로를 제외하고는 여기저기 수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터키와 그리스의 관계는 우리와 일본의 관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제의 36년간의 통치를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후 400년간 오스만 터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독립후에도 발칸 전쟁 등 터키와 숱한 전쟁을 벌이다가 1921년 로잔 협정에 의해
터키 내에 살던 120만명의 그리스인과
그리스에 살던 45만명의 터키인을 서로 추방하였으니
현재도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만큼 서로 앙숙인 관계이며
특히 400년간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 사람들은 터키 사람들을 아주 아주 싫어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리스 국경에서 여권 검사를 하고 면세점을 들려보니
면세점에는 오직 술과 담배 뿐이고 화장실 외에는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터키 국경 지대의 편의 시설은 매우 낙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을 통과하려면 그리 넓지 않은 강 하나를 건너야 한다.
특이한 것은 다리 난간의 색깔인데 강 한가운데가 서로의 영토 경계선이라서
그리스 영토 부분을 지날 때에는 강의 난간이 그리스를 상징하는 색인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강의 중간 부분을 지나 터키 영토인 다리 부분에 오면 난간의 색깔이 터키를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바뀌게 된다.


강폭은 그다지 넓지 않아서 순식간에 그리스에서 터키로 넘어오게 되기 때문에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다리 색깔이 가운데서부터 달라지는지 볼 사이도 없이 넘어와 버리게 된다.


 드디어 국경을 넘어 터키의 영토로 진입한지라 버스 뒤편 창을 통하여 사진을 찍었다.
저멀리 파란 난간의 다리와 이쪽 붉은 난간의 다리 사이에 펄럭이는 두 나라의 국기가 눈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리스로 들어가기 위해 입국 수속을 기다리는 많은 차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리를 지나 터키 쪽 국경 검문소로 진입하니 '튀르키에'라는 터키의 국명이 선명하게 보인다.
검문소를 지나가면서 보니 보초병들이 지키고 서 있길래 차 안에서 손을 흔들어주었더니
보초를 서는 군인이 '터키 남자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차가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든다.
보초병이 여자를 보고 눈웃음이라니....!


 터키 영토로 진입하니 그리스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리는 지루함 때문에
차에서 내려 담배를 태우거나 삼삼오오 짝지어 얘기를 나누는 터키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터키 국민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하게 성격이 무지 급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을 잘 참지 못한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이는 길거리 노점상들은 너무나 친근하고 정겹게 보인다.
터키는 넓고 비옥한 토지로 인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과일들은 값이 싸고 당도도 높으며 무지 신선하다.
 


 국경 도시 에디르네를 지나면 이스탄불 시내로 들어오게 된다. 


이스탄불 길가의 가로수는 올리브 나무가 많고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여유로워 보인다. 


인구 1,200만명이 밀집해서 살아가고 있는 이스탄불의 모습은 아주 활기차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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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 중에 묵은 상대마장 호텔(國民宿舍 上對馬莊)은 맑고 고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대마도에서는 가장 멋진 숙박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 상대마장 호텔은 개관할 때에 일본 황태자 부부가 묵고 간 곳이라황태자와 그 가족들의 사진이 호텔 로비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호텔의 입구 주차장에서 본 모습인데 이 호텔에서는 바다가 삼면으로 보인다. 호텔 건물 뒷편에서까지 이렇게 바다가 보이는 멋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호텔은 어디서도 보기 힘들 듯.... 

 
객실은 양실과 일본식 다타미 방을 선택하게 되어 있었는데 필자는 당연히 일본식 다타미 방을 선택했다.
다타미 방을 택했다고 해서 친일파냐고 태클 걸지 마시기 바란다. 단지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것일뿐....
 


 문을 열고 신을 벗고 들어가니 정갈한 일본식 다타미 방이 눈 앞에 펼쳐진다.객실 문을 열고 신발장에 신을 넣고 들어가면 있는 조그마한 로비 맞은 편에 화장실과 세면실이 있고중문을 열고 들어가니 객실이 있는데 왼쪽은 옷장, 오른쪽은 이불장으로 쓰이는 벽장이다.  

 옷장 아래에는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세면 도구와 유카다(浴衣)가 얌전하게 들어 있다. 


 유카타는 원래 잠옷 또는 목욕 후에 집안에서 입는 옷으로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는 더운 여름철 저녁에 옥외에서 입기도 한다. 일본의 대부분의 여관과 호텔에서는 고객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유카타를 제공한다.  


 도코노마(床の間:객실 上座에 바닥을 조금 높여 꾸민 곳)엔 코딱지만한 구형 TV 한대가 었고 그 아래에는 용도를 가늠할 수 없는 기구가 한개 놓여 었는데 대체 용도가 무엇인지.....

 방 안 쪽에서 객실 입구 문 쪽으로 본 모습인데 (객실 현관 로비는 벽장 뒷쪽에 위치해서 안 보인다.)

아무런 장식없는 일본 특유의 다타미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타미(疊)는 일본의 가옥에서 바닥을 덮는 데 쓰는 짚으로 만든 사각형 돗자리인데한개의 크기는 대개 너비 90㎝, 길이 180㎝, 두께 5㎝ 가량이어서 쇼지(障子)라는 미닫이문의 높이와 다타미의 길이는 같은 크기이다. 바닥을 덮는 데 필요한 다타미 수는 방의 크기를 나타내곤 하는데 필자가 묵은 다타미방은 8장의 다타미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발코니 쪽...실내 발코니와 실외 발코니 이렇게 이중으로 된 발코니인데 실내 발코니는 친절하게도 깔끔한 서양식 테이블 세트가 놓여져 있다.  


 일본풍의 미다지 문을 열고 바깥을 보니....와아.....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이런 비경을 객실 내에서 볼 수 있는 호텔이라니.....정말 최고의 전경을 가진 객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살짝 들어간 만에 위치한 앞 바다에는 마치 분재와도 같은 작은 섬이 위치해 있고 거의 오염되지 않은 해변은 아름답고 푸르기만 하다. 

 저녁 무렵 파도 없이 잔잔한 바다는 마치 낙원과도 같이 고요하다. 


 약간 튀어나온 곶 위에 위치한 호텔의 위치로 인해 삼면으로 바다가 보인다.내가 묵은 객실은 마침 제일 가장자리의 방이어서 측면으로 깊이 들어간 바다도 조망할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부두쪽으로 바다가 깊숙히 들어가 있고...  

 황혼의 햇살을 받으며 부두로 돌아가는 고깃배는 만선의 기쁨을 누렸으리라. 

 다타미방 한가운데의 탁자 위에는 다기와 녹차가 있는데 보온 물병에 따스한 물이 준비되어 있다. 


 준비된 유카타를 입고 설정 샷을 찍어보기도 하며 따스한 녹차 몇 잔으로 여행의 피로에 지친 몸을 풀고 자리에 들었다. 


  다타미 방에 베풀어진 이불과 요, 베개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침에 환한 빛에 눈을 뜨니 자리에 누워서도 바다가 훤히 다 보인다.완전 "저 바다에 누워~♬"인 것이다..ㅋ 발코니로 나가보니 악간 비스듬한 방향으로 해가 마악 떠오르기 시작한다.와.. 대마도의 호텔방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일출을 보다니... 


 새로 솟아오르는 해를 맞이한다는 것은언제 어디에서든지 사람의 마음을 희망으로 가득차게 하는가 보다.대마도에 와서 맞이한 일출은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고남은 여행을 더욱 더 활기차게 해주는 행운의 선물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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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마지막 왕 '벅드 칸 겨울 궁전 박물관'에는 몽골인들의 다양한 풍습을 그린 세밀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아이락 축제'라는 그림에서는 몽골인들의 음주 문화가 세밀한 필치로 잘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축이 공간 가득히 늘어나기를 기원하는 제전인 '아이락 축제'는 
그 해 처음으로 말 젖을 짠 날이나 그 말 젖을 발효시켜 아이락을 만든 날 거행하는 축제이다.
아이락 축제를 그린 세밀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숫대야보다 큰 술잔에 아이락을 채워서
마시다 토하고 또 마시거나 술 마시는 사람의 양 귀를 잡고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아이락 축제의 진기한 음주 풍습이 그림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세밀화에 나타난 것 처럼 술 마실 때 사용된 엄청나게 큰 술잔은 실제로 몽골인들이 술 마실 때 사용했던 잔으로
'벅드칸 겨울 궁전 박물관'에 전시된 아이락 술잔은 크기가 거의 세숫대야 만큼이나 크다.



몽골의 대표적인 술, '아이락'은 '마유주(馬乳酒)'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말젖을 가죽 부대에 넣고 나무 막대기로 밤새 저어서 만드는 아이락은 발효되면 보글보글 소리가 나며 기포가 솟아오르며 술이 된다.



우리나라 막걸리 같이 약간 비릿하고 시금털털한 맛을 가진 아이락은 알코올 성분이 그다지 높지 않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마시는데
몽골 사람들은 6~7도의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아이락은 술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아이락은 식사 대용으로도 쓰이는 몽골 최고의 영양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여름에는 한사람이 매일 3~5 리터의 아이락을 마시기도 하고 허약한 아이나 중환자에게는 영양식처럼 아이락을 마시게 하기도 한다. 
몽골에서 아이락은 행복을 상징하며 흰색의 종교적 의미 때문에 축제나 기념일에는 꼭 사용되는 대표적인 전통술이다.



음주는 몽골의 국가적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 시대 이후부터 40년전까지는 음주가 엄격히 통제되었으나 
1959년 처음으로 보드카를 만드는 증류소가 세워졌고 '절제된 소비'를 권장하는 홍보운동이 시작되었다.
몽골의 젊은이들에게 음주의 이점(?)을 알리기 시작한 결과 술의 소비와 함께 국가 재원 또한 급증하였다.
몽골인은 술과 함께 산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통계에 따르면 몽골인은 남녀 구분없이 연간 26리터 이상의 보드카를 마신다고 한다.


 

알코올 농도 39도가 넘는 독주 보드카를 물 마시듯 마셔대는 몽골인은 늘 술에 취해 있기가 일쑤이다.
기뻐도 술, 슬퍼도 술, 기분 나빠도 술....집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직장 내에서도 술을 마신다.

몽골인들은 손님을 맞이할 때도 술로 맞이하기 때문에 공항에서부터 벌어진 술 파티가 끝이 날 줄 모르고
손님이 돌아 가거나 먼 길을 떠날 때에도 어김없이 술판을 벌여야 그 사람을 놓아보내준다.
떠나는 손님에게도 그의 안전을 빌기 위해 술 마시기 전에 동서남북을 향해 고수레를 한 후 술잔을 주고 받는데
여행에 앞서 마시는 세잔의 술은 행운과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에 반드시 의무적으로 세잔은 마셔야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몽골을 사업이나 방문 목적으로 들리는 사람들은 몽골인들의 매일 계속되는 술 대접으로 인해 취생몽사하다 돌아오기가 다반사이다.



몽골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만취하는 것이 예의인데 취하지 않으면 술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여 계속 술을 먹인다.
특히 남의 대접을 받았을 때에는 주인의 호의에 답하는 듯으로 만취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취해서 저지르게 되는 주사에 대해서도 아주 관대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급한 몽골인들은 술마시다 조금만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
금방 주먹질과 욕설이 난무하며 치고 받고....난투극이 벌어지는데 술이 다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이 만취하는 풍습은 칭기즈칸 시대로 올라가는데 다른 종족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취한 척하고 있다가 주인을 살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의 집을 방문해서 술을 마실 때에는 손님이 주인을 해치지 않을테니 안심하라는 표시로 만취하는 습관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에서 '만취는 영원한 우정'이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오른쪽 목을 튕기기도 하는데 이는 '완전 필름이 끊어지도록 마셨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어느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가 모자라 쉽게 술에 취하는 것으로 보고됐다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몽골인들은 음주에 의해 쉽게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몽골의 모든 범죄의 80%이 술에 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몽골의 매월 1일은 국가에서 정한 '금주일'이다.
이날은 몽골의 모든 술집은 영업을 하지 않고 다 문을 닫아야 한다.
국민들의 과다한 음주로 인해 부작용이 많이 일어나니 한달 중에 하루 만이라도 술을 마시지 말자고 정해 놓은 날이란다.
금주일에 본 몽골 시내의 유명한 Pub Bar 의 풍경은 실외 의자까지 모두 홀 안에 쌓아두어 마치 폐업한 가게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나 술을 좋아하는 몽골인들이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딜 수가 있을까....
이와 같이 앞에서 단속반이 오는지 웨이터를 문 앞에 세워두고 몰래 몰래 지하에서 영업을 하는 술집도 있다는 사실....



강남의 어느 바처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어느 Lounge Bar 안에는 금주일에도 몰래 한잔 하러 오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몽골의 젊은이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처음에는 맥주로 시작하지만.....
맥주로 인해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알코올 함유량이 39도나 되는 보드카병을 쉴 새 없이 비우고 폭탄주도 서스럼없이 들이킨다.



몽골 젊은이들이 최후에 마시는 술은 항상 칭기즈칸 보드카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의 술이지만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칸 보드카를 비워야 끝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오늘도 몽골 사람들은 술잔을 부딪히며 크게 외친다.
"토토이(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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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를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바다에 접해있는 신사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대마도의 해신 신사 4곳 중의 하나인 와다즈미신사(和都多美神社)이다.  
이 와다즈미신사는 가야의 김수로왕의 자손이 대마도로 건너와 세웠다는 설과
장보고 장군의 소가(小家)였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는 신사이다. 
 

 

'와다즈미'의 '와다'는 우리말의 바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마도에서는 지금도 바다의 후미진 곳을 '와다(わざ)'라 부르고, 

일본의 옛말에서도 바다를 '와다'라고 했다. 이에 따른다면 '와다즈미'란 다름 아닌 바다의 용궁이란 뜻이다. 이 신사에는 다섯개의 도리이(신사문)가 일렬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 중 바다 속에 서 있는 도리이는 만조시 2m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가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한다는데 마침 간조 때라 바닷물이 빠져 나가 물 속에 도리이가 물에 잠겨 있는 멋진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도리이'란 우리말로 장대 또는 솟대로 표현되며 '새'라는 뜻의 일본어이다. 天이라는 글자모양의 문을 세우고 새를 신의 사신이라 믿어 새가 쉬어가도록 한다고 해서 도리이라고 부른다. 솟대 위에 새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우리의 전통신앙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신사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곳(洗手帶,테미즈야)이 반드시 있다.

일본인들은 이 물은 절대 마시지 않으며 국자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이 곳에서 손을 씻고 배례전으로 들어가는데 오른손으로 국자를 들어서 왼손에 물을 부어  씻고 그런 다음 오른 손을 씻는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물을 떠서 입에 넣어 입을 행구고 다시 왼손을 씻는다.

 

처음 왼손을 씻는 것은 전생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이, 오른손을 씻는 것은 현생에 지은 죄를, 입을 행구는 것은 입(말)으로 지은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라고 하고 우리 나라 사찰 앞에 있는 감로수처럼 먹기 위한 물은 아니라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편 폭이 넓은 연못 가운데에 '도리이' 세 개가 로 모서리를 맞물고 서 있고 그 옆에 '이소라에비스(磯良比須)'라고 써 놓은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이 곳에 얽힌 전설을 알아 보면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천신의 아들이 형의 낚시바늘을 찾으러 갔다가 용궁의 딸과 결혼하게 되고 바닷속에서 3년을 살다가 만삭이 된 아내랑 육지로 나왔는데 아이를 낳는 모습을 결코 엿보지 말라고 한 부탁을 어기고
이를 엿보다가
아내가 용의 모습(커다란 구렁이)으로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남편이 자기를 엿본대에 화가 난 아내는 아이를 버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데 바로  이곳이 아이를 버리고 간 장소로 회자되고 있다.

 

버려진 그 아이가 일본 왕가의 시조인 텐무천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신화로서 결국 지금의 일본 왕실계보는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해양국가 일본의 국가상이다. 일본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 '니이'지역의 해변 '와다즈미(和宮)'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니이'지역이야말로 세형동검, 말방울, 팔찌 등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경질토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많은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의 신사는 동쪽이 아니면 남쪽을 바라보게 지어져 있으나 대마도의 신사는 서쪽을 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는 한국의 신을 숭상하는 곳이 많다. 

 

모든 신사 앞에는 사자와 같이 생긴 두 마리의 짐승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이것은 사자가 아니고 '고마이누(高麗犬)'이다.

고마이누란 말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마'와 개를 지칭하는 '이누'라는 일본어의 합성어이니 고구려에서 건너온 개라는 말이다.

(고구려를 고려라고 칭하는 것은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므로 삼국시대 이후의 고려와 구분해야 한다.)

고마이누는 신사뿐 아니라 도다이사(東大寺)를 비롯해서, 나라와 교토의 주요 사찰 입구에는 거의 빠짐없이 거대한 석상으로 서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개가 수컷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개가 암컷이다. 뿔이 달린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으며, 귀가 선 것도 있고 서지 않은 것도 있는 등 고마이누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일본의 신사 건물의 특이점은 우리나라의 8작 지붕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어 있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즉 가로는 짧고 세로는 직사각형 형태의 사전(배례전)이 신을 모신 본전과 연결된 형태의 모습이다.   

신사의 건물은 신사의 규모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인 경우  본전과 배례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항상 앞쪽이 배례전이고 배례전 안쪽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별개의 건물인 본전이 이어져 있다. 대체로 본전은 배례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하고 배례전은 대개 앞 뒤로 길기 때문에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본전에는 그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이 모셔져 있으며, 이 신물은 누구도 볼 수 없는 신사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의 내부는 경배를 올리기 위한 사전(社殿)과 신을 모신 본전(本殿)의 2중 구조이다.  

사전(社殿)의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렇게 초를 켜두는 장소와 헌금기록부인듯한 장부가 하나 비치되어 있다.

배례전에서는 돈 넣는 함에 돈을 넣은 다음 배례전 앞에 늘어진 천을 흔들어 목탁모양의 방울을 친다. 방울을 치는 것은 내 정성을 바치니 봐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죄와 부정을 씻어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두번 합장 배례하고 두번 박수를 친다.  신사를 들어갈 때는 가운데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며 나올 때는 오른 쪽으로 나오는데 이 풍속은 우리나라와 동일하다.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사찰과는 달리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는 단청이 없어 내부는 매우 소박해 보인다. 

 

신사에 가면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신사의 본전 뒤를 돌아가면 거대한 삼나무가 하늘까지 솟은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숲은 깊고 으시시하기까지 하며 등에 난 땀이 식을 정도로 시원하였다. 

 숲 한 곳에 도리이가 하나 서 있고 안쪽에는 돌무지 위에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서낭당 같이 금줄을 쳐 놓은 이 곳은 가토요타마히메(豊玉姫)의 묘이다.
이곳의 지명은 토요타마쵸라 불리워지는데 바로 토요타마히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한다. 
  

2003년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30% 가운데 51%가 신도, 그리고 48%가 불교, 그리고 1%도 안되는 나머지가 기독교등으로 되어 있다.

신도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 전쟁영웅은 물론 각종 귀신이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 것으로 여겨지면 신사를 세워 모신다.

 

전국에 신사가 10만 여개가 넘으니 거의 동네마다 신사가 있는 셈이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첨단 산업으로 앞서가는 선진국 일본에 경전도 없고 사제도 없는 신도가 사람들의 기복(祈福)과 관련하여

제일의 종교로서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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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의 북쪽 해안도시 네압볼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 즈음..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니 호텔 밖 풍경이 더할 나위없이 좋다.

호텔은 바다로 툭 튀어나온 자그마한 곶 위에 자리잡아 객실 어디서든 삼면으로 바다가 보이는 환상적인 장소에 있었다.

 

정말 천혜의 장소에 자리잡은 멋진 호텔..

호텔은 부페 음식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수영장 시설도 멋지다. 하지만 바로 옆에 바다를 두고 수영장 물에 몸을 담글 수는 없는 일......

삼면으로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 앉아 그리스의 풍부한 해산물로 배를 불린 후 수영복으로 갈아 입은 후 치마만 살짝 걸치고 바닷가로 나가 보았다.

 

호텔은 에게해의 톡 튀어나온 곶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호텔과 건너편 곶 사이로 쏘옥 들어간 조용한 만이 그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인지.....
거기다 저녁 무렵 이 멋진 
해변에서 수영하고 노는 사람은 필자와 S양, K양 세 사람 뿐이어서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너무나 즐거운 마음에 해변에서 장난치고 소리지르며 놀다보니.......호텔 발코니에 나와서 우리를 지켜보던 외국 남자가 우리를 부르며 손을 흔든다.
아이...쪽 팔려라...ㅋㅋ

해변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군데 군데 자리잡고 있어서 작은 수조같은 공간이 여기저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수조에 누워 있으면 파도도 치지 않아 바닷물에 둥둥 떠서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낭만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바닷물에 누워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동쪽 하늘에서 보름달(!)이 떠오르고 이내 달빛이 고고히 비쳐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인다.  에게해에 떠오르는 보름달이라니....! 하늘에도 달이요...바다에도 달이 흩어져 있으니 에게해의 달밤은 그야말로 환상의 달밤이다.

이 날 필자의 눈 속에 들어와 박힌 하늘과 바다의 달빛은 아직도 바로 어제 일인양 기억에 생생한데......
물에서 노느라 사진은 전혀 남기지 못했으므로 월출의 인증샷은 아쉽게도 통과~!

 

아침 일찍 일어나 베란다쪽을 보니 동쪽 바다로 여명의 기운이 불그레하다.
사진에서 바로 앞 쪽의 쏘옥 들어간 바다가 바로 엊저녁에 밤드리 노닐었던 바다이고 저 멀리 건물이 많이 보이는 곳은 네압볼리 다운타운이다.

 

 

앗....해가 떠오른다.  에게해의 떠오르는 태양이다!
구름이 끼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구름 사이로 해가 동그렇게 떠오른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에게해의 월출과 일출을 한자리에서 보다니....정말 기억에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

 

 

망원 렌즈가 아닌 콤팩트 디카로 찍은 사진이라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러면 어떠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에게해의 일출인 것을....
아직 어두운 바다 위로 비치는 햇살이 찬란하게 나의 마음 속에 들어와 박힌다.

 

 

아침을 먹고 네압볼리 다운타운으로 나가 보았다. 

 

 

지나가는 버스에 쓰인 그리스어(헬라어)가 눈에 뜨인다.
읽기도 힘든 그리스어의 조합들은 내게는 문자라기 보단 그냥 부호같이 보이기도 한데.....
차라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는 터키어가 훨씬 쉽게 느껴진다. 

 

 

항구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다 쓴 전화 카드가 나동그라져 있고 여기저기 낙서가 가득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다 똑 같은가 보다...

 

 

 

간판도 역시 뜻 모를 글자가 가득....그리스어를 전혀 모르는지라 읽기가 정말 난해하기만 하다. 

 

 

 

‘새로운 성읍’이란 뜻의 네압볼리(네아폴리스,Neapolis)는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세워진 도시인데 비잔틴 시대에는 크리스토우폴리스(Christoupolis)로 불리웠으며 터키 통치시대부터 카발라(Kavalla)로 바뀌어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오늘날 카발라는 인구 10만여명 정도의 활기찬 항구도시로 현재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데살로니키(성경의 데살로니가) 다음 가는 큰 도시인데 항구도시이자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중해의 담배 집산지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네압볼리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도착했던 곳으로 유럽 전도가 처음 시작된 항구이다.

바울은 이 항구를 통해 이곳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빌립보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사도행전 16:11∼12) ”  

 

 

 

바울 당시 이곳은 동서양의 뱃길을 잇는 교통 요지였고 육로 역시 로마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대로(Via Egnatia)가 이곳을 지난다.  

네압볼리에서 빌립보로 넘어가는 에그나티아 가도는 도로 건설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돌을 깔아 마차가 다닐 수 있게 한 포장도로인데 그 때문인지...시내 한 복판에도 돌을 깔아 포장한 도로가 많다. 

 

 

 

이곳에는 바울의 도착을 기리는 바울기념교회가 두 곳이나 세워져 있는데 한 곳은 항구 가까이에 있고 다른 곳은 항구의 언덕 위에 있어 항구 바로 가까이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를 찾아 보았다.

 

 

이 교회는 1928년에 사도 바울의 유럽 도착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교회 벽에는 바울이 배에서 항구에 내리는 모자이크화가 있어 이 곳이 바울이 유럽 전도에 첫 발을 디딘 역사적인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신축한 교회는 예전에 있던 교회 터 위에 세워져 있다.
'한번 세워진 교회는 절대 무너뜨리지 않는다.'란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앞에는 예전 교회의 기둥의 잔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세월이 스쳐 지나간 돌기둥에 기대어 잠시 상념에 빠지며
모자이크로 새겨진 사도 행전 16장 9~12절의 바울의 사역을 회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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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가장 먼저 도로를 닦았는데 도로 건설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이다. 
B.C. 146~120년 사이에 건설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터키까지 연결하는 길이 535마일의 도로였으니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860km에 달하는 엄청나게 긴 거리이다. 

 

에그나티아 가도가 지나가는 길에 에 위치한 빌립보(필리피, Philippi)는 기독교 선교를 받은 유럽의 첫 성으로 바울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립보의 옛 명칭은 크레니티(샘)였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마게도냐 왕 필리포스 2세(재위 BC 359∼336)가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바꾸었다. 

이 빌립보는 기원전 42년에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루터스가 참패한 후 자결한 곳이며 이 결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후에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게 된 배경이 된 역사적인 도시이다.

 

 

 

빌립보의 대규모 유적지는 1914∼1937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행해졌는데 도시의 대광장은 에그나티아 도로 바로 옆에 있고 그 면적은 길이 91m, 폭이 46m가 넘는 장방형이다. 

 

 

 

북쪽 중앙에 연사들이 연단으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는 장방형의 주춧돌이 있고 대광장의 북동쪽과 모서리에는 2개의 대신전이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그리고 도서관 건물, 줄지어진 기둥들, 건물의 현관, 분수, 목욕탕 등이 발굴되었는데 아직도 광범위한 지역은 미발굴된 그대로 남아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 바로 옆에 에그나티아 가도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새로운 도로를 닦기 바로 직전까지 이 길은 주민들의 통행로로써 충분히 제 할 일을 다했다.

에그나티아 가도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 복음을 들고 유럽 선교를 위해 지나갔던 길이기도 한데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이며 최고의 복음 전도자인 그로 인해 유럽 선교의 장이 처음 열렸다.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은 지금은 아스팔트 길에 밀려난 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통해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당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약 9m 폭으로 상당히 넓은 규모의 도로이었는데 도로에는 중앙 분리대도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마차들은 상대방의 채찍질을 피하기 위해 다 좌측으로 통행을 하였다고 하니 오늘날의 영국권 나라의 차량 좌측 통행의 기원은 에그나티아 도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에그나티아 도로에 그려져 있던 도형이 눈에 뜨이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놀이 했던 흔적이라고 추측된다.

 

 

극장을 지나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조금 지나면 바실리카 A 라고 불리는 지역이 위치해 있다.   

 

 

바실리카는 회당식 교회를 말하는데 빌립보에는 바실리카가 두 곳이 있다.

 

 

바실리카 A는 거의 허물어지고 기둥 몇개와 벽만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기둥 몇 개만 보아도 전성기 때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대리석 기둥 위의 아칸사스 잎이 어제 새긴 듯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이런 기둥 양식을 코린트식이라고 한다. 

 

 

바실리카 A에서 바실리카 B로 가려면 중간에 현대에 건설한 아스팔트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길을 건너면 바로 바울이 투옥되었던 감옥이 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곳은 바울이 귀신이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써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힌 감옥이다. 

그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다(사도행전 16:16∼34). 이 일로 기독교 역사상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된다.  

 

 

가운데 나 있는 이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빌립보 유적지는 두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윗쪽 유적지 산허리에는 바실리카 B와 원형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바실리카 B의 웅장한 기초석을 보면 당시 교회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바닥에 나둥그러진 대리석 조각들에는 십가가 장식이 선명하다. 

 

 

현재는 기둥 몇 개만 서 있고 바닥에 흩어진 석재들이 이 곳이 바실리카 B의 자리임을 알려준다. 

 

 

여기저기 무너진 유적의 잔해가 널려 있는데 발굴과 복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의 유적지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곳은 바로 원형 극장인데 아직도 시민들의 공간으로써의 원형 극장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원형 극장 가운데에 심상치 않은 장식들이 있길래 알아보니 내일부터 이곳에서 연극제가 열린다고 무대 장식을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이천년이 넘은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무대라니...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배우들도 다 감격으로 가슴이 떨릴 것 같지 않은가....
시간이 있으면 내일까지 머무르며 이천년된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공연을 볼 수 있을텐데.....아쉬운 마음 간직하고 빌립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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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데살로니가란 지명을 들어본 적 있으신지....
어릴 적에 여름 성경 학교라도 조금 다녀 본 경험이 있는 분은
이내 "데살로니가 전후~♪ 디모데전~♬"하며 부르는 성경 목록가의 한 대목이 떠오를 것 같다. 

데살로니가(테살로니키,Thessaloniki)는 BC 315년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동생 카스텔이
알랙산더의 누이이기도 하고 자기 아내이기도 한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에는 바울과 관련되는 로마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사실 유적이라는 게 고대 도시가 국가 지진이나 전쟁이 나서 폐허가 되어버리거나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리는 일이 생기게 되면 무인지경이 된 채로 방치되었다가
마침내 후대에 발굴되어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건데
오늘날의 데살로니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발굴이 되었다고 해도 극히 일부분이고 고대 데살로니가는 아직도 땅 밑에 고이고이 잠들어 있다. 

 

 

 

데살로니가에서 찾아볼 만한 유적 중의 하나는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드미트리우스 교회이다.
성 드미트리우스는 4세기에 순교한 분인데 어쩌다 데살로니가의 수호 성인이 되었고 이 교회는 드미트리우스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5세기에 지은 이 교회는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1948년에 다시 재건되었다. 

 

 

 교회의 내부는 어두운데 규모는 상당히 크다. 

 

 

현 교회의 지하로 내려가니 아래에 오래된 옛날 교회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한 번 세워진 교회는 무너지거나 없애면 안 되는 동방 정교회의 원칙에 따라 원래 있던 교회 위에다 다시 새로운 교회를 지은 것이다.

  

 

드미트리우스 교회 맞은 편에 로마 성벽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을 뿐 도시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교회 앞 광장은 넓고 그늘은 너무나 시원하여 화단가에 앉아 잠시 쉬어가려고 하니 
이쁜 강아지를 데리고 놀러 나온 그리스 부자가 눈에 뜨인다.
키 크고 잘 생긴 아들과 키 작은 아버지가 부자 지간일지 당최 줄이 그어지진 않았지만
자기 아들 자랑을 무지 하는걸 들어보니 그 아들의 아버지임엔 분명하였고(^^)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은 동서양이 다를바 없는 것 같다. 

 

 

 주인을 따라나온 행복한 개는 연신 하품을 해대는데....원래부터 개를 데리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트려면 개 칭찬부터 하는 법.
개가 아주 귀엽다고 말을 붙이자 개의 주인인 훈남은 너무나 좋아하며 대화에 끼어든다. 

 

 

 

 

 

그리스 조각같이 잘 생긴 이 훈남, 만면에 웃음을 띄며 강아지를 안더니 사진 한장 찍어달라고 한다.
강아지 산책 시키러 나온 동네 총각조차 이런 훈남이라니....그리스 여자들은 축복받은 땅에 태어난 것에 틀림이 없다...^^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실망을 주었던 데살로니가. 조각 미남을 만난 것에 만족하고 빌립보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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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치한 '루디아 기념교회'는 바
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5월 20일을 루디아의 축일로 정했는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하였다.   



이 교회의 돔에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형상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 마당 아래에는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세례터가 있다. 

그 전날 상류에 내린 비로 인해 흙탕물이 콸콸 흘러 가고 있었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세례터를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루디아가 세례받았다는 터에 선 것만 해도 기념할 만한 일이다. 




세례터라 알려지는 장소 옆에 아주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이렇게 작은 교회를 그리스에선 '에클레시아'라 부른다.



 

바울이 유럽에서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결신자,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자주장사 루디아라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두아디라(Thyatira,터키어로 Akhisar)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는데

그 당시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었다.

그리고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 후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 지방 염색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하던 여인이 자주장사 루디아였던 것이다.  


 

바울 일행은 지각티스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하였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사도행전16:15)"

그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하여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여러 번 도왔고

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위문품을 보냈다.

이에 바울은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의 '빌립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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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수호신인 여신 아테나의 이름에서 유래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Athens).
260만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아테네는 아티카주의 주도이자 그리스의 수도이다.

2500년전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로써 번영을 누린 도시 아테네. 
메인 스트리트인 파네피스티미우 거리에는 근대적인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데
한편에는 고대 유적들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시내 곳곳에는 중세의 비잔틴 건물도 남아 있어
고대와 중세,현대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곳이다.  

아테네를 방문하는 사람, 아니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리는 곳,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크로폴리스 입장 티켓을 손에 쥐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신들의 도시 아크로폴리스에 발을 딛게 되는 것이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제일 먼저 지정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있는 언덕.
이 언덕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올림푸스 신에게 제사 지내던 영역으로
파르테논 신전, 에렉티온 신전, 니케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2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서있는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외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파괴, 학자들의 절도 행위, 방문객들의 낙서, 지진 등으로 건물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특히 1687년 베네치아와 터키로부터의 공격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그리스 독립 후 복원 작업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려면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이온(음악당) 옆을 거쳐가게 되는데
오데이온은 정치가이며 부호인 아티쿠스가 사랑하는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AD 161 년에 건축한 음악당인데
넓이 240m, 높이 28m의 직사각형 구조이고 
원래는 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무대 전면은 화려하게 장식된 3층 구조였으나 지금은 2층만 남아있고
육천명을 수용하는 규모인 32열의 계단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파괴된 것을 1950년에 보수 하였다.
 

 

아직도 여름이면 이천년이나 된 이 오데이온에서는 아테네 축제가 열리며 많은 예술가들의 공연이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공연을 해야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오데이온 계단의 경사는 심히 가파르고 높아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아찔하기까지 했는데
이천년 넘은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문을 닫아 놓고 출입금지시킨 유적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동이 전해져 왔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서 내려다 본 아테네 시내의 전경에서 바로 아래는 아레오바고 언덕이며 오른 쪽에 보이는 신전은 복원된 헤파이토스 신전인데 신전 앞에 옛 아고라터가 펼쳐져 있다.
이 아고라는 아테네인들의 심장 역할을 했던 곳으로 단순한 상업적인 중심지만 아니라 모든 공공 건물이 운집해 있던 곳인데
267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아고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파르테논 신전의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 양식의 작은 신전은 에렉티온 신전이다.
처녀 여신 아테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아테나 여신은 이곳 시민들에게 풍부한 올리브를 포세이돈은 풍부한 물을 제공해 줄 것을 약속하며 둘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삼지창으로 아크로폴리스를 치고 샘에서 소금물이 솟도록 했으나 아테네가 올리브를 싹트게 하자 신들이 아테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그 장소가 이 곳이다. 결국 시민들은 아테나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화가 난 포세이돈은 물을 마르게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리스는 물이 무척 귀하다.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앙 숭배를 위해 지어진 이 신전은 6 명의 소녀상이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처녀단이 특히 유명하다.
이 것을 카리아테이드(caryatid)방식이라고 하는데 이렇듯 기둥이 아닌 처녀상들이 받치고 있는 기법은 이 신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각상들은 보면 왼 쪽 세 개는 왼 쪽 무릎을 오른 쪽 세 개는 오른 쪽 무릎을 살짝 내밀고 있어 튜닉을 입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는데 에렉티온 신전 앞에 선 여자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한 발을 살짝 앞으로 내어밀고 신전의 소녀상과 같은 포즈로 기념 사진을 찍어 본다. 


아테네의 여름은 심하게 덥고 아크로폴리스 바닥의 화강암에 반사 된 햇빛은 사람을 쉬 지치게 한다.
해발 고도 156m의 높은 언덕(?)을 헥헥 거리며 올라온데다 강렬한 햇빛에 지쳐서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르테논의 자료 사진을 미쳐 남기지 못하고 남은 사진은 필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들어간 사진 한장 뿐이었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의 이미지는 웹에서 살짝 빌려온 이미지로 대체하기로 하고.....

파르테논 신전은 약 2400 년 전에 도리아식 기둥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처음에는 아테나 여신을 섬기던 신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성 소피아 교회로,
오스만 터키의 지배 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베네치아와 대치 중에는 폭약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전 안에 있던 많은 조각 작품들은 폭약고로 사용할 때의 폭발 사고로 인하여 에서 떨어져 나와 신전 바닥에 방치되던 중
엘긴이라는 사람이 파르테논 박공부에 붙어 있던 조각품 및 많은 조각품을 떼어서
영국으로 가져 갔는데 엘긴이 가져간 조각품을 '엘긴 마블'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양을 가져가
지금은 대부분의 조각 작품이 대영 박물관 파르테논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러니....
조상이 물려 준 유적들을 지키지 못한 비애는 다만 우리 나라뿐만 아닌가 보다. 

 

 

이 사진은 대영박물관에서 찍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이다.
대영박물관에는 파르테논 특별실이 따로 있어서 파르테논 신전에서 때내어 온 대부분의 조각상과 부조들이
방 전체를 빙 둘러가며 원래 있던 곳과 같은 위치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라 모든 관광객들은 파르테논 앞에서 기념 사진만 찍고 다음 유적지로 서둘러 떠나곤 한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조그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언덕은 유명한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 언덕이다. 아레오바고는 그 언덕에서 소집되었던 아테네 공회의 명칭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재판관들은 재판을 진행하고 교사 후보자들을 심사하여 임명하였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동안 그 당시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에피쿠로스 및 스토아 학파의 추종자들에게 붙들려 끌려가게 되는데 이 때 바울은 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과 변론하였다. 그 상황을 기록한 사도 행전 17 :18~31의 내용이 아레오바고 언덕 오른 쪽 네모난 동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뒷편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다음으로 중요한 박물관이라고 하며 1865년에 완공되었으니 거의 150년이 다 된 박물관이다. 

 

 

특히 여신들의 조각상들은 섬세한 옷과 머리 장식이 눈에 띄는데... 

 

 

주름이 곱게 들어간 섬세한 옷감과 가늘게 땋은 머리가 그 당시 아테네의 최신 유행이었다고..... 

 

 

파르테논 신전 박공의 모형에는 포세이돈(삼지창을 들고 있다)과 아테나가 대결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넘어진 거인과 싸우는 아테나의 모습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전시된 유물의 사진은 아무리 많이 찍어도 되나 유물을 배경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처음에는 약간 갸우뚱했지만 나중에 와서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유물을 배경으로 서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경우에는 관람하는 사람들의 동선에 상당히 방해가 되는데
사진을 찍느라 유물을 가리는 것을 방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일 듯....
그리고 유물 자체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유물을 단지 인물 사진의 뒷배경으로 삼는 것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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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오라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이란 뜻의 메테오라(Meteora)는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들이 있는 곳. 그 희귀성과 신비함으로 인해 UNESCO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이 곳의 수도원들은 14세기에 처음 세워졌고  전성기인 16세기에는 총 24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속세와 차단하기 위해 바위산 위에 수도원을 지었는데 올라가는 길을 따로 만들지 않아 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래를 이용하여 끌어올리는 방법 뿐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총 14개의 수도원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수도사가 거처하는 6군데의 수도원만 그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메테오라로 가는 길 오른 편에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곳을 자세히 보니 그 앞에 판자촌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스 가옥같지 않은 다소 지저분한 집들이 늘어서 있기에 물어보니 집시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란다.
집시들은 유럽 어느 지역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거나 이렇듯 한적한 지역에 부락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여자들의 입는 치마 중 길고 폭이 넓거나 갈래갈래  폭이 갈라진 치마를 흔히 집시 치마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일정한 거주 지역을 가지지 못한 집시의 여인들이 길을 가다가 생리 현상을 해결할 때에 아무 곳에나 치마를 펼쳐 들고 앉기만 하면 남들의 눈치를 받지 않고 볼 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치마들을 입었는데 요즘은 멋진 집에 멋진 화장실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옷을 입는다고 집시들이 흉을 본다고 한다. 

 

 

 집시 마을을 지나 한참 가면 저멀리 예사롭지 않은 기암 괴석들이 보이는데 마치 사람이 누워서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 

 

 

멀리서보아도 그 위용이 예사롭지 않고 바위 아래에 빨간 지붕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기묘한 모습의 바위들이 여기저기에 불쑥 솟아오른 듯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은
산정에 물고기 및 바다 생물들의 뼈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옛날에 갇혀진 내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수도원 보수 작업 당시 발견된 건축적 증거와 벽화가 이 곳이 조성된 시기가 13세기초임을 확인해 준다.
기암 괴석 군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이 일품이며 현재 6개의 수도원이 남아 있는데  
왼 쪽부터 루사노,니콜라우스(아주 작게 희미하게 보이는..),대메테오라(큰 산 위에 희미한..), 발람 수도원이다. 

 

 

메테오라의 수도원 건물 중 가장 도달하기가 어려운 건물은 트리니티 수도원이다.
이 곳에 가기 위해선 계곡을 지나 좁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한다.
1981년 007 시리즈 ' For Your Eyes Only'의 클라이막스 추격 장면에서 이 수도원이 등장하여 더욱 유명세를 탔다.

 

 

루사노 수도원은 메테오라의 수도원 중 자연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왼 쪽 바위 위에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오래 된 대 메테오른 수도원이 있는데  
너무 높아서 사진 상으로는 잘 나타나 보이지 않고 오른 쪽  수도원은 두 번째로 큰 발람 수도원이다. 

 

 

발람 수도원은 은돈한 수도자 발람에 의해 1542년에 세워졌는데
주황빛의 지붕으로 유명한 이 건축물은 수도원 건물 중 주변 풍경과 가장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발람 수도원을 돌아보기 위해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는데는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야 한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는데에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로는 입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바지를 입은 관광객들은 사진과 같이 수도원 입구에서 빌려 주는 고무줄 치마를 걸치고 들어가야만 한다.

절벽 사이를 이은 다리를 지나 계단을 한참이나 걸어올라가서 내려다 보면 아래가 까마득하다. 

 

 

 역시 골짜기 아랫 부분들을 보면 수도원들이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옛날에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도원으로 통하는 계단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원 위에서 도르래를 이용하여 사람들이나 물자를 끌어 올리곤 했다. 

 

 

이 수도원에는 세 명의 주교를 기리는 돔으로 된 십자형 교회가 있으며
벽면에는 1548년 프랑스 성화가 카텔라노스가 그린 성화가 장식되어 있다.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은 깔람바까 마을 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깔람바까의 전망대로 불리운다.
14세기에 수도원이 형성되었고 많은 수도사들이 있었으나 쇠퇴하면서
1961년도에는 수녀원으로 바뀌어 비잔틴 성화,성가 등을 제작 판매하고 있다. 

 

 

성 스테파노스 수도원에 있던 특이한 모양의 종은 쇠막대로 치면 청아한 소리가 난다.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신비한 메테오라.....고요한 깔람바까 마을....
시간이 허락한다면 오래 머무르며 정지된 중세의 시간을 느껴보고 싶은 공중 수도원 메테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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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유명한 말씀으로 인해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고린도(코린트,Corinth).

구 고린도의 광대한 유적지를 돌아보다 보면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박물관이 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개인박물관같이 규모가 작고 아담한 박물관이다.
고린도 유직지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세워진 이 박물관의 입장료는 6유로이다.

 

 

 '고대 고린도 고고학 유적 및 박물관'이라는 안내판을 따라서 박물관을 한바퀴 둘러본다. 

 

 

박물관 마당에는 시대별로 그리스 건축의 각각의 기둥 양식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비교해 두었다.
제일 왼쪽은 도리아식의 기둥으로 기둥 위 장식이 대체로 단순한 사각형의 형태이고
중간의 것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도리아식보다는 장식이 가미되어 있으며
기둥 위 부분 양쪽에 둥근 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른쪽의 것은 고린도식 기둥으로 넝쿨 무늬로 섬세히 장식한 가장 화려한 형태의 기둥 장식이다.
 

 

 

고린도의 건축물은 기둥 장식 하나도 그냥 그대로 두는 법이 없이 화려한 장식이 기본이다. 

 

 

전시품에는 대리석 석상이 유달리 많은데 이 석상들은 인간의 몸을 본뜬 것이 대부분이다.
환락의 도시 고린도답게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높았던 것일까....?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Six Pack 열풍은 그 기원이 그리스 시대 이전까지 올라가는 듯....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서 옷은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인지 옷은 어깨와 팔에 슬쩍 걸치기만 했다.
 

 

 코린트식의 기둥 장식 속의 이 아름다운 남자는 머리는 구불구불 아름답게 파마를 하고 주름이 많이 잡힌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석상의 옷 주름이 너무나 세밀하고 아름답다. 귀족들은 섬세하게 치장을 한 옷을 입고 멋을 부렸다고 하며 시종들까지 아름답게 장식한 옷을 입혔다고 한다. 

 

 

금방 다린 듯한 섬세한 주름의 옷을 입고 치장을 한 고린도 사람들이 떠오른다.
대리석을 가지고 이렇게 옷 주름까지 미세하게 표현한 조각 기법이 놀랍기만 하다.  

 

 

 아우구스투스 상인 듯 하다. 

 

 

 이 모자이크는 제우스신의 아들이고 술의 신인 디오니수스(바커스)를 위한 것인데  원래는 바닥에 깔린 모자이크이다. 

 

 

 극도로 세밀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그 당시 고린도의 풍요함을 말해 주고 있다.  

 

 

 코린토 박물관에 소장된 이 도자기들은 BC 3000년 부터 900년 사이의 물건들이다. 

 

 

니케(Nike,전쟁이나 경기의 승리의 여신) 상이다. 스핑크스의 영향을 받은 듯 반인반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시절 고린도의 승리를 위하여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게 날개를 잘라 놓은 것을 후세에 다시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병이 치유가 되면 그 신체의 부분을 조품으로 만들어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쳤다고 한다.
귓병이 나으면 귀를 만들어 바치고 발이 나으면 발을 만들고
성병도 치유가 되면 성기의 조각을 만들어서 바쳤다고 하여
고린도 박물관에는 유난히도 성기의 조각이 많았다.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이다 보니 성병이 많았던 듯....  

 

 

발굴 당시에 나온 인골과 부장품들.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 

 

 

고린도 박물관에는 유달리 목만 남은 석상들이 많은데 이렇게 석상의 코가 훼손된 모습도 많이 보인다.
그리스에서도 석상의 코를 깎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퍼졌나....? 

 

 

박물관 뒤뜰에는 묘비명과 함께 머리 없이 몸만 있는 석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문 앞에 문패 대신 자기의 전신상을 세웠다는데 전쟁도 많았고 이동도 많았던터라
전신상이 완성되기 전에
당사자가 죽거나 이사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얼굴이 없는 전신상은 기본 사양이고 얼굴은 옵션....
새 집을 사도 얼굴만 주문하고 이사할 땐 얼굴만 들고 다니게 된 것이다.

 

 

착탈식 석상이라....그런 석상을 개발한 사람이 요즘 있었더라면
나라 생각은 안 하고 자기 무리의 영달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 한 두 개 쯤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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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고대 및 현대 도시 고린도(코린트,Corinth). 
이 도시는 구 고린도와 신 고린도로 나뉘는데 고대 도시 유적은 구 고린도에 있다.
 
 

고린도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세계 3대 운하 중의 하나인 고린도 운하.
이 운하는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에 있는 운하인데 서쪽 바다인 이오이나해와 동쪽 바다인 에게해를 연결한다.
길이 6.3km, 폭 25m(바닥의 폭은 21m) 의 규모인데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약 80m인지라
다리 위에서 보면 아래가 까마득하게 보일만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운하 양 쪽 바다 풍광도 아주 아름답다.

AD 67년, 로마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노예를 데리고 자기 스스로 첫 삽질을 하여 운하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네로 황제가 죽자 이어 즉위한 가르바 황제가 경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중지한 이후
1881년 다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하였으니 운하를 만드는데 거의 180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운하 안에 갑문이 없는 수평식 운하이며 양쪽 만의 간만 시간차 때문에 강한 조류가 일어나기도 한다는데
실제로 다리 위에선 몸을 가누기도 힘들만큼 심한 바람이 불어 운하 구경하는데도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곳이다.

운하를 가로질러 놓인 도로 표지판에 쓰인 낙서가 눈에 뜨인다. 어디든 낙서하고 싶은 심리는 만국 공통인 듯....

운하를 지나면 나타나는 구 고린도에는 고대 도시 유적지가 있다.
이 고대 도시는 지브롤터처럼 돌출한 아크로코린토스 언덕(해발 575m)의 성채 아래에서 성장했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는 고대 도시의 위로 가파르게 솟아 있고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는 육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옛날 고린도는 전략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중요성을 지닌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BC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BC 8세기초에 고린도 도시국가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고린도의 정치적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증대되었다.
그 당시 고린도의 인구가 자유인이 25만, 노예가 40만이었다고 하니 인구 3만 정도인 오늘날의 고린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고린도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신전 중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매음 행위를 자행했고
한 때는 1000명의 선발된 창녀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봉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린도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인과 같이 행한다'는 말은 '성적 부도덕을 행한다'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고린도의 폐허의 아폴로 신전은 BC 6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38개의 기둥이 있었는데 반복되는 지진으로 인해 지금은 7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신전은 주전 6세기경에 세워진 그리스의 신전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으로
전통적인 도리아식(Doric style)기둥이며 기둥이 하나로 된 통기둥인데 현재는 7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 신전의 남아 있는 고린도식 열주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고대 고린도시의 유적은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의 정북쪽에 있으며 그 도시와 언덕은 둘레 약 10㎞의 원형 성벽으로 결합되어 있다.
중요 유적은 대부분 로마 시대의 것들이지만 아고라가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BC 4세기의 일이라고...

아고라(시장)지역의 건물이 화려한 걸로 보아서 고린도 사람들의 생활은 대단히 화려하였다고 짐작되며 이곳은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한 도시였다고 전해 온다.

그밖의 신전, 별장, 극장, 상점, 공중목욕탕, 도기제조소, 단련장, 거대한 개선문,
기타 건물들의 유적이 점점이 들어서 있는 아고라 일대는 1896년부터 대대적으로 발굴되었다.

바울의 재판터(Bema)는 광장 중앙에 쌓여 있는 돌더미로 본래 아고라의 중앙에 자리자잡고 있었으며
가이오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인들의 고소로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았단 자리이다(사도행전 18:12~17).
5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인들이 이 곳을 교회로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사용된 우물 피레네 샘터는 정원과 6개의 물저장소가 서로 유통되도록 되어 있고 한 시간에 11000리터의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물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신화에 의하면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피레네)의 애절한 사랑이 오늘도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고 전한다.

그 당시 길가의 각 상점에서는 우물을 파서 포도주나 육류를 우물 속에 매달아서 냉장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팔았다.

대극장 유적은 에베소 유적지의 대극장에 비해서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다.

고대의 고린도 시가가 지진으로 무너진 후 1858년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신 고린도 시가 건설되었다.

한때 65만의 인구를 자랑했던 고린도의 현재 인구는 약 3만 정도이며 
신 고린도는 그리스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지만 여행자가 보기엔 한적한 소읍 같은 도시이다.

신 고린도 중앙에 위치한 '신 고린도 바울 교회'의 왼쪽에는 베드로 사도 오른쪽은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교회 입구 우측면에 위치한 대리석판에 흔히들 '사랑장(章)'이라고 부르는 고린도 전서 13장 1~8절의 말씀이 헬라어(그리스어)로기록되어 있다.

신고린도 교회 벽면에는 또한 역대 교역자의 명단이 벽에 적혀 있는데
1대 바울, 2대 아볼로, 3대 실라....이렇게 이어 내려와 현재는 88대 교역자가 시무하고 있다.

AD 50~52년에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본업인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 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강론하였다.
고대 고린도는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숭상하는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는데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음행을 꾸짖으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
고린도서를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어서 권유하였다.

이천년전 고린도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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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고 다섯 시간......
그리스의 영토인 에게해의 작은 섬 밧모(파트모스, Patmos)로 향한다.
남북 17km, 동서 9km 넓이의 바위와 화산암으로 뒤덮힌 조그마한 섬 밧모는 농사라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건조하고 불모지같은 땅인데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에게해를 헤치고 저멀리 밧모가 보이면 항구가 채 보이기도 전에
섬의 정상 부분에 성채와 같이 우뚝 서서
밧모에 오는 사람들을 환하게 반겨주는 건물이 있으니
바로 '성 요한 수도원'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 아름다운 수도원은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동로마 황제로부터 섬 전체를 성지로 하사받아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인데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높은 곳에 요새처럼 건축하였다. 

 

 

하얀 페인트로 칠한 그리스의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화산암으로 건축된 성 요한 수도원은 바다에서 바라보면 약간 검붉은 색으로 두드러져 보이며 마치 거대한 요새같이도 보인다. 

 

밧모섬의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성요한 수도원'을 가기 위해선 주차장에 내려서도 하얀 집들이 늘어선 호라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다 숨이 차서 멈추어 뒤로 돌아서 본 풍경은 깨끗한 하늘과 눈이 부시게 푸른 바다...거기에 장난감 같은  하얀 집들...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성 요한 수도원'의 철문이 순례자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이곳은 원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으로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성 요한 수도원을 세우면서부터 이 섬에 수도원과 교회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수도원 입구 문 위에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로 새겨져 있다.  

 

 

정문을 지나 다시 작은 문으로 들어서니 에는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의 사제가 서 있는데
민소매의 옷을 입은 필자를 보더니 어깨를 가리라고 태양의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검정색 숄을 한 장 주었다.
사진의 모델을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하고는 앉아서 멋진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검은 수도복과 검은 모자....그리고 길고 하얀 수염이 정말 멋진 사제. 카리스마도 완전 짱이다...!

정교회 사제의 프로필을 찍은 후에 욕심이 생긴 필자.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그것 또한 웃으며 허락한다.
필자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카메라를 앞에 선 사람에게 부탁하고 사제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더니
깜짝 놀란 이 사제..... 손사래를 거듭 치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덩달아 깜짝 놀란 필자.....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한 후 그냥 옆에 얌전하게 서서 포즈를 취하니
그 할아버지 사제 .....필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옆으로 고개 돌리고 외면한 채 사진 촬영에 임한다.
나이가 아주 많은데도 여자랑 신체 접촉을 하거나 쳐다 보면 안 된다는 계율을 지키던 할아버지 사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입구에서 수도원으로 가는 통로에도 있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는 예수님,왼쪽은 사도 요한,오른쪽은 수도원을 지어 헌납하는 크리스토둘로스이다. 

 

 

먼저 수도원의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예배당의 둥근 지붕의 붉은 돌이 눈에 들어온다.
화산암의 군데군데가 붉은색이라서 이 수도원이 먼데서 보면 붉은 성채처럼 보이나보다. 

 

 

수도원의 제일 큰 종루에는 종이 다섯개나 달려 있는데 쳐다보면 노틀담 사원의 에스메랄다가 떠오르는 건 웬일인지.....

 

                                                                                                                     

성 요한 수도원 도서관에는 장서 3,000 여권이 소장되어 있는데 장서 중에는 7~8 세기의 성경 희귀 사본들도 있다.
이 도서관은 아토스 수도원 도서관 다음으로 귀중한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라고 한다.  대리석에 쓰여진 요한계시록 사본도 이채롭다.  

이 건물 내에는 8개의 크고 작은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성요한 교회'는 제일 중심이 되는 예배당이다.
벽과 천정에는 오래 되어 칠들이 벗겨져 가는 성화들로 가득 차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인해 아랫 부분이 다 희미해져 없어져가는 성화들이 무척이나 신비한 느낌을 준다. 

8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이른바 '성상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서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보내던 세금 납부를 중지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오 3세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으로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분열된 원인이 되었던 성상 금지령으로 인해 이 후 비잔티움 내의 많은 성당의 이콘(icon,성화상)이 무너뜨려지고 지워졌는데 이 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라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해 이콘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1,2차 성상 금지령 이 후 성상 금지령은 점점 시들막해져서 동방 정교회에서 이콘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예배 형식은 계속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특징은 성상(聖像)은 거의 없으나 이콘(icon,聖畵)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랜 세월이 스쳐 간 흔적이 남아 있어 더 아름다운 성요한 수도원의 이콘들을 감상하시길......

 

 

모자이크로 된 이콘도 많은데 왼쪽은 사도 요한, 오른쪽은 수도원을 건립한 크리스토둘로스이다. 사도 요한의 이마를 보면 혹처럼 불룩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그 흔적은 사도 요한이 이마를 동굴 암벽에다 대고 하도 오랫동안 기도를 해서 생긴 굳은 살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였는지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 무릎 같았다고 전해진다. 

예배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입구까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성요한수도원 교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필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개신교인은 성상이나 성화에 대해서 그다지 탐탁치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서 그것이 비록 예수님의 그림이나 형상이라도 만들거나 그려서 형상을 보고 경배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같은 곳에서도 거기에 그려지거나 세워진 수많은 성경상의 형상들이 미적으로는 심히 아름다웠으나 신앙적으로 형상을 경배한다는 일은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되곤 했다. 

그러나 작은...너무도 작은...조그마한 방 두개 정도를 합친 듯한 성 요한 수도원의 아주 아주 작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에 필자는 감격에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방의 천정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소박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천정화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사면 벽에도 역시 성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성당이나 교회처럼 설교를 듣기 위해 성도들이 앉는 의자가 없었고
대신 성화가 그려진 벽 삼면에 앉는 부분이 없는 등이 높은 의자가 대여섯개 붙어 있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독특한 습관이 있어서 수도사들이 이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는 앉지 않고 서서 기도하며
서서 기도하던 중에 졸다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앉는 부분 대신 팔걸이만 있는 의자였다.

너무나 소박하고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예배당...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 붙어서 천정만 쳐다 보고 있는데
함께 천정 벽화를 보고 있던 S가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왜 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S,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을 잇는 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요...너무 아름다워요....
언제 다시 이 곳에 와 보겠어요.....너무 아름다워요....
이 모든 것을 내 눈 속에....마음 속에..... 담아갈 거에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 성화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작고 소박한 예배당..... 너무나 경건한 아름다움.....
필자 또한 벅차 오르는 감격에 가만히 서서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피부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 예배당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필설로나 사진으로써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고
지금 글을 쓰며 그 곳을 기억해 보아도 동일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성지 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밧모섬에 가서 성 요한 수도원의 예배당을 꼬옥 가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예배당 바닥에는 넓적한 나뭇잎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웬 나뭇잎일까...궁금하게 여기며 오른쪽 문으로 나가려던 중 아주 젊고 잘 생긴 수도사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필자가 이 나뭇잎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내일이 성모승천일인데 이 수도원을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경배의 뜻으로 나뭇잎(나뭇잎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적어둘걸...ㅠㅠ)을 제단 앞에 뿌려서 봉헌한 것이란다.
제물이 나뭇잎이라니...참으로 소박하기도 하다..
열심히 설명해 주던 수도사는 필자가 작별 인사를 하니 기념으로 나뭇잎을 주겠다며 필자의 손에 나뭇잎을 꼬옥 쥐어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예배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같은 화려한 성당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을 그 곳에서는 경험할 수가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자그마한 예배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청아한 노래 소리도 함께 들려 온다.

Nulla in mundo pax sincera
Sine felle; pura et vera
Dulcis Jesu est in te

Inter poenas et tormenta,
vivit anima contenta,
Casti amoris, sola spe

이 세상에 고통없는 참 평화는 없어라...
자비로운 예수여, 당신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평화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의 빛이 비칠 때
내 영혼은 비로소 위안을 얻게 된다네.

 

"Nulla in Mundo Pax Sincera (세상에 평화 없어라)..."
천국에 BGM이 흐른다면 아마 이 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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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인 밧모(파트모스,Patmos)섬은 남북 17 km,동서 9 km의 넓이의 이 섬은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인데 농사라 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별 것 아닌 건조하고 불모지 같은 땅이다.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으로 로마시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던 밧모섬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이곳에 18개월동안 억류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소로 가게 된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동안 '계시의 동굴'에서 지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그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계시의 동굴 출입구 옆 축대에는  '계시의 동굴(The Cave of the Apocalypse on the Patmos)'이란 글과 함께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I was on the island of Patmos)" 라는 요한계시록 1장 9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요한이 기거할 때에는 바위 동굴만 있었으나 17세기 경에 바위 위에 동굴 보호를 목적으로 성 안나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신학교 건물이 세워졌다. 

 

 

신학교 건물은 그리스 건축 양식에 따라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고

 

 

문 위에는 요한이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는 내용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 있던 바위 동굴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건물은 비스듬히 지어져 있는데
아무 시간에나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앞에서 기다린 후에 개장 시간에 맞춰 입장할 수 있다. 

 

 

동굴로 들어가려면 신학교 건물로 들어가서는 좁은 계단을 다섯번이나 꺾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도중 계단 옆으로 굳게 닫겨 있는 신학교의 붉은 문들은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한참 걸어내려가면 계시의 동굴의 입구로 들어서게 되는데 계시의 동굴을 둘러 싼 공간은 성 안나 교회라고 한다.


성스럽다 못해 신비한 느낌마져 드는 게시의 동굴은 한 20평 정도나 될만한 공간일까...
입구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난 바위 창문으로는 산 아래의 정경과 해안이 환히 드러나 보이고
맞은편에는 성안나교회의 벽화들이 천정과 오른 쪽에는 자연적인 동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동굴의 머리 위 바위가 크게 갈라진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요한이 계시를 받는 순간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이 나며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이라고 한다.

신비감 도는 동굴에서 나와 교회 건물 꼭대기 종루에 올라 푸른 밧모 바다를 내려다 보니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는 사도 요한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요한계시록 21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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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사에 가면 자식의 대학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대부분의 신사에서는 운세 같은 것을 점칠 수 있는 괘를 팔기도 하고 부적도 파는데 시주함에 돈을 넣으면 주는 운이 적힌 부적 종이를 오미구치(御神籤)라고 한다.

 

오미구치를 펼쳐 보았을 때에 좋은 괘가 나오면 가지고 가고 좋지 않은 괘가 나오면 신사 앞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가는데 대마도의 와다즈미 신사의 문 앞에 매달린 많은 오미구치를 보니 마음에 들지 않은 괘도 많이 나오는가 보다.

 

심지어 이렇게 오미구치 자판기까지 있는데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맨 아래 난 구멍에서 부적이 나온다.  오미구치 자동 판매기는 와다즈미 신사 뿐 아니라 전국의 신사에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돈을  주고 부적을 받는 번거로움과 인건비 절약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일본인의 놀라운 상술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부적까지 자판기로 팔다니.....자판기 천국인 일본다운 아이디어다. 

 일본의 신사에서는 소원을 적어서 매다는 작은 나무판을 따로 사기도 한다.  

여기에 자기 소원을 적어서 매달아 놓거나 걸어놓는데 이 나무판을 에마(繪馬) 라고 한다. 

사랑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에마도 있고...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에마도 있다. 

일본어로 된 에마 중 많은 부분이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소원의 글귀인 것으로 보아 일본에도 입시는 인생의 가장 힘든 관문인 듯 하다.

 

와다즈미 신사에 걸려 있는 에마에는 의외로 한국 사람이 남긴 것이 아주 많았다.
일본의 귀신에게 소원을 빌다니...?
비록 관광지에서의추억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어쩐지 씁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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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부터이다.
그들은 외교적, 상업적 동기에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특히 대마도(쓰시마)사람들이 조선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래서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구했다고 한다.
조선의 역관들은 다른 나라로 유학을 하지 못했지만 일본의 역관들은 초량 왜관에 와서 유학을 하며 조선어를 배웠다.
통계에 의하면 대마도의 남자의 반이 일생에 한번은 조선에 왔다고 하니 그래서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어에 능통했던 것 같다. 
 

이즈하라 카페리 터미널에서 보면 건너편 산 중턱에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광청사이다.
서산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청사는 길에서도 경사가 급한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광청사(光淸寺,고우세이지)는 1727년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설립한 3년제 조선어학교가 있던 건물이다.

이 조선어학교의 수업은 하루 4시간씩. 매월 27일은 시험을 쳤다.

교재는 1학년 <교린수지> 2학년<전일도인> 3학년<인어대방>이란 책이었는데 통역사 양성이 목적이었는데

교사는 인위문길(仁位 文吉)이라는 20세의 전문통역사였다.

 

 

길에서 광청사 입구까지는 약간의 비탈길을 올라가야 하므로 입구에 지팡이가 비치되어 있다.

지팡이에 붙어 있는 명찰에는 좌수용,우수용이라고 쓰여져 있다.

왼손잡이,오른손잡이를 구별하여 지팡이를 구비해 놓은 것도 일본인들의 세심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절 본당에서 1872년 10월 25일 '한어학소(韓語學所)'가 개소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통역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대마도에서 조선어는 매우 인기가 높아 입소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1873년 8월 2일까지 1년간 대마도 고위층 자제 34명을 입소시켰는데 그들 중 10명이 10월 16일 조선말을 더 잘 배우기 위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왔다. 초량 왜관 내에 '초량관 어학소'를 만들었으니 한어학소의 전진 배치였던 셈이다.

 

이들이 이후 경복궁을 드나들며 한일 합병의 통역관 겸 정보원 역할을 했으며 1895년 민비 시해사건 때 투입된 자객들 중에 낀 통역 2명이 이 어학소 출신 대마도인이었다. '초량관 어학소'는 1880년 동경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가 생기면서 자동 폐소되었다.

 

현재 대마도 소학교에서는 5,6 학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어과를 설치해 교육하고 있고 한국인 원어민교사가 있다고 한다. 대마도 고등학교에서는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사물놀이를 학습하고 있으며 곧 태권도도 가르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던 조선어학교...이제는 상생하는 이웃이 되기 위해 선하게 쓰여지기만 바랄 뿐이다. 

 

 

광청사를 나와 수선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선사(修善寺,슈센지)는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개인 사찰이라 최익현 순국비에 참배키 위한 한국 사람 외엔 거의 찾는 사람도 없는 절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인데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높이 9.5cm의 신라 동조여래현좌불상이 있으며 최익현선생의 순국비와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토츠안'의 묘가 있다.  신라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는 비각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어서 확인할 수도 없다.

 

 

수선사 내에 있는 '대한국인 최익현 순국지비'. 최익현은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은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수선사에 지장보살이 단체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지장 보살들이 여러 가지 무늬의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전번에 서산사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원래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당)의 주불(主佛)이어서 무서운 이미지로 남아 있는데
일본의 지장 보살은 모두 다 까까머리에 이쁜 턱받이를 하고 몸에 사탕이나 장난감을 지니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의 지장 보살은 낙태나 사산으로 허공을 떠도는 어린 영혼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부모들은 어린 영혼을 지워 버린 몹쓸 짓을 한 자기들의 죄를 이 지장 보살에게 빌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장 보살상에다가 이쁜 턱받이로 치장을 한다.

 

그리고 머리에는 이쁜 뜨게 모자를 씌워 춥지 않게 하고 그 앞에는 장난감이나 사탕으로 놓아두어 어린 영혼을 달랜다는 것이다. 

(이 코딱까리만한 지장보살은 서산사(세이잔지)정원에 있는 지장 보살이다.) 

 

가는 곳마다 턱받이로 장식한 지장 보살들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만제키바시(만관교) 다리 옆 숲에 있던 지장 보살들은 하나같이 파란 색깔의 턱받이로 치장하고 있었다.
 

 

뒤에 광배가 있는 수선사의 이 부처는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선 한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일본의 부처는 석가모니불조차도 이쁜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화꽃 턱받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본인들의 불심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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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마지막 칸인 벅드 칸의 겨울 궁전 박물관에는
벅드 칸 왕과 왕비가 실제로 사용했던 많은 유품들이 남아 있는데
각국 사신들로부터 선물받은 희귀 동물의 박제, 보석, 도자기 등의 진귀한 유물들이 많아서 볼거리를 준다.
그중에서도 전시실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세밀화는 많은 유물로 인해 스쳐지나가기 쉬운데
이 세밀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몽골인들의 주거 방법, 복식, 생활상들을 그대로 짐작할 수 있다.


몽골 세밀화는 이라크에서 발달한 모술파 세밀화의 영향을 받은 지극히 섬세한 필치가 인상적인데
이 박물관에는 B. Sharav (1869~1939 )라는 작가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아이락 축제', '여름 궁전', '겨울 궁전'같은 전시 작품의 깨알 같이 그려놓은 세밀화에는
궁전에서의 외국 사신 접견, 선물 행렬, 병사들의 체력 단련, 싸움에 출정하는 남자들을 배웅하는 여자들,
라마 사원에서의 예불, 라마승들의 토론,  게르 짓기, 말젖짜기, 낙타젖짜기, 소들의 싸움, 말똥으로 고기 굽기,
양털 고르기, 가축 잡기, 말똥 줍기, 아이락 축제의 산해진미,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
토할 때까지 술 마시기, 아동 음주, 술 마신 후의 폭력적인 행동, 여성들간의 머리채를 쥔 싸움.....등
당시 몽골인들의 생활 모습이 너무나 세밀하고도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충격적인 성 묘사가 그림 군데 군데에 숨겨져 있는데
간통녀로 짐작되는 여자를 재판하는 무당, 그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여자들, 
성행위중인 남녀를 죽이려고 다가가는 남자,  음주 후의 변태 행동, 성기 노출, 남녀간 성행위,
호모 섹스, 레즈비언, 성도착증을 비롯하여 눈을 의심케 하는 가학적인 성기 단련 장면까지.....
19금으로 분류할 수 밖에 없는 묘사가 군데 군데에 숨어 있어 보는 이들의 얼굴을 붉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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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과 미소가 저절로 나오는 몽골 세밀화의 해학의 세계로 여러분들을 살짝 초대하오니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라시길 바라며......^^

 

아이락(마유주) 축제 / B. Sharav ( 1869~1939 )





















여름 궁전 / B. Sharav ( 1869~1939 )




겨울 궁전 / B. Sharav (1869~1939 )












(벅드칸 궁전의 입장료는 2,500 투그릭인데 사진 촬영비는 입장료의 4 배가 되는 10,000 투그릭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엄청나게 비싼 사진 촬영비를 지불하고 찍은 사진들이지만
복원품인 '아이락 축제'그림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 년 정도 된 그림이라 그림이 많이 탈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리 속에 든 그림을 흐린 조명하에서 찍었기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흔들린 것을 널리 이해 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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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묵었던 호텔에서 아침을 먹을 때의 일이다.
식탁의 양념통 옆에 매실 절임같이 생긴게 있어서 뭐냐고 물어보았더니 '우메보시'라고 한다.  

 

하나 먹어 보았더니 너무나 시어서 저절로 몸서리가 처진다.

우웩...이런 걸 어떻게 먹지 싶을 정도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우메보시'란 매실을 소금에 절인 다음 차조기 잎을 넣어 만든 매실장아찌를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김치처럼 항상 상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고 예전에는 도시락 반찬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였다고...

 

매실은 식욕을 북돋우고 배탈을 막아주며 피로회복에도 놀라운 효과를 보여 현대인의 체질이 산성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건강식품으로 불릴 만큼 각광받고 있다.

우메보시를 자주 먹는 일본사람들도 우메보시라는 말만 들어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고 하는데 이 침은 음식물의 소화 작용 이외에도 살균, 면역효과를 높여준다.

일본 사람들이 생선회나 초밥을 쌀 때에 우메보시를 함께 넣는 것도 매실의 살균효과 때문이라고.  

 

 

어떤 사람은 "우메보시,그 몸서리치는 기괴한 맛!'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 그래도 몸에 좋다니...하나 더 먹어 볼까....

입에 하나 더 넣었더니 다시 머리 끝까지 번개가 치며 온 몸 끝까지 몸서리가 쳐왔다..후훗....

다시 더 먹고 싶은 맘은 당최 들지않는 우메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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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모(파트모스,Patmos)섬은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이다.
남북 17 km,동서 9 km의 넓이의 이 섬은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인데
농사라 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별 것 아닌 건조하고 불모지 같은 땅이다.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으로 이 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밧모에 18개월동안 억류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소로 가게 된다.
이 곳에 있는 동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밧모섬 여행자들 중에서 한국인을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에게해 한가운데 있는 밧모섬을 가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이틀은 잡아야 하니
섬을 둘러보는 시간에 비해 오고 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이유로
인해 
밧모를 방문한다는 것은 상당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밧모섬으로 가는 길은 보통 두가지가 있는데 그리
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밧모까지는 약 10시간 정도 걸리고
터키의 쿠샤다시 항구에서 밧모로 가는 항해는 약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필자는 에베소를 둘러 본 후에 쿠샤다시에서 하룻밤 경유한 후 아침 일찍 소형 선박(거의 유람선?)을 타고 밧모로 가기로 했다.
밧모에서는 사도 요한의 유적지와 섬 전체를 돌아본 후 대형 크루즈선을 타고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리스 고린도의 피레우스항까지 가는 여정이다.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면 터키와 그리스 국경을 넘어가게 되므로 항구 내 출국장에서 여권 검사와 짐 검사를 마친 후 배에 올라야 하는데 터키는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나라여서 밧모로 가는 여행객은 거의 없으므로 소형 선박을 이용해야만 했다. 

 


쿠샤다시항을 출발하니 이내 비둘기섬이 나타난다.
쿠샤다시 여행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이 '비둘기섬'은 긴 방죽으로 본토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귀베르진 아다스'라고 불리우는 이 섬은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 섬을 둘러 싼 14,5세기의 성채가 복구되어서 지금은 터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나이트 크럽으로 변모되었다.
600년이 넘은 오래된 성채를 나이트 클럽으로 변모시키다니....! 
온 나라 안에 이천년 넘는 고대 유적이 차고 넘치는 터키에서는 600년 된 성채 정도는 그저 생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다행히도 날씨가 매우 맑고 파도가 거의 없어서 항해는 순조로왔고 젠틀하게 생긴 선장의 나이 지긋한 모습을 보니 더욱 더 안심이 되었다. 일기가 고르지 못하거나 파도가 높은 날에는 소형 선박은 아예 운행을 안한다고 하니 그리스 여행의 시작은 아주 운이 좋은 출발이다. 

 

 

배는 터키 국적인 유람선인지라 선박 후미에 터키 깃발이 붉게 휘날리고 있다.  

 


쿠샤다시를 떠난지 얼마 안 되어 큰 섬이 나타나길래 벌써 밧모섬? 했더니 사모스섬이다.
터키의 항구를 떠나면 얼마 되지 않아 계속 여기 저기 크고 작은 섬이 나타나는데 터키 바로 옆에 위치한 섬들은 놀랍게도 거의가 그리스의 영토이다.
제법 큰 섬인 사모스(Samos)섬, 또한 터키의 영토였으나 1912년 그리스에 합병된 상당히 큰 섬이다.
터키 사람들은 닭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코 앞의 섬들이 그리스의 영토라는데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

 

 

강렬한 태양빛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맑고도 푸른 에게해를 헤치고 5시간을 가니 드디어 저 멀리 목적지 밧모섬이 나타난다. 
오랜 시간 배에 있어 지루해하던 승객들은 모두 갑판에 나와서 멀리 보이는  밧모섬을 향하여 환호성을 지른다. 

 

 

나무도 거의 없이 바위와 화산석으로 뒤덮인 섬에 가까워지니 별것도 아닌 섬이네.....이런 생각이 일순간 들지만 
섬 주변을 유유자적하는 요트들에서 평화로운 느낌이 피부로 전해져 온다. 

 

 

푸른 나무로 뒤덮인 우리나라의 섬들과 달리 밧모섬은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섬이라 다소 낯설게 느껴지고
섬의 아랫부분에서부터 높지 않은 정상까지 여기저기 집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집들은 대부분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섬에 가까워질수록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솟아 있는 붉은 성 요한 수도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스칼라 항구가 가까워지고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집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방파제도 제대로 없는 그야말로 작은 항구로 배가 들어가는데....

 

 

이런 작은 항구에 대형 크루즈선도 들어온다니 믿겨지지가 않는 부분이다.

 

 

섬은 지극히 조그마한데 여름에는 유럽 각지에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이 곳에서 휴가를 보낸다. 

 

 

호화 요트에서 소형 요트까지 즐비한 이곳은 유럽 사람들의 꿈의 휴양지이다. 
주민이 2500명 밖에 안 되는 이 섬에 유람선과 요트는 물론이고 수만톤 급의 크루즈선도 정박하니 이 섬의 명성은 크기로 짐작할 일이 아닐 듯 하다. 

 

  

항구 옆 메인 스트리트에는 좁은 섬의 지형에 알맞게 오트바이가 많이 주차되어 있고 다운타운을 거니는 여자들의 자유분방한 차림과 핫한 몸매에서 섬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다운 타운 골목의 상가에는 아름다운 보석 및 악세사리 가게가 줄을 지어 있고 기념품 상가도 많이 들어서 눈요기거리를 준다. 

 

 

항구에서는 제일 먼저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의 세례터'를 찾아 보았다.

 

 

AD 96년 이 곳에 도착한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된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장소이다. 

 

 

바로 옆에는 아주 아주 조그만 기념 교회가 있다. 

 

 

사도 요한의 세례터 앞에서 보면 스칼라 항구의 전경이 그대로 보이고 성 요한 수도원도 멀리 다 보일 정도인데
밧모는 면적은 매우
좁지만 섬이나 해안선이 드나듦이 거의 80km나 될 정도로 구불구불한 섬이다.  



해변의 바닷물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해초도 거의 없어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이 곳은 태양 광선이 너무 강렬하여 플랑크톤이 잘 서식치 못하여 해변엔 고기도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하고
염도가 낮아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도 몸이 전혀 끈끈하지 않고
몸을 말린 후 손으로 비비면 피부가 보송보송하니......정말 신비롭고 환상적인 바다이다. 

 

 

항구 바로 옆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바닷물의 오염이 적은데 이 섬의 구불구불한 어느 해안 한 구석에는 '누드 비치'도 있다고 하니  밧모에 가시는 분들은 그곳도 찾아본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휴가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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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유일한 아유모도시 자연 공원의
'아유'는  은어, '모노시'는 되돌아온다, 회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유모도시란  '은어가 회귀하는 곳'이란 뜻이며
실제로 은어가 살고 있으리라 확신이 들 정도로
맑은 청류천(淸流川 )주변 약 26ha의 수려한 대자연 경관을 그대로 살린 공원이다. 

 이 곳은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계곡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공원 입구에서 간단한 음료수등을 팔고 있는 휴게소가 있는데 대마도의 전통 이시야네(돌지붕) 형태로 지은 집이다.

휴게소 앞 테라스 아래에는 일본의 고시가 만엽집에 나오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연어의 회귀에 대한 내용이라고.... 

등나무꽃이 아름답게 드리워진 아래 계곡을 가로질러 드리워진 현수교가 보인다. 아름다운 계곡에 놓인 현수교라니...보기만 해도 낭만적이다.

 다리 아래의 비석에는 천지수라고 쓰여있는 걸 보아 샘물이 나는가 보다.

다리 밧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 보던 여자 한 사람이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가운데는 통나무로 이어 붙여 아래의 계곡이 훤히 다 내려다 보이니 걸을 때마다 오금이 짜릿짜릿한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니 경치 한 번 일품이다. 하얀 화강암 너럭 바위는 물결 무늬의 주름이 잡혀 있고 그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은 맑고도 짙푸르다.

현수교는 그다지 높지도 않는 곳에 달려 있는데 다리 위에 서면 출렁출렁하기 때문에 스릴 만점이다. 약 1.2Km에 달하는 계곡 전체가 화강암 통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곡 아래 연못에는 어른 허벅지보다 큰 잉어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푸르름이 더해가는 계곡 주변의 나무들과 하얀 너럭 바위, 짙푸른 계곡물의 조화가 가히 신선경이다.

물은 깊이에 따라서 짙푸르기도 하고 에메랄드빛이 돌기도 한다.

 그늘도 즐기고 발도 담글 수 있는 명당 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신이 났다.   날개옷만 벗어놓으면 선녀가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질 것 같은 곳.... 

 바위 위에서 편안히 쉬시는 어르신들은 현대판 신선이 되신 듯 하다. 필자가 손짓을 하여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니 너무 좋아라 하면서 애들처럼 V자를 그려 보인다.

요즘 보기 힘든 자동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시면서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도무지 떠나기 싫어서 다음 여행은 접고 오래 머무르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시간이 되어 이제는 이 아름다운 계곡을 떠나야 한다. 잠시 체험한 신선 노름을 접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떠날 채비를 하고 젖은 발을 손수건으로 닦으시는 한 어르신의 모습에서도 아쉬운 기운이 살포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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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만제키바시(만관교,萬關橋)는 1897년에 굴삭을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시킨 일본 군사용 운하에 놓인 다리이다.

 길이 210m의 철교인 만제키바시 아래에는 만제키 운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운하의 개통으로 인해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대마도는 상대마, 하대마로 나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다리는 3차로 건설된 다리인데 1차로 건설된 다리는 1897년에 시작하여 1900년에 완공되었다. 리 길이는 100m. 폭은 5.5m. 높이는 약 36m로 일본 해군에 의해 건설된 철교로이다.  2차로 만든 다리는 1956년에 완성한 다리로 길이는 약 81m. 폭은 5.5m. 높이는 약 30m이다. 아치형 철교로 다리가 완성됨으로 버스가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게 되었다. 

 3차로 건설된 현재의 다리는 1996년에 완성된 것이다. 길이 210m. 폭 10m. 높이 약36m의 이 다리로 인해 섬 전체의 도로망 정비와 함께 남북을 연결하는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는데 두번째 다리는 이후에 철거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러일 전쟁의 와중에서 이 다리 아래 만제키 운하를 일본 해군의 전략적 거점으로 십분 활용하여 당시 해군 전력상 세계 최고로 꼽히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로 유도시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해전이 일어났던 시대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부국 강병 정책으로 해군력 증가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대륙으로 연결되는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와 부산까지에 이르는 항로의 단축이 필수적이었다.  그 일환으로 1900년에 일본 해군의 주도하에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운하를 개통하게 된다. 대마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인공 해협  만제키 운하 건설을 하게 되니 이 운하가 쓰시마 해협과 아소만을 지나 대한 해협에 이르는 직항로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영일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있었는데 1904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에게 10일에 개전하자는 선전포고를 하고 이틀 앞선 8일에 기습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하게 되니 바로 러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지라 일본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는데 1905년 3월 만주의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의 주력군이 패퇴되는 일이 벌어지자 러시아는 이런 전력의 약세를 보충하기 위해 유럽에 있던 발틱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시키게 된다. 

 


이때 일본 해군은 함정을 준비하여 당시 세계 최강으로 꼽히던 발틱 함대가 이 함정에 빠지기를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함대는 북해에서 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인도양을 돌아 대한 해협으로 이동하고자 했는데 일본이 이것을 알고 영국의 협조를 얻어 러시아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게 하자 러시아 함대는 하는 수 없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야 했다. 러시아 함대가 도중 기착지로 예상되었던 상해에 들르지 않고 항진을 계속하자 연료와 시간의 절약을 위한 항로의 최단 거리를 예상한 일본 함대는 대마도에서 대기하게 되는데 발틱 함대는 일본의 예상대로 쓰시마 해협으로 항진해 왔다.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 제독은 "황국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렸다!" 고 외치면서 일본 함대에게 정신무장을 시켰고 결국 발틱 함대는 쓰시마 해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함대의 정면과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협공에 의해 괴멸되고 만다.


이 해전은 발틱 함대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또는 파괴, 3척 나포. 4,800여명 사망과 일본 해군 3척 침몰, 전사 117명이 말해주듯 거의 일방적인 전투였던것이다. 

이 쓰시마 해전의 결과로 일본은 동북아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러시아는 짜르 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볼세비키 공산혁명의 시발점이 된다.  그 이후 일본의 야욕은 더욱 더 팽창 일로의 길을 걷게 되어 그 해(1905년) 가쓰라-테프트협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 제국 지배의 승인을 받아낸후 한국의 주권을 박탈당하는 음모가 무르익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후 5년 뒤 1910년 대한 제국은 강제 합병(한일합병)을 당하게 되니 우리나라는 일본에 35년간을 지배당하게 되는 치욕적인 병합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니 이 다리는 일본에서는 <전승의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는 <통한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하의 물은 오늘도 여전히 푸르기만 하고....  

이곳을 찾는 여러 여행객들은 다리 위에서 운하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감탄을 그치지 않는다. 

 

발틱 함대와 일본의 함대가 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웠던 만제키 운하의 오늘은
요트와 함께 여유로운 휴가를 누리는 평화의 운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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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요트와 에게해 크루즈선들이 늘어서 있는 해안을 통해 그리스 및 에게해의 다른 섬들로 연결이 되는 도시인 터키 쿠샤다시(Kusadasi).

 

 

반짝이는 아름다운 바다와 드넓은 백사장,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크루즈선들의 정박으로 인해 유럽인들이 즐겨찾는 이곳은 터키의 에게해 연안의 휴양 도시 중에서도 규모와 시설이 손꼽히는 리조트 도시이다. 
 

 

예전에는 거대 유적 도시 에베소(에페스)로 가는 경유지에 불과했던 이곳은 지금 수십개의 관광 호텔과 휴양촌이 해안선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레스토랑과 나이트 크럽은 나날이 증가하는 많은 관광객들로 그득하여 유럽의 여느 도시보다 더 북적거리는 곳이다.  

 

 

쿠샤다시 입구에 위치한 '비둘기섬'은 긴 방죽으로 본토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귀베르진 아다스'라고 불리우는 이 작은 섬은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 섬을 둘러 싼 14,5세기의 성채가 복구되어서 지금은 터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나이트 크럽으로 변모되었다. 600년이 넘은 오래된 성채를 나이트 클럽으로 변모시키다니....! 우리 같으면 보존한다고 일반인의 통제를 막았을 텐데....  온 나라 안에 이천년 넘는 고대 유적이 차고 넘치는 터키에서는 600년 된 성채 정도는 그저 생활의 일부분일 따름이다.


쿠샤다시의 호텔에 짐을 풀고 배터리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으니 빨간 불이 점멸하며 이상 증상을 보인다. 아무래도 고장인 것 같이 생각이 되어 하나 새로 살 겸 쿠샤다시 다운타운 구경을 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SUV차량 처럼 생긴 택시를 불러서 타고 바자르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바자르 입구에 도착하니 이즈닉 타일로 장식된 공동 수도가 먼저 반겨준다. 이슬람 교도들은 정결 의식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은 물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꼭 공동 수도가 있다.
 

 

터키도 여느 유럽과 같이 서머 타임을 실시하므로 여름엔 9시나 되어야 해가 지는데  리조트 도시인 관계로 바자르에는 낮보다는 밤에 손님이 많아 낮시간에는 비교적 한산하다.

 

 

휴양 도시인만큼 유럽이나 터키 전역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아 길에 앉아 노닥거리는 사람이 많다.  

 

미용실 앞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남자들은 머리 하러온 여자 친구나 아내를 기다리는 듯..... 

 

 

이곳에서도 역시나 패스트 푸드점이 대세인 듯 거리에는 버거 킹, 프라이드 치킨집....등이 보이는데

 

 

터키의 청소년들은 주로 패스트푸드점 2층에서 밀회를 가지곤 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각처에서 오는 여행객들이 들끓는 곳이라 옷차림이나 애정 표현이 비교적 자유롭다.

 

커피나 아이스크림, 쥬스 등을 파는 카페도 성업 중인데 아이스크림은 1유로 정도이다.

 

 

바자르의 좁은 골목에 밀집한 상가들은 우리네 재래 시장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데 물건의 진열 상태도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으며 기념품가게들에는 마치 우리나라 관광지에서처럼 조잡한 물건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해적판 게임 CD와 유희왕 카드 같은 것을 파는 좌판을 지키는 꼬마는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주목받는 도시인 쿠샤다시의 부동산 가게에는 매물의 사진과 가격들이 유리에 빼곡이 붙어있다.  

 

 

환상적인 맛의 터키 케밥집의 다양한 메뉴가 눈에 확 들어온다. 

 

 

관광 안내용 모니터인 것 같은데 역시 우리네와 같이 무용지물인 듯.... 아무도 안 쓰는지 앞에 자전거와 모터 사이클이 주차되어있고 낙서만이 노란 페인트 위에 선명하다.

 

터키 사람들은 춤추고 노는 것을 무지무지 좋아하기 때문에 어딜 가든지 디스코텍이나 가라오케가 빠지지 않는다. 이 곳에는 우리나라 처럼 관광 버스 춤도 성행하고 유럽에서 가장 큰 디스코텍도 터키에 있다고 한다. 

 

 

여러가지 색으로 무질서하게 간판이 난립한 것도 우리 나라와 비슷한데 네거리에 위치한 귀금속 가게 근처에서 카메라 전문점을 찾아냈다. 
 

 

카메라 용품점 안에는 디카가 많이 진열되어 있고 관광지라 일회용 카메라도 많이 볼 수 있다.

 

먼저 온 손님이 마시고 간 차이 잔이 얌전히 놓여 있는데 터키에서는 손님에게 차이 한잔 대접은 기본이다.

 

다운타운 한가운데 있는 복합 상가로 추정되는 건물은 터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풍경. 

 

각양각색 간판들이 조그만 점포나 사무실마다 들어서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다. 
  

 

호텔 셔틀 버스로 추정되는 차에 손님이 오르고 있는 모습은 쿠샤다시에서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지중해에 가까운 쪽이라 야자수가 가로수로 자라고 있고 소득 수준이 높은 도시라 고급차가 많고 사람들의 행색이나 집들도 모두 깔끔하다.  

 

 

횡단 보도도 중앙선도 없는 길에는 차는 차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갈길을 간다. 

 

 

거리 뒷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보니 주차 수준은 우리 나라와 비슷해 보인다.  

 

 

세 시간 정도 다운타운을 돌아보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식사를 한 후 쿠사다시의 야경을 보기 위해 다시 나왔다.
낮에는 길도 잘 모르고 열기가 장난이 아니라서 택시를 타고 왕복했는데 9시쯤 되니 한낮의 더운 기온도 식어 한결 시원해진지라 해변 구경도 하면서 걸어서 바자르까지 갔다. 

 

 

다운 타운의 상점은 크루즈선을 타고 부두에 도착한 수많은 승객을 상대로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길거리에는 터키인과 유럽인들이 한데 섞여  마치 인종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쿠샤다시는 남녀의 차림새가 이스탄불 다음으로 세련되었던 곳이었는데 가는 곳 마다 훈남, 훈녀가 득시글거린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넘쳐나고 모두 밖에 나와서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음식을 즐기고 있다.  

 

 

길거리에 앉아 전통차 '차이'를 마시는 모습은 터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람 다니는 길에 아무 생각없이 놓여있는데도 테이블과 의자들을 다들 잘 피해다닌다.
 

 

음식점의 입간판들이 길에 버젓이 나와 있는 걸로 보아 간판에 대한 규제는 별로  없는 듯 하다. 

 

 

레스토랑에 앉은 사람들은 남녀 모두 축구를 보며 괴성을 질러대고 있는데 축구는 터키에서는 공통 언어여서 남녀 노소 다 축구를 모르고는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이라고. 

터키 전역에는 약 200 여개의 프로 축구팀이 있는데 축구 리그는 3 부로 되어 있어 거의 매일 축구 경기가 있기 때문에 터키 전국민이 축구와 함께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집마다 다 TV가 있지만 모두 카페에 모여 축구를 보는데 이는 우리처럼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질러가며 축구를 보는게 더 신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여행객이 주고객인 쿠샤다시의 바자르에는 갖가지 상품이 넘쳐나는데 우리 나라로 치면 "골라 골라 만원 샵" 정도인 "Everything is  10 Euro"라는 카피도 눈에 뜨인다.

 

유럽 관광객들은 여자나 남자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데 이렇게 동네 장에 나온듯한 편안한 옷차림의 유럽 아줌마들도 눈에 많이 뜨인다. 

 

 

이슬람이 대부분인 터키이지만 검은 머리에 스모키 메이크업을 진하게 한 터키 여자들도 이곳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거나 어깨를 노출한 정도의 옷차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터키 여자들이 미니 스커트나 핫 팬츠로 다리를 노출한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유럽이나 터키에서는 상체 노출보다 하체 노출이 더 심한 노출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 여성 여행객들이 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미니 스커트 등을 입으면 좋지않은 추파와 야유의 대상이 되든지 위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대형 크루즈선들이 매일 정박하는 자유로운 도시 쿠샤다시에서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되니 안심해도 된다.  

 

 

선물 가게에 들어가 보니 특히 터키 도자기의 화려함과 퀄리티는 상상 이상이다.

 

 

길 양쪽에 빽빽하게 들어찬 관광상품점들은 가게의 규모도 대단하고  상품도 질도 상당히 높다.  가게마다 화려하고도 특이한 장식품들이 즐비하여 사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면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터키의 대표적 기념품은  파란 눈알이 그려진 장식품  '나자르 본주(Nazar Boncugu)'이다.

 

이것은 파란색 바탕으로 된 유리에 까만 눈이 그려진 일종의 부적인데
열쇠 고리, 키 홀더, 목걸이, 팔찌....각가지 형태로 다 있다.

 

 이블 아이(악마의 눈)라고도 하는 나자르 본주는 가장 강력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주위의 악마들을 도망가게 하며 타인의 질투나 질시를 빨아들여 주위의 재난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녀서 터키의 대부분 집의 들어가는 입구나 상점의 문 옆에는 어김없이 이것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념품 중에는 <의외로> 인물의 초상도 보인다. 이슬람 국가에선 예로부터 인물의 초상이 절대 금지되어 있어서 왕들 조차도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림이란 것은 오직 책의 삽화일 때만 존재할 수 있는데 이는 신성화, 우상 숭배의 염려 때문인 듯 하다. 그래서 왕들이 자신의 권세와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책 삽화의 주인공을 자신의 얼굴로 넣는 것이었는데
그런 책을 몇 권을 제작했느냐가 왕의 권세를 증명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후대 왕들이 취임하면 전의 왕들의 책들에서 얼굴만 자신의 얼굴로 갈아치우기도 했다고 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얘기임)  

 

 

이렇게 다양한 냉장고 자석이 많은데 왜 안 사왔지....여행지의 냉장고 자석 콜렉션이 취미인데 고르다가 못 사온 것이 내내 아깝기만 하다.    

 

 

 식료품 가게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터키 젤리가 눈에 뜨인다. 터키 젤리는 달콤하고 완전 죽이는 맛이다.  

 

 

 피파 스폰지밥 스파이더맨 등....익숙한 게임들이 눈에 띈다. 4개에 30유로.....20파운드....50 예니터키리라이고 테스트 해보고 사 가란다. 음반가게에서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의 음반을 달라고 하니 'Tarkan' 베스트 앨범을 추천해 주어서 처음으로 Tarkan을 처음 알게 되고 팬이 되었는데 CD의 값이 유달리 싼 것이 이상하다고 했더니 나중에 들어보니 불법 다운로드 복제 CD였다...ㅎ

 

 

터키의 대부분의 아파트는 주상복합이 많았다. 이슬람사원마저도 1층에는 바자르로 세를 주는 경우가 허다한데 바자르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사원을 운영한다는데 심지어 가장 큰 사원인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에도 수백년 전부터 모스크 아래에 '아라스타 바자르'라는 바자르가 있어서 사원의 수입을 충당하기도 했다고. 

 

 

 

 늦은 시간이지만 가게는 낮보다 오히려 손님이 많다.
 

 

 터키는 가는 곳마다 보석 가게가 널려 있는데 특히 금은 세공품이 주를 이룬다. 터키에서 남편들은 늘 아내에게 보석을 선물하는데 아내가 걸친 고가의 보석은 남자의 부를 상징한다고.....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에 갔을 때에 보석 가게 앞에서 거울을 보며 뺐던 귀걸이를 다시 끼우고 있었는데 보석 가게 남자가 필자가 하고 있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무슨 보석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이건 이미테이션"이라고 말했더니 그 남자는 "왜 당신의 남자는 당신에게 이미테이션을 사주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도 보석 가게 남자는 앞에 선 여자가 돈이 너무나 없는 불쌍한 여행객으로 보였으리라.... 

 

우리 나라 사람이 유럽이나 다른 곳에 가면 일본에서 왔냐고 먼저 물어보지만 터키에서는 보면 한국인이냐고 먼저 묻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카펫가게 아저씨는  필자가 코레에서 왔다고 하니 어느 도시에서 왔냐? 서울? 대구? 부산? 하며 말을 걸었다. 20년 전에 부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던 이 아저씨는 한국말도 '쬐끔' 한다.   

 

 

바자르 뒷골목으로 가면 유난히 타투나 피어싱을 하는 가게가 많다.

 

 

이슬람과 타투라...영 줄이 안 그어지는 조합이지만 이곳은 여행객들이 주를 이루는 도시라 그런지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나는 곳이다.  

 

 

뒷골목에서는 조명이 밝지도 않은 곳에서 길거리 문신질을 하고 있는 광경도 볼 수 있다. 

 

 

헉....도인을 방불케하는 옷차림과 등과 팔에 문신을 새긴 사람 발견. 터키 전역에서 이런 사람 처음 보았는데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가보다. 

 

유럽 관광지는 밤이 되면 길에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이 무지 썰렁하던데 여긴 12시가 넘어도 사람이 줄어들지 않고 점점 흥청거리고 청소년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닌다.

 

이슬람 신자가 대부분인 터키지만 이곳 쿠샤다시에서는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밤이 너무나 아름다운 젊음과 정열의 도시, 이곳은 터키의 '쿠샤다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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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건강식으로 일본 사람들의 밥상에 매일 오른다는 낫토(納豆).
우리나라의 청국장과 비슷한 낫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발효 음식이다.

 끓여서 섭취하는 우리의 청국장은 끓일 때 영양소의 파괴가 다소 있을 수 있지만
낫토는 발효된 상태로 그대로 먹기 때문에 영양소의 손실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낫토의 끈적끈적한 물질 속에 들어있는 ‘낫토키나제’라는 효소가 혈전 용해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서
일본에서의 요즘 와서 낫토의 소비가 급증했다고 한다.  

비위가 약한 다른 분들은 끈적거리는 낫토의 실을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 먹기를 포기하겠지만

여행지의 새로운 음식은 그 무엇이든 꼭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필자로서는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왼 쪽 제일 위의 플라스틱 용기에 담딘 낫토를 빈 그릇에 붓고

곁들여진  간장 소스를 첨가해 열심히 비벼대니 발효된 콩들 사이에서 끈적끈적한 실과 거품이 많이 생긴다.  

 

 열심히 비벼 놓고 사진을 찍고 보니.......헉....--;;
꼭 토해놓은 음식같아서 식욕이 일순간 감퇴된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먹어보니.... 흐음....
그다지 땡기는 맛이 아니긴 하나 새로운 음식 체험이고 건강에도 좋다니....
한 그릇을 다 비워버렸다.

하지만 속이 약간 느끼...하긴 했다.....사실....^^ 

매일 먹어 낫토에 적응된다면 이런 희한한 맛도 즐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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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서쪽에 위치한 바얀골 지역(Bayangol District) 적십자 지부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말박물관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차를 돌려 말 박물관으로 향한다.


차에서 내려 앞을 보니 엄청나게 큰 말동상이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건물 바로 아래 선 사람과 비교해보면 말 동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실 것이다.


어마어마한 말 동상이 방문자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이 말 박물관은 2009년 5월에 개관했는데
50명의 독일, 중국의 기술자들이 힘을 합친 이 공사에는 무려 250톤의 철이 소요되었다고...


세계 제일의 크기를 자랑하는 말 동상의 높이는 무려 40m 인데 말의 높이만 해도 30m에 달한다고 한다.


동상이 서 있는 건물은 완공되었으나 아직 기반 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주변은 황량하기 그지없고.....


거대한 정문과 진입로도 아직 공사중이라 주변 경관은 다소 어수선하기까지 하다.


으리으리한 로비로 들어서니 엄청난 크기의 봉 위에 채찍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칭기즈칸이 15세 때에 황금 채찍을 찾은 장소에 칭기즈칸과 그의 말 동상을 세웠다고 하는데 봉 위에 놓인 채찍은 아마 재현품인 듯.....


말에 대한 다른 전시관이 있나 싶어 물어보니 어이없게도 1층에 있는 전시품은 이게 전부라고 한다.
말 박물관이라서 여러 종류의 말이나 말 관련 유적 및 전시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엄청난 크기의 말 동상이 전부라고 하니 약간은 실망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 말 박물관의 관람 포인트는 바로 '말 속으로 들어가 본다'는 것이다.
아랫층 로비에서  말 꼬리를 통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말의 뱃속으로 들어간 후 
말 뱃속에 있는 영상실에서 3분 정도의 말 박물관 건립 과정에 대한 영상물을 감상하고 다시 계단을 통해 
말머리로 올라가게 되면 말머리 끝 부분에 아주 협소하긴 하지만 전망대가 위치해 있어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사진에서 말 갈기 부분에 사람 세명이 서 있는 것을 점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말 동상과 그 크기가 비교된다.


말 뱃속에 있는 영상실은 한 십여평 규모로 47인치 정도의 TV가 낮은 위치에 앉아 있어서
의자에 앉으면 뒤의 사람은 화면이 보이지도 않는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스하고 바로 전망대로 올라간다.
 


영상실을 나와 계단을 통해 전망대로 올라가 뒤로 돌아보니 헉....위엄에 가득 찬 칭기즈칸의 얼굴이 노려보고 있다.


얼마나 크기가 큰지 아무리 뒤로 물러서도 카메라에 반도 채 잡히지 않는다.
이런 엄청난 크기의 동상을 바로 앞에서 찍는건 광각 렌즈로도 안 되고 어안 렌즈라야 제대로 될까....?


할수 없이 부분 부분 닥치는 대로 카메라에 남아 보았으니 보시는 분들이 머리 속에서 이미지를 조합하시기 부탁드린다.


칭기즈칸의 왼쪽 팔뚝 아래에 늘어선 게르들이 이채롭다.


앞으로 게르 200여채를 주위에 더 세워 이곳을 관광의 기지로 삼을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주변이 많이 어설픈지라 잘 정비된 관광지로 자리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 하다.


칭기즈칸 말 박물관.....전시품은 없고 겉모습만 웅장한 박물관이긴 하지만
세계 최고의 말 동상이 있는 박물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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